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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일 주교와 함께 걷는 세상
강우일 지음 / 바오로 딸
1. 작가소개
강우일 주교
일본 동경 상지대학교와 대학원, 교황청 우르바노 대학원을 수학하고 1974년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품을 받았고 1986년 주교로 서품되었으며 2002년 10월 8일 제주교구장에 착좌했다. 2012년 현재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으로 있다.
2. 내 마음에 다가온 글귀
오늘 예수님이 오신다면 먼저 누구를 찾아가실까?
“믿습니다!”하고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은 옛날 2천년 전에 이스라엘에 이러한 훌륭한 삶을 사신 예수님이 실제로 존재하셨다는 것을 머릿속으로 동의하고 인정하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믿습니다!”하고 고백할 때는 예수님의 선택, 딱 한 번 짧은 인생에 온몸을 내던지면서 하신 그 선택, 하느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서 완성하기 위해 가난한 이들과 불의에 억눌려 고통 받는 이들을 선택하신 예수님의 선택을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어가고 그분 삶의 발자취, 궤적을 계승하고 확신하는데까지 가야만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믿습니다.”하고 고백하는 것이 진실성이 있는 것입니다.(p8)
☞ 믿음은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여 완성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정치,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그리스도교적 가치관이 원천적으로 배제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속화된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p11)
☞ 오늘날 믿음은 자칭 안다는 사람들에 의하여 무지와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세상은 돈을 향해 미쳐 돌진하고 있다. 믿는 사람마저도……
예수님 시대에도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계속적인 수탈과 억압 속에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유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아래 백성들의 아픔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외면하여, 자기들의 자리 지키기에만 급급했고 끊임없이 로마 사람들의 눈치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p14)
☞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지도자들. 과연 그들에게 백성과 하느님이 있을까?
예수님의 첫 번째 복음 선포의 외침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 바로 문 앞에 하느님 나라가 왔다. 하느님의 왕국, 하느님의 다스림이 바로 코앞에 다가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우리 한심한 세상에 들어오셔서 바로 우리 곁에 계신다. 우리의 고통스런 처지를 알고 계신다. 하느님은 우리 눈높이에 계시면서 우리의 아픔을 함께 짊어지고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 이것이 예수님이 전하신 기쁜 소식의 알맹이였습니다.(p15)
☞ 세상 끝날 때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느님, 이 얼마나 위안인가!
예수님은 이 기쁜 소식을 말씀으로만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존재 자체가, 당신의 삶 전체가 바로 이 기쁜 소식의 구현임을 현실적으로 증명하셨습니다.(p15)
당신 자신이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 이 세상에서 절망과 슬픔에 젖어 자포자기하며 사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먹고 마시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랑하셨습니다.(p16)
우리는 그저 막연하게, 초월자이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사람이 되어 우리 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알리기 위해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셔서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 아파하고 어루만지고 위로하시며, 거기서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일을 하셨습니다. 또 그 일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증명하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의 큰 뼈대입니다.(p16-17)
☞ 가난한 이들의 하느님이시기에, 교회는 무엇보다도 먼저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믿습니다!”하고 고백할 때는 예수님의 선택, 딱 한 번 짧은 인생에 온 몸을 내던지면서 하신 그 선택, 하느님의 사랑을 이 세상에서 완성하기 위해 가난한 이들과 불의에 억눌려 고통받는 이들을 선택하신 예수님의 선택을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어가고 그분 삶의 발자취, 궤적을 계승하고 확산하는 데까지 가야만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믿습니다.”하고 고백하는 것이 진실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선포하는 기쁜 소식이 글자 그대로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p17)
☞ 가난한 이, 약자를 선택하신 예수님의 길을 우리가 따라갈 때, 우리는 “믿는 사람”이 된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받은 우리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그저 단순히 개인적 차원에서 내 주위의 사람들, 가족, 친지들만을 사랑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이어받아 살려면, 개인적 차원의 사랑만이 아니라 집단의 사랑, 공동체의 사랑, 세상을 향한 사랑의 차원으로 나가야 합니다.(p18)
☞ 우리의 신앙이 자신만의 기복신앙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한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 세상의 아픔에 함께 해야 한다.
예수님의 사랑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오늘 예수님이 오신다면 누구에게 먼저 다가갈 것인지를 예리한 감성으로 알아차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 현실을 꿰뚫어 보며 귀를 기울이고, 아픈 이들의 아픔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누가 가난한 사람들이고, 누가 잡혀간 사람들이며, 누가 억압받고 있고, 누가 앞을 못 보고 암흑 속에 갇혀 있는 지에 관심이 없다면, 작은 공동체 안에서 우리끼리 사랑한다고 외쳐봐야 예수님의 진실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합니다.(p19)
우리도 나름대로 예수님이 선택하신 복음화의 길을 어떻게 이어받을 수 있는지 고민해 봐야겠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오신다면 가장 먼저 누구를 찾아가실 것인지, 누구와 함께 어울리고, 누구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누구와 식사를 하실 것인지 끊임없이 성찰하고 우리 삶의 표지판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p20)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한국교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출범한 지 50주년이 되었고 끝난 지도 47년이 되었으나 현대 교회는, 특히 한국교회는 아직도 공의회가 목표하고 시도한 세상과의 새로운 대화와 친교를 제대로 펼쳐 나가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공의회 이전의 사고와 교회관, 세계관에 머물며, 아직도 세상을 향한 울타리를 허물지 못하고 울타리 안에서의 친교, 울타리 안에서의 동네잔치에 자족하고 있다.(p22)
☞ 50년이나 지난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내용을 본당에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듣지 못했다. 교리신학원에서, 그리고 영성강좌를 들으면서 접하며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벌써 5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신자들이 알기에는 ‘불편한 진실’일까?
1564년부터 1897년까지 가톨릭 교회에서 신자들은 모국어 성경을 읽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것은 16세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프로테스탄트 성경 번역본의 전파를 막기 위해서였다. 가톨릭 신자는 성경을 개인이 마음대로 해석할 수 없으며, 반드시 교회의 공식적이고 전통을 따르는 해석만이 가능하다고 가르쳤다.(p38)
하느님은 넘치는 사랑으로 마치 친구를 대하듯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과 사귀시며, 당신과 공동체를 이루도록 인간을 부르시고 받아들이신다(계시 2항). 하느님 말씀에 관한 유권적 해석의 임무는 교도권에 맡겨져 있으나 교도권은 하느님 말씀보다 더 높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에 봉사할 따름이다.(계시 10항)
☞ 교도권은 군림하기 위하여가 아니라 하느님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있다.
