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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백인들이 흑인학교와 백인학교의 통합을 격렬하게 반대하던 1970년대 버지니아주, 흑인인 허먼 분(덴젤 워싱턴)은 신설된 T.C.윌리엄스 고교의 풋볼팀 "타이탄스"의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인근 백인고교의 베테랑 감독인 빌 요스트(윌 패튼)가 조감독으로 밀려나자 백인 선수들은 이에 강력하게 반기를 든다.
허먼은 "내 말은 곧 법"이라며 엄격하게 선수들을 훈련시키고, 반항하던 백인 선수들은 차츰 흑인선수들과 팀웍을 이루게 된다. 조감독 요스트 역시 불쾌한 심정을 접고 허먼과는 다른 스타일로 선수들을 지도하고 타이탄스는 연승행진을 거둔다.
그러나, 마셜 고등학교와 버지니아 주 결승전을 앞둔 상황에서 주장인 게리(라이언 허스트)가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자 타이탄스는 의기소침해지는데...
<영화 리뷰>
리멤버 할리우드, 리멤버 휴머니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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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영화가 아닌 <리멤버 타이탄>은 교양주의를 갖춘 성장기 영화로는 어른스럽지만, 현실의 정치성을 논하는 수준에서는 유아기의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결국 드라마가 현실을 덮어버린 영화로 귀결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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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노예에서 해방된 프레데릭 더글러스는 독립기념일 기념연설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백인 청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의 선조들이 전해준 정의와 자유, 번영과 독립이라는 풍요로운 유산은 여러분이 누리는 것이지 내가 아니다. 여러분에게 빛과 위안을 선사하는 햇빛이 나에게는 채찍자국과 죽음을 가져다주었다. 독립기념일은 여러분의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니다. 여러분은 축하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애도를 표할 수밖에 없다."
백 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1971년의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에게 이 말은 얼마나 멀고도 가까운 것일까. 프레데릭 더글러스의 말이 1971년 버지니아에서 바뀔 수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영화와 풋볼(스포츠) 덕분이다. 박애와 평등이라는 이념은 할리우드가 내세우는 전형적인 이데올로기이고, 가장 미국적인 스포츠라 할 수 있는 풋볼은 미국의 이상을 상징화한다. 영화 <리멤버 타이탄>은 오늘날 미국 사회를 지탱하는 다원주의를 대변하고 있다. 이 영화는 미국식 다원주의를 늘 위협했던 인종간의 갈등을 스포츠를 통해 화합하려는 70년대 미국의 교육과 인종정책을 정면으로 다뤄낸다. 풋볼의 세계와 대별되는 인종간의 대립과 폭력이 오가는 현실을 반대편에 세워둠으로써 팀 내의 갈등을 그럴듯하게 꾸미고 현실(인종대립)과 이상(인종화합)의 대결하는 심리적 긴장감마저 유도해낸다.
애인을 배신하며 팀의 기둥인 흑인 빅쥬와 백인 게리는 "동료애"를 통해 신뢰를 쌓으며 무패의 행진을 시작한다. 집단적인 광기에 가까운 남성 중심주의의 신화는 이들을 이끄는 교사 허만(덴젤 워싱턴)에 의해 절정에 다다른다. 스포츠의 순수한 이념 속에는 인종도, 차이도 없다. 오로지 능력과 단결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화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열망에 가깝다. 첨예한 문제들을 매우 보편적인 정서로 뒤바꾸는 것은 정치적 소재를 담보로 한 할리우드의 주류 영화가 능숙하게 다뤄낸 뛰어난 전통이었다. 이러한 재치는 분명 태평양 건너에 사는 한민족에게는 감정을 자극하고, 이념의 갈등을 흥미롭게 다루는 영화로 이해하도록 만드는 구석이 있다. 그러나 21세기를 사는 미국의 비평가들은 노골적으로 감정을 자극하고, 화합을 끌어내는 <리멤버 타이탄>의 위세에 반감을 표시했다. 당연하다. 영화 속 시대 배경인 1971년은 인종 갈등으로 고통받았던, 멀지 않은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30년이 지난 시절이 아름답게 포장되는 것의 역겨움은 박정희를 둘러싼 사안을 통해 한국 사회도 경험한 바가 아니었는가.
