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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대 숙종실록]
4. 숙종의 환국 정치로 인해 계속되는 정치 옥사
숙종은 이른바 용사출척권(왕이 정계를 대개편하는 권한)을 통한 환국 정치로 왕권을
강화시켰던 왕이다. 그는 정국 전환을 뜻하는 '환국'이라는 방법으로 세 번에 걸쳐
정권을 교체하면서 붕당 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그 반대급부로 군주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여
왕권을 강화시켜 나갔다.
그가 이같은 환국 정치를 구상하게 된 배경은 정확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붕당의
한계성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가 꿰뚫고 있던 붕당의 한계성은 바로 군주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파당은 반드시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점을
시의 적절하게 이용하면서 특정 파당이 지나치게 힘이 강해지면 대출척을 감행함으로써
정국의 전환을 꾀하곤 하였다.
숙종이 환국 정치를 택하게 된 것은 아마 그것만큼 왕권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정책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환국 정치를 이끌어 가면서 허적, 윤휴, 이원정, 송시열, 김수항, 박태보 등 수많은 뛰어난
신하들을 희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자신의 부인인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거나 세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를 죽이기까지 했다.
숙종의 이같은 환국 정치에서 비롯된 사건들을 열거해 보면, 남인이 대거 축출당하는 1680년의
경신환국, 왕자 균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서인이 제거당하고 남인이 다시 집권하게 되는
1689년의 기사환국,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통해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의 소론이 집권하게 되는
갑술환국, 그리고 이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1701년의 '무고의 옥'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경신환국(1680년)
경신환국은 1680년(숙종 6년)에 남인 일파가 정치적으로 대거 축출된 사건을 일컫는다.
남인은 1674년의 제2차 예송 논쟁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았으나, 그해 즉위한 숙종은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의 추천에 따라 그녀의 종질 김석주를 요직에 기용하여 남인을 견제하였다. 하지만
김석주의 세력은 남인을 견제할 만큼 강성하지 못했다. 따라서 숙종 초기는 남인의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숙종은 남인의 지나친 성장을 경계하고 있었는데 그런
내면적인 경계심은 허적의 유악 남용사건으로 폭발하게 된다.
1680년 3월, 남인의 영수 허적은 조부 허잠의 시호를 맞이하는 잔치를 벌이게 되는데 이날
공교롭게도 비가 내렸다. 그래서 숙종은 허적에게 유악(비가 새지 않도록 기름을 바른
천막)을 내어주라고 명한다. 하지만 이미 유악은 허적이 빌려간 상태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숙종은 심하게 분노하여 패초(나라에 급한 일이 있을 때 국왕이 신하를 불러들이는 것)로
군권 책임자를 모두 불러들였다. 사실 유악은 군사 물자였기 때문에 개인이 사사롭게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혹 유악이 필요할 때에는 왕이 선처하여 빌려주는 형태를
취했는데, 당시 군권과 조정을 거의 장악하고 있던 남인은 허적의 권세를 믿고 왕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유악을 빌려 주었던 것이다.
숙종은 이 일을 남인이 권세를 믿고 왕을 업신여긴 행동이라고 단정하면서 남인이 거의
차지하고 있던 군권을 서인에게 넘겨 버린다. 훈련대장직은 남인계의 유혁연에서 서인계의
김만기로 바꾸고, 총융사에는 서인 김철을, 수어사에는 서인 김익훈을 임명한다. 그러나
어영대장은 당시 서인 김석주가 맡고 있었으므로 보직을 유임시켰는데, 이로써 서인이 군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그런데 남인은 설상가상으로 '삼복의 변'에 직면하게 되었다. 김석주의 사주를 받은 정원로가
허적의 서자 허견이 인조의 손자이며 인평대군의 세 아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등 삼복과
함께 역모를 도모했다는 고변을 했던 것이다.
고변 내용을 살펴보면 허견과 삼복 형제들은 숙종이 즉위 초년에 자주 병을 앓는 것을 보고
왕위를 넘겨다 보았고, 또한 도체찰사부 소속 이천 둔군에게 몇 차례에 걸쳐 특별한 훈련을
시켰다는 것이 골자였다.
도체찰사부의 둔군을 사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은 왕권에 도전하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는
일이었고, 그 때문에 도체찰사였던 영의정 허적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요소였다.
문제가 되었던 도체찰사부는 효종 대까지는 잦은 전란과 군비의 필요성으로 상설되었으나,
평화가 정착되던 현종 대에 폐지된 기관이었다. 그러다가 숙종 초에 중국 대륙의 정성공,
오삼계 등의 움직임에 대비하여 군비를 강화해야 한다는 윤휴, 허적 등의 주장에 따라 1676년
다시 설치되었다.
