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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동활의 음악정원 ♣ 원문보기 글쓴이: 茶軒
빵집
이면우
빵집은 쉽게 빵과 집으로 나뉠 수 있다
큰길가 유리창에 두 뼘 도화지 붙고 거기 초록 크레파스로
아저씨 아줌마 형 누나님
우리 집 빵 사가세요
아빠 엄마 웃게요, 라고 쓰여진 걸
붉은 신호등에 멈춰 선 버스 속에서 읽었다 그래서
그 빵집에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과
집 걱정하는 아이가 함께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자세를 반듯이 고쳐 앉았다
못 만나 봤지만, 삐뚤빼뚤하지만
마음으로 꾹꾹 눌러 쓴 아이를 떠올리며
이면우(1951년 ~ )
시인. 대전에서 태어났다. 생계를 꾸리는 직업은 보일러공이다. 최종 학력은 중졸이며 마흔 살이 넘어서야 시를 쓰기 시작했다. 신춘문예나 문학 전문 잡지에 글을 싣는 등 일반적인 방법으로 문단에 나오지 않고, 주변의 경제적 도움을 받아 첫 시집 《저 석양》을 펴내면서 문단에 나왔다. 거기 나오는 시인의 이력은 '학력 별무, 건축배관공'이다.
시〈거미〉로 2003년 제2회 노작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 《저 석양》(호서문화사, 1991)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창작과비평사, 2001)ISBN 89-364-2211-1
《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북갤럽, 2002)ISBN 89-90095-09-3
출처: 위키백과
이 시를 읽으면 지금으로부터 약 60년이 조금 안된 몇 해 전, 지금의 창신동 입구 사거리 쯤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내 스케이트장이 생겼을 즈음의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스케이트를 타면서 스피드 시합을 하여 진 사람이 찐빵을 사기로 하고 한참 먹성이 좋아 돌맹이도 씹어 소화를 시킬 나이에 출출해진 뱃구렁을 채우기 위해 근처 숭인동에 있는 중년의 아주머니가 하시는 찐빵집을 단골로 드나들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그 찐빵집은 없어 졌지만 그 쓰러질 듯한 건물은 숭인동 종묘가 있는 대로변에 아직도 있더군요.
그 아주머니는 흡사 저희 어머님을 닮아서 아주 자그마한 체구에 단아한 모습의 인자한 분이셨는데, 우리가 단골로 드나들기도 하지만 빵을 한 접시 주문하면 한창 먹을 나이인데 더 먹으라며 덤으로 꼭 몇 개를 더 올려주시곤 했습니다.
그 시절 학생들은 돈도 별로 없을뿐더러, 부잣집의 학생이나 가난한 학생이나 교복을 입고 다녀서 겉볼안으로는 별반 차이도 없었고, 부잣집의 급우라 하더라도 그 시절엔 그렇게 있는 척을 한다든지, 가난한 학생을 얕잡아보는 학생도 없었습니다.
그저 모두가 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였고, 단지 키가 큰 급우들은 장난삼아 키가 작아 교실에서 제일 앞에 앉아있는 친구의 까까머리를 쓰다듬으며 “아가야!” 하며 놀리는 정도였었지요.
다니던 학교가 명색이 5대공립이어서 학급에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쟁쟁한 집안- 장관의 손주, 큰 기업의 아들, 국회의원이나 고관, 판 검사, 의사의 아들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 친구들은 하나 내색도 하지 않고 점심시간에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도시락 반찬을 나누어 먹을 때도 함께 앉아 도시락을 풀고 먹을 때 보면 반찬이 특별히 호화롭거나 특별하지도 않았고 행동도 거만하거나 티를 내지 않아서 졸업하기 전까지는 여늬 급우들처럼 평범한 친구였었습니다.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 후 취직을 하고나서도 그때 당장은 몰랐지만,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고 사회의 중견직으로 종사를 하다보면 그때서야 그 집안의 저력(?)이 나타나, 그 친구들의 입지가 성실과 노력으로 개천에서 용 낫다는 “입신양명”을 이룬 우리네 평범한 보통사람과는 다르게 기업의 중역이나 오너로 동창회에 나오거나 명부에 오른 것을 볼 수가 있어서, 아! 그 친구가 어디어디 재벌가의 자손이구나! 아니면 어느 어느 국회의원, 정부 고관의 자식이구나! 또 어느 병원장의 아들이거나 대학의 총학장의 자식 이었구나!라고 알게 되었던 적이 많습니다.
