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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천리길을 걸으며 함께 걸었거나 지켜본 분들이 계셨는데 혹시나 이런 길 걸어볼 생각이 있으신 분은 참고해서 준비 바란다.
노송님은 팔순이라는 연세를 떠나 함께 걷고 싶은 제1인으로 발바닥 물집이 자라고 터져 전치 4주가 나왔으나 다음날 출근하셨는데 (팔만대장경 이운길에서 사진은 다소 험오스럽게 보일수 있기에 식사도중에 뚫어져라 보시면 안됩니다.)
이런 상태로 하루 꼭 60km이상을 걸어내셨고
깽이님 해안길 천리 걸으며 발바닥 물집으로 살이 터지고 고름이 생기고 다시 터지길 반복
해안길 특성상 하루 50km정도를 걷는데 이런 상태로 바닷물에 들어가고 갯벌에 들어가고,그뒤에 전치 4주 그럼에도 또 이런 길 걷겠다 하셨고
그리고 국토종주 하셨던 콜리님과 동강님께서도 발바닥으로 고생 많이 하셨고
제주해안길 원샷으로 걸으셨던 엘리님도 물집으로 인해 허리가 새우처럼 굽으셨는데
걷다 보면 두 가지 선택권은 늘 주어지는데 그중의 하나가 포기란 거다
클럽 특성상 노숙 준비는 기본이고 하루 60km로 걷는 천리는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눈은 좋은 걸 보니 늘 즐겁고
입은 맛있는 걸 먹거나 달달한 아이스크림을 먹어서 즐겁고
귀는 산새소리 바람소리 들으니 즐겁지만
발은 신발 속에서 얼마나 답답할까
아스길을 걸으며 발이 가장 즐거워야 함에도 발은 늘 뒷전이다
그러함에 반전은 딱 이틀뒤에 나타난다.
인간의 뇌를 즐겁게 하는게 남녀간의 사랑,니코틴, 코카인 그리고 뇌를 더 즐겁게 해준다는 낮술이라는데
물집이 생겼을 때 뇌는 극도로 파괴되고 시간이 지나면... 이건 경험해 보시고
이효석의 평창땅이 끝나고 사람보다 소가 더 많다는 횡성땅이니 횡성은 소 이외도 안흥찐빵이 유명하며 북쪽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넓은 지역의 군(郡)인 홍천, 동쪽에는 평창, 남쪽에는 강원도에서 가장 큰 도시인 원주와 단종의 혼이 살아있는 영월, 서쪽에는 양평땅이다.
이름의 지명은 횡성(橫城)의 횡(橫)에서 알 수 있는 뭔가가 가로지른다는 뜻인데 횡성군 청일면 속실리 봉복산 북서쪽에서 발원하는 섬강이 횡성을 남북으로 갈랐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황천현으로 부르다가 고려 때 이름이 조금 거시기해서 횡천현으로 다시 고쳐 불렀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횡성으로 고쳐 부른 곳이다.
횡성을 중심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있는데 서쪽에는 비룡과 물금산, 오음산, 만대산 그리고 천 고지 이상의 산들이 버티는 북쪽에 봉복산, 태기산 동쪽에 청태산, 사자산, 남쪽에 매화산, 치악산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강원도에 있어서 몇 안 되는 평지를 조금 가진 곳이기도 하다
태기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과 실타래처럼 길게 이어지는 내리막길 따라가면 구두마을이 나온다
횡성 제일산인 태기산은 진한의 마지막왕인 태기왕께서 산성을 쌓고 저짝 아래 보리문디 신라군과 일전(一戰)을 치렀다는 곳이다. 한판 거하게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태기왕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없고 다만 태기왕의 부인 아라왕비가 도망가다가 신라군에 잡혀 능욕당하기 직전 칼로 자신의 몸을 찔러 자결하려 할 때 신라왕이" 잠깐만 보내 줄 테니 그냥 갈길 가시오"했다고... 태기산은 웅장한 산세도 좋지만 겨울철에 눈이 많이 내려 설경도 죽여주니 따뜻한 커피 한잔의 여유를 갖고 찾으면 좋을듯하다
태기산 서,남쪽 계곡에서 발원하는 하천으로는 주천강이 있는데 태기산 1100m에서 발원하여 안흥면을 지나영월군 한반도면에서 서강(평창강)에 합류하는 맑은 90km의 강이다.
오늘 갈길에 뿌연 연막탄이 앞을 가리니 태양은 어디메뇨! 이상세계로 내려가는 무릉도원이 발아래 펼쳐지는데 지난밤 횡성땅 주민들 모두 한자리에 모여 소 한 마리 잡아 구워드셨나 소고기 한 점 한 점 살짝 익힐 때 나는 흰 연기가 이곳에 한꺼번에 모인듯하다
치악산과 함께 횡성 제일이라는 어떠한 소원도 다 들어주실 것 같은 마음씨 고운 태기산 태기왕산신께 비야 비야 했더니 내일 전국에 비가 옹팡지게 온다며 걱정 말라 신다
구두마을
태기산 실타래길을 내려오면 첫 마을인 구두마을이다
구두마을 거북이가 새끼를 등에 없고 태기산으로 올라가려나 보네요
앙다문 입, 똘망한 눈 그리고 천년을 수행한 탓에 머리털은 모두 빠진 모습이다
돌 거북은 어딜 돌아다녔는지 씻지를 못해 다소 더럽지만 어미 거북이 자신이 낳은 새끼를 등에 업은 모습은 천지만물의 가장 큰 은혜이니 사람이나 짐승이나 잊으면 안 될 모습이다
감자밭 사잇길을 지나
횡성땅 둔내에 들어와
둔내면 둔방리 길가의 선정비. 송덕비, 불망비군
옛날 고을을 다스리던 관리들이 어진 정치를 베풀면 인근 고을 백성들이 그의 은덕을 기리고자 세워주던 일곱 기의 비석으로 그동안 면(面) 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것을 6번 국도변에 모아 놓아 "이 길을 지나는 관가(官家)사람이라면 니도 선정을 베풀면 이런 거 한 개쯤 세워줄 수 있다"며 누구나 선정을 베풀 것을 가르치고 있으며 비석앞으로 앞으로 화단도 예쁘게 조성해 놓았다
마치 연양갱을 세워 놓은 듯한 모습이며 제사상을 차린 듯 깔끔하다
관찰사 이형좌 영세 불망비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호조참의, 수원 부사를 지내셨고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셨던 분인데
비석들 중에서 가장 볼품없다.
