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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마음을 어떻게 쓸 것인가?
옛날 어느 장군이 산적을 물리치고 승전고를 울리며 산기슭을 내려 오다가 절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절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주지스님 계십니까?”하고 주지 스님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동자승이 방문을 열고 나와 “주지 스님은 출타중이시라 지금 절에 안 계십니다.”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장군은 “주지 스님을 만나면 한 가지 물어 볼 말이 있었는데 그 참 안됐다.”며 돌아 서려는데, 동자승이 “주지스님에게 물으나 저 한태 물으나 마찬가지입니다. 물어 볼 말이 있으면 저 한태 물어 보시지요?”라고 말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장군은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업보에 따라 극락에도 가고 지옥에도 떨어진다고 하는데 대체 지옥과 극락이 어디 있단 말인가?”하고 물었습니다.
장군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미승이 오른손을 번쩍 들어 그의 왼쪽 뺨을 후려쳤습니다. 엉겁결에 뺨을 맞은 장군은 순식간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수많은 산적을 물리치고 기세당당한 장군이 부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뺨을 맞았으니 화가 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장군은 얼굴을 붉히며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단숨에 스님의 목을 베려 들었습니다.
이 때 스님은 맑고 평화로운 얼굴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군님, 장군님은 저에게 극락과 지옥을 묻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먼저 지옥을 알려 드렸습니다. 제가 장군님의 뺨을 치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저를 죽이려고 칼을 빼지 않았습니까? 사람을 살해하려고 칼을 뽑아든 장군님의 분노한 마음, 그 자리가 곧 지옥입니다.”
이 말을 들은 장군은 어이가 없어 뽑았던 칼을 다시 칼집에 넣으며 파안대소(破顔大笑)하였습니다.
그러자 다시 동자승이 말했습니다.
“장군님의 지금 마음 상태가 곧 극락입니다.”
극락과 지옥은 사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극락과 지옥을 왕래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세상에 사는 사람 중에 지옥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행복(극락)을 바라고 불행(지옥)을 싫어하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마음을 바로 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마음을 잘 쓸 수 있는가? 마음을 잘 쓰려면 먼저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중국 당나라 때 회양선사(南嶽懷讓; 677~744)란 분이 있었습니다. 일찍이 출가하여 참선수행을 열심히 했지만 내가 누군지 도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산 넘고 물 건너 수 백리를 걸어 그 당시 선지식으로 유명한 6조(六祖) 혜능대사를 찾아갔습니다. 혜능대사에게 정중히 큰 절을 올리자 대사가 물었습니다.
“어디서 왔는고?”
“숭산(崇山)에서 왔습니다.”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그 한마디에 스님은 그만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어떤 물건이 분명 왔기는 왔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뒤 대사의 문하에서 8년을 보내며 ‘어떤 물건’을 찾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그 어떤 물건이 무엇이지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대사를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제자의 말을 들은 대사는 회양이 한 소식[깨달음]을 얻은 것을 알고, 인가(認可; 공부가 다 되었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증언)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한 한 물건을 서산대사는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한없이 신령스러워서, 일찍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으며, 무엇이라고 이름 지을 수도 없도다.”라고 표현하였는데, 우리는 이것을 통상 마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마음이 어떤 것인지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마음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코로 냄새 맡아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고, 빛깔도 없고, 모양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존재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이 몸뚱이가 자동차라면 마음은 운전사와도 같습니다. 마음이 가자하면 가야하고, 서라하면 서야 하듯이, 나의 주인공은 이 육신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둘째, 마음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 마음입니다.
달마대사가 소림사에서 면벽참선을 하고 있을 때 하루는 신광이라는 젊은이가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스님, 저의 마음이 편안하지 못합니다. 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십시오.”
“너의 불안한 마음을 이리 가져오너라. 내가 편안하게 해주리라.”
