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전쟁
이슬람교 질풍에 맞선 1,300년전 위기의 기독교 - 푸아티에 전투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우리의 미래를 계획하고 경영하고 계시다.
그러나 인간을 사랑하셔서 ‘자유의지’를 주셨기에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먹지말라는 선악과를 먹어 죄인이 되고
인간행위 중에서 가장 참혹한 전쟁까지도 일으킨다.
아래 성경은 출애굽 직후, 백성들이 블레셋과 전쟁하게 되면 애굽으로 간다고 할까봐,
하나님께서 광야의 먼길로 여정을 택하게 되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찌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출 13:17-18)
<!--[endif]-->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할까봐~~’
이처럼 인간의 자유의지을 존중하는 하나님이시다!
전쟁은 국가 간의 이기적인 갈등 즉, 인간의 정욕으로부터 야기된다.
너희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약 4:1)
<!--[if !supportEmptyParas]--><!--[endif]--><!--[endif]-->전쟁은 인간 행위 중에서 가장 격렬한 폭력행위이다.
나라가 없어지기도 하고 엄청난 피해가 뒤따른다.
0 6.25전쟁 : 450만명 사상
0 세계 2차대전 : 5,000만명 사망
<!--[if !supportEmptyParas]-->
이번에는 5-1편) 이슬람과 기독교 문화권의 주요 전쟁 중에서
유럽의 운명을 결정한 대충돌(大衝突), 푸아티에 전투에 대해 알아보자
하나님 전쟁(5-1편)
이슬람교 질풍에 맞선 1300년 전 위기의 기독교 - 푸아티에 전투
<!--[if !supportEmptyParas]--> <!--[endif]-->
1. 들어가며
아브라함의 서자(庶子)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자칭(自稱)하는 마호메트가 나타나면서
이슬람교권과 기독교권과의 전쟁이 시작되는데
이스라엘과 이스마엘 후손들과의 전쟁은 이미 시편에도 기록되고 있다.
말하기를
가서 저희를
멸하여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
저희가
한마음으로 의논하고
주를
대적하여 서로 동맹하니 곧 에돔의
장막과 이스마엘인과 모압과
하갈인이며 그발과
암몬과 아말렉이며
블레셋과
두로 거민이요 앗수르도
저희와 연합하여 롯 자손의
도움이 되었나이다(셀라)
시편
83 : 4~8
역사학자들은,
‘만약 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 군이 승리했다면
지금쯤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코란을 가르치고 있을 것이고
세계 남자들은 할례를 받아야 할 것’ 이라고 말한다.
현대에 들어와서 미국 영국 등 기독교 국가가 세계의 리더가 되었고
이란 이락 등 이슬람 국가는 의사표현도 제대로 못하는 일방적 관계에 처하고 있지만
1,300년 전에는 빈약한 기독교 세력에 비해 이슬람 세력은
고도로 발달한 조직력과 기동력을 바탕으로, 이들을 막을 자가 없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2. 푸아티에 전투 발발(732년) 전의 지중해 지역 상황
<!--[if !supportEmptyParas]--> <!--[endif]-->
가. 이슬람 군의 아프리카 및 이베리아 반도 점령
AD 7세기 이슬람의 우마이야’ 왕조시절, 그들의 세력은
아라비아 반도(사우디아라비아)를 거점으로 동서로 크게 영토를 확장하였는데
7세기 후반 아프리카 북쪽 평야지대(이집트 시리아 모로코 등)까지 점령,
기독교 지역과 비아랍 지역에 이슬람 문화를 전파하여 오늘에까지 이르게 된다
또한 711년에는 이베리아 반도(지금의 스페인 포투칼 지역)를 지배하고 있는
서고트 왕국을 단 한번의 전투로 궤멸시켰다.
그후 콜럼버스 등장하는 1492년까지 무려 700여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이베리아 지역의 기독교 주민들은 이슬람의 지배를 받는다.
