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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거름이 되어 별처럼 고운 꽃이 피어난다면, 온 몸을 녹여 네 살이 될게.”(‘강아지똥’) 하찮고 쓸모없이 여겨지던 자신의 존재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동화 ‘강아지똥’의 작가 권정생씨가 17일 오후 2시17분쯤 대구가톨릭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0세. 20대부터 만성심부전증, 신장결핵으로 오랜 기간 투병해온 고인은 기구했지만 운명을, 사회를 탓하는 대신 평생 올곧고 소박한 마음으로 살다갔다. 아름다운 글로써 세상을 비춘 고인의 삶은 대가없이 민들레의 거름이 되기를 자처한 강아지똥과 다름없었다. 고인은 스무살 무렵 경북 안동 일직면 조탑리에 정착한 뒤 평생을 홀로 누옥에서 보내며 글을 써왔다. 1937년 일본 도쿄 혼마치 뒷골목에서 가난한 노무자의 아들로 태어나 해방후 조국으로 돌아온 고인이 조탑리에 정착하게 된 것은 지병인 결핵 때문이었다. 가난이 원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객지를 떠돌며 나무와 고구마, 담배 등을 파는가하면 재봉틀상회 점원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 앓게 된 늑막염과 폐결핵이 신장결핵과 방광결핵으로 번져나갔다. 스무살 때,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병구완을 하다 64년 세상을 떴다. 혼기가 찬 여동생과 늙은 아버지에게 부담이 될까봐 집을 나온 뒤 유랑걸식을 하다 정착한 곳이 바로 조탑리다. 67년 병마와 싸우며 시골예배당 ‘종지기’로 문간방에 더부살이를 하면서 고인의 문학인생은 시작됐다. 객지를 떠돌던 시절, 문학에 눈뜬 고인은 여름이면 비가 새고 겨울이면 생쥐가 발가락을 깨무는 작은 방에서 연필을 꾹꾹 눌러가며 동화를 썼다. 비오는 여름날 처마 밑에 굴러다니는 강아지똥을 보고 쓴 ‘강아지똥’(1969)으로 제1회 기독교 아동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식민지와 분단, 전쟁이 가져온 빈곤과 참혹함을 담담하게 그리고 앉은뱅이 아줌마, 매맞는 할미소, 미친 어머니 등 버려지고 보잘것없는 존재들이 그의 펜을 통해 생명력을 얻었다. 고통 속에서 태어난 그의 동화는 한국 아동문학사에 당당히 한 획을 그었다. 각각 60여만부가 넘게 팔리며 아동문학 최대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로 자리한 ‘강아지똥’, 전쟁후 가난과 소외, 폭력 앞에서도 꿋꿋했던 절름발이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몽실언니’(1984)가 그러하다. 고인은 ‘사과나무밭 달님’ ‘하느님의 눈물’ ‘오소리네집 꽃밭’ ‘점득이네’ 등 100여편의 동화를 발표했고 제1회 기독교 아동문학상(1969),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1975), 제22회 새싹문학상(1995) 등을 수상했다. 그러나 “우리 아동문학이 과연 어린이들을 위해 무엇을 했기에 이런 상을 주고받습니까”라며 수상을 거부하기도 했다. 96년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을 끝으로 글쓰기를 중단했다. 창비어린이 김이구 이사는 “고인은 전쟁 속에서도 꿋꿋하게 삶을 살아가는 몽실이와 같이 생명과 인간 존엄성을 옹호하는 작품을 써왔으며 2003년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내용의 동시 ‘바그다드 알리 하느님’을 발표하는 등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자였다”고 회고했다. 빈소는 안동병원이며 발인은 20일 오전 9시. 장지는 생가가 있는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다. 유족은 없으며 장례는 6·15 민족문학인협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가 공동 주관하는 민족문학인장으로 치러진다. (054)820-1679 〈윤민용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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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05월 21일 18:12:16 | ||||||||||
타계한 동화작가 권정생의 삶은 ‘녹색 세상’을 열고 홀연 사라지는 흡사 봄바람 같았다.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지만, 세상을 위해서는 많은 것을 남겼기 때문이다. 혈육은 아예 없었고 5평짜리 흙집도 허물어 자연으로 돌려보내라고 지인에게 당부했다. 혹시라도 자신을 기념하는 일은 제발 없도록 하라고 일렀다. 그가 생전에 남긴 유언은 새삼 우리 주위를 돌아보게 한다. ‘인세는 굶주리는 북녘의 어린이를 위해 써달라. 남과 북이 통일을 이뤄 잘 살았으면 좋겠다. 시신은 화장하여 집 뒷산에 뿌려 달라.’ 권정생은 진정 남아있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는 우리 시대에 가장 진실한 동화작가이며 시인이었다. 삶과 문학이 일치했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바보, 장애인, 노인 같은 약자들이거나 똥이나 돌, 풀처럼 볼품 없는 것들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존재들, 그것들을 가장 따뜻하게 바라보고 보듬었다. 