예전에는 강원도 관찰사 거주하던 감영이 원주에 있었는데 조선 후기인 1895년 무렵에 춘천으로 옮겨갔는데 소양강을 품은 춘천은 강원도를 대표하는 원주, 강릉과 함께 3대 도시로 알려져 있다
횡성땅에 왔으니 소고기 국밥으로
식당은 아주 깨끗하고 주인분과 직원분들이 아주 친절하셨고 주인분께 "아침이라 많이 먹지 못하니 소고깃국은 국물만 조금 달라고 부탁드린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한 그릇 나왔다
평소에 먹어보던 소고기, 대파, 무를 가마솥에 넣고 푹 끓인 소고깃국과는 전혀 다른 비주얼인데 숟가락이 국그릇에 들어가기 싫은 듯 밥에 물을 부어 마시고 국은 남긴다
식성도 이런 식성은 없을 듯 하니 내가 봐도 밉상 손님인 듯하다.
황재고개로 가는 길
양평까지 86
두물머리까지 100은 나올 것 같다
왕복 4차선인데 차량의 이동이 뜸한 편이고
송곳봉 사이의 황재
횡성으로 내려가는 길은 무난한데 횡성에서 올라오면 얼반 고생 좀 할듯하다
길가에 자작나무가 가족인 양 듬성듬성 서있는데
자작나무 껍질(화피)은 조선시대 때 금지된 무역품인데 화살의 뼈대에 감싸는 물질이라 나라에서 밀무역하다 걸리면 초주검을 면치못할 정도로 중형을 내렸다
날씨는 덥고 슈퍼에 들러 시원한 삼다수로 발 한번 씻어주고 다시 걷는다
횡성 회다지 소리
횡성군 일대의 구비전승되는 죽은 자를 위한 장례요(謠)로 망자의 영혼을 편히 모시고 슬픔에 빠진 상주들을 위로하기 위한 노래라고 한다.
양평 67km
횡성군으로 가는 길
내가 좋아하는 아스길~~ 아스길~~
아스길 ~~ 아스길~~
걸으며 뇌를 가장 즐겁게 했을 때가 있다면
첫 100km 완주했을 때
그리고 홀로 200km 이상 했을 때
마지막으로 발바닥에 훈장을 달고 고통스럽게 완주했을 때 뇌를 가장 즐겁게 할 것 같다
내가 내 발에 무슨 짓을 한 거니
각 얼음물에 뜨거운 발을 담궜 냉찜질했더니 흐물흐물해져 20분 이상 걷지를 못해서 죽을 맛이었는데 절대 해서는 안될 행동이다.
그렇지만 시원해서 좋음
횡성 향교를 찾아서
대소인(大小人)은 무조건 내려라는 양갱을 닮은 하마비(下馬碑)가 서있고 그 옆에는 잡인의 출입을 금하는 붉은 홍살문이 서있다
공자와 유교
옛사람들은 "우리나라 지형이 노인형 해좌사향(亥坐巳向)이라 서쪽을 향해 얼굴을 들어 중국에 절하는 모양이어서 중국에 충성하고 순종하였으며 천리를 흐르는 물이 없고 백리에 걸친 들판이 없어서 큰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하였다. 중국 서쪽. 북쪽, 만주,여진은 모두 중국에 들어가 황제 노릇을 해보았으나 조선은 그러지 못했다 한다. 또한 비록 청나라에 항복한 일은 있었으나 임금과 신하 온갖 계층이 1592년 임진왜란 때 우리 조선을 구해준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고...
이런 답답한 일이 유자(儒子)들이 글로 남겨졌으니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노량에서 전사하신 이순신장군께서 벌떡 일어나실 일이다
횡성 남문 시장 앞을 지나
눈이 침침하여 소고기집이 안 보여 통과^^
횡성군청 앞을 지나
섬강을 건너며
섬강은 한강의 큰 여섯 지류 중 짧은 편에 속하며 발원지는 강원도 횡성의 봉복산 서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횡성-원주를 거쳐 남한강에 합류하기까지 101km를 흘러간다.
섬강의 유래는 송강 정철(조선 중종-선조)의 관동별곡( 선조 13년인 1580년) 중 "평구역(양주)에서 말을 타고 흑수(지금의 여주땅)로 돌아드니
" 섬강(蟾江)이 어듸메뇨 치악(雉岳)이 여기로다"
소양강 흘린 물이 어디로 흘러 간단 말인고...
관동별곡에 등장하는 걸 봐서 옛날부터 섬강이란 이름이 쓰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며, 그 외 달강 달래강으로도 불렀으며 섬강의 섬(蟾두꺼비 섬)은 두꺼비를 뜻하며 달을 의미한다고 한다.
섬강 횡성교를 건너 용두면으로 향하는데 고개 같지 않은 구리고개를 지나 횡성군 합곡리 도둑골 마을쯤에서 노숙을 하려 했으나 밤에 비가 많이 온다는 일기예보가 검색된다.
노숙하다가 비가 들이칠 것 같아 한국도로공사 횡성영업소 인근의 럭셔리한 모텔에 들어가 일찍 씻고 빨래하고 잠자리에 든다.
새벽 2시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밖을 보니 빗님은 소리 없이 오시는데 이런 날은 걷기 싫거나, 걷기 좋거나
오늘은 내일을 위해서 80k 정도 걸어 양평 북한강이 흘러 남한강에 합류하는 두물머리까지 가야 해서 밥도 굶어야 할 것 같다
우산을 펼쳐 들고 양반걸음으로 나와 걸음 하는데 횡성군 공근면 초원리를 지날 무렵 뭔가 반짝이는데 렌턴을 켜니 불빛은 사라진다
"아!~~~ 아무리 울어봐도 친구가 없다는 그 녀석?"
