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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호는 五代사람으로서 자는 호연(浩然) 호는 홍곡자(洪谷子). 산수, 수석화가, 화론가로 실질적인 의미에서 남종산수의 기반을 다진 사람. <필법기>는 절경을 수만 본 그린 다음 실물과 유사하게 되었을 때 우연히 만난 노인과의 대화형식을 통해 그림에 대한 의견을 펼친 글. 나무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만한 내용인것 같아 옮겨 봅니다.
태행산에 홍곡이라는 곳이 있는데, 나는 그곳에서 수백 평 쯤 되는 밭을 갈아서 생활하고 있었다. 어느날 근처 신정산에 올라가 사방을 두루 바라보면서 산길을 거닐던 중 대문짝 같은 큰 암석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푸른 이끼가 끼어 있는 오솔길 바닥에는 맑은 샘물이 스며 흐르며 기이하게 생긴 돌 언저리에는 아지랑이가 신비롭게 아롱거렸다. 걸음을 빨리 하여 그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위에는 모두가 오래된 소나무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아름드리 큰 노송은 껍질이 묵어 푸른 이끼가 끼어 있는 데다, 넓적한 비늘을 번득이며 공중으로 치솟아 있는 것이 마치 서리어 있던 규룡이 은하수를 향해 올라가는 기세였다. (또 여러 나무들이 서로 어울려) 숲을 이룬 것들은 가지와 잎이 무성하여 의기가 양양한듯이 보이며, 그렇지 못해 외따로 서있는 것은 뿌리가 구불구불 땅을 뚫고 나와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크게 흐르는 물 위로 비스듬히 누워 있기도 하였다. 이 외에도 언덕에 걸려 있는것, 시내에 구부러져 있는것, 이끼를 헤치고 나온 것, 바위를 찢고 서있는것 등 그 기이한 절경에 나는 경탄하면서 두루 그것을 관상하였다.
다음날부터 필묵을 가지고 가서 거듭 그것을 그리기 시작하여 무릇 수만 본을 그린 후에야 비로소 그 실물과 같게 되었다.
이듬해 봄, 석고암(石鼓巖) 굴 앞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다. 나에게 어떻게 왔느냐고 그 연유를 묻기에 온 사유를 답하였더니, 그 노인은 "자네는 붓 쓰는 법을 아는가?" 하고 물었다. (나는 이상히 여겨서) "보아하니 노인장은 몸가짐새가 촌사람 같은데 어떻게 필법을 알고 계십니까?" 하고 되물었더니 노인은 "자네쯤이 어떻게 내가 지니고 있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하고 의젓한 말씨로 받아 넘기는 바람에, 나는 그만 부끄러운 한편 놀라웠다. 문답은 계속되었다.
노인 자네는 연소한 사람으로 배우기를 좋아하니, 결국은 성공할 수 있을것일세. 대체로 화(畵)에는 여섯가지 요체(六要)가 있다. 그 첫째는 기(氣)요, 둘째는 운(韻), 셋째는 사(思), 넷째는 경(景), 다섯째는 필(必), 여섯째는 묵(墨)이니라.
형호 화(畵)라는 것은 화(華)외형의 화미를 뜻함를 뜻히는 것인 만큼, 형사(形似)를 귀히 여기고 실물의 진을 얻는 것이 중요하거늘 어찌 이처럼 까다로운 일이 있습니까.
노인 그렇지 않느니라. 화(畵)라는 것은 획(畵)동자이음으로 회화라면 화, 계획한다면 '획'임. 여기에서 획은 내적인 사량(思量)을 뜻함을 뜻하는 것이다. 물상(物象)을 심중으로 헤아려서 그 진(眞)을 취하는 일이니라. 물상의 외화(外華)에서는(외화에 치중할 경우에는) 그 華만을 취하게 되고, 물상의 내실(內實)에서는(내실에 치중할 경우에는) 그 실(實, 즉 내적인 본성)만을 취하게 된다. 따라서 화를 가지고 실이 된다고는 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그 방법(즉 필법)을 알지 못한다면, 진실로 외적인 형태를 근사하게 모사할 수는 있겠지만 대상의 眞을 기도(즉 圖眞) 할 수는 없느니라.
