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국 사람에게 이토록 강한 서열의식이 체질화된 데는 우리 한국인이
고대부터 영위해 내린 생업이 강한 정착성을 요구했던 데에서 그 뿌리를 찾아볼
수가 있다.
사물사리의 서열파악
한국인은 모든 사물이나 사리를 서열적으로 파악해야만이 사고나 행동이 안정되는
성향이 있다. 서열의식이 비교적 강한 편이다.
평등한 남남끼리 만나더라도 한국 사람이 가장 먼저 상대방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은 신분과 나이다.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와 동시에 얼마나 높은 사람인가 알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나의 신분과 그 사람의 신분과를 서열적으로 파악해야만이
'관계'가 안정되기 때문이다. 동창이면 선배인가 후배인가, 종씨이면 항렬이 위인가
아래인가를 알지 않고는 관계가 안정되질 않고 불안하다.
서열을 잡을 기준이 잡히질 않으면 대뜸 형님뻘인지 아버지뻘이니 하여 '뻘'이라는
매체를 이용, 의사 혈연관계로라도 서열을 잡고 본다.
초면에 만나면 별나게 명함 주고받기를 좋아하는 것도 명함에 기재된 상대방의
신문이나 직위를 알므로서 자신의 그것들과의 서열을 설정하기 위한 서열의식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양자 결연에 있어서도 한국인의 서열의식은 대단하다. 한국인에게 가계를
상속시킬 사자가 없으면 같은 형제의 아들 가운데 누군가로 양자를 삼거나
차선적으로 보다 가까운 혈연의 누군가를 선택하겠지만 항렬의 서열인
세대원리(generationalprinciple)를 파괴한다는 법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곧
나보다 하서열인 조카뻘이어야만이 양자로서 조건을 갖춘다는 엄연한 서열의식이
제도화되고 있다. 같은 동양 문화권에 속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일본에서는 나이 차이가 많은 아무라도 양자를 삼는다. 항렬을 무시한 이같은
양자는 서열의식이 강한 한국인에게 있어서는 친족체계의 기초원리의 침해요,
도덕적으로 용서 못할 패륜행위가 된다.
또한 일본에서는 아버지 형제간의 미망인과의 결혼도 자연스럽게 자행하는데,
항렬을 거역하는 이같은 결혼은 한국인에게 있어 근친상간이 된다.
곧 서열의식의 농도가 이같은 양자제도나 결혼제도에도 여실히 투영됐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초기 신교 선교사 가운데 한 분인 언더우드 1세는 후배 선교사들에게
한국인을 접하는 예의를 가르치면서 다음과 같은 공간 서열을 지킬 것을 강조했다
한다.
한국인이 거처하는 방에는 부분마다 서열이 정해져 있으며 선교를 할 때 그
최하위의 자리에 앉아야만 선교하는 말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잘못 최상석에
앉으면 선교하나마나다 라고....
그럼 한국인의 방에는 1등석, 2등석, 3등석 하고 푯말이 붙어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 푯말도 없는 평등한 공간이기에 고층이 있다면서 상석 말석을 판단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부엌이 붙은 쪽, 곧 아랫목이 최상석이나 부엌을 확인하고자 부인의 독점 공간인
부엌을 기웃거렸다가는 내외가 심한 한국 사람에게는 예비 파렴치범으로 오인되어
몽둥이질을 당하게 될 것이므로 부엌 찾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 하고 '방에
들어가 먼저 벽을 둘러보면 모자가 걸려 있는 벽면이 있는데, 그 벽면의 가장 복판
직하가 상석이요, 그 상석의 반대편이 말석이다.'라고 가르쳤다 한다.
방이라는 같은 공간도 부위에 따라 서열적으로 파악하지 않을 수 없었던 한국인의
강한 서열의식인 것이다.
같은 피가 통하고 신경이 통한 인체도 부위에 따라 서열적으로 파악했다.