캄캄해야 잘 보이는 밤하늘 별과 함께 여름철의 개똥벌레의 아름다운 비행이다.
그동안 몇몇 곳에서 봤지만 새벽녘 개똥벌레의 비행은 마치 별에서 눈물이 떨어지듯한 모습이며 오염되지 않은 시골보다 더 시골을 찾은 느낌이 든다
누군가 노래했다. "개똥벌레는 아무리 울어도 친구가 없다"고... 그런데 친구가 너무 많이 보인다
개똥벌레의 아름다운 비행 카메라에 담지 못해 못내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아따리~~ 요놈! 부모님 말 안 듣기로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그놈 아닌가 봐
도로를 마치 자기 집인 양 대차게 앉아있는데 차가 오든 말든 항우의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로 눈을 부릅뜨고 있다
"야! 어디가 노 그러다 차에 칭기만 니만 디진데이"
청개선달 께서" 비키라 걸거친다" 이 한마디로 기선제압하는 눈치다
요놈 얇은 갑옷 속에 빵빵한 근육이라도 숨겼나 당체 겁이 없다
비가 내렸고 지금도 비가 오락가락하는 도로가에 온통 차에 치여 오징어개구리가 된 녀석들이 즐비했는데 두 눈 딱 치켜뜨고 있다. 차 오면 피해야 니가 산다며 잡아서 도로 밖으로 보내준다.
비 오는 날 도로에는 용감한 청개구리 전사들의 시체들이 널려있는데 이러다 청개선달이 전멸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서원면 상하터 고개
이제 비는 그만 올랐는지 우산을 접어도 될 것 같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비가내려 물기 가득한 아스길이 편하게 이어지는데 덥지도 시원하지도 않은 날씨 이런 길이라면 하루 백 킬로도 쉽게 걸을듯하다
느르게 마을을 지나다가
밭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아주머니께서 "아침은 드셨나?" 물어보셔서 "아직 쌀 구경도 못했다"하니 먹음직스러운 오이 3개를 따서 수돗물에 깨끗이 씻어서 주신다
"고맙다"며 인사드리고 "밭일 다 하시면 또 무슨일 하시냐?" 하니 오후에는 친구들하고 횡성 가서 파크골프 치신다 한다.
즐겁게 사시는듯 하여 인사드리고
풍수원마을의 풍수원 교회
강원도 최초의 성당이며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웅장한 모습의 성당으로 보인다.
갈 길이 멀어서 풍수원 교회는 가보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쳐다본다
풍수원 삼거리에서 도둑머리 고개 방향으로
강원도에는 뭔 도둑에 관한 지명이 많은지
이제 강원도땅은 끝나고 한양을 둘러싼 경기도 땅에 들어선다.
지겹게 이어지는 아스길
그동안 다녔던 거칠다?는 산(山)이 순한 맛이라면
아스길이나 시멘트길은 매운 청양 고추맛이고
서해안의 갯벌길은 캡사이신이 듬뿍 들어간 매운 짬뽕맛에 비유하면 될듯하다.
도덕고개(도둑머리고개)
이 고개는 예로부터 산세가 험하여 속칭 도둑머리고개라고 하여 행인들의 발길이 드물었다
그러함에도 횡성에서 경기도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서울을 지척에 두어 희망이 보였다는 고개이기도 했다
옛 시절에 선비들이 학문과 인격을 갈고닦는다는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서울로 과거 보러 가던 고개
어쨋던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선택권은 없는 듯 오로지 빠른 길을 찾아 올라가는 길뿐이다
그 길에 낮에 산적을 만나면 지팡이라도 들고 맞짱 떠야 했고 밤에 만나는 虎이나 狼는 그저 귀여운 동물에 지나지 않았고
깊은 산속에서 나무해서 꺾어 팔거나 시묘살이 할 때 산속 무덤에서 홀로 3년은 또 어찌 견뎌냈는지...
현대에 들어와 지구상에서 밤거리가 가장 안전한 나라임에도 이불 밖은 위험하다며 어둠이 내린 산길은 산꾼들 이외 겁나서 쉽게 걸음 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우리 조상님들께서 밤에 밖으로 나가지 않은 이유로는 범과 간 빼먹는 여우?
밤에 싸돌아 댕기지 말라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잠시 차가 다니는 도로 대신에 갈운천 따라 내려가며
이런 길은 언제나 좋고
600리터의 물통
요즘처럼 더운 날 하루에 2리터의 물을 매일 마신다면 10달간 마실 수 있는 량이다.
어렵고 힘든 시기 그러함에도 앞으로 10달간 이 정도는 마셔봐야 할 것 같다
우산은 지팽이로
좀 더 망가진 모습
그동안 천리길만 11번을 걸었는데 가장 힘들었던 길은 서ㅡ동종주로 산 넘고 물 건너는 470k 종주가 힘들었고, 가장 쉬웠던 건 장마기간에 걸었던 대간길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집 나오면 다시 집에 갈 때까지 편하게 걸으려 하는데 애들 문제나 회사문제가 아니라면 좀 더 편하게 걸을 것 같다
용두면에 들어와
이곳 용두면으로 비가 많이 온듯하다. 그러함에도 날씨는 후덥지근하다
마트에 들러 "게또래이"큰거하나 사들고 나와
원샷해주고
뭐든 물 종류는 마실 때뿐이다
용머리 마을이다 보니 비룡이니 보룡이니 하는 지명이 있고
울산에서 자전거 타고 여행하신다는 분들을 만나서 이분들은 홍천으로 가서 인제, 진부령, 속초, 미시령, 한계령으로 가셨는데 울산에는 잘 가셨는지
훗날 울산에 오면 커피 사주겠노라며 전화번호를 남겨 주셨다
황룡(黃龍)이 산다는 소(沼)
길을 이어오다가 홍천군 남면 시동리 금물산(775m) 서쪽 계곡에서 발원해 경기도 양평읍 회현리에서 남한강에 합류하는 45km의 흑천이며 경기도에서 특별 관리하는지 엄청 깨끗한 하천이다.