지금처럼 강남에 사는 아이들이 강북에 사는 아이들을 업신여기거나, 요즘처럼 소위 금수저 집안의 아이들로 세상을 편하게 사는 아이들, 또 요즘은 연줄 연줄로 대기업의 직원이나 정부기관의 공무원으로 쉽게 들어가는 것은 물론 TV에 출연하는 배우, 탤런트, 가수, 개그맨 등등 연예인까지도 제 자신을 배경으로 자식을 공공연하게 출연시키는 세상이지는 않았지요.
요즘 금수저 집안은 더구나 아니며, 부모가 부를 축적한 자식은 커녕, 부모가 특별한 사회적 배경이나 자산이 없는 자녀들은 정말 울분에 젖어 이 사회를 원망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더구나 고액의 연금을 받는 퇴직공무원들도 산하기관에 기를 쓰고 한 다리 걸치려 하고 아무런 노후대책도 없는 퇴직 중장년들의 알량한 일자리마저 저희들이 차지하려고 하는 몰염치를 보면 참 너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산림청 숲해설가의 일을 할 때에도 공무원 퇴직연금이나 초, 중고 교사로 퇴직연금 250만~300만 원 이상 수령하는 자들이 일자리창출사업에 지원하는 고령의 지원자들의 자리를 꿰차려고 공무원 시절의 인맥, 배경을 동원하여 월 120~150만 원 정도의 수당을 받는 일자리마져도 빼앗아 99석에서 100석을 채우려는 고약한 자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관계청장이나 소속 고위관료에게 그런 점은 시정을 하는 것이 어떠냐?라고 하면 그래도 공무원이나 교사들이 숲해설의 지식이나 해설의 테그닉이 낫다면서 그들을 옹호합니다. 아마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는 말이 딱 맞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한 번 봅시다. 우리네 같은 전문 고위 전문직 출신이나 고급학력과 사회적으로도 공직(국기 공무원은 아니지만)사회의 고위직이나 대기업의 간부로 퇴직한 그들이 말하는, 공무원이나 교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유휴고급인력들도 요즈음 숲해설가나 공공기관의 기간제나 시간제 채용에 지원하는 경우가 많은데, 객관적으로 그네들보다 학력이나 능력에서 모자란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만 대부분 그들은 채용되지 않는 것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현직의 공무원들이 그러한 고급인력의 채용을 꺼려하기 때문이지요.
이미 사회적으로 은퇴를 하고 자기 자신의 지식과 풍부한 경험, 경륜, 재능을 사회에 도움이 되고자 그러한 공공근로나 공공목적의 채용에 지원하지만 그러한 인력을 부려먹는 데는 버거웁고 열등감에서 그러는 게 아닌가 판단됩니다. 물론 모든 공무원들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요.
이면우 시인의 시 “빵집”을 이야기하다가 잠시 또 삼천포를 지나 사천으로 빠져버렸습니다 그려. 참, 삼천포 시민들은 이 말을 참 싫어하더군요. 이야기하는 사람은 악감정 없이 그냥 “삼천포로 빠졌다”고 하는데..... 그들이 싫어하는 말이라면 조심하여 사용하지 않아야 겠습니다. 그것이 서로를 존중하는 더불어 사는 사회 일테니까요.
그 빵집의 어린 자녀가 오죽 애가 탔으면 “우리 집 빵 사가세요/ 아빠 엄마 웃게요” 했을까요?
그런 어리지만 대견한 자식을 둔 빵집의 부모들에게도 좋은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여기서 빵집은 요즘 제빵집의 소보로나 식빵의 서양빵집이라기 보다는 연탄 위에 커다란 가마솥을 올려놓고 찌는 찐빵이나 손 만두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뜨거운 빵이나 만두 같은 열기로 그 빵집에 손님이 가득 찼으면 좋겠다고 응원하는 마음을 갖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도 이제는 좀 살만해졌지요?
모든 것이 다 우리 선배는 물론 우리 자신이 건설의 역군으로 또 각자의 자리에서 정말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하고 참으로 열심히 치열하게 살았던 결과가 아닌가요?
먹을 것 다 먹지 않고 하고 싶은 것 참으면서 고통을 힘들다 생각하지 않고, 6.25전쟁 이후 궁핍한 국민과 나라가 자유민주주의다 뭐다 하면서 초기의 정치인들이 민생고를 해결하지 못하고 또 당파싸움처럼 그 버릇 버리지 못하고 싸움만 일삼으니 구악을 일소한다고 군인이 혁명을 일으켰지요.
