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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명인물 스크랩 임사홍(任士洪) .. 奸臣의 상징
박유승(박노동) 추천 0 조회 525 10.03.25 10:1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임사홍(任士洪)과 그의 아버지 임원준(任元濬)

 

 

 

 

 

 

 

 

 

 

 

 

 

 

 

 

 

                                     임원준 (任元濬) .. 임사홍의 아버지

 

 

 

 임원준(任元濬. 1445~1500) .. 이 곳의 사진은 대부분 임원준의 묘이다. 임원준의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자심(子深), 호는 사우당(四友堂)이다. 그는 10세에 글을 지어 신동이라고 불리었다.

 

 

1445년(세종 27). 世宗이 그의 兄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농장에 갔을 때, 그가 글을 잘 짓는 것을 보고 칭찬하였으며, 얼마 후 그에게 벼슬을 내렸다. 1456년(세조 2)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집현전의 부교리가 되었다.

 

 

다음해 중시에 합격하여 호조,예조, 병조, 형조의 4조 참판에 올랐으며, 1466년에는 발영(拔英)과 (登俊)의 양시에 합격하여 바로 예조판서와 의정부 좌,우참판에 올랐다. 성종시절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이 되었고, 문장에 이름을 날렸으며 풍수와 의복(醫卜)에 능통하였다.

 

 

 

 

                                               大任 그리고 小任

 

 

 

그러나 성품이 교활하고, 탐사(貪邪 .. 탐욕스럽고 사악함)하며, 그의 아들 사홍, 그의 손자 숭재(숭재)도 탐욕스럽고 간사하여 나라를 그르치게까지 되어 당시 사람들이 대임(大任), 소임(小任)이라고 하였다.

 

 

임원준은 연산군을 ?아내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성공한 후, 아들 任士洪의 罪로 관직이 삭탈되었고 곧 추살(推殺)되었다.

 

 

 

 

 

 

 

 

 

 

 

 

 

 

                                                                     

                                                                임사홍 (任士洪)의 묘

 

 

 

임사홍(任士洪. 1445~1506) ..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이의(而毅)이고 아버지는 좌찬성을 지낸 임원준(任元濬)이다. 그리고 世宗의 형,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아들 보성군(寶城君)의 사위이다

 

 

1465년(세조 11)에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校理), 도승지,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는데, 재직 중에 勳舊派세력의 대표적인 인물로 지목당하여 士林派의 공격 표적이 되었다. 1478년에는 유자광 등과 함께 파당을 만들어 횡포를 자행하고, 조정의 기강을 흐리게 한 죄로 사헌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의주로 유배 당했다.

 

 

공주가 보고 싶어한다는 이유로 곧 풀려났으나, 정권에서 소외되어 큰 활약을 하지 못하였다. 중국어에 능통하여 중국에 사신으로 몇차례 다녀 왔으며, 1496년(연산군 4), 유자광 등이 무오사화를 일으켜 김일손(金馹孫)을 비롯한 士林派를 축출하자, 이들과 결탁하여 전횡를 일 삼았다.

 

 

 

 

 

 

 

 

 

                                               임사홍의 묘에서 바라 본 아버지 임원준의 묘

 

 

 

 

 

 

 

                                       임사홍 ..  명문가 출신, 왕실의 사위

 

 

 

유자광과 함께 대표적인 奸臣으로 꼽히는 임사홍.. 그는 대단한 名門家 출신이다. 아버지 임원준(임원준)은 3정승(三政丞) 바로 아래인 종1품 좌찬성을 지냈고, 임사홍 자신은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아들 보성군(寶城君)의 사위이다.

 

 

그뿐 아니라. 임사홍의 큰아들 임광재(任光載)는 현숙공주(顯肅公主)에게 장가들어 예종의 부마(駙馬 ..사위)가 되고, 둘째 아들인 임숭재(任崇載)는 휘숙(徽淑)옹주에게 장가들어 成宗의 부마가 되었다.  

 

이렇게 임사홍은 그 자신이 王室(효령대군)의 사위일뿐만 아니라, 그의 두 아들 모두 예종과 성종의 사위가 되어, 그 일가는 왕실과 이중 삼중으로 결혼한 대단한 명문가이었다.

  

 

 

 

 

 

 

 

 

 

 

                                           임사홍도 할 말은 있다.

 

 

 

 

나라의 기생충 같은 간신(奸臣). 하지만 그들 중에는 대단치 않은 잘못을 했지만 분위기에 떠밀려 간신의 오명을 쓰고 만 경우도 있다. 또 시대의, 체제의 모순 때문에 奸臣의 틀에서 벗어 날 수 없었던 사람도 있다.

