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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14-18
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금식(禁食)할 때에, 금식하는 티내지 말고, 머리에 기름 바르고, 얼굴을 깨끗이 씻어라. 그러면 티 안 나나요? 한 열흘 굶으면요 아무리 머리에 기름을 발라도 티 납니다. 주님이 그런 이야기 하시는 걸까요?
우리는 지난주까지 주기도문(主祈禱文)에 대해서 상세(詳細)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말이 주기도문이지 우리의 기도죠? 우리의 기도를 주님이 가르쳐 주신 거. 우리가 주기도문, 이렇게 거의 고유명사처럼 알고 있으니까, 우리도 그렇게 부르자는 겁니다. 우리가 공부한 바에 의하면, 주기도문은 마땅히 우리가 되어야 할 상태! 그 되어야 할 상태임과 동시에, 그래서 우리의 간절한 염원이 될 수밖에 없는, 그러한 내용인 것이라고 그랬죠? ‘아 그게 바로 우리가 도달해야 될 지점이구나!’라고 우리가 확실히 알게 되면, 그게 바로 우리의 염원(念願)이 되는 거죠. 기도가 되는 거죠. ‘프로슈코마이’가.
거기에는 기도의 양(量)이라든지, 횟수라든지, 시간이라든지, 방법이라든지, 장소 등에 관한 내용은 일체 언급(言及)이 되어 있지 않아요. 그건 다 나중에 우리들이 만든 거예요. 하루에 몇 번 기도를 해야 된다. 몇 시간 이상 해야 된다. 산에 가서 하면 더 잘 된다. 골방에 들어가면 더 잘 된다. 이런 건, 다 우리가 만든 거지, 절대로 하나님이 그렇게 정해 주신 건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이라는 건, 기도(祈禱)라는 종교행위(宗敎行爲)에 대한 태도(態度)와 자세(姿勢)와 방법에 대한 그런 권면(勸勉)이 아니라, 기도라는 종교행위에 대한 재구성(再構成)인 거예요.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기도라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그런 기도라는 그 종교행위, 그것 자체를 구성을 부수어 버리고, 부정해 버리시고, 기도의 그 진의와 그 내용을, 다시 구성하셔서 제시해 준 게, 주기도문이라는 거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百姓)들에게, ‘기도하라! ‘프로슈코마이,’ 기도하라!’라고 하셨던 건, 인간들 스스로 열심을 부려서, 자기들의 욕망을 이루는 도구로, 이 기도를 사용하라 라고 주신 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言約) 안에서, 이미 정해져, 그렇게 되어 질 것에 대한 인정(認定)과 동의(同意)와 확인(確認)! 그리고 확신(確信)! 거기에 거하게 될 성도의 상태(狀態)! 그걸 우리보고 확인하라는 거지~, 그 기도라는 것 자체를, 우리의 욕망(欲望)을 이루는 도구나 방법으로, 그리고 우리가 갖고 싶은 것을 얻어내는 그러한 방법으로, 사용하라고 준 게 아니란 말이에요. 원래요.
하늘의 뜻이, 내 뜻과 그렇게 연합(聯合)이 되면, 하나가 되면, 당연히 그 하늘의 뜻이, 나의 청원(請願), 나의 염원(念願)이 될 거고, 그 내용이 기도의 내용이 되는 건 당연한 거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진리(眞理)라는 씨가 들어 와서 일을 시작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에요. 주님은 그 씨를 ‘양식(糧食)’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래서 ‘내일의 양식!’ 이렇게 이야기 했죠. 그리고 그 올바른 하늘의 양식이 우리에게 주어졌을 때, 위대한 용서(容恕)가 실현이 되고, 성취(成就)가 되고, 그 용서가 우리의 것이 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죠?
그렇게 되면, 아버지께 있는 그 나라와 권세(權勢)와 ‘두나미스, 영광(榮光)’이 우리 것이 된다고 그랬죠? 네 원래 그 분 것이 맞아요. 어버지꺼죠 그거는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어버지껀데, 그 아버지가 내 안에 들어오시잖아요? 그러니까 그것은 내 것이죠.
그러니까 그것을,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아버지께 있습니다.’라는 걸, 그냥 ‘덕솔로지(doxology),’ 그 송영(頌榮)으로 두고 싶어 하는 그런 이들의 마음은 충분히 알겠는데…. 그래요. 그런데 그 아버지가 내 안에 들어온 거라니까요. 그 진리를 내가 깨달으면. 그러니까 내 거라는 거예요. 거기에 굳이 아버지라는 단어를 성경이 안 써 놓고, 그냥 아멘으로 끝내 버리는 거죠. 이게 진리다! 이렇게. 히브리어로 그냥 음역한 거죠. 아멘! 이게 진리야! 이렇게요.
그러니까 성도의 기도, 그것의 핵심(核心)은 올바른 양식! 하늘의 양식! 내일의 양식이에요.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가 ‘내일의 양식’이라고 그랬죠? 그 하늘의 양식! 주기도문의 핵심은 올바른 그 양식이고, 그것으로 말미암게 되는 용서(容恕)인거예요. 그게 우리가 하는 기도의 내용인거예요. 그것이요. 다른 것은 없어요.
그 올바른 양식은 올바른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 올바른 진리의 말씀이, 나에게 깨달아지면, 가장 먼저 내 안에서 나에 대한 용서(容恕)가 일어나는 거라고 그랬습니다. ‘그렇지! 이걸로 내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게 아니었구나!’라고 나에 대한 그 용서가 일어나고, 그 용서가 또 이웃에게로 또 흘러가는 거라고 그랬죠? 그 말씀을 올바로 전해주면~. 그래서 아멘으로 끝나는 그 주기도문에 붙여서, 용서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첨언해 주시는 거예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그 부분입니다. 아멘하고 끝났는데, 다시 또 용서에 대한 내용이 붙어 있단 말이에요.
본문 14절을 보시면,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신다.’라는 말씀이 주기도문에 첨언(添言)이 되어 있어요. 마치 이렇게, 이렇게 하면, 너희에게 이러 이러한 보상(報償)이 주어질 거야.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이야기인거 같죠?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그 주기도문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실 일에 대한 내용이었지, 그 일이 우리에게 간절한 염원(念願)이 된다는 이야기지~, 우리의 염원이 그걸 이룬다는 이야기 아니었잖아요? ‘우리에게서 무엇이 나오면 그것이 이루어진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실 일에 대한, 우리의 확신이며, 우리의 확인이며, 그것을 우리가 염원으로 갖게 된다는 이야기였잖아요? 우리가 힘써 행해야 하는 일에 관한 그런 내용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 주기도문에 첨언된 내용이, ‘너희가 이렇게 하면, 이렇게 해 줄 것이다.’라는 그런 보상의 내용, 그런 보은(報恩)의 내용이면 안 되지 않아요?
여기에서 과실(過失)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파라프토마’라는 단어에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 죄라는 단어, ‘하마르티아’와 ‘오페일레마.’ 우리 두 개 배웠습니다. 그렇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에서의 그 죄는 ‘오페일레마’라고 그랬어요. 그건 ‘빚’이라는 의미라고 그랬죠? ‘하마르티아’는요? ‘과녁을 벗어나다’라는 말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파라프토마’라는 단어가 이제 합세를 하는 거죠. 지금 여기에 나오는 ‘과실,’ 이 ‘죄’라고 번역이 된 이 단어가 ‘파라프토마’에요. 그 단어는 ‘파라’라는 전치사, ‘옆으로,’ 이런 전치사와 ‘핍토,’ ‘떨어지다, 옆으로 떨어지다, 옆으로 넘어지다’ 제대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옆으로 떨어지면, 그게 넘어지는 거고, 미끄러지는 거거든요. 그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옆으로 떨어져서, 옆으로 미끄러지면, 그걸 ‘과실’, ‘죄’ 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길에 떨어져야지, 길가에 떨어지면 죕니다, 그것이요. 그런 의미에요. 옆으로 떨어짐, 옆으로 넘어짐, 옆으로 미끄러짐. 이런 뜻이에요. 제대로 떨어져야 되는데, 뭐 과녁을 벗어나다와 별로 다른 말은 아니에요. 자 이렇게 이해하시면 돼요. ‘하마르티아’라는 게, ‘올바른 짝이 아님. 올바른 증거를 하지 못함. 죽지 않음.’ 이런 뜻이거든요. ‘하마르티아’가 죄(罪)잖아요? 여러분이 제일 잘 아는 단어죠? 그죠?