형호 그러면 어떠한 것을 근사한 것이라고 하고, 어떠한 것을 진을 얻은 그림이라고 하나이까.
노인 근사한 그림이란 그 형(形, 즉 質)만 취하고 그 기(氣)를 잃어 버린 것을 말하며, 진을 얻은 그림이란 기와 質을 아울러 충분히 표현한 그림을 말한다. 무릇 기가 華에만 흘러서 물상에서 떠나버렸다면 그 물상은 죽은 것이니라.
형호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서화라는 것은 유명한 명현들이 학습하는 바이고, 나와 같은 농민 출신의 본분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본래 한때의 흥취로서 잡은 붓이므로 근실하지 못해 결국 성취 할 수 없을 것인데도, 부끄럽게도 은혜롭게 요의(要義,즉 六要)까지 가르치심을 받았습니다. 하오나 정녕코 제대로 그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노인 인간의 기욕은 생을 해치는 것이다. 명현들이 거문고와 書, 圖畵를 즐기려 함도 그러한 취미로 대신 잡된 욕심을 제거하고자 함이다. 자네는 이미 그림을 그리는데 정을 붙였으니, 앞으로는 일생의 학업으로 수행을 하면서 잠시라도 중단됨이 없기를 결심해야 할 것이다. 이제 자네에게 도화의 요의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네.
첫째 氣라는 것은 마음에 따라 붓을 운행하여, 象을 취하되 확고한 신념으로 하는 것이요, 둘째 韻이라는 것은 기법의 자취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形을 세우고, 격식을 갖추되 속되지 않게 하는 것이요, 셋째 思라는 것은 대요를 간추려(구도하고) 想대상의 形狀을 뜻하기보다는 거기에서 떠오르는 동작태를 뜻함을 물형에 집중하여 파악하는 것이요, 넷째 景이라는 것은 풍속 제도와 四時 景物에서 묘리(妙理)를 색출하여 진을 창조하는 것이요, 다섯째 筆이라는 것은 비록 법칙에 의하더라도 운용상 임기변통을 하여서 너무 質實에 치우치거나 형사에 치우치지 않고 나르는 듯 움직이듯 하는 것이요, 여섯째 墨이라는 것은 高低 운담(暈淡)과 온갖 사물의 깊고 얕음, 文采가 자연스러워 붓으로 그린것 같이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그림에는) 신(神).묘(妙). 기(奇). 교(巧)라는 품격이 있다. 신이라는 것은 계획적으로 작위함이 없이 붓의 운용에 맡겨서 형상을 이루는 것이고, 묘라는 것은 생각이 천지와 만물의 성정을 헤아려 외적인 華美와 내적인 조리가 법도에 합하게 하므로 온갖 형태가 붓으로 제대로 나타나는 것이고, 기라는 것은 자유분방한 필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변화를 하여서 혹시 진경과 괴리되는 바가 있더라도 이상하게 그 화리에 이르게 한 것인데, 한편에 치우쳐 이렇게 되는 것 역시 筆은 있어도 思가 없는 것이다. 교라는 것은 언뜻 예쁘게 보이게 잔재주를 부려서 마치 참된 畵道원문은 大經(대경 :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에 합치하는 듯이 꾸미고 억지로 문채를 표현했으므로 氣象이 더욱 아득하게 사라지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일러 내실이 부족하고 외화만 넘친다고 말한다. 또 무릇 필세에도 근(筋). 육(肉). 골(骨). 기(氣)라고 일컫는 네가지 세(勢)가 있다. 붓 자취가 끊어져도 그러나 필세만은 끊어지지 않고 연속되는 것을 근이라 하고, 필적이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면서 실(實)을 이루고 있는 형태를 육이라 하고, 선이 살아 있든지 죽었든지선이 굵고 힘차게 살아 있든지 가늘게 소멸하여 죽어가는 듯이 보이든지 강건하고 단정한 것을 골이라 하며, 붓을 가지고 그린 자취가 무너지지 않는 것을 기라고 한다. 그러므로 먹이 너무 질박하면 그림의 근본 형상(體)을 잃게 되고, 먹색이 희미하면 正氣가 무너지며, 근이 죽으면 육이 없게 되고, 필세가 끊어지면 근이 없게 되며, 진실로 미려를 위한다면 골이 없게 됨을 알것이다.
