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는 미국 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돌아온다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서 재산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재산을 증명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사실은 현실을 헤쳐갈 자신이 없어서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었는데 4명의 영사 가운데 제일 까다롭다는 여자 영사가 두 말 없이 잘 갔다 오라며 도장을 꽝꽝 찍어주었다.
무사히 비자는 받았지만 비행기를 타자마자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비행기에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하나도 없고 일본 젊은이들만 가득 타서 왁자지껄 떠들어대고 있었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패를 갈라 한 편에서는 최루탄을 쏘고 한 편에서는 돌을 던지고, 한 쪽은 위협적인 태도로 가방을 수색하고 한 쪽은 비굴하게 가방을 열어 보여야 하는 암담한 현실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일본 젊은 애들은 세계가 좁다고 누비고 다니니 어떻게 마음이 편할 수가 있겠는가?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이는 하와이는 그림보다도 더 아름다웠지만 나에게는 이발소 벽에 걸린 액자 속의 그림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몸은 도무지 거칠 것이 없는 자유로운 땅에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길을 지나도 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슬픈 땅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일 먼저 그 동안 나에게 후원금을 제일 열심히 보내주던 제니라는 여성을 만났지만 보답할 것이 아무 것도 없어서 나에게는 매우 소중한 첫토기도회 배지를 주었다. 그 배지는 동교동응접실의 주인 의자 옆에 항상 놓여 있는 '기도하는 손' 모양의 검은 돌의 모습을 새긴 것이었다. 아마도 그 돌은 지금 은 김대중 기념관에 있지 않을까 싶은데 우리들에게는 매우 의미가 있는 돌이었다. 제니는 그 배지의 뜻을 알는지 모를 일이지만 나로서는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준 셈이었다.
워낙 긴장되고 어려웠던 절차를 통과해서 떠나기에 급급해서 보니 막상 남겨 두고 가는 아내나 아이들에 대하여 많이 걱정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8살, 10살이었던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힘이 들었지만 아무 것도 보낼 형편이 못되어서 크리스마스가 되어서야 카드를 가장 큰 것으로 3장을 샀다. 아내에게 보내는 것은 한 번에 쓸 수 있었는데 아이들에게 보내는 카드를 쓰려고 하면 울음이 터져 덮었다고 또 쓰고 해서 카드를 쓰는데 1주일이 걸렸다.
동생이 사는 아파트 바로 뒤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와이키키 비취였건만 태평양 바닷물에 발목조차 담가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가끔 고생하다가 왔다고 식사에 초대받았을 때도 한겨울 내내 연탄 한 장 안 때고 사는 하안동의 후배들을 생각할 때 도저히 입맛이 나지 않아서 제대로 먹지를 못했다.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달래려고 거리를 산책하면서 한 주간의 일을 끝내고 식구들끼리 단란하게 휴식을 즐기는 가정이며, 놀러 가기 위해서 분주히 준비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며, 또 태평양 바닷가를 자기 집 풀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하와이 부자들의 그림 같은 집을 보면서 저 사람들도 과연 우리처럼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마도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원한다면 그것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가 아닌 저 세상에서나 이루어질 천국, 즉 이 땅에서는 아무리 행복한 부자일지라도 병에 걸리지 않거나 죽지 않을 수는 없을 터이니까 아픔이 없고 죽음이 없는 천국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천국은 아닌 것이다.
한 번은 미군과 국제결혼을 해서 미군기지 내에 살고 있는 자매를 만나서 이야기하고 돌아오는 길에 끝없이 펼쳐진 사탕수수밭에서 잠시 차를 멈추었다.
그곳은 바로 백 년 전에 우리들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짐짝처럼 화물선에 실려서 태평양을 건너와 무서운 백인 농장주들에게 노예 같은 대우를 받으면서 일하던 곳이었다. 그들이 국민회를 만들고 몸서리치는 노동을 해서 번 돈으로 5전, 10전씩 모아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지만 이 승만은 그렇게 벌어서 보낸 돈을 독립 운동한다고 워싱턴의 호텔에 앉아 흥청망청 쓰다가 해방 후에 대통령이 되었다. 그런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후, 자기의 행적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하와이 국민회 사람들이 귀국하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그날 나는 태평양 바닷가에서 우리들의 조상들을 생각하며 ‘선구자’를 부르면서 미국에 온 이래 처음으로 마음껏 울었다.
1987년 초에 박종철이라는 학생이 경찰의 고문으로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꽃 같은 청춘이 목숨을 잃었는데 나는 일신의 안녕을 위해서 도피의 길을 찾는다는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그러나 김대중 선생이 부탁한 편지를 전달해야겠기에 김홍걸을 만나러 LA로 갔다. 김홍걸은 인권 문제연구소 사무실에 박종철 분향소를 설치해 놓고 있었지만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오히려 누가 찾아오는지 감시를 당하는 형편이었다. 아무도 없는 분향소에서 분향을 한 다음에 홍걸이와 식당에 가서 설렁탕을 먹었는데 돈은 누가 냈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았다. 그나 내나 당시에는 알거지 신세였기 때문이다.
