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년대 젊은 대학생들의 필독서이었던 이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최초로 월남전에 관한 흑과 백의 이분법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비로소 베트남전을 ‘이성의 눈’으로 살펴볼 수 있는 단초가 제공되었다. 정권에 의해서 금서가 된 이 책에서 베트남전 개입은 공식적으로는 월남 정부의 요청으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박정희 대통령이 먼저 미국에 ‘월남전 카드’를 제시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민주주의 질서를 무너트리고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소장은 쿠데타 승인을 받기 위해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해서 미국에 협력할 의사가 있음을 먼저 밝혔다. 그러나 베트남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과 전면 철수, 두 가지 방안을 놓고 고민하는 중이었던 케네디는 분명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결국 케네디는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달라스에서 암살되고 만다.
그러나 후임 존슨 정부는 1964년 봄부터 베트남 전쟁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최대 54만 명까지 병력을 늘리는 한계에 도달하자 한국 등 25개 우방국에게 베트남 파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에 응해 병력을 파견한 국가는 한국 이외에는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타이 정도였으며 그나마 상징적 의미만 있는 소수 병력에 그쳤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와 직접적 연관성이 없고 유엔 회원국도 아니었던 한국은 대규모 병력의 참전을 결정했다.
1965년 5월 16일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어 다시 미국을 방문하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사정이 달라졌다. 박정희 대통령 부부와 수행원들은 존슨 미국 대통령이 보낸 대통령 전용기 보잉 707에 몸을 실었다. 그 당시 대통령 전용기가 없었던 가난한 대통령을 위해서 미국 대통령이 자기가 타고 다니는 전용기를 보낼 정도로 당시 베트남 전쟁의 뻘밭에 빠진 미국으로서는 한국의 도움이 절실했다.
워싱톤에 도착한 박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영접한 존슨 대통령은 큰 리무진에 동승해 영빈관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13만 명의 시민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앞차에는 양국 정상이, 뒷 차에는 양국 영부인이 타고 21대의 모터사이클이 선도하는 행렬이었다. 이날 오후 5시 백악관에서 한미정상회담이 열렸다.
이틀 후 뉴욕에 도착한 박정희 대통령 일행은 시내로 들어가면서 또다시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번화가인 브로드웨이를 지나가는 동안 고층 건물에서 오색종이들이 눈처럼 쏟아졌다. 한국 대통령에 대한 이 같은 융숭한 대접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
드디어 1965년 9월 20일 드디어 역사상 최초로 전투부대가 월남에 파견되는 결단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환송사를 읽어내려가다가 그만 연설문이 바람에 날아가 주변의 별들이 바람에 굴러다니는 연설문을 잡기 위해서 네 발로 기어다니는 사건이 벌어졌다. 결단식을 마친 병사들이 막사로 돌아와 보니 막사 안은 어두워져 있었다. 보안상의 이유로 창문을 모두 합판으로 가려버렸기 때문이었다.
1970 년대 미국은 CBS에서 방영한 한 편의 월남전 다큐멘터리 때문에 발칵 뒤집혔다. 존 로렌스라는 기자가 월남의 한 중대에 들어가 생활을 같이 하면서 그들의 실상을 그대로 보도했기 때문이었다.
작전을 위하여 부대가 이동해야 하는데 상부에서는 이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산길로 가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병사들은 거부했다. 부대원들은 베트콩이 아군보다 훨씬 지형을 잘 알 수 있는 산길로 택하는 것은 공격을 당할 가능성이 많아서 자살행위라고 판단을 했기 때문에 비록 명령위반으로 감옥엘 가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정글에서는 절대로 남이 갔던 길은 가지 않고 새로 길을 내면서 가는 것이 상식이었다. 왜냐하면 적이 어디에다 매설물을 설치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찰리 중대’에서 공공연히 지휘관의 명령을 거부하는 미군의 행태가 보도되자 난리가 난 것은 당연했다. 전쟁의 현실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