네 아이의 엄마인 나는 아이들이 열중해서 놀 때면 최대한 방해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 관찰한다. 한 배에서 나왔는데 어쩌면 저렇게 4인 4색인지 놀랍다. 아이들은 타고난 천성대로 각자가 좋아하는 것을 따라 탐색하고 몰두한다. 이 집중의 시간이야말로 바로 배움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심심할 때 만들어내는 놀이는 가장 좋아하는 내 놀이이다.
나는 동네 아이들이 알아주는 말괄량이로, 뒷산으로 개천가로 사내아이들과 돌아다니면서 놀았다. 혼자서 놀 때는 낯선 동네 길 탐험하기를 좋아했고, 종종 길을 잃어버리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해 질 녘에 이르러 집으로 돌아가서는 지칠 만도 하건만 TV를 보며 세상 물정을 마저 배웠다. 좋아하는 놀이를 하면서 배우는 지식은 산지식이 되어 몸에 체득된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자전거를 타는 법이나 수영을 습득하면 오랜 시간이 지나 해보아도 몸이 기억하는 것인가 보다. 배우기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나는 공자님 말씀 중에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그 가운데 내 스승이 있다”라는 가르침을 늘 가슴에 두고 산다. 배울 자세만 있다면 세 살짜리 아기에게서도 배울 점이 보인다.
내가 스승님으로 만난 인물 중에서 남다른 선생님이 한 분 계신다. 그분은 학교 선생님이 아닌, TV 속에서 만난 '맥가이버' 선생님이시다. 맥가이버는 인생 헤쳐가는 법을 알려준 선생님이었고, 내가 되고 싶은 롤모델이었다. ‘맥가이버(MacGyver)’는 1985년에서 1992년 사이에 방영된 외화 시리즈였다. 내 나이 열한 살 즈음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맥가이버가 방영되는 날이면 이 수업 시간을 놓치지 않았다. “빠바밤 바밤밤 빰빠바바바바밤빰…” 그 음악은 이 세상에 모든 지친 사람들을 응원하는 시그널이었다. 존경해 마지않는 가이버 선생님을 바라보는 나에게 엄마는 "텔레비전 안으로 들어가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왜 그렇게 두 눈에 불을 켜고 봤을까? 그는 주머니 속에 든, 이른바 '맥가이버 칼(Swiss Army Knife)' 하나로 주변에 있는 어떠한 물건이든지 이용하여 스스로 궁지에서 탈출하거나, 누군가를 구출해 냈다. 맥가이버가 어려움을 대처하는 방법은 하나하나가 버릴 것 없는 레슨이었다. 각종 레슨을 몸에 익힌 후 어떠한 문제에 봉착할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수수께끼 대하듯 접근했다. 누군가 시도해서 성과를 못 이룬 프로젝트를 만날 때마다 내 차례가 왔다고 여겼다. 남들이 포기한 걸 주워서 쓸모 있게 바꿔놓으면 그게 내 존재 이유가 돼주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조교 생활 8년 동안, 나는 '해결사 김 조교'로 통했다. "조교님, TV가 안 켜져요", "김 조교! VCR이 작동이 안 되네요", "김선생님, 스크린이 안 내려와요" 등등... 문제가 있는 그곳에 내가 가면 뺀질거리던 기기들이 정신을 차리고 작동을 시작하였다. 입시와 콩쿠르 일정표를 만드는 업무에서 수십 명 교강사들의 개인별 일정을 겹치지 않게 시간과 동선을 감안하여 효율성을 극대화할 때 희열을 느꼈다. 맥가이버의 수제자답게 문제 해결 능력과 민첩함은 일상생활에서 수시로 튀어나왔다.
어느 날, 둘째 아이가 불편한 얼굴로 다가왔다. 아이는 턱에서 ‘딱딱’ 소리가 난다고 호소하였다. 나는 마치 전문의가 문진하듯이 물었다. "어느 쪽이죠?" 아이는 "왼쪽입니다" 하였다. 나는 아이 뒤로 가서 섰다. 그리고 내 오른손으로 아이 오른쪽 귀를 살짝 누르면서 왼손으로는 신속하게 아이 왼쪽 뺨을 지그시 눌렀다. "우두득!" 단 한 번의 손동작으로 뼈 맞춰지는 소리가 났고, 이윽고 환자의 환한 미소를 통해 턱이 교정됐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다. "당분간 입을 크게 벌리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괜찮은지 확인하는 것도 삼가세요" 평화의 순간보다는 위기의 순간이 왔을 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모면하기를 실로 즐긴다.