신인 보아즈 야킨의 세련된 연출력이 돋보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할리우드의 큰손 제리 브럭하이머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마겟돈> <더 록> 등에서 보여준 미국 중심주의는 언제나 그가 선택하는 항로다. 구별할 것이 있다면 <리멤버 타이탄>은 <아마겟돈>보다는 오락적인 요소와 갈등을 잘 배치한 <더 록>의 자리에 가깝다는 것. 그러나 오락영화가 아닌 <리멤버 타이탄>은 교양주의를 갖춘 성장기 영화로는 어른스럽지만(학생과 제자들과의 관계), 현실의 정치성을 논하는 수준에서는 유아기의 태도를 보여줌으로써(흑과 백의 스포츠와 우정을 통한 무조건적 화합), 결국 드라마가 현실을 덮어버린 영화로 귀결되고 말았다. 타이탄을 기억하라고? 할리우드가 기억할 것은 따로 있다. 이 영화의 주제에 더 어울리는 제목은 "기억하라, 할리우드"가 아닐까. 그래도 불가사의한 것은 여하튼 이 영화가 꾸민 드라마가 재미있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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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4.10 / 이상용(영화평론가) |
<씨네 21 리뷰>
승리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승리보다 고귀한 가치를 위해 불꽃 투혼을 불사른 영웅들의 인간승리!
버지니아 주에선 고등학교 풋볼이 최고의 인기를 누린다. 사람들에게 풋볼은 성탄절보다 화려한 축제이며, 플레이오프 경기는 국경일 보다 더 웅장한 행사이다. 1971년, 버지니아 주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에게 풋볼은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지역 교육청이 백인과 흑인 학교를 통합시키면서 풋볼은 뿌리 채 근본이 흔들릴 위기에 처한다. 통폐합의 결과 새로 탄생한 T.C. 윌리암스 고등학교의 신설 풋볼 팀 “타이탄스”를 맡기 위하여 흑인 감독 허만 분(덴젤 워싱톤)이 부임한다. 그 지역 백인 고등학교에서 오랫동안 풋볼 감독을 맡았던 빌 요스트가 허만 분을 도와줄 조감독으로 밀려나자 백인 사회엔 강력한 불만이 싹트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무수한 갈등의 요소를 안고 출발한 타이탄스는 허만 분 감독의 강력한 통솔력과 카리스마 아래 피부색의 장벽을 뚫고 서서히 뭉치게 된다. 허만 분과 조감독 요스트도 함께 일하는 동안 그들 사이엔 풋볼에 대한 열정 이상의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즉, 두 사람은 성실과 명예는 물론 투철한 직업 의식을 겸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엄청나게 다른 배경에도 불구하고 이들 두 감독은 분노로 뭉친 선수들을 교화시켜서 다이나믹한 승리 팀으로 완성시킨다. 두 감독이 맡은 타이탄스가 각종 시합에서 연전연승을 기록하자 흑백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던 알렉산드리아의 냉랭한 분위기도 눈 녹듯 변하기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피부색이 아니라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영혼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타이탄스의 무패행진으로 마을 전체가 축제 분위기에 취해있을 무렵, 팀의 주장인 게리 버티어가 교통사고로 하반신 불구가 된다. 팀 전원이 충격에 빠진 가운데 주 챔피언 결정전이 열린다. 전설적인 감독 에드 헨리가 지휘하는 “마샬” 팀과 맞붙은 타이탄스는 초반엔 고전을 면치 못하지만 특유의 투혼을 발휘하여 후반의 전세를 뒤집기 위한 혼신의 힘을 쏟아 붓는데...
비록 역사가 허만 분, 빌 요스트 같은 영웅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버지니아 주가 “타이탄스”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타이탄스가 이룩해낸 인간승리의 드라마 때문이다. 승리의 기록보다 값진 타이탄스의 유산, 그 원동력은 바로 흑백간의 갈등과 편견의 벽을 뛰어넘은 선수들의 우정과 동료애였음을 버지니아 시민들, 아니 미국인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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