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은 눈의 피로를 풀어주고 심신을 안정시켜준다고한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분들은 복받은거다
어디살든 눈을 돌리면 초록의 세상에 갇혀사니까
모든 생물이 빛을잃은 겨울에도 산에 소나무는 여전하니 푸르름은 살아있고~
외국에사는 몇몇친구들이 통화할때 이런 소리를 자주하더군요
너는 행복한줄 알아라고요~
광주~대구에 놓인 논공쪽에서 고령 넘어가는 88낙동강교인가?
달성보
다람재로 올라가지않고 앞에 보이는 도동터널로 통과 도동서원으로 ~
도동서원앞 은행나무
*도동서원*
도동서원은 조선 5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을 향사한 서원으로
1568년(원조원년) 지방유림에서 현풍 비슬산 동쪽 기슭에 세워 쌍계서원(雙溪書院)이라 불렀는데
창건 5년 뒤인 1573년(선조6)에 같은 이름으로 사액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그 후 1604년(선조37)에 지방의 사림들이 지금의 자리에 사우를 중건하여 보로동 서원(甫老洞書院)이라 불렀다.
이황은 김굉필을 두고 ‘동방도학지종(東方道學之宗)’이라고 칭송했다.
1607년(선조40)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 사액하였으며, 마을 이름도 도동리라 고쳐 불렀다.
도동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전국 서원 중 철폐 되지 않은 전국 47개 중요서원의 하나로
사림과 후손들의 두터운 보호 하에 지금에 이르고 있다.
*관수정*
임진왜란 때 곽재우와 함께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사우당(四友堂)김대진(金大振)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경상 감사 이민구와 지역 사림이 1624년(인조 2)에 건립하였고,
1721년(경종 1)에 화재로 불에 탄 것을 1866년(고종 3)에 김대진의 후손인 김규한이 다시 건립하였다.
오른쪽끝 도동나루터에 왕령지맥이 잠기는곳이라
물가에 내려가니 태풍에 다떠내려가고 길도없다
*왕령지맥*
왕령지맥은 낙동정맥이 경주 사룡산에서 비슬지맥으로 가지를 쳐 천왕산에서
경상남도 창녕군 부곡면 학포리로 이어지는 열왕지맥이
천왕산을 지난 능선 분기점(경상남도 창녕군 성산면 가복리와
창녕군 고암면 감리 및 밀양시 청도면 두곡리의 경계점)에서 서북쪽과 남서쪽으로 가지를 쳐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성산리로 이어지는 도상거리 약 37.2km의 산줄기로,
분기점에서 시작하여 성산리에서 그 맥을 낙동강에 넘겨주고 있다.
이 산줄기를 따라가면 왕령산(429m), 소왕령산(263m), 소시랑등(137m), 태백산(284m), 대니산(407.3m),석문산(242.8m),진등산(280.2m) 등을 지난다.
이 산줄기의 북쪽에는 운봉천, 차천 등이 낙동강으로 흐르며,
이 산줄기의 남쪽과 동쪽에는 토평천 등이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길을걷다보면 국민의 세금으로 지은 저런건물이 너무나도많다
과하게 저렇게 꼭지어야만할까?
개인적으로 의문이든다 ? 누굴위한 건물인지 용도에맞게 쓰이고나 있는지
일년에 고작 몇번의 행사로 쓰이는 건물치고는 크기가 너무크다
모르긴해도 저런 용도의 건물은 도청에 공무원들 퇴직전에 놀다가 가는곳일 확률이높다
유지시설 관리비또한 우리들이 낸세금이다
대한민국같은 초미니 국가 자원도없는 나라,수출보다 수입이 많은 나라
허세를 줄이고 실속있게 나라살림을 꾸려야한다
국민들이 허리띠 졸라메고 낸세금을 흥청망청 쓴다면 자라나는
미래세대에게 빛만 잔뜩 물려줄건까? 마음이 씁쓸해진다
이노정은 성종때 무오사화로 화를 당한 김굉필과 정여창이 시를 읆고 풍유를 즐겼던 곳이라한다
이노정이란 말은 김굉필과 정여창 두늙은이를 가르킨다한다
이노정은 우물마루를 둔 정자 건축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특이한 평면 형식을 갖추고 있다. 또한 마루 천장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통풍구를 두어 산바람, 강바람의 유통을 자연스럽게 이용하고 있어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무오사화란*
무오사화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김일손이 사초에 실었던 일이었다. 1498년 실록청이 개설되어 〈성종실록〉의 편찬이 시작되자 〈조의제문〉이 세조의 즉위를 비방하는 것이라며 유자광은 김종직과 김일손이 대역부도를 꾀했다고 연산군에게 고했다. 이에 연산군은 김종직과 그의 문인들을 대역죄인으로 규정하였다. 이미 죽은 김종직은 대역의 우두머리로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는 형을 받았다. 또한 김종직의 문도로서 당을 이루어 국정을 어지럽게 했다는 죄로 많은 사림들이 처형되거나 귀양을 갔다. 반면 무오사화를 주도한 유자광 등 훈구파는 권력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무오사화의 결과 신진사림파는 중앙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은 선조 대에 이르러서는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추산대장님 낙동강할때 밥사주러 왔던곳인데 ~
오늘은 내가 밥을먹게 될줄이야 ~~ ㅎ
*홍의장군 곽재우*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하여, 왜적의 호남 진출을 저지하는 데 공을 세운 의병장.
