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시 선산읍 해평면 일선리. 오늘 찾아가는 곳이다. 내 기억의 해평은 몇 해전 상주에서 있었던 선배결혼식에 참석하려고 대구에서 상주를 향해 가며 스쳐지나갔던 곳이다. 그 때 차창 오른켠으로 단정한 한옥이 모여있는 마을 하나를 봤고, 옆에 앉은 이가 저 마을이 임하댐 수몰로 고향을 잃게 된 사람들의 집단 이주단지라고 말해주어 그런가보다 했던 곳이다. 일선리 입구에는 수류우향 '水柳寓鄕'이라 새겨진 큰 돌이 세워져 있다. 말 그대로 해석하면 무실 유씨가 타향에 새로 마련한 마을이라는 뜻이다. 원래 이들의 본관이 전주임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무실이라고 표현한 것은 무엇때문일까? 무실로부터 왔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무의식적 의지의 표현이 아닐까? 아니 오히려 '水柳'라는 이 한마디 말에서 결코 고향 무실을 잊지 않겠다는 결단마저 드러난다. 또 나는 이 '水柳'라는 말의 어감에서 물길따라 흘러왔다(水流)는 느낌을 받았고 그것은 무실에 사는 전주 유씨의 집단적 이주를 암시하는 듯했다. 전주 유씨가 임하댐으로 수몰되기 전에 머물렀던 곳은 임동 수곡 일대인데 전주유씨가 임동 수곡(무실)에 정착한 것은 서주석씨의 기록에 의하면 유성(중종28 1533-명종 15년 1560)때부터라고 한다. 성의 아버지 유윤선은 연산 6년(1500)생으로 원래 대대로 한성 묵사동에 세거했는데, 영주 거주 반남박씨 사직 승장의 사위가 되어 영주 처향으로 이거하였고 아들 성이 안동 천전의 의성김씨 진(청계)의 사위가 되어 다시 천전과 가까운 수곡에 이거하였다고 되어 있다. 전주유씨 수곡파는 여러 곳으로 흩어져 집성촌을 이루었는데, 그 중 무실, 박실, 한들 등이 대표적이다. 류희걸씨가 지은 [기하수류]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무실에는 수곡파의 대종가 집이 있고, 선조의 유업을 숭모하는 기양서당과 정려각이 마을 중심부에 위치하였다. 건물은 임하댐 수몰로 인하여 동편 광산기슭 수곡 이주단지로 이건하였다. 박실에는 관암위파와 수남위파가 거주했는데, 성의 사대손인 진휘의 차남 봉시가 무실서 분가해 위리에 잠시 거주하다가 이곳으로 이사 정착했기 때문에 박곡의 입향 파조가 되었고, 그 후손이 관암위파인 것이다. 뒤에 와서 성의 동생 원의 9대손인 기문이 수정재의 둘째 아들 치교를 양자하여 박실에 살게 되었고, 그의 후손을 수남위파라 하다. 박실에는 관암위파 종택인 침간정과 수남위파 종가가 있고, 삼가정이 있었는데, 후손 일부와 함께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로 이건하였다. 수곡2리 한들에는 관암위파와 용암위파가 주로 살았다. 관암위파의 파조 봉시의 차남인 관현이 한들로 분가하여 먼저 살았고, 그 뒤에 용암파 파조 지잠의 6대손 건휴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함께 살았다. 한들에는 정재(유치명) 종택과 수재(유정호)고택이 있고, 대야정·근암정·동암정과 그의 대택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해평으로 이건하였고, 다만 정재 종택은 안산의 구암산 기슭에 이건되었다"
아도화상이 창건한 도리사에 들르다 지도를 놓고 해평에 빨리 도착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가산 톨게이트에서 내려 구미로 들어가기로 했다. 물론 예전에 내가 대구에서 출발해 해평을 지났던 기억에 충실하게 따른 결정이었다. 평일 오전인 까닭인지 고속도로는 정체없이 차가 시원스럽게 나간다. 가산 톨게이트에 내려 비로소 국도에 접어들었다. 시원스런 맛은 덜하지만 국도는 언제 달려도 정감있는 길이다. 구미 외곽도로를 빠져나가 선산으로 가는 길 양 옆 논의 한창 누렇게 익은 벼는 성숙한 빛깔로 가을을 온통 뒤덮고 있다. 잎을 다 떨군 느티나무가 양옆으로 시원스럽게 늘어선 길을 한참 지나니 선산읍 안내판이 보인다. 시간이 11시 30분경이라 점심을 어떡할까를 고민했다. 일선리에 들어서면 점심무렵이어서 낯선 동네를 방문하는데 실례가 될 법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마침 도리사 ○○m라고 적힌 안내판이 눈에 들어와 도리사를 들렀다가기로 했다. 도리사는 우리나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이 창건한 유서깊은 고찰이다. 도리사를 안고 있는 태조산을 바라보며 들어가는 길은 한적하면서 제법 엄숙하고, 경건함을 준다. 주차장이라는 표시가 있는 곳에 차를 세우고, 오락가락하는 비 때문에 우산을 챙겨들고 내렸다. 오르막인 도로를 한참이나 걸었다. 주변의 참나무, 소나무 숲을 둘러보고 상수리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도 주워가면서. 도리사 앞마당에 들어서서 숨을 고르고 뒤를 돌아보니 멀리 휘돌아가는 낙동강 물줄기와 구미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내부에서 보는 도시, 특히 구미와 같은 공단지역은 삭막하기 그지없지만, 멀리 산사에서 바라보는 도시는 휘감고 흘러가는 낙동강 물줄기에 모두 적셔져 아름다운 광경이다. 날씨도 흐린데다 경내에는 관람객이 거의 없어 고즈넉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도리사도 최근 불사를 많이 한 탓인지 사찰의 옛맛을 느낄만한 공간은 줄어들고 중심부에는 선원이라는 거창한 건물 공사가 한창이다.
일선리 안동슈퍼 해평에서 차로 5분정도를 달리니 일선리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한눈에 봐도 여느 시골과 달리 단정하고 구획지어진 땅에 들어선 가옥이 자연스런 삶의 공간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었다기 보다는 계획에 의해 조성된 마을이라는 인상을 준다. 동네 입구에 차를 세우고 내리니 첫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안동슈퍼라는 간판이다. 동네 첫집인 안동슈퍼는 슬쩍 봐도 물건을 파는데 그다지 열심인 집 같지는 않다. 웬만한 시골가게보다도 갖춘 구색이 못하다. 다소 굵어진 비도 피하고 동장님댁도 물을겸 안동슈퍼로 들어갔다. 달산에서 온 김씨라는 주인 아주머니는 슈퍼앞에 쪼그리고 앉아 양파까기에 열심이다. 들어서는 두 사람을 보자 "어디서 왔니껴?"라며 먼저 묻는다. ∼니껴라는 말이 나오는 걸 보니 틀림없는 안동사람이다. 우리도 옆에 쪼그리고 앉아 간단한 인사를 나누며 동네를 찾은 이유를 설명한다. 무실로 시집온지 28년째 되었다는 아주머니는 낯선 사람과의 대화로 조금은 부끄러워 하는 듯하기도 하고 안동사람이라는 말에 반가워하는 듯하기도 한 소박한 미소를 띤 채 연신 양파껍질을 벗기면서도 이것저것 대답한다. 빗줄기가 다소 가늘어지자 동장댁을 묻고 일어섰다.