그는 평생 시달렸던 병마까지도 쓰다듬고 달랬다. 자신도 가장 낮은 곳에서 세상의 한 귀퉁이를 빌려 썼다. 새가 나뭇가지에 둥지를 틀 듯이. 그리고 그 둥지까지 없애라 일렀다. 진정 무소유의 삶이었다. 욕심이 욕심을 낳는 이 시대에 그와 함께 있음이 우리에게 위안이었다. 그는 어린이 때문에 인세가 생겼으니 어린이를 위해 쓰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했다. 인세를 돌려줌으로써 그가 남긴 100여편의 동화까지 영감의 원천이었던 어린이에게 나눠주었다. ‘너희들에게서 받았으니 내 것이 아니다.’ 세상 끝에서도 그는 어린이처럼 맑았다. 세상의 가식과 허울을 사르고 권정생은 떠나갔다. ‘강아지 똥’이 부서져 민들레 속으로 들어가 꽃을 피웠듯이 그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고 떠났다. 그는 비움으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채워주었다. 이름을 팔고, 지식을 늘리고, 재주를 부풀리는 데 익숙한 우리들에게 권정생은 나눔과 배려와 낮춤이 무엇인지를 일깨우고 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주위의 모든 것을 섬기다 사라진, 그 끝이 아름다운 사람. 우리는 작가 이전의 성자, 권정생을 떠나 보냈다. |
[기고] 권정생 선생님, 거기 가셨나요? | |
입력: 2007년 05월 22일 16:33:06 | |
지금쯤 어머님은 만나 보셨겠지요. 어떠세요. 선생님께서 그리도 염원하시던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곳에 계시던가요? 슬픔도 고통도 싸움도 없는 나라에 살고 계시던가요? 그렇다면 저희도 안심입니다만, 무엇보다도 오줌 받아내는 보따리를 차지 않아서 기쁘기 짝이 없습니다. 정말 가실 때 뵈니 그렇더군요. 이젠 배에 난 구멍만 아물면 될 것 같습니다. 좋아지면 어머니 손잡고 그렇게 가고 싶어 하신 청송 화목 근처 외삼촌 살던 칠배골도 가보시고, 안동 장터 어디 자장면도 마음 놓고 많이 드시길 바래요. 모든 것을 어린이들에게 주고 가셨지만, 어머니 모실 차비랑 자장면 사드릴 돈은 그래도 좀 가지고 가셨겠지요? 저런, 얼굴이 빨개지셨네요. 뒤춤에 감추신 거 다 알아요. 걱정 마세요. 거기선 선생님도 어머니 손을 잡은 어린이가 분명할 텐데, 뭐 어때요. 부모 살아생전 효자 별로 없고, 죽은 뒤엔 불효자 드문 게 인생인 거 같아요. 선생님 가시고 나니 이렇게 효자인 척 하는 제 꼴 좀 보세요. 마치 선생님 돌아가시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호상을 맡아 일사천리 장례를 치르고 무슨 공치사를 바라는 양 이러고 있음을 용서해 주세요. 생전에, 선생님 뭐 필요한 거 없으세요, 뭘 좀 해드릴까요 하면 다 물리치시고는 오직 한 가지 “그케 해주고 싶은 게 있으만 내 대신 아파주기나 해라. 쯧쯧. 거 봐라. 그것도 못 하믄서 뭘 자꾸 해 준다꼬 그노” 라고 말씀하셨지요. 이젠 그런 핀잔도 들을 수가 없게 되었네요. 선생님. 이젠 하늘나라를 생각하면 든든합니다. 그동안 우리 어린이들이 굶주리고 슬프고 아프고 해도 참 무심한 하느님들이 많으셨는데, 이젠 선생님께서 가 계시니 뭐가 걱정이겠어요. 이젠 시간만 나면 그런 어린이들을 찾아가셔서 위로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실 텐데 말이에요. 선생님의 작품은 그런 의미에서 불경이고 성경이며, 그래요, 이미 아이들을 위한 경전이 되어 있으니 하느님 역할만 해 주시면 되겠네요. 선생님이 그리신 착한 하느님 말이에요. 아니, 평소 착하기만 해서는 못 쓴다고 하셨으니, 착한 마음을 몸으로 움직이는 하느님이면 좋겠네요. 마음이 바쁘시겠지만 서두르진 마세요. 우선 어머님하고 좀 지내시면서 맛난 것 많이 드시고 몸도 돋운 다음에 하세요. 괜히 성치 않는 몸으로 과로하여 거기서도 오줌보 차고 계시면 큰일 나잖아요. 오줌보 찬 하느님은 좀 그렇잖아요. 참, 이번에 선생님 누나, 동생, 조카들이 다 오셨어요. 반가웠죠? 모두들 많이 슬퍼했어요. 특히 조카들이 많이 안타까워했답니다. 생전에 누구에게나 찾아오지 마라는 말을 자주 하셨는데 조카들에게도 그러셨나보죠? 그것은 남에게 피해 끼치기 꺼리는 선생님 성품인데, 그걸 모르고 많이 섭섭했던 것 같아요.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그것이 오해였다는 걸 알고 무척 가슴 아파했답니다. 우리들도 가족들이 선생님 챙기지 않는다고 오해한 것도 풀렸답니다. 5월입니다. 10년 전 이맘때쯤 내 아버지 저기 가셨는데, 올해는 또 찔레꽃 길을 따라 선생님도 저기 가셨습니다. 선생님 뿌려진 부모님 무덤 중에 유독 어머니 봉분에만 뻐꾸기 울 때 핀다는 뻐꾹채 한 송이 환하게 피어 있었습니다. 그건 선생님이 달아 주신 거죠? 시치미 떼지 마세요. 다 알아요. 너무 어머니만 챙기지 마시고 슬픈 아버지도 좀 챙겨 주세요. 아셨죠, 아부지. 참, 진짜 아부지 되시려면 유언장에서처럼 건강한 남자가 되어 연애해서 장가 꼭 가세요. 꼭요.〈안상학 시인〉 |
[이대근 칼럼]권정생, 그의 반역은 끝났는가 | |
입력: 2007년 05월 23일 18:23:25 | |