무릇 그림의 병폐란 두 가지인데, 하나는 無形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유형한 것이다. 유형의 병이란 것은 꽃나무가 시기에 맞지 않는다든지, 가옥이 작은데 사람이 크다든지, 혹은 나무가 산보다 높다든지, 다리를 언덕으로 오를 수 없게 그린다든지 하여(대상의 시간적. 공간적인 면에서) 그 형태의 종류(즉 適否와 비례)를 헤아릴 수 있는 것들이다.(그러나) 이와 같은 병은 고칠 수 있는 병이다. 무형의 병이라는 것은 氣도 韻도 다 없어서 사물의 형상이 전혀 어그러져, 비록 필과 묵이 행해진다 해도 대략 죽은 사물과 같이 되는 것이니, 이러한 품격의 졸렬함은 도저히 수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네가 이미 雲林山水를 즐겨 그린다면, 반드시 먼저 물상의 근원을 구명해야 할 것이네.
무릇 나무가 생을 사는 것은 각기 자기의 천성을 받아서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나무의 생은 휘어도 구부러지지 않는 성질이다. 언뜻 보면 그 모양이 빽빽한 듯 성긴 듯하며, 푸른 빛도 비취빛도 아니고, 어릴 때부터 저절로 꼿꼿하여 절대로 낮추지를 않는다. 자세도 원래 홀로 고결하여, 가지들이 낮게 다시 가로 뻗치고, 혹은 거꾸로 늘어지되 지면까지는 떨어지지 않으며, 아래로 층을 나누어 흡사 첩첩이 쌓여있는 듯한 것이 숲속에서 군자가 덕을 베푸는 풍도(風度)인 듯이 보인다. 그런데 소나무를 마치 나르는 용이나 서리어 있는 어린 용같이 보아서 가지와 잎을 매우 산란하게 그린 것이 더러 있는데, 이러한 것은 소나무 본래의 기운이 아니다. 다음에 측백나무의 생은 변하고 바뀌면서 굴곡이 많고 번잡하나 화려하지 않으며, 마디를 받쳐 들면서(그 속에서 마디가 나와)단락이 생기고 문채와 무늬가 돌아가며 따라 가는데, 잎새는 가는 실로 매듭을 지은것 같고, 가지는 삼나무 껍질을 입힌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회화에서 그 줄기와 가지가 뱀과 같이 미끈하고, 나무껍질이 무늬가 없이 질박하며, 나무의 중심이 비어 있는 듯 뒤틀리게 그려진 것이 있는데 이 역시 잘못된 것이다. 이 외에도 가래나무, 오동나무, 참죽나무, 굴참나무, 느릅나무, 버드나무, 뽕나무, 회화나무 등이 있다. 비록 그 형태와 질감은 모두 다르겠지만, 그것을 깊이 연구한다면 하나하나를 분명하게 합치되게 할 수 있느니라.
또 산수의 모양은 氣勢와 相生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기에 뾰족하면 봉(峯)이라 하고, 평평한 듯하면 정(頂)이라 하며, 둥그스름한 것을 만(巒)이라 하고, 이러한 만들이 연이어 있는 것을 령(嶺)이라 하며, 깊은 구멍이 있는 것을 수(岫)라 하고, 높은 벼랑으로 된 것을 애(崖)라 하며, 애의 중간이나 아래인 것을 암(巖)이라고 한다. 조그마한 길이 산중에 통해 있는 것을 谷이라 하고, 통하지 않은 곳(즉 통로가 없는 곳)을 욕(峪)이라 하며, 욕 중에서 흐르는 물을 계(溪)라 하고, 산에 끼어 흐르는 물을 간(澗)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위쪽의 봉과 만이 비록 다르게 솟아 있더라도, 그 아래쪽의 산등성이와 봉우리가 서로 이어지면서 숲과 샘물 사이로 은은히 비추이면 그것에 의해 원근의 형색이 어렴풋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산수를 그리는데 있어 이러한 형상을 갖추지 못한다면, 또한 잘못된 것이다. 가령 흐르는 물을 그리는 경우, 붓을 대개 광태적으로 구사하여서 물결이 마치 끊어진 선같이 산란하게 하고 물결의 높낮이를 분간할 수 없게 한 것이 있는데, 그것 또한 잘못된 것이다. 무릇 구름과 안개, 아지랑이는 그 가볍고 무거움이 대체로 시기에 따라서 기세가 정해지지만 혹은 바람 때문에 형상이 전혀 정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그 복잡한 규칙은 문제삼지 말고, 그 대요를 취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선 능히 이러한 옳고 그른 사리를 알고난 연후에 그 필법을 배워야 할 것이니라.
