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이 날개다(Car makes a man.)
이완구
우리나라 속담에 “옷이 날개다”라는 말이 있다. 입은 옷이 좋으면 사람이 달라보인다는 의미다 외국에도 이와 비슷한 말이 있어 외국에서는 “Cloths maketh a man.”이라는 말이 있더라고 하시며 우리 속담과 비슷한 뜻이라고 영국에 오래 사셨던 친척이 말씀하셨다. 시대가 변하고 물질적으로 풍족하여 너도나도 좋은 옷을 입고 다녀서 지금은 고급차나 비싼 외국차를 타고 다녀야 “차가 날개다”(‘Car makes a man)라는 말로 변하게 되었다.
친척 중에 모 부처의 차관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치시고 지방에서 방송국 사장을 하시고 계시는데 대규모 산업단지를 조성하고 준공식을 하는 자리에 대통령도 참석한다며 초청장을 보내 왔는데 ‘승차입장’이라는 표지가 동봉되어왔다고 하셨다. 그분은 먼 길을 가실 때는 대부분 기차를 이용하시고 가까운 거리나 시내에서는 ‘무엇 때문에 큰 차가 필요하냐?’ 하시는 검소한 지론을 가지신 분이었다.
마침 준공식 날이 되어 ‘승차입장’이라는 표지를 소형차 전면에 붙이시고 정문 입구로 들어가는데 교통순경이 옆으로 가라고 수신호를 하자 기사가 옆길로 들어서길래 차를 돌리게 하여 다시 정문으로들어가려니 경찰이 몸으로 차를 막아서더라고 하셨다. 차에서 내려 그 경찰관에게 정식 초대를 받아 입장에 필요한 ‘승차 입장’이라는 비표가 차 유리창에 붙어있다고 말하자 그때서야 입장시켜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니 고급차나 외제차는 제지도 않고 무조건 입장시키더라며 겉모양을 보며 사람을 판단하는 모습에 분노를 느꼈다고 하셨다
이런 겉모습으로 사람을 구분하여 평가하는 것이 현대사회 각 분야에 산재해 있었다. 직장에서 사무실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흰 와이샤스에 넥타이를 매고 다녀 화이트컬러라 칭하고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작업하기 편리하게 푸른 색등 유색 옷을 입어 블루칼라라고 불렀는데 이것 또한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잘못된 습관 때문에 점차 산업인력은 피하고 사무직만 하려고 하여 외국인
근로자는 한국으로 돈 벌러 오려고 모여드는 반면에 대졸 고급인력은 취업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로 되어 소위
부모에 얹어 사는 캉가루 족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힘든 일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심지어 먹고 놀고
지내려는 젊은이들이 늘어나 잠재적 실업율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상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요즘에도 대표적인 것이 아파트 평수와 가지고 있는 차의 종류와 입고 있는 옷차림새로 사람을
평가하는 못된 관습이 생겨났다.그 사람이 살고있는 집이야 가보지 않고는 알 수 없지만 차는 수시로 타고 다니며
보이기에 남편이 자기의 수입에 맞는 차를 사려고 하면 부인들이 동창 아무개는 무슨차를 타고 누구는 외제차를
샀고 사촌은 뭘 타고 다니는데 쪽 팔릴일 있느냐며 크고 비싼차를 고집하므로 울며 겨자먹기로 아내말을 들어야
하니 그야말로 차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이 정설처럼 되어 버렸다.
더구나 차는 사람이 이동하는 수단이지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닌데 매일 세차하고 광내고 조금이라도 험집이 나면 사람이 다쳤을 때 보다 더 호들갑을 떨어댄다. 영국사람들은 차를 집의 일부로 생각하여 자기 차에 타자고하는 것은 집에 초대하는 것이나 다름없게 생각하여 매우 까다롭다고 하는 반면에 미국인들은 차를 단순한 이동수단으로 여겨 길에서 히치 하이킹이 가능한것인데 우리는 미국 문화권이면서도 남녁의 국도 2호선에서 배낭을 메고 걷다가 하도 다리가 아파 히치하이킹을 시도하였더니 열두어대가 지나가고 한 대가 태워 주었는데 그것도 아마 영감이 배낭을 메고 있어서 딱해서 세워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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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 솜씨는 아내의 표현대로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 걸핏하면 긁고 받고하여 멀쩡한 데가 없어 이제는 아예 고치기를 포기하고 누가 물어보면 내가 손수 운전한 것이 얼마 안되고 남이 운전하는 차만 타서 미숙하다고 둘러댄다. 그러나 항상 차를 과시의 수단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결코 남을 의식하고 살지는 않겠다는 것이 내 주의고 고집이며 차 따위가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낸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옷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자기의 개성을 나타나는 방법만이 자기만족을 높이고 무엇의 유, 무가 행복의 척도가 된다면 이미 그것 자체가 노예되기를 바라는 것과 다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