경향신문 문화부는 지난 17일 출판사로부터 부음 하나를 전해들었다. 그리고 두어 시간 지나 망자(亡者)를 돕는 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영정으로 쓸 사진이 없다면서 경향신문에 게재됐던 그의 사진을 보내 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영정으로 쓸 사진 하나 남기지 않고 떠난 그는 누구인가. 평생 살아온 5평짜리 흙담집은 남김없이 헐어 자연상태로 되돌려 놓고, 인세로 들어올 돈은 북한·아시아· 아프리카의 가난한 어린이에게 나눠주고, ‘나를 기념하지 말라’며 나이 일흔이 남긴 흔적을 이 세상에서 말끔히 지워버리려는 그는 누구인가. 권정생. 도쿄 혼마치 빈민가 뒷골목에서 태어났다. 식민지, 분단과 전쟁, 굶주림의 골짜기를 넘은 그는 제대로 배우지도 먹지도 못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나무장수·고구마장수·담배장수를 했고, 10대에 결핵·늑막염·폐결핵·신장결핵·방광결핵을 앓았다. 그래도 살아남아 경상도를 떠돌며 걸식을 했고, 운좋게도 가난한 예배당 종지기 자리를 얻었다. 그의 거처는 예배당 부속 토담집.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운 그 곳에는 찢어친 창호지로 개구리가 들어와 놀다갔고, 잠자는 밤에는 쥐가 발가락을 깨물고 돌아갔다. 그는 거기에서 동화를 썼다. -문학을 통해 세상에 맞서- 그리고 어지러운 세상을 담아내기 턱없이 부족한 지면에서도 그의 부음이 한 구석을 차지할 정도로 그는 꽤 알려지게 되었다. 어느새 아름답고 감동적인 글을 쓰는 유명 아동문학가가 된 것이다. 그는 자기 인생처럼 못나고 버림받고, 가난하고 하찮은 것들에 관해 써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의 글을, 이 풍지고 흐벅진 세상의 지루함을 달래주는, 추억의 당의정이 입혀진 ‘힘들었지만, 아름다운 시절’의 이야기로 소비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동화는 세상을 예쁘게 포장한 선물세트가 아니다. 그 것은 그가 살아온 방식도, 글쓰는 방식도 아니다. 그는 전사였다. 그는 살아 숨쉬는 동안 생활이라는 최전선에서 그가 보고 듣고 알고 겪은 모든 모순과 부딪치며 하루도 쉬지 않고 싸웠다. 그는 농민들이 낫과 곡괭이를 들고 착취계급에 저항하다 실패한 역사를 슬퍼했다. 물질이 한정된 세상에서 몇 사람이 풍요롭게 살기 위해 나머지는 가난하고 고통스럽게 사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승용차를 버리면 기름 걱정안하고 전쟁할 이유가 없어지고, 우리가 파병을 안해도 된다고 믿었다. 미국은 절대악이었다. 약탈과 살인으로 강국이 되고, 전세계 인구의 5%가 세계 자원의 50%를 소비하는 미국은 그의 눈에 악마였다. 그리고 그 악에 맞선 테러리즘을 “새끼 빼앗긴 엄마 닭이 적한테 자기 목숨을 내놓고 달려드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가! 반공주의와 국가주의의 서슬이 퍼렇던 1985년에는 ‘초가집이 있던 마을’을 썼다. 아버지는 월북하고, 남은 복식이는 동족을 살상하는 무기를 들 수 없다며 징집을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 거부가 주제이다. 이게 그가 스스로 꼽은 최고작품이다. 석유·자동차·전쟁·미국·자본주의와 터럭만큼의 타협도 용서도 화해도 하지 않았다. 신채호·장준하·함석헌을 존경하는 그는 히틀러를 죽이기 위해 암살단을 조직한 디트리히 본 회퍼 목사를 닮고 싶어했다. 물론 그는 안중근처럼 권총도 없고, 화염병을 던지지도 않고, 테러를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의 것들을 했다. 저 깊은 곳에서 울렁거리는 분노를 삭이고 녹여, 그 진액을 짜내 시와 동화, 산문을 쓴 것이다. 그는 탐욕과 죽음의 공포로 가득한 이 세상의 전복을 꿈꿨다. 이 세상의 한 구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전체에 대한 반역을 꿈꿨다. 욕망의 체계인 자본주의 한 가운데에서 그는 무욕, 절제, 가난을 무기로 정면 대결했다. 사람들이 그의 베스트셀러 ‘우리들의 하나님’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 모르지만, 31쪽에는 “함께 일해 함께 사는 세상이 사회주의라면 올바른 사회주의는 꼭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끝이 아닌 평화의 길로…- 가난하고 늙고 병든 아동문학가는 이 사회에서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잘못이다. 버림받고, 병들고 가난한 자가 세상과 잘 어울리다는 것 자체가 기만이다. 그는 매우 위험하고 불온한 사상가였고, 반역자였으며 혁명이 사라진 시대의 혁명가였다. ‘위대한 부정의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왜 그의 죽음은 인생의 종말이 아닌 평화를 느끼게 할까. 그에게 소멸은 무엇이기에 슬프기보다 아름다워 보일까. 한 줌의 흙, 한 포기 풀과 같이 살았기 때문일까. 그는 “싸움이라는 삶이 끝났을 때라야 평화라는 안식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지지배배 짖던 작은 새가 숲속으로 날아가듯 그는 그렇게 가버렸다. 가장 치열하게 싸운 전사에게만 돌아가는 휴식이다. 이대근/정치·국제에디터〉 |
[도종환 칼럼] 권정생 선생의 다섯평 흙집 | ||||||||||
입력: 2007년 05월 31일 18:06:34 | ||||||||||
권정생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뒤 조탑리 노인들은 많이 놀랐다고 한다. 혼자 사는 외로운 노인으로 생각했는데 전국에서 수많은 조문객이 몰려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우는 걸 보고 놀랐고, 병으로 고생하며 겨우겨우 하루를 살아가는 불쌍한 노인인 줄 알았는데 연간 수 천만원 이상의 인세수입이 있는 분이란 걸 알고 놀랐다고 한다. 그렇게 모인 10억원이 넘는 재산과 앞으로 생길 인세 수입 모두를 굶주리는 북한 어린이들을 위해 써달라고 조목조목 유언장에 밝혀 놓으신 걸 보고 또 놀랐다고 한다.