LA에 간 김에 만난 고교 동창생이 미국에 온 나의 목적과 방향을 알 리가 없어서 접대를 한다는 의미에서 라이브 쇼를 하는 곳을 데려갔다. 친구는 매표소에서 입장료로 7불씩을 내고 10불짜리 지폐 2장을 1불짜리로 바꾸었다. 바로 코 앞에 있는 당구대 크기의 테이블에서 난생 처음 쭉쭉빵빵한 백인 미녀들이 은밀한 부문을 드러내며 흐느적거리듯 춤을 추는 것을 보니 처음엔 신기 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눈이 즐거운 것이 아니라 마음이 편하지 않게 느껴져서 결국 친구에게 그만 나가자고 했다. 하지만 친구는 비싼 돈 주고 들어왔는데 더 앉아있자고 하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친구가 가자고 할 때까지 스트립쇼를 보면서 명상 상태에 빠졌다. 계속해서 바뀌는 여자들의 몸을 보는 것이 싫증이 나서 얼굴을 자세히 보게 되었다. 그런데 춤을 추는 여자들의 표정이 억지로 짓는 웃음이 아닌 것 같아서 아무리 직업이라지만 다리를 넓게 벌려 자신의 은밀한 부분까지 보이면서 춤을 추는 것이 정말 좋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친구에게 조용히 귓속말로 물었다.
"저 여자들 약 먹고 춤을 추는 것 아냐?"
"직업인데 어떻게 매일 같이 약을 먹고 춤을 추겠나?"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생글거릴 수가 있나?"
"내가 자네가 그걸 깨달으라고 피 같은 돈을 투자해서 여기 온 거야."
"난 정말 모르겠는데?"
"이게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느낄 수 있는 돈 버는 즐거움이라는 거야."
그랬었구나! 그러고 보니 여자들은 한 차례 춤이 끝날 때마다 손님들이 좌석 앞 테이블에 놓은 지폐를 걷어서 얇은 가운 주머니에 넣고서 다음 테이블로 건너갔다. 그래서 친구가 입장을 할 때 입구에서 미리 잔돈을 바꾸어 온 것이었다. 친구는 라이브 쇼를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너무 한 쪽으로 치우쳐 있다고 보였기 때문에 자극을 주기 위해서 아낌없이 거금을 투자한 것이다. 사실 그랬다. 당시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살고 있었다.
술은 팔지 않아 먹을 수는 없지만 여자들이 완전 나체로 사람들 사이를 마치 물고기가 유영하듯 미끄러져 다니는데도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가만히 손님들의 표정을 살펴보니까 나만 빼놓고는 모두들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래도 친구는 그런대로 어색하지 않게 분위기에 어울리는데 내 표정은 내가 생각해도 완전 계엄령이었다. 그런데 주위를 들러보니까 테이블 건너편에 마치 영국의 버킹검 궁전의 근위병 같이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는 동상 같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저런 얼굴을 하고 있으려면 여기를 왜 왔나?' 싶은 느낌이 들만한 얼굴이었다. 정장을 하고 007 가방을 가진 품새를 보니 나와 같은 장기체류자도 아니고 바쁜 출장길에 잠시 시간을 내서 환락가를 방문하신 한국인 같았다. 그 친구 표정을 보는 순간 내 표정이 바로 저렇지 않을까 싶어서 표정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안면근육 운동을 해보려 했지만 마음대로 잘 되어지지 않았다. 억지로 웃어 보려고 애를 쓰니까 나중에는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얼굴 가죽이 근지러워졌다. 그러니 그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이 나에게는 즐거움이 아니라 고문이었다. 이 날의 자본주의 현장 교육은 별로 영양가는 없었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도덕적 엄숙주의에 대해서 심각한 도전이 되었다.
LA에서 다시 하와이로 돌아와 동생의 집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서 몇 일을 고민하던 끝에 결심을 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서 다소로 가다가 고래의 배 속에 던져져 돌아왔지만 박종철의 죽음은 나로 하여금 미국에 대한 미련을 단칼에 잘라버리게 만들었다.
돌아오는 비행기가 구로공단 위를 지날 때, 게딱지처럼 붙어 있는 안양천 뚝방 동네가 보일 때 반가움으로 가슴이 메어졌다. 비록 공해로 오염된 안양천변에 살아도, 젊은이들이 학생과 전경으로 갈라져 최루탄과 돌멩이의 공방전을 벌이며 살아도, 함께 어깨를 부둥켜안고 살 수 있는 나라가 내 나라이었다. 2 개월의 짧은 미국 생활은 나에게 있어서 그 때까지 분명하지 못했던 점들이 오히려 분명해지는 기회가 되었다. 마음 한구석에나마 남아 있는 애급의 고기 가마의 희망을 끊어버리는, 나 자신의 애급에서의 탈출이었다.
1987년 2월 4일 귀국한 바로 다음날 박종철 '고문치사 규탄 전 국민 결의대회'였다. 그 날 조선 호텔 앞에서 행렬의 선두에서 비장한 마음으로 현수막을 들고 서 있는데 뒤에서 툭 치기에 돌아다보니 김덕룡 실장이었다. 나를 보고 깜짝 놀라더니 "아니? 지 목사님! 언제 왔어요? 세상에! 그렇게 힘들게 나갔는데 왜 이렇게 금방 왔어요?"라고 물었다.
그렇다! 그것은 나의 운명이었다. 전태일에게 ‘정신 차리라.’고 뺨을 맞고 박종철에게 ‘뭐 하고 있느냐?’고 뒤통수를 맞아 허둥지둥 달려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