스님의 말씀을 듣고 산광이 불안한 마음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스님, 아무리 마음을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달마는 한참을 침묵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이제 네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신광은 크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불안한 마음, 괴로운 마음, 좋아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의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공연히 불안 한 마음을 일으키기도 하고, 괴로운 마음을 일으키기기도 하며,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키기도 하며,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이 자리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셋째, 빛보다 빠른 것이 마음입니다. 빛은 1초 동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돈다고 하는데, 그보다 더 빠른 것이 마음입니다. 빛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만 마음은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ㆍ현재ㆍ미래를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할 수 있습니다. 예컨데 중국 만리장성을 구경하고 온 사람이, 만리장성을 생각하면 즉시 만리장성이 떠오르고, 초등학교 때 친구와 코피나게 싸웠던 생각을 하면 즉시 그 기억이 떠오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은 과거를 회상하거나 추억할 수 있고, 미래를 꿈꿀 수도 있습니다. 정말 요술방망이가 마음입니다.
넷째, 마음은 위대한 창조자입니다. 여기에 있는 이 책상도, 마이크도, 이 농협건물을 누가 만든 것입니까? 마음이 설계하여 만든 것입니다. 이 손바닥보다 작은 스마트폰에는 오늘의 국내외 뉴스, 일기예보, 교통정보, 카메라 기능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 카페에 들어가면 그동안 제가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한 500여 편의 글과 제가 쓴 8권의 책이 이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이 스마트폰 속에는 제가 쓴 글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수천ㆍ수만의 사람이 쓴 글도 자기 블로그나 카페에 다 들어있습니다. 이 속에 들어있는 것을 책으로 엮어낸다면 그 분량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입니다. 한 줌도 안 되는 스마트폰 속에 그렇게 엄청난 분량이 다 들어간다니,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스마마트폰을 누가 만들었지요? 물론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창안하여 만들어 낸 것입니다.
마음은 아파트도 만들고, 비행기도 만들고, 인공위성도 만들어 우주에 쏘아 보내기도 합니다. 마음은 좋은 사람도 만들고 미운 사람도 만들며, 행복도 만들고 불행도 만듭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다섯째, 마음은 마치 원숭이와 같아서 잠시도 그냥 머물러 있지 않고, 대상에 따라 천변만화(千變萬化)를 일으킵 니다. 또한 마음은 크게 쓰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덮고도 남고, 작게 쓰면 겨자씨보다도 작은 것이 또한 마음입니다.
여섯째, 마음은 눈ㆍ귀ㆍ코ㆍ혀ㆍ입ㆍ몸 등,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하여,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냄새를 맡기도 하고 맛을 보기도 하고 감촉하기도 하지만, 이 자리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찾을 수가 없는 것은 삼세(三世; 과거ㆍ현재ㆍ미래)를 초월해 있습니다. 삼세를 초월한 것은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며,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은 생기는 일이 없습니다. 생기는 일이 없는 것에는 사라지는 일도 없고, 가는 일도 없고 오는 일도 없으며, 죽는 일도 없고 태어나는 일도 없습니다. 이해하기가 참 어렵지요?. 우리 중생의 눈으로 볼 때 분명 생사(生死)가 있는데, 왜 생사가 없다는 것일까요?
중국 당나라 때 서당 지장(735~814) 선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선사에게 한 마을 선비가 찾아와서 여쭈었습니다.
“스님, 천당이 있습니까?”
“있지요.”
“지옥이 있습니까?”
“있지요?.”
“생사가 있습니까?”
“있지요.”
이렇게 뭐든지 묻는 대로 다 있다고 답변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선비는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께서 지금 말씀을 잘못하고 계신 게 아닙니까?”
“나는 잘못 말하는 것이 없습니다.”
“실은 며칠 전에 경산선사를 찾아뵈었는데, 경산선사의 말씀이 ”본래 천당도 없고 지옥도 없고,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고,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없는 것이다. 참다운 진리에는 본래 이런 것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모두 다 있다고 말씀하시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이에 서당 지장선사는 다시 반문을 하였습니다.
“경산스님한테 상투가 있었습니까?”
“스님에게 무슨 상투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당신에게는 상투가 있습니까?”
