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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불변은 만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_오십의 성찰
제1절 넘치는 마음은 반드시 후회를 부른다_과욕
극상의 자리에까지 양 기운이 이르니 항룡의 상이로다. 후회가 있으리라.
亢龍 有悔. (제1괘 중천건괘 6효사 ; 109쪽)
하늘에 오르기 전 땅 위를 기어다닐 때는 하늘에 올라 비룡(飛龍, 하늘을 나는 용)의 삶을 살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하늘에 오르고 나니 이제는 더 높은 곳까지 오르고 싶은 욕심이 발동하는 것이다. 결국 그 욕심으로 인해 한 단계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간 용, 극상의 자리에까지 올라간 용이 항룡이다. 역경은 항룡에게는 후회가 따를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 (110쪽)
항룡은 쉽게 말해 과욕을 부린 용이다. 용의 잠재력은 앞서 5효사의 비룡 단계에서 모두 발휘되었다. [그림8]에서 1은 자신의 잠재력이 실현된 비룡의 삶에 만족하고 자족하는 삶을 누리는 용의 궤적이다. 오십 대만이 아니라 이후로도 쭉 하늘을 나는 용의 삶을 누릴 수 있다. 반면 2는 비룡의 삶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다가 추락하고 마는 항용의 궤적이다. (...) 사람이 나이 오십에 이르면 80 대 20의 법칙을 명심하면 좋다. (...) 사람이 나이 오십에 이르러 원하는 것의 80%쯤을 가졌다면 만족스러운 것이다. (110쪽)
* [도덕경] 제33장에 '知足者富'란 경구가 있음. (박희택)
* '80 대 20의 법칙'은 전체 결과의 80%가 전체 원인의 20%에서 일어난다는 파레토 법칙을 말하는데, 이를 '80%쯤을 가졌다면 만족스러운 것이다'로 해석하는 것은 오류임. (박희택)
사적인 삶이나 공적인 경력에서 대단한 불행을 겪은 사람들 대다수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주의 깊게 생각해 보라. 그들에 대해 당신이 읽었거나 전해 들은 내용이든, 당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든 그들 모두에 대해서 말이다. 그들 가운데 절대다수가 겪은 불행은 형편이 좋았을 때, 다시 말해 가만히 앉아 자족했더라면 그저 좋았던 때를 그들이 몰랐기 때문에 생겨났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제3부 제3장 ; 113쪽)
제2절 음과 양이 순환해야 좋은 일들이 이어진다_리듬
한 번은 음이었다 한 번은 양이었다 하는 것을 도라 이르니, 이으려는 것은 선이고, 이루려는 것은 성이다.
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 (계사상전 제4장 ; 116쪽)
세상 만물이 양의 흐름에 놓였을 때는 외형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화려해진다. 봄과 여름에 나무가 빠르게 자라면서 잔가지와 이파리가 무성해지고 화려하게 꽃을 피우는 모습을 연상하면 이해하기 쉽다. 반면 만물이 음의 흐름에 놓였을 때는 외형이 위축되며 볼품 없어진다. 가을과 겨울에 나무가 이파리를 모두 떨구고 가지만 앙상한 모습을 연상하면 된다. 이때 우리가 외형의 변화에만 눈을 둔다면 중요한 핵심을 놓치게 된다. 음의 시기에는 존재의 내면이 성장한다. (119쪽)
역경은 도가 이처럼 음과 양의 순환을 반복하는 이유가 이를 통해 선을 이어 가고, 성을 이루려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여기서 선은 진선미를 대표해서 말하는 것이다. 도가 음과 양의 순환을 반복하며 전개돼야 온갖 좋은 일들을 계속 이어 갈 수 있다고 말하는 대목이어서 흥미롭다. 성은 앞서의 [그림3]과 같이 사람이 태어날 때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영성을 말한다. 이와 같은 성을 이루려는 것이 도의 전개 목적이라 말하고 있다. 도는 존재가 나아가는 길이니, 이는 결국 성을 이루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라 말하는 셈이다. (121쪽)
제3절 육체에는 죽음이 필요하고, 영혼에는 기억이 필요하다
비롯함에 근원하여서 돌아가서 마치는 고로, 죽고 삶의 답을 안다.