본관은 현풍, 자는 계수, 호는 망우당으로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에 뽑혔으나,
글의 내용이 왕의 미움을 사서 합격이 취소되었다.
그 뒤 향촌에 거주하고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천강홍의대장군'의 깃발을 내걸고 혼자서 말을 타고 적진에 돌진하여 적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했으며,
함성으로 군사가 많은 것처럼 꾸미기도 하여 적을 물리쳤다. 붉은 옷을 입어 홍의장군으로 잘 알려져 있다.
1585년(선조 18) 34세의 나이로 별시(別試)의 정시(庭試) 2등으로 뽑혔다.
그러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발표한 지 수일만에 전방(全榜)을 파해 무효가 되었다.
그 뒤, 과거에 나갈 뜻을 포기하고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인
기강(岐江: 거름강) 위 돈지(遯池)에 강사(江舍)를 짓고 평생을 은거할 결심이었다.
그러나 그 곳에 머문 지 3년 만인 1592년 4월 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관군이 대패하자,
같은 달 22일에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대신해 싸웠다.
그 공으로 같은 해 7월에 유곡찰방(幽谷察訪)에, 곧 이어 형조정랑에 제수되었다.
10월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진해 조방장(助防將)을 겸했다.
이듬해 12월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삼가(三嘉)의 악견산성(岳堅山城) 등 성지(城池) 수축에 열중하다가
1595년 진주목사로 전근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현풍 가태(嘉泰)로 돌아왔다.
1597년 명나라와 일본간에 진행되던 강화 회담이 결렬되고 일본의 재침이 뚜렷해지자,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벼슬에 나아가 경상좌도방어사로 현풍의 석문산성(石門山城)을 신축했다.
그러나 그 역(役)을 마치기도 전에 왜군이 침입해 8월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옮겨 성을 수비했다.
그 뒤 계모 허씨가 사망하자 성을 나와 장의를 마친 뒤, 벼슬을 버리고 울진으로 가서 상을 입었다.
1599년 다시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임을 구실로 나가지 않았다.
그해 9월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으나 10월에 이르러서야 부임하였고,
이듬해 봄에는 병을 이유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다.
이 문제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靈巖)으로 귀양갔다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 뒤 현풍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곡식을 금하고 솔잎으로 끼니를 이어가다가,
영산현(靈山縣) 남쪽 창암진(滄巖津)에 강사를 짓고 망우정(忘憂亭)이라는 현판을 걸고 여생을 보낼 설계를 세웠다.
그러나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거절할 수 없어 1604년(선조 37) 찰리사(察理使)가 되어
인동(仁同)의 천생산성(天生山城)을 보수했다. 이어 선산부사로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찰리사라는 벼슬마저 사퇴했다.
곧, 안동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고,
그해 10월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에 제수되고,
다음달 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嘉善大夫龍驤衛上護軍)로 승진했다.
그 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한성부우윤을 역임하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경상좌도병마절도사·용양위부호군을 거쳐
이듬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10년 광해군의 간청으로 서울에 올라가 호분위(虎賁衛)의 부호군,
호분위의 대호군(大護軍) 겸 오위도총부의 부총관(副摠管)에 제수되었고,
이어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에 함경도관찰사로 바꾸어 발령했다.