* 아래 지도(색으로 구별바람) :
이슬람 영토 (녹색지역에서 갈색 지역으로 확장됨
남보라색은 프랑크 지역, 진분홍색은 비잔틴제국.
참고 1) 비잔틴 제국이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AD313년 기독교를 공인(公認 - 다른 종교와 동등권리 인정)한데 이어,
테오도시우스 황제는392년 기독교를 국교(國敎)로 지정했는데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은 후에
로마제국이 너무 광할하여 통치하기 힘들게 되니까 제국을 ‘서 로마제국, 동 로마제국’으로 나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서로마제국은 용병제도(돈으로 외국인을 고용한 군대)에 의해 나라를 지탱하다가
476년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멸망되고
동 로마제국은 후에 비잔티움 제국으로도 불리우는데
7세기 이슬람 군이 세력을 키우며 비잔틴 제국은 이들에게 영토를 많이 빼앗기기도 하며
흥망성쇠를 거듭하다 천년의 영화를 누리는데
1453년 투르크 족(오스만 터키)침략으로 멸망함.
----------------------
비잔틴 제국이 점령하고 있던 팔레스타인, 북아프리카 지역 등에서
이슬람 군이 쉽게 승리할 수 있었던 주요 이유, 두 가지를 예로 들면,
1) 군사전략상의 사소한 실수로 비잔틴 국가의 운명을 바꾸다.
636년에 팔레스타인 지역을 쳐들어온 아랍의 군대는
비잔틴
군의 1/2
수준이며
장비는
비잔틴 군에 비교될 수 없는 열악한 수준이었다
비잔틴의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8만
대군을 갈릴리 지방으로 파병하였는데
비잔틴 군을 이끌었던 장수가 한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사막 한가운데를 지나는데 무거운 중장비들을 모두 짊어지게 했던
것이다.
반면
아랍의 병력들은 종종 영화에서 보듯이 중장비 없이 칼 하나 방패 하나 이런 정도이고 ..
비잔틴군은 지쳐서 기동력에서 밀렸고 설상가상으로 그때 사나운 모래바람이 불었다.
이 모래바람을 이슬람측은 알라의 도우심이라 생각하는데..
(원나라가 일본을 침공할 때 태풍이 불어 일본을 구해 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결국 이슬람 군의 포위공격에 비잔틴 군은 거의 궤멸되어 군사력 손실이 너무 컸다.
이후 이슬람 군대는 연차적으로 시리아, 팔레스틴, 이집트, 북부아프리카를 점령하였고
비잔틴은 주력군대를 잃고 이 지역들을 모두 내어주게 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2)
종교상의
불화
이슬람은 점령지역의
주민에게 이슬람교를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이슬람교를 믿지 않으면 무거운 세금을 메겼다.
세월이 지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슬람교를 믿게 만들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러나 기독교를 믿는 비잔틴에서는
정통교리를 믿지 않으면 같은 기독교인 일지라도 배척했다.
예로 그 당시 비잔틴의 단성론자들이 탄압을 받아 아랍권으로 이주하거나
이슬람군이 공격해 오자 이들을 환영, 가담하면서 소위 '기독교 협력자'가 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참고 2) 단성론(單性論)이란,
예수그리스도는 신적인 성질만을 가졌을 뿐, 인성은 갖고 있지 않다는 주장이다.
신성과 인성이 연합 이전에는 양성으로 존재했으나, 연합 이후에는 하나의 본성만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451년 칼케돈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단성론을 옹호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았는데 특히 이집트나 시리아 지역에 단성론을 지지하는 커다란 세력들이 있었다.
칼케돈 회의의 결과를 정통으로 주장하는 동로마제국(비잔틴)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아프리카 지역의 기독교도들은 종종 신앙의 독자 노선을 추구했고 이들은 아랍에 우호적이 되었다.