심심치 않았던 어린 시절 중 가장 강렬한 한 장면을 이쯤에서 공개하면 좋을 것이다. 제목하여 ‘지붕 뚫고 하이킥!’ 이 장면은 내가 평생 도전했던 각종 도전기에 첫 페이지에 해당한다. 각종 도전들은 모험이고, 비상구이며, 놀이터였다. 우리 집은 홍은동 산동네에 있었다. 마당 아래로 다른 집 지붕이 이어지는 산동네 풍경을 상상해 보시라. 마당을 경계로 난간이 둘러쳐져 있었다. 아무도 없을 때 난간 타는 것을 좋아했는데, 바깥쪽으로 타야 제대로 스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스릴을 만끽한 대가를 혹독히 치러야 했다. 나는 추락했다. 난간을 잡을 오른손 왼손 교차 타이밍을 절묘하게 놓치면서 날개없이 추락했다. 여자아이의 마른 몸뚱아리는 지구의 맨틀을 지나 외핵과 내핵까지 들어가는 듯했다. 온갖 걱정들이 스쳐갔다. 외할머니 불호령이 들렸다. 아니다, 분명 꾸지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의 가련한 등짝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지붕을 깨기 직전이었지만 이미 나는 깨진 지붕 비용을 걱정하고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긴 추락의 시간은 아랫집 슬레이트 지붕을 가볍게 뚫어 부수고, 그 집의 빈 장독 두 대를 와장창 깨고 난 후에 끝났다. 착지와 동시에 기절하였다. 몇 분이 지났는지, 몇십 분이 지났는지, 이윽고 정신을 차렸을 때 천만다행인지 그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신기하게도 나의 부상 정도는 팔꿈치를 조금 긁히고 꼬리뼈는 얼얼한 것에 불과했다. 띵한 정신을 가다듬고 엉거주춤 일어나서 깨진 지붕과 장독을 대충 한쪽에 모았다. 그리고 역시 인적이 없는 골목 계단을 통해 우리 집으로 어기적어기적 기어 올라갔다.
추락사고 이후, 종종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를 일상의 단조로움을 달아나는 비상구처럼 활용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내가 시도한 가장 재미난 일은 길거리에서 액세서리를 팔았던 기억이다. 장사를 나서는 매일이 마치 무전여행 같았다. 낯선 곳을 헤매던 것을 재밌어 하던 어린 시절의 나는 변하지 않았다. 각종 백일장, 공모전, 사진대회 등등… 벗어날 수 없는 일상생활의 경계선을 허무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떨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준비하는 과정에서 몰입하면 할수록 시간의 축을 오가는 인터스텔라를 맛볼 수 있었다. 한글학교 교사가 된 후에는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몇 가지 일회용품만으로도 그럴듯한 학습 교구를 만들었고, 놀면서 한글을 배우는 수업을 고안해 내었다. 팬데믹 기간을 오히려 기회로 삼아 호주와 미국, 한국, 캐나다를 연결하여 친구들과 온라인 수다방을 열었다. 매주 한 편의 수필 쓰기도 제안하였다. 그때 시작했던 첫 번째 글을 탈고하여 신춘 문예에 당선했다. 막다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놀이였기 때문에 어쩌면 코로나바이러스가 친 바리케이드도 뚫고 더 멀리 있는 친구들에게 가 닿은 것이다. 놀면서 배우는 나에게 지금 이렇게 신문 지면이 허락된 것을 보면 즐기는사람은 이기기 힘들다는 말은 맞다.
이제 새 직장에 도전한 지 딱 한달이 지나가고 있다. 모든 일을 하나씩 배워나간다. 하루도 빠짐없이 실수한다. 나이가 들어 예전만큼 민첩하지는 못하지만 실수를 줄이려고 노력하고 잘못을 고치면서 배워 나가고 있다. 나와 같은 과정을 겪은 선배들이 “실수하면서 배우는거다”라면서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인생에서 맥가이버와 같은 멘토를 한 명 가슴에 지니는 것은 축복이다. 살면서 지붕 뚫고 하이킥 하는 잊지 못할 장면을 하나쯤, 아니 몇 번이고 찍어둘 수 있다면 행복하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요즘 지붕을 뚫고 추락하는 시간이라고 해도 낙심하지 않았으면 한다. 배움이 일어나고 있다면 낙하산을 편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삶의 다양한 시험과
경험
어느 땐 객기로 느껴지는 그런 시간들이 다 내공으로 쌓여 있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TV를 볼 수 없었기에 멕가이버를 어렴풋이 알았는데
실제 방송이 있었네요.
다양한 시도의 경험들은 아주 좋은 작문의 소재가 되리라 싶네요.
와 닿는 글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