봉황정은 조선 초기 세조 때 대제학 양성지가 단월면 보룡리 보산정에서 돌아온 황룡(黃龍)을 위로하고
오래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 건립
참고로 황룡은 우리나라 한영 도성 경복궁 근정전 천정에도 황룡이 그려져 있는데 조선 말기 고종 때 그렸다고 한다.
지금 보이는 건물은 철종 때 소실된 것을 다시 복원했는데 누각 위로는 봉황이 춤추고 그 아래는 흑천 절벽으로는 황룡이 서리었다고 전한다.
구성대(九性臺)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태평성대를 아홉번 이루니 봉황이 춤춘다는 그런 뜻으로 만들었다고
청백리 양응함 신도비
조선 중기의 관리로 이조판서. 공조판서, 대제학을 지내신 문양공 양성지의 6대손이다
용문산 지구 전투 전적비
1951년-5월 19일부터 5월 30일까지 전개된 용문산 지구 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과 중공군 제60군 예하부대와의 격전 끝에 적을 섬멸하고 승리로 이끈 전투
용문산 전투와 더불어 이곳 이근에는 지평리 마을이 있는데 그곳도 전투를 치른 곳인데
6.25 전쟁 62주년 52대 5천 지평리 전투(유엔군-중공군 전투)
지평리 전투는 1951년 2월 13-16일 중공군의 4차 공세 때 美2사단 23 연대와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중공군 3개 사단의
집중 공격을 막아내, UN군에게 중공군을 막아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최초의 전투로 UN군이 2차 반격작전의 발판을
마련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특히 지평리 전투는 2차 대전의 ‘벌지 전투’와 함께 대표적인 ‘사주방어(All Around Defence)’ 전투로 평가받고 있다
3일 동안 완전히 포위된 미군 23 RCT와 프랑스 대대는 포위 3일째 2월 16일에 미군 1 기병 사단과 5 기병연대를 주축으로 편성된 크롬베리 특별임무부대에 의해 구출되었다.
이 전투에서 美23 연대와 프랑스 대대는 사망 52명, 부상 259명, 실종 42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반면 중공군은 5,000여 명이 사살되고, 79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 공로로 프랑스 대대는 한국 대통령의 부대표창과 두 번째의 美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았다.
오래전 지평리 전투지역을 찾으며 걸어본 산길을 바로 지척에 두고 있다.
자기 나라도 아닌데 참전해 주신 분들
우방의 피들이 모여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니
감사합니다 이 말만 떠오른다
용문(龍門) 청사
이곳 경기도 양평군은 지명이 용이 들어왔다 나가는 용문산 용문사를 비롯하여 용두, 비룡 보룡, 마룡 용담이라는 지명이 자주 나오는데 용이 살긴 살았나 보다
전국에 이렇게 많은 용(龍)을 둔 건 경북 예천군에도 용 이름이 들어간 지명이 많은데 용이 살았다는 용궁면. 용이 들어오고 나가는 용문산 용문사, 굽이돌아가는 회룡포. 작아도 아담한 이룡산. 구룡마을. 용당산... 용생 구자란 말이 실감 나는 두 곳 지역
용문산 용문사가 있는 우리나라 3대 호국사찰 용문사(龍門寺)로는 경남 남해의 호구산 아래 육룡이 지키는 용문사가 있는데 원효가 창건하였고 조선 숙종과 연이 있으며 여섯 마리의 용이 신성한 대웅전을 지키고 있고 3대 용 중에서 꼬리에 해당하는 곳이다
경북 예천 용문산 아래 용문사가 있는데 신라 천년의 옛 고찰이며 태조 왕건과 인연이 있으니 공산전투에서 얼반 죽었을 정도로 대패하고 안동 병산 전투를 하기 위해 이곳에 잠시 머물렀던 곳으로 국보 윤장대를 모셨고 3대 용문중 심장에 위치하고
양평 용문사 용문사에는 천년 은행나무가 있으며 세조와 인연이 있고 3대 용 중 머리에 해당한다
용은 왕을 상징하거나 부처님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알려져 있으니 불자라면 한번 찾아볼만하다
시간 나면 3대 용문사도 한번 걸어봤으면 좋겠는데 거리가 5백 이상 나올 것 같다
용문역 앞을 지나고
빈 깡통은 혼자 있을 때는 조용하지만 여럿이 있으면 요란하다. 이유는 없다 그냥 시끄럽다
가끔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마녀 사냥하듯 할 때도 있을 것 같은데... 그래 본들 깡통이다
작은 바람에도 요란하니 그대 이름은 빈깡통이라
세상만물은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빈 공간에서 차츰 속을 꽉 채워나가는데 켄도 처음에는 빈 공간에 액체로 채워져 일정한 무게감을 가졌으나 뚜껑이 열리면 남기기도 애매하다
콜라나맥주가 열받지 않도록 흔들어 깨우지 말았으면...
지금은 수명다한 켄이 바람에 흔들려 두더지가 밭으로 침입하는 걸 막고자 줄줄이 철갑으로 무장한 체 달려있는데
마치 동해바다 바람을 맞으며 빨랫줄에 걸린 노가리 장군이나 "반으로 굽을지언정 절대 꺾이지 않는다"는 오징어처럼 바람을 기다린다
사랑스러운 발
물집이 생길까 봐 늘 삼다수로 씻어주고 주물러 주고
양말도 좋은 것 새것으로 갈아 신으면 좋겠지만 발바닥이 새것에 적응하지 못하면 곧바로 물집이 생길 수 있어 하얀 양말이 까맣게 되도록 신는다. 그리고 슬리퍼도 찍찍이로 된 걸 선호하는데 발이 붓거나 하면 조금씩 늘려줘야 발이 좋아한다.
물집 안나게 하는 비결이 있다면 시원하게 해주고 자주 주물러 줘야하고
이미 생겼다면 방법은 참고 가는것 뿐...