수몰 피해 옮겨 앉은 무실, 박실, 한들 사람들 해평 일선리는 임하댐이 수몰되면서 무실, 박실, 한들 등의 동네에 흩어져 살던 전주 유씨들이 집단이주를 해 온 마을이다. 86년부터 터를 다져 87년과 88년에 거쳐 이사를 했으니 어느 덧 고향을 물 속에 묻고 떠나온 지도 10년이 넘었다. 집성촌 한 부락을 고스란히 옮겼다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일선리에 이사온 사람들의 삶은 뭐가 달라졌을까? 11년의 세월은 그들에게 고향에 관한 기억도 가물거리게 만든 건 아닐까? 사실 여기나 저기나 사람 사는 법이 크게 다를 바 없이 매양 같은데, 그들의 고향은 물 속에 잠겼다는 감상에 사로잡혀 이런저런 애틋함과 안타까움을 혼자 애써 자아내고 있는 노릇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동장댁을 찾아가는 동안 주위를 살피며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졌다. 집집마다 마당엔 감나무와 석류나무를 심어 탐스럽게 익은 열매가 제 빛을 발하고 있다. 대부분의 주민이 농사를 짓는 시골이라 하지만 집 둘레가 여느 시골과는 달리 어설프지 않다. 한옥은 한옥대로, 양옥은 양옥대로 단정하고 골목 또한 널직널직하다. 보이는 문패마다 유씨성을 달고 있어 다시금 동족부락임을 확인시켜준다. 안동슈퍼 김씨 아줌마가 일러준대로 마을 초입에서 3분여를 걸어 유용희라고 적힌 문패를 찾았다. 동장댁이다. 마실 나가는 길인지 마침 나오는 안노인이 "여기가 동장님댁이지요" 하는 물음에 "맞니더. 들오소"라고 하시고 안채를 향해 사람을 부르고는 대문을 나선다. 곧 동장이 나와 우리를 사랑으로 안내한다. 아마 비가 와서 들에 나가지 않고 집에 있었나보다. 사랑에 들어서자 동행한 김복영씨와 서로 예를 갖춰 인사를 나눈다. 보통의 경우 초면에 악수나 통성명 정도 하는 게 대부분인데 깍듯이 서로 절을 한다. 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별 가구도 없는 아담한 방이다. 일선리 각 집의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가 벽에 붙어 있는 걸 보니 과연 동장댁답다. 대나무액자가 걸려있고 방 한구석에는 대학, 중용, 퇴계선생문집과 몇 권의 다른 문집이 쌓여있다. 시대풍속이나 생각이 너무나 많이 변했지만 아직도 양반의 기개와 품위를 지닌 채 사는가 보다하고 여겨진다. 설사 그 책들을 넘겨보지 않는다 할지라도 마음 한켠에 명문양반으로서의 자부심이 자리잡고 있으리라. 유용희(55)동장과의 대화는 추석이 지난 지 얼마 안된 무렵이라 성묘이야기부터 시작됐다. 추석 때 고향에 다녀왔냐는 물음에 "산소가 거겐데 어예니껴. 가지요 뭐"라며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였다. "그러면 추석에는 동네가 텅 빌세요"하니 "예. 추석엔 동네가 텅 비고 설엔 엄청시리 모이니더"하며 주고받는 말이 건조하기 짝이 없지만 안동 사람에겐 익숙한 말투다. 퉁명스레 툭툭 던지는 듯 해도 관심과 정을 담은 안동 사람들의 말이다. 현재 일선리는 모두 80가구가 살고있다. 이중 타성은 5가구이고 나머지는 모두 유씨이다. 이들은 무실, 박실, 한들, 맛재, 용계에서 이주해 왔는데 박실에서 1집, 맛재에서 3집, 용계에서 6집이 왔고 나머지는 모두 무실에서 왔다. 비록 고향은 물에 잠겼지만 씨족이 함께 나와 마을을 이루고 살면서 상실감을 어느 만큼 상쇄시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터전을 옮겨 온 이들의 삶도 그리 녹녹지는 않았다. 안동과 달리 양반문화라고 할 것이 없는 구미인근이지만 전주 유씨가 양반이라는 사실은 다 알고 있어 사소한 행동 하나 하나를 오히려 조심하며 지낸다고 한다. 안동에서야 장날에 시장에 나가 아는 이들끼리 술 한 잔 나누고 조금 풀어진 모습을 보여도 다 아는 이들끼리 허허거리면서 묻혀질 일들이 여기서는 꼬투리가 되기 일쑤니 행여 책잡힐까 더욱 조심하는 것이다. 늘 주변사람들의 이목을 생각하고 마음속에 더욱 삼가고 조심하는 마음을 가진다고 한다.
맹 고향은 거기래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바깥의 빗줄기가 더 굵어진다. 안채에서 커피를 끓여 왔다. 집에 오는 이를 그저 보내지 않고 뭐라도 대접하는 것이 우리네 풍습이다. 올 가을에 비가 자주 오는데 농사에 큰 피해는 없냐고 물었더니 다행히도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이주할 당시 정부로부터 지급 받은 동네 토지가 모두 84ha인데 처음엔 전부 백사장이었다고 한다. 정상소출까지는 약 3년이 걸렸는데 일선리에서 농사지은 지 3년째 되는 해가 지금껏 제일 많은 소출을 낸 해라고 한다. 다른 밭작물이나 참외 같은 것도 재배하지만 주로 벼농사를 하는데 안동과는 수확량이 비교도 안될 만큼 월등하다고 한다. 유동장의 경우 안동에서는 일년에 보통 나락 200두 정도를 추수했는데, 여기서는 1천두 이상 추수한다고 한다. 무엇보다 충분한 일조와 물의 공급이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먹고사는 형편이 나아졌지만, 맹 고향은 거기래요" 라며 동장은 말을 잇는다. "종가, 서당, 묘소 잊어 불 수가 없지요. 눈감으면 안동 간다 생각하면 되요. 이승은 객지에서 그냥 그냥 보내고 저승 가서 고향가지요" 그래서인가. 이곳에 이주하고 열 세분 정도의 노인이 돌아가셨는데 산소는 전부 고향에 만들었다고 한다. 말 나누는 중에 이웃 할머니가 오시자 동장은 "아지매, 언제 오셨디랬니껴?" 라고 인사를 건네며 비 오는데 고구마는 나중에 캐라, 들어와 앉으시라 권하는 말이 살갑게 들린다. 여기 와서 변한 게 있다면 뭐냐는 물음에 동장이 지게 벗은 것이라고 대답하자 셋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한바탕 소리내어 웃었다. 무실에서야 산비탈 비탈마다 농사를 지어야 했으니 지게를 지고 수 없이 왔다갔다 해야 했겠지만 해평 들이야 그냥 시원스레 펼쳐진 농토니 지게 벗은 홀가분함이 오죽했을까 싶다. 마당 한 켠에 제법 큰 감나무가 있어 감나무도 함께 이사왔느냐고 묻자 이사 와서 시장에 나갔다가 뭔지도 모르고 사다 심었는데 단감나무라며 갈 때 두어 개 따가라고 권한다. 다음에 다시 한 번 더 찾아보기로 하고 동장댁을 나섰다. 날씨가 많이 흐려 사진 찍기도 마땅치 않고 해서 동네나 한 번 살피고 이 주일 후쯤 다시 오기로 했다. 마을 앞으로 저 멀리 낙동강이 보인다. 일선리에 사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흐르는 낙동강을 보며 망향의 아픔을 조금씩 떠내려 보낼까? 아니면 그들이 처음 터전을 내렸던 물 고을(무실)이라는 마을이름에서부터 임하댐으로 인한 수몰, 그리고 멀리 이주해온 곳까지 결국 낙동강을 떠나지 못한 끈질긴 물과의 인연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일까? 지금까지 고향을 떠나본 적도 없고, 가슴 한켠에 묻어야 하는 망향에 대한 아픔도 없는 나로서는 그들의 깊은 속내를 어찌 짐작이나 하겠는가? 그러나 강산도 변한다는 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아프게 키워가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심사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로 유유히 흘러대는 무심한 낙동강을 보며 일선리 첫 방문을 마무리지었다.
문화재로 지정된 고옥 10여채 두 번째 일선리 가는 날. 역시 날씨가 좋지 않다.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고 일기예보에서도 비 소식을 전한다. 하필이면 일선리 가는 날마다 날씨가 이 모양이냐고 두어 마디 중얼거리며 길을 떠났다. 지난 번에 돌아오면서 가까운 길을 알아두었다가 이번엔 그 쪽을 선택했다. 풍산에서 예천 풍양, 의성 단밀, 상주 낙동을 거쳐 가는 길이다. 이번엔 오래된 흑백사진을 한 장 들고 간다. 사진속의 주인공은 두 할머니. 방에 앉아 밖을 내다보는 두 할머니는 고부지간이다. 김복영씨가 86년 임하댐 수몰을 앞두고 수몰지역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며 찍어 놓은 사진 중에 하나다. 사진 속의 시어머니인 호지말 할머니는 지난 번 일선리에 갔을 때 여쭈었더니 100수를 넘기고 돌아가신지 10년 가까이 된다고 했다. 그 며느리인 다내실 할머니(78)는 일선리에 산다고 들어서 이번엔 할머니도 찾아보고 사진도 전해줘야 한다면서 챙겨놓은 것이다. 천천히 달려 거의 2시간만에 일선리에 도착했다. 바로 전날 밤에 비가 와서 나락 말린 것을 다 적셨나보다. 골목마다 나락 펴말리기에 일손이 바쁘다. 넓은 골목이지만 아예 차를 못 들어가게 하고 사람 다닐 길만 내고서는 나락을 편다.