 

 

 

임사홍도 그런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임사홍은 成宗의 총애를 받던 유능한 관료이었다. 詩文과 학술에 능하였고, 중국어 실력이 발군이어서 명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큰 활약을 하였다. 서예솜씨는 당대의 으뜸이었다.  奸臣으로서의 임사홍 .. 그 시작은 이러 하였다.

 

 

 

 

 

                                임사홍과 言論의 갈등 ..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1478년(성종 9) 4월, 약간의 흙비가 내리는 "변괴(變怪)"가 생겼다. 언론 3사 (사간원,홍문관,사헌부)에서는 이 것을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여 근신해야 하며, 당분간 술을 일체 금지해야 한다는 합동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 그리 대단치 않은 변괴인데, 이제 곧 나라의 제사가 이어질 지금 술을 일체 금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는 것이 成宗과 승지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러나 언론의 태도는 강경하였다. 이 때 성종의 신임을 받고 비서실장인 도승지를 맡고 있던 임사홍이  " 약간의 흙비가 곧 천변(天變)은 아니다. 그리고 무조건 언론에서 하라는 대로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라고 발언한 것이다.  언론 3사는 곧바로 맹렬한 임사홍 성토에 들어갔다. 그의 발언은 트집 잡을 여지가 많았다.

 

 

 

술을 禁해야 한다는 요구를 반대하였으니  "퇴폐 향락 풍조를 부추겼다"는 혐의를 걸기 좋았고, 흙비의 중대성을 낮춰 보았으니 "하늘의 뜻을 우습게 알았다"고 비난하기 알맞았다. 더구나 임사홍이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 (임사홍의 아들이 공주와 결혼)은 "외척의 발호를 경계해야 한다"는 조선 정치의 원칙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自然 災害를 自然 현상일 뿐이라고  말한 임사홍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 왕조 .. 임금의 책무는 하늘의 이치를 실현시키는 것이었다. 즉, 자연재해(自然災害)의 발생은 임금에 대한 일종의 경고이며, 이 경우 왕 스스로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 실천의 방법으로는 음식의 가지 수를 줄이는 것, 정전(正殿 .. 왕비의 침실)의 출입금지, 죄수 풀어주기 등이었다. 또한 자연재해를 궁녀(宮女)들의 원한이 하늘에 미친 것이라고 생각하여, 궁녀들을 궁궐 밖으로 내 보내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조선의 재이관(災異觀)은 세상의 현상들을 천도(天道)의 실현이라고 보았다. 1478년 4월에 내린 흙비에 대한 언론 3사와 임사홍의 논쟁도 이러한 재이관(災異觀)을 바탕으로 판단하여야 할 일이지만, 임사홍은 결국 자연 재해를 그저 자연 현상으로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역시 성리학자이었던 임사홍.. 그는 자기모순(自己矛盾)을 범하였다.

 

 

 

 

 

                                               

                                                 실록의 기록

 

 

 

 

1478년 (성종 4) 4월에 하늘에서 흙비가 내리자 이를 두고 言論 3司(사간원,사헌부,홍문관)를 중심으로 한 대신들과 임사홍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成宗은 처음에는 임사홍의 주장에 동조하였고, 그를 변호하였지만, 결국 계속되는 3司의 탄핵에 임사홍을 유배보낸다.

 

 

 

 

 

                                       먼저 언론 3사의 의견을 옮겨 본다

 

 

 

흙비가 내렸음에도 禁酒令을 반대하는 임사홍의 말은, 모두 小人이 임금에게 아첨하여 기쁘게 하는 말이었으므로, 臣 등은 통분함을 이기지 못 하겠습니다. 옛 신하는 조그만 재변(災變)이 있으면 임금에게 경계하기를 告하여 몸을 조심하고 행실을 닦아서 천경(天警 ..하늘의 경고)에 답하게 하였기 때문에  재이(災異)가 사라지고 나라가 편안하였습니다.

 

 

예전에 이수(伊水)와 낙수(洛水)가 마르자 하(夏)나라가 망하였고, 양산(梁山)이 무너지자 한(漢)나라가 亡하였습니다. 나라가 위태롭고 어지러움에 미쳐 재변이 자주 일어나면, 그 임금으로 하여금 두려워 하여 몸을 닦고 마음을 살펴서 천재(天災)를 사라지게 하여도 이미 늦은 것 입니다.

