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山淸에서 24시간
100년 된 고택서 눈뜨고 원시의 계곡에서 '꽃놀음'
봄의 당도를 알리는 건 꽃의 일이나 진정 봄의 문을 활짝 여는 건 신록의 잎입니다. 봄꽃이 '마침내 겨울이 끝난다'는 느낌을 안긴다면, 연두색 잎은 사계절이란 새로운 순환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죠. 같은 봄이어도 꽃의 봄과 잎의 봄이 이렇게 다릅니다.
이 즈음의 경남 산청에서는, 꽃과 잎의 봄이 혼재해 한바탕 봄의 축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꽃은 흩날리며 연둣빛에 자리를 내주고 잎은 차분히 몸을 불리며 계곡마다 청량감을 키워냅니다. 뿐인가요. 산청에는 꽃과 잎의 봄을 사람의 품으로 넉넉히 안아 여유로운 고택 마을 남사예담촌이 있고, 한방약초축제(5월 4~10일)와 황매산 철쭉제(5월 8~9일)도 곧 열립니다. 그러하니, 올해 봄꽃놀이를 놓쳤다고 아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산청은 봄이 한창입니다.
- ▲ 남사예담촌의 회화나무는 한껏 늑장을 부리며 잎 피워내기를 주저하고 있으나 담을 감싼 덩굴식물에선 이미 아이 손바닥만 한 잎이 자라났다.
산청은 먼저 후각과 미각으로 다가온다.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따라오다 산청 IC에서 빠져나오면 바로 등장하는 곳이 전통 한방휴양관광지. 그곳에, 전국에서 몇 안 된다는 약초 버섯전골을 하는 곳이 있다. 바로 '약초와 버섯골 식당(055-973-4479)'이다.
이름은 전골이지만 나오는 방식은 샤부샤부다. 느타리·양송이·팽이·표고 등 버섯류와 당귀·두릅·방풍·오가피 등 산나물·약초를 소고기와 함께 내놓는다. 육수 자체도 약초를 달인 물이며, 컵에 담긴 물은 표고버섯과 무를 달인 차다. 일관성 있는 식단의 구성으로, 이곳 식당엔 약초 특유의 씁쓸한 향이 늘 감돌고 있다. 그 향은 씁쓸하되 그만큼 깊어 향을 맡는 사람들의 기운을 맑게 한다.
씁쓸하며 깊고 맑은 약초의 향은 과거의 향이자 산청의 향이다. 그 향은 전통 한방휴양관광지 위쪽에 자리 잡은 국새전각전의 귀감석(龜鑑石), 석경(石鏡) 앞에서 비로소 시각화된다. 산청은 현재 정부가 사용 중인 4대 국새를 새긴 곳이다. 산청에서 전각(篆刻)된 이유는 두 가지. 이곳의 기(氣)와 토양 때문이다. 국새전각전이 자리한 곳은 전국에서 가장 기가 센 곳으로 손꼽힌다. 하여 이곳을 둘러싼 산과 마을의 이름은 아무런 수식어 없이 단 두 자, 왕산(王山)과 특리(特里)다. 국새전각전 앞에 세워진 조감도는 터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주봉 왕산과 곁봉 팔봉산이 앞 강을 맞이하면서 마치 왕이 문무백관을 거느리듯 이 터를 두르고 있다"고.
다른 하나는 토양. 국새를 제작하는 데 필요했던 거푸집의 재료가 산청의 고령토다. 산청군지에 따르면 2002년도 우리나라 전체 고령토 생산량 62만4000t 중 산청에서 15만3863t을 생산했다. 전체 생산량의 24.7%로 전국 최대의 생산량. 주 채광터가 전각전을 두른 왕산 일대다. 이곳 도로를 지나다 보면 나무 베어낸 자리 위로 하얀 흙이 생채기처럼 쏟아져 나온 풍경을 볼 수 있는데, 모두 고령토 광산의 흔적이다.
좋은 토양과 기운으로 국새를 만들어낸 산청은 그 자리에 2012년 준공을 목표로 국새전각전을 짓고 있다. 거북이를 닮은 130t짜리 귀감석과 봉황이 새겨진 석경이 여기 있다. 먼저 크기로 압도하는 이 돌은 아직 정식으로 공개되지 않았음에도 입소문으로 '기 체험의 명소'가 됐다. 수험생을 둔 학부모나 선거를 앞둔 정치인이나, 여기 돌에 이마와 손을 대고 기를 받는다. 산청군청 문화관광과 임길선씨는 "주말이면 돌 앞에 기 받으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고 했다. 그러하니, 산청까지 왔다면 잠시 돌에 기대 기를 받아보는 것도 좋겠다.