原始反終故, 知死生之說. (계사상전 제4장 ; 122쪽)
죽음에 대한 역경의 가르침은 위와 같다. 역경은 우선 자기가 비롯한 곳으로 돌아가서 마치는 것이 죽음이라고 말한다. 이 때문에 우리말에서도 사람이 죽는 것을 '돌아간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하늘에서 비롯했으니 하늘로 돌아간다고 해서 '귀천(歸天)'이다. (122-123쪽)
* [장자]의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죽음관과 일치함. (박희택)
내가 비롯했던 순간을 가만히 돌아보면, 처음에 나의 육체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육체는 내가 먼저 비롯하고 나서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을 때 원소가 모여들어 형성한 것뿐이다. 이 때문에 아기는 태어난 후에 한동안은 자기 몸을 인식하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내가 비롯하던 순간에 나에게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늘이 내게 부여한 성(性)이 있었을 뿐이다. 나의 의식조차도 처음에는 없었으며, 의식은 12세 무렵이 되어야 비로소 완성된다. 이처럼 내가 비롯했던 과정을 돌아보면 나의 육체가 나의 본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역경 역시 이를 깨치도록 유도하고 있다. 죽고 삶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123-124쪽)
* '내가 먼저 비롯하고'의 '내'는 '주관(업식)'이며, '원소가 모여들어'의 '원소'는 '객관(조건)'을 지칭함. (박희택)
조계종의 창시자인 지눌 국사는 [수심결]에서 인간의 육체를 피낭(皮囊) 즉 가죽 주머니라 지칭했다. 나의 마음을 담고 있는 가죽 주머니이니 아껴야 할 나의 부분이긴 하지만 나의 본질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자아의식은 자기 육체를 느끼면서 형성되기 시작하므로 자아의식이 형성되는 12세 무렵에는 자기 몸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된다. 그 결과 생의 전반기인 젊은 시절, 육체가 피어나는 시기에는 자기 몸이 아닌 정신이 나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느끼기 어렵다. (124쪽)
생명에게 죽음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가죽 주머니일 뿐인 육체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생명의 진화 역사를 돌아보면 생명이 영생하던 시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초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바이러스는 죽지 않으며, 단세포 생물인 아메바도 죽지 않는다. 생명이 죽게 된 것은 생명이 처음 생겨나고 한참의 진화를 거듭한 후의 일이다. 이는 생명에게 육체의 죽음이 필요했다는 것이며, 육체의 영생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125쪽)
* 불교의 '대중열반'을 이해할 필요가 있음. (박희택)
육체는 나의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육체가 썩어 없어진다고 해서 내가 죽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먼저 비롯하고 나서 그 이후에 원소가 모여들어 형성한 것이 육체이니, 이제 다시 원소가 흩어진다고 해서 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126쪽)
영혼에 미친 영향은 사람의 기억을 넘어 이 세상에 남는다. 그리고 그만큼 이 세상을 자라게 한다. 이러한 영혼의 성취가 쌓이고 쌓여 지금까지 세상이 이렇게 진화해 온 것이다. 이를 은나라 사람들은 귀장(歸藏)이라 칭했다. 귀장이란 '돌아가서 저장된다'는 뜻이다. 사람의 영혼이 기울인 노력이 돌아가서 저장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 우주에 더해짐으로써 영혼은 영원히 사는 것이라 생각했다. (128쪽)
제4절 나는 무엇 하러 여기에 왔나?_의의
하늘과 땅이 자리를 갖추매 역은 그 중간에서 행하는도다.
성을 이루고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하는 것이 도의에 드는 문이다.
天地設位 而易行乎其中矣.
成性存存 道義之門. (계사상전 제5장 ; 129쪽)
'성성존존'은 역경의 가장 근본적인 과제다. 이 때문에 성성존존이 도의에 드는 문이라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성성존존의 이치를 깨치면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무한한 기쁨을 느끼며, 영원한 삶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근본 과제인 것이다. (130쪽)
'성(性)'을 이룬다'는 성성(成性)에는 두 단계가 있다. (...) [그림5]를 통해 살펴본 하늘의 뜻은 각 사람이 자신의 성질(기질)대로 고집을 부려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비타협적으로 자신에게 새겨진 결의 방향대로 나아가 하늘의 뜻을 실현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팔자에 부여된 소임을 다하는 것에 해당한다. 이처럼 성에서 발현되는 성질, 특성에 요청되는 소임을 이루는 것이 '성을 이룬다'는 것의 첫째 단계이다. (130-131쪽)
