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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 비
위치: 서울 특별시 잠실동 47 석촌 호수 서호변 송파 대로변
지정 번호: 101호(지정 년도 1963.1.21)
규모: 총고 5.7m 비신 높이 3.95m 폭 1.4m 무게 32t
재료: 비신(대리석) 귀수(화강암)
삼전도 비는 대 청 황제 공덕비 혹은 한의 비로 불렸으며 받침돌인 귀수와 머릿돌인 이수는 조선시대 중기의 정교함이 뛰어난 아름다운 조각으로 손꼽힌다. 앞면 좌측은 몽골어 우측은 만주어 뒷면은 한문으로 쓰여진 당시 동북아 삼국의 문자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제시하는 역사 유적이다. 더욱 아끼고 싶은 것은 아픈 역사도 소중함을 아는 민족이야 말로 바른 역사를 창조하는 민족이라 생각 된다. 부끄러움을 감추고 왜곡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이웃 민족들이 안타깝다
청나라 전신은 금나라로서 그 뜻은 그들의 근거지인 ‘안추후 수이’(지금의 송화강 부근)에서 금이 많이 나온다는 설이 나라 이름의 배경이라는 것에서 신라 왕실의 장신구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여겨지며 신라와 관계된 내용을 보면 여진족이 가장 존경해온 나라는 고구려에서 신라 고려에 이어지는 조선국을 상국으로 하였으며 신라 마의 태자 ‘김일’의 후손이 세웠다 하여 김씨의 나라라는 뜻의 금나라로 하였다는 설등에서 우리와는 같은 갈래로 고조선으로부터 이어지며 조선 시대로 이어졌다.
금나라는 아구다 태조가 1115년 나라를 세우고 120년을 이어오며 형제국 으로서 또는 조선을 부모국으로서 예우를 하였었다. 제 10대 ‘완 옌 청진’ 때 1234년 몽골과 송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그 후 후금이 ‘누루하치’(1559-1626)에 의해 중국 한족을 누르고 강력한 통치 국가를 열었으며 조선과는 형제국 또는 부모국으로서 고구려 옛 영토와 선조들의 영토를 신성시하여 중국의 한족이 선조들의 지역을 범접하지 않도록 철저히 하며 그 지역 산해관등 변문을 9곳에 설치하고 동북으로 장춘과 압록강에 이르는 지역에 신목으로 여겼던 버드나무를 심어 신성한 장소로 하였었다. 그래서 광개토 왕의 비석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어림 해 본다.
봄이면 조선 하늘엔 버들 꽃가루가 하늘을 수 놓으므로 서로가 무관하지 않음을 이야기 하는 듯 하다.
누루하치는 명나라 지배 하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피살 당하는 비극을 당하여 원한이 몸에 배여 있었다. 한을 숨기고 차가운 고난의 세월을 보내고 기회를 포착하여 군대를 일으켜 1589년 여진을 통일하고 1616년 금나라의 대를 잇는 의미의 대금을 세우고 여진이라는 이름도 만주라는 이름으로 개칭 만주문자를 만들었다. 누루하치는 1626년 9월 명나라와 전쟁중 홍이포에 맞은 후유증으로 사망하게 된다. 16명의 아들 가운데 8째아들 ‘홍타이지’가 그 뒤를 이었다. 명나라로 들어가기전 1636년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1644년 베이징의 여진족 즉만주족 3대 ‘순치’제 때 중국을 통일하게 된다
정묘호란 때도 형제국의 우의를 다지기 위한 전쟁 이었으나 조선은 많은 것을 임진왜란 등 명나라에 의존하는 길에서 회귀하기에는 너무 먼길을 왔으며 금나라와는 가까워 질 수 없는
길을 걷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삼전도 비가 있게 된 것이다.
인조 14년 1636년 청 태종은 10만 군사를 직접 이끌고 처 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이때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항전 하다가 결국 청나라 군대가 머물고 있는 한강가 삼전도의 나루에서 항복하며 강화 협정을 맺게된다.
비문은 청이 조선을 침략한 이유와 해를 끼치지 않고 돌아 갔다는 청 황제 공적을 기술하고 잇으나 실은 50만명이 끌려가고 25000명의 환향녀 이야기도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니 전쟁의 후유증은 오랫동안 이어 졌었다. 오늘날 남북이 갈린 후유증 중 유교와 전통이념과 좌우 이념 갈등에서 현재와 무관치 않다고 가늠 해보며 너무도 오랜 세월 이어지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 후 수난의 삼전도 비는
1895년 고종이 청일 전쟁의 수모등 일련의 사건으로 쓰러 뜨리고
1909년 쓰러진 채 발견되고
1917년 일제가 다시 세우고
1955년 11월4일 치안국장의 요청에 의해서 치욕의 비로 여겨 땅에 묻었다는 설
1963년 홍수로 매몰된 비가 들어나 석촌동에 세워진다
1983년 송파대로 확장공사로 석촌동 289-3으로 옮겼다
2010년 3월 원 위치 부근에 다시 세워지게 된다
지금은 가까에서 살피기에 좋게 되어서 삼전도비의 수난의 모습이 보인다.
비신 받침 부분이 깨지고 보수한 흔적에서 몸돌이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스러졌을까 추측하게 하며 비석의 물리적인 우여곡절을 상상 하게한다.
삼전도 비의 수난사에서 세상일을 깨닫지 못한 조선은 그 후 300년도 되지 않아 일본에 국권을 잃고 1945년 광복을 맞으며 오늘에 이르니 삼전도 비가 계시하는 의미는 오늘날에도 깊은 뜻으로 전개되어 오고 있다.
애궂은 세월을 인조와 홍타이지에 얽힌 공덕비가 버티어 왔네
오달제 홍익한 윤집 김상헌 정온은 남한성 현절사로 가셨는데
젊은 최명길 외로운 주장은 어디에서 빛나고 있을까
아니면 지금까지도 한의비속에 묻어있나 보다
그대들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비석은 묻고 있었다
-송파의 일주일 중 일부-
나름대로 정리 해 보았습니다. 정정 할 부분이나 생각하신 추가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댓글 또는 E-메일로 답장 해 주십시오. 3모듬 모두의 뜻이 전달 될 수 있게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한강 해설사 선생님들 모두 결실의 가을 풍성한 가을 맞이 하십시오.
첫댓글 선생님 함께한 시간 유익 했읍니다 찍으신 사진은 도로 빼드리겠읍니당 근디 시간은 걸릴 거예요 제가하는것 없이 바빠서요 늘 글쓰시느라 힘드시죠 많은도움이 됌니다 곰마리님 홧팅 ^ ^
고맙습니다.집안 두루 두루 편안하시길 시 아버님 수발 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유비님도 고생 많으십니다.
항상 좋은 글 올려 주셔서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명확한 방향 제시에 크게 영감을 얻어 도움이 컸었습니다. 다시 감사드립니다.
서로 격려하고 이끌어 줄 수 있다는 것은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닐까요---
항상 인자한 웃음으로 대해 주시니 행복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