성경에 문자로 쓰인 내용은 똑 같지만, 하느님은 같은 성경 구절로도 역사의 여정에서 인간들의 체험과 삶과 기도를 통해 끊임없이 새롭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교회 교도권이 가르쳐 온 교리만 받아들이고 만족할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느님 말씀을 직접 읽고 말씀을 통해 하느님과 인격적인 교감을 갖도록 해야 한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이 모든 교회활동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p39)
☞ 렉시오 디비나를 해야겠다
교회는 교회헌장을 통해 오랫동안 교회를 지배해 온 조직체로서의 자기 이해를 벗어났다. 교회가 성직자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교계제도로서의 자기 인식에서 탈피하고 성직자·수도자·평신도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교회는 이 세상의 제도와 조직의 개념을 뛰어넘어 하느님과 일치하고 온 인류와 일치하는 성사적인 존재이며, 하느님의 구원을 향해 함께 걷는 순례자의 신분임을 천명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가 그리스도의 사제직·예언직·왕직에 참여하여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 헌신하도록 초대받고 있는 사람들임을 밝혔다.(p41)
☞ 사제‧수도자‧평신도가 함께 하느님께 나아가는 순례의 여정
사목헌장이 현대 세계와의 대화를 심화하고 넓히도록 초대했으나, 한국교회는 현대인이 당면하여 고뇌하는 문제들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방향과 지침을 제시하는 일에 매우 게을렀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p46)
사목헌장이 다양한 현대 세계의 분야와 영역에 대해 관심을 갖고 교회가 복음적인 시각으로 대응할 것을 권고했으나, 한국교회는 세상일은 평신도들이 교회 밖에서 알아서 대처해야할 문제로 보고, 이런 문제를 교회 안에 끌어들이는 것을 너무 조심스러워하거나 두려워하고, 방관적이거나 책임 회피적인 태도를 이어왔다. 그것은 시대의 징표를 읽으려고 하지 않은 우리의 나태함과 무관심에서 비롯되었다.
☞ 세상과 교회를 여전히 구분했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세상이 포함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 공의회 이전의 사고와 교회관, 세계관에 머물며, 아직도 세상을 향한 울타리를 허물지 못하고, 울타리 안에서의 친교, 울타리 안에서의 동네잔치에 자족하고 있다.(p48-49)
☞ 신자만의 교회. 우리는 딱 그 정도에 만족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일까?
가톨리 교회는 왜 사회문제에 대해 관여하는가?
어떤 이들은 교회가 왜 정치적인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느냐고 한다. 성직자는 종교적인 일만 하면 되지 왜 전문가도 아니면서 나서느냐고 한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인간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 인간의 품위와 존엄이 잘 지켜지도록 하는 모든 일에 교회는 무관심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있어 인간과 무관한 일이 어디 있는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같은 모든 영역이 다 인간과 직결되는 일이다. 정치든 경제든 과학이든 기술이든 하느님을 닮은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해를 끼치거나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훼손하는 데 대해 교회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p52)
☞ 하느님 맡기신 인간이 고통받고 있는데, 아무도 그들의 소리를 들어주지 않는데 교회마저 귀를 막아야 하는 것일까? 울부짖는 이의 목소릴 들으시는 하느님(탈출기)
이스라엘이 믿었던 하느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게 된 하느님은 다른 무엇보다 우리가 다른 인간들과 얼마나 서로 아끼고 보살펴 주는 형제적 관계를 유지하는가에 가장 큰 관심을 갖고 계시는 분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과의 관계에서 미워하거나 배척하거나 억압하거나 속이거나 복수하거나 하여 그 관계를 파괴하는 일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하느님의 원의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고 할 수 있다.(P55)
곧 하느님께서는 이집트 사람들의 억압에 짓눌려 고통받는, 종살이하는 이들의 신음과 아우성을 들으시고 그들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 그리고 종살이 땅에서 그들을 해방하는 하느님이라는 뜻이다.(p56)
이제부터 광야를 오래 여행하게 되는 이스라엘에게 레위기에서 모세를 통해 들려주신 하느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이스라엘이 이웃과 맺는 인간관계다. 그 관계에서 옛날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했던 것처럼 미워하고 무시하고 속이고 억압하고 착취하는 일이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결코 보아 넘기지 않으실 곳이라는 이야기다. 그것이 구약성경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정체다.(p56-57)
☞ 세상은 공존하며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곳이다. 나와 다르다고 억압하고 착취한다면 하느님의 뜻을 거슬리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고 힘없는 사람들을 짓밟고 괴롭히며 억압한 이스라엘의 권력자와 지도자들을 향해 예언자들은 그런 행위가 하느님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고 하느님의 이름을 업신여기는 일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항의하고 고발했다. 엘리야‧엘리샤‧이사야‧아모스‧호세아‧예레미야‧에제키엘 같은 예언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p57)
☞ 교회는 예언자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잊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도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고 착취하고 수탈할 때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했을 때 하느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살려내셨는지를 상기시키며 정의로운 삶을 살도록 끊임없이 깨우치고 경고했다.(p57)
아모스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전한다. “그들이 빚돈을 빌미로 무죄한 이를 팔아넘기고 신 한 켤레를 빌미로 빈곤한 이를 팔아넘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힘없는 이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다 짓밟고 가난한 이들의 살길을 막는다.(아모 2,6-7).(p57)
☞ 약자의 편이신 하느님. 약자를 억압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성문에서 올바로 시비를 가리는 이를 미워하고 바른말 하는 이를 역겨워한다. 너희가 힘없는 이를 짓밟고 도조를 거두어 가니 너희가 다듬은 돌로 집을 지어도 그 안에서 살지 못하고 포도밭을 가꾸어도 거기에서 난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정녕 나는 너희의 죄가 얼마나 많고 너희의 죄악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다. 너희는 의인을 괴롭히고 뇌물을 받으며 빈곤한 이들을 성문에서 밀쳐내었다.”(아모 5,10-12)(p58-59)
☞ 권력을 잡은 자들의 죄악을 하느님은 역겨워 하신다. 바른 말을 하는 사람들을 싫어하고 억압하는 권력자들의 형태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세상만이 전부인양 살고 하느님을 부정하는 자들.
“나는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배척한다. 너희의 그 거룩한 집회를 반길 수 없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과 곡식 제물을 바친다 하여도 받지 않고 살진 짐승들을 바치는 너희의 그 친교 제물도 거들떠보지 않으리라. 너희의 시끄러운 노래를 내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희의 수금 소리도 나는 듣지 못하겠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 5,21-24)(p58)
☞ 약자를 억압하면서 바치는 제물을 받지 않으시는 정의의 하느님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 버리리라.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 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 1,15-17)(p59)
☞ 악을 행하는 자들의 기도가 정녕 정의의 하느님께 무슨 소용이 있으랴?
