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시간
최 장 순
만둣국을 떠올리면 진한 향수에 젖는다.
채 꽃잎이 벌지 않은 산목련을 띄워놓은 듯한 만둣국. 뜨거운 김을 훌훌 불어가면서 김치와 동치미를 곁들여 먹던 만둣국은 내 어린 시절과 고향 강릉을 추억하게 하는 대표적인 맛이었다. 나는 어느새 몇십 년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고향의 밥상으로 달려간다.
만둣국은 담백한 맛도 좋지만, 온 가족이 함께 만드는 과정이 정겹다. 밀가루 반죽이 어머니의 홍두깨 손놀림에 맞춰 쓱쓱 늘어나는 것이 신기해서 한 뼘 한 뼘 크기를 재면서 대광주리만큼 커질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가끔 달인을 찾아가는 티브이 프로를 보면서 그 시절의 어머니가 출전을 했다면 만둣국 달인의 칭호쯤이야 너끈히 받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머니가 안반 위에 밀가루 판을 펼쳐놓으면 나는 누나들과 함께 주전자 뚜껑이나 종지그릇으로 땅따먹기 하듯 내 영역을 찍어냈고, 자투리땅은 어머니가 차지하여 나머지 땅따먹기 땅이 준비되곤 했다. 푹 고아 우려낸 사골국물에 잘게 찢은 소고기를 얹어 내 놓으면 내 젓가락은 만두보다 고명에 먼저 닿았다.
만두를 빚을 때면 나도 누나들 곁에서 덩달아 따라했는데, 그때그때 마음 내키는 대로 소를 넣은 만두의 양 귀를 이어 붙여 꽃모양을 내기도 하고 반달모양을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장난기가 발동을 할 때면 내가 만든 것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일부러 이상한 모양으로 별나게 만들기도 했고, 욕심을 부풀려 주먹만 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대개는 삶는 동안 터져버리기가 일쑤였다.
"만두를 이쁘게 빚고 떡을 고르게 썰어야 시집가서 귀여움을 받는단다."
어머니는 누이들에게 후렴처럼 그 말씀을 하는 걸 잊지 않으셨다.
"여보, 만둣국 준비를 해 가면 어떨까?"
얼마 후면 설인데, 딱 이것이 좋겠구나 생각나는 것도 없고 겨울 음식으로는 제격이다 싶어 아내에게 제의했다. 더구나 이제는 노령에 접어든 어머니가 직접 만들 수 없으니 모처럼 우리 부부의 손으로 만들어 어머니와 같이 둘러 앉아 먹고 싶었다. 안반에다 어머니가 하시던 것처럼 만두피를 밀어보고도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솜씨도, 도구도 없었다. 슈퍼마켓에서 만두피와 속에 넣을 두부며 숙주나물과 당면,
무를 사서, 다진 김치와 데친 그 재료들을 꼭 짜서 양푼에 넣어 버무리고, 어머니의 방식대로 담백하게 하려고 고기는 넣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이런저런 반찬거리를 챙겨 고향 길을 서둘렀다.
우리부부와 형님내외, 누님까지 둘러 앉아 그동안 미뤄둔 얘기를 소에 덤으로 섞어 시끌벅적하게 만두를 빚었다. 어머니가 반죽을 밀던 모습만 아쉽게도 빠졌을 뿐, 나는 어느덧 어릴 적 풍경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동안 딸들은 어머니를 자주 찾아뵙고 나름대로 각자의 처지에 맞게 봉양하였지만, 외지의 며느리는 이런 저런 핑계를 내세워 늘 뒷전에 비켜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런 우리를 대견한 듯 지켜보셨다.
문득 내 제의를 선뜻 받아준 아내가 고마웠다. 기껏 몇 푼 되지 않은 봉투나 불쑥 내미는 것으로 자식의 도리를 다한 듯 돌아서곤 했었는데……. 어려운 일도 아닌데 왜 자주 못했을까.
"맛있다. 맛있어."
어머니의 손맛에 미치려면 아직 요원할 텐데도 연거푸 맛있다 하시는 어머니의 눈에 어느새 봇물이 넘친다.
