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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문가문 스크랩 왕씨 (王氏)
박유승(박노동) 추천 0 조회 365 10.03.25 10:4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왕씨(王氏)... 500년 고려 왕족의 후손들...기구한 운명 ( 王 → 田 → 全 →申→ 車 → 玉)

 

 

 

 

왕씨(王氏)의 본관은 개성(開城).. 강릉(江陵)..해주(海州) 왕씨 외에 15개의 본(本)이 전해지고 있다. 제남(濟南)왕씨가 있는데, 명말청초(明末淸初)에 명나라의 의사(義士) 왕봉강이 조선에 귀화하여 생긴 본관이다.  왕씨는 王이란 성(姓)으로 그 역사도 기구하다.

 

 

 

 

 

                                                  王氏의 유래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전, 서기 기원전 2704년에, 고대중국에서는 하(夏)나라가 세워졌고. 그 황제의 11대손 신갑(申甲)이란 사람이 고조선 평양 일토산(一土山)아래에 살면서 일토(一土)를 합하여 왕(王)자를 만들고, 성을 왕씨로 하여 이름을 조명(祖明)이라고 하였다.

 

 

그 후 기자조선(箕子朝鮮...중국인 箕子가 단군조선에 이어 평양에 세웠다는...현재는 허구라고 인정하지 않는다)의 마지막 왕인 준왕(準王) 시절.... 일토초가위왕(一土草家爲王)이란 동요가 있어 準王이 불안감을 가지고 왕씨들을 잡아 죽이기 시작하였다.   당시 왕씨의 후손이었던 왕몽(王夢)이 꿈을 꾸니.. 성왕자(姓王字)를 세번 바꾸면 난리를 피하고 자손이 번창할 것이라는 꿈을 꾸게 된다. 이에 왕몽은 왕자(王字)를 전자(田字)로, 다시 신자(申字)로, 또 다시 차자(車字)로 만들어, 성을 차(車)씨로 하고 이름을 무일(無一)로 하였다.

 

 

 

 

 

                                                   고려  王建

 

 

그 후 차무일(車無一)의 후손들은 신라시대에 높은 벼슬을 하며 지내게 되는데..그의 후손인 차승색(車承穡)은 왕권 다툼에 휘말려 황해도 구월산으로 피신을 가서, 류(柳)씨로 변성을 하고 숨어 살았다. 차승색의 둘째 아들 차공도(車恭道)는 옛날 姓인 王씨로 복성하였는데, 이 사람이 개성 왕씨의 시조(始祖)이며, 고려를 건국한 왕건(王建)의 증조부이다. 

 

 

 

 

 

 

 

왕건이 고려를 세웠고, 고려는 918년부터 1392년까지  450년간 유지되었던 나라이었기에 , 왕씨의 숫자는 상당하였을 것이다. 고려가 亡하고, 조선이 건국된지 사흘 후인 1392년 7월20일 太祖 이성계는 대사헌 민계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고려왕조의 제사를 받들 극소수의 인원을 제외한 모든 왕씨들을 강화도와 거제도에 옮겨 살도록 명을 내린다.

 

 

 

 

 

                                      이성계 그리고 王氏의 수난

 

 

 

태조 이성계와 그 일파들은 왕씨의 존재에 대하여 극도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 명나라의 승인도 받지 못하고 있던 불안한 시절이었다. 태조 3년(1394) 1월21일, 사헌부,사간원,형조 등이 합동으로 왕씨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다. 자칫 민심을 완전히 잃을 수도 있어 이성계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나, 신하들은 십여차례에 걸쳐 끈질기게 왕씨의 제거를 주장했고 이성계는 강화도의 경계를 철저히 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결국 4월14일 의논에 부친 결과.. 일부는 섬에 유배하는 정도에서 왕씨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했지만 소수이었다. 결국 왕씨 제사를 담당해야 할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동생 왕우 三父子를 제외한 모든 왕씨를 죽이기로 결정되었다. 왕우의 딸이 이성계의 아들 이방번과 결혼하였으니 사돈이어서 목숨을 겨우 부지할 수 있었다.