형호 그러면 옛날부터 그림공부를 하는 사람 중에서 누가 완비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노인 그림 공부를 완전히 해득한 자는 적다. 옛날에 사혁은 육탐미를 제1품 화가로 評定하였지만, 지금은 이미 그의 진짜 작품을 만나기 어려운 형편이고, 장승요가 남긴 그림은 회화의 이치에 매우 어긋난다. 원래 수류부채는 옛날부터 잘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예를 들어 수운묵장(水暈墨章)수묵만의 새로운 문채로 표현하는 화법같은 것은 우리 당대에 일어났다. 그러므로 장원외의 수묵으로 된 수석그림은 기와 운이 함께 충분히 발휘되어 있고, 필과 묵이 정묘하게 쌓여 있으며, 천진한 심사가 탁연하게 나타나 다섯가지 채색이 귀할 것 없이 되었으니, 고금에 일찍이 있은 적이 없는 작품이다.국정(鞠庭)과 백운존사의 작품들은 기가 형상에 표현된 상태가 그윽하고 뛰어난 동시에 그 천지의 기운을 함께 획득했고, 활동과 변화작용이 일상적인 궤도를 초일(超逸)하고 있어서 깊이를 측량할 수 없다. 왕우승(왕유)은 필과 묵이 완려(宛麗)하고, 기와 운이 높고 맑으며, 교묘하게 형상을 그려내면서도 천진한 심사를 움직이게 한다. 이 장군(이사훈)은 이치가 깊고 생각이 원대하며, 필적이 매우 정미하다. 그러나 비록 공고하고 華하지만 묵의 묘를 크게 잃고 있다. 항용산인의 수석은 필치가 둔삽하고 능각(稜角)이 모호하다. 먹을 쓰는 법은 홀로 비오(秘奧)한 경지에 도달하였다 해도, 붓을 쓰는 법에는 전혀 그 골이 없다. 그러나 호방하고 종일(縱逸)한 점에서는 진정한 천지의 기운을 잃지 않았고, 기상이 천지의 기운으로 크게 교묘하고 아름다운 일면을 창안하였다. 오도자는 필이 형상보다 뛰어나고 골기가 처음부터 높아 말로 할 수 없이 천연스러운 경지의 그림을 수립하였지만, 역시 먹이 없는것이 한스럽다. 진원외(陳員外)와 승 도분 이하의 무리들은 거칠어서 凡格에나 오를 정도이고, 작용에 특별히 기이한 붓놀림은 없으며, 묵의 운행에서도 지나친 형적(形蹟)이 눈에 뜨인다. 이상으로 자네에게 몇 가지 지름길을 일러주었지만 구체적으로 완비된 설명이라고 할 수는 없네.
마침 내가 전날 그려 두었던 <이송도異松圖> 한 폭을 펼쳐 보여 드렸더니,
노인 굵직한 선(肉)의 필이 법에 맞지 않고, 근과 골이 모두 어울리지 않았다. 기이한 소나무를 그리는데 어찌 기능만으로 될 수 있겠는가.내가 조금 전에 자네에게 필법을 가르쳐 주었으니 그대로 하여보라.
이내 노인은 견소(絹素, 그림그리는 흰 비단) 두어 폭을 가지고 와서 자기 옆에서 이송(異松)을 마주하고 그리게 명령하였다.