지난 번에 한 번 봤다고 벌써 얼굴이 익숙하다. 나락을 펴고 있는 안동슈퍼 주인아줌마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비가 와 가지고 나락 말린 것 다 버렸지요"하고 걱정스레 물으니 장화를 신고 나락을 펴느라 왔다갔다 하면서 "글쎄 말이래요. 싹 다 나게 생겼니더" 하며 속상해 하였다. 오늘은 우선 정자와 문화재로 지정된 고택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일선리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이 10여채이다. 모두 안동의 집을 고스란히 옮겨 새로 지은 것이다. 마을의 위쪽에 자리잡고 있는 정자와 제사를 찾아가니 대문이 모두 잠겨있다. 안내판도 대부분 집 안 마당에 설치되어 있어 바깥에서는 무슨 집인지 달리 알 방법이 없다. 미리 연락해 놓지 않아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없으니 담장 밖에서 이리저리를 기웃대며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문화재 지정가옥이기는 하지만 역시 사람이 살지 않아서인지 부분적으로 훼손된 곳도 있고, 무엇보다 사람이 집에 머무르면서 풍기는 온기와 윤기가 없다. 옛날 한옥이 멋스럽긴 하나 생활하는 데 여러 가지 불편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겨울에 난방 문제는 심각하다. 하지만 이런 집들이 껍데기만 남아 옛날의 영화와 자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도 여전히 사람이 사는 공간으로 활용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사람이 사는 거주공간일 때 집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박제화된 집은 이미 집으로서의 생명은 끝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저 옛 사람들이 살았다는 흔적을 쉽게 지울 수 없게 하는 시각적 기록이라고나 할까. 그렇지만 편의에 길들어진 지금의 우리 삶은 운치있는 우리의 옛집을 집다운 공간으로 재활용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 생각만큼 뾰족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13년전 고향을 마음에 품고 있는 다내실 할머니를 만나다 사진 속의 다내실 할머니댁을 찾아 나섰다. 낯익은 동네 사람의 얼굴이 아닌 탓인지 보는 이들마다 "어디서 오셨니껴" 하며 인사반 심문반의 안동식 수작을 건다. "안동서 왔니더"라고 대답하면 "안동서요? 안동 워디서 왔니껴" 하며 반색을 하고 되묻는다. 두 번 째의 물음은 겉보기와 달리 이제 심문이 아니다. 각기 자기 안에 감추어둔 고향냄새를 더 가까이 확인하려는 절차인 것이다. 바구니에 몇 가지 풀뿌리를 담아 가는 아주머니께 사진을 보여드리며 할머니를 아느냐고 물으니 "의인 할매(다내실 할머니의 또 다른 택호. 후처로 들어온 그는 진성이씨로 친정이 의인이지만 택호는 전처의 것을 그대로 쓰고 있다)네요." 하면서 집을 가르쳐 주겠다고 한다. 때 마침 앞에 할머니 두 분이 걸어오고 있었다. 두 분 중 한 분이 우리가 찾던 다내실 할머니였다. 13년 전 사진인데도 불구하고 한 눈에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사진보다 그다지 늙지 않았다. 할머니께 사진을 보여드리며 "기억나세요" 하니 "이게 워디서 났니껴" 하며 참으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한사코 집으로 가자고 권하면서 가던 길을 되돌아 당신의 집으로 향했다. 아마 두분 할머니가 함께 이웃에 점심 대접받으러 가는 길이었나 보다. 다내실 할머니와 함께 있던 영양 도개에서 온 한양 조씨 할머니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어떻게 안동에서 왔냐며 예기치 않던 손님이 못내 궁금한 모양이었다. 김복영씨와 몇 마디 인사를 나누다가 김복영씨의 선친이 누구인지 알게 되자 먼 사이가 아니라며 팔을 부여잡고는 "에구, 이래 보이 희안타. 반갑다" 하시며 눈시울까지 붉히신다. 알고보니 김복영씨 할머니와 도개 할머니는 4촌자매였다. 도개 할머니가 이래저래 일가의 안부를 묻고 놀라워하는 동안 다내실 할머니는 사진을 한참이나 들여다 보며 "에구, 이게 도대체 워디서 났니껴?"하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어느새 다내실 할머니의 눈가가 발갛게 젖어들었다. 사진 속의 호지말 할머니를 가리켜 "우리 시어머니시더." 하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김복영씨가 사진 찍을 때의 상황과 그 무렵의 이야기를 하자 다내실 할머니의 붉은 눈시울은 기어이 눈물로 반짝거렸다. 무디고 어둔한 손이었지만 사진 속의 물건 하나 하나를 그녀의 기억만큼 정확히 짚어나갔다. 자신의 손때가 베어있는 사진 속의 제봉틀, 반짓그릇, 밥솥은 13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게 하여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아픈 기억마저 이제는 차라리 아름다운 것들인양 생생하게 재현시키고 있었고, 할머니는 자신이 불러낸 몽환 같은 기억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일그러진 표정은 괴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향이 그리워도 그리워하지 않는듯이 무표정하게 살았던 자신의 삶에 대한 원망과 그것을 훌훌 털며 자유롭게 그리워하는 지금의 감정이 교차하며 만들어낸 부자연스러운 표정이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자신의 감정을 쉽게 추스리지 못한 당혹감을 감추기 위해 그렇게 여러 번 설명을 했는데도 또다시 이 사진 어디서 났느냐며 속절없는 물음만 되풀이했다. 기억하지 못하는 사진 속의 생생한 기억들. 그리고 준비되지 않는 감정에 갑자기 다가선 복받치는 그리움. 그러한 것들이 다내실 할머니의 눈시울을 젖어들게 했을까? 이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사진이 망각의 껍질을 벗기자 까맣게 잊어버렸다고 여겼던 억제된 과거는 되살아났고 마침내 멈춰버렸던 주마등도 재가동되어 13년의 세월을 차례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고향 박실이 제일 먼저 생각났을 것이고 그 곳에서의 거칠고 힘들었던 삶의 흔적들은 정작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짙게 드러워진 자신의 주름살에 하나하나 박혀있음을 불현듯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이리라. 어쩌면 그렇게 무덤덤하게 잊고 지냈던 세월의 흔적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다 감당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다내실 할머니를 보고 있자니 나까지 괜시리 콧잔등이 시큰해져왔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투영된 할머니의 감정일 뿐 정작 세월의 풍상을 몸으로 견뎌낸 할머니 자신의 삶을 실은 감정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두 분 할머니는 아직도 어디에서라도 안동이라는 말만 나오면 눈이 번쩍 띄이고 귀가 솔깃해진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아직도 이들의 마음엔 고향은 여전히 안동인 것이다. 아니 마음에 고향으로 들어앉은 자리는 아무리 댐을 쌓고 쫓아내어도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었다. 현실에서는 쫓겨왔지만 자유로운 마음의 고향에서마저 또 다시 고향을 잃을 수는 없었으리라. 마음에서 고향을 잃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마음의 고향 자리에서 기꺼이 그대로 수몰되어 가고 싶었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은 시집와서부터 또 어떤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였지만 싱그럽게 부딪혔던 삶이었기에 그때의 흔적 하나 하나는 겉도는 이곳에서의 삶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비록 물에 잠겨 버려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지만, 무실과 박실과 한들은 지금도 눈감으면 선명한 이미지로 물위로 불쑥 떠올라 선하게 다가올 수 있었다. 그들이 마음속의 잠망경을 눈에 갖다대기만 하면 아직도 어디쯤에 뭐가 있고, 누구와 누구 집이 이웃이고, 여기서 거기는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 훤하게 볼 수 있었다. 도개 할머니는 "추석 때 고향에 다녀왔는데, 물에 차 있는 고향은 어디가 어딘지도 몰라. 대충 그럴 것이다라고 짐작만 하다 왔어" 하고 기대에 못 미친 고향방문 소감을 불쑥 내뱉었다. 이제 눈 앞에서 분명한 고향 땅을 보는 건 어렵다고 푸념하지만 그것은 사실 마음에 늘 선명한 고향의 영상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임하호의 어떤 낚시꾼보다 임하호 어디에서라도 언제든지 월척의 고향을 건져 낼 수 있었다. 물 아래 잠겨 버린 고향이지만 살아있는 한 이들의 기억에서 고향은 항상 13여년 전의 밝고, 맑고, 정감 있는 곳이었다.