자, ‘하마르티아(ἁμαρτι′α G266)’ 이게 ‘하(ἁ)’라는 부정접두어와 ‘메로스(μερος G3313)’ 혹은 ‘하(ἁ)’라는 부정접두어와 ‘마르투스(μα′ρτυσς G3144)’ 요것의 조합으로 된 단어거든요. 그런데 이게 뭐냐면요? ‘메로스(μερος G3313)’ ‘분깃, 몫’ 이렇게도 하지만, 한 부분 있죠?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비뼈로(부분), 여자를 만들었다’에 그 단어가 헬라어로 바꾸면, 바로 이 ‘메로스’에요. 그 부분, 반쪽, 하나인 것의 반쪽, 그래서 이게 없으면, 그 어느 쪽이라도 이 한 쪽이 없으면, 온전한 것이 될 수 없는, 그 부분을 ‘메로스’라고 그러죠.
그런데 그 반쪽이 제대로 된 반쪽이 아닌 것! 그러면 이게 ‘하마르티아’라고 해서, 엉뚱한 남편(男便)을 내가 붙들어, 하나로 되는 것 있죠?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을 주셨는데, 그걸 율법으로 붙들어서, 내 남편으로 세우면, 그걸 죄(罪)라고 그래요. 그리고 이 밑의 것은 ‘마르투스’가 뭐냐면? ‘증거, 증인(證人)’ 이런 뜻이죠. 그리고 ‘순교자(殉敎者)’라는 뜻도 돼요. ‘순교(殉敎)!’ 그러니까 증거를 제대로 하지 못해요. 잘 못 들어서, 잘 못 배워서, 못 깨달아서. 그리고 제대로 된 증인이 못 되고, 죽지 않는 그걸, 죄(罪)라고 그래요.
여러분은 반드시 그 말씀으로 죽어야 되는데, 그걸로 죽는 게 아니라, 오히려 펄펄 살아서 뛰는 나를 증명(證明)하려고 하면, 그걸 죄(罪)라고 한다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말씀을 항상 거기에 사용하죠? 그러면 말씀으로, 성경으로 죄짓는 거예요.
자, 그렇게 잘못된 걸 증거하고, 잘못된 남편(男便)을 내 남편으로, 로마서에서 이야기하는 율법을 내 남편으로, 죽어야 할 남편을 내 남편으로, 그냥 끝까지 붙들어 버리면, 그걸 죄라고 그래요. 그리고 그 말씀으로 죽지 않으면, 그걸 죄라고 그래요. 나의 살아 있음을 증명하려고 하는 거. 그게 율법이죠? 그것이 과녁을 벗어난 거죠.
그렇게 과녁을 잘못 잡아서 활을 쏘면, 당연히 그 활은, 올바른 과녁이 아닌 다른 곳으로 떨어지겠죠? 이게 ‘파라프토마’예요. 다른 곳으로, 옆으로 떨어지다. 제대로 된 과녁이 아닌 옆으로 떨어지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엉뚱한 목적지 즉, 우리 스스로 우리의 빚을 갚겠다고 부산을 떠는, 그 ‘오페일레마’의 죄를 범(犯)하게 되는 거예요. 그게 ‘빚’이라고 그랬죠. 그런데 그걸 갖다가 ‘없이’하는 거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아 내가 그 빚 갚는 거 아니구나! 내가 괜히 그걸 빚으로 짊어지고 있어구나!’ 그걸 없애주는 게 말씀이잖아요?
그러니까 ‘너희가 말씀을 받고, 그 빚을 네 스스로 네 안에서, 먼저 없애지 않으면, 너는 그 말씀 제대로 못 받은 거야.’라는 게 그 주기도문의 가운데 그 핵심(核心), 용서(容恕)의 내용이었잖습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하마르티아,’ 말을 잘못 들어서, 잘못된 남편으로, 반쪽으로, 내가 갖고 잘못된 것을 증거(證據)하게 되면, 그게 ‘하마르티아’죠? 그렇게 되면, 나는 엉뚱한 과녁을 쏘아, ‘파라프토마’ ‘옆으로 떨어지게’ 되는 거죠? 그 말씀의 목적대로 가는 게 아니라, 옆으로 떨어지게 되면, 그것도 ‘파라프토마.’ 그게 범죄가 과실(過失)이 되는 거고, 그렇게 과실이, 내가 그 ‘파라프토마’로 떨어지게 되면, 나는 ‘오페일레마,’ 그 빚을, 수고하고 무거운 빚을, 평생 짊어지고 가는 거예요. 그게 다 죄(罪)라는 거예요. 그게.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게 이렇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파라프토마’ 즉, ‘옆으로 떨어짐’이라는 결과가 있으려면, ‘옆으로 던짐’이라는 원인(原因)이 전제(前提)가 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 옆으로 떨어질 거 아니에요? 옆으로 던져야~, 그 ‘옆으로 던짐’이라는 단어가, ‘던지다’가 ‘발로(βα′λλω G906)’라는 단어니까. ‘파라볼레(παραβολη′) G3850,’ 비유(譬喩)라는 뜻이에요. ‘옆으로 던지다.’
그러니까 비유라는 단어 자체가, 하나님이 말씀을 이렇게 옆으로 던져 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비유 같은 것을 들으면, 우리가 반드시 해석을 해야 되죠? 그거예요. 옆으로 던져 놓은 거예요. 그러면 옆으로 던져 놓으면, 그걸 올바로 깨달아 내 과녁에 맞추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냥 옆으로 던져진 채로 이해를 하면, 그것이 바로 ‘파라프토마, 죄’가 되는 거예요.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 버리면~.
주님이 당신의 모든 말씀을, ‘비유, 파라볼레’라고 이야기 한 거 아세요?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말씀을, 옆으로 던져 놓은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에게 직접 못 주시니까~. ‘파라볼레’ 옆으로 던져 주세요. 마태복음 13장 34절 보세요.
(마태복음 13:34-35)
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35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이 담고 오신 진리(眞理)를 비유로만 말씀하셨대요. 그 말은, 진리를 옆으로 던져 주고, 그걸 진리로 받아들이는 자는 구원하시고, 그걸 그냥 ‘비유, 파라볼레, 옆으로 떨어진 거, 옆으로 떨어짐’으로만 받아들이면, 그걸 ‘파라프토마, 죄인(罪人)’이라 부르시는 거예요. 그 이유가 뭐예요? 마태복음 13장 10절 보세요.
(마태복음 13:10-16)
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들어서 깨달으라고 준 거예요? 아니면 못 깨달으라고 준 겁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을 비유로 주셨다고 하면서, 이거는 구약 때부터 계속 반복(反復)되어 기록되어 있는 말이잖아요? ‘너희는 내가 한 이 말을 그대로 믿잖아~? 그대로 받아서 그대로 믿으면, 그거에 걸려 넘어지는 거야~.’ 이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걸 그대로 받아서, 너희의 수준에서 너희의 실력(實力)으로 믿으라고 준 게 아니라, 이걸로는 너희들이 이 진의(眞義)를 때려 죽어도 못 깨달으니까, 내가 어떤 것을 보내어, 어떤 방법을 취하여, 너희들에게 이걸 깨달을 수 있게 만들어주겠다는 이야기였단 말입니다.
주님은 하늘의 진리를 옆으로 던져서, 하나님이 택(擇)하신 자들만, 그 분의 은혜로, 진리로, 깨닫고 영생에 이르게 하기 위해, 옆으로 던져 놓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손을 쓰지도 않았는데, 보편적 인간 군상(群像)들이, 성경을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한 최고의 베스트셀러라고 그러면서, 타 종교인(宗敎人)들도 이걸 읽고 있네~. 도덕(道德)과 윤리(倫理)로! 그러면 그게 뭐에요? 옆으로 떨어진 걸 그대로 읽는 거예요. 비유로 읽는 거라니까요. 읽으면서 눈과 귀가 막혔다는 걸, 스스로 폭로당하는 거예요. 그거는요. 하나님은 그렇게 읽으라고 안 줬단 얘깁니다.
그러니까 다른 종교인들이 성경을 보고, ‘야 성경에는 이렇게 쓰여 있는데, 그 따위로 사니?’라고 여러 곳에서, 많이, 우리를 향하여 화살을 쏘죠, 사람들이요? 심지어 요즘은 TV에 웬 스님들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지 말이죠. 그 양반들이 다 멘토(mentor)래~. 그리고 뭘 즉문즉답(卽問卽答)인지, 뭔지 해서 물어보면, 또 제자리에서 그냥 바로바로 대답을 해줘요. 인생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그런데 그들이 성경을 갖고 우리를 가르치려고 한다니까요. ‘야,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는데, 너희들 왜 이렇게 살아~?’ 이렇게요. 그들이 본 그건 비유라니까요.