<몽실언니>와 <강아지똥>의 작가 권정생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제 일이다. <강아지똥>은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국민동화이고, <몽실언니>는 언젠가 TV 드라마로 방영된 바 있어서 나처럼 직접 책을 읽지 않은 독자에게도 낯설지 않다. 하지만 내가 가장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은 오래전에 읽은 한국일보의 '문학기행' 연재 가운데 <몽실언니> 편이었다. 그걸 옮겨놓으려고 하다가 곁다리로 오마이뉴스의 인터뷰기사까지 옮겨온다(작년 가을 한겨레의 기사는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168507.html). '권정생의 삶과 문학'이란 거창한 타이틀을 달았지만 사실 선생의 사진 한 장만으로도 그건 다 웅변되는 듯하다. 나머지는 사설이다.
국민일보(07. 05. 18) 몽실언니’ 작가 권정생씨 타계 ‘몽실언니’의 작가인 아동문학가 권정생씨가 17일 지병으로 타계했다. 향년 70세. 고인은 20대부터 만성심부전, 결핵 등으로 오랜 기간 투병했으며 최근 3∼4년간 병세가 악화돼 작품 활동을 접고 요양을 해오다 16일 입원했었다.
한국일보(00. 05. 22) [문학기행](28) 권정생 소년소설 '몽실언니' 소년 소설 ‘몽실언니’는 1984년 초판이 나온 이후 42판을 거듭 발행했다. 소년들이 너나없이 국·영·수나 디지털로 내몰리는 시대에 ‘몽실언니’의 성공은 놀라운 문학현상으로 꼽힌다. 그리고 소년소설 ‘몽실언니’를 읽은 사람들 중 상당수가 소년이 아니라 50대를 넘긴 초로의 독자들이라는 것은 당연한 현상으로 보인다.
언니, 오빠, 아버지, 어머니처럼 인간의 생물학적 관계를 지칭하는 모국어에서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힘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모국어 호칭들 속에서는 그 운명의 힘 만큼의 슬픔과 아름다움이 숨어있다. 언니는 어머니보다 가깝고, 오빠는 아버지보다 가깝다. ‘몽실언니’는 아직도 어린 거지 ‘언니’가 삶과 시대의 고난을 자신의 생애 속으로 받아들여가면서 이 세상의 ‘언니’로 넓어져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인간은 어떠한 지경에서도 삶을 부정할 수 없고, 이 세상의 선과 악은 어느 편의 것이 아니라 끝끝내 개인의 것이며, 이념과 총칼로 무장한 욕망의 충돌 속에서 참혹하게 부서져가면서도 인간은 그 역사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이 몽실이의 언니된 마음이다.
‘몽실언니’는 비참과 불행의 연속이고, 그 소설 안에서 아무런 행복한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몽실언니’는 결국 해피엔딩이다. ‘몽실언니’의 배경은 어느 특정한 마을과 산천이라기보다는 작가 권정생의 생애이다. 그의 한 평생의 가난과 외로움은 가히 설화적이다. 그리고 지어낸 이야기만 같은 그 설화적 고통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수많은 한국인들의 현실이었다. 이 시대는 이미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떠한 상처가 남아있는가를 되돌아보려고 하지 않지만, 많은 할머니들이 울면서 이 소년소설을 읽는다.
작가 권정생은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 산비탈 아래 토굴 같은 흙집에서 혼자 산다. 이 흙집으로 오기 전에는 마을 교회 문간방에 기거하면서 교회 종지기 노릇을 했다. 신장결핵으로 34년 동안 주머니로 소변을 받아낸다. “한달 생활비가 5만원이면 좀 빠듯하고 10만원이면 너무 많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작가 권정생을 “억수로 착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외로운 노인이나 슬픈 일을 당한 할머니들이 그를 찾아와 하소연도 하고 넋두리도 한다. 술집 아줌마들이 자신의 고통으로 ‘몽실언니’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오기도 한다. 마을 할머니들이 모여서 ‘몽실언니’를 읽는다. 글을 잘 읽고 눈이 밝은 할머니가 소리내서 읽으면 다른 할머니들은 숨죽여가며 듣는다. ‘몽실언니’는 이제 소년소설이 아니다.
권정생은 1930년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 노무자의 아들로 도쿄 호마찌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몽실언니’는 그 빈민가에서 살았던 가엾은 아이들의 모습이라고 권정생은 말했다. 그는 보릿고개가 고통스러웠던 1946년 봄에 외가가 있던 경북 청송으로 돌아왔다. 먹을 것이 없어서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어렸을 때 나무장수, 고구마장수, 담배장수를 했고 여러 가게의 점원 노릇을 했다. 온 나라에 결핵이 퍼져있었다.
객지에 돈벌러 나갔던 아이들이 결핵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아이들은 이내 빨간 피를 토하며 죽었다. 그는 늑막염, 폐결핵, 방광결핵, 신장결핵으로 온 몸이 망가져갔다. 대구, 김천, 상주, 문경을 떠돌며 걸식을 했고, 때때로 산길에 쓰러져 혼절했다. 1967년에 지금 사는 조탑동 마을로 돌아와 정착했다. 그는 기자에게 자신의 생애의 일들을 상술하기를 거절했다. “제발 날 좀 힘들게 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래서 그의 전기적 사실에 관한 기술은 그가 이미 글로 발표한 내용을 넘지 못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비참과 구걸에 대한 사실적 기술이 아니라 그가 “그때 나는 따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라고 말하고 있는 대목일 것이다. 그리고 이 대목이 아마도 소설 ‘몽실언니’의 발단이고 귀결인 것으로 보인다.