약초가 산청의 향이요 국새가 산청의 기운이라면, 왕산을 돌아 만날 수 있는 전구형왕릉(傳仇衡王陵)은 산청의 혼이다.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은 신라에 나라를 양도했다. 그는 밀양 이궁대에서 신라 법흥왕에게 양위의 절차를 마치고 낙동강을 건너 이곳 왕산에서 은거하다 5년 후 세상을 떴다고 전한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구형왕은 "나라를 지키지 못했으니, 흙이 아닌 돌로 무덤을 쓰라"고 유언했다.
- ▲ 피라미드 모양의 석총, 전구형왕릉.
가까이 다가갈수록, 구형왕릉은 석총도 돌무더기도 아닌 그저 숲의 일부분 같다. 멀리서 돌은 무채색이었으나 가까이서 돌은 푸르고 붉다. 그 색깔이 능을 둘러싼 숲을 닮았다. 구형왕은 자신의 한을 다스리려는 뜻으로 흙이 아닌 돌을 썼지만, 세월의 흐름으로 돌은 흙을 닮아갔다.
16:00 산천의 지형
산청엔 산이 많다. 전체 면적 794.6㎢ 중 임야가 623㎢다. 천왕봉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 줄기가 서쪽을 남북으로 가르고, 동북쪽으론 황매산과 소룡산·부암산이, 남부에선 주산·우방산이 인접 지역과 경계를 이룬다. 그것도 모자라 중앙부에도 산 천지다. 웅석봉·둔철산·백마산·왕산 등이 산청 한복판에 우뚝 솟아 있다.
단순히 많은 게 아니다. 높다. 지리산을 제외하고라도 웅석봉·황매산·구곡산·왕산 모두 해발 1000m 내외의 산들이다.
당연히 산청의 전경을 보는 방법은 이런 산에 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굳이 높이 오르지 않아도 산청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봉화산(금서면 특리 활공장·滑空場)과 정취암이 그곳.
봉화산에서, 산청을 두르거나 침입한 산의 세력은 또렷하다. 지리산 줄기는 단순히 산청의 서부를 남북으로 가를 뿐 아니라, 제2·제3의 자락을 펼치며 동쪽으로 산청의 평지를 깊숙이 압박한다. 동부와 중앙에서도, 지리산과 능선을 공유하지 않는 봉우리들이 출렁이며 이어진다. 그 숱한 산줄기 사이로 강폭이 넓은 경호강이 굽이치며 산청을 남북으로 관통한다. 경호강은 주변 산에서 내려온 물로 마르지 않고 언제나 넉넉하다. 현재 경호강은 유속이 빠르면서도 소용돌이치는 급류가 없어 래프팅으로 유명한 곳이나, 과거 경호강은 평지 적은 산청군민들이 생계를 기댄 터전이었다. 산청읍은 경호강이 크게 굽이치는 곳에 자리 잡았고, 멀리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단성면은 경호강이 양천강과 합류하는 곳에 형성됐다. 산청읍과 단성면은 산청에서 가장 큰 마을들이다.
- ▲ 대원사계곡보다 남쪽에 자리한 내원사계곡의 신록이 또렷하다. 여기서 나무는 제각기 개성을 뽐내며 다양한 농담(濃淡)의 연두로 숲을 수놓는다.
정취암은 봉화산에서 볼 수 없는 풍경, 산청의 동쪽을 둔철산(811m) 허리에서 조망한다. 산이 많은 만큼 유난히 절도 많은 이곳 산청에서, 정취암은 바라보거나 바라보이는 경치가 빼어난 곳 중 하나다.
길을 오르며 바라보이는 정취암은 암봉 아래 절묘하게 매달려 있고, 정취암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탁 트인 전망으로 아찔하다.
정취암은 암자라기보다 사찰에 가깝다. 원통보전과 응진전, 산신각을 두루 갖췄다. 여기까지 찾았다면 정취암 뒤편으로 솟은 암봉에 오를 일이다. 멀리서 보기엔 오르는 길이 만만치 않으나 실제로는 평탄하다. 그곳에 서면 누군가 쌓은 돌탑 뒤로 정취암의 기와가, 산청의 동부가 훤히 내려 보인다.
10:00 산청의 삶
산청의 남쪽, 단성면에 있는 남사마을은 고택촌이다. 아름다운 담으로 남사예담촌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엔 약 400년 된 이씨 고가를 비롯, 30여 채의 한옥이 터를 지키고 있다. 전통 한방휴양관광지나 봉화산, 정취암에서 맛보는 산청의 느낌이 또렷하고 강하다면, 남사마을은 그 느낌을 보다 오밀조밀하고 어여쁘게 전해준다.
고택 사양정사에서 잠을 청하고 맞은 남사마을의 아침은 꽃으로 환했다. 박태기나무엔 홍자색 꽃이 밥알처럼 매달렸고, 보랏빛 라일락은 은은한 향을 풍기며 밝게 폈다. 낮은 곳에서, 납작한 주머니 모양의 금낭화는 붉게 조롱조롱 매달렸고, 냉이와 꽃 잔디 역시 각기 하양과 보라로 마당을 물들였다.