“저에게는 상투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경산선사에게는 상투가 없고 당신에게는 상투가 없습니다. 경산선사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해서 생사와 천당ㆍ지옥이 모두 없는 세계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없다고 한 것이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직 그 세계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당신에게는 생사와 천당ㆍ지옥이 그대로 다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은 진리를 체달해야 합니다. 생사의 고통은 본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사가 없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중생은 전도(顚倒)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업(業)을 짓고, 그 업으로 인하여 생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 속에 해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꿈속의 일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삶과 죽음은 모두 꿈입니다. 꿈속에서는 분명히 태어나고 죽는 일이 있으나 진리의 세계에는 본래 나고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사의 꿈속에서 하루빨리 깨어나야 합니다.
일곱째, 마음의 본성은 누구에게나 평등합니다. 따라서 부처나 중생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하에서 도를 깨달으시고 제1성(第一聲)이 “기이기하고 기이하도다. 일체 중생의 본성이 부처와 조금도 차이가 없구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부처의 마음이 따로 있고, 중생의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본바탕은 부처나 중생, 심지어 저 꼬물거리는 미물까지도 똑 같다는 것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부처님은 마음을 깨달으신 분이고, 중생은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미혹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중국의 천태지의 대사는 『법화론』에서 “한 생각 깨달은 마음이 부처이고, 한 생각 자비한 마음이 보살이며, 한 생각 청정한 마음이 아라한이고, 한 생각 정직한 마음이 인간이며, 한 생각 투쟁한 마음이 아수라이고, 한 생각 어리석은 마음이 축생이며, 한 생각 탐욕한 마음이 아귀이고, 한 생각 성내는 마음이 지옥이다.”라고 하였으며, 달마대사는 『혈맥론』에서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이다. 마음을 떠나서 부처가 없고 부처를 떠나서 마음이 없다.”라고 하였다. 습니다.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코로 냄새 맡을 수도 없고,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는 마음, 빛깔도 없고 모양도 없는 마음,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主人公)이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깨친 이을 부처라 하고 마음이 우매한 이를 중생이라 하며, 마음을 깨달으면 삼계육도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와 안락을 누리게 되나, 마음이 미혹하면 생사의 바다에서 해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견성성불(見性成佛)했다는 것은 곧 마음이 무엇인가를 깨쳤다는 것입니다. 원효스님의 행장(行狀)을 보면 의상스님과 함께 불법을 공부하기 위하여 당나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고 합ㄴ니다. 서해안에서 배를 타고 가기 위해 해물당주(지금의 경기도 남양만 부근)를 향하여 걸어 가다가 날이 저물어 인가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그냥 쓸어져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목이 몹시 말라 물그릇을 찾으니 마침 손에 잡히는 것이 있어서 실컷 마셨는데, 물맛이 얼마나 좋은지 마치 감로수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보니 잠을 잔 곳은 무덤가였고 마셨던 물은 해골에 고였던 물이었습니다. 해골에 든 물을 마셨다는 생각이 들자 원효는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비위가 거슬려 간밤에 마신 물을 다 토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원효는 부처님께서 『화엄경』에서 하신 말씀 즉, "모든 법(法)은 마음 따라 일어나고(是生卽 種種法生) 모든 법은 마음 따라 사라지니(是滅卽 種種法滅)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이다.(一切唯心造)”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검은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이 온통 검게 보이고 푸른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이 온통 푸르게 보이듯이, 어떤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서 이 세상은 살 맛 나는 세상이 되기도 하고 괴로움과 슬픔의 세상이 되기도 합니다.
“아직 반시간이 남았다.”는 것과 “반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긍정의 눈으로 세상을 보느냐 부정의 눈으로 세상을 보느냐, 낙관의 눈으로 세상을 보느냐 비관의 눈으로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서 이 세상은 극락이 되기도 하고 지옥이 되기도 하며, 행복한 인생이 되기도 하고 불행한 인생이 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마음의 산물이요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면 그 마음을 어떻게 쓸 것인가? 이제 그 해답은 스스로가 내려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