몽실이는 ‘거지’로서 해방된 조국에 돌아왔다. 언니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어렸지만, 어린 몽실이가 어른들의 언니 노릇을 해낸다. 소설 속에서 몽실이는 살강마을(안동군 임하면, 현재는 수몰됨)에 살다가 단지 밥을 얻어먹기 위해 남편을 바꾸는 어머니를 따라서 댓골마을(현 안동시 화목리)로 간다. 몽실이의 언니됨은 살강마을이나 댓골 마을이나 다 똑같은 마을임을 아는 데 있다. 아늑한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행복이 아니다. 똑같이 아름답고 똑같이 쓸쓸한 마을이었다. 감나무와 대추나무도 똑같다. 친아버지와 새아버지도 다 똑같이 불쌍하고 외로운 아버지들이었다. “어느 쪽이 김씨 아버지이고 어느 쪽이 정씨 아버지인지 잘 가려내지 못할 때가 많았다. 어쩌면 둘은 닮은 데가 많았다. 어머니 밀양댁도 정씨 남편에게 죽도록 얻어맞았었다. 술 취하고 때리는 것이 둘이 똑 같았다”라고 소설은 적고 있다.
몽실이의 그리움 속에서 죽은 친어머니와 새 어머니는 언제나 포개져서 떠오르고, 배가 다른 동생들과 씨가 다른 동생들이 다 몽실언니의 동생들이다. 그렇게 해서 몽실언니의 삶은 행복을 쫓아가는 삶이 아니라 고난 속으로 넓어져가는 삶이다. 몽실언니는 절름발이 걸음으로 절룩거리지만 그 언니는 구걸의 깡통을 차고서도 그 시대의 편가르기와 야만성을 넘어서서 개인의 도덕성에까지 절름거리면서 걸어간다.
‘몽실언니’의 가장 힘세고 아름다운 대목은 그 마지막 페이지들이다. 몽실이는 양공주 노릇을 하는 언니들의 방문 앞에 놓인 미군들의 군화를 노려보면서 흩어져간 동생들을 찾아내기로 결심한다. “몽실이는 그 시커먼 구두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싸늘한 밤하늘, 거기 어두운 곳에 별들이 반짝였다. 몽실은 이빨이 부딪치도록 몸을 떨었다”라고 소설은 적고 있다.
소설의 지리적 배경인 댓골마을은 지금은 다들 떠나고 두 집만 남았다. 땅 이름도 화목리로 바뀌었다. 이 마을 박명하(61)씨는 대구에서 건설노동일을 하다가 IMF 초기에 실직하고 다시 인기척 없는 고향으로 내려와 빚더미에 짓눌려가며 농사를 짓고 있다. “6·25때 이 마을에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거지 아이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 아이들이 지금 내 또래들이다. 피난민들이 밥을 해먹으면 폭격기들이 연기를 보고 쫓아와서 기총소사를 했다”고 박씨는 말했다.
이 마을의 또 다른 주민은 박정하(64)씨다. 다섯 살 때 홍역 끝에 실명했다. 박씨는 고아원에서 자라난 김문희(50)씨와 결혼해서 세 자녀를 두었다. 박씨는 아내와 아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손으로 더듬어서 안다고 말했다. 그가 전하는 처자식들의 생김새는 눈뜬 사람이 보아도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김씨는 200평 밭농사로 앞 못보는 남편을 섬기고 세 자녀를 길렀다. 첫째 딸은 부천에서 공장에 다니는데 이미 애인이 생겼고, 둘째 딸은 안동대학교 3학년이다. 막내아들은 입영영장을 받았다. 김씨는 소설 ‘몽실언니’를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이 나라 산천 구석구석에 힘세고 아름다운 ‘몽실언니’들은 너무나도 많다. 작가 권정생은 “깡통을 차고 헤맬 때도 인간이 아름다워서 눈물겨웠다”라고 말했다.
■ 권정생 연보
▲1937년 일본 도쿄 출생·1946년 귀국
▲1967년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에 정착, 이 마을 교회 문간방에서 기거하며 종지기 일을 함
▲동화 ‘강아지 똥’으로 등단
▲동화집 ‘사과나무밭 달님’ ‘짱구네 고추밭 소동’ 소년소설 ‘몽실언니’ ‘초가집이 있던 마을’ 장편동화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등
■ '몽실언니' 줄거리
몽실이네는 해방 후 외국에서 돌아온 거지 가족이다. 아버지 정씨는 날품을 팔았고 어머니 밀양댁은 구걸질을 했다. 밀양댁은 남편을 버렸다. 밀양댁은 몽실이를 데리고 댓골마을 김씨한테 시집갔다. 김씨는 밥걱정은 안 했다. 밀양댁은 새 남편한테서 동생 영득이를 낳았고 새 아버지 김씨는 몽실이를 구박했다. 몽실이는 새 아버지의 폭력으로 절름발이가 되었다. 몽실이는 다시 친아버지 정씨한테 갔다.정씨는 남의 집에서 머슴으로 얹혀 살고 있었다. 정씨는 북촌댁한테 새 장가를 들었다. 북촌댁은 가냘프고 착한 여자였다. 북촌댁을 딸을 낳고 굶어 죽었다. 난리통에 태어났다고 해서 새 아기의 이름은 ‘난남이’로 지었다.