잠시 앉아서 쉬는데 비가 올 듯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 몰려온다
비야! 비야! 를 시전하며
용문에서 양평으로 가는 길에
아스길인지 하천인지
소나기는 내리고 대구에도 비 온다고 한다
아스길이 냉탕으로 바뀌었고
발바닥의 피로가 싹 사라지는듯하다
양평에 들어와 이곳까지 거의 60km를 걸어왔으나 아직 20km가량 더가야 두물머리가 나올 듯하다.
해가 아직 남아있어 가까운 뷔페식당에 들어가 오늘 첫 한 끼를 때우고 나온다
비 그치고 나니 또다시 후덥지근 덥고
양평 오빈리를 지나며 오빈리는 교통의 요충지로 조선시대에 오빈, 역말이라 하였는데 일제 강점기 때 양평읍에 편입된 동네다.
앗!~~ 놀라워라
길가에 꼬라 박은 니 꼬라지나! 내꼬라지나!
저울에 달면 똑같다 ^^
시원해서 뇌가 즐거운 길
옛길은 보이지 않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지금은 사라진 철도길을 자전거길로 바꾼 곳을 지난다.
조용한길이 이어지는데
멀리서 반가운 님이 조랑말이라도 타고 달려오면 얼마나 좋을까
국수역 언저리에서
국수역을 지나고
신원역을 지나고
읽어 보시고
남한강이고
한강은 한반도의 강 중에서 유역 면적으로는 압록강, 두만강 다음으로 넓고, 길이는 압록강. 두만강, 낙동강 다음으로 긴 강이다.
한강에 합류하는 81개의 이름 있는 지류 중에서 100km 이상의 강으로는 북쪽으로 북한강. 홍천강, 소양강. 평창강, 섬강이 있으며 한강 남쪽으로 국립공원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괴산을 거처 충주에서 남한강과 합류하는 달천이 있겠다.
한강은 강원도 태백시 백두대간 금대봉 북쪽에서 발원하지만 검룡소가 한강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다.
검룡소에서 골지천이란 이름으로 흐르다가 정선군 여량면 아우라지에 이르러 오대산 국립공원에서 발원한 남대천 물과 합류하면서 조양강이라 부른다
정선읍 아래부터 잠시동안 桐江(동강) 그리고 정성군 가수리에 이르러 지장천을 만나면서 동강(東江)이란 이름으로 영월까지 이어 오다가 동강은 조선조 단종이 유배되었던 평창강(서강)과 만나면서 본격적인 남한강 이름으로 흘러 단양-충주-여주-양평-하남-서울-인천-김포 서해 바다까지 494km를 지난다
한강은 발원지부터 충북 단양까지 서, 남 방향으로 220km 흘러와서 단양군부터 서, 북방향으로 틀어 서해바다로 흘러들고 한양으로 가는 기나긴 강길 따라 사연도 많지만 구슬픈 노래 가락의 정선 아리랑과 그 속에 숨은 비경길 있다
백두대간 석병산에서 발원한 임계천이 골지천(한강)과 만나는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봉산리 이곳부터 아름다운 경치는 단양까지 180km 이어진다. 모두가 석회암 성질의 바위가 멋진 곳이다.
*참고로 함백산 금대봉 아래 검룡소(儉龍沼) 한강의 발원지이며 하루 2천 톤가량의 물이 흘러나오며
오래전 이무기가 마을로 와서 지랄을 하니 마을분들이 참다못해 자갈돌로 구멍을 메꾸어 버렸고 그 이후로 이무기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길 없단다.
이 이야기는 허구이며 1984년 전에는 없었던 이야기로 그전에는 물구덕이란 이름이었으며 검룡소의 이무기 전설은 태백의 향토 사학자인 김강원이란 분이 아무것도 없던 태백의 관광 차원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인데 이제는 정설로 자리를 잡았다고 볼 수 있겠다
금대봉 아래 있다고 해서 금룡소였으나 이후에 태백산의 단군왕검에서 검(儉) 자를 발췌하여했다는 설이 있다
또 비가 오려나 하늘이 수상하니
살은 거의 5kg 빠진 상태며
배가 홀쭉하니
다음날 출근이라 마음만 바쁘다
이곳에서 조만간에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로 가신다는 중년의 부부를 만나서 해 빠질 때까지 이야기 나눈다
"왜 가시는지 모르겠으나 어지간하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천리길을 걸어 보라"하니 "그건 재미가 없단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재미없는지" 말씀해 달라니
"숙식도 그렇고 아스팔트길에 물집 생기는 게 싫고 무엇보다 거리가 짧단다"
스페인 산티아고는 거리도 700 정도로 길고 그런 부분이 잘 돼있다고 하시는데 "왜 외국까지 가서 그렇게 걸으려고 하시는지 모르겠다"고 하니 "안 가본 사람은 모른다"며 꼭 스페인 가시겠다고 한다.
그래서 듣고 싶은 말만 듣는것 같아 외국 가보지 않았음에도 외국 가면 좋은 점 맛있는 것, 좋은 호텔에서 잠도자고 대충이야기 해주고 물집은 스페인 반창고가 제일이라고...
젊은 친구들 같으면 어떻게 하던 구슬려 국토종주해 보라 하겠는데 이런 이야기 나누다 보니 노루꼬리 같던 해는 홀딱 넘어가버렸다. 시간 아까비
양수역에 도착
오늘은 75km를 걸어와 소나기라도 올듯하니 노숙은 힘들 것 같고 여관방을 구해서 자야 할 듯하다
하늘이 온통 내 마음처럼 무겁게 느껴진다.
길을 걸으며 또 다른 길을 찾아간다는 생각
그 길은 부분적으로 걸었던 길이지만 다시 자르고 붙이고 연결해야 또 다른 길 위에 서게 만드는 하나의 재료가 된다
비록 검은 먹구름이 몰려오는 하늘과 같이 될지라도 가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두발은 멈추지 않는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 어느 모텔에 들어가 씻고 빨래만 해 놓고 눈을 감는다.
비는 조금 내렸는데 얼마나 온 건지
마지막날 2025년 6월 17일 화요일
내일 출근해야 해서 새벽 01시쯤 밖으로 나온다.