-------------------------
<!--[if !supportEmptyParas]--> <!--[endif]-->
3. 이슬람 군의 '유럽 서북쪽'으로 진출 시도
이슬람 군은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의 점령에 만족하지 않았다.
'국경없는 세계 이슬람제국'을 건설하고 이지역 주민들에게 알라신을 믿게 하려 했다.
이를 위해 이들은 먼저 비잔틴 제국(동로마제국)을 제외한 유럽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
유럽 서북쪽의 프랑크 왕국과의 대립에 가장 중요한 비중을 두고 전쟁을 준비했다.
드디어 719년, 이슬람군은 피레네 산맥(유럽으로 진출하는 관문)에 거주하고 있는
바스크족의 도시 팜플로나를 함락시켰다.
남(南) 프랑스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는 뜻이다.
이어 이슬람군은 프랑스 남부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721년, 툴루즈에서 아키텐 지역의 공작 ‘오도’에게 툴루즈 전투에서 패하면서 주춤하다가
725년, 726년 재차 침공하지만 역시 실패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4. 푸아티에 전투 발발(732년)
732년, 이베리아 반도의 총독 ‘압둘 라하만’이 직접 인솔한 이슬람 군은
피레네산맥을 다시 넘어온다.
이번에는 파리 뿐 아니라 그 너머도 공격할 차비였고 아예 눌러 앉기위해 대부대를 이끌고 왔다.
드디어 11년전 툴루즈에서 이슬람 군에게 패배를 안겨준 아키텐 공작 ‘오도’군대에게 승리한다.
가장 큰 장애물인 오도 대공을 밀어낸 이슬람군은 투르 근방까지 진격하였다.
오도 대공(大公)은 적대 관계에 있던 프랑크 왕국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당시 프랑크 왕국의 실권자(궁정장관)였던 ‘샤를 마르텔 (카를 마르텔이라고도 표기)’은
오도 대공으로 부터 '충성 맹세'를 받은 후 이를 수락한다.
* 샤를 마르텔의 참전을 후세의 역사가들은 '그리스도의 도움'이라고 평한다.
샤를 마르텔은 당시 프랑크왕국의 주력이었던 중무장 보병을 중심으로 군대를 편성해서
투르로 나아가면서 역사적인 푸아티에 전투가 시작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5. 전쟁의 경과
하루에 5번 기도하라는 예언자의 말에 따라 기도가 끝나면, 일제히 화살을 퍼부으며 공격을 시작한다.
이어 쇠사슬 갑옷을 입고 원추형의 투구를 쓴 중장갑 기병들이 일제히 ‘알라 후 아크바르'(알라는 유일하다)를 외치면서 로마 공로(公路)를 따라 돌격하고 경기병이 그 뒤를 따라간다.
전통적인 아랍군의 공격방식이다!
파도처럼 질주하던 기병들은 떼 지어 내려오며 대열을 갖춰
적진의 좌익 우익을 무너뜨린다
이런 장면을 ‘하늘에서 불이 쏟아지는 것 같다(계시록 표현)’ 하고
‘바람에 휘몰아치는 불길같다’고도 표현한다.
<!--[endif]-->
이미 이슬람 군대의 전술을 알고 있던 샤를 마르텔은 오도 대공에게,
‘사라센 군은 격류와 같아서 질주를 막는 건 위험하오. 그들이 전리품을 너무 많이 챙겨 귀찮아할 때까지 참으시오’라고 조언한다.
참고 3) 이슬람교 규정에 지하드(성전 聖戰) 참가자에게는 전리품의 분배가 약속되어 있고,
순교자에게는 천국이 약속되어 있다. 그래서 이들은 전리품을 더 많이 타려고
전쟁터로 이동하며 대성당 등의 약탈을 일삼고 불을 지른다.
참고 4) 이슬람과 무슬림 : 이슬람(교)은 종교 이름이고, 무슬림은 이슬람교를 믿는 신자를 말함
참고 5) 사라센 제국이란,
7세기 중엽 마호메트의 후계자들이 아시아·유럽·아프리카에 걸친 '우마이야 왕조'라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15세기말까지 존재한 이슬람 제왕조(諸王朝)을 총칭함.