자기 근원이 궁금해질 때 해평으로 가자
어느 새 점심 무렵이 되어 일어섰다. 조씨 할머니는 찬은 없지만 한사코 집으로 가서 밥을 먹자고 권한다. 연세 높으신 어른들 번거롭게 할 마음이 전혀 없어 다음 번에 오면 꼭 찾아뵙겠다며 간신히 거절하고 나섰다. 나가다 보니 동장도 벼를 펴 말리느라 바쁘게 손을 놀리고 있다. 한번 만난 인연으로 인사를 건네니 반색을 하며 농사일에 바뻐 차도 한잔 대접 못한다며 미안해한다. 지난 번 왔을 때도 들렸던 근처의 재첩국 집에 갔다. 근처가 재첩이 날만한 곳도 아닌 것 같은데 주인은 저번과 마찬가지로 자기네 식당은 재첩이 전문임을 강조하면서 뭘 먹을 것인가를 물었다. 메뉴도 재첩횟밥과 재첩국 밖에 없단다. 재첩국 맛이 내 입맛에 그다지 맞는 건 아니었지만 뭐 한끼 밥이 중요한 건 아니니, 한 그릇 얼른 비우고 다시 일선리로 갔다. 다내실 할머니 댁에 두고 나온 물건이 있어 찾으러 갔더니 도개 할머니를 꼭 찾아보고 가라고 전한다. 행여나 우리가 그냥 갔을까 이리저리 찾아 다녔다고 한다. 그러겠다고 약속드리고 집을 물어 찾아갔더니 정작 집은 비어 있다. 기다릴 겸 마당 이리저리를 둘러보는데 두 노부부의 정성스런 손길이 느껴진다.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게 가꾼 정원은 향나무, 감나무, 국화, 장미 등의 각 종 꽃나무, 잘 다듬은 잔디가 어울리게 자리잡아 참으로 소박하면서도 아담한 마당을 이루고 있었다. 10여분 기다렸을까? 도개 할머니를 찾으러 나선 다내실 할머니가 도개 할머니와 함께 들어왔다. 도개 할머니는 우리가 그냥 갔을까봐 경로당이며 동네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며 안동에서 온 사람 봤냐고 물었다고 한다. 마당에 놓인 의자에 앉으라고 하고는 차를 내러 집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의자 옆에 놓인 커다랗고 널직한 돌에 새겨진 글씨를 보고 몇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평평하면서도 잘 생긴 돌에는 기경실업 류기진. 대한민국 산업포장 제3037호 96.5.11. 대통령 김영삼 이라고 새겨져 있다. 다내실 할머니가 류기진은 이 집 맏아들이라고 알려주었는데, 우리는 그 바위만한 돌을 포장 기념으로 대통령이 직접 준 것인지, 아니면 그런 상을 받았다고 받은 사람 쪽에서 기념하기 위해 새겨 둔 것인지 궁금해했다. 이 돌에 관한 궁금증은 결국엔 다른 이야기를 하느라 잊어버려 물어보지도 못했다. 도개 할머니가 쌍화차에 배를 깍아 내 왔다. 그러는 사이 이 집 어른인 류덕휘(81) 할아 버지도 경로당에서 돌아왔다. 도개 할머니는 대접할 것도 없는데 이거라도 따야겠다며 마당에 있는 감을 따서 깎는다. 배와 감, 석류를 많이 먹어 배가 부른데도 두 분 할머니는 옆에 있는 나에게 끊임없이 먹을 것을 권한다. 어느새 날씨가 조금씩 개어 마당 안으로 오후 해가 따사롭게 비쳤다.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어도 고향 이야기는 끝이 없다. 마치 눈앞에 박실, 무실을 보는 듯하며. 류덕휘 할아버지는 옛날을 생각하니 고향이 그립고 안타깝지만 경제적인 면에서 생활은 일선리가 훨씬 더 낫다고 했다. 작년 한해 일선리 농협의 예금고가 11억이었다고 하니 일선리의 경제력은 새삼 말 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류덕휘 할아버지 뿐 아니라 동장이나 만났던 어른들 모두 한결같이 물질적 풍요로움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었다.
처음엔 낯선 타향이었겠지만 어느새 생활이 안정되면서 교통 편리하고, 인심 좋은 선산에 정이 많이 들기도 했나보다. 고향 얘기를 할 때와는 달리 강산도 변한다는 10여년의 세월을 보낸 땅이니 무실, 박실에 대한 기억이 가슴 한켠으로 밀려날수록 어느새 일선리의 삶이 큰 자리를 차지해 가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일선리의 삶은 오늘 그 분들이 살아있는 현장이니까. 하지만 일선리의 삶이 아무리 편안해도 여생이 그다지 많이 남아있지 않는 이들에게는 안동은 역시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도개 할머니가 "죽으면 무조건 박실로 가야지. 이승은 여기라도 저승은 박실이지. 어떻게 안동을 잊어"하니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그 짧은 순간에 한결같은 마음을 내는 것을 보니 이들은 모두 나중 일을 약속해 두었는 듯하였다. 이승에서 몇 십년 동안 동성부락을 이루고 살면서 집안 대소사는 물론 무엇 하나 숨기고 가릴 것 없이 한 집처럼 지냈으면서도, 무엇이 좋아 다음 생에 또 함께 살려고 하는지 알듯 모를 듯하다. 아마 그 때는 더 이상 고향이라는 말에 눈시울 붉히거나 마음 한 구석을 아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수몰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다시 고향산천을 내줄 일이 없어서인가. 자신의 근원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는 날, 혹은 고향 어른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 이는 날. 해평으로 가 보자. 일선리에 들어서 공손하게 인사를 드린 후 "안동서 왔니더"라는 한 마디에 마당의 잘 익은 석류며 단감을 따 주는 손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성이 유씨면 더 좋고 의성 김씨만 되어도 좋다. 다만 타성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본관만큼은 정확하게 알고 가야 할 것이다. 처음엔 낯선 타향이었겠지만 어느새 생활이 안정되면서 교통 편리하고, 인심 좋은 선산에 정이 많이 들기도 했나보다. 고향 얘기를 할 때와는 달리 강산도 변한다는 10여년의 세월을 보낸 땅이니 무실, 박실에 대한 기억이 가슴 한켠으로 밀려날수록 어느새 일선리의 삶이 큰 자리를 차지해 가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일선리의 삶은 오늘 그 분들이 살아있는 현장이니까. 하지만 일선리의 삶이 아무리 편안해도 여생이 그다지 많이 남아있지 않는 이들에게는 안동은 역시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도개 할머니가 "죽으면 무조건 박실로 가야지. 이승은 여기라도 저승은 박실이지. 어떻게 안동을 잊어"하니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그 짧은 순간에 한결같은 마음을 내는 것을 보니 이들은 모두 나중 일을 약속해 두었는 듯하였다. 이승에서 몇 십년 동안 동성부락을 이루고 살면서 집안 대소사는 물론 무엇 하나 숨기고 가릴 것 없이 한 집처럼 지냈으면서도, 무엇이 좋아 다음 생에 또 함께 살려고 하는지 알듯 모를 듯하다. 아마 그 때는 더 이상 고향이라는 말에 눈시울 붉히거나 마음 한 구석을 아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수몰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다시 고향산천을 내줄 일이 없어서인가. 자신의 근원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는 날, 혹은 고향 어른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 이는 날. 해평으로 가 보자. 일선리에 들어서 공손하게 인사를 드린 후 "안동서 왔니더"라는 한 마디에 마당의 잘 익은 석류며 단감을 따 주는 손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성이 유씨면 더 좋고 의성 김씨만 되어도 좋다. 다만 타성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본관만큼은 정확하게 알고 가야 할 것이다.<안동>