하나님은 그 내용으로 읽으라고 준 게, 아니란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표피(表皮) 그대로 받아 들여서, 육신으로 행해 버리면 그게 옆으로 미끄러지는 거예요. ‘파라프토마!’ 그런데 마지막 절에 뭐라고 그래요? 어떤 이들은 그걸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이들이 있대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사람이라는 존재들의 그 보편적 속성이, 옆으로 던져진 그것을, 왜냐면 자기들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그 최선의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옆으로 던져진 그것을 그대로 받아 들여서, 자기들 스스로가, 옆으로 떨어진다고요. 그러면 멸망이란 말이에요.
주님은 그러한 것에서 ‘떠나라’라고 그러세요. 그 ‘용서하다’라는 단어 ‘아피에미(ἀψίημι G863)’가 ‘떠나다, 버리다, 용서’라는 뜻도 있지만, 그런 뜻이에요. 거기서 떠나야 그게 용서다, 이런 뜻이에요. 그래야 네가 진정 아버지의 용서를 아는 자다~, 이런 말이죠. 그래서 오늘 성경이 그렇게 번역한 거예요. 너희가 그 과실(過失)을, 사람의 과실이라고 그래요. 보편적 아담들, ‘호 안트로프스 호 파라프토마,’ 보편적 아담들은 반드시 거기에 빠지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 사람의 그 과실, 거기에서 떠나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가 그 아버지의 용서에서 먼 자다. 이런 뜻이에요. ‘그걸 내가 주기도문으로 가르쳐 준거야!’라고 반복해서 첨언하는 거예요. 지금요.
그렇게 해서 그 ‘파라볼레’를 그냥 그 비유 그대로 받아서, 그 내가 그걸 행해 버리면, 그게 ‘파라프토마.’ 옆으로 떨어지는 거고, 그게 죄에요, 과실(過失)입니다. 그렇게 옆으로 떨어지게 되면, 우리는 반드시 그 말씀을 법(法)으로 여겨, ‘오페일레마, 빚’을 평생 짊어지고 낑낑 대다가, 거기에 깔려 죽는 거예요. 그 사람에게 어떻게 용서(容恕)가 가당(可當)하겠느냐~? 이런 말입니다.
그러면 자, 그 과실, 그 ‘파라프토마’에서 떠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眞理)로 깨달아서, 그 진의(眞義)로 내가 가지면 되는 거죠. 그걸 ‘새 마음’이라고 그래요. 내가 마음으로 가지면 되는 거예요. 그걸. ‘아~ 이게 그거구나!’ 이렇게. 그러면 용서가 된다는 거예요. 성경 전체는 바로 그 용서의 이야기만을 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 처음부터, 하나님이 등장하고, 진리의 원천(源泉)입니다. 거기에서 이제 증거가 되어 질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걸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하마르티아’에서 시작이 되어야 한다니까요. 내가 증거를 잘못 받아, 그러면 잘못 전해 주게 되겠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 자, 아담이 처음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와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 저거 먹지말래!’ 잘못 받아, ‘하마르티아,’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曲解)하여, 잘못된 짝으로 법으로 받아서, 다른 이에게, ‘야~ 이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셔!’라고 전하면, 그게 ‘하마르트스,’ 잘못된 증거죠? 잘못된 증인이죠? 그러면 이게 어떻게 돼요? 잘못 떨어지겠네요. 옆으로. 그러면 ‘파라프토마’가 되는 거죠~? 그러면 그 사람은 그 ‘파라프토마’의 상태에서, ‘오페일레마, 빚’을 그냥 뒤집어쓰고 죽을 때까지 가는 거예요. 이 전체가 바로 ‘선악과’라는 거예요. 선악과 사건을 통하여 그걸 설명해 주는 겁니다. 선악과가 율법(律法)이라면서요.
그러면 그걸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아담이 제대로 말을 듣고, 그 ‘하마르티아’를 해결을 하면, ‘파라프토마’가 해결 되겠네요, 그죠? 제대로 듣고 ‘하마르티아’가 아니라, 참된 그 진리의 ‘마르투스’가 되어서 전해 주면, ‘파라프토마’가 아니라, 길에 떨어질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성경은 처음부터 무슨 이야기냐면, 너희들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올바로 깨달으면, 그때 죄라는 건, 너희와 전혀 무관하게 된다는 것을 설명해 주는 거란 말입니다.
자, 그렇게 우리는 ‘하마르티아,’ 잘못된 증거를 해결해서, ‘파라프토마’에서 해방이 되는 거고, ‘오페일레마’를 멀리 던져 버리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 용서(容恕)라고 한다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옆으로 떨어진 비유로써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것이 바로 선악과가 되는 거고, 그 말씀이 진의로 깨달아 지면, 그게 바로 생명나무 실과(實果)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건, 그거 먹고, 그걸 먹는 게 뭔지를 깨달아 알아서, 안 먹는 자가 되라고 준 거잖아요? 그런데 먹지마를 그냥 ‘파라볼레’ 옆으로 떨어진 비유로 받게 되면, ‘어 나 먹었는데 어떡하지~’ 여기에 평생 묶여서 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땅에 말씀으로 오신 예수가, 비유(譬喩)만 말씀하신 거예요. 그 예수라는 존재 자체 그 분이, ‘파라볼레’로 오신 거라니까요. 그러면 그 ‘파라볼레,’ 말씀으로 오신, 그 예수에 의해 어떤 놈은 걸려 죽겠네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나로 인하여 실족(失足)하는 자들이 있어. 그런데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들이 있으니, 그가 복(福)된 자다.’ 이렇게 얘기 하세요. 마태복음 11장 6절 보세요.
(마태복음 11:6)
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그런데 대부분 실족(失足)한다는 거예요. 누구 때문에? 예수 때문에. 마귀 사탄 때문이 아니라.
자, 그분은 진리로 오셨죠? 생명이에요. 그게. 내가 생명이다! 내가 진리다! 그랬단 말이에요. 내가 말씀이다! 그랬단 말이에요. 그러면 생명, 진리로 오셨어요. 생명나무 실과로 오신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 분의 말씀을 진리로 따 먹으면, 사는 거죠? 그런데 그걸 법으로 따먹어 버리면, 예수를 그냥, 내 밖의 예수로 섬겨 버리면, 그게 선악과가 되는 게 아닙니까? 그러니까 선악과와 생명나무는 하나네! 하나라니까요.
그 예수를 본질로 알아먹지 못하고, 그냥 표피로 따 먹어 버리면, 선악과로 먹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즉, 말씀에 의해서, 내가 죽으면, 그것이 생명이 되지만, 그래서 하나님이 그러신 거예요. ‘너 이거 먹어 먹고 무트타무트, 말씀으로 완성돼! 죽어!’ 그랬단 말예요.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이 말이 ‘먹으면 죽여 버릴꺼야~’ 이 말이 아니라, 먹고 죽어야 산다는 뜻이라니까요. 그래서 거기에 ‘무트’라는 단어를 쓴 거예요. ‘말씀의 완성!’ 그런데 그걸 따 먹고, 내가 얼마나 훌륭한 존재인가를, 얼마나 펄펄 살아 숨 쉬는 자인가를, 증명하려고 하면, 그게 진짜 죽는 거예요.
자, 선악과를 먹고, 그 사람, 아담과 하와가 숨은 곳이 어디에요? 선악과를 먹자마자, 그들이 무화과 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그리고 숨었어요. 어디로 갔겠어요? 동산 중앙에 나무 하나 있었다면서요. 다 단수잖아요? 선악과나무 뒤로 숨었다니까요.
모든 인간이 그래요. 내가 선악의 주체가 되면요. 하나님은 항상 내 밖의 객체가 돼요. 그리고 나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대상이 되거든요. 그러면 그 분은 어찌됐든 나보다 힘이 강한 존재이기 때문에 내 두려움의 대상이 돼요. 그러면 우리는 항상 어디로 숨냐면, ‘내가 이렇게 잘 하지 않으면 저 사람이 나를 벌주겠지’라고 항상 그 선악 패러다임 뒤로 숨어 버린다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러신 거예요. ‘아담아, 사람아, 네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디냐?’ 그러는 거예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가 하나님이 몰라서 물은 게 아니라, 네가 서 있는 곳이 도대체 어디인지 알라는 거예요. ‘내가 언제 너보고 선악과(善惡果) 뒤로 숨으라고 그랬니? 누가 너보고 벌거벗은 걸 네 스스로, 그렇게 선악과로, 율법(律法)으로, 도덕(道德)으로, 가리라고 그랬어? 내가 언제 그게 부끄러운 거라고 그랬어? 그랬으면, 옷을 입혀서 만들었겠지. 그런데 왜 너희들 스스로 선악과 뒤로 숨어서, 너희들 스스로를 부끄러운 존재라고 그래? 그게 진짜 벌거벗은 거라니까!’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그러므로, 성도라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른 생명의 양식으로, 진리로 먹지 못하면, 율법으로 먹으면, 선악과로 먹어버리면, 생명나무로 못 먹고, 선악과로 먹어버리면, 용서의 자리에 절대 설 수 없는 거고, 그렇게 되면, 그 사람들은 올바른 과녁에 당도하여, 하나님과 연합이 되지 못하고, 옆으로 떨어져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자가 되는 거예요. 이를 간다라는 건, 양식인 줄 알고 먹었는데, 이게 공갈빵이야~ 그래가지고 이빨끼리만 부딪히는 거예요. 그래서 이를 가는 거예요. 억울해서 이를 가는 게 아니라, 가짜 양식을 먹는다는 뜻이에요. 그것이.