“너희는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으로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고, 너희 자신도 모르는 다른 신들을 따라간다. 그러면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 안에 들어와 내 앞에 서서,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이런 역겨운 짓들이나 하는 주제에! 너희에게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이 강도들의 소굴로 보이느냐?”(예레 7,9-11)
☞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권력에 아부하는 정치가들의 모습이 이 말씀을 읽으며 떠올려진다.
이 예레미야 예언서의 말씀은 예수님이 성전에서 환전상의 탁자를 뒤집어엎으시고 비둘기 장수들을 내쫓으셨을 때 하신 말씀의 배경이다.(p59-60)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 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마르11,17)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이 제사 지내는 일, 제물 장만하는 일 같은 외형적 종교행위에는 열과 성을 다하면서도 이스라엘의 현실 속에서 가난하고 힘없어 육체적‧정신적으로 신음하고 고통받는 이들한테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자신들의 형식적이고 관행적인 신앙생활을 유지하는 데 만족하는 행태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질책하신 것이다. (p60)
☞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나오는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하면서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가는 사제의 모습이 이들과 다르지 않다.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가 임박했다고 거듭 외치신 것은 바로 이 세상 어떤 지도자도 실현한 적이 없는 왕권, 가장 가난하고 약하고 힘없는 자들이 모두 보호받고 사랑받는 왕국을 하느님께서 손수 구현하시는 때가 다가왔다는 것이다.(p61)
☞ 하느님이 다스리는 이상적인 하느님의 나라
죄인이라는 말은 하느님 말씀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가리키지만 또한 사람들에게 멸시받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가리킨다. 그 시대 유다인에게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이란 대체로 사람들 눈에 부정과 부도덕한 일에 연관된 직종을 지닌 사람들을 포함했다. 곧 도박사‧고리대금 업자‧세리‧관세 청부인‧목자(다른 사람의 토지에 양 떼를 몰고 들어가서 피해를 끼치기 때문) 등이다.(p62)
☞ 하느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의 다르다. 모든 인간이 구원의 대상인 것이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 태반이 땅만 파먹고 사는 사람, 지식도 교양도 없는 패거리들이라는 취급을 받으며 따돌림 받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아는 것도 없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문제아들이었기에 도저히 구원받을 가망이 없는 사람들로 여겨졌다. 그런데 예수는 이들을 “가난한 이” 또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이들”(마태 11,28)로 보았다.(p63)
☞ 우리는(아니 나는) 여태껏 복음을 잘못 또는 반만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예수님은 당신이 사시던 이스라엘의 사회 현실과 체제와 질서가 대단히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세상은 도저히 용인할 수 없고, 그래서 그런 세상을 유지하고 옹호하던 당시 유다의 지도자들, 정치 지도자들, 종교 지도자들에게 정면으로 도전하고 비판의 날을 세우셨다.(p64)
한마디로 예수님은 산 위에서 기도와 묵상에만 전념하는 영성가가 아니셨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하느님께 제사만 바치는 직업적인 종교인도 아니셨다. 예수님은 세상일과는 초연하게 이탈해 계시는 수도자가 아니셨다. 오히려 희로애락이 교차하고 온갖 선과 악이 춤추며 소용돌이치는 세상 현실 깊숙이 뿌리박고 사셨다.(p64)
☞ 세상 속에서 세상과 함께 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구약과 신약을 통해 오늘 우리한테까지 계승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단순히 성인들의 기도 속에서 얻은 추상적 믿음이 아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주의 주인이 되시는 절대자에게 바치는 철학적인 믿음이 아니다. 우리가 이어받은 믿음은 이스라엘 백성이 구체적 역사와 사건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하고 깨닫고 확인하여 얻은 믿음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살아 계시는 하느님’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곧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단순히 천상 세계에 초월적으로 계신 절대자가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백성과 함께 걷고 돌보고 보호하여 때에 따라서는 꾸짖고 벌하기도 하시는 하느님이다.(p65)
☞ 약자를 돌보시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우리의 위안이시다.
모세가 믿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수천 년 동안 믿어왔고 또 예수 그리스도가 믿고 보여주고자 하신 하느님은 이 세상에 관심이 많고 특히 세상의 가장 작은 이들에게 지대한 관심과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함께하시고 구원으로 이끌고자 하시는 분이다.(p65)
중세 때는 이렇게 병자나 극빈자를 돌보는 일에만 개입하던 교회가 근대에 들어와서는 좀 더 다양한 영역의 세상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고통받는 사람, 아픈 사람, 가난한 사람들이 자기 탓이나 부모 탓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와 시스템이 그렇게 돌아가는 경우가 많고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거기서 헤어날 수 없기에 교회가 나서서 사회의 잘못된 시스템과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도울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p67)
☞ 교회의 예언자적인 사명은 중요하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이루신 구원 사업을 이어받아 추진하기 위해 존재한다. 예수님이 추구하신 구원이란 정신적‧영적인 구원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살아있는 인간 전체를 구원하고자 하셨다. 구원이 영신적인 것에 국한된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굳이 세상에 사람이 되어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힐 필요도 없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 교리인 ‘강생의 시비’, 천주 성자께서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강생의 신비는 사람들의 영혼만이 아니라 이 세상 전체를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가르침이다.(p68-69)
☞ 성(聖)과 속(俗)은 별개가 아니다. 하나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며 살아야 한다.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는 세상과 동떨어진 성인들의 모임이 아니다. 교회는 물론 궁극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향한 순례를 시작한 이들의 모임이지만, 언제나 세상 속에 살아야 하고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기 위해 존재하고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p69)
☞ 세상 안의 그리스도인.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회칙 “진리 안의 사랑”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전체의 종합이 사랑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랑은 인간이 하느님과 그리고 이웃과 맺는 인격적 관계의 참된 본질입니다. 사랑은 친구나 가족, 소집단에서 맺는 미시적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차원의 거시적 관계의 원칙이 됩니다.”(진리 안의 사랑 2항) (p69)
우리는 개인적으로 우리 가족과 이웃과의 좁은 관계와 범위 안에서 인간으로서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노력하지만 시민과 국민으로서도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불의한 가치판단과 그릇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감시하고 견제할 줄 알아야 한다.(p69)
유다인 6백만 명이 학살 당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위험을 무릅쓰고 유다인들의 목숨을 지켜주려고 용기 있게 손을 내민 사람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가톨릭교회 성직자 중에도 그런 구체적 행동을 한 사람은 200명이 채 안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유럽 대륙에서 활동한 사제들은 몇만 명이 넘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다인들은 이 사실을 두고두고 섭섭하게 생각했고, 유럽의 가톨릭교회도 두고두고 이 사실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렸다.(p70-71)
☞ 교회가 교회의 안위만을 생각하고 예언자적 사명을 버렸기에 전후 실망한 많은 유럽인들이 교회를 떠난 것이다.