이를테면 목 윗부분을 배꼽 아랫부분보다 몇 곱절 서열이 높았고, 또 오른손은
왼손보다 몇 곱절 서열이 높았다. 그러했기로 옛날 양반들 서열 높은 머리나 얼굴
부분에 손댈 필요가 있을 때, 이를테면 갓을 쓴다든지, 머리를 긁적거린다든지
콧등을 매만진다 할 때 반드시 서열 높은 오른손으로만 작업했던 것이다. 만약
초면에 만난 어떤 사람이 왼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었거나 갓을 바로 쓰거나 했으면
당장에 상놈으로 판단케 하는 관습적인 고식적인 기준이 돼 있기까지 했다. 깐깐한
양반이나 고식적인 선비 가운데는 얼굴 씻는 데까지 왼손을 쓰지 않는 분도 있었다
한다.
한국인의 왼손은 역사적으로 무척 학대받아 온 피압박 신체부위였던 것이다.
이제 서열이 낮은 하체부위에 작업할 필요가 있을 때는 서열 낮은 왼손
담당이었다.
옛날 양반들이 발을 씻을 때는 왼손으로 씻었고 소변 볼 때도 반드시 왼손으로
보았다. 양반 집안에서는 오줌가리기 시작할 때부터 어머니가 왼손으로 보도록
버릇을 들였던 것이다.
돈이나 재산문서를 천대했던 양반들은 아예 위임장을 써주어 종에게 거래행위를
대행시키거나 부득이 자신이 돈이나 재산문서를 거래할 때는 왼손으로 주고받았던
것이다.
오늘에 사는 한국인에게 오른손 왼손을 차별하느냐 여부를 묻는다면 아마도
노장층을 제외하고는 차별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의식층에서의
무차별이요, 무의식층에는 차별할 수 있는 어떤 외부의 자극만 받으면 차별을 하게
할 소인이 잠재돼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선조들이 수백 년 동안 누려왔던
의식구조는 그것이 근대화 과정에서 희석돼 왔다 해도 소인만은 유전질서로
애오라지 잠재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결핵이란 병 자체는 유전되지
않지만 결핵에 쉽게 걸릴 수 있는 소인은 유전되는 것과 같은 이치랄 수가 있다.
지금 오른손 왼손 차별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있는 세대의 두 사람이 초면에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고 하자. 나이도 비슷하고 신분도 재산도 학벌도 비슷한 동등한
서열의 이 두 사람은 보다 친밀해지고 싶어 술집에 들어갔다 하자. 갑은 초면인
을을 존중해 주는 뜻에서 두 손으로 공손히 술잔을 권했다. 한데 을은 갑의 정중한
태도와는 정반대로 양반앉음으로 퍼지게 앉아 왼손으로 살짝 술잔을 받았다고 하자.
또 을은 갑과는 달리 왼손 한 손으로 갑에게 술잔을 권하고 왼손 한 손으로 술을
따랐다 하자. 갑은 두 손으로 공손히 술잔을 받고 있는데....
갑이 미국 사람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면 반드시 심적인 충격을 받을 것이다.
저자가 자신을 나의 상전으로 여기거나 나를 저의 종으로 여기고 있다는, 그런
얕보고 깔보고 있다는 심리적 반발이 생겨날 것이다. 노장년층이 그런 꼴을
당했다면 멱사리를 쥐어틀고 한판 싸움이 벌어졌을 것이다. 노장년층이 아니더라도
이같은 꼴을 당하면 싸움까지는 번지지 않더라도 불쾌한 느낌이 들어 그 사람과의
관계효율은 제로 이하로 떨어져 나갈 것이다.
왼손 반발에 어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한국인에게 강하게 잔존돼 있는 서열의식이 그렇게 살아 있다는 증거랄 수가 있다.
따라서 한국인끼리의 관계 덕목으로 왼손을 써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부각된다.
돈을 주고받든, 전표나 서류나, 볼펜이나 공구 하나를 주고받더라도 왼손을 쓰면
상대편에게 나에 대한 플러스 이미지를 준다.
이같은 한국인의 서열의식은 일상 속에서도 적잖이 정착되고 생활화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지금 말단 사원인 내가 맡고 있는 어떤 업무 때문에 나의 직계상관인 계장, 과장,
부장, 상무, 전무, 부사장, 사장과 함께 술집에 갔다 하자. 미국 같으면 이만한
사람이 가면 술자리마다 푯말을 적어 각자가 앉을 좌석을 명시해 놓는다. 명시해
놓지 않으면 웨이터가 낱낱이 좌석을 안내하여 앉혀 준다.