이후 허적은 지방 군대는 물론 훈련도감, 어영청 등 도성의 군영도 도체찰사부에 소속시켜
군권을 일원화하자고 하였으나, 김석주의 반대로 1677년 6월에 도체찰사부 자체가 일시
혁파되었다.
도체찰사부는 영의정을 도체찰사로 하는 전시의 사령부로서, 외방 8도의 모든 군사력이 이
기관의 통제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뒤 국왕 및 궁성 호위부대로 발족한
중앙 군영은 예외적인 존재로 인식되어 도체찰사부에 예속되지 않았다. 허적이 중앙 군영까지
그곳에 예속시키려고 하다가 김석주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그 후 1678년 12월
도체찰사부는 영의정 허적의 주장으로 다시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이 때 숙종은 허적을
견제할 요량으로 부체찰사로 김석주를 임명하였다.
비록 도체찰사부에 중앙 군영이 통합되긴 했으나 이들 군사 기관은 사실 서인측이 창설하고
발전시켰기 때문에 서인은 그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중앙 군영의 지휘권도 거의 남인에게 넘어가고 말았던 것인데, 허적의 유악
남용사건으로 서인이 다시 중앙 군영의 군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한편 허적의 아들 허견과 복창, 복선, 복평군 삼형제의 모반 행위에 대한 고변의 주요 내용이
도체찰사부의 군사를 동원한 것이었기 때문에 도체찰사부 복설에 관련된 자들은 모두 역모에
연루되게 되었다. 그래서 허견과 삼복 형제 뿐만 아니라 허적, 윤휴, 유혁연, 이원정, 오정위 등
남인 중진들이 대거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었다. 또한 고변자 정원로 역시 역모자의 하나로
지목받아 처형되었다. 이로써 남인은 대거 축출되고 서인이 대폭 등용되어 조정은 서인에 의해
장악되었다.
기사환국(1689년)
기사환국은 후궁 소의 장씨의 소생을 원자로 책봉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다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숙종의 정비는 원래 서인 노론의 김만기의 딸 인경왕후였으나 그녀가 1680년에 죽어 숙종은
노론 민유중의 딸(인현왕후)을 계비로 맞이했다. 그런데 그녀는 원자를 낳지 못했고, 숙종이
총애하던 소의 장씨가 아들을 낳았다. 숙종은 소의 장씨가 낳은 아들 균을 인현왕후의 양자로
삼아 원자에 정호하려 했는데, 서인측은 이를 반대하였다. 영의정 김수홍을 비롯한 이조판서
남용익, 호조판서 유상운, 병조판서 윤지완, 공조판서 심재, 대사간 최규서 등 노론계는
한결같이 중전의 나이가 아직 한창인데 태어난 지 두 달밖에 안된 후궁 소생을 원자로 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다. 이에 숙종은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워 종사의 대계를 늦출 수
없다고 하면서 서인 노론측 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5일 만에 왕자 균의 정호를 정묘사직에
고하고, 그의 생모인 장씨를 빈으로 격상시켰다.
하지만 대신들의 반발은 누그러들지 않았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송나라 신종이 28세에
철종을 얻었으나 후궁의 소생이어서 번왕으로 책봉하였다가 적자가 없이 죽게 되자 그 때
비로소 태자로 책봉하여 후사를 이은 고사를 예로 들며 후궁 소생인 왕자 균을 원자로
확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재차 강조했다.
숙종은 송시열의 반대 상소를 접하고는 이미 종묘사직에 고하여 원자로 확정했는데도 이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왕을 능멸하는 처사라고 지적하며 심하게 분노하였다. 그래서 그는 승지
이현기와 윤빈, 교리 남치훈, 이익수 등과 의논하여 송시열의 관작을 삭탈하여 외지로
출송시키고, 이어서 영의정 김수홍을 파직시켰으며, 목내선, 김덕원, 민종도, 민암, 목창명 등
남인계 인사를 대거 등용하였다.
반면에 노론계는 송시열이 유배되어 사사된 것을 비롯하여 이이명, 김수항, 김만중, 김수홍
등도 유배되거나 사사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숙종은 본질적인 원인이 민비에게 있다 하여 다시 중전을 폐비하려 했다.
그러자 노론측이 오두인 등 86인의 이름으로 이를 저지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숙종은 그
주동자인 박태보, 이세화, 오두인 등을 국문한 후 위리안치하거나 귀양보냈으며, 그 해 5월
민비를 폐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는 한편 원자 균을 세자에 책봉했다.
궁인 출신의 후궁 장씨는 1686년 처음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여 숙원을 거쳐 소의에
봉해지고, 왕자 균을 낳은 후 그가 원자에 정호되어 이듬해 세자에 책봉되자 그 해에 중전이
되었다.