 

 

그런데 이제 흙비와 화재에 대해 임사홍이 이르기를 "뚜렷이 나타난 災異가 아닌데 두려워하여 몸을 닦고, 마음을 살필 필요가 없습니다"고 말하는 것 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임사홍의 뜻은 ..반드시 백악산(白嶽山)이 무너지고, 漢江이 이미 마른 뒤에야 비로소 전하에게 청하기를 "재변이 일어났으니 가히 몸을 조심하고 행실을 닦도록 하소서"라고 할 것입니다.임사홍이 또 말하기를 "술은 먹기 위하여 마련된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크게 옳지 아니합니다.

 

 

임사홍의 말한 바가 모두 음험하고 간사하니, 그 죄를 심히 다루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가 말한 것을 보건데, 모두 나라를 망하게 하는 말로써, 총명(聰明)을 막고 덮으며 對諫을 저해하고 억제하였으니, 臣 등은 놀랍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겠으며, 그 듣고 본 것이 늦음을 한스러워 합니다.

 

 

 

 

 

                                                 成宗의 변호

 

 

 

아니다. 임사홍의 말은 비록 그와 같았으나, 그 뜻은 그렇지 아니하다. 前日에 임사홍이 말하기를 "비가 두루 흡족하게 내리어 밀보리가 무성하니 술을 금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 하였다. 때개 그 뜻은, 흙비는 뚜렷이 나타난 災異가 아니고 비가 흡족하여 보리가 잘 되었으니 술을 禁하는 법을 세우지 말도록 청한 것이고,

 

 

나로 하여금 두려워하여 몸을 닦고 마음을 반성하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니다. 또 임사홍이 이르기를 "요즘 대간에서 일을 말하는 것이 번거러울 정도로 자주 합니다"고 하였는데, 이는 대저 대간이 일을 말하면서 쉽게 함을 말한 것이고 罪를 주고자 함이 아니다.

 

 

 

 

              그러나 결국 성종은 계속되는 탄핵에 못 이기어 임사홍을 유배보낸다.

 

 

 

 

 

 

 

 

 

 

                                                         임사홍의 恨

 

 

1478년(성종 4) 약간 내린 흙비로 인한 言論 3司 (司諫院,司憲府,弘文館)와의 갈등이 빚어지자, 언론 3사는 임사홍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흙비를 천변(天變)으로 보고 禁酒令을 내리자는 言論의 주장과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주장하는 임사홍...그들의 갈등은 이렇게 시작되었지만 이로 인하여 임사홍은 무려 22년간이나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성종은 결국 임사홍을 저버리고 말았다. 당시의 가치관으로 임사홍은 바로 하늘의 뜻을 거슬린 인물 .. 그는 이 갈등으로 임사홍의 귀양살이는 22년간이나 이어졌다.

 

 

연산군이 즉위하고 6년이 지나 임사홍이 유배에서 풀려난 것은 그의 아들 임숭재(임숭재)가 연산군의 유흥 상대로 총애를 받은 덕택이었다. 그때까지 그 누구도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려 하지 않았다. 늘 말만 앞세우고 멀쩡한 사람을 간신으로 모는 선비들에게 한이 없었다면, 그는 성인이었을 것이리라.

 

 

 

                                                 임사홍의 굴욕

 

 

 

임사홍이 연산군에 의하여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도 그의 입지는 별로 좋아지지 않았다. 연산군은 그에게 채홍사(채홍사)의 임무를 맡겼다. 방방곡곡을 돌아 디니며 얼굴 예쁜 여자를 찾아내 연산군에게 바치는 채홍사 중의 한명...

 

 

이제는 노인이 되어버린 한 때의 잘나가는 文臣이자, 王室의 사위이었던 임사홍에게는 오히려 모욕적인 임무이었다. 거기에 연산군은 美女를 찾아오는 실적이 부진하자 "죽게 된 거나 마찬가지인 신세에서 구해줬거늘, 쓸모없는 늙은이가 은혜도 모르는구나"하며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기도 하였다.  

 

 

 

 

                                                  채홍사  採紅使

 

 

 

연산군이 美女와 준마(駿馬)를 궁중에 모아 들이기 위하여 지방에 파견하였던 벼슬이다. 그리하여 원래 이름은 채홍준사(採紅駿使)이었다. 즉, 홍(紅)은 여자를, 준(駿)은 말을 가리키는 것이다.