한데 한국의 술자리는 술상에 백지를 깔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늘어 놓았을 뿐
푯말도 없고 그렇다고 누가 자리를 안내해 주지도 않는다. 술상 자체는 만인에게
평등하게 펼쳐져 있다. 누가 어디에 어떻게 앉으라고 표시도 또 안내도 하지 않는
것일까.
실은 표시나 안내를 할 필요가 없기에 하지 않았을 뿐인 것이다.
한국인은 한국에 태어나 사회화하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대뇌피질에 서열을
기가 막히게 잘 따지는 서열 컴퓨터 하나씩을 지니게 된다. 그리하여 어느 임장에서
그 서열 컴퓨터가 민감하게 작동하여 자신의 서열에 맞게끔 앉을 자리를 지정해
준다.
곧 술상이 차려진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서열 컴퓨터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
컴퓨터에는 누구누구가 이 술자리에 온다는 정보가 이미 들어가 있기에 제일로
서열이 높은 사장은 가장 아랫목 한복판 두번째로 높은 부사장은 그 상석의
반대편...하는 식으로 서열을 따져내리면 말단 사원인 내가 앉아야 할 말석이
지정된다. 각자가 각자의 컴퓨터로 자신의 자리를 서열적으로 파악 제자리에 찾아가
앉는다. 무슨 놈의 푯말이며 번거로운 안내가 필요할 까닭이 있겠는가.
대체로 서열에 맞게 제자리를 찾아가 앉는데 이따금 한자리를 두고 두 사람이
서로 양보하며 자리 다툼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이 세상에 서열을 따질 기준이
하나밖에 없다면 이같은 서열 차질 현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서열을 따질
기준이 수백, 수천, 무수하게 있기에 두 사람의 선택한 서열 기준이 동일하지 않고
이원화된 데서 일어난 차질인 것이다.
이를테면 과장인 A와 사원인 B가 술자리에서 서로 자리 양보를 하고 있다 하자.
직장 직위로는 상위인 A이지만 학교 선후배로 기준을 잡으면 B의 후배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했을 경우 A는 직장 같으면 상석에 앉겠지만 술자리에서는 의당히
선배를 상석에 앉혀야 한다고 선후배의 기준으로 서열을 잡고 보다 낮은 자리에
앉으려 든다. 한데 B는 동창회 모임 같으면 상석에 앉겠지만 아무리 직장을 떠난
술자리라 해도 직장 사람들과 같이 있는 이상 과장은 과장대접을 해야 한다 하고
직위 기준으로 서열을 잡고 보다 낮은 자리에 앉으려 든다. 한 자리에 두 사람이
서로 앉으려 드니까 물리적인 충돌이 불가피하게 된다.
이것은 한국인의 억센 서열의식이 어떤 시공에서든 민감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랄 수도 있다.
사무실 공간에 놓인 책상의 구조에도 엄연한 서열이 매겨져 있다. 계원이 일하는
책상의 서랍 수나 면적보다는 계장이 일하는 책상의 서랍 수가 보다 많고 면적도
보다 넓다. 직위가 오를수록 비례해서 서랍 수와 면적이 넓어진다. 따라서 한국의
사무실 공간에 있어 서랍 수와 면적은 실용에 부응해서 많아지고 커가는 것이
아니라 스테이터스 심벌인 것이다. 실용적인 측면에서나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오히려 많은 서류를 보관하거나 늘어놓고 일해야 하는 하위직일수록 서랍 수가 많고
면적도 넓어야 하는데도 역현상을 이루고 있는 것 또한 강한 서열의식의 소치다.
미국의 사무실에 가보면 대체로 결정권을 가진 스탭은 책상 면적도 하위직 사람의
것보다 좁고 서랍도 사물만을 넣어두는 한두 개에 불과하다.