꽃에서 눈을 거두면 이내 연둣빛이 시야에 들어온다. 한창 꽃을 화려하게 피워냈던 벚나무와 목련은 이제 꽃을 떨어뜨리고 어린잎을 내놓았다. 감나무와 은행나무도 마찬가지. 600년 된 나무나 이제 갓 심은 나무나 봄을 맞는 태도는 이처럼 한결같다.
그러나 남사마을 곳곳에서 만나는 많은 나무 중 이곳을 대표하는 나무를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회화나무다. '학자수(學者樹)'란 별칭을 가진 회화나무는 커다란 키와 붓으로 그리듯 화려하게 휜 가지를 뽐낸다. 특히 이씨 고가 앞에 서 있는 두 그루의 회화나무는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출사지다. 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선 회화나무는 서로를 향해 다가가다 방향을 돌리지 못하고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뻗으며 멀어졌다.
꽃과 어린잎과 고목은 서로 무관하게 제각기 봄의 시간을 보내고 있으나, 그 각자의 시간을 한데 어우르는 것은 500년의 세월이 첩첩이 쌓인 남사마을 그 자체다. 돌담은 나무나 잡초에 자신의 틈을 기꺼이 내줄 정도로 여유롭고, 마을 주민들은 긴 시간 고택을 포기하지 않았던 만큼 자연에 너그럽다. 그 너그러움과 여유가 돌담길에 배어 있어 자연히 마을을 도는 발걸음도 느려진다. 문화해설사 정구화(011-789-0801)씨에게 하루 전쯤 미리 연락하면 마을 내 규모가 큰 한옥을 돌며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 ▲ 산청 대원사 계곡에서는 지금 꽃과 잎이 한데 어울리며 한바탕 봄의 축제를 벌이고 있다. / 조선영상미디어 김승완 기자 wanfoto@chosun.com
거림 계곡, 중산리 계곡, 고운동 계곡, 백운동 계곡, 오봉 계곡, 지막 계곡, 선유동 계곡…. 산이 많은 산청은 당연히 많은 계곡을 안에 품고 있다. 그 대부분의 계곡이 깊고 청량해, 산청사람들은 "다른 지역에서 이름깨나 났다는 계곡으로는 여기서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고 자랑한다. 그 숱한 계곡 중에서도 산청 사람들이 최고로 손꼽는 계곡이 대원사 계곡이다.
지리산자락 곳곳에서 발원한 물이 한데 모여 힘찬 물소리를 들려주는 대원사 계곡은 원시적이다. 집채만한 바위들이 계곡을 따라 물길을 낸다. 그 길은 넓고도 깊어서 이름만 달리 한 유평계곡까지 12㎞에 이른다.
이 원시적 풍모의 길 위에서 나무들은 아기자기한 봄의 변화를 맞는 중이다. 서어나무, 느티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굴피나무, 때죽나무 등 너나 할 것 없이 무채색의 계곡에 연둣빛 색깔을 피워내고 있다. 나뭇잎은 어려서 서로 비슷하다. 해서 그 연둣빛은 개별로 파악되지 않고 군집으로 다가온다. 군집의 연두는 산수유의 노랑보다 더 옅어서 가까이 다가서기 전까진 얼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멀리서 눈에 뜨이는 건 이제야 활짝 만개한 벚나무다. 깊게 들어갈수록 벚나무는 더욱 많은 꽃잎을 매달고 있고, 계곡에서 나올수록 꽃잎은 햇빛을 받아내며 눈송이처럼 떨어진다.
그곳에선 절도 봄을 닮았다. 대원사는 신라 진흥왕 때 연기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비구니들의 수행도량이다. 그곳 벚나무 옆 약수터에서 물은 벚꽃의 향을 머금었고, 경내를 흐르는 여승의 독경은 봄처럼 정갈하고 맑다.
- ▲ 산청군 곳곳에서 마주칠 수 있는 다랭이논.
서울에서 산청을 가는 가장 빠른 대중교통 수단은 버스다. 서울 남부터미널(02-521-8550)에서 산청이나 원지행 버스를 타면 된다. 30분~1시간에 한 대 정도 있다. 약 3시간.
먹을거리
대체로 나물과 약초를 내놓는 집이 많다. 그중 신안면 홍화원 식당(055-973-9555)이 내놓는 '홍화원 특미(7000원)'는 말 그대로 '별미'다. 찰밥·수수·조·보리·흰밥을 섞지 않고 지어 소쿠리에 함께 내놓는다.
이외에 '갑을식당(한방닭백숙·055-973-0053)' '시골별장식당(맥문동 호박백숙·055-973-6066)' '세검정가든(약초정식·055-973-6564)' 등이 괜찮다는 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