둘째 단계는 앞서 소개한 자기만의 십자가를 진 자로서의 소임을 이루는 것이다. [그림6]을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의 내면에는 결핍이 존재한다. 이 결핍은 유한한 인간 육체의 형질에 담기면서 형성된 영혼이 완전무결한 영성에 못 미치면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내면의 결핍을 느끼는 인간 정신의 감수성은 이를 채워 완전한 영성에 이르고자 노력한다. (...) 이때 모남이 있는 그의 성질은 일정한 품격을 이루게 되어 성품이 된다. (...) 이러한 영혼의 성취인 성품은 영성[性]의 무한한 가능성 중 일부를 이룬 것이다. (131쪽)
'있어야 할 것을 있게 한다'는 존존은 가고자 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실천 행동을 가리킨다. 군자의 그러한 행동은 마땅히 있어야 할 무엇인가가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지금 없기 때문에, 그것을 있도록 만드는 일이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느낀 군자가 이를 실천에 옮기는 행동에 나서는 것이다. 눈앞에 가시밭길이 뻔히 보여도 피하지 않고 기꺼이 걷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132쪽)
역경은 '하늘과 땅이 자리를 갖추매 역은 그 중간에서 행한다'라고 했다. 여기서 역이 행한 결과가 이 세상이고 이 우주다. 역은 세상 만물의 존재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존재 법칙을 가리켜 아인슈타인은 신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법칙적 조화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스피노자의 신을 믿는다." "우주가 이해 가능하고 법칙을 따른다는 사실은 경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조화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는 신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나는 스피노자의 신을 믿는다. 왜냐하면 이 우주는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이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스피노자는 '우주는 신이다'라고 말했다." (132-133쪽)
* 스피노자의 '우주(자연)는 신이다'는 관점을 '범신론'이라 함. (박희택)
*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조화'는 '연기(緣起)'를 말하기에 <연기=신=역>으로 이해할 수 있음. (박희택)
그 의미를 깨닫는다면 신의 존재 증명이 달리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조화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 신의 본질적인 특성'이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언급한 '존재하는 모든 것의 법칙적 조화'가 바로 역이다. 그리고 이 역이 행한 결과가 바로 이 우주요, 이 세상이다. 앞서 살펴본 [그림1]이 바로 역이 행한 천지 창조의 원형이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이 우주 가 바로 신이며, 역이 바로 신의 뜻일까? 아인슈타인이 도달한 결론과 역경의 계시 사이에는 조금 차이가 있다. (133쪽)
이 우주는 신의 몸인 것이다. 이는 신의 뜻 자체는 이 우주 너머 저곳 초월의 장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신의 몸인 이 우주는 완전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신의 몸인 이 우주는 완전무결한 신의 뜻을 향해 자라고 있다. 오늘의 우주는 어제보다 낫고, 내일의 우주는 오늘보다 더 자랄 것이다. 하지만 완전하지는 못하다. 무한한 신의 뜻이 유한한 시공의 장에 모습을 현현시킨 것이 신의 몸이므로 완전할 수 없다. 유한은 무한을 다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134쪽)
이 세상에서 하늘의 뜻이 점점 실현되고 있다. 역은 하늘과 땅 사이 그 중간에서 행한다고 했는데, 하늘이 땅을 펼치고서 또 사람을 내었으니, 하늘과 땅 사이에 선 사람은 자신에게 하늘이 부여한 성(性)을 이루어야 한다. 또한 하늘의 몸인 이 세상에 마땅히 있어야 할 것(하늘의 뜻을 실현하는 무엇)이 눈에 띈다면 그것을 이루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사람이 이룬 것(成性)은 하늘의 몸인 이 세상에 저장되며(存存), 그만큼 하늘의 몸을 자라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귀장이며, '사람이 하늘에서 왔으니 하늘로 돌아간다'는 귀천의 참뜻이다. 이렇게 하늘의 몸을 자라게 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하늘이 기뻐하는 일이다. 그리고 하늘의 뜻을 실천하는 영혼의 노력을 이 세상에 덧붙여 보존함으로써 그 사람의 영혼은 하늘의 몸에서 영원히 살아 숨쉬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꼭 거창한 일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135쪽)
그의 모습을 볼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혼의 품격을 느낄 수 있었다. 성성의 2단계인 성품의 완성을 이룬 사람인 것이다. 품격을 완성한 그의 마음은 주변인들에게 감화를 주었다. (...) 김정민 씨는 이렇게 샌드위치 가게라는 자신의 생업을 통해 브로드웨이 한 귀퉁이에서 하늘의 뜻을 실천한 것이다. 그리하여 김정민 씨로 인해 하늘의 몸이 그만큼 자라났다. (137-138쪽)