이들을 ‘사라센 제국’이라 불렀고 했고 중국은 ‘대식국(大食國)’이라 부름.
즉 '이슬람 군 = 아랍 군 = 사라센 군'을 같은 뜻으로 이해 하면 됨
<!--[if !supportEmptyParas]--> <!--[endif]--> --------------------------
프랑크 왕국의 주력인 중무장 보병은 정면대결에서는 압도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샤를 마르텔은 투르와 푸아티에의 중간지점인 고지대의 숲 속에서 대기하였다.
며칠 후 이슬람군이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처음 일주일간 양군은 별다른 격돌없이 탐색전만을 벌였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하지만 이미 날짜가 10월에 접어들면서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추위에 익숙하지 않았던 이슬람군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무장 기병이 주력인 이슬람군은 프랑크 군을 향해 돌격했지만
프랑크군은 중무장 보병의 밀집대형으로 그 공세를 잘 견뎌내었다.
숲속이 전장터가 되면서 측면 공격도 여의치 않게 되어서
측면이 약한 밀집대형의 약점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팽팽하게 유지되던 전황은 오도 대공이 기병을 이끌고 적진 후방을 기습하면서
무슬림의 보물과 부녀자를 위협했을 때 전세는 유리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본진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에 이슬람군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때까지 숨겨 두었던 프랑크의 기병부대가 적 중앙으로 돌격하자 붕괴되기 시작한다.
이때 이베리아 반도 총독이자 지휘관인 '압둘 라하만'이 최전선까지 나와 병사들을 독려하며
전세가 다시 혼전속으로 빠질 무렵, 총독이 화살에 맞아 전사한다.
이슬람군 사기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패주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6. 전쟁의 결과와 평가
푸아티에 전투 이후 이슬람 제국은 거대 제국임에도 불구하고 피레네산맥을 넘지 못했다.
이후 서유럽 세계는 이슬람세력의 침략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서
독자적인 문명을 굳혀 나가게 된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이 승리를 극찬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을 종합해 보면,
1) ‘만약, 샤를 마르텔이 서고트 국왕 로데릭처럼 이슬람 군대에게 무참히 패배했다면,
아마 세계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2) '만약 여기서 패했다면 국경없는 이슬람 제국이 탄생, 세계를 지배했을 것이며
우리는 구약에 따라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이다'
3) '프랑크 족이 아시아 인과 아프리카 인에게서 유럽을 구출했다
동양과 서양의 싸움이며 카톨릭의 복음과 코란의 싸움이었다.'
4) 8세기 이후 성직자나 기독교 사가(史家)들은 '푸아티에 승리는 기적적인 것'으로 강조한다
서구 역사상 처음으로 중무장한 기병대가 출전하여 이슬람 군대를 격퇴시킨 공로를 생각하며,
19세기에도 '732년의 서사시'는 문학 작품이나 회화를 통해 찬미 대상으로 평가한다.
이전까지는 터벅터벅 걷는 굼뜬 농민으로 구성된 보병위주의 군대에서
기병 위주로 바뀌면서 유럽사회 발전속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5) 전쟁에서 승리한 측은 '강력한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되는 법인데
아키덴, 푸아티에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
비로소 '해가 지는 어두운 곳에 사는 자'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유럽인'으로 불리우게 되었고
카톨릭과 유럽인이 다가오는 시대의 신화를 만들어 가면서 그 둘이 동의어가 되었다.
이제 비로서 '유럽인에 의한 유럽'을 자각하고 스스로 만들어 가게 된다.
6) '오늘날의 유럽연합(EU)의 존재까지도 푸아티에 전투의 공적으로 본다'는 학자도 있다.