그래서 이 용서의 이야기에, 금식(禁食)의 이야기가 붙어 있는 거예요. 주기도문이 성도가 오해(誤解)하고 있는, 그 기도라는 종교행위의 재구성(再構成)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처럼, 이 금식의 이야기도 인간들이 곡해(曲解)하고 있는 종교행위를 올바른 내용으로 다시 전해 주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하나님이, ‘너희들 이걸 올바르게, 이 율법을 올바르게 이렇게 이해(理解)를 해서, 사랑으로 완성(完成)해야 돼!’ 그래 놓고, ‘그럴 때 주의해야 할 점이 뭔지 알아? 구제(救濟)할 때 이렇게 해! 기도할 때 이렇게 해! 금식할 때 이렇게 해!’ 이렇게 지금 설명해 가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이건 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금식도 같은 이야기일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내용도, 사용되는 단어들도 거의 비슷해요.
금식(禁食)이라는 건, 밥을 굶는 걸 이야기 하죠. 금식! 양식을 금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밥을 굶어서, 자기의 정성(精誠)을 표시하고, 자기의 애씀과 노력(努力)을 표시하는 데에, 그걸 사용하죠. 밥을 굶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나의 이 정성을, 치성(致誠)을, 기쁘게 보실 것이다. 이렇게 생각 하는 거예요. 이렇게까지 도대체 먹는 게 뭐라고, ‘이렇게 까지 굶는데,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지 않으실까? 이 정성을 정말, 정성으로 봐주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그 금식이라는 행위를 종교행위로 사용을 해버리죠.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오늘 본문도 얼핏 보면, 종교적 행위로써의 금식을, ‘티 내지 말고 해!’라는 권고(勸告)를 하는 것으로 보이잖아요? ‘야, 티 내지 말고 해! 뭘, 그걸 나 며칠 굶었어요. 이렇게, 나 지금 금식해요, 이렇게 티 나게 해? 티 내지 말고 해!’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받아 버리면, 옆으로 떨어진 걸 받는 거라고 그랬습니다. 그냥 그대로 받아 버리면. 주님은 주기도문을 통해서 너희들은 내일의 양식, 올바른 양식을 구하라고 그랬단 말이에요. 그런데 바로 밑에다가 ‘굶어라!’ 그러겠어요? 그런 거 아니에요? ‘금식 해! 굶어! 그 대신에 티 나지 않게 굶어!’ 그러겠느냐고요? 바로 위에서는, ‘그거 구해서 꼭 먹어야 돼!’ 그런 분이. 생각을 해 보시라니까요.
자, 그렇다면 지금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금식은, 무엇에 관한 금식일까?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너희는 엉뚱한 율법의 양식을 금하고, 그것 먹지 말고, 제대로 된 진리의 양식을 먹어야 된다는 권고(勸告)인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그래요. ‘너희들 금식해!’ 이 말은 올바른 것으로 먹어 라는 말이었어요.
‘너희들 희생 제사 드려!’ 이 말은 ‘너희들은 그 영단번에 예수로 드려지는 희생제사가 뭔지 알아야 돼! 그러면 이 희생 제사 안 드리게 될 거야!’라고 말씀하신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걸 ‘파라볼레’ 옆으로 떨어진 그대로 받아 버리면, ‘파라프토마,’ 우리는 그냥 과실(過失)에 머물게 되는 거예요. 죄인이 된다니까요. 성경은 성도가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이렇게 구분해 줍니다. 고린도전서 3:1절 보세요.
(고린도전서 3:1-3)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신령한 자들이라는 것은, ‘프뉴마티코스,’ 그 진리를 마음으로 가진 자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들과 같이 너희들을 대할 수 없어서’ 왜? 너희들은 ‘사이킬코스,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너희들에게 단단한 음식을 못 준대요. 뭘 준대요? 젖을 준다고 그러죠. 그러면 ‘프뉴마티코스’가 안 된 분들, 진리가 그 마음이 되지 않은 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건, 뭐 밖에 없어요? 율법 밖에 없어요. 그런데 끝까지 그걸 먹으면, 안 된다 말이에요. 우리도 처음에는 성경을, 아니 지금도 그 성경은, 그 자체는, 율법이라니까요. 그렇잖아요?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도. 그러나 우리는 그걸 단단한 음식으로 먹을 수 있는 능력을 부여 받은 거지, 우리가 갖고 있는 것도, 그냥 그대로, 그렇게 그대로 율법으로 행해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간디도 그랬고, 법정도 그랬고. 그들이 제일 즐겨 읽었던 게, 산상수훈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그걸 몸으로 행해 버렸다니까요. 그러면 그게 뭐예요? 율법이에요. 그들에게 있어서 그 성경은! 그걸 뭐라고 그래요? ‘젖’이라고 그래요. 히브리서 5:11절.
(히브리서 5:11-14)
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그 말을 너희들에게 전해 줘야 되는 거야. 내가. 뭐에 대해서? 멜기세덱이 뭔지에 대해서. 그런데 너희가 듣지를 못하기 때문에, 너희는 내가 멜기세덱을 설명해 줘도 못 알아들을 거라고 이야기를 해요.)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하나님의 말씀의 그 초보(初步), 시작이 뭐예요? 율법이란 말이에요.)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의(義)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를 구원 받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어요? 없어요? 못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멜기세덱이 뭔지도 모르는 거고, 그들은 ‘어린아이’라 칭함을 받는 이들이에요.)
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선악이 뭔지, 그걸 하나로 아는 자들이라는 거예요. 누구는? 장성(長成)한 자들은. 그렇지 못한 자들은 그걸 끝까지 둘로 나누어서, 자기들이 그 선악의 주체가 되어, 그 이 세상에 그 아담들의 수준, 보편적 아담들의 수준으로, 그걸 분별(分別)할 거라는 거죠. 그러나 장성한 자들은, 그 선악이 뭔지 그들은 하나로 알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젖을 먹고 있는 자들은, 말씀을 감당할 수도 없고, 듣는 것이 둔하여, 그 말씀을 의의 말씀으로 경험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가 젖을 금하지 않아요. 심지어 자기도 그 말씀을 젖으로 준 적이 있다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렇게 주죠. 저도 지금 이 성경을 이 아래의 말로 전한단 말이에요. 사실은 이것도 그냥 젖일 뿐이에요. 그걸 들을 귀가 있는 이들이 단단한 음식으로 받아 들여 먹는 것일 뿐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그 젖을 떼야 돼요. 말씀을 떼야 된다는 게 아니라, 젖의 수준에서 이제 그것의 진의를 단단한 식물, 밥으로 먹을 수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게 젖을 떼는 거예요.
자, 그러면 젖은 율법이고, 단단한 식물은 진리네요, 그죠? 그래서 성경이, 밥을 먹지 못하는 자, 젖만 먹는 자는 어린아이다, 그러는 거예요. 그 단어가 ‘네피오스’예요. 그 ‘네’라는 부정모어하고 ‘에포’라는 단어가 ‘텔리’거든요. ‘말하다.’ 그러니까 어린아이 라는 단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뜻이 뭐냐면? ‘그 말을 하지 못하는 자’라는 뜻이에요. ‘그 말을 하지 못하는 자!’ 왜? 그게 뭔지를 모르거든요. 젖만 먹어서. 그냥 율법으로만 먹어, 율법으로만 말하는 걸, ‘그 말을 하지 못하는 자’라고 그래요. 그걸 어린아이라고 그래요. 그 말을 하지 못하면, 그건 장성한 자가 아니죠? 장성한 자는 반드시 그걸 진리로, 밥으로 먹고, 그 말을 해야 돼요. 그걸 ‘장성한 자’라고 그래요. 그걸 그리스도의 영을 자기 안에 가진 자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라고 하는 거예요. 에베소서 4장 13절 보세요.