구미시 선산읍 해평면 일선리. 오늘 찾아가는 곳이다. 내 기억의 해평은 몇 해전 상주에서 있었던 선배결혼식에 참석하려고 대구에서 상주를 향해 가며 스쳐지나갔던 곳이다. 그 때 차창 오른켠으로 단정한 한옥이 모여있는 마을 하나를 봤고, 옆에 앉은 이가 저 마을이 임하댐 수몰로 고향을 잃게 된 사람들의 집단 이주단지라고 말해주어 그런가보다 했던 곳이다. 일선리 입구에는 수류우향 '水柳寓鄕'이라 새겨진 큰 돌이 세워져 있다. 말 그대로 해석하면 무실 유씨가 타향에 새로 마련한 마을이라는 뜻이다. 원래 이들의 본관이 전주임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무실이라고 표현한 것은 무엇때문일까? 무실로부터 왔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무의식적 의지의 표현이 아닐까? 아니 오히려 '水柳'라는 이 한마디 말에서 결코 고향 무실을 잊지 않겠다는 결단마저 드러난다. 또 나는 이 '水柳'라는 말의 어감에서 물길따라 흘러왔다(水流)는 느낌을 받았고 그것은 무실에 사는 전주 유씨의 집단적 이주를 암시하는 듯했다. 전주 유씨가 임하댐으로 수몰되기 전에 머물렀던 곳은 임동 수곡 일대인데 전주유씨가 임동 수곡(무실)에 정착한 것은 서주석씨의 기록에 의하면 유성(중종28 1533-명종 15년 1560)때부터라고 한다. 성의 아버지 유윤선은 연산 6년(1500)생으로 원래 대대로 한성 묵사동에 세거했는데, 영주 거주 반남박씨 사직 승장의 사위가 되어 영주 처향으로 이거하였고 아들 성이 안동 천전의 의성김씨 진(청계)의 사위가 되어 다시 천전과 가까운 수곡에 이거하였다고 되어 있다. 전주유씨 수곡파는 여러 곳으로 흩어져 집성촌을 이루었는데, 그 중 무실, 박실, 한들 등이 대표적이다. 류희걸씨가 지은 [기하수류]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무실에는 수곡파의 대종가 집이 있고, 선조의 유업을 숭모하는 기양서당과 정려각이 마을 중심부에 위치하였다. 건물은 임하댐 수몰로 인하여 동편 광산기슭 수곡 이주단지로 이건하였다. 박실에는 관암위파와 수남위파가 거주했는데, 성의 사대손인 진휘의 차남 봉시가 무실서 분가해 위리에 잠시 거주하다가 이곳으로 이사 정착했기 때문에 박곡의 입향 파조가 되었고, 그 후손이 관암위파인 것이다. 뒤에 와서 성의 동생 원의 9대손인 기문이 수정재의 둘째 아들 치교를 양자하여 박실에 살게 되었고, 그의 후손을 수남위파라 하다. 박실에는 관암위파 종택인 침간정과 수남위파 종가가 있고, 삼가정이 있었는데, 후손 일부와 함께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로 이건하였다. 수곡2리 한들에는 관암위파와 용암위파가 주로 살았다. 관암위파의 파조 봉시의 차남인 관현이 한들로 분가하여 먼저 살았고, 그 뒤에 용암파 파조 지잠의 6대손 건휴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함께 살았다. 한들에는 정재(유치명) 종택과 수재(유정호)고택이 있고, 대야정·근암정·동암정과 그의 대택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해평으로 이건하였고, 다만 정재 종택은 안산의 구암산 기슭에 이건되었다"
아도화상이 창건한 도리사에 들르다 지도를 놓고 해평에 빨리 도착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가산 톨게이트에서 내려 구미로 들어가기로 했다. 물론 예전에 내가 대구에서 출발해 해평을 지났던 기억에 충실하게 따른 결정이었다. 평일 오전인 까닭인지 고속도로는 정체없이 차가 시원스럽게 나간다. 가산 톨게이트에 내려 비로소 국도에 접어들었다. 시원스런 맛은 덜하지만 국도는 언제 달려도 정감있는 길이다. 구미 외곽도로를 빠져나가 선산으로 가는 길 양 옆 논의 한창 누렇게 익은 벼는 성숙한 빛깔로 가을을 온통 뒤덮고 있다. 잎을 다 떨군 느티나무가 양옆으로 시원스럽게 늘어선 길을 한참 지나니 선산읍 안내판이 보인다. 시간이 11시 30분경이라 점심을 어떡할까를 고민했다. 일선리에 들어서면 점심무렵이어서 낯선 동네를 방문하는데 실례가 될 법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마침 도리사 ○○m라고 적힌 안내판이 눈에 들어와 도리사를 들렀다가기로 했다. 도리사는 우리나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이 창건한 유서깊은 고찰이다. 도리사를 안고 있는 태조산을 바라보며 들어가는 길은 한적하면서 제법 엄숙하고, 경건함을 준다. 주차장이라는 표시가 있는 곳에 차를 세우고, 오락가락하는 비 때문에 우산을 챙겨들고 내렸다. 오르막인 도로를 한참이나 걸었다. 주변의 참나무, 소나무 숲을 둘러보고 상수리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도 주워가면서. 도리사 앞마당에 들어서서 숨을 고르고 뒤를 돌아보니 멀리 휘돌아가는 낙동강 물줄기와 구미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내부에서 보는 도시, 특히 구미와 같은 공단지역은 삭막하기 그지없지만, 멀리 산사에서 바라보는 도시는 휘감고 흘러가는 낙동강 물줄기에 모두 적셔져 아름다운 광경이다. 날씨도 흐린데다 경내에는 관람객이 거의 없어 고즈넉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도리사도 최근 불사를 많이 한 탓인지 사찰의 옛맛을 느낄만한 공간은 줄어들고 중심부에는 선원이라는 거창한 건물 공사가 한창이다.
일선리 안동슈퍼 해평에서 차로 5분정도를 달리니 일선리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한눈에 봐도 여느 시골과 달리 단정하고 구획지어진 땅에 들어선 가옥이 자연스런 삶의 공간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었다기 보다는 계획에 의해 조성된 마을이라는 인상을 준다. 동네 입구에 차를 세우고 내리니 첫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안동슈퍼라는 간판이다. 동네 첫집인 안동슈퍼는 슬쩍 봐도 물건을 파는데 그다지 열심인 집 같지는 않다. 웬만한 시골가게보다도 갖춘 구색이 못하다. 다소 굵어진 비도 피하고 동장님댁도 물을겸 안동슈퍼로 들어갔다. 달산에서 온 김씨라는 주인 아주머니는 슈퍼앞에 쪼그리고 앉아 양파까기에 열심이다. 들어서는 두 사람을 보자 "어디서 왔니껴?"라며 먼저 묻는다. ∼니껴라는 말이 나오는 걸 보니 틀림없는 안동사람이다. 우리도 옆에 쪼그리고 앉아 간단한 인사를 나누며 동네를 찾은 이유를 설명한다. 무실로 시집온지 28년째 되었다는 아주머니는 낯선 사람과의 대화로 조금은 부끄러워 하는 듯하기도 하고 안동사람이라는 말에 반가워하는 듯하기도 한 소박한 미소를 띤 채 연신 양파껍질을 벗기면서도 이것저것 대답한다. 빗줄기가 다소 가늘어지자 동장댁을 묻고 일어섰다.