우리는 나치나 나치 가맹국이 점령하거나 통치한 나라들에서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웃 유다인들의 사라짐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저항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는지는 모른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형제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을 짓누른 이 무거운 짐이야말로 참회하라는 부름이어야 한다.(p71)
정선 카지노도 이야기를 들어보면 가산 탕진하고 인생 막장을 사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개인들 몇몇이 모여서 하면 비윤리적인 행위가 정부의 이름으로 공공사업이 되면 윤리적 행위인가? 이런 문제는 국가가 하는 일이니 잠자코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p73)
☞ 국가는 무조건적 절대선인가?
우리나라 현대사를 돌이켜보면 국회와 사법부가 정부를 견제하거나 감독하는 일을 제대로 수행한 적이 없다. 군사독재 시절에 국회와 사법부는 꼼짝 못하고 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했다. 아무도 독재정권이 저지르는 불의에 대해 항의하거나 비판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p73)
김수환 추기경이 나중에 왜 당신이 정치 문제에 대해 발언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치인이나 국회의원들에게 여러 기회를 통해 대통령에게 진실을 말씀하라고 이야기했지만 모두가 다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아무도 진실을 있는 그대로 국가 통치권자에게 말하지 못하는 무서운 상황이니 나라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싶었다.”(p72-73)
이 세상을 다스리는 정치 지도자들, 법조인들, 지식인들, 모두 자신들의 사적인 체면과 영광과 욕심에 지배당하는 사람들이다. 교회는 그런 데서 비교적 자유로운 도덕적 권위를 갖고 있다. 교회가 그런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세상이 잘못된 길을 갈 때 그것을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고발하는 용기를 갖지 못하면 교회의 예언적 직무를 포기하는 것이다.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에 쓸까, 밖에 버려져 발에 밣힐 뿐이다.”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대로 짠맛을 잃은 소금이 되고 마는 것이다. (p76)
교회가 4대강 사업이 문제가 있다고 소리를 높인 것도 ‘4대강 살리기’라는 명칭 속에 이 나라 국토 전반에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의 환경 파괴를 초래할 부작용이 감추어져 있음을 그 분야의 전문가들을 통해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에 잠자코 침묵을 지키는 것은 결과적으로 정부가 하는 일에 동조하는 것이다. (p76)
또 교회가 배아줄기세포 실험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것은 그 실험 과정에서 인간 생명이 마구 다루어지고 폐기되어 나가는 여러 가지 비윤리적 행위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p76)
☞ 교회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리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 예언자적인 사명을 다 해야한다.
교회는 세상의 정치‧경제‧사회 모든 문제와 관련하여 정의가 실현되는지 끊임없이 살피고 호소하고 경고하는 예언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시작하려 하신 구원의 현장이다. (p77)
사회교리 제1항에서는 교회가 추구하는 구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구원은 의인들이 죽은 다음에 얻는 새 생명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경제와 노동, 기술과 커뮤니케이션, 사회와 정치, 국제 공동체, 문화와 민족 간의 관계와 같은 실재들을 통하여 이 세상에도 현존한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구원, 곧 인간 전체(全人)와 모든 인류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는 구원을 가져다주러 오셨다.”(새 천년기 1항: 간추린 사회교리 1항) (p77)
민족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
한반도의 분단과 무력 대결, 굶주림과 병고를 끝내고 참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전투기와 함정과 대포가 아니라, 세상을 타락시키는 맘몬을 떠나 하느님께 돌아서는 참회와 회개가 먼저 이루어져야한다. 맘몬을 주인으로 섬기는 우리의 탐욕과 불의를 떨쳐버리고 하느님의 정의로 돌아가는 회개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평화를 선물해 주실 것이다. (p80)
☞ 왜 우리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은 진정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이 없는 것일까?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하여 정치를 하는 사람은 많아도 진정 민족의 아픔인 분단의 고통을 해결하려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강대국에 의해 나라가 분단된 것도 억울한데, 이를 해결하려는 사람이 없는 현실은 더 안타깝다.
아무리 국가의 이름을 내걸고 싸운다 해도, 또 어떤 고상한 이념을 내세운다 해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몇 백만의 인명을 무차별 살해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평생 불구로 만드는 전쟁은 결코 정당화할 수 없다. 전쟁은 인간이 저지르는 행위 가운데 가장 우매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야만적이고 비윤리적 행위다. 이제는 이 지구상에서 어떤 이유의 전쟁이든, 어떤 행태의 전쟁이든 간에 모두 사라져야 한다.(p82)
그런데 왜 그런 끔직한 참극, 노인과 여성들, 병자와 어린 아이들까지 모조리 독가스실로 보내져 번제물처럼 불살라지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재앙을 경험하게 되었을까? 유다인들이 악을 많이 저질러서가 아니다. 오히려 유다인들은 나치 독일을 비롯하여 지구상의 다른 여러 나라 백성이 저지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죄악을 대신 기워 갚으며 스스로를 번제물로 바친 것이다.(p85)
오늘날 이 지구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외면하고 하느님 대신 돈을 숭배하고 경제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섬긴다. 인류가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맘몬을 섬기기 시작했다. 많이 가진 사람은 더 많이 누리기 위해 적게 가진 사람들 것을 빼돌리고 인간 사이의 신의와 존중, 배려와 연민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산다. (p85-96)
경쟁을 통해 정규직은 갈수록 줄어들고 비정규직은 늘어나, 정규직은 퇴직금에 자식 학자금 혜택까지 주는가 하면 비정규직은 하루 종일 뛰어도 당장 가족 부양하기가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서민들의 자신을 맡아 안정되게 운영하고 지켜주어야할 금융회사의 임직원들이 사욕을 채우려고 투기와 횡령에 앞장서서 서민들이 평생 피땀 흘려 번 돈을 말아먹고 있다. 이런 비리와 부정을 감시하고 올바로 관리하라고 만들어놓은 기관의 공직자들이 한통속이 되어 눈감아 주고 나누어 먹고 있다. 모두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맘몬을 섬기기 때문이다. (p86)
☞ 그렇다. 세상은 맘몬을 섬기고 있다. 신앙인이라는 나도 이에 자유롭지가 않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참아주며 세상이 회개하기를 기다려 주신다. 지금 이 순간도 가난하고 굶주리고 병들고 희망도 없이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북한 동포들 안에서 예수님이 함께 고통 받으시며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고 계신다.(p87)
한반도의 분단과 무력 대결, 굶주림과 병고를 끝내고 참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전투기와 함정과 대포가 아니라, 세상을 타락시키는 맘몬을 떠나 하느님께 돌아서는 참회와 회개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맘몬을 섬기는 우리의 탐욕과 불의를 떨쳐버리고 하느님의 정의로 돌아가는 화개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평화를 선물해 주실 것이다.(p87)
우리 모두 예레미야와 같은 마음으로 함께 참회의 기도를 바치며 우리 자신과 이 나라를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 봉헌하자. 그러면 성모님께서도 기쁘게 우리 기도를 전달해 주실 것이다.