삐그덕 거리는 북한강 나무다리를 건너며...
앞에서 허연게 불쑥 솟아 올라올 것 같아 드럽게 무섭네~~^^
새벽이지만 갈대밭에서 개개비 소리가 처량하게 들린다
달이 떠도 꼭 날 째려보는듯한데 별이 한,두개 보이더니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고 이런 심심한길을 걸을 때는 계산하거나, 생각하거나 혹시 과거시험에 나올지 모르는 문제를 생각해 본다
우리 은하에는 약 4천억 개의 별이 있다는데 그걸 숫자로 센다면 얼마나 걸릴까?
의자에 앉아 노트를 꺼내고 계산해본다
하루 24시간이면 총 1,440분이고, 86,400초
1년이면 8,760시간, 526,000분. 31,526,000초다
백 년이면 3,152,000.000초
천년이면 31,526,000,000초
만년이면 315,260,000,000초
초당 계산하다면 1초에 한 개씩 세더라도 12.676년 걸릴 것 같고, 인간의 한세대를 백 년이라 가정했을 때 127세대에 걸쳐야 셀 수 있는데(인간의 한세대는 보통 25년 정도) 밥 먹을 시간, 잠잘 시간도 없다. 계산이 틀리다 생각되시면 밤하늘 별 보고 헤아려 보시기 바란다
잠시 계산기 들고 4천억 개를 1초에 한 개 센다면 4천억 초 얼마나 걸리까 하고 밤하늘을 보다가 다시 갈길 가는데 그나저나 만년이면 신석기시대가 아닌가
1원짜리 동전을 1초에 한 개씩 1년간 정확히 세고 가지고 가라면 3천1백만 원 정도 되는데 못 할 것 같다
잠이 와서 잠 깨려고 별보고 별 쓸데없는 상상을 해본다
능내역을 지나서
어디서 우는가
장닭소리가 새벽임을 알리고
팔당댐을 지나고
공사 중인 제2 팔당대교?
한강에는 약 30개의 다리가 있는데 예전에는 물을 건너던 나루터가 있던 곳으로 그 옛날의 희로애락을 함께한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한강이 흐르고 인근에는 남양주시가 있다.
도로길보다 한강 구경차 자전거 길로
달리는 분들도 있고 걷는 분들도
강댕이와 산책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내가 젤 거지 같다"
덕소 나루터를 지나고
수석리 토성에서 본 아침 풍경
수석리 토성은 한강을 지키기 위해 축조된 백제시대의 토성으로 해발 100미터에 자리하며 타원형으로 만들어졌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는 사실상 무용지물로 방치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편으로 고구려의 남침으로 백제가 수도를 공주로 옮긴 이후 군사를 주둔시켜 국방의 요새로 삼았던 곳인데 남쪽으로는 남한산성을 의지하고 북쪽으로 고구려를 견제할 수 있는 곳이다.
양주 조 씨 개인 사유지인 수석리 토성 위에 자리하는 조말생 묘소로 잠시 가니 키높이의 철재 울타리가 있어 들어가 보지 못하고 구경만 한다.
조말생은 조선초기의 태종, 세종조에 이르기까지 병조판서로 8년간 재임하셨던 분으로 두 왕의 곁에서 35년간 나랏일을 보셨던 분이다. 조말생은 세종께서 무척 아꼈던 분인데 뇌물 수수로 귀향도 좀 다녀오셨던 분이다.
물 중에서 맑은 물 구정물 그리고 뇌물이 있는데 요즘 나라일을 보면 대부분 뇌물이 좋은 듯 안 걸리면 좋고 걸리면 망신살이다
왕숙천을 거슬러 올라가서 구리역으로 향한다.
왕숙천은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신팔리 한북정맥 수원산 동, 남쪽 계곡에서 발원해 남양주시 진접읍-퇴계원읍-경기도 구리시-구리시 포평동에서 한강에 합류하는 39km의 짧은 강이다
한국의 100 대강 중에서 왕과 깊은 연관이 있는 하천으로 울진의 왕피천(삼국시대 초기의 소국인 실직국인 안일왕)과 함께 왕숙천도 나랏님(이성계)이 오셨다간 강이니 이성계가 남양주시 진접읍 팔야리에서 팔일(八日)을 머물렀다 해서 왕숙천이라 유래가 된 곳이며 무엇보다 왕숙천은 조선왕조의 많은 왕들이 잠들어 있는 명당 중의 명당터이다.
그러함에도 물은 드럽게 흐른다
구리 구리하다는 구리역을 지나
날씨가 덥고 어디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했으면 좋으련만...
드디어 한양인가 하노라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 격이며 근심걱정을 내려놓는다는 망우리 고개에 도착
인근으로 공동묘지가 있는데 유명한 분들이 많이 누워계신다
여기서 욕인가 칭찬인가?를 듣는데
어느 분께 "흥인지문(동대문)까지 얼마나 가야 하는지"여쭈어 보는데
행색이 남루한데 그 몰골을 보자면 더럽게 보이는 슬리퍼에 흰 양말은 까맣고, 갓은 떨어지고 꽁지머리는 헝클어졌고 수염은 삐죽삐죽 자랐고, 보따리는 일주일간 메고 다녀 땀냄새가 진동하고, 피부는 햇볕에 타서 동남 아시아인으로 급 변했고...
그래서 그런지 "노숙자냐?며 동대문에 왜 가냐?" 한다
"ㅎㅎㅎ 동대문에 팔도 거지 잔치한다"는 멘트 한마디 날려주고 "멀리 경북 울진ㅡ동해ㅡ삼척ㅡ강릉을 돌아 다시ㅡ평창ㅡ횡성ㅡ양평을 지나 이곳까지 만 6일 동안 천리를 걸어서 왔다고 하니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멋진분이다"고 하신다.
이건 분명 욕은 아니겠지?
이제 한양에 도착했으니 서울 사람구경하며 지난다.