전쟁이 터졌고, 정씨는 군대로 끌려갔다. 마을에 인민군이 들어왔다. 인민군들은 마을 사람들을 마구 죽였다. 그러나 인민군들 중에는 마을사람들을 보호해주는 착한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은 다 착해질 수 있는 것이며, 어느 편은 다 나쁘고 어느 편은 다 좋은 것이 아님을 몽실이는 알게되었다. 마을 처녀들은 양공주가 되었다. 양공주들은 검둥이 아기를 쓰레기통에 내다 버렸다. 몽실이는 죽은 아기들을 끌어안고 쓰레기 더미에서 울었다.
전쟁이 끝났다. 군대에 간 아버지는 포로로 잡혀 있다가 절름발이가 되어 돌아왔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살아야 한다’라고 몽실이는 다짐했다. 몽실이는 깡통을 차고 장터거리에 나가서 구걸을 했다. 댓골로 시집간 친어머니 밀양댁은 아기를 사산한 후 심장병으로 죽었다. 몽실이는 배가 다른 동생들과 씨가 다른 동생들을 다 함께 데리고 살았다. 몽실이는 구걸질을 열심히 했다. 아버지의 병은 점점 깊어져갔다. 몽실이는 아버지를 자선병원에 맡기려 했다. 아버지는 병원 문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다가 죽었다. 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몽실이는 다시 흩어진 동생들을 찾아 나선다.
삼십 년이 지났다. 몽실이는 구두수선쟁이인 꼽추 남편과 결혼해서 남매의 어머니가 되었다. 배다른 동생 난남이는 폐결핵으로 요양소에 입원해 있었다. 몽실이는 닭찜을 싸들고 한 달에 한번씩 이 요양소로 난남이를 찾아간다. 오마이뉴스(04. 08. 05) <몽실 언니> 작가 권정생 선생님을 찾아 지난 7월 28일, 여름휴가를 맞아 안동에 계시는 권정생 선생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권 선생님은 <강아지 똥> <몽실언니>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우리들의 하느님> 등 수 많은 주옥같은 작품들로 우리 시대의 강퍅해진 영혼들을 일깨우는 작업을 해 오신 원로작가이십니다. 그 분을 작품을 통해 알게 된지 십 수 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기회가 닿지 않아 직접 만나 뵙진 못하고 간간이 연락만 드리다가 이번에 큰 용기를 내어 찾아간 것입니다.
- 지난번에 월간 <작은책>에 선생님이 쓰신 글, "승용차를 버려야 파병도 안 할 수 있다"를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말씀처럼 사시니까 선생님 글을 제가 동의하고 또 그래야 된다고 생각은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가 아닌가?'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 그렇게 생각하면 할 수 없는 거지요. 우리가 좀 불편하게 살아야 해요. 가난하게 살아야 되고 힘들게 살아야지 안 그러고 편하고 풍요롭게 산다는 건 그건 안 됩니다. 그렇게 살면 누군가는 힘들게 살아야 하잖아요. 세상의 모든 물질이 한정되어 있는데, 몇 사람이 풍요롭게 살면 나머지는 가난하고 고통스럽게 살아야 하잖아요. 뭐 도와준다고 몇 푼 갖다 준다고 그거 가지고 됩니까?" "그건 제 주장이고요, 각자 생각해서 살아야 되지요. 남의 말 듣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내 생각을 이야기하는 거지." "그렇게 하면 데모할 필요도 없잖아요. 석유 때문에 싸움을 하고, 환경오염이 되니까 또 공해를 줄이기 위해서… 뭐 누구나 다 아는 거잖아요, 뻔하게. 실천을 안 하니까 그렇지. 그래서 저는 승용차 타고 우리 집 오면 절대 오지 말라고 그래요. 그 뭐 할라고 몇 백 리를 승용차 타고 기름 때가면서 그렇게 와서 뭐합니까." "오늘 28일이지요? 지난날 8일에 갔다가 꼭 20일만에 우체국 갔다왔네요. 바쁘게 편지 부칠 건 있고 해 가지고. 어디 계시더라도 좀 힘들게 살더라도 가난하게 살아야 됩니다. 그건 이상도 아니고 꿈도 아니고 현실이잖아요. 아프리카 아이들 불쌍하다느니, 이라크 아이들 죽어 가는 것 뭐 어쩌고 걱정하고 몇 푼 가지고 보태주는 것 그거 가지고는 안 됩니다. 미국의 인구가 전세계 인구의 한 5%도 채 안 되거든요. 그런데 전 세계 모든 자원의 한 50%를 다 미국이 소비하고 있거든요. 저건 안 되지요. 저건 악마지요. 우리도 미국 따라 그렇게 해서는 안 되잖아. 제발 미국한테 기대가지고 그 비싼 무기 사다가 괜히 우리끼리 저렇게 죽이고 하지 말고. 아이구, 고등학교 대학에서 그런 거 안 배웁니까? 도대체 대학에서 무얼 배우는 줄 모르겠어.(깊은 한숨)" "그러니 죽은 김선일씨도 교회에서 괜히 이야기하는 대로 이라크 불쌍하니까 선교하러 간다고 갔는데, 그거 그럴 필요 없어요. 그 사람들 나름대로 종교를 가지고 있고 오히려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순수하게 살고 있는데, 아랍인들 계율이 엄격해 가지고 아직까지 퇴폐적인 건 없거든요." "바꿔 놓고 생각해봐요. 우리가 만약 이라크처럼 당했다고 하면 가만있겠어요? 