행복한 시대는 아니었지만 어쨌던 그 군인들이 이 나라의 가난을 물리친 것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뭐라 하지 못하지요. 실로 그렇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세계 경제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던 밑바탕을 해놓은 그들은 이 나라에서 길이 기억해야 할 위대한 인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 그와 견줄 수 있는 대통령 어느 놈 하나 있습니까? 다만 민주독재를 했다는 것이 오점이지만, 지나고 보면 그 시대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이 나라 구석구석에 깔려 있는 종북세력에게 이 나라는 이미 공중분해 되었을 겁니다. 물론 지금도 그 세력들을 경계 해야합니다만.
이 나라의 과도기에 어쩔 수 없는 우리 나라와 국민의 운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도 남을 도울 수 있는 고마운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라의 복지혜택으로 열심히 일하지 않고도 먹고는 살 수 있는 하위계층까지 애완견이다 뭐다 하면서 애완동물을 키우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진정 하위계층인지는 모를 때가 종종 있기는 합니다만.
그러한 계층의 임대아파트에 어쩌다 가보면 수입 외제자동차나 고급 자동차가 항시 주차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곳이 빈곤층이 살고 있는 임대아파트가 맞는가 싶을 때가 있습지요.
어쨌거나 요즘에는 애완견 카페다 휴양시설이다 또 개 MRI를 찍느니, 개 묘지가 있느니, 개에게 쇠고기에 영양제를 먹이느니 어떠니 하는 것을 보다가도 병든 애완견을 버리기 위해 휴가철이나 한 겨울 외진 시골에 버리고 달아나는 종자들을 보면 참 어쩌다가 인간이 저렇게 되는가? 허탈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TV나 언론 보도에 보면 한 달에 10만 원 가량밖에 벌지 못하지만 그 돈으로 온 가족을 부양하면서 불평하지 않고 그런대로 감사하고 만족하며 사는 이웃나라 사람들을 보면 우리 6.25 동란 때의 생각이 납니다.
그 때 그 궁핍하고 모질게 살았던 시절엔 선진국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었지 않습니까? 우리 국민학교 다닐 때 전국의 모든 학생들이 미국 원조 분유 -지금 생각하면 약 10리터 정도의 누런 종이 분유통- 1통씩 배급을 받았던 때가 생각이 나는군요.
물론 지금 우리나라도 민간원조기관에서 이들 나라에 자금과 인력을 파견하여 많이 돕고 있습니다. 그래도 피골이 상접한 어린아이들이 먹지도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는 광경을 볼 때 빚을 갚는 심정으로 내가 쓰는 돈의 적은 부분이나마 그들을 위해 도와주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민간기관에서 한 달에 3만 원, 2만 원 이상의 돈 만을 받는다 하지 말고 단 몇 푼이 됐던 도움의 작은 손길이나마 마다 않고 모아서 그들을 위해 쓰면 좋을텐데 왜 자기들 편의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외국의 딱한 사정도 사정이지만 우리나라에도 정작 나라의 따뜻한 도움을 받을 사람이 받지 못하는 딱한 사람들이 아직도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받지 않아야 할 사람이 그들에게 갈 돈과 혜택을 가로 채는 일은 절대 없었으면 좋겠고, 애완견에게 사치스런 쓰임새를 줄이고 내가 마실 스타벅스 커피 한 잔 값만이라도 모아서 우리나라의 딱한 사정과 몹쓸 병에 어쩔 수 없이 생존을 이어가고 있는 새싹과 어린 청소년에게 도움의 물고가 향하도록 공무원이나 순수 민간단체에서도 관심과 눈길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그 빵집에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과
집 걱정하는 아이가 함께 있다는 걸 알았다“
하듯이 모든 이들이 내가 어렵다 할지라도 아주 조금만 마음을 떼어내어 정말 도움이 필요한 그들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손을 잡아준다면 그들도 이 나라의 당당한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 하루에 단돈 천 원이라도 모아 볼까요? 많다고 생각하면 많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 그 돈이 없다 해도 그냥저냥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것이 몇 만 원, 몇 십 만 원 되는 날, 가족과 내 손주와 함께 공신력이 있는 “사랑의 기금”에 기부를 한다면 아들, 손자, 며느리..... 모두가 따뜻하고 흐뭇한 미소를 지을 날이 많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