(에베소서 4:13-14)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아들로’예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되면) 온전한 사람(이 된다 그러죠? 그게 온전한 사람이에요. 아니면 반쪽이 없는 자, 엉뚱한 반쪽을 갖고 있는 자, ‘하마르티아, 죄인’이란 말이에요. 아니면.)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흉내 내어, 비슷하게라도 살라는 말이 아니라, 너희들이 믿고 아는 것,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아는 것을, 하나로 믿게 되면, 갖게 되면, 그게 온전한 사람이 되는 거고, 그건 그리스도의 영, 그걸 마음으로 가졌다는 얘기네요, 그죠? 그러면 그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죠? 그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 ‘장성하다’라는 게 그거였잖아요? 어린아이들의 반대, 그 말을 가졌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란 자가, 그 자란 말이에요, 그것이요. 예수의 흉내를 내어서, 뭐, 온유와 절제와 사랑과 이런 걸 행하면서 사는 게,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는 게 아니라.)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이게 뭐예요? 젖이죠?)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어린아이 때는, 항상 그 궤술 그 유혹에 빠져요. 왜? 그게 우리가 하기 쉬운 수준의 것이거든요, 그것이. 모든 보편적 인간들이 아담들이 가치라고 여기는 거니까. 그런데 어린아이가 아니고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이른,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된 다구요? 흔들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렇게 성도는 율법으로 주어진 그 하나님의 말씀, 그 젖을 진리의 밥으로 먹고, 어린아이 네피오스 그 말을 하지 못하는 자의 자리에서 벗어나서, 의의 말씀을 경험하여, 그것을 전하는 자의 자리로, 옮겨 가야 되는 거예요. 이렇게 의의 말씀을 경험하여, 그걸 전하는 자가 되면,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걸 ‘멜키 싸데크, 멜기세덱’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건 고유명사가 아니에요, 여러분. 일반 명사란 말입니다.
그 멜기세덱이 뭐냐면? 창세기부터 나오잖아요, 그건? 어떤 주석서에도 그걸 설명해 놓은 데가 없어요. 그냥 두루 뭉실하게. 읽어도, 이게 무슨 소린가? מלכּ - צדק H4442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게 ‘מלרּ 말라크’라는 단어와 ‘צדק 짜다크’라는 단어의 조합이에요. ‘ מלרּ + צדק’ 이게 무슨 말이냐면, 여기다가 하나만 더 넣으면 ‘מלאך 말라키,’ 말라기 있죠? 성경 말라기에요. 이게. 말라크가 뭐냐면 ‘하나님의 사자’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거죠, 그죠? 대언자, 말라크 단어 자체. ‘짜다크’는 여러분 잘 알잖아요? 의(義)라는 뜻이에요.
그러면 의(義)의 말씀을 올바로 깨달아 전해주는 자가 되면, 멜기세덱, ‘말라키 짜다크’가 되네요. 그런데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자는, 절대 이게 뭔지 모르겠죠? 전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면 창세기에 나타난 멜기세덱은 뭐에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祖上)입니다. 믿음의 조상인데 그가 의(義)가 뭔지 몰랐어요. 그리고 씨가 뭔지도 몰랐습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에게 멜기세덱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어요. 그 분은 하나님이었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318명인가 몇 명을 데리고 4개국 연합군을 쫓아가서 이기고 옵니다. 그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 집에서 키우는 그 가솔들, 종들, 호미, 뭐 지팡이 이런 거 들고 가서, 전차를 갖고 있는, 그 앗수르를 비롯한 그 어마어마한 그 4개국 연합군을 물리친 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렇죠? 기드온의 300 용사 똑같은 거예요. 185000 앞에 300명이 어떻게 말이 되냐고요. 발로 꾹 밟아도 그냥 다 죽는 건데, 그거는.
그게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의 전쟁은, 너희들의 능력과 너희들의 힘, 너희들의 지혜를 사용하여 하는 게 아니라고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일부러 하나님이 다 짤라 버리고, 300명만 남긴 거예요. 그리고는 아브라함에게 318명 데리고 쫓아가라고 한 겁니다. 이겼어요. 전리품을 갖고 왔어요. 그런데 멜기세덱이 나타나더니, 포도주와 떡을 들고 나타납니다. 뭡니까? 예수의 살과 피! 진리의 말씀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네가 승리를 한 유일한 근거는 바로 그 진리의 말씀에 의한 것이라는 거예요. 네가 뭘 갖고 가서 싸웠냐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이 그 말을 알아듣는 믿음의 조상의 모형으로 거기서 행동을 하는 거예요. 어떻게? 십(10)을 하나로 드리죠?
그걸 성경이 뭐라고 쓰냐면, ‘마아쉐르’라고 쓰는데요. 이게 무슨 말이냐면, ‘עש 마쉐르’가 십(10)입니다. מ 이거는 진리의 말씀이죠? 이 10, 열이라는 계명이잖아요, 이거는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칠(7)이라는 안식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열(10)을 주시는 거잖아요? 그래서 십계명을 주신다 말이에요. 안식이 뭔지를 설명하기 위해. 율법을, 젖을 먼저 주신다니까요. 그런데 이 십(10), 이걸 진리로 완성을 해버리면, 그걸 뭐라고 그래요? ‘마아쉐르, 십일조’라고 그래요.
나는 한국말 십일조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하여튼 이렇게, 십분의 일을 내는 것, 이런 뜻으로 쓰인 것 같은데 십일조가 그런 말이에요? 진짜로요? 그런데 원어의 뜻은 뭐냐면, ‘열(10)을 그가 진리로, 하나로 알았다’는 거예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걸 받으시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멜기세덱은 뭐냐면, 그 진리를, 율법 안에 담아 있는 그 진리를 깨달아, 그걸 전달해 주어, 그 십(10)이라는 율법을 하나로 그가 깨닫게 만들어, 그를 하나님 것으로 취하는 자들을, 멜기세덱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젖만 먹는 율법만 아는 그들에게, 어떻게 이 멜기세덱을 설명하냐는 거예요. 그게 히브리서 5장의 이야기라니까요. 그러면 그 십일조라는 걸, ‘아, 그러니까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그리고 또 야곱이, 십일조 했죠? 그렇게 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소유에, 소득에 십분의 일만 드리면 되는 거구나’하고 그것만 열심히 드리면 그게 뭐예요? 그걸 ‘파라볼레’라고 한다니까요.
그러니까 한국 교회에서 이 부분을 건드리면, 금방 파르르 떨고 여기저기서. 난리가 나요. 전 세계에서 십일조를 이렇게 열심히 하는 나라는 한국 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렇게 커진 거예요. 한국 교회가. 그 돈으로. 성경은요, ‘너희들 그런 식으로 십일조를 하면, 내가 너희에게 화 낼거야’라고 이야기 한다니까요. 오히려. 그 ‘마아쉐르’라는 건, 그 십을 진리로 깨달아 알아, 네가 십일조! 하나님이 받는 바로 ‘마아쉐르’가 되는 거지, 그냥 그거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그냥 너희들이 갖고 있는 것에 십분의 일을 나한테 계속 드리면, 너희들이 그 희생제사 드려라 라는 말을 듣고, 그냥 everyday 희생제사만 드리는 그거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그 제사는 하나도 안 하면서, 마아쉐르는 계속 해. 왜? 여기서 그렇게 계속 가르치고 있거든요. 그게 없으면 교회는 운영이 안 돼. 그렇다고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것보다 더 하세요, 우리는요. 내가 이렇게 까지만 이야기 했더니, 그냥 헌금이 반으로 뚝 떨어졌어! 말라기 3장 8절 보세요.