7) 샤를 마르텔의 아들, 피핀은 허약한 '메로빙거 왕조를 무너트리고 '카롤링거 왕조'를 세우며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샤를 마뉴'가 등장, 프랑크 부족이 유럽의 주도권을 잡아 나가며
강력한 유럽을 건설하게 되며
오늘날까지 푸아티에 승리의 기쁨은 프랑스인의 기억 속에 공고히 자리하고 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endif]-->
그런데 이 전투의 영향에 대해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는 사학자들이 있다
주로 영국에서 낮게 평가하는데
마르텔의 ‘푸아티에’ 7일간의 전투 무용담은 환영(幻影)이라는 설을 제기하면서
푸아티에 전투 승리의 결과가 실제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라고 평가한다.
732년 전투 후에도 이슬람 군의 공격은 계속 되었음 등을 예로 들면서~.
* 실제로 2년후에 새로운 아랍군 총독이 직접 군대를 끌고 푸아티에의 복수를 위해 공격해 온다.
하지만 기세가 오른 오도 대공의 군대에 다시 패배한다. 그후에도~
더구나 '샤를 마르텔은 기독교 세계의 구원자가 아니다'라고 평한다.
- 용모가 의젓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났다는 것은 전해지지만 종교에 무관심한 사람이며
- 휘하의 무사들을 중장갑 기병대로 조직,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교회 토지를 몰수했고
- 수도원장의 직위를 정치적인 이유로 그의 일족이나 가신들에게 배당하는 등
샤를 마르텔에 대한 교회 측의 평판이 안 좋은 것으로 보아 ‘기독교의 구원자’로 볼 수 없다고 한다.
반면에 영국에서는 푸아티에 전투(Battle of Poitiers)를,
732년 이슬람과의 전투를 기념하는 대신
1356년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백년 전쟁 중 2번째 전투인 푸아티에 전투를 기념한다.
영국의 흑태자 에드워드(Edward, the Black Prince)에 의해 승리한 '푸아티에 전투'를 지칭하면서
732년 프랑스의 푸아티에 전투의 역사적 의미를 축소한다.
참고 6) 백년전쟁이란,
1337~1453년까지 116년간 영국와 프랑스간에 일어난 3차례의 전투를 말하는데(바쁠때는 휴전),
프랑스 내부에 영토를 가지고 있는 영국이 프랑스 왕위에 개입함으로서 발발한 것으로
크레시 전투(1337), 푸아티에 전투(1356), 아쟁쿠르 전투(1453년) 등 3차례의 전투를 말함.
* 상식) 전쟁과 전투의 관계 : 전쟁은 하나 이상의 전투의 집합.
-------------------------------------
영국과 프랑스의 역사 전쟁은
한국과 일본의 역사전쟁을 생각하며 이해하면 될 것이다.
패배자인 이슬람 측의 평가는 더욱 아이러니하다
즉, 푸아티에 전투에서 유럽이 이기므로 인해 '경제적으로 낙후되고 정치적으로 분열되고
형제 살해적인 (자기들끼리 권력다툼) 유럽을 만들어 냈을 뿐'이라고 평가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일본이 36년간 우리나라를 강점해서 식민통치하고 전쟁에 동원하고는
사과는 커녕, 자기들 덕분에 이곳이 발전했다고 하는 것과 비숫한 논리다.
입장에 따라 평가가 크게 다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도움, 기적, 유럽을 구한 전쟁'이라는 것이다
7. 푸아티에 전쟁의 교훈
가. 푸아티에 전투의 승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8세기 유럽은 국가의 틀을 갖추지 못했다.
721년, 툴루즈 전투에서 아키텐의 오도 대공이 이슬람군을 무찌름으로서
그후 대대적인 재침이 있었던 732년까지 11년간 피레네 산맥을 넘어오지 못하게 했다.
유럽 특히 프랑크는 허약한 왕권하에서 군사력을 정비할 수 있는 귀중한 기간을 벌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역사에는 늘 사탄의 역사도 함께 따라다니는 법,
731년, 이슬람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있기 1년전,
프랑크는 아키텐의 오도 대공을 침략하는 우(愚)를 범한다.