☞ 참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 살면서 맘몬보다 하느님을 우선으로 살아야 한다. 비록 바보 소리를 들을지언정……
제주에서 평화를 시작한다
내가 접하는 보통 사람들, 이념이나 사상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일반 시민들, 굳이 따진다면 일상생활에서 오히려 보수적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사람들도 4·3에 대해서만은 공통된 아픔을 간직하고 대한민국 정부와 국가에 대해 한이 맺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국가의 이름으로 공권력이 민중봉기 진압작전에 투입되어, 무장 투쟁을 벌인 이들뿐 아니라 민간인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 연행하여 정당한 재판 절차 없이 집단 학살하거나 처행했기 때문이다.(p93)
☞ 아무리 국가의 공권력이라도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하느님이 주신 생명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의무는 생명을 지키는 데 있지 생명을 말살하는 데 있지 않다.
대한민국은 자국만이 3만 명이나 집단 학살되었음에도 50년 동안 침묵을 강요하면서 진실을 밝히지 않았기에 99퍼센트의 국민이 이에 대해 아는 바도 없고 수많은 동족의 희생에 대해 아무런 아픔도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한국 가톨릭교회도 지금까지 4·3의 비참한 역사를 한 번도 온전히 성찰한 적이 없음을 부끄럽게 생각한다.(p97)
☞ 불편한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더 큰 가치는 하느님이며, 하느님이 주신 생명임을 그리스도인은 알아야하지 않을까?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그리스도이시다.
유다인 학살의 비극을 통해 인류는 역사 속에서 한 가지 크게 배운 것이 있다. 세상에서 무엇보다 고귀한 가치는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 누구도 인간의 생명을 마음대로 박탈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다. 설사 국가라 해도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마음대로 제약할 권리는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은 국가의 가치를 뛰어넘는 고귀한 것이라는 인식이 바탕에 있다.(p99)
☞ 이들은 세상의 죄를 대신하여 하느님께 번제물로 바쳐진 것이다. 약자를 돌보지 않은 죄, 타인의 생명을 무시한 죄.
4·3은 아무리 국가 공권력이라 해도 결코 국민의 생명권을 짓밟을 권리는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아무리 국가 안보라는 거창한 이유를 내세워도 국민의 생명이 국가에 우선한다는 것을 4·3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국민 개개인의 생명과 기본 인권을 무시하고 짓밟는 정부와 국가는 결코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4·3은 가르치고 있다.(p104)
☞ 집단 광기, 집단 이데올로기. 나치 치하의 독일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생명을 무시하는 것. 이것이 하느님 앞에 죄다.
우리 정부는 툭하면 국가시책, 국책사업이라는 말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려 한다. 그러나 국가가 한다고 다 옳고 좋은 것은 결코 아니다. 현대사를 살펴봐도 가장 많은 희생과 고통을 몰고 온 불의와 죄악은 국가가 공권력으로 저지른 경우가 태반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나치, 군국주의와 식민주의로 아시아 대륙을 유린한 일본,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르짖으며 곳곳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넣은 사회주의 공산정권 소비에트 연방, 또 3대째 권력을 세습하며 백성을 기아와 가난의 고통 속에 붙잡아 두고 있는 북한, 이들은 모두 국가 공권력의 이름으로 만행을 저질렀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국민이 다 잊어버리고 있지만, 5·16군사쿠데타에 이어 30년씩 이어진 군사독재 시절 비밀정보기관을 통해 자행된 불법 사찰과 고문, 억압과 음모는 모두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졌다.(p104-105)
☞ 아마도, 정치인들을 하늘나라에서 보기는 부자보다도 더 힘들 것이다.
가공할 파괴력과 살상력을 가진 각종 미사일로 무장한 해군기지는 생명을 거슬리는 죽음의 성채다. 무력으로 평화를 이룩한다는 것은 본질적인 자기당착이며 환상이다. 인류 역사상 평화가 무력으로 이루어진 적이 없다. 상대보다 더 강력한 무력을 확보했다고 해서 승리와 평화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p106)
생명이란 무엇인가?
인간 생명은 뛰어난 성적, 잘생긴 외모, 풍요한 부, 찬란한 명예, 그 어떤 가치와도 비교할 수 없는 더 높은 가치이며, 인간은 존재 자체로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엄함을 지닌다.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 앞에 선 단독자로서 소중한 존재이다.
인간은 하느님 창조의 완성이고 결정체이며 하느님과 모든 피조물을 잇는 대표이기도 하다. 사람은 하느님의 입김, 하느님의 숨을 직접 받은 존재로 하느님을 닮은 존재이며,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마름으로서 하느님께서 빚어주신 피조물이 각각 창조주의 뜻에 따라 번성하도록 돌보는 책임을 받았다. 그래서 사람은 무엇보다 고귀한 존재이고 어떤 일이 있어도 훼손해서는 안 되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존재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라도 수단화하거나 도구화할 수 없는 존엄한 존재다.(p110-111)
판관들이 하느님의 명을 받고서 전투를 벌이고 적들을 잔인하게 도륙하는 구절을 읽으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그런 명령을 내리실 수 있을까? 이런 구절에서 많은 사람이 성경에 어떻게 이런 내용이 적혀 있을까 하는 의문과 함께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p112)
그러나 그런 표현들은 하느님이 직접 그런 명령을 내리신 것이 아니고, 그 시대에 살던 사람들의 의식 수준을 대변하는 것이다. 아직 그들의 의식 수준에선 같은 종족, 같은 부족에 속한 이들만이 훼손해서는 안 되는 인간 생명의 존엄과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민족이나 타종족은 같은 범주에 들어가지 않았다.(p112)
☞ 평소에 성경을 읽으며 들은 의문이다. 그렇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을 비롯한 고대인들의 의식수준이었다. 자기 민족이 아닌 타 민족은 다 죽여 없어야 할 악한 존재로 본 것.