(말라기 3:8-13)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을’이에요. 하나님을 도적질하는 게 뭔지 한 번 보세요.)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나의 것이 아니에요. 나를)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주를)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그런데 내가 말해줄게. 너희가 나를 도적질한 게 뭐냐면? 너희가 지금 하고 있는 십일조와 헌물(獻物)이다. 헌물이라는 건 제사 때 드린 제물(祭物)이라는 뜻이에요, 이게요. 하나님이 화가 나서 이야기를 해요. ‘말라키’ 그 의(義)를 전하는 그 사자의 말을 빌어, 하나님이 말을 하신다니까요. 구약의 마지막에. ‘화났다 나~ 너희가 어떻게 나를 도적질 하니?’ 우리 산상수훈에서도 ‘도적질 하지 말라!’ 있었잖아요. 십계명에도 ‘도적질 하지 말라!’가 있고. 그런데 그 도적질을 뭐라고 그러냐면, 하나님이. ‘우리가 언제 주를 도적질을 했습니까?’ 이야기를 할 텐데, ‘내가 가르쳐 줄게. 도적질! ‘너희가 나를 도적질 했다’라는 게 뭐냐면, ‘마아쉐르’하고 헌물이야. 십일조라는 것과 헌물이! 너희가 행하는 그것이 지금 나를 도적질 하는 거야!’라고 이야기를 하세요. 9절.)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나를)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참된 진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봐! 그 십일조가 뭔지를 올바로 깨달아서, 그걸로 나의 집을 채워 봐! 그러면 나의 집이 진짜 양식으로 가득 찰 거야~. 이런 말이에요. 나의 집에, 그 성전이죠~)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그걸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십일조! 십의 일의 소득을 드리면, 내가 너희에게 몇 배나 튕겨서 복으로 주게 이 말이 아니라, 너희가 온전한 십일조가 뭔지를 알아, ‘마아쉐르’가 되어, 그것으로 내 성전, 내 집을 채워 버리면~, 지금은 엉뚱한 십일조로 내 집을 채운다는 거죠? 그런데 거기에는 양식이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지금요. 그건 내가 너희에게 먹여주려고 하는, 그 양식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율법의 지킴은! 너희들이 진짜 내 집을 양식으로 채우는 방법을 가르쳐줄게! 뭐가 양식인 줄 알아? 그 십일조, ‘마아쉐르’가 갖고 있는 그 진의를 너희가 알고, 너희가 그것이 되어서, 나에게 오면, 그것이 바로 양식으로 내 집이 가득 차는 거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게 바로 복이라는 뜻이에요. 아니, 복은 그것 밖에 없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왜 황충을 내리겠느냐 라는 거예요. 황충은 메뚜기죠. 메뚜기는 곡식을 전부 먹어서, 기근을 오게 하는 곤충이란 말이에요. 그렇게 되면 너희들에게 왜 메뚜기가 내려가서, 너희의 양식을 먹어 치우겠냐는 거예요. 너희의 양식은 풍성해질 거라는 것입니다. 그게 너희의 양식이니까)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포도나무는 뭐예요? 여러 개가 하나가 된 게 포도잖아요? 포도는 한 송이, 하난데, 그 안에 여러 개를 갖고 있죠. 율법을 여러 개의 율법을 하나로 가지면 포도나무 과실이에요. 그것이요.)
12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13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게 뭐예요? ‘도적질’이라는 거예요. 완악한 말, 율법이에요. 잘못된 말, ‘다이모니온,’ 너희가 나의 말을 완악한 말로 받아서, 그렇게 엉뚱한 것만, 그렇게 행하는 게, 나를 대적하는 거라는 거예요. 그렇게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했습니까? 라고 한다는 거예요. 이게 율법의 결국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라키’를 마지막으로 구약이 닫히는 거예요.)
그래 놓고 그 어두움이 이제 빛으로 드러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 일을 하시는 거예요. 진리이신 그분이 오셔서. 그게 십일조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십일조 못했다고 너무 부담 갖고 그러지 마세요. 하나님은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라, 네가 그 십의 하나가 되어서 내게 오면, 나는 그걸로 족해~,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의 금식이라는 건,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먹는, 그 보편적 아담들의, 그 영민한 의지와 노력을 중단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먹으라는 그런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에 그 젖을 뗀 자들 그들의 상태를 ‘다맘,’ ‘고요하다, 그치다, 멈추다.’ 이렇게 쓰세요. 보세요. 시편 131편 2절.
(시편 131:2)
2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젖을 떼면, 애들이 평온해요? 젖 떼면, 애들이 불안해 가지고요 어쩔 줄을 몰라 하죠 그래서 엄마들이 애들 젖 뗄 때 젖에다가 쓴 걸 발라 놓죠. 떼려고요. 안 떨어질려고 한다니까요. 그런데 젖 뗀 자의 평온이 뭐에요? 젖을 뗀 자들은, 그 때에서야 자기들이 열심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 행하던 것을, ‘다맘,’ 그친다는 거예요. 그걸 ‘평온’이라고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삭이 젖 뗄 때 잔치를 벌이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약속의 자손이 젖을 떼면 잔치인 거예요, 그것이요. 젖을 뗀 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잔치를 벌였겠어요? 그 말을 써 놨겠어요, 거기다가? 자 그걸 그치게 된 자들 그 율법의 행위(行爲)를 그치게 된 자들을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 자, 신령한 자 ‘푸뉴마티코스’ 등으로 호칭하는 겁니다. 그들이 그 율법의 젖을 더 이상 안 먹는, ‘금식(禁食)하는 자’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이 16절이 금식할 때 슬픈 기색을 띠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하 금식하면서 아 괴로워!’ 이런 표정 짓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 ‘슬픈 기색’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스큐드로포스’라는 단어인데요. 그 ‘스큐드로스’라는 헬라어와 ‘옵타노마이’라는 단어의 조합(組合)이에요. 그러니까 스큐드로스가 무슨 말이냐면, ‘어두움, 그림자, 덮여진’ 이런 뜻이에요. 그 단어가 쓰인 곳을 한 군데 보시면 조금 이해가 쉬우실 텐데~ 누가복음 24장 15절.
(누가복음 24:15-17)
15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16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슬픈 빛을 띠고’ 이게 똑같은 단어에요. 그런데 이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나타났더니, 못 알아 봤어요. 그러면 부활하기 전의 예수는 알아 봤을까요, 못 알아 봤을까요? 당연히 알아보죠. 이들은 지금 눈이 어두워서, 육으로 죽고 진리로 산 그 분을 못 알아보는 자로 나타나는 거예요. 지금 이들이요. 이들이 삼년 반 동안 같이 다녔던 그 예수를 왜 못 알아 봐요? 지금 예수님이 여기에 뭐 깨끗이 장동건처럼 변해가지고 나타나서 못 알아 본 게 아니라니까요. 아니면 그 동안 못 씻고 다니다가 깨끗이 씻고 와서, 못 알아 본 게 아니라~, 육으로 죽으시고 영으로 살아나신, 다른 존재, 그렇게 부활 하셨기에, 육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그 진리를 못 알아본다는 뜻이에요. 이게 그래서 그들이 상태가 뭐라고 그래요? ‘저희가 눈이 어두워서’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 많은 제자 중에 정말 지독한 근시 두 명이 여기에 나타난 게 아니라, 볼 눈이 없어서, 그 예수를 이제 진리로 살아나신 예수를 알아 볼 수 없는 그들, 그들에게 예수님이 당신이 하신 말씀을, 풀어 줬다고 그러잖아요. 그랬더니 마음이 뜨거워져, 그들이 비로소 알아 봤다고 그런다니까요. 그런데 그걸 알아보기 전에, 그 어두운 상태의 그들을 ‘스큐드로스’라고 그래요. 어두운 자들! 슬픈 기색!
그러면 너희들 금식할 때, 그 금식이라는 걸, ‘스큐드로포스’로 보지 말라는 게, 무슨 말이에요? 진리로 보지 못하고, 너희들 표피적으로 껍데기로 보지 마! 이런 말이에요. 슬픈 기색을 띠지마 이게 아니라, ‘너희들 금식이라는 걸 스큐드로포스 적인 것으로 보면 안 돼~’ 이런 말이에요. 그런데 그걸 ‘스큐드로포스’적으로 보면, 엄한 밥만 굶는 거예요. 외식(外飾)하는 자들은, 그 금식이라는 걸 외식하는 자들은 앞에 구제에서도 나오고 기도에서도 나온 거예요. 그들은 금식이라는 걸 ‘스큐드로포스’적 어둡게, 그리고 표피적으로만 본다는 거죠. 너희들은 그렇게 그걸 보면 안 된다 이런 말인 거예요. 다시 본문 16절 보세요.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슬픈 기색, ‘스큐드로포스’적인 것으로 보지 말아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이건 사람에게 자랑 하려고가 아니라 사람들이 보편적 아담들이 그냥 인식하는, 나타난 것으로 이런 말이에요. 나타난 것으로 얼굴을 흉하게 한다. 얼굴! ‘프로소폰’은 ‘판임’이라는 단어의 헬라어 역본이라고 그랬죠? 그러니까 판임은 뭐죠?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진리를, 보이는 것으로 이렇게 나타낸 준 것을, ‘판임’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그걸 얼굴이라고 그러잖아요. 얼굴이라는 단어 자체가 얼꼴이라는 단어죠 그죠? 얼, 영의 꼴, 모양 그걸 얼굴이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판임’이라는 건 그 영이란 것을 어떤 모양으로 나타내 주면 ‘판임’이라고 그래요. 그걸 헬라어로 바꾸면 ‘프로소폰’인데 이걸 얼굴이라고 번역했단 말이에요.
그 얼굴을 여기서 ‘흉하게 하다.’ ‘아파니죠.’ 이게 ‘알아보지 못하게 하다’라는 뜻이에요. ‘알아보지 못하게 하다. 가치 없게 만들다’ 이런 말이에요. 흉하게 하다는 게 아니라~. 그러면 너희는 그 말씀을, 그 금식이라는 걸 표피적으로만 보아 그걸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거야! 진짜 그 가치를 없게 만들어 버리는 거야! 이런 말이에요. ‘금식할 때 얼굴을 흉하게 하지 마!’ 이런 말이 아니라.