안중근 의사가 처음에 프랑스 선교사한테 굉장히 많은 자기 고민을 이야기했어요. 어떻게 나라는 이렇고, 하느님 뜻은 어떻고.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그 프랑스 선교사가 '당신이 알아서 해야지, 당신 나라니까 당신 나라가 중요하면 나라를 위해서…' 라고 말했어오. 그래서 간도 독립 운동하는 데 가 가지고 군대 조직해서 싸우다 보니까 사람을 죽여야 하잖아요, 죽이는 것도 일본 졸병들 아무리 죽여 봤자 그거 소용없거든요. 정말 무고한 목숨만 죽이는 거지. 그래서 생각한 것이 우두머리를 죽여야겠다 해 가지고 이등방문을 죽인 것이지." "그렇게라도 하기 때문에 미국이 많이 주춤하고 있잖아요. 미국시민들도 어느 정도 반성 분위기가 서고 그렇지요. 독일의 디트리히 본 회퍼 목사가 히틀러 죽이기 위해 암살단을 조직해서 활동하다가 붙잡혀 감옥에서 죽었는데 그 목사가 그래요. '내가 아무리 신학박사 학위를 받아봤자 뭔 소용이 있느냐?' 그래 가지고 미국에서 공부하다 돌아와 가지고 그랬거든. '미친 사람 하나 죽여야 된다'고." "예수도 그렇게 했잖아요. 무모하게 그랬잖아요. 로마한테 대들었잖아요." "아니 그 보다 더 무서운 저항이 어디 있어요. 예수의 방법이 달라 그렇지." "마태복음에 나왔을 거예요. 예수님은 오리를 가 달라하면 십리까지 가줘야 된다. 적극적인 방법이지요. 그게 맞습니다.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마저 들이대라. 그게 간디가 그렇게 했거든요." "그건 어쩔 수 없어요. 안중근이가 이등방문을 안 죽였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겠어요? 그 당시에 김구 선생이 가만히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그건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새끼 빼앗긴 엄마 닭은 적한테 자기 목숨 내놓고 달려듭니다." "교회 목사님들은 괜히 그렇게 사람 죽여서 되겠느냐고 그러는데, 예수님처럼 살지도 못하면서 그래요." "안 그러면 남 안 죽이더라도 예수님처럼 철저하게 살든지." "이 세상 편한 데가 어디 있습니까? 아이고 참." "없어요. 전부 다 도시로 나가고…." "요즘 아이들은 옛날 아이들 같지 않아서요. 요즘 아이들은 별로 정이 안가요. 어머니들이 잘못 키우고 있어요. 전부다 자기 아이만 대단한 것처럼…." "아이디어는 얻는 것 없어요. 그대로 다 이야기니까 사람 살아가는… 이라크가 지금 겪고 있는 거 우린 벌써 5~60년 전에 다 겪었잖아요." "어린이 아동문학이 상업화가 돼 가지고 책이 귀한 줄을 모르게 되었어요. 그러다 보면 좋은 책이 나오긴 나오겠지만 아이들한테 별로 좋지는 않은 것 같아요." "또 매출이 많이 줄어들어요. 한 번은 저것도 큰 코 다치겠지요!" "<초가집이 있던 마을>이요. 그건 가톨릭 출판사에서 잡지에다 쓰다 보니 제재를 받지 않았어요. 거기서 복식인가 그 애는 입대를 거부하고 자살해 죽어요. 아버지는 월북하고 이런 아이입니다. 요새 양심적 병역거부가 이야기되고 그럽니다만. 그게 몽실이보다 한 3년 앞서 썼지요." "요즘은 안 다녀요. 몸도 그렇지만. 목사님들이 너무 친미를 하고요. 너무 축복받고 이래 살아야 한다니까 우리 같은 사람은 그렇게 안 됩니다." "그럼요. 저는 예수님을 기독교의 교주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냥 깨끗하게 순수하게 불의를 마다하고 저항하다가 저렇게 돌아가신 분이지 기독교라는 어떤 종교를 만드신 교주는 아니라고 봐요. 더군다나 부시라는 사람이 정의의 하느님을 앞세워 가지고…." "굉장히 갈등이 심했어요. 처음에 이걸 어떻게 하나. 남아 있으면 나도 같은 족속이 될 수밖에 없고. 나갈라니까 거기에 같이 있던 사람들 버려 두고 나 혼자 나온다는 것이 비겁한 것 같고, 그렇다고 교회는 고쳐지질 않으니까 '나'라도 그러면…." "이야기를 해도 그 사람들 뭐냐 그러냐면 대중들이 구하는 게 기복신앙이지 않느냐 이러 거든요. 그건 맞아요. 그러나 그거는 목사님들이 편하거든요. 기도해야 복 받는 거. 그렇게 하면 목회가 편합니다. 바치는 것만큼 몇 배 얻는다. 기도한 만큼 얻는다. 두드리라 얻는다. 이러면 (사람들이) 찾아오지요.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처럼 힘들더라도 이 세상에서 있어야 될 것 없어야 될 것 구분해 가지고 떳떳하게 물리칠 것 물리치고 그렇게 살아야 된다 이러면 안 옵니다. (웃음)" "그래요. 그 시간 좋다고 하면 그 시간 나오게 하고 어떤 경계를 안 만드는 게 좋아요. 불교, 기독교, 가톨릭…. 그래 가지고 항상 개방해 놓고 교회에 와서 주무시고 갈 사람 있으면 자고 가라고 그러고. 제가 교회 옆에 흙집에서 한 십육 년인가 살았거든요. 거기 있으면 밤이고 낮이고 애들이고 뭐고 찾아와요. 겨울에 눈이 오면 지나가다가 자고 가는 스님도 있고 비오면 비 피해 가고. 그런 사람 오면 마음대로 다 이야기해요. 어떤 청년은 와 가지고 '어제 대구 갔다 왔는데 뭐 하러 갔다 왔는지 압니까?' '내가 어이 아나?'라고 하면, '색시 집에 가서 자고 왔십니더. 나이 서른 넘은 놈이 장가를 못 가니까 한 달에 한 번씩은 갔다 와야 합니더' 그런 이야기도 해요."