수몰 피해 옮겨 앉은 무실, 박실, 한들 사람들 해평 일선리는 임하댐이 수몰되면서 무실, 박실, 한들 등의 동네에 흩어져 살던 전주 유씨들이 집단이주를 해 온 마을이다. 86년부터 터를 다져 87년과 88년에 거쳐 이사를 했으니 어느 덧 고향을 물 속에 묻고 떠나온 지도 10년이 넘었다. 집성촌 한 부락을 고스란히 옮겼다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일선리에 이사온 사람들의 삶은 뭐가 달라졌을까? 11년의 세월은 그들에게 고향에 관한 기억도 가물거리게 만든 건 아닐까? 사실 여기나 저기나 사람 사는 법이 크게 다를 바 없이 매양 같은데, 그들의 고향은 물 속에 잠겼다는 감상에 사로잡혀 이런저런 애틋함과 안타까움을 혼자 애써 자아내고 있는 노릇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동장댁을 찾아가는 동안 주위를 살피며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졌다. 집집마다 마당엔 감나무와 석류나무를 심어 탐스럽게 익은 열매가 제 빛을 발하고 있다. 대부분의 주민이 농사를 짓는 시골이라 하지만 집 둘레가 여느 시골과는 달리 어설프지 않다. 한옥은 한옥대로, 양옥은 양옥대로 단정하고 골목 또한 널직널직하다. 보이는 문패마다 유씨성을 달고 있어 다시금 동족부락임을 확인시켜준다. 안동슈퍼 김씨 아줌마가 일러준대로 마을 초입에서 3분여를 걸어 유용희라고 적힌 문패를 찾았다. 동장댁이다. 마실 나가는 길인지 마침 나오는 안노인이 "여기가 동장님댁이지요" 하는 물음에 "맞니더. 들오소"라고 하시고 안채를 향해 사람을 부르고는 대문을 나선다. 곧 동장이 나와 우리를 사랑으로 안내한다. 아마 비가 와서 들에 나가지 않고 집에 있었나보다. 사랑에 들어서자 동행한 김복영씨와 서로 예를 갖춰 인사를 나눈다. 보통의 경우 초면에 악수나 통성명 정도 하는 게 대부분인데 깍듯이 서로 절을 한다. 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별 가구도 없는 아담한 방이다. 일선리 각 집의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가 벽에 붙어 있는 걸 보니 과연 동장댁답다. 대나무액자가 걸려있고 방 한구석에는 대학, 중용, 퇴계선생문집과 몇 권의 다른 문집이 쌓여있다. 시대풍속이나 생각이 너무나 많이 변했지만 아직도 양반의 기개와 품위를 지닌 채 사는가 보다하고 여겨진다. 설사 그 책들을 넘겨보지 않는다 할지라도 마음 한켠에 명문양반으로서의 자부심이 자리잡고 있으리라. 유용희(55)동장과의 대화는 추석이 지난 지 얼마 안된 무렵이라 성묘이야기부터 시작됐다. 추석 때 고향에 다녀왔냐는 물음에 "산소가 거겐데 어예니껴. 가지요 뭐"라며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였다. "그러면 추석에는 동네가 텅 빌세요"하니 "예. 추석엔 동네가 텅 비고 설엔 엄청시리 모이니더"하며 주고받는 말이 건조하기 짝이 없지만 안동 사람에겐 익숙한 말투다. 퉁명스레 툭툭 던지는 듯 해도 관심과 정을 담은 안동 사람들의 말이다. 현재 일선리는 모두 80가구가 살고있다. 이중 타성은 5가구이고 나머지는 모두 유씨이다. 이들은 무실, 박실, 한들, 맛재, 용계에서 이주해 왔는데 박실에서 1집, 맛재에서 3집, 용계에서 6집이 왔고 나머지는 모두 무실에서 왔다. 비록 고향은 물에 잠겼지만 씨족이 함께 나와 마을을 이루고 살면서 상실감을 어느 만큼 상쇄시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터전을 옮겨 온 이들의 삶도 그리 녹녹지는 않았다. 안동과 달리 양반문화라고 할 것이 없는 구미인근이지만 전주 유씨가 양반이라는 사실은 다 알고 있어 사소한 행동 하나 하나를 오히려 조심하며 지낸다고 한다. 안동에서야 장날에 시장에 나가 아는 이들끼리 술 한 잔 나누고 조금 풀어진 모습을 보여도 다 아는 이들끼리 허허거리면서 묻혀질 일들이 여기서는 꼬투리가 되기 일쑤니 행여 책잡힐까 더욱 조심하는 것이다. 늘 주변사람들의 이목을 생각하고 마음속에 더욱 삼가고 조심하는 마음을 가진다고 한다.
맹 고향은 거기래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바깥의 빗줄기가 더 굵어진다. 안채에서 커피를 끓여 왔다. 집에 오는 이를 그저 보내지 않고 뭐라도 대접하는 것이 우리네 풍습이다. 올 가을에 비가 자주 오는데 농사에 큰 피해는 없냐고 물었더니 다행히도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이주할 당시 정부로부터 지급 받은 동네 토지가 모두 84ha인데 처음엔 전부 백사장이었다고 한다. 정상소출까지는 약 3년이 걸렸는데 일선리에서 농사지은 지 3년째 되는 해가 지금껏 제일 많은 소출을 낸 해라고 한다. 다른 밭작물이나 참외 같은 것도 재배하지만 주로 벼농사를 하는데 안동과는 수확량이 비교도 안될 만큼 월등하다고 한다. 유동장의 경우 안동에서는 일년에 보통 나락 200두 정도를 추수했는데, 여기서는 1천두 이상 추수한다고 한다. 무엇보다 충분한 일조와 물의 공급이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먹고사는 형편이 나아졌지만, 맹 고향은 거기래요" 라며 동장은 말을 잇는다. "종가, 서당, 묘소 잊어 불 수가 없지요. 눈감으면 안동 간다 생각하면 되요. 이승은 객지에서 그냥 그냥 보내고 저승 가서 고향가지요" 그래서인가. 이곳에 이주하고 열 세분 정도의 노인이 돌아가셨는데 산소는 전부 고향에 만들었다고 한다. 말 나누는 중에 이웃 할머니가 오시자 동장은 "아지매, 언제 오셨디랬니껴?" 라고 인사를 건네며 비 오는데 고구마는 나중에 캐라, 들어와 앉으시라 권하는 말이 살갑게 들린다. 여기 와서 변한 게 있다면 뭐냐는 물음에 동장이 지게 벗은 것이라고 대답하자 셋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한바탕 소리내어 웃었다. 무실에서야 산비탈 비탈마다 농사를 지어야 했으니 지게를 지고 수 없이 왔다갔다 해야 했겠지만 해평 들이야 그냥 시원스레 펼쳐진 농토니 지게 벗은 홀가분함이 오죽했을까 싶다. 마당 한 켠에 제법 큰 감나무가 있어 감나무도 함께 이사왔느냐고 묻자 이사 와서 시장에 나갔다가 뭔지도 모르고 사다 심었는데 단감나무라며 갈 때 두어 개 따가라고 권한다. 다음에 다시 한 번 더 찾아보기로 하고 동장댁을 나섰다. 날씨가 많이 흐려 사진 찍기도 마땅치 않고 해서 동네나 한 번 살피고 이 주일 후쯤 다시 오기로 했다. 마을 앞으로 저 멀리 낙동강이 보인다. 일선리에 사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흐르는 낙동강을 보며 망향의 아픔을 조금씩 떠내려 보낼까? 아니면 그들이 처음 터전을 내렸던 물 고을(무실)이라는 마을이름에서부터 임하댐으로 인한 수몰, 그리고 멀리 이주해온 곳까지 결국 낙동강을 떠나지 못한 끈질긴 물과의 인연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일까? 지금까지 고향을 떠나본 적도 없고, 가슴 한켠에 묻어야 하는 망향에 대한 아픔도 없는 나로서는 그들의 깊은 속내를 어찌 짐작이나 하겠는가? 그러나 강산도 변한다는 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아프게 키워가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심사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로 유유히 흘러대는 무심한 낙동강을 보며 일선리 첫 방문을 마무리지었다.
문화재로 지정된 고옥 10여채 두 번째 일선리 가는 날. 역시 날씨가 좋지 않다.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고 일기예보에서도 비 소식을 전한다. 하필이면 일선리 가는 날마다 날씨가 이 모양이냐고 두어 마디 중얼거리며 길을 떠났다. 지난 번에 돌아오면서 가까운 길을 알아두었다가 이번엔 그 쪽을 선택했다. 풍산에서 예천 풍양, 의성 단밀, 상주 낙동을 거쳐 가는 길이다. 이번엔 오래된 흑백사진을 한 장 들고 간다. 사진속의 주인공은 두 할머니. 방에 앉아 밖을 내다보는 두 할머니는 고부지간이다. 김복영씨가 86년 임하댐 수몰을 앞두고 수몰지역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며 찍어 놓은 사진 중에 하나다. 사진 속의 시어머니인 호지말 할머니는 지난 번 일선리에 갔을 때 여쭈었더니 100수를 넘기고 돌아가신지 10년 가까이 된다고 했다. 그 며느리인 다내실 할머니(78)는 일선리에 산다고 들어서 이번엔 할머니도 찾아보고 사진도 전해줘야 한다면서 챙겨놓은 것이다. 천천히 달려 거의 2시간만에 일선리에 도착했다. 바로 전날 밤에 비가 와서 나락 말린 것을 다 적셨나보다. 골목마다 나락 펴말리기에 일손이 바쁘다. 넓은 골목이지만 아예 차를 못 들어가게 하고 사람 다닐 길만 내고서는 나락을 편다.