어머니는 요즘 말씀보다 눈물을 늘 앞세운다. 오래 살아서 미안해 우시고, 죽은 둘째가 보고 싶다며 우시고, 자식들에게 남겨줄 게 없다고도 우신다. 험한 대관령 기슭에서 산나물을 뜯던 억척스러운 어머니, 십리길 시장을 문지방 드나들듯 단숨에 다니시던 그 어머니가 검불처럼 초라한 노구를 들썩이며 우실 때마다 나도 속눈물을 삼켜야 했다.
어머니와 마주할 밥상이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있을까. 그동안 어머니를 뵈러 고향에 갈 때면 으레 모시고 나와 외식을 하곤 했다. 평소에 다하지 못한 효성을 남들이 보는 앞에서 한꺼번에 과시라도 하려는 듯, 경포의 횟집이며 초당 순두부집으로 보란 듯 출입을 했었다. 돌이켜보니 어머니는 돈쓰는 것을 아까워하면서 마음 편히 드시지도 못했을 것 같다. 그나마 이제는 바깥출입도 어려워져서 집에서 식사를 모실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기도 했지만, 살아계실 때 한번이라도 더 내손으로 밥상을 챙겨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몇 년 전, 아버지 산소자리가 안 좋아 자손들이 화를 입는다는 지관의 말이 있었다. 처음에는 귀를 닫았으나 우연하게도 그 무렵 내 병치레와 둘째형의 죽음, 동생의 암 투병까지 연이어지자 가족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한창 꿈을 키워가는 다음 세대에까지 화가 미칠까싶어 왈칵 두려워졌던 것이다.
급기야 의견이 모아져서 파묘를 하고 화장을 하여 아버지를 수목장으로 다시 모셨다. 산소를 없애다보니 자연히 상석床石을 땅에 묻게 되었고, 그로인해 아버지는 물론, 곁으로 가셔야 할 어머니마저도 제사상을 차릴 밥상이 사라지게 된 셈이다. 형님 나름의 고육책이었지만 나도 동조를 했으니 불효를 자청한 것일까. 신앙처럼 여겼던 고향 하나를 그렇게 가슴 속에 묻었다.
하루를 천년처럼 쪼개야 할 연세, 올해에 백수白壽가 되신 어머니의 시간. 내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려면 자주 찾아뵙는 길밖에는 없다. 다음에 뵐 때는 어머니가 이슥한 밤 출출할 때 해주시던 동치미국수를 말아드리리라. 그 시원한 맛을 보시면, 요즘 가끔 정신을 놓으시는 어머니가 온 식구들이 둘러앉던 밥상의 정겨운 풍경을 떠올리지 않으실까. 그땐 돌아가신 아버지와 둘째형도 슬며시 그 밥상머리에 끼어들 것 같다.
(2011. 수필과 비평 11월호)
첫댓글 백수의 어머니와 가족과 함께 좋아 하시는 만두국이나 동치미국수를 같이 하는 것,
참 좋은 효도의 방법입니다.
우리 어머니도 103세까지 사셨는데 이런 효도를 못해 드린 것 같아 늘 마음이 짠합니다.
장수 집안이십니다. 어머니는 우리 모두에게 신앙과 같은 존재이겠지요. 감사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산목련을 못보신분도 있을테지요? 듬성듬성 다소곳 하게 핀 산목련은 청초하기도 하고 귀품있지요
일찍 좀 철이 들었으면 좋았겠는데... 내가 효도를 받아야 할 때가 되어서야 후회도 되고 기다려주시지않았던 부모님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세상사 새옹지마라 참 무상하도다
네 기다려주지 않은 다는 말, 곱씹어 봅니다.
저는 떡국을 마주하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 얼른 숟가락을 뜨지 못 합니다
늘 누군가 옆에서 식기 전에 빨리 먹으라고 거드는 소리가 들리곤 하죠.
음식은 허기를 채우기도 하지만 그리움을 퍼올리는 두레박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식구들이 둘러 앉은 밥상은 늘 따뜻하지요. 더구나 만두국은 뜨겁기까지 하니까...가족의 사랑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요즘 어머니의 반찬이 그리워지고 있습니다. 제가 하면 그 맛이 나질 앟아요. 손맛이 빠져서겠지요.
영주샘, 요즘 요리의 매력에 푹 빠지셨나요? 이제 슬슬 손맛이 날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