"제가 해 주지 않아도, 누구라도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혜가 그런 분별을 다 주셨어요. 그런데 그것이 용기지요. 용기일 겁니다. 그리고 겁이 나잖아요. 내 기득권을 다 잃어버리는데. 장로님 장로님 하고, 권사님 권사님 하고 그랬는데, 그거 다 버리자면 그렇잖아요."
"기도를 해도… 철야기도를 했거든요. 몸이 아프고 그럴 때. 겨울에는 하다보면 기도가 안 나와요. 아이고, 추워라, 추워라 그러지. 한참 하다보면 입에서 그냥 다른 기도가 안 나오고 추워라, 추워라만 하지요. 그리고 그렇게 밤새 앉아 있다는 그 의지력 자체지 그건 하느님한테 구한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거든. 자기가 얼마 만큼 의지력으로 견디느냐 그거지." "그때 하느님한테 기도의 힘을 얻어야지요. 다른 힘을 얻는 거보다도….' "그래도 종교인들, 스님들과 목사님들, 신부님들이 한 목소리로 그렇게 반대하면, 미국한테 대고 항의를 하면 저건 어느 정도 될 겁니다. 그런데 목소리 각각 다 다르니까 그게 문제지." - 선생님 평생에 걸쳐서 이 책만은 꼭 읽어 봐라 할 만한 추천할 책 다섯 권만 소개를 해 주십시오. "이미 다 읽어 보셨을 텐데. 신채호요. <조선상고사> 신채호 선생님 글은 다 좋아요. 우리 한국 사람은 신채호, 그 다음에 장준하 선생님이 직접 쓴 <돌베개>라는 거 있습니다. 일진 깊이 갔다가 달아나 가지고 독립군 찾아가는 과정을 적어 놨거든요. 그건 정말 돌베개입니다. 야곱이 고향 찾아가는 그 과정보다 더 힘들었지요. 김창숙이라는 사람 책하고, 리영희, 강만길 같은 분들 책들 모두 좋습니다. 다섯 권만이 아니라…. 역사 인물로서는 허균이라는 사람 전기를 될 수 있으면 구해 보시고…. 그 다음에 생각이 안 나서 그러는데 또 있어요. 우리가 약소국가였기 때문에 그때그때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살펴보면 좋은 사람 많습니다." "구약성서가 이스라엘 역사잖아요. 함석헌 선생 책 <뜻으로 본 한국역사> 같은 거, 함석헌 선생님 책들도 다 좋아요. 누가 썼는지 모르지만 <사람의 아들>이라는 책 그거 보면 예수님에게 누구 어머니인지 '그런 불한당 같은 놈이 자식들 데려다가 다 버려 놓는다!'고 욕한 어머니가 거기 나와요. 제자 된 사람 가운데 한 어머니인데, 집에서 열심히 일하는 착한 애를 데려다가 저놈 자식이 다 베려 놓았다고 그런 장면이에요. 나사렛 그 목수 놈의 아들 자식이….(웃음)"
"다들 잘 알 겁니다. 강만길, 리영희, 송건호… 이런 사람들 책은 다 고전이니까. 판소리, 신재효입니까? 그 만들어 놓은 거 <춘향전>이나 <가루지기타령>이라는 거 있어요. <변강쇠전>이나 그거 정말 눈물겹지요." "애들은 그냥 안 읽어도 됩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그냥 놀게 하고 그 다음에 중3학년이나 고등학교 되면 자기가 읽어야 돼요. 정신 차려 가지고 누가 읽어라, 읽어라 하지 않아도. 그 다음부터는 자기 인생을 살아야하기 때문에 선배들 어떻게 살았나 하면서 책을 읽겠지요." "책을 읽었는데 잘 못 읽었어요. 열일곱 열여덟 살 때, 이광수 책을 그 땐 베스트셀러라고 해 가지고 또 그땐 책이 없어서 헌책방에 가서 구해 읽었는데, 이광수 그 사람 우리 역사를 많이 왜곡시켜놨어요. <단종애사> 같은 거. 그런데 김동인의 <젊은 그들>이라는 건 괜찮아요. 박종화의 <금산의 피>라든가. 또 현진건의 <무영탑> 같은 거도 괜찮아요. 그런데 이광수 책은 아주 안 좋아요. 그리고 우리 작가들도 좋은 책 많지요. 그 누구지요? 채만식의 단편들…." "건강 때문에 많이 못 읽지요." "요즘은 좋은 책이 안 나오잖아요. 옛날에 나왔던 책들이나 좀 보고…. 찾아보시면 좋은 책들이 있어요. 본 회퍼 전기 같은 거. 김교신이라는 사람 수기, 일본의 누구지요? 우찌무라 간조 그 사람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요. 또 누구지요? 노동운동 했던 사람, 일본 사람… 그 사람이 나중에 변절을 해 가지고 일본군국주의 협조를 하고 그래가지고 나쁜 사람이 되어 버렸는데 그 전에까지는 괜찮아요. 어떻든지 헌책방 다니셔 가지고… 부산이나 광주 이쪽으로 아니면 서울 가시거들랑… 헌책방 다니셔 가지고 책을 모으세요. 아이구 목회하는 분들도 힘들 겁니다. 그러나 기성교회 따라가서는 안돼요."
"앞으로 열심히 살면 되지요. 아이고, 이제 가시지요. 제가 힘들어 안 되겠네." |
첫댓글 몽실언니를 읽으면서 눈시울을 많이 붉혔드랬는데,새삼 이 가사들을 읽으면서 눈시울이 뻑뻑해 집니다.,,권정생 선생님.
다음 세상이 있다면 더 좋은 삶을 기원하며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