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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이열도(遇岩 李閱道) 묘역 선몽대에서 시산제를 마치고 점심 식사 후에 선몽대의 주인격인 우암선생 묘소를 찾았다. 사두혈로 알려진 우암 이열도 묘는 길게 능선이 이어지는데 똑바로 내려오지 못하고 청룡방으로 휘어져 있다. 위성사진으로 보니 뱀이라 보기보다는 도마뱀 형상이다. 도마뱀이라면 굳이 개구리 바위가 필요 없으리라... 아무튼 묘역은 과협에서 치올라가는 비룡입수인데 묘는 정상부위에서 아래로 많이 내려가서 점혈하였다. 향선도 손좌건향(巽坐乾向)으로 하였는데 신술방(辛戌方)에 멋진 탐랑(貪狼)이 있는데 일부러 틀어서 점혈 했다. 아마도 향법을 이용하려 한 듯 보인다. 묘역 아래로는 급경사를 이루는데 아래쪽에 바위가 깊게 박혀 있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혈증(穴證)이다. 산 아래 논과 마주하는 곳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사두혈(蛇頭穴)에서 말하는 와사(蛙砂,개구리)로 보인다. 나른한 봄 날 답사는 이래저래 졸려서 따라다니기도 버겁다.ㅎ |
우암(遇巖) 진성(眞城) 이공(李公) 묘갈명(墓碣銘) 선생의 휘(諱)는 열도(閱道), 자(字)는 정가(靜可)이며, 우암(遇巖)은 그 호이고, 진보 이씨(眞寶李氏)이니 송안군(松安君) 휘 자수(子脩)로부터 비롯 되었다. 증조부의 휘는 식(埴)인데 좌찬성 벼슬을 증직 받았고, 조부의 휘는 하(河)인데 예천 훈도를 지냈고, 아버지의 휘는 굉(宏)인데 기린도 찰방(獜道察訪)을 지냈고, 훈도공이 처음 예안으로부터 예천 금곡리(金谷里)에 이사했고, 찰방공이 또 금곡으로부터 그 고을 남쪽 백금리(白金里)로 옮기었다. 어머니는 안동 김씨(安東金氏)인데 부장(部將) 수량(遂良)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嘉靖) 무술(戊戌, 1538)년에 백금리 집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여느 아이들과 달랐다. 학업에 뜻을 두고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를 통달하였고 미묘한 말씀과 심오한 뜻을 다 칼날을 들고 해체하듯 하였다. 숙조부(叔祖父) 문순공(文純公)이 매우 사랑하여 매우 훌륭하게 될 것이라 하였다. 경술(庚戌)년에 모친상을 당하니 나이 겨우 열세 살이었는데 밤낮으로 곡을 하고, 정성을 다하여 예문을 갖추어 마치 노성인과 같았다. 계유(癸酉)년에 찰방공상을 당하매 한결같이 문공 가례를 따랐었고 묘 옆에 여막 살이 하여 삼년을 지냈다. 만력 병자(丙子)년에 처음으로 별시에 응시하여 병과(丙科) 제일인으로 급제했다. 괴원(槐院 승문원)의 정자(正字)가 되었다가 신사(辛巳)년에 박사로 옮기었다. 임오(壬午)년에 사헌부 감찰이 되었다가 곧 예조정랑이 되었고, 계미(癸未)년에 은계찰방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을유(乙酉)년에 고령현감이 되어 잘 다스렸다 하여 평안도사로 승진하였다. 