그나저나 과거시험을 봐야 하는데 주상전하께서 외국으로 출타하셨다는 기별이고 광화문은 노는 날이라 하여 굳게 닫혀있다고 한다
결국 이번 과거시험도 못 보고 발길을 돌려야 할것같다
이제 마지막 기회는 강화도에서 한양까지 강화대로 100k 조금 더 가면 끝인데 담에 합격하겠지...
고려 광종 때 시작한 과거 시험을 900년 간 실시해서 2만 명이란 유생들을 기쁘게 했지만 그로 인해 슬퍼했던 사람은 얼마나 많았는지 퇴계 선생께서도 3번 떨어졌던 과거시험 개개인의 영광도 슬픔도 1894년 갑오경장 때 과거시험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삼국 시대 때는 혈통관계였다면 고려시대는 문벌 귀족, 권문세족, 조선에 들어와 혈통이나 문벌을 보지 않고 오로지 문방사우를 믿으며 과거를 통한 실력에 의해 인재 등용을 했음에도 전체인구에 천민이 대다수였다
아스길은 이어지고
양주시 산북동 임꺽정봉 북쪽 경사진 계곡에서 발원하는 중랑천은 양주시-의정부-서울시 도봉구를 지나 동대문구, 성동구 옥수동에서 한강에 합류하는 38km의 강이며 한강으로 흐르는 강들은 대부분 깨끗하지 못한데 이곳도 그와 마찬가지로 더럽다
한북정맥 북쪽의 남은 강들은 임진강 유역으로 흐르는 한탄강,그리고 한탄강 유역으로 흐르는 포천천과 연평천, 신천천이 있고, 한북정맥 남쪽으로 흐르는 이름 있는 하천으로 중랑천, 왕숙천, 조종천, 가평천, 한강지맥에서 발원하는 흑천, 제천천, 주천강이 있겠다
그리고 한양에서 가장 핫한 하천이 있다면 바로 중랑천 지류인 청계천일것이다. 청와대 뒷산인 북안산 서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중랑천을 만나기까지 한양 도심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14km의 하천이다.
회기역 앞을 지나
청량리역 앞
청량리 청과물 시장을 지나
흥인지문
궁궐을 중심으로 사방팔방 8개의 숨구멍(성문)이 있었으니 유교의 인의예지(정)신(仁義禮志信)을 상징하는 4大門과 4小門으로
나라의 전란 때는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사활(死㓉)이 걸린 구멍(성문)으로 살고자 할 때는 숨구멍이었으나
전란때는 죽음의 구멍으로 너나 할 것 없이 지켰던 구멍이건만 두 번의 전란(임란, 병자)을 통해서 뭐 하나 지켜내지도 못한 사방팔방 문(門)이기도 하다
한양을 지키는 숨구멍 같은 4대문과 4소문
간략하게 사방팔방 방패 역할을 했던 문을 살펴보면
남대문:불의 방패로 지어진 건물로써 조선초기 정도전이 중국의 황제가 살고 있는 궁(宮)이 남쪽으로 있다고 하여 경복궁 문을 남쪽으로 내고자 할 적에 무학대사께서 궁을 남쪽으로 지으면 훗날 200년 후에 불탈 것이라 예언을 했는데 200년 후에 임진왜란 때 궁궐이 불타 전소되었다
그 외 우리나라 4대문과 4소문 대부분 일제 때 일본에 의해서 훼손되었다는 점 강조하면서
동대문:일본에 의해 주변의 성곽이 모두 헐어졌지만 문루 자체는 무사했는데 임진왜란 때 고니시가 여주를 거쳐서 한양으로 입성할 때 들어온 문이고, 가토기요마사는 용인을 거쳐 숭례문으로 들어와 훗날 일본의 개선문(凱旋門)으로 여겨 문루가 보존되었다.
숭례문인 남대문은 영남대로와 삼남대로의 마지막 종착지점이라 늘 많은 사람들로 붐 빈 곳이다.
서울에서 전국 어디를 가던 기준점이 숭례문이다
참고로 서울에서 대구까지 거리를 잴때...
서대문:조선으로 들어오는 사신을 맞이하던 문이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보름만인 4월 30일 선조께서 일단 튀고 보자며
도망 나간 문인데 훗날 일본이 전철을 만들며 철거했으며 지금은 흔적이 없고 남은 건 현판만 어딘가에 존재한다
북대문:일제에 의해 철거되지 않은 문으로 성안의 음기를 누르기 위해 만든 문인데 거의 닫혀 있는 문이다.
북소문: 창의문은 앞에서 이야기를 했기에 생략하고
서소문: 소의문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처형장으로 최인을 능지처참 한 곳으로 유명했으며
조선후기 때 천주교 박해 때 많은 천주교인을 처형한 곳이다. 일제 강점기 때 철거되었고 확실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동소문:이 문은 강원도나 함경도로 가는 문
남소문:조선시대 때 8개의 문중에서 가장 불길한 문으로 성안의 시체가 밖으로 통과하는 유일한 문으로 불렸고
청계천 생활수와 함께 시구문(屍口門)이나 통곡문(痛哭門)으로 더 많이 불려 산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많이 드나들던 문이며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대문이 아닌 이문을 통해서 남한산성으로 도망가셨다
얼마나 급했으면 시체가 드나들던 문으로 왕이 나가셨을까?
선조는 서대문으로 냅다 튀었고, 인조는 남소문으로 각각 도망을 가셨다
그러한곳에 10 일 11시 35분에 도착 408km 만 6일하고 한 시간 소요
내일 회사 출근 문제로 부지런하게 왔건만 경복궁은 문이 닫혀 들어갈 수 없었으며 갔다가 곧바로 서울역으로 향한다.
어느 노숙자분께서 사진을 담아 주셨는데 사진을 처음 찍어본다며 손가락 하나를 덤으로 담아 주셨습니다.
이번 걸음에 도움주셨던 노송님, 산이 지부장님. 깽이님. 타키님, 솜주먹님. 보라님 홍대감님께 감사드리며
님들 덕분에 보다 쉽게 걸을수 있었습니다
아참!배낭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시죠
비비색 텐트,침낭,돗자리,칼,양말 5켤레,수건 두장, 갈아입을 옷, 등산화, 배터리 5개,렌턴 2개, 노트, 바르는 반창고, 붕대, 생수 4리터, 게또래이 2병, 육포 2 봉지,기타...