그들은 이 역사 속에서는 좋은 것, 자기들이 원하는 걸, 상으로 받지만, 그게 자기만족이고, 자기자랑이고 그런 것들이에요. 자기 성취감! 상으로 받지만. 그 나사로의 대척점에 있던 부자가 ‘너는 살았을 때, 역사 속에서 좋은 거 다 받잖아~’ 그게 상이에요. 인간들이 추구하는 상. 그러나 하늘이 추구하는 상과는 ‘아페코, 아주 무관한, 멀리 떨어진 자’가 되는 거야 이런 말. 상을 이미 받았다, 이 말이에요. 너희들이 원하는 상으로 받을 거야. 그러나 하늘의 상과는 아무 상관없는 자가 되는 거예요. 하늘의 상은 생명(生命)이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올바른 금식을 할 수 있는가? 17절이 그 얘기에요.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기름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요? 얼굴을 씻어도 그냥, 그냥 그 모양인 사람들도 있잖아요. 조금도 깨끗해 보여지지 않는 그런 분들. 자 얼굴 역시 ‘프로소폰’이에요. 그 얼굴, 말씀의 표피적인 부분, 그걸 어두운 상태로 보지 말고, 깨끗이 씻어 봐! 이런 말이에요. ‘깨끗이 씻어 봐!’ 그러면 어떻게 알 수 있다는 거죠? 머리에 기름을 바를 수 있대요. 그걸 금식이라고 그래요. 그럼 그 머리는 뭐예요? 머리카락이라고 안 그랬습니다. 머리라고 그랬어요. 아니 머리카락은 머리털이라고 쓴다니까요, 성경에서도. 너희들의 머리털을 세신 바~, 뭐 이렇게 얘기하죠? 여기에서는 머리에요. 그냥. 머리 ‘케팔레,’ 머리에 기름을 바른다는 게 뭐예요? 에베소서 4장 15절.
(에베소서 4:15)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진리에요.)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이게 무슨 말인지 이젠 아시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란다는 건, ‘네피오스’의 그 자리에서 말을 못하는 자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 그리스도의 말을 하는 자가 되는 거니까)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머리니~ 머리는 누구? ‘그리스도다’라고 그래요) 누가복음 9장 58절
(누가복음 9:58)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그러면 그 머리에 기름을 바른다는 게 뭐예요?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에요. 분명히 이제. 마가복음 14장 3절 보세요.
(마가복음 14:3, 8-9)
3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기름입니다.)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케팔레’ 똑같은 단어에요.)
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그러니까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는 건, 그 예수를 장사 지낸다는 얘기네요. ‘빨리 죽으세요.’ 이렇게. ‘당신이 죽어야 일곱 귀신, 일곱, 그 완전한 악인, 나, 죄인 중의 괴수! 당신이 죽어야 내가 살아요.’ 이런 말이에요. 이거는요.)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기억하리라~. 이 여자가 행한 일이 복음(福音)이기 때문에, 그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 이 여자가 기억되리라~. 이런 말이죠.)
그러면 머리에 기름을 바르는 게 뭐죠? 성도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를 구원한 나의 예수! 그게 내 머리로 붙어 있으면 안돼요. 잘 이해하셔야 돼요. 그 예수가, 기름이 뭐에요? 진리죠? 항상. 기름으로 덧입혀진 분으로 나에게 붙어 있어야 돼요. 그걸 뭐라고 그래요? ‘그리스도’라고 그러잖아요. 여기서~. 그 머리가 그리스도라니까요.
그러면 내게 붙어 있는 그 육적인 예수가, 장사 지내지고 죽고, 기름! 그리스도! 그리스도 메시아라는 단어 자체가 기름 부음 받은 자니까. 기름 발리다, 이런 뜻이란 말이에요. 그게 그리스도로 나에게 붙어 버리면, 나의 육도 그 예수와 함께 장사 지낸 바 되는 거네요? 그러면 금식이라는 게 뭐에요? 그 율법, 선악과 패러다임 아래에서의, 노예 생활을 하던 내가, 그 예수와 함께 죽고, 그 진리가 나의 머리가 되어, 기름 발린 그 예수가 나의 머리가 되어, 나의 메시아 나의 그리스도가 되어, 내 삶의 주관자가 되면, 그걸 금식이라고 그래요. 그게 내 안의 그리스도의 영, 진리가 들어온 거라며요, 네? 그러면 그게 올바른 음식으로 먹는 거고, 율법으로 안 먹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걸 금식이라고 그래요.
주님이 그래서 ‘금식은 머리에 기름 바르는 거고, 그 ‘프로소폰’을 깨끗이 씻는 거야! 그 어두운 그것으로 그냥 보는 거 아니야!’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엉뚱하게 밥 굶고 그런 거 하지 말아요. 그냥 다이어트한다 그래요. 솔직하게. 꼭 그냥 여자들 저녁 금식한대요. 다이어트하려고 안 먹는거지, 그게 무슨 금식이에요. 예레미야 14장 10절 보세요.
(예레미야 14:10-14)
10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 발을 금하지 아니하므로 나 여호와가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고 그 죄를 벌하리라 하시고
11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12 그들이 금식할찌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 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찌라도 (번제와 소제가 금식이에요.)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멸하리라
13 이에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이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시리라 하나이다
(이 칼이라는 헤라브란 단어 자체가 물이 없어 양식을 생산할 수 없는 상태, 기근(飢饉)이란 뜻이에요. 이것이요. 가뭄, 가뭄이란 뜻이에요. 그리고 기근은 말 그대로, 그냥 물이 없어 양식을 내지 못하는 거! 염병은 ‘데라브’란 뜻인데요. 그게 ‘데베르, 다바르’ 있죠? ‘아마르’가 ‘진리, 레오 레마’를 이야기 하는 거라면, ‘다바르’는, 표피적으로 하나님이 말로 주는 것들 있죠? 그걸 ‘다바르’라고 그래요. 그 내용이 아닌, 표피적인 것으로 말해지는 것이라고 써 놓고 그걸, 염병이라고 읽는다니까요. 그러니까 그 진리를 그 내용으로 알지 못하면, 그게 너희를 죽이게 되는 건데, 그게 바로 칼, 헤레브, 가뭄이고, 기근이고, 그게 껍데기, ‘데베르 염병’이야~ 이런 겁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이 뭐라고 그런다고 그래요. ‘아니야~ 그 칼이 너희 안 죽여~ 걱정하지 마~ 그 기근이 너희 안 죽여~ 걱정하지 마~’그런다는 거예요.)
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하나님이 안 보낸 자들이 이 땅에 와서, 내가 선지자고, 내가 하나님이 보낸 자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하는 이들이 무수히 많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래요. ‘나는 그들을 안 보냈다’는 거예요.)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 (자기 마음은 두 마음이죠. 뭐 선악의 마음, ‘에피두미아’ 그거에 속으면 너희들은 칼과 기근과 염병에 망한다. ‘데베르’에 망한다.) 스가랴 7장 5장 보세요.
(스가랴 7:5-6)
5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진짜 나를 위하여 한 거냐? 그러면서 뭐라고 하는지 보세요)
6 너희의 먹으며 마심이 (그들이 금식했는데, 하나님은,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마셨다, 그래요. 너희가 오월과 칠월에 금식했다. 나를 위하여 금식한다고 했는데, 그게 진짜 나를 위하여 한 거야? 아니야! 너희를 위하여 한 거야~ 그래 놓고 그걸 먹고 마셨다 그래요.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마셨다.) 전혀 자기를 위하여 먹으며 자기를 위하여 마심이 아니냐 (너희들의 금식은? 엉뚱한 걸로 먹는 거죠? 굶어 배 터지게 먹는 거예요. 먹지 말아야 할 것으로~.)
그래서 주님이 광야 40일간 금식(禁食)을 하셨던 거예요. 이 역사 속에서는 아들이, 하늘의 아들이, 먹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모형으로 보여주신 거예요. 그리고는 당신의 양식을, 너희는 알지 못하는 양식! 이라고 말씀하셨다고요. ‘내게는 그거 있어! 난 그거 전해 주러 왔어! 너희에게 그걸로 먹이고 마시우게 하려고 왔어!’ 이렇게 이야기 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내가 떡이다! 내가 물이다!’ 그런 거예요. 내게 그 양식이 있어~
주님께서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물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뭐라고 그러죠?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는, 신부들이 금식하면 안 되지~ 그 신랑이 주는 걸 먹어야지~ 내가 신랑으로 왔거든. 그런데 신랑을 뺏길 날이 올 거야! 그러면 이 땅엔 더 이상 그걸 줄 존재가 없어! 그러면 그때는 금식하게 될 거야~ 세상은 율법만 붙들거거든~ 그때 그들은 금식하게 될 거야~ 그리고 그들이 세상이 모르는 음식으로 소통하게 될 거야~’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이에요.