노인 이제야 자네의 솜씨가 내 마음대로 되었네. 나는 "말하는 것을 살펴보면 그 행동을 알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네. 자네 내 말대로 소나무 시 한 수 읊을 수 있겠는가?
형호 감사합니다. 이제야 "교화는 성현의 천직이라 녹을 받든지 못 받든지 선악의 일에서 떠날 수 없고, 감응케 하여 그것에 따르게 한다."는 말뜻을 알게 되었습니다.지도하심이 이와 같으시니 어찌 감히 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으리이까? 하고 이내<고송찬 古松贊> 한 편을 지어 읊었다.
이울지 않고 겉치레도 하지 않은 모습
저 곧은 소나무 뿐이로다.
기세가 높고도 험상스러운가 하면
절조를 굽힌 듯 공손하게도 보이도다.
잎새는 푸른 일산(日傘)을 펼친 모습이고
가지는 붉은 용이 서리어 있는 듯한 모습이도다.
아래에는 덩굴들이 마냥 뻗어 있고
그윽한 그늘에 풀들이 어지럽도다.
어떠한 천품을 타고 나왔는지
기세는 구름에 걸린 봉우리에 가깝고
그 치솟은 줄기를 우러러 보면
가로 뻗거나 서 있는 가지들이 층층이 겹쳤도다.
높고 크고 웅장한 형상이 시냇물 가운데 비치고
짙푸른 달무리 안에 안개낀 듯 얽혀 있네.
기이한 가지들은 거꾸로 걸쳐 있으면서
배회하듯 변화무궁하도다.
아래로 범목(凡木)들과 연접해도
協和는 할지언정 뇌동(雷同)하지는 않도다.
시가(詩歌)나 부문학(賦文學)에서 고귀하게 다루었음은
군자의 풍도를 지니고 있음이로다.
맑은 바람 끊임없이 불어올 때에
그윽한 음향이 창공에 사무치도다.
노인은 感心한 듯 오랫동안 잠자코 있다가, "원컨대 자네는 성심으로 연습하면 될 것이네. 필묵을 잊어버려야 참다운 경치(眞景)가 있게 되네.원문 "忘筆墨而有眞景"은 장자의 '망지(忘知)'나 '망아(忘我)' 와 같다. 즉 지식이나 자아를 세우고 난 뒤 그것을 잊고 통찰로 그 이상의 세계를 꿰뚫고 직관해야 비로소 참다운 경치가 이루어짐을 말하는 것이다. 나의 거처는 바로 석고암의 굴이고, 나의 자는 석고암자라고 하네."
형호 원컨대 노인장을 모시면서 지도 받고 싶습니다.
노인 그럴 필요는 없느니라.
노인은 드디어 급히 작별하고 가버렸다. 다른 날 그곳을 다시 방문하였더니 그 분의 자취는 찾을 길이 없었다. 그후부터
나는 그 필법을 연습하면서 일찍이 그분이 전해준 바를 존중하였다. 이제 드디어 그분의 말씀을 엮어 모아 도화의 한 궤범(軌範)으로 삼으려 한다.
※참고서적 : 중국화론선집, 김기주 역주, 미술문화사
첫댓글 좋습니다. 형호의 필법에 이어, 동기창의 화론까지 내친김에 주~욱 달려 보시지요.
동기창의 화론은 분량도 많고 실제 작품들을 예로 들어 얘기된 부분이 많아 난감한데요.^^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처음보는 내용으로 신선들의 대화로 생각하고 많이 배우렵니다.
형호의 필법기는 곽희.곽사의 임천고치, 석도의 석도화어록과 함께 중국의 삼대 화론서에 속합니다.
그 중 필법기가 짧지만 함축적이고 무협지를 읽는 듯 재미있는 화론인것 같습니다.
몇번이고 되세겨 봐야할 글인것 같습니다.감사합니다.
그냥 옮겨 보는 글입니다. 잘 읽어 주시면 제가 감사하지요.
정말 무협지를 읽는것처럼 술술~~
근데.. 넘 어렵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