그 시대 사람들은 다른 종족을 쳐부수고 다른 신을 섬기는 부족을 죽여 없애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고 나라가 망하고 수많은 백성이 죽임을 당하고, 유배지로 끌려가고, 이민족의 지배 속에 여러 세기를 고통 속에 살면서 그들은 인간이 갖는 인격의 품위와 가치에 대해 조금씩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인간이 비록 적이나 다른 민족이나 비천한 노예라 해도 그렇게 마구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느끼기 시작했다.……이스라엘 백성 자신이 노예처럼 팔려가고 끌려가고 종살이하면서 노예들도 결코 함부로 억압하거나 무시하거나 짓밟아서는 안 되는 동등한 인간임을 조금씩 깨달아 갔다. 인간은 인간이 얼마나 존귀하고 존엄한 존재인지를 오랜 수난과 역경을 통해 조금씩 배워왔다.(p113)
☞ 이스라엘은 자신이 노예생활을 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깨달았다. 그들도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생명이라는 것을.
우리가 인간 생명의 존엄과 고귀함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고 그 존엄을 보호하고 지키는 역사 발전의 대열에 설 수 있으려면, 오늘날 저질러지고 있는 인산 생명에 대한 엄청난 도전과 파괴 행위를 알리고 중단하도록 호소하고 행동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헤아릴 수 없는 유다인이 죽어가는데도 외면하고 침묵하던 수많은 대중의 대열에 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p117)
☞ 슈바이처 박사의 말이 생각나다. 무엇이 선인가? 생명을 살리고 보살피는 것. 무엇이 악인가? 생명은 죽이는 것. 생명은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목적이 아무리 다른 생명을 위한 것이라 해도, 그대로 두면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생명을 인위적으로 훼손하거나 파괴해 실험실의 자료로 소모적으로 사용하고 폐기하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인간 배아는 당연히 생명을 지닌 인간 개체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양보할 수 없는 확신이자 믿음입니다. 국제적인 협약과 조약 역시 배아를 인간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미 인간 배아에서부터 인간 생명의 모든 프로그램이 내재되어 있으며, 이 배아가 자율적인 유기체로 발달하여 하나의 완전한 태아로서 태어날 온전한 인간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될 생명은 처음부터 인간입니다.(p117-118)
☞ 가장 약한 존재인 배아부터 하느님이 주신 귀한 생명임을 그리스도인이 우리부터가 인식하고 지켜야 한다. 온 세상은 생명 경시, 물질 만능의 악으로 물들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생명의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
희귀병과 난치병 등의 치료를 위해 온전한 인간 생명인 배아를 만들고 또 희생시켜도 좋다는 발상은,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이 없는 약한 생명은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는 강자를 위해 희생되어도 좋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희귀병과 난치병 치료를 위한 생명과학 분야의 연구와 실험은 매우 절실하지만 그 연구와 실험이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이루어진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주교회의 생명위원회) (p118)
☞ 하느님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조롱거리, 바보가 되자. 우리의 진정한 생명은 죽음 뒤의 삶임을 잊지말자.
사회 전체가 지도층부터 풀뿌리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경제 가치를 최우선으로 꼽고, 그래서 모두가 일렬종대로 경쟁 대열에 끼게 되고 그 대열에서 낙오되는 데 대한 엄청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자신의 목숨까지 지워버리는 극단적 선택을 생각하게 된다. 정말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 사회 전체를 어둡게 뒤덮고 있다.(p119-120)
☞ 생명보다 돈이 우선인 사회. 물질만능, 맘몬의 시대의 뒤편에 보이는 사탄의 무리들.
인간 생명은 뛰어난 성적, 잘생긴 외모, 풍요한 부, 찬란한 명예, 그 어떤 가치와도 비교할 수 없는 더 높은 가치이며, 인간은 존재 자체로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엄함을 지닌다.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p120)
☞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기준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생명이 되어야 한다.
구제역 사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성찰
교회가 오늘의 세상에 기쁜 소식을 선포하려면, 세상이 오늘 어떤 멍에를 짊어지고 있는지, 어떤 덫에 걸려 신음하는지, 또 어떤 아픔과 어떤 슬픔에 시달리는지 예민하게 공감하고 동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직자‧수도자‧평신도 모두 예배 위주의 관행적 신앙생활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복음적 시각으로 바라보며 성찰하여 회심의 열매를 맺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예수님처럼 이 시대의 가장 힘없는 이들, 고통 받는 피조물들의 고통과 신음까지도 함께 호흡하고 고민하며 우리 자신의 삶의 궤적을 바로잡아 가야 하지 않을까? 인간에게 먹는 것은 생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먹는 데도 인간답게 먹고, 그리스도인답게 먹을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p122)
현대에 들어와 산업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대규모 축산 농장을 차리고 냉동시설을 갖추면서 가축은 더 이상 가축이 아니라 공장 생산물이 되어버렸다.(p125)
☞ 하느님의 질서를 무너뜨린 인간들. 과연 행복한가?
소는 원래 되새김질하는 동물임에도 풀을 주지 않고 목구멍을 넘어가면 바로 소화되고 영양분으로 변화되는 옥수수, 그것도 대부분 유전자를 조작한 옥수수를 사료로 공급하고 있다. 그리고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약되는 항생제등으로 가축등의 건강이 더 이상 병균에 저항할 정상적 면역력을 잃어버려 힘없이 무너져 버린다고 한다.(p126)
☞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깨뜨리는 인간의 만용은 생태계를 파괴하는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 물질만능의 시대가 관연 우리에게 행복을 보장할까?
육식은 지구 환경에 치명적 훼손을 가져오고 있다. 그리고 사육장에서 흘러나오는 축산폐기물도 지구 환경을 훼손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 우리가 육류 소비를 확대하는 것은 이런 다양한 부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며 하느님이 태초에 설계하신 창조 질서에 심각한 무질서와 불균형을 초래하는 것이다. (p127)
☞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깨뜨리는 것은 현대의 바벨탑에 다름이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다스리라고 하신 말씀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다스리라는 것은 피조물을 인간의 멋대로 아무렇게나 마구 다루거나 착취해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다스리라고 하신 것은 온갖 생물이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고유의 존재 가치와 아름다움을 잘 유지하고 보존할 수 있도록 지켜주고 보살피라는 말씀이다. (p128)
☞ 그리스도인은 깨어있어야 한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이 유지되도록 내 자신부터 실천해야 한다. 말씀만 하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다.
창세기의 가르침에 의하면 짐승들도 모두 하느님 구원의 대상이고 보살핌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p129)
여성의 존엄과 평화를 위한 도전
창세기 1장과 2장의 내용을 종합하면, 남자든 여자든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매우 특별한 존재이고, 하느님을 닮은 모습은 남자와 여자 서로를 또 하나의 ‘나’로 동등하게 받아들이고 사랑 안에 일치하는 통교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곧 남자든 여자든 그 존재의 내적 구조 안에 본성적으로 타자를 향한 사랑으로 일치함으로써 하느님의 인격적 통교에 참여하고 하느님의 닮은 꼴이 되려는 성향을 갖고 있기에 존엄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p137)
☞ 다른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완성할 수가 있다.