사람이 땅 위에서 하늘의 뜻을 실천하다는 것은 하늘의 대리자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늘의 천지 창조 대업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기쁜 일이라는 사실을 깨치는 것이 핵심이다. 그 기쁨을 깨친다면 이것 외에 다른 것이 없다. 사람이 성성존존의 이치를 제대로 깨치면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 어떤 고통도 이겨 낼 수 있다. 하늘의 대리자 역할을 하는 무한한 기쁨을 느낄 수 있으며, 그의 영혼은 영원한 삶에 이르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근본 과제인 것이며, 은나라의 옛사람들이 성성존존(곧 귀장)을 삶의 의의로 삼은 이유 역시 이 때문이다. (138-139쪽)
*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는 '해탈'을 말함. (박희택)
산업 문명과 자본주의 체제로 인해 물질의 시대가 열렸다. 이는 앞서의 [그림9]에서 양의 흐름이 지나치게 강해진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라 시대의 풍조가 육체를 찬양하는 것이다. 육체의 쾌락이 전부라고 여기는 삶의 태도가 범람하고 오로지 젊음을 찬양하는 것이 시대의 풍조라고 할 수 있다. (...) 오십 대의 의미를 찾고자 하면 오십 이후에도 지속되는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나는 무엇 하러 여기 왔나?' 하는 질문을 '근본 질문'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있어야 다른 모든 것을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이 질문이 근본 질문인 것이며,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근본 지식'이라 불린다. 오십은 이러한 근본 지식을 정립해야 하는 시기다. (139-140쪽)
* '근본 질문'을 불교에서는 '본원사(本願事)'라 하고, 유가에서는 '천명(天命)'이라 하며, 유가의 주역에서는 특별히 '장(章, 곤괘 3효사, 제5절 참조)'이라 함. (박희택)
제7절 변화는 변치 않는 하나를 위한 것이다_불변
공자가 말씀하시길, 역이란 비추는 것이고, 변하여 바뀌는 것이고, 바뀌지 않는 것이다.
孔子曰, 易者 易也, 變易也, 不易也. (역위 건착도 ; 170쪽)
이 세상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역경 역시 때에 맞추어 그에 합당하게 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군자가 인생 여행 중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을 때는 그에 합당하게 변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변치 않은 하나가 없이 계속 변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변화는 필요하지만, 변화가 필요한 이유는 변치 않는 하나를 위한 것이다. (170-171쪽)
이 세상은 온갖 변화를 통해 변치 않는 하나(하늘이 뜻)를 구현해 가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한 이 세상의 전개 법칙이 바로 역(易)이다. 결국 이 세상은 하늘의 뜻이 점점 실현되고 있는 공간이다. 하늘의 뜻은 이 세상을 통해 드러나며, 여기에 이 세상의 의미가 있다. 이 세상은 하늘의 마음이 드러나는 하늘의 몸인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결론은 긴 시간을 두고 볼 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변칙과 예외가 속출한다. 이 때문에 은나라에서는 역사 기록이 매우 중요해졌다. 긴 시간을 두고 관찰한 역사 기록을 곁에 둠으로써 영원의 추세를 확인하고, 변칙과 예외에 흔들릴 수 있는 인간의 덧없는 욕심을 경계하고자 했던 것이다. (172-173쪽)
하지만 동시에 변화의 소중함도 잊지 말아야 한다. 아이가 변하지 않으면 어른이 될 수 없고, 남녀가 변하지 않으면 부부를 이룰 수 없다. 이처럼 사람은 변화를 수용함으로써 성장할 수 있다. 변화를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성을 이룰 수 있는 것이지, 이를 거부한다면 사람은 좁은 자아에 갇힌 채 정체하고 퇴보하고 만다. 그런데 이처럼 필요한 변화를 수용하는 것과 불변의 가치를 지키는 것은 서로 상충하는 면이 있어서 양자를 조화하기가 쉽지 않다. 어떻게 양자를 조화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달의 마음이어야 한다. 은나라 사람들은 이상적인 상징을 달에서 발견했다. 달은 때에 맞추어 기꺼이 모습을 바꾸지만 언제나 변함없이 떠올라 밤길을 비추어 준다. (174-175쪽)
은나라 사람들은 변치 않는 항상됨의 도(道)를 숭상했는데, 해당 괘의 이름이 항아(恒我)였다. '나를 항상되게 한다'는 뜻인데, 그 안에는 '달의 마음으로 나를 향상되게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 [그림13]에서 원래 恒 자의 갑골문을 보면 해가 아니라 반달이 하늘과 땅 사이를 잇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달이 때에 맞추어 주기적으로 차오르고 줄어들며 자신의 모습을 바꾸지만 언제나 거기에 떠 있고, 시기를 어기지 않으며 언제나 한결같은 하나의 원칙을 따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또한 이렇게 하면 하늘과 땅 사이를 이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다가 금문에 이르면 여기에 心 자가 더해지면서 '달처럼 항상된 마음'을 뜻하게 된 것이다. (177-178쪽)
은나라에서는 달을 숭상했고, 또한 은나라 자체가 모계사회이기도 