지난 번에 한 번 봤다고 벌써 얼굴이 익숙하다. 나락을 펴고 있는 안동슈퍼 주인아줌마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비가 와 가지고 나락 말린 것 다 버렸지요"하고 걱정스레 물으니 장화를 신고 나락을 펴느라 왔다갔다 하면서 "글쎄 말이래요. 싹 다 나게 생겼니더" 하며 속상해 하였다. 오늘은 우선 정자와 문화재로 지정된 고택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일선리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이 10여채이다. 모두 안동의 집을 고스란히 옮겨 새로 지은 것이다. 마을의 위쪽에 자리잡고 있는 정자와 제사를 찾아가니 대문이 모두 잠겨있다. 안내판도 대부분 집 안 마당에 설치되어 있어 바깥에서는 무슨 집인지 달리 알 방법이 없다. 미리 연락해 놓지 않아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없으니 담장 밖에서 이리저리를 기웃대며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문화재 지정가옥이기는 하지만 역시 사람이 살지 않아서인지 부분적으로 훼손된 곳도 있고, 무엇보다 사람이 집에 머무르면서 풍기는 온기와 윤기가 없다. 옛날 한옥이 멋스럽긴 하나 생활하는 데 여러 가지 불편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겨울에 난방 문제는 심각하다. 하지만 이런 집들이 껍데기만 남아 옛날의 영화와 자태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도 여전히 사람이 사는 공간으로 활용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사람이 사는 거주공간일 때 집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박제화된 집은 이미 집으로서의 생명은 끝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저 옛 사람들이 살았다는 흔적을 쉽게 지울 수 없게 하는 시각적 기록이라고나 할까. 그렇지만 편의에 길들어진 지금의 우리 삶은 운치있는 우리의 옛집을 집다운 공간으로 재활용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 생각만큼 뾰족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13년전 고향을 마음에 품고 있는 다내실 할머니를 만나다 사진 속의 다내실 할머니댁을 찾아 나섰다. 낯익은 동네 사람의 얼굴이 아닌 탓인지 보는 이들마다 "어디서 오셨니껴" 하며 인사반 심문반의 안동식 수작을 건다. "안동서 왔니더"라고 대답하면 "안동서요? 안동 워디서 왔니껴" 하며 반색을 하고 되묻는다. 두 번 째의 물음은 겉보기와 달리 이제 심문이 아니다. 각기 자기 안에 감추어둔 고향냄새를 더 가까이 확인하려는 절차인 것이다. 바구니에 몇 가지 풀뿌리를 담아 가는 아주머니께 사진을 보여드리며 할머니를 아느냐고 물으니 "의인 할매(다내실 할머니의 또 다른 택호. 후처로 들어온 그는 진성이씨로 친정이 의인이지만 택호는 전처의 것을 그대로 쓰고 있다)네요." 하면서 집을 가르쳐 주겠다고 한다. 때 마침 앞에 할머니 두 분이 걸어오고 있었다. 두 분 중 한 분이 우리가 찾던 다내실 할머니였다. 13년 전 사진인데도 불구하고 한 눈에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사진보다 그다지 늙지 않았다. 할머니께 사진을 보여드리며 "기억나세요" 하니 "이게 워디서 났니껴" 하며 참으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한사코 집으로 가자고 권하면서 가던 길을 되돌아 당신의 집으로 향했다. 아마 두분 할머니가 함께 이웃에 점심 대접받으러 가는 길이었나 보다. 다내실 할머니와 함께 있던 영양 도개에서 온 한양 조씨 할머니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어떻게 안동에서 왔냐며 예기치 않던 손님이 못내 궁금한 모양이었다. 김복영씨와 몇 마디 인사를 나누다가 김복영씨의 선친이 누구인지 알게 되자 먼 사이가 아니라며 팔을 부여잡고는 "에구, 이래 보이 희안타. 반갑다" 하시며 눈시울까지 붉히신다. 알고보니 김복영씨 할머니와 도개 할머니는 4촌자매였다. 도개 할머니가 이래저래 일가의 안부를 묻고 놀라워하는 동안 다내실 할머니는 사진을 한참이나 들여다 보며 "에구, 이게 도대체 워디서 났니껴?"하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어느새 다내실 할머니의 눈가가 발갛게 젖어들었다. 사진 속의 호지말 할머니를 가리켜 "우리 시어머니시더." 하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김복영씨가 사진 찍을 때의 상황과 그 무렵의 이야기를 하자 다내실 할머니의 붉은 눈시울은 기어이 눈물로 반짝거렸다. 무디고 어둔한 손이었지만 사진 속의 물건 하나 하나를 그녀의 기억만큼 정확히 짚어나갔다. 자신의 손때가 베어있는 사진 속의 제봉틀, 반짓그릇, 밥솥은 13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게 하여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아픈 기억마저 이제는 차라리 아름다운 것들인양 생생하게 재현시키고 있었고, 할머니는 자신이 불러낸 몽환 같은 기억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일그러진 표정은 괴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향이 그리워도 그리워하지 않는듯이 무표정하게 살았던 자신의 삶에 대한 원망과 그것을 훌훌 털며 자유롭게 그리워하는 지금의 감정이 교차하며 만들어낸 부자연스러운 표정이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자신의 감정을 쉽게 추스리지 못한 당혹감을 감추기 위해 그렇게 여러 번 설명을 했는데도 또다시 이 사진 어디서 났느냐며 속절없는 물음만 되풀이했다. 기억하지 못하는 사진 속의 생생한 기억들. 그리고 준비되지 않는 감정에 갑자기 다가선 복받치는 그리움. 그러한 것들이 다내실 할머니의 눈시울을 젖어들게 했을까? 이 기억조차 할 수 없는 사진이 망각의 껍질을 벗기자 까맣게 잊어버렸다고 여겼던 억제된 과거는 되살아났고 마침내 멈춰버렸던 주마등도 재가동되어 13년의 세월을 차례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고향 박실이 제일 먼저 생각났을 것이고 그 곳에서의 거칠고 힘들었던 삶의 흔적들은 정작 그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짙게 드러워진 자신의 주름살에 하나하나 박혀있음을 불현듯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이리라. 어쩌면 그렇게 무덤덤하게 잊고 지냈던 세월의 흔적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다 감당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다내실 할머니를 보고 있자니 나까지 괜시리 콧잔등이 시큰해져왔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투영된 할머니의 감정일 뿐 정작 세월의 풍상을 몸으로 견뎌낸 할머니 자신의 삶을 실은 감정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두 분 할머니는 아직도 어디에서라도 안동이라는 말만 나오면 눈이 번쩍 띄이고 귀가 솔깃해진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아직도 이들의 마음엔 고향은 여전히 안동인 것이다. 아니 마음에 고향으로 들어앉은 자리는 아무리 댐을 쌓고 쫓아내어도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었다. 현실에서는 쫓겨왔지만 자유로운 마음의 고향에서마저 또 다시 고향을 잃을 수는 없었으리라. 마음에서 고향을 잃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마음의 고향 자리에서 기꺼이 그대로 수몰되어 가고 싶었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은 시집와서부터 또 어떤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였지만 싱그럽게 부딪혔던 삶이었기에 그때의 흔적 하나 하나는 겉도는 이곳에서의 삶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비록 물에 잠겨 버려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지만, 무실과 박실과 한들은 지금도 눈감으면 선명한 이미지로 물위로 불쑥 떠올라 선하게 다가올 수 있었다. 그들이 마음속의 잠망경을 눈에 갖다대기만 하면 아직도 어디쯤에 뭐가 있고, 누구와 누구 집이 이웃이고, 여기서 거기는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 훤하게 볼 수 있었다. 도개 할머니는 "추석 때 고향에 다녀왔는데, 물에 차 있는 고향은 어디가 어딘지도 몰라. 대충 그럴 것이다라고 짐작만 하다 왔어" 하고 기대에 못 미친 고향방문 소감을 불쑥 내뱉었다. 이제 눈 앞에서 분명한 고향 땅을 보는 건 어렵다고 푸념하지만 그것은 사실 마음에 늘 선명한 고향의 영상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임하호의 어떤 낚시꾼보다 임하호 어디에서라도 언제든지 월척의 고향을 건져 낼 수 있었다. 물 아래 잠겨 버린 고향이지만 살아있는 한 이들의 기억에서 고향은 항상 13여년 전의 밝고, 맑고, 정감 있는 곳이었다.