그녀가 일개 궁인에서 왕비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데에는 장렬왕후(인조의 계비)의 동생
조사석과 종친인 동평군 항의 힘이 많이 작용했다. 조사석은 남인과 연결을 맺고 있었고 동평군
항은 궁중과 연결을 맺고 있었기에, 장씨는 조사석을 통해 남인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고
동평군을 통해 종친의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장씨에게 조사석을 연결시켜 준 사람은 그녀의 어머니였다. 장씨의 어머니는 조사석과 한때
내연의 관계에 있던 여자였는데, 이 때문에 장씨가 조사석의 딸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한편
동평군 항을 끌어들인 사람은 장씨의 오빠 장희재였다. 동평군 항은 종친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선혜청제조를 맡고 있었기에 궁중을 무상으로 출입할 수 있었는데, 장희재는 그 점을
이용하기 위해 일부러 그에게 접근하였다.
왕자 균이 원자로 정호될 당시에 남인의 민암, 민종도, 이의징 등이 이들과 은밀히 손을
잡았다. 이 때문에 원자 정호 문제로 서인이 대거 축출당하자 남인이 다시 등용될 수 있었다.
따라서 남인 세력과 장씨가 은밀히 연합 세력을 형성하고 서인과 인현왕후를 공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사환국과 인현왕후 폐출사건은 이러한 세력 구도를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다.
갑술환국과 무고의 옥
갑술환국은 기사환국으로 정권을 장악한 남인이 인현왕후 민씨의 복위 문제와 관련하여 대거
축출하고 다시 서인이 집권한 사건이다. 그리고 '무고의 옥'은 취선당에 마련된 신당 문제로 희빈
장씨가 죽은 사건인데, 이 일로 그녀를 지지하고 있던 소론측의 정치적 입지가 약해지고 나아가
남인이 정계에서 완전히 거세당하게 된다.
1694년 노론계의 김춘택과 소론계의 한중혁 등은 폐비 민씨의 복위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들이 민씨의 복위 운동을 전개한 것은 당시 숙종이 민씨를 폐위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른 것이다.
그들이 민씨의 복위를 꾀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남인의 민암, 이의징 등은 이 사건을
계기로 서인들을 완전히 몰아낼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복위 운동 주모자들을 심문하여 그
사실을 파악한 다음 숙종에게 보고하려 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폐비 사건 이후 중전 장씨와 연합한 남인 세력의 힘이 지나치게 팽창되고
있음을 염려하고 있었고, 장씨에 대한 애정이 식고 숙빈 최씨에게 애정을 쏟고 있는 중이었다.
그 때문에 대신들에게 민씨를 폐위한 것을 후회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은근히 주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서인측이 민씨 복위 운동을 꾀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오히려 서인을
제거하려 한 남인들을 궁지로 몰았다. 그리고 기사환국 당시에 서인에 대한 국문을 주관하던
민암과 판의금부사 유명현 등을 제거해 버렸다. 제거된 남인들은 유배당했고, 훈련청과 어영청의
지휘관도 소론의 신여철, 윤지환 등으로 교체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소론의 환국 도모는 대체로 두 방향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하나는
소론 쪽의 한중혁이 집권 남인측의 막후 실력자이며 총융사인 장희재(왕비 장씨의 오빠)와
동평군 항에게 뇌물을 주고, '폐비 민씨를 복위시키되 별궁에 거처하도록 한다'는 내부 계획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인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는 동시에 세력을 잃은 서인의 정계
진출을 도모한다는 계산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남인과 왕비 장씨에 대한 숙종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당시 숙종이 총애하던 숙빈 최씨(영조의
어머니)와 손을 잡았다. 그래서 숙빈 최씨로 하여금 왕비 장씨와 남인들의 잘못을 고변하도록
했다. 즉, 왕비 장씨가 질투로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고 말하는 한편 남인에 대해서는 민암,
이의징 등이 소론측 인사들이 인현왕후에게 동정적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내용을 숙종에게 고했던 것이다.
숙종은 숙빈 최씨의 말을 듣고 왕비 장씨와 남인에 대해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그 때문에
남인이 폐비 민씨 복위 운동에 대한 보고도 하기 전에 이미 마음이 돌변해 민암, 이의징 등을
유배시켰다. 그리고 이어서 유배된 그들을 사사시키고 목내선, 김덕원, 민종도, 이현일, 장희재
등의 남인 중진들을 유배시키고, 장씨를 빈으로 강등시켰다.
