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같은 삶
“참하시네예”
“네?”
“선생님 젊으셨을 때 참하셨겠으예”
“하하..네..감사해요”
얼마 전 사무실에서 올해 새로 수업을 맡으신, 유독 사투리가 심하신 선생님이 나를 슬쩍 보시더니 ‘참하다’라고 한다. 나는 순간적으로 어떤 화답을 할지 몰라 ‘고맙다’라며 적당히 얼버무리고 나왔다. 나는 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내내 ‘나는 왜 당황했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다른 누군가가 듣는다면 칭찬인데 왜 그러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무슨 얘기를 듣고 싶었을까?’
내가 이제 젊은층(?)에서 상대의 외모를 칭찬할 때 쓰는 ‘예쁘다’ 라고 하는 형용사와는 거리가 멀어진 듯한 섭섭함일까? 아님 훌쩍 나이가 들어버린 중년 여성에게 하는 찬미같은 ‘참하셨겠어요’에서
오는 상실감일까?(사실 나도 예전에 나보다 연배가 높으신 여성분들에게 그런 말을 한 듯하다.) 나랑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는 선생님에게서 듣는 저평가 된듯한 무안함일까? 하지만 둘 중 어떤 것도 긍정적인 해석은 아닌 것 같다.
내가 20대 즈음에 친구들을 데리고 집에 갔을 때, 마침 우리 집을 방문한 동네 어른들이 우리를 보고,
“아이고, 저 복숭아 같은 얼굴 봐라. 예쁠 때다. 제일 좋을 때다.”
그때는 어른들이 우리에게 듣기 좋으라고, 으레 하는 칭찬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내가 그 옛날 복숭아같은 얼굴을 한 대학생들을 캠퍼스에서 보면 넋 나간 듯 한참이나 쳐다보는 나이가 되었다.
텔레비전에서 내가 어릴 적 활동했던 연예인이나 옛 지인들을 몇 년 만에 우연히 거리에서 만나면 그들에게서 무심한 세월을 발견하면 마음이 짠해지는 동지애까지 나도 모르게 생긴다. 그러다 차 밖 사이드미러에 비치는 내 얼굴을 봤다. 이제 그 ‘복숭아’는 없고 얼굴 여기저기 그늘이 있는 협곡있는 얼굴이 보인다. 얼굴과 머리의 경계선에는 은색의 실오라기도 드문드문 보이는 것 같다. 순간 더 우울해진다. 어쩌다 벌써 이렇게 되었나 싶어 처량해지기까지 했다. 집에 와서도 밥을 하면서 아이들이 뭐라고 조잘대는 데도 그 소리마저 귀에 들어오지 않고, 혼자만의 늪에 빠져 있을 때 남편이 들어왔다. 남편과도 대충 인사하고 저녁을 준비하다 남편과 순간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남편은 의자 깊숙이 몸을 축 늘어뜨리며, 부엌을 왔다 갔다 하는 나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순간 정적이 몇 초 흘렸다.
누구랄 것도 없이 서로의 무심한 세월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는 건축현장에서 햇볕에 그을려 대추같이 익은 시뻘건 얼굴로 땀에 젖은 회색 솜뭉치 같은 머리카락을 아무렇지 않게 쓱 올리며,
“ 집에 오니 좋다. 당신도 있고 우리 새끼들도 있고.”
“ 음..그래.. 나도.”
그때 어디선가 막내가 달려와 남편에게 폭 안기며, 복숭아 같은 발그레한 얼굴을 대추 같은 남편 얼굴에 비빈다. 뒤에선 첫째 아들녀석이 말없이 테이블에 수저를 갖다 놓는다. 그 모습을 보다가 내 몸 아래에서 뭔가 모를 찌릿한 열기가 밑에서 올라와 나를 감싸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 나에겐 이제 복숭아 같은 두 아들과 함께 익어가는 대추같은 친구가 있다. 대추같이 늙어가는 참한 인생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