또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을 돌로 치도록 압박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 앞에서 예수님은 “너희들 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는 여성을 차별하고 억압하고 폭행해 온 모든 남성의 불의와 죄에 대한 고발이 담겨 있다.(p140)
예수님은 문제 있는 여성, 사회 전체가 죄인으로 낙인찍은 여성들과의 만남과 사귐을 통해 그들이 받는 차별과 불의에도, 더 큰 사랑을 통해 이를 극복하는 하느님 나라의 길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여성들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랑의 역량, 탈렌트를 부각하고 이를 극대화하도록 초대하신 것이다. (p141)
☞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인간, 약자를 사랑하셨다.
오늘 세계 평화를 저해하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지만 그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편협된 민족주의와 국가 이기주의, 그리고 그런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계속되는 영토 분쟁과 군비 증강이다.(p147)
☞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빠져서 형제가 신음하는 소리를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반성해 보아야 한다.
FTA와 관련한 고찰
멕시코 정부의 공식통계로도 2005년도 신규취업자 10명 가운데 7명이 비정규직이다. 절대빈곤층으로 분류되는 인구도 전체의 31퍼센트에 이른다. 멕시코의 경우 나프타는 외형적 경제수치로는 성장을 가져왔지만, 그 수치는 속 빈 강정이었고 국민의 삶의 질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셈이다.(배성인, 한미 FTA 국민보고서) (P169)
벡텔은 상하수도 시설 운영권을 따낸 지 단 1주일 만에 수돗물 가격을 급격하게 인상했다. 당시 볼리비아의 최저 임금은 월 70달러 정도였는데, 한 달 물값이 20달러를 넘게 되었던 것이다. (P171)
극소수의 자본가들은 엄청난 고수익을 누리는 반면, 중산층이 무너지고 생활보호대상자가 급증하며 시민들이 월 가를 점령하여 1퍼센트를 위한 경제구조는 바뀌어야 함을 부르짖는 현실은 신자유주의의 실패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가 내세우는 시장의 모든 규제와 장벽의 철폐는 얼핏 듣기에는 가장 자유스러운 경제구조인 것 같지만, 실상은 경제의 건전한 균형과 질서를 무너뜨리는 악성 바이러스와 같은 것이다.(P174)
☞ 극소수의 자본가들을 보면 이들이 악의 실체가 아닌가하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하느님을 대항하여 맘몬주의를 퍼뜨리는 그들 말이다.
멕시코의 주교들은 이렇게 선언한다. “세상의 어떤 시스템도 죽음을 초래하는 한,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결코 전례거행이나 형식적인 설교의 틀 안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이기적인 안락함과 수동적 자세에 머무르기를 용납하지 않으며 가난한 이들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찾아 나서도록 촉구한다.”(P181)
☞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는 교회는 예수님을 외면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결국 NAFTA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권보다 국제기업의 이윤을 우선하고 국가의 미래 환경을 팔아넘긴 셈이라고 캐나다 주교단은 천명했다.(P181)
캐나다 주교들은 이 성명에서 이렇게 단언하고 있다. “나프타 협약을 통하여 가난한 이들이 그 낙수 효과를 볼 것이라는 기대는 오직 신자유주의 이념이 만들어낸 허상이었음을 많은 이가 인식하게 되었다. 이 길을 계속 달려 내려가기 전에 우리는 나프타를 통하여 대체 누가 득을 보았는지 자문해야 한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북쪽 나라에 본부를 둔 거대한 다국적 기업들이다. 그들은 어느 국가에도 충성하지 않으며, 시장을 무제한으로 휘젓기 위해 엄청난 로비를 전개한다. 우리가 사목하는 신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또 공동선의 원칙에 입각하여 바라본다면, 이들이 벌인 일들은 인간에게도 생태계에도 필요한 것이 아니다.”(P183)
☞ 극소수의 부자들을 배불리기 위해 지구촌의 대다수 사람이 고통 받는 경제 발전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부자가 왜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말씀하신 이유를 알겠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말했다. “네 것을 가난한 이에게 희사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의 것을 그에게 돌려주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함께 사용하도록 주어진 것을 네가 독점했기 때문이다. 땅은 모든 사람의 것이지 결코 부자들만의 것이 아니다.”(P184)
산업이 발달한 선진국은 이미 고도의 기술력을 갖추고 있고 개발도상국은 농산물이나 원자재를 생산하는 초보적 산업 수준에 머물고 있어 국제통상에서 양자가 아무런 조건없이 같은 출발점에서 자유경쟁을 펼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그것은 마치 100미터를 달리는데 대학생과 유치원생을 함께 달리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국제 교역에서 개발도상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하지 않고 선진국과 동등한 경쟁을 강요하는 것은 불공정 교역이며 국가 간의 빈부격차를 갈수록 격화하는 길임을 교회는 일찍부터 호소해 왔다.(P184-185)
교황 바오로 6세는 1967년에 이미 국제교역에 필요한 경제 정의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며 선진국들의 부의 독점과 편중을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그 시대는 FTA가 아직 거론되지도 않은 시기였지만, 국가간의 통상 현실에는 이미 오늘날의 FTA가 초래하는 부작용이 드러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P186)
☞ 불공정이 아닌 나눔과 공존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현대 사회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인가?
"경쟁 시장을 아주 없애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공정하고 도의적인, 따라서 인간다운 것이 되게 하는 방법으로 유지하라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들 사이의 통상 관계에 있어서는 조건이 너무나 다르고 능력의 차이가 너무나 크다. 인간적이고 도의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 사회 정의가 요구하는 바는 국제 무역에 있어서 경쟁자들에게 적어도 어느 정도 공정하고 평등한 이득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교황 바오로6세, 민족들의 발전 61항) (P186-187)
"세계의 부가 절대 수치에서 증가하고 있지만 불평등도 증대하고 있습니다. 잘사는 나라들에서는 새로운 사회계층이 빈곤의 나락으로 빠지고 새로운 형태의 빈곤이 출현하고 있습니다. 빈곤 지역에 사는 일부 집단은, 지속되고 있는 비인간적인 박탈현상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대비되는 낭비적이고 소비 중심적인 일종의 ‘초발전’을 누리고 있습니다. ‘부당하고 원망스러운 불균형’이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교황 베네딕토 16세, 진리 안의 사랑 22항) (p187)
☞ 선진국의 과소비에 의하여 지구는 몸살을 앓고 있다. 환경의 파괴, 자원고갈, 창조 질서의 파괴.…지구는 온 인류가 함께 살 공간이다.