그래서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먹고 마시는 것. 그 이야기를 그렇게 반복하여 하셨던 거예요. 그래서 오죽하면 별명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 주님이 뭘 그렇게 대단히 먹었겠어요? 포도주를 마셨으면 얼마나 먹었겠냐고, 나 같은 사람은 예전에 저 잠실 수영장만큼은 먹었을 거 같은데~. 아니 예수님이 뭐 그렇게 먹었겠냐고요? 그런데 왜 그런 별명이 붙었냐면 예수님은 먹이고 마시우게 하려고 오셨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실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니까 ‘저 분은 입만 열면 먹고 마시라는 이야기만 하네~’ 사람들이 이야기 한 거예요. 그거 안 먹으면 죽거든요. 아무도 안 받아 먹었어요. 하나님은 이사야를 시켜서 진짜 금식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이사야 58장 1절.
(이사야 58:1-11)
1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날려 내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 집에 그 죄를 고하라
2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 (즐겨하는 것 같지? 이런 말이에요. 날마다 나를 찾아오고,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하는 것 같이, 그렇게 보이잖아? 그리고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는 것 같지? 이런 말이에요. 그렇게 했다가 아니라.)
3 이르기를(그들이 이렇게 이야기 했대는거예요.)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너희는 금식을 한다고 하면서, 그걸 즐긴다는 거예요. 그리고는 그 금식으로 다른 이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거죠?)
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5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어떻게 풀어줘요? 진리의 말씀으로! 그러면, 젖을 끊고 진리를 먹어야 되는 거네요. 그게 진짜 금식인거네요.)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그 멍에, 율법의 멍에를 끌러주려면, 역시 젖을 금식하고 진리로 먹어야 되는 거네요.)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마찬가지죠)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아까 말라기에서 진짜 식물이 뭐라고 그랬어요? 진짜 양식, 진리의 말이지, 너희들의 완악한 말 그거 아니고)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뭘로 진리의 옷으로, 겉옷으로)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 골육을 피하여 숨으면 그들이 죽는데 왜 숨어요? 그죠? 그러나 율법을 갖고 있으면 그들을 피하여 숨는 것이 된다는 것이에요.)
8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당연하죠. 밤이 그들에 의해, 아침으로 빛이 되는 거예요.)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그게 치료하는 거죠)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보세요. 여기도 말의 이야기에요. 비진리의 그 말을 제해 버리고)
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와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진짜 양식으로 주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빛이 뭐예요? ‘오르’라는 단어 자체가 어두움이 뭔지를 나타내면, 그걸 빛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주일날 말씀드렸잖아요. 어두움의 빛, 어두움의 빛, 어두움은 빛이라는 것을 내용으로 갖고 있어요. 그런데 그 진리를 알게 되면, 그 어두움이 낮이 된다는 거예요.)
11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물이 대어진 동산이 어디에요? 하늘의 물! 그 물! 그 진리가 대어진 동산, 흙, 우리 이야기 하는 거예요.)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우리의 배 안에서 생수가 끊이지 않고 흘러난다고 그러죠. 그리고 하나님이 그걸 뭐라고 그래요? 진리야! 성령을 내가 이야기 하는 거야~ 라고 이야기하시잖아요)
어렵지 않죠? 그죠? 이 금식의 이야기를, 아 금식할 때 얼굴 흉하게 하지 마! 머리에 기름 발라! 그리고 사람들이 눈치 못 채게 해! 그러면은 상주께~. 이런 말로 보면 안 되는 거예요. 적어도 우리는요. 그죠? 그렇게 진짜 금식은, 진리의 물을 흘려주어, 식물을 나누어 주며, 벗은 자를 진리의 옷으로 입혀서,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를 꺾고,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놓아주는 거예요. 그게 젖에서 해방된 하늘의 아들들의 모습인 거예요. 은혜(恩惠)의 지평(地坪) 안에서, 그 내 육신을 포함한 물리적 시공(時空)을, 그 앞에 헌납(獻納)하는 거예요. 함몰(陷沒)시켜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와 무관(無關)한 자로 사는 거예요. 그냥. 그걸 진짜 금식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본문 17절에 뭐라고 그러냐면, 그게 사람에게 보이는 금식이 아니고, 은밀한 곳에서 보시는 아버지가 보는 금식이라고 그래요. 그러면 뭐라고 그러냐면, 그 뒤에서 아버지가 너에게 은밀한 곳으로 ‘디도미’ ‘넘겨 줄거야~.’ 진리로 넘겨 줄 거라는 거예요. 그 금식의 진의(眞義), 그 내용을. 그렇게 금식해! 그러는 거예요.
여러분, 양식이라는 단어 자체가 ‘아카라’라는 단어인데요. ‘아카라’라는 단어가 뭐냐면, 이게 ‘콜’이죠. 여러분이 잘 아는 단어. 그죠? 헬라어로 바꾸면 ‘파스’ 모든,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할 때, 모든 것, 이 모든 것이 뭐냐면 우리의 것으로 전환하여 가르쳐 주기 위해 준 것들을 다, 아래의 것으로 하나님이 그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주신 것을 전부, ‘콜, 파스, 모든 것’ 그래요. 앞에 ‘알레프, 하나님’이 붙었네요. 하나님이, 그 아래의 것으로 그 진리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준 모든 것, 그걸 소리로 주면, 그것이 바로 양식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걸(양식) 율법의 양식으로 먹고, 어떤 이들은 이걸 진리의 양식으로 먹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그걸 이 아래에서 진리의 양식으로 여러분이 먹으면, 여러분은 이 ‘호 코스모스’ 이 율법의 세상에서 금식하는 자가 되는 거예요. 다음 주에 제가 조금 보충 설명하겠습니다.
자, 여러분은 머리위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는 금식을 하는 분입니까? 아니면, 슬픈 기색을 띠며 얼굴을 흉하게 하고, 가짜 금식을 하는 분입니까? 전자(前者)죠? 그 금식 하세요. 밥 굶지 말고. 가면서 맛있는 저녁을 드시고 가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K목사님 산상수훈43편)
첫댓글 말씀을 요리 올려주시니 날마다 감사함으로 먹습니다 😍 단단한 음식&신령한 젖에 대한
원어적 설명을 읽었었는데 여기에서도 나와 약간은 다르게 보여서 ?이 생겨서요
저도 다시 공부하는 중이예요
근데 김목사님이 히브리서 5장부분은 원어해석안하시고 번역만으로 설명하신거 같기도 해요
저도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네요~~
제가보기엔 원어를 풀어보면 먼저 김목사님의 다른 강의에서 어린아이와 젖에대해 설명을 하신게 맞는데...
시편 131편2절에
“젖뗀아이”는 젖이라는 율법을 뗀 후에 평온함이 있다고 말하는것보다
말씀이라는 신령한 젖을 다먹은 후 평온하게됨이 맞을것 같네요
히브리서 5장 14절에 장성한자(텔레이오스)는 13절에 “어린아이는 된다” 에서 에이미 동사에 뒤에 붙어서 어린아이가 온전하게 되야함을 말하는 거얘요~
13절에 마지막에 에이미동사 다음에 단어가 없어요~ 그 탤레이오스(온전한다) 가 14절에 잘못 붙은거거든요~ ㅠㅠ
텔레이오스 (온전한, 장성한자)는 13절 마지막에 에이미동사 다음에 붙어서 “어린아이는 온전한자가 된다” 이렇게 해석이 되야 문장이 맞아요
김목사님도 43강에서 히브리서 5장은 원어를 해석해서 말씀하신게 아니라서 번역글 그대로 설교하셨네요
살아계셨으면 좋겠네요 ㅠ 물어보게~~ ㅠ
[비유 16강 중]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예수님이 오신 모습, 세상의 가치관으로 오시지않고 연약한 모습으로 오심)
어른에 비교한 어린아이는 겸손을 말하는게 아니라 크고작음의 구별이 없는 천국의 존재양식 즉 연약한 작은모습속에 하나님만 의존하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만이 그가 존재가되는 구원의 대상을 말씀하는것이다.
어른은 크고작음의 타락한 이 세상이 창안하고 요구하는고착된 사고체계를 갖고있는자들이다
그래서 큰자에 속하기위한 그 사고체계를 표현하기 위한것이 이땅의 전투이며 게임이다
여기에는 진정한 사랑 용서 같은것은 성립이 되지않는다
이 모습은 종교와 일상에서도 고스라니 표현된다 그 모습은 또 그 성취정도에 따라 상급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른의 그 사고체계가 아니라 의존적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건설되고 운영되며 그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 자만이 갈수있기 때문에 큰자사상과 상급론을 운운하는 어른들의 모습으로는 갈수없는곳임을 말씀하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