 

 

 

荒淫에 빠진 연산군은 서울의 妓女와 美녀로써는 만족치 않아 1505년에 우찬성 이계동을 전라도에, 임사홍의  아들 임숭재(任崇載)를 충청,경상도에 파견하는데 任士洪도 이때에 파견되었다. 그 뒤 연산군은 특히 白馬가 양기에 좋다고 말고기를 즐겨 좋은 백마를 구하게 하였고, 시집 가지 않은 여자들을 청녀(靑女)라 하여 士族의 미혼처녀들을 뽑기 위하여 채청녀사(採靑女使)를 전국 8道에 파견하였다.

 

 

전국에서 뽑혀온 기생은 처음 300명이었다가 1,300명으로 늘어났다, 成宗의 사위인 남치원(南致元)의 집을 함방원(含芳院)이라고 이름지어, 기생들이 머물도록 하였으며, 제안대군(濟安大君)의 집은 뇌양원(雷陽院), 見盛君의 집은 진향원(進香院)으로 이름을 지어 이 곳에도 머물게 하였다.

 

 

 

연산군은 사냥을 즐기기 위해 봉순사(奉順司)라는 관청을 설치하였고, 전국 각지에서 말을 기르는 운구(雲廐)를 두어 數千匹의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연산군은 여기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을 공신들의 공신전(功臣田)과 노비를 몰수하여 충당하려 하였고, 위협을 느낀 勳舊派들의 반감이 中宗反正의 원인이 되었다.

 

 

 

 

 

 

 

 

                                       갑자사화(甲子史禍)와 임사홍

 

 

 

 

                                               연산군 生母 윤씨

 

 

연산군의 生母 윤씨(尹氏)는 바로 성종비(成宗妃)이다. 윤씨는 질투가 심하여 王妃의 체모에 어긋난 행동을 많이 하였다는 이유로, 1497년(성종 10)에 폐출(廢黜)되었다가, 그 이듬해 사사(賜死)되었다.

 

윤씨가 폐출 그리고 사사(賜死)된 배경에는 윤씨 자신의 잘못도 있었지만, 성종의 총애를 받던 엄숙의(嚴叔儀)와 정숙의(鄭叔儀) 그리고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가 합심하여 윤씨를 배척한 것도 중요한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甲子史禍와 임사홍

 

 

 한편 연산군은 계속된 사치와 낭비로 국고가 바닥나자, 연산군은 功臣들의 재산의 일부를 몰수하려 하였는데, 이 때 임사홍은 연산군을 사주하여 공신배척의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이때 윤씨의 생모인 신씨(辛氏)가 윤씨의 폐출과 賜死의 경위를 임사홍에게 일러 받쳤고, 임사홍은 이를 다시 연산군에게 밀고하면서 사건이 확대되었다. 연산군은 이 기회에 어머니 윤씨의 원한을 푸는 동시에 功臣들을 탄압할 결심을 한 것이다.

 

 

 

 

                                                   갑자사화

 

 

연산군은 정숙의와 엄숙의를 궁중에서 죽이고, 그들의 소생을 귀양보냈다가 사약을 내려 죽인다. 그의 조모 인수대비(仁粹大妃)도 한패라 하여 병상에서 난동을 부렸으며, 그 火病으로 인수대비도 죽었다.

 

 

연산군은 비명에 죽은 어머니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폐비 윤씨를 복위시켜 왕비로 추숭하고 성종묘(成宗廟)에 配祀하려 하였는데, 신하들이 이를 반대하자 이들을 참형시키거나 유배보냈다. 그리고 윤씨를 폐비할 때 찬성한 윤필상, 이극균, 권주, 김굉필 등을사형에 처하고, 이미 죽은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남효온 등에 대하여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마다 하지 않았다.그리고 그들의 가족과 제자들까지 처벌하였으니, 수십명이 참혹한 화를 당하였다.

 

 

 

 

 

 

 

 

                                          甲子史禍의 근본적 배경

 

 

 

이 사건은 표면상 연산군의 생모 윤씨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하여 벌인 살육으로 평가할 수도 있으나, 그 이면에는 조정의 대신들 사이에 보이지 않느 알력이 작용한 결과이다. 연산군의 극에 달한 향락생활과 사치로 인하여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자 이를 제어하려는 신하들과 연산군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려는 신하들로 나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궁중세력과 훈구,사림파 중심의 부중세력(府中勢力)으로 나뉘게 되었고, 임사홍이 이러한 구도를 적절하게 이용하면서 연산군의 복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일으킨 사건이었다. 또한 임사홍은 무오사화 때 당한 원한을 갚기 위하여 연산군의 비(妃)의 오빠인 궁중세력의 신수근(愼壽勤)을 끌어들여 부중세력의 훈구파와 무오사화 때 남은 선비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옥사를 꾸민 것이다.