자기 근원이 궁금해질 때 해평으로 가자
어느 새 점심 무렵이 되어 일어섰다. 조씨 할머니는 찬은 없지만 한사코 집으로 가서 밥을 먹자고 권한다. 연세 높으신 어른들 번거롭게 할 마음이 전혀 없어 다음 번에 오면 꼭 찾아뵙겠다며 간신히 거절하고 나섰다. 나가다 보니 동장도 벼를 펴 말리느라 바쁘게 손을 놀리고 있다. 한번 만난 인연으로 인사를 건네니 반색을 하며 농사일에 바뻐 차도 한잔 대접 못한다며 미안해한다. 지난 번 왔을 때도 들렸던 근처의 재첩국 집에 갔다. 근처가 재첩이 날만한 곳도 아닌 것 같은데 주인은 저번과 마찬가지로 자기네 식당은 재첩이 전문임을 강조하면서 뭘 먹을 것인가를 물었다. 메뉴도 재첩횟밥과 재첩국 밖에 없단다. 재첩국 맛이 내 입맛에 그다지 맞는 건 아니었지만 뭐 한끼 밥이 중요한 건 아니니, 한 그릇 얼른 비우고 다시 일선리로 갔다. 다내실 할머니 댁에 두고 나온 물건이 있어 찾으러 갔더니 도개 할머니를 꼭 찾아보고 가라고 전한다. 행여나 우리가 그냥 갔을까 이리저리 찾아 다녔다고 한다. 그러겠다고 약속드리고 집을 물어 찾아갔더니 정작 집은 비어 있다. 기다릴 겸 마당 이리저리를 둘러보는데 두 노부부의 정성스런 손길이 느껴진다.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게 가꾼 정원은 향나무, 감나무, 국화, 장미 등의 각 종 꽃나무, 잘 다듬은 잔디가 어울리게 자리잡아 참으로 소박하면서도 아담한 마당을 이루고 있었다. 10여분 기다렸을까? 도개 할머니를 찾으러 나선 다내실 할머니가 도개 할머니와 함께 들어왔다. 도개 할머니는 우리가 그냥 갔을까봐 경로당이며 동네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며 안동에서 온 사람 봤냐고 물었다고 한다. 마당에 놓인 의자에 앉으라고 하고는 차를 내러 집으로 들어갔다. 그 사이 의자 옆에 놓인 커다랗고 널직한 돌에 새겨진 글씨를 보고 몇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평평하면서도 잘 생긴 돌에는 기경실업 류기진. 대한민국 산업포장 제3037호 96.5.11. 대통령 김영삼 이라고 새겨져 있다. 다내실 할머니가 류기진은 이 집 맏아들이라고 알려주었는데, 우리는 그 바위만한 돌을 포장 기념으로 대통령이 직접 준 것인지, 아니면 그런 상을 받았다고 받은 사람 쪽에서 기념하기 위해 새겨 둔 것인지 궁금해했다. 이 돌에 관한 궁금증은 결국엔 다른 이야기를 하느라 잊어버려 물어보지도 못했다. 도개 할머니가 쌍화차에 배를 깍아 내 왔다. 그러는 사이 이 집 어른인 류덕휘(81) 할아 버지도 경로당에서 돌아왔다. 도개 할머니는 대접할 것도 없는데 이거라도 따야겠다며 마당에 있는 감을 따서 깎는다. 배와 감, 석류를 많이 먹어 배가 부른데도 두 분 할머니는 옆에 있는 나에게 끊임없이 먹을 것을 권한다. 어느새 날씨가 조금씩 개어 마당 안으로 오후 해가 따사롭게 비쳤다.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어도 고향 이야기는 끝이 없다. 마치 눈앞에 박실, 무실을 보는 듯하며. 류덕휘 할아버지는 옛날을 생각하니 고향이 그립고 안타깝지만 경제적인 면에서 생활은 일선리가 훨씬 더 낫다고 했다. 작년 한해 일선리 농협의 예금고가 11억이었다고 하니 일선리의 경제력은 새삼 말 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류덕휘 할아버지 뿐 아니라 동장이나 만났던 어른들 모두 한결같이 물질적 풍요로움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었다.
처음엔 낯선 타향이었겠지만 어느새 생활이 안정되면서 교통 편리하고, 인심 좋은 선산에 정이 많이 들기도 했나보다. 고향 얘기를 할 때와는 달리 강산도 변한다는 10여년의 세월을 보낸 땅이니 무실, 박실에 대한 기억이 가슴 한켠으로 밀려날수록 어느새 일선리의 삶이 큰 자리를 차지해 가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일선리의 삶은 오늘 그 분들이 살아있는 현장이니까. 하지만 일선리의 삶이 아무리 편안해도 여생이 그다지 많이 남아있지 않는 이들에게는 안동은 역시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도개 할머니가 "죽으면 무조건 박실로 가야지. 이승은 여기라도 저승은 박실이지. 어떻게 안동을 잊어"하니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그 짧은 순간에 한결같은 마음을 내는 것을 보니 이들은 모두 나중 일을 약속해 두었는 듯하였다. 이승에서 몇 십년 동안 동성부락을 이루고 살면서 집안 대소사는 물론 무엇 하나 숨기고 가릴 것 없이 한 집처럼 지냈으면서도, 무엇이 좋아 다음 생에 또 함께 살려고 하는지 알듯 모를 듯하다. 아마 그 때는 더 이상 고향이라는 말에 눈시울 붉히거나 마음 한 구석을 아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수몰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다시 고향산천을 내줄 일이 없어서인가. 자신의 근원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는 날, 혹은 고향 어른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 이는 날. 해평으로 가 보자. 일선리에 들어서 공손하게 인사를 드린 후 "안동서 왔니더"라는 한 마디에 마당의 잘 익은 석류며 단감을 따 주는 손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성이 유씨면 더 좋고 의성 김씨만 되어도 좋다. 다만 타성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본관만큼은 정확하게 알고 가야 할 것이다. 처음엔 낯선 타향이었겠지만 어느새 생활이 안정되면서 교통 편리하고, 인심 좋은 선산에 정이 많이 들기도 했나보다. 고향 얘기를 할 때와는 달리 강산도 변한다는 10여년의 세월을 보낸 땅이니 무실, 박실에 대한 기억이 가슴 한켠으로 밀려날수록 어느새 일선리의 삶이 큰 자리를 차지해 가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일선리의 삶은 오늘 그 분들이 살아있는 현장이니까. 하지만 일선리의 삶이 아무리 편안해도 여생이 그다지 많이 남아있지 않는 이들에게는 안동은 역시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도개 할머니가 "죽으면 무조건 박실로 가야지. 이승은 여기라도 저승은 박실이지. 어떻게 안동을 잊어"하니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그 짧은 순간에 한결같은 마음을 내는 것을 보니 이들은 모두 나중 일을 약속해 두었는 듯하였다. 이승에서 몇 십년 동안 동성부락을 이루고 살면서 집안 대소사는 물론 무엇 하나 숨기고 가릴 것 없이 한 집처럼 지냈으면서도, 무엇이 좋아 다음 생에 또 함께 살려고 하는지 알듯 모를 듯하다. 아마 그 때는 더 이상 고향이라는 말에 눈시울 붉히거나 마음 한 구석을 아파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수몰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다시 고향산천을 내줄 일이 없어서인가. 자신의 근원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는 날, 혹은 고향 어른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 이는 날. 해평으로 가 보자. 일선리에 들어서 공손하게 인사를 드린 후 "안동서 왔니더"라는 한 마디에 마당의 잘 익은 석류며 단감을 따 주는 손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성이 유씨면 더 좋고 의성 김씨만 되어도 좋다. 다만 타성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본관만큼은 정확하게 알고 가야 할 것이다.<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