앉아 일하는 의자의 구조도 서열적으로 돼 있다. 가장 말단인 계원이 앉아 일하는
의자는 아무런 부착물도 없이 직각으로 고정된 단구조 의자인데 예외가 없다. 이제
계장쯤 되면 의자 양편에서 팔꿈치 괴는 받침대가 나오기 시작하는데, 나오려면
양편에서 고루 다 나오든지 말려면 양편에서 고루 나오지 말든지 할 일이지 오른쪽
한 편만 나온 의자가 있다. 정말 희한한 구조의 의자가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의자에 구조적인 차이를 두어야 할 서열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데 어떻게 차이를
두느냐 하는 고심 끝에 발상된 서열의식 충족용 의자인 것이다.
과장쯤 되면 왼편에서도 마저 나오고 부장쯤 되면 뒤로 젖히게 되어 있고 중역쯤
되면 빙빙 돌아가게끔 구조적인 차이를 두고 있다.
엉덩이 들어가는 의자의 깊이도 서열에 따라 비례하고 있다. 서열의 고하에 따라
의자에 구조적인 차이가 별반 없는 미국의 사무실과는 대조적이다.
이같은 서열 시스템에 별반 저항이나 불평없이 용납하고 있는 것도 서열의식의
소치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파는 동일 상품이나 동일 식품에 약간의 질적인 차이를 두어 특제를
만드는 것도 외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서열의식의 소치다.
이를테면 설렁탕집에는 같은 설렁탕에도 맛빼기, 곱빼기며 보탕(보통탕),
특탕(특제탕), 특특탕으로 서열화한다.
대포집에 가면 제값에 대포만 팔면 되는 것을 왕대포를 두어 서열화하지 않고는
성이 풀리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는 종횡으로 이 서열이 지배하고 있으며 이 복잡한 서열구조 위에
우리 사회가 영위되어 있다 해도 대과가 없을 것이다.
서열의식이 강해진 이유
우리 한국 사람에게 이토록 강한 서열의식이 체질화된 데는 우리 한국인이
고대부터 영위해 내린 생업이 강한 정착성을 요구했던 데에서 그 뿌리를 찾아볼
수가 있다.
한반도의 기후대에서 벼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촌락 단위의 소우주에 강하게
정착해 살지 않을 수 없게끔 했다. 그 마을에 태어나 한 발자국도 마을 밖에 나가지
않고 그 마을에서 죽어갈 수 있는, 모든 것이 자급자족 되는 그 소우주에서 10대,
15대 조상대대로 살아온 정착사회의 안정은 종적인 서열없이 영위될 수가 없다. 곧
대인관계가 서열로서 고정됨으로써만이 안정이 된다.
수렵을 하고 유목을 하며 상업을 하면서 떠도는 이동성 민족은 서로 만나는
사람이 평등한 횡적 관계이기에 서로의 이해가 상충되지 않게끔 대등한 입장에서의
계약이나 대화나 의론이 발달한다.
유교 모랄은 중국에서 공맹이 창설한 모랄이라기보다 정착성 사회에서 자생하게
마련인 모랄이며 그 정착성 모랄을 공맹이 체계화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곧
우리나라에는 중국으로부터 유교 사상의 영향을 받기 이전부터 유교가 지향하는
인이나 예 같은 서열 인간구조의 덕목이 보편화 돼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외래의 유교 사상이 그토록 저항없이 쉽게, 깊게 우리 사회에 체질화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러할 수 있는 바탕이 돼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유교의 가르침은 바로 서열구조로 된 인간관계의 덕목을 강조한 것임을 그
보편적인 기조 덕목인 삼강오륜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억세게 체질화된 서열의식이 근대화 과정의 괄목할 만한 변혁이랄 도시화
과정에서 희석돼 왔다고 볼 수 있으나 의식구조란 그것을 형성시킨 여건이 달라진
그 순간부터 달라진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도시화는 정착성 서열사회로부터 이동성 평등사회로의 이행을 의미하고 있으나
이같은 여건 변화가 심화된다 해도 현재 생존 세대는 물론 다음 세대까지도 이
서열의식은 잠재돼 있어 세력을 부릴 것은 예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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