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제2년 2월 7일 욥기 6장 찬송가 449장(새찬송가 394장)
01.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02. 나의 분한을 달아 보며 나의 모든 재앙을 저울에 둘 수 있으면
03. 바다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럼으로 하여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04.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05. 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06.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07. 이런 것을 만지기도 내 마음이 싫어하나니 못된 식물같이 여김이니라
08. 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나의 사모하는 것 주시기를 내가 원하나니
09.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으실 것이라
10.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무정한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1. 내가 무슨 기력이 있관대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관대 오히려 참겠느냐
12. 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나의 살이 어찌 놋쇠겠느냐
13.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지혜가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
14. 피곤한 자 곧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어늘
15. 나의 형제는 내게 성실치 아니함이 시냇물의 마름 같고 개울의 잦음 같구나
16. 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취었을지라도
17. 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
18. 떼를 지은 객들이 시냇가로 다니다가 돌이켜 광야로 가서 죽고
19. 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20.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리고 낙심하느니라
21. 너희도 허망한 자라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22. 내가 언제 너희에게 나를 공급하라 하더냐 언제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로 예물을 달라더냐
23. 내가 언제 말하기를 대적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포악한 자의 손에서 나를 구속하라 하더냐
24.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25. 옳은 말은 어찌 그리 유력한지, 그렇지만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뇨
26. 너희가 말을 책망하려느냐 소망이 끊어진 자의 말은 바람 같으니라
27.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벗을 매매할 자로구나
28. 이제 너희가 나를 향하여 보기를 원하노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리라
29. 너희는 돌이켜 불의한 것이 없게 하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돌이키라 내 일이 의로우니라
30.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궤휼을 분변치 못하랴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1차 답변”
본 장에서부터는 순환적인 변론이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즉 한 사람이 자기 주장을 하면 그에 대해서 욥이 대답하는 방식으로 변론이 진행됩니다. 6, 7장은 욥이 엘리바스의 말에 대답하는 내용으로서, 욥으로서는 많은 말을 하지만 그것은 엘리바스에게 답변을 하거나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기보다는 하나님을 향해서 하는 독백에 가깝습니다. 이는 엘리바스의 주장이 부분적으로는 사실일지라도 욥 자신의 경우와는 대부분 무관하기 때문에 반박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욥은 위로를 기대했던 친구들로부터 질책의 말만을 들으면서, 그들에 대한 실망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의 불평을 정당화하는 욥(1-13절)
【1-13절】우리는 욥기를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그릇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즉 욥은 처음에는 순전하고 착하여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온전히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세 친구가 사정을 알지 못하고 계속 논박하자 실수를 저지르게 되지만 신앙의 순수성만은 잃지 않아서 결국엔 더 큰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이런 시각에서 욥기를 읽는다면 우리는 욥기의 귀중한 요점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욥기는 신앙과 불신앙, 선과 악의 단순한 구도의 문제가 아니라, 욥의 경우에서처럼 의인의 고난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인간 구원의 문제에 대한 메시지를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특히 의인의 고난의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의 신비에서 이 주제는 그 절정에 다다릅니다. 그러므로 계속되는 친구들의 공박에 대한 욥의 대항과 불평, 자신에 대한 변론들도 그런 맥락에서 읽어야 합니다.
욥이 고난 가운데서 구하고 사모하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라고 말합니다(3:20-23 참고). 그러나 욥은 그처럼 오직 죽음밖에는 더 바랄 것이 없는 고통 가운데서도, 스스로 위로를 받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10절). 즉 그는 비록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신실하심을 믿어 왔으며 지금도 믿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더욱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사실 욥은 고난 자체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왜 자기에게 고난이 찾아왔는지에 대해서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하나님의 침묵만이 계속되는 것에 대해서 불평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욥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평가하셨는데(1:8; 2:3), 욥이 이처럼 죽음을 갈망하고 불평을 한다고 해서 그 평가가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욥의 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정당하다고 인정하십니다(42:7-8).
친구들에 대한 실망을 나타내는 욥(14-30절)
【14-30절】욥은 “피곤한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어늘, 나의 형제는 내게 성실치 아니함이 시냇물의 마름 같고 개울의 잦음 같구나”(14-15절)라며 고통 중에 있는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하려 들지 않고 인과응보의 논리로 자신을 공격하는 친구들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14절은 “비록 절망한 사람이 전능자 경외하기를 그만둔다고 하더라도 그의 친구들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뜻으로, 욥은 친구들에게 지혜와 진정한 위로를 바랐으나 오히려 부끄러움과 혼란만 더하게 되었다고 불만을 표현합니다(20절). 그의 친구들은 욥을 동정하고 힘과 용기를 주기는커녕 책망하고 공박하여 더욱 더 절망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욥의 심정이 예수님의 경험과 유사함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친구들에게 버림을 받으셨고(마 26:56), 또한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느끼셨습니다(마 27:46).
◈ 묵상을 돕기 위한 질문
1. 욥은 죽음을 갈망하면서도 무엇 때문에 위로를 받으며 기뻐할 수 있다고 말합니까?
2. 욥은 친구들의 무정함을 빗대어 그들이 어떤 사람들과 같다고 말합니까?
◈오늘의 기도◈
“누군가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게 하시고, 나에게도 진정한 친구가 있게 하소서!”
◈믿음의 글◈ “친구에 관한 짧은 낙서”
영국에 있는 한 출판사에서 상금을 내걸고 ‘친구’라는 말의 정의를 독자들에게 공모한 적이 있었다. 수천이나 되는 응모엽서 중 다음 것들이 선발되었다.
‘기쁨은 곱해 주고 고통은 나눠 갖는 사람’
‘우리의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
‘많은 동정이 쌓여서 옷을 입고 있는 것’
‘언제나 정확한 시간을 가리키고 절대로 멈추지 않은 시계’
하지만 1등은 다음의 글이었다.
“친구란 온 세상이 다 내 곁을 떠났을 때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다.”
- ‘작은 이야기 큰 깨달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