 

 

당시 왕씨들은 강화도, 거제도 그리고 삼척에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성계는 자신의 최측근들을 세군데로 나누어 보내 그들을 모두 수장(水葬)시켰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왕씨 색출작업이 벌어져 "모두 목을 베었다."라고 실록에 기록되었고, 심지어 王씨의 妾 자식까지 잡히는대로 참수당한다. 이어 이성계는 고려때 왕씨 姓을 하사받은 경우에는 본래의 姓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왕족이 아니더라도 왕씨 성은 모두 어머니쪽 성으로 바꾸도록 엄명을 내린다. 왕씨의 관직 진출도 물론 금지시킨다.

 

 

행정력이 미비한 상태이었으니, 살아남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1413년 태종은 의정부에 명을 내려

" 사찰에 있는 중들 중에서 나이 15세 이상 40세 이하의 경우 출생지와 조상 계통을 샅샅이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하였다. 왕씨 색출과 불교국가이었던 고려에의 동조를 염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다루면서 太宗은 생각이 바뀐다. 당시 왕씨의 후손 한명이 잡혀왔다. 신하들은 당연히 그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太宗은 " 역사를 살펴보니 역성혁명(易姓革命)을 하고서도 전조(前朝)의 후손들을 완전히 멸망시킨 경우는 없었다. 그것은 임금의 도리가 아니다. 앞으로 나는 왕씨의 후손들을 보전하겠다. "라고 말한다.

 

 

그 지시는 아버지 이성계의 조치를 뒤집는 발언이었다. 벌떼처럼 반대하는 신하들을 태종은 꾸짖는다. " 이(李)씨가 도(道)가 있으면  백명의 왕씨가 있다고 하더라도 무얼 걱정하겠는가? 그렇치 않고 李씨가 道를 잃으면 왕씨가 아니라도 천명(天命)을 받아 일어나는 자가 없겠는가? "

 

 

 

 

 

 

 

 

 

과연 태종다운 생각이고 발언이었다. 이어 太宗은 " 예전에 태조가 王氏를 제거한 것은 실은 太祖의 眞意가 아니었다. " 고 말하여 아버지와의 의견충돌을 무마하였다. 이후 왕씨에 대한 살륙은 중단되었지만, 관직은 사실상 금지되었다. 조선 500년 동안 왕씨의 과거 급제 기록은 고작 17명이었다. 아마 단종에게 사약을 가지고 간 왕방연 정도가 최고위직이었던 것 같다. 과거급제자는 50년이 지난 1453년 왕희걸(王希傑)이 최초이었다.

 

 

 

이 과정에서 왕씨들은 살아 남기 위하여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으며 심지어 성(姓)을 전(田)이나 옥(玉)씨로 바꾼 사람도 많았다.  이 같은 왕씨 탄압에도 불구하고 고려왕실에 대한 제사는 이어져 왔지만, 宣祖때에 오면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별로 없었던 듯하다. 1589년 선조시절 조정에서는 50년가까이 왕씨가 아닌 다른 성의 사람이 제사를 주관해 온 것은 문제라며,왕씨 중에서 제사를 모실 사람을 선정하자고 논의한다.

 

 

 

조선 500년 역사를 통털어 왕씨를 중용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인물은 흥선 대원군이었다. 그의 뜻은 고종에게 이어졌다. 高宗 8년, 高宗은 개성에 있는 왕건의 현능에 행차하였다가 동부승지 왕정양에게 이렇게 말한다.

 

 

"왕씨가 전조(前朝)의 후손으로서 오랫동안 벼슬에 오르지 못하고  파묻혀 있는 것은 실로 가슴 아픈 일이다. 이제부터 공부에 힘써 이름을 날리도록 하라."  즉 조선이 亡하기 일보 직전에야 제대로 벼슬길이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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