 

 

 

 

                                              갑자사화 以後

 

 

 

갑자사화는 이후 국정과 문화발전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사형을 받았거나 부관팜시의 욕을 당한 사람들 중에는 역사상 그 이름이 빛나는 명신과 학자, 충신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화로 성종 때 양성한 선비들이 많이 수난을 당하여, 유교적 왕도정치가 침체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또한 연산군의 비행과 폭정을 비난하는 한글 방서사건(榜書事件)이 발생하자, 글을 아는 사람들을 잡아 들여 옥사를 벌였고, 이를 계기로 한글서적을 불사르는 등 이른바 언문학대(諺文虐待)까지 자행되어 이후 국문학 발전에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임사홍은 奸臣인가 ?

 

 

 

 

연산군시절 .. 유자광(柳子光)과 함께 대표적인 奸臣으로 꼽힐뿐만 아니라 , 현재에도 유자광과 함께 간신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고 있는 임사홍..

 

 

그는 과연 연산군의 총명을 어지럽히고 나라를 망친 몹쓸 간신인가 ? 아니면 단순히 역사의 패배자(敗北者)일 뿐인가? 그는 中宗反正이 성공하고, 연산군이 ?겨난 후 길거리에서 反正軍에 의하여 맞아 죽었다. 그리고 무덤에 묻힌 뒤에도 다시 그 시신을 꺼내어 목을 베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으며, 조선이 끝날 때까지 영원히 복권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임사홍이 연산군을 충동질하여 갑자사화(甲子史禍)를 일으켜 수많은 선비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고 기록하고, 평가하고 있다. 당시 임사홍이 연산군에게 따로 생모(廢妃 尹氏)가 있음을 알리고 복수를 부추겼다고 하는데, 실록에는 연산군은 이미 즉위 당시부터 폐비 윤씨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왜 즉위 10년이 지나서야 폐비윤씨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을 처단하였는지 분명치 않다.

 

 

연산군이 급작스럽게 갑자사화를 일으킨 것은, 연산군의 방탕한 생활로 국고(國庫)가 고갈되었으므로, 이유를 만들어 大臣들을 몰아 죽이고 그들이 재산을 몰수하려고 갑자사화를 일으켰다는 견해도 설득력이있는 것이다. 임사홍이 그 일에 관여하였다 하더라도 그의 역할은 그렇게 결정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의 폭정을 임사홍의 책임으로 돌릴 여지는 별로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가 反正軍에게 죽임을 당한 이래, "어째서 연산군은 폭군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에는 "임사홍이라는 간신이 연산군을 부추겼기 때문 ..."이라는 말이 정답처럼 따라 다녔다.

 

 

잘못된 정치는 奸臣이 임금을 잘못 인도하여 빚어 지는 것..이라는 것이 유교 정치의 공식이었고, 그러한 간신의 실례로 그럴듯한 대상이 임사홍이었을 뿐 아니었을까 ???

 

 

 

 

 

 

 

 

 

 

 

 

 

 

 

                                       임사홍의 아들 ..  임희재

 

 

 

 

 임사홍은 출세를 위한 길이라면 무엇이든 서슴치 않았다. 임사홍의  아들 임희재(任喜載)는 아버지와는 달리 일찍부터 士林派의 길을 걸었다. 임희재는 일찍 金宗直의 門下로 들어가 그들과 정치적 이념과 사상을 같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희재는 무오사화 때 곤장 100대를 맞고 유배를 간다. 그가 유배에서 풀리던 어느 날, 연산군이 任士洪의  집을 방문하여, 병풍에 씌여 있는 임희재의 시(詩)를 발견한다.

 

 

 

그 詩의 내용은 " 요,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할 것인데, 진시황은 무슨 일로 그렇게 백성을 괴롭혔는지 ..."라는 글귀를 보고 연산군은 자신을 비판하는 것임을 직감적으로 파악한다. 이에 연선군이 임사홍에게 " 저 시는 나를 진시황에게 비유한 것이 아닌가 ?"라고 묻자,

 

임사홍은 " 예. 맞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임금께 아뢰올 참이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연산군은 이에 크게 노하고, 任喜載는 갑자사화 때 귀양가서 처형을 당하였다. 갑자사화를 일으킨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것이다.

 

 

아들 임희재가 처형되던 날, 임사홍은 일부러 잔치를 벌이고 흥겹게 노는 시늉을 하였다고 한다. 사람을 시켜 任士洪의 동정을 살피던 연산군은 이 소식을 듣고 그야말로 충신이러고 크게 칭찬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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