유럽의 방패막 역할을 잘 하던 오도 대공의 군대인데 프랑크 군대가 이곳을 침략하여
아키텐 지역을 폐허로 만들고 오도 대공은 피신한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에 있는 방패막을 약자인 프랑크 스스로가 훼손시키다니~
732년, 결국 오도 대공은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어 이슬람군과의 초기 전투에서 패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엇박자를 놓는 사탄의 역사이며 인간의 욕심의 발로이다.
유럽의 운명을 좌우할 '푸아티에 전투'를 앞두고
오도 대공은 1년전 침략당한 분을 삼키고 프랑크의 샤를 마르텔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알려지지 않은 아키텐 공작 ‘오도’와
프랑크 왕국의 실권자 궁정장관‘샤를 마르텔’을
불신의 관계에서 협조의 관계로 변화시켜 이들을 들어 쓰셨다
이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아랍의 전술에 함께 대비하게 하시고 그들의 기세를 꺾었다.
당시 유럽은 지방 부족국가 형태의 미약하고 단결되지 못한 군사력 밖에 구비하지 못한
상태인데 이슬람의 질풍노도와 같은 막강한 군사력을 막은 것은 실로 기적(奇蹟)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참고 7) 사라센 제국 이후, 최대의 이슬람 맹주 오스만 제국은?
사라센 제국의 쇠퇴이후 이슬람은 '오스만 터키(또는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다시 거대 제국으로 부흥한다
13세기 몽골군을 피해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 땅으로 들어와
결국 비잔틴제국을 무너트리며 발칸반도의 주인이 되고
과거 사라센 제국이 차지했던 지중해 일대(이베리아 반도 제외)와
북아프리카를 회복함으로서 거대 세력으로 거듭난다.
그러나 이들은 서지중해로의 진출을 막는 에스파냐(스페인) 및 교황의 연합함대와 충돌,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패하면서 성장을 멈추게 된다..
오스만 제국이 맹위를 떨칠 당시 유럽은,
프랑스 독일 영국 에스파냐 등이 이미 강대국으로 성장해 있었고
오스만 제국이 넘볼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그후 오스만 터키는 1차세계대전때 독일-오스트리아의 힘을 빌려 세계 제패를 시도했지만
결국 패배하여, 모든 땅을 미국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라는 묘수(妙數)에 따라
각 지역의 민족들에게 돌려주게 함으로서 지금의 보통 국가들로 분리된다.
오스만 터키 제국의 본체는 터키공화국으로 바뀌고~.
732년 푸아티에 전투!
이 전투가 이슬람이 유럽을 점령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이를 하나님께서 막으시고 '기독교 국가에 의한 세계 경영체제'를 만들어가신다.
푸아티에 전투 승리 덕분에 유럽이 보존되면서
그후 유럽은 세계의 주도권을 잡아가게 되고 기독교 세력도 함께 확대된다
현대에 이르러 이슬람 세력은 상대적으로 크게 쇠하여
이스라엘 이라는 조그만 나라와 중동전쟁에서 패하고
최근에는 이란이 쿠웨이트를 침공하는 등 자기 끼리도 싸우며 정체성이 훼손되고 있다
<!--[endif]-->이제 기독교 국가가 세계의 리더가 되고
이슬람 세계는 겨우 테러 방식으로 저항하는 정도가 되었으니
이런 기틀을 마련한 푸아티에 전투의 승리는 실로 값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계를 경영하시며 ‘오늘이 있게’ 해 주셨다~!
<!--[if !supportEmptyParas]-->우리 모두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당신은 이 세계 경영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나요?
강대국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안에서 움직일
뿐,
이 세계는 하나님께서 경영하신다!