정해(丁亥)년에 형조정랑이 되어 조정에 돌아왔다. 이어서 금산군수(金山郡守) 강원도사를 제수하였으나 다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에 경산군에 폐풍이 있다고 들리니 대신들이 장계(狀啓)를 올림으로 인하여 특별히 공을 차출하여 일을 보게 하니 몇 달이 못되어 학업을 일으키고 근본에 힘씀을 먼저 하니 1년만에 교화가 행해졌고, 도신(道臣)이 장계까지 올렸다. 하루는 도백(道伯)이 보자 하거늘 가보니 책 표지에 제목을 써달라 청하는지라, 공이 큰소리로 말하기를, “말할 것은 공사뿐이거늘 붓을 놀리라고 모독을 보이느냐.” 하고 곧 탕건을 벗어 던지고 돌아와서는 다시 나가 벼슬할 뜻을 두지 않고 선몽대(仙夢臺)에서 지냈다. 대(臺)는 곧 퇴계 선생이 꿈속에서도 그리워하던 곳이고 먼저 찰방공이 일찍부터 뜻을 두었는데 공이 뜻을 이어서 집을 지은 것이다. 퇴계 선생이 손수 선몽대(仙夢臺) 세 글자를써 주시고 또 시(詩)와 서(序)를 주시니 그 때가 가정 계해년이다. 약포, 서애, 금계, 학봉, 한음, 우복, 청음 등 여러 선생이 다 차운했었고, 절강에 사는 주대승(朱大勝)이란 사람은 풍문을 듣고 멀리 여기까지 찾아와서 차운했으니 다 우연한 일이 아니다. 신묘(辛卯, 1591)년 8월에 병환으로 고향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54세이다. 그해 어느날에 난산(卵山) 손좌원에 장사지냈다. 배(配)는 영양 남씨(英陽南氏) 목사 희석(希奭)의 따님이고 여사(女士)의 행실이 있었다. 공보다 한 달 뒤에 돌아가 동혈(同穴)에 장사지냈다. 아들 진남(鎭南)은 참봉을 하였고 임난 때 망우당 곽홍의 장군을 따라 의거하였다. 다음은 흥남(興南)이니 계공랑이고, 다음 경남(慶南)은 진사이고, 사위는 남흥달(南興達)인데 진사이고, 금우성(琴友聖)과 이영남(李榮男)과 조우인(曹友仁)은 승지(承旨)이다. 참봉의 아들 시형(詩馨)은 장악원정(掌樂院正)이다. 내외 증손과 현손이 백여인이라 많아서 다 기록 못한다. 아! 선생은 높은 뜻과 순화한 자질로 일찍 가정의 학문을 이어받았고 나아가서는 세상에 수용하였는데 대개가 다 학문의 위에 종사하였으나 하읍(下邑)에 잠기어 도덕을 안고 세상을 떠났고 더불어 사귄 사람이 다 당세의 이름높은 분들이다. 혹은 선비로써 표방하고 혹은 고절(高節)로써 허여했으나, 지위가 덕에 맞지 않았으니 가히 개탄할 일이다. 저 겉만으로 공을 보는 자가 어찌 공의 경중(輕重)을 논할 수 있으랴. 계속하여 명에 말하기를 도산 선생이 도(道)를 일으킴에 진실로 선비의 종가가 되었다. 공이 그 여서(餘緖)를 이어받았으매 우리 후진들을 열어 주었네, 정자가 있어 우뚝 하였으니 퇴계 선생이 명명하였다. 초목이 아름다움에 문미(門楣)가 빛나도다. 백세의 뒤라도 듣는 자 경건한 마음을 일으킬 것이다. 저 난산(卵山)을 우러러 보니 선생의 묘소가 거기 높직하다. 내가 비석에 명을 지어 새기니 무궁토록 이어져 전해지리라. 辛丑(1901)年 5月 후학 금부도사 풍산(豐山) 유도헌(柳道獻) 삼가 짓다. 