이 사건의 뒤처리 과정에서 중인, 상인 계층의 자금이 뇌물 수수의 방법으로 이용된 사실이
드러나 왕과 조정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성장한 중인, 상인 계층이
중앙 정치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과 또 한편으로는 사대부가 상대적으로 힘이 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대부 중심의 조선 사회가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남인은 대거 축출되고 소론의 남구만, 박세채 등이 중용되었으며, 노론측도
폐비 민씨가 복위되고, 송시열, 민정중, 김익훈, 김수홍, 김수항 등이 복관되었다. 따라서 조정은
서인의 소론측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그런데 소론측은 '무고의 옥'으로 인해 노론측에 주도권을 내주고 만다. 소론은 정권을 잡은
이후 희빈 장씨의 소생인 세자를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따라서 희빈 장씨를 은근히
지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장희재가 희빈 장씨에게 보내 복위된 왕비 민씨를 모해했을 때 조정
일각에서 그를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지만 소론의 남구만이 나서서 세자의 앞날을
생각해서 용서해야 한다고 주장해 무마되기도 했다.
그러나 1701년 민비가 죽고 나서 취선당 서쪽에 신당이 발견되자 숙종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희빈 장씨는 신당을 차려놓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기도 하고 매일같이 민비가 죽기를
기원하며 자신의 복위를 꾀했는데, 실제로 민비가 죽자 이 신당 문제는 걷잡을 수 없는
정치적 사건으로 확대되고 말았다.
숙종은 신당 사건의 전모를 보고받고 희빈 장씨와 그녀의 오빠 장희재를 죽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때 소론측의 남구만은 후에 세자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이를 저지하려 하였다.
당시의 정국은 장씨 소생의 세자에 대한 지지 여부를 놓고 노론과 소론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숙종은 소론측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리고, 장희재와
무속인 그리고 희빈 장씨의 주변인들을 국문하여 죽였으며, 희빈 장씨에 대한 치죄를
만류하던 소론 세력도 제거해 버렸다. 그 결과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남구만, 유상운, 최석정
등의 소론 거두들이 유배되거나 파면되었다.
이 사건으로 조정은 다시 노론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세자 지지 문제를
중심으로 소론과 노론의 대립은 가속화되어 점차 대등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영조 대의 장헌세자 사건 이후 노론은 벽파와 시파로 분리되고, 소론과 남인이 시파에 합류해
조정은 시파, 벽파의 대결 양상으로 치닫게 된다.
5. '숙종실록' 편찬 경위
'숙종실록'은 총 65권 73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674년 8월에서 1720년 6월까지 숙종 재위
45년 10개월 간의 역사적 사실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1720년(경종 1년) 11월부터 1728년(영조 4년) 3월까지 지속되었다. 이 작업이
9년이나 걸린 것은 숙종의 재위 기간이 약 46년이나 되는데다 편찬 과정에서 노, 소론의
정쟁이 심화되어 정국의 잦은 전환으로 인해 편찬 책임자가 여러 번 바뀌었기 때문이다.
1720년 11월 편찬에 착수했을 때는 노론이 정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노론의 김창집이
총재관이 되어 도청과 1, 2, 3방의 당상 및 낭청을 선임하고, 시정기와 승정원일기 등 국가
기록을 자료로 하여 실록을 편찬했다.
그러나 이듬해 12월에 소론의 김일경 등에 의해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
노론 4대신이 탄핵을 받아 실각했기에 총재관이 소론의 조태구로 변경되었으며, 나머지 당상,
낭청들도 대부분 교체되어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 뒤로 최석항, 이광좌로 총재관이 바뀌었으나
같은 소론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지장을 초래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1724년 경종이 죽고 노론측이 지지하던 영조가 즉위하자 조정은 다시 노론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실록 책임자도 바뀌게 되었고, 다시 당상 및 낭청도 일부 교체되었다.
그 후 노론에 의해 실록 편찬 작업이 지속되어 1727년 9월에 겨우 완성하여 인쇄하였다.
인쇄가 완료될 무렵 다시 정미환국이 일어나 노론측이 물러가고 이광좌 등 소론이 정권을 잡게
되자, 그들은 실록을 개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각 권의
끝에 소론측이 빠졌다고 주장한 내용들을 보충하거나 잘못된 기사들을 바로잡는 이른바
'보궐정오'를 덧붙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에 실록보궐정오청을 설치하고 이광좌를
총재관으로 하여 이듬해 3월까지 보궐정오의 인쇄를 마쳐 노론측이 편찬한 '숙종실록'과 합쳐
각 사고에 봉안하였다.
숙종 시대의 세계 약사
숙종 시대의 세계사를 살펴보면 동아시아에서는 청이 여러 정난들을 평정하고 세력권을
확대했으며, 영국 등의 유럽 국가와 무역을 시작했다. 이 때 인도에서는 네덜란드에 의해 커피
농장이 건설되어 유럽에 의한 침략 위협이 노골화 되었다. 한편 유럽에서는 영국이 해상권을
장악했고, 각 국가간에 동맹이 결성되어 블록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또한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식민제국을 조직하고 서로간에 식민전쟁을 감행했다.
한편 라이프니쯔와 뉴턴이 미분과 적분을 동시에 발견했고 헨델의 음악이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볼테르의 연극이 유럽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