이는 이미 성경에서 증명이 되고
있지요.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애굽(이집트)은 물론이고
앗수르(앗시리아), 바벨론, 바사(페르시아), 헬라(그리스), 로마
등
모두 하나님의 세계경영
섭리 안에서 쓰임 받는 나라이다.
예로, 애굽이 망할 것이라고 200년전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경고를 외쳤는데(이사야
19장)
정말 200년후, 애굽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에게
패하며 쇠락의 길로 들어서며,
또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망하여 3차례에 걸쳐 포로로
끌려갔을 때
예레미아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다.
‘70년 후에는 바벨론이 망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다고~’(예레미야 29장).
이 소망을 믿고 다니엘이 매일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를
드렸고
정말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
후
하나님께서 페르시아의
고메스 왕을 통해 바벨론을 망하게 하고
그에게 감동을 주셔서 3차에
걸쳐 이스라엘 백성들을 귀환하게 한다.
하나님은 이세상의 주관자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
나. 기독교의 배타성(排他性)을 회개해야 한다.
이슬람군은 점령지역에 대해 종교를 강요하는 대신
세금의 불이익을 주면서 이들을 자기 백성으로 만들어 가는데,
기독교 계에서는 단성론, 성상파괴 등의 교리적 갈등으로
내부 단결을 해치는 우(愚)를 범했다.
11세기 카톨릭에서 동방정교회가 분리되고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카톨릭에서 개신교가 분리되어
기독교는 크게 3개로 나뉘고 또 재분열하면서 수많은 교파를 낳고 있다.
회개하자!
교리는 사랑 안에서 풀어라~!
참고 8) 성상 파괴사건이란,
성상(聖像)를 경배하는 것이 우상숭배냐 아니냐로 일어난 갈등.
교황은 마리아상, 베드로상 등 성상을 통해 '신의 음성과 정신적 영감을 얻는다'며 필요성을 주장하고
로마 황제는 '우상숭배이니 성상을 파괴하라'는 명령으로
교황과 로마 황제간의 갈등이 깊어지며 주도권 다툼이 일어나 큰 혼란을 야기시키고
결국 교황은, 로마황제와 결별하고 대신 파리의 샤를 마르텔 측과 유대를 맺게 된다.
--------------------------------
다. 기독교인은 이슬람교인을 사랑으로 품어야 한다.
기독교인은 유대교인을 협오하지 않지만 이슬람교인에겐 경계하고 협오한다.
이슬람교의 성장은 저지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을 협오해서는 안된다.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 사랑~!
자신의 목숨까지 내준 예수님의 사랑으로 세계인를 품어야 한다!
종교의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세계 평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교리 등이 다르다 하여 선을 긋지말고
사랑으로 품어주는 '더 넓은 기독인'이 되자!
참고 9) 이슬람인 의식구조를 소개하며 마칩니다.
(1) 가족 제일주의 사고를 갖고 있다 - 가문의 명예중시, 국가의식은 상대적으로 미약
(2) 행동이 느리고 초조해 하지 않는다 - 매사 알라에게 결과를 맡김
(3) 운명적 사고가 강하다 - '알라의 뜻이라면'(인 샤 알라)하면서~, 간혹 책임회피 수단으로 사용
(4) 의심이 많으며 일단 신뢰얻으면 쉽게 믿어준다.
(5) 자부심이 강하여 자신들의 전통과 관습을 인정해주면 친해질 수 있다
(6) 위엄과 예의를 중시한다 - 비밀을 지키고 배신하지 않으며 성실, 근엄함
(7) 코란 중심의 단순하고 보수적이며 인내심이 강하다 - 협상시 인내심을 가져야함
주요 참고문헌
1) 신의 용광로(God'crucible), 데이비드 리버링루 저
2) 수잔 바우어의 중세이야기 1, 2권 수잔 와이즈 바우어 저
3) 이슬람 문화권소개 국가정보대학원 손수천 저
여기까지 보아 주심을 감사드리며 늘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가시길~!
다음은 십자군 전쟁에 대해 연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