대략 15kg 조금 더 될것 같다
다음날 회사에 출근해서 땡볕에 아주 고생 무자게 하고 집에 왔는데 다음에 갈길 3대용문(三大龍門)길 또 지도를 보게 된다.
땡볕에 아직 고생 덜한 듯하다.
첫댓글 팔도거지 잔치!ㅎㅎㅎㅎ 후기의 모든 내용을 빨아 먹는 문장입니다.ㅋㅋㅋ 욕보셨습니다.
물집이 저렇게 잡힌적이 없어서 군대 있을 때도 본적도 없구요! 으~으~
대단들 하십니다. 보기만 해도 아파서요! 횡성한우는 강릉에서 먹어 봤는데... 횡성에서는 못 먹어 봤습니다.ㅎㅎ 다음 길이 용문면 지날때 말씀하신 약500키로 언급한 그 길 맞으시나요?
남해>> 예천 >> 양평 (국토 정중앙 종단?)
ㅎㅎ 암튼 관동대로 일주일간의 발걸음 잘 봤습니다.^^
물레길 이정표와
함께 서계시는 모습이
너무 행복한 것인지 ~~~~~~~~~
그저 그모습 보고 웃어 봅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이틀 지나면 앉아서 쉬는 것이
쉬는 것이 아님을 깨닭고요
저 부르신건 아니죠 ㅋㅋ
ㅡ그대이름은 빈깡통 ㅎㅎ
몇번을 읽었는지 모르겠네요
ㅡ과거
ㅡ현재
ㅡ미래를 왔다갔다하는 Back to the Future
수고하셨습니다
어릴적 아스길 위로 누운 청개징어..
비가 온 다음 날이면 빈 곳이 없을 만큼
빼곡히 누워있던 청개징어였는데..ㅋㅋㅋ
그때나 지금이나..
차가 있건 없건 대담하기로는 호랑이 못지 않은 그야말로 청개선달님 이시네요!! ㅋㅋ
눈알 말똥말똥한 청개선달님 반갑게 보고 갑니다^^
보기만해도 더운 기운이 느껴집니다 ㅎㅎ
양수역 한강기맥하며 본게 엊그제 같은데 반갑네요.
수고 많았습니다.
3대용문길이라 음..
예전에 어느 역사 강사분이 조선시대 과거제도를 설명하면서,
요즘으로 치면 고시제도 1차, 2차, 3치 시험인데,
초시는 지방 및 한양에서 시험을 치뤄 합격자 선발해서 생원, 진사 명칭 부여
복시는 초시 합격자 중 한양에서 시험을 치뤄 33명 선발, 성균관 입학 자격 부여
전시는 성균관에서 공부 잘 하는 놈 선발해 왕 앞에서 시험 치뤄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
순위를 메겨 관직을 부여, 이중 갑과 1등이 장원급제인데 양반이라고 자랑하는 집안에
장원급제 1명도 없는 집안이 허다하다고 했습니다.
이야기의 요는 그 강사분 윗대 조상님이 과거준비를 하면서 먹가는 시간도 아까워
단지에 물을 받아 대청마루에 글을 쓰시며 공부를 했는데
어찌나 집중을 하셨던지 소나기가 와 마당에 고추를 적시는데도 정신없이 공부를 하셨답니다.
결국 70세까지 초시에도 붙지 못하고 돌아 가셨답니다. 허생원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고 어정쩡하게 공부해서 먹고 사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방장님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습니다.
지금과 같이 건강하시고 남은 과거길 무탈한 걸음 기원합니다.
장원급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파이팅.!
으악.. 제 발을 다시 보니
어찌나 사랑스러운지요^^
400KM 아스길
변태라면 변태가 맞는듯 400KM라는
그 길이 그립고 시간만 허락한다면
또 걷고 싶으니 말입니다.
구두마을 마을회관 거북이 모자에 미소지어보며
둔방리 마을 길가의 양갱이비석이며 어느분의 솜씨일지
앙징맞은 화단에 그 마을분들의 인품이랄까~
그런게 전해져 오는듯한 산행기입니다.
시커멓게 타버린 방장님
천리걸음이라는 것
검정콩알눈을 가진사랑스러운 청개선달님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도 궁금해지고
카스와 코크의 만남은 운명이었을까??^^
이야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이번 걸음 마지막편
음악 좋고~
진짜 고생 많으셨네요. 어휴~
고된 몸에 영양보충 고기좀 많이 많이 드시길요.
깽이님 발바닥 물집은 전에 글에서 봤는데 참 대단한 정신력입니다.
노송님을 몇년 전에 광교산에서 한번 마주쳤는데 저는 사진을 많이 봤기에 금방 알아봤고 노송님은 저를 모르시기에 그래도 그냥 지나치긴 그래서 안녕하세요 크게 인사를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ㅎ
소고깃국을 놔두고 밥에 물만 말아 드셨다구요.
방장님 식성이 까다로우신 것일 수도 지쳐서 안 넘어가는 것일 수도요.
얼음 주머니에 발을 담그는건 상상도 못 했는데 얼마나 발바닥이 뜨거웠으면 그랬을까 공감도 됩니다.
수년전 고향 시골 어르신들 운동하러 화성시청 있는 남양으로 수영장 다니신다는 말 듣고 많이 변했구나 했는데 골프 치시는 분들도 있으시군요~
애들 문제 회사문제 그리고 집안문제가 누구나 겪는 가장 큰 난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긴 산행으로 모습이 그래도 초면에 노숙자냐고 묻는건 실례인 듯 합니다 ㅎ
저도 지맥 하고오면 바로 다음지맥 찾아보는데 방장님께서도 비슷하시군요.
더운 날씨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스팔트길은 바퀴달린 물건들을 위한 길이지
다리달린 동물들을 위한 길은 아니더군요.
산길은 박배낭 메고 며칠을 걸어도 물집이 안 잡히는데
포장길은 가볍게 메고 하루만 걸어도 물집이 잡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