국제통상 전문가들은 FTA를 맺음으로써 서로가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FTA를 맺은 대부분의 나라가 외형상의 경제규모는 커졌을지 몰라도 극소수의 대기업과 자본가들만 엄청난 부를 축척하고, 중산층이 몰락하여 빈곤층으로 떨어지고, 무한경쟁의 구도 안에서 안정된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들고, 국민의 과반수가 임시직과 비정규직에 종사하여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지키기 위한 복지 혜택도 못 받고, 최저 생계비를 버는 것도 힘든 가혹한 빈곤을 강요당하고 있다.(P189)
☞ 극단적인 양극화는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공존의 길을 인류는 찾아야 한다.
탈 원전을 위하여
“환경은 하느님께서 모든 이에게 주신 선물로서, 이를 사용하는 우리는 가난한 이들과 미래 세대와 인류 전체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 자연환경은 우리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이상으로 소중한 창조주의 놀라운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연에는 그것을 무분별하게 착취하지 않고 현명하게 사용하기 위한 목적과 기준을 알려주는 ‘공식’이 담겨 있습니다.”(진리 안의 사랑 48항) (P192)
☞ 당장의 편함을 위해 브레이크없이 달려가는 환경의 파괴와 자원의 과소비는 지구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지구의 지도자는 인류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원자력발전소가 수많은 사람의 생명에 관계되고 인간의 기본 생존권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대재앙으로 연결되는 문제이기에, 비록 비전문가지만 우리 일반인도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숙고하고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관심 갖고 관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전문가 집단이 지금까지 원전과 관련해서 너무 많은 거짓을 진실처럼 포장해 왔기 때문이다. (P197)
☞ 우리는 얼마나 많은 허상에 속아왔는가?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하여 원전의 안전마저 이용하는 작태를 보며 참 나쁜 시대를 절감한다.
히라이 노부오 씨는 20년간 원자력발전소 현장에서 일한 사람이다. … 그는 현장에서 일하면서 원자로 안의 배관에 현장 공사 인부들이 수시로 망치나 공사도구를 놓고 나오는 등 인간적 실수를 자주 저지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국민들은 원전 같은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시설은 완벽하게 시공되고 관공서에서 완벽하게 감리하여 하자 없는 공사가 된 것으로 전제하고 안심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P205)
방사선은 본디 인간뿐 아니라 생명체의 존재와는 공존할 수 없는 괴물이다. 생물은 지구상에 방사선 물질이 거의 사라지고 나서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태곳적에는 여러 가지 원소들이 있었으나 우라늄보다 무거운 원소는 불안정하여 붕괴해 버리고, 그 결과 생물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P208)
☞ 지금 당장의 편리를 위하여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원전을 사용한다는 것은 시한폭탄을 옆에 두고 사는 것과 같다. 원전이야말로 인간의 오만의 극치인 현대의 바벨탑이 아닌가?
방사능은 개개의 생명체만이 아니러 종(種)의 존속을 위협한다. 이는 인류 전체의 미래를 치명적으로 위협하는 것이다. (P208-209)
방사능 물질은 다른 무엇으로도 통제하거나 제거할 수 없다. 방사능은 한 세대를 넘어 자손에까지 신체적 장애를 일으킨다. 염색체 이상으로 유전적 영향이 발생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피폭한 한국인 생존자의 2세들은 같은 나이의 일반인에 비해 빈혈 88배, 심근경색 및 협심증 81배, 우울증 65배, 정신분열증 23배, 천식 26배, 갑상선 질환 14배가 높게 나타났다고 한다. 방사능은 인간의 건강에 이렇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 강한 독성을 지닌 물질이지만, 이것을 차단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방사능은 인간의 어떤 기술로도 통제할 수 없는 대재앙이다. (P212)
벨기에에서는 2003년 탈 원전 법안을 통과시켜 2004년에 7기였던 원전을 2025년까지 전폐하기로 결정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터진 후 독일‧스위스가 원전 폐쇄를 결정했다.(p213)
☞ 차라리 불편한 삶으로 돌아가자. 좀 느리고 불편하더라도 안전한 삶으로… 도대체 무엇을 위한 발전인가?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자연계의 지배는 절대 권력이 아니다. 자연의 개발과 이용에는 지켜야할 도덕적 요청이 따른다. 우리는 자연계 이용에 한계를 설정해야 한다. “태초부터 창조주 친히 설정하신 한계, ‘그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마라.’하시는 금령에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한계(창세 2,16-17참조)는, 우리가 자연계를 대할 적에 그 생태학적인 법칙만이 아니라 도덕적인 법칙에 귀속됨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이를 위반할 적에는 반드시 징벌이 따르게 되어있다.”(사회적 관심 34항) (p214)
☞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깨어있어야 한다. 주파수를 하느님께 맞추어야 한다. 교회의 가르침에 눈을 열고 귀를 열어야 한다.
“환경은 하느님께서 모든 이에게 주신 선물로서, 이를 사용하는 우리는 가난한 이들과 미래 세대와 인류 전체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 자연환경은 우리가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원료 이상으로 소중한 창조주의 놀라운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연에는 그것을 무분별하게 착취하지 않고 현명하게 사용하기 위한 목적과 기준을 알려주는 ‘공식’이 담겨 있습니다.”(진리 안의 사랑 48항) (p213)
생명이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곧 동물이나 식물이나 무생물이나 자연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아름답고 조화로운 선물이며 인간은 이를 보호하고 온전히 지켜 나갈 사명을 부여받았다. 아무리 무생물이라 해도 인간이 자기 뜻대로만, 자신들의 당장의 경제적 이익만을 위해 고갈하거나 탕진해서는 안 된다. 모든 피조물 안에는 각 사물의 본성이 있고 또 우주 안에서 다른 피조물과의 상호 질서와 연계가 있다. 그런 본성과 질서를 무시하고 인간의 탐욕에 따라 자원을 고갈하거나 탕진하면 자연계 자체의 본성과 질서가 인간을 응징한다.(사회적 관심 34항 참조) (p213-214)
☞ 세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 불편하더라도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저는 지난4월 제주순례길 답사 때 강우일 주교님이 쓰신 '강우일 주교와 함께 걷는 세상'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부산교구 사회교리 특강도 들었습니다. 저는 강 주교님의 정신을 본받고 한 걸음 나아가 그 분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께서 뜻하신 모든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뤄지시길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불편하더라도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비우고 또 비우며 가난한 맘으로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인간의 탐욕에 따라 자원을 고갈하거나 탕진하면 자연계 자체의 본성과 질서가 인간을 응징한다.(사회적 관심 34항 참조) (p213-214) 욕심을 줄이는 일에 노력 하도록 힘쓰겠습니다. 잘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