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교육을 전공한 뒤 프랙티컴(Practicum) 과정을 이수하던 시절의 기억이다. 집에서 도보로 3분 남짓한 거리에 위치한 큰 규묘의 데이케어(Daycare)가 있었다. 평소에 오고 가며 이곳에 대해 무척 궁금 했고 선생님들과 원아들이 평화롭게 노는 모습을 보고 나는 이곳에서 실습을 쌓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문을 두드렸고, 다행히 흔쾌히 실습을 허락 받았다. . 캐나다에 정착한 지 1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언어의 장벽은 높게만 느껴졌고, 과연 잘 해낼 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섰다. 현지의 교육 방식 또한 낯설었기에 선배 교사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피며 조심스럽게 하루를 시작했다. 필요한 곳에 신속히 손길을 보태고 교사들의 지도 방식을 관찰하며 익히는 것이 나의 일과였다. 그곳에서 나의 시선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아이는 '도미닉'이었다. 도미닉은 강한 반항심과 폭력성을 보이는 아이로, 교사나 또래 친구들과 좀처럼 협조적인 관계를 맺지 못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독점하려 했고, 때로는 거칠게 다루다 부숴버리기 일쑤였다. 당시 내가 살던 타운하우스 앞뜰에는 웅장한 히말라야 시더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무성한 가지 사이로 온갖 새들이 찾아와 아침마다 경쾌한 지저귐을 선사하던 나무였다. 어느 날 아침, 그 나무 아래에서 떨어진 작은 새둥지 하나를 발견했다.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다람쥐나 고양이의 공격으로 둥지가 떨어진 듯했다. 바닥에 흐트러진 몇 개의 깃털 만이 간밤의 위급했던 순간을 간직하고 있어 마음이 한없이 아려왔다. 나는 그 둥지를 상자에 정성스럽게 보관했고, 볼 때마다 자연이 만들어낸 정교한 조형미에 탄복하곤 했다. 이후 프랙티컴을 진행하며 이 새둥지를 아이들을 위한 자연 관찰 재료로 활용해보고자 데이케어에 가져갔다. 아이들이 직접 만져보고 감상할 수 있도록 전시해 두었는데, 도미닉이 그것을 발로 짓밟아 산산조각을 내버렸다. 그토록 경이롭고 아름다운 둥지를 무참히 짓밟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의 충격은 컸다. '어떻게 저토록 어린아이의 마음에 미움과 분노가 가득 차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훗날 그 아이가 사랑이 부재한 열악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야 겨우 이해의 단초를 찾을 수 있었다. 서클 타임(Circle Time)이 되면 도미닉은 옆 친구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거나 발길질을 하는 등 돌발 행동을 일삼았고, 이에 따라 항상 전담 교사가 붙어 위험한 상황을 예방해야 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일을 시작하는 실습생이자 현장에 익숙지 않았던 나에게 그 아이를 전담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아이들과 차근차근 신뢰를 쌓아가고 싶었던 나로서는 깊은 상처와 분노를 가진 아이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아무런 갈피도 잡을 수 없었다. 그저 다른 교사가 아이를 안아 행동을 제지하던 모습을 어설프게 따라 하는 것이 전부였고, 정작 그 누구도 그 아이에게 제대로 된 교육이나 따뜻한 지도를 제공하지 못하는 듯하여 안타까웠다. 하지만 이러한 나의 미숙함 때문이었을까, 내가 그 공간에서 온전히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실습생은 데이케어에 봉사하며 실전 지도 기회를 얻고, 그 경험을 토대로 배움을 기록하여 제출해야 한다. 그러나 지도 교사의 적절한 조언과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환경에서 계속 머무는 것은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나는 2주간의 봉사를 끝으로 그 데이케어를 떠나게 되었다. 떠나오는 발걸음 뒤로 마음 한구석에 아릿한 미안함이 오래도록 남아있었다. 조금 더 경험이 쌓인 상태였더라면, 언어와 환경이 덜 두려웠더라면, 그 아이의 부서진 마음을 새둥지 다루듯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끝까지 다가가 도와주지 못하고 돌아선 것이 여전히 마음의 짐으로 남아있다. 어느덧 오랜 시간이 흘러 도미닉도 이제는 어엿한 청소년으로 자랐을 것이다. 어린 시절 마음 깊이 새겨졌던 상처들이 부디 따뜻하게 치유되었기를, 그리고 어려운 환경을 딪고 건강하게 성장해 있기를 지금도 간절히 바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