후학 순천 김상준 근서 墓 碣 銘 先生諱閱道 字靜可 遇巖 其號也 眞安之李自松安君 諱子修始 曾祖諱埴 贈左贊成 祖諱河 醴泉訓導 考諱宏 麒麟道察訪 訓導公始自禮安移居 醴泉金谷里 察訪公 又自金谷移于郡南白金里 妣安東金氏部長遂良之女 以嘉靖戊戌某日 生公于白金里第 自齠齔時 異凡兒 及志學 通六經四子 微辭奧旨 皆迎刃解 叔祖文純公甚愛之 許以遠到 庚戌遭母喪年纔十三 畫夜號哭 備盡情文 如老成人 癸酉丁察訪公憂 喪葬一遵家禮 廬于墓側 以終三年 萬曆丙子始赴別試 闡丙科一入 補槐院付正字 辛巳遷博士 壬午除司憲府監察 尋移禮曹正郞 癸未授銀溪 不赴 乙酉拜高靈 以善治陞平安都事 丁亥以刑曹正郞 還朝 連授金山江原都事 拜不赴 時慶山以弊局聞 因大臣啓以公特差 公視事不數月 以興學務本爲先 朞年而化行 道臣褒啓 一日道伯要之 往見則所請冊題也 公勵聲曰 所言惟公事可己 以漫筆見瀆耶 卽投幘而歸 不復出仕意 牢臥仙夢臺 臺卽退陶先生夢想之地也 先察訪公 嘗留意而公繼志肯構 先生手書仙夢臺三字 又贈之以詩與序 寔嘉靖癸亥也 藥圃 西厓 錦溪 鶴峰 漢陰 愚伏 淸陰 諸先生皆和韻 有浙江人朱大勝者聞風而來題 其名儘不偶也 辛卯八月 以疾終于寢 享年五十四 用其年某日窆于卵山負巽之原 配英陽南氏 牧師希奭之女 有女士行 後公一月而卒 因以同宂 男鎭南 參奉 壬亂從郭紅衣擧義 次興南啓功郞 次慶南進士 女南興達進士 琴友聖 李榮南 曺友仁承旨 參奉子時馨贈掌樂正 內外曾玄孫百餘人 多不錄 嗚呼 先生以高亢之志 粹和之姿 早襲家庭之學 出以需於世 聿從學問上做去竟沉論不邑 抱道以沒世 所與交皆當世巨人 或標以儒仙 或許以高節 而位不滿德 爲可慨也 彼自外至者 爰足輕重公耶 系之銘曰 陶山倡道 允爲儒宗 公承其緖 牖我羣蒙 有亭屹然 先生以命 艸木播芬 門楣輝映 百世之不 聞者起敬 仰瞻卵麓 衣履攸藏 我銘于石 俾垂旡疆 後學 禁府都事 豊山 柳道獻 謹撰 後學 順天 金商濬 謹書 上之卽位三十八年 辛丑 五月 日 改竪 舊碣銘 卽梅湖曺公所者 而歲久石泐 不可考據 且本文 曾入於鬱 攸中 故敢用新撰爾 <다음카페 풍류마을에서 인용> |
문화재지정 | 미지정 |
문화재명칭 | 우암 이열도(遇岩 李閱道) 묘 |
소재지 | 경북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 산 5-2 |
관리자(연락처) | 진성이씨 |
▼ 우암 이열도(遇岩 李閱道) 묘는 사두혈(蛇頭穴)로 전한다.
▼ 사두혈(蛇頭穴)이 내가 보기에는 도마뱀으로 보인다.
▼ 우암 이열도(遇岩 李閱道) 묘를 측면에서 본 모양...
▼ 우암 이열도(遇岩 李閱道) 묘는 과협에서 비룡으로 치오른다.
▼ 우암 이열도(遇岩 李閱道) 묘는 입수룡에서 들어가다보니 도두에서 먼저 묘역 후경을 바라본다.
▼ 우암 이열도(遇岩 李閱道) 묘 후경...
▼ 우암 이열도(遇岩 李閱道) 묘는 앞쪽 근사한 탐랑에 향을 맞추지 않고 손좌(巽坐)로 잡았다. 자생향을 놓으려 한듯 보인다.
▼ 우암 이열도(遇岩 李閱道) 묘 전경
▼ 우암 이열도(遇岩 李閱道) 묘비
▼ 우암 이열도(遇岩 李閱道) 묘 좌우 망주석
▼ 우암 이열도(遇岩 李閱道) 묘 아래에는 부친 이굉(李宏)과 모친 안동김씨 묘가 있다.
▼ 이굉(李宏) 묘비
▼ 우암 이열도(遇岩 李閱道) 모친 안동김씨 묘지가 발견되어 이를 새겨 놓았다.
▼ 우암 이열도(遇岩 李閱道) 묘역 아래에는 돌이 깊게 박혀 있다.
▼ 장사추와형(長蛇趨蛙形) 또는 사두혈(蛇頭穴)에는 개구리 사(砂)가 있어야 한다. 묘역 아래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 우암 이열도(遇岩 李閱道) 묘역 앞에서 바라본 전경... 개구리 바위가 흐릿하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