1612년(광해군 4)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칭탁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신구(伸救)하는 소를 올리고 낙향했다.
1616년 창암강사에서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제수받았으나 역시 나가지 않고, 이듬해 죽었다.
의병 활동 초기에는 의령의 정암진(鼎巖津: 솥바위 나루)과 세간리(世干里)에
지휘 본부를 설치하고 의령을 고수하는 한편, 이웃 고을인 현풍·창녕·영산·진주까지를
작전 지역으로 삼고 유사시에 대처했다.
스스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적군과 아군의 장졸에게 위엄을 보이고,
단기(單騎)로 적진에 돌진하거나 의병(疑兵: 적이 의심하도록 하기 위한 위장 병사)을 구사해 위장 전술을 펴서
적을 직접 공격했다. 그리고 유인해 매복병으로 하여금 급습을 가한다든가,
유격전을 펴서 적을 섬멸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수십 인으로 출발한 의병은 2,000인에 이르는 큰 병력을 휘하에 가질 수 있었으며,
그 병력을 바탕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2년 5월 하순경 함안군을 완전 점령하고
정암진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대승을 거둠으로써, 경상우도를 보존해 농민들로 하여금 평상시와
다름없이 경작할 수 있게 했다. 왜군의 진로를 차단해 계획한 호남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또한, 기강을 중심으로 군수 물자와 병력을 운반하는 적선을 기습해 적의 통로를 차단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현풍·창녕·영산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해 물리쳤다. 그해 10월에 있었던
김시민(金時敏)의 1차 진주성 전투에는 휘하의 의병을 보내서 승리로 이끄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정유재란 때는 밀양·영산·창녕·현풍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화왕산성을
고수해 왜장 가토[加藤淸正]의 접근을 막았다.
필체가 웅건, 활달했고 시문에도 능했다. 묘지는 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리에 있다.
죽은 뒤에 사우(祠宇)에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고,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가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이보우 글님
낙동강을 찾으러가우~ ㅎ 개고생도 함께찾고있소
무심사지나 산길을 오르내리고 내려가니 "우산목장" 소고기ㄸ냄새 실컷마시고 ~
해가지는 5시50분에 합천창녕보에 도착합니다
유나님과 종환님께서 픽업하러 와주셨습니다
대구까지 안전하게 올수있었구요
간만에 얼굴뵐수 있어서 반가웠구요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이틀간 120km를 걷고나니 몸이 좀풀리는것 같은데
생업을위해 come back home 했습니다 ~ ㅎ
첫댓글 날머리쪽이 유난이 눈에 익어서 보니
문중산쪽이시네요 우곡교 지나서 칠봉지맥 끝자락이죠...
식사하시는곳은 문중벌초있으면 옛날에는 직접 한군데에서 음식을 해먹었으나
지금은 거기 식사한곳에서 먹기도합니다...
종환형님하고 유나님이 픽업까지오시고...
수고하셨습니다
강을 따라 120Km 강행군 하셨네요!
역사와 전사, 지리까지 망라한 후기 쓰신다고 수고 하셨습니다!
건강관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지난주에 신안의 섬 여행을 갔다가 만난 어르신이 '대구 도동서원'을 관리하고 있다고 한번 와보시라고 했었지요.
벌써 대구까지 내려오셨군요.
걸어서는 못가더라도 잔차타고 한번 낙동강을 지나보려 하는데 언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낙동강은 유교문화와 근현대사의 전쟁을 지켜봐온 강으로써 우리가 한번쯤 걸어봐야 할 강이라 생각이 듭니다.
남은 구간이 얼마되지 않으니 묵언수행으로 걸으시고 낙동강 오리알은 되지 않길 바랍니다
다와간다 다와가... 쪼매이만오믄 다오네요...
묵언수행 오래하믄 말문이 막힐낀뎅... 조심히 니리오이소~
방이름은 왜 바꿧대요???
묵언수행으로 하이소
낙동강6구간 구미산호대교~합천창녕보2부
이글스님 멋진강행기 덕분에 역사공부 잘했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무탈한 발걸음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벌써 이만큼 내려오셨네요
시작이 어그제 같은데... 금방입니다
삼량진쯤은 언제 내려오시는지요
홀로걷는 강길 고생많으셨습니다
선배님~
무탈히 걸음 잘하고 계시네예...
늠름한 모습보이 한시름 놓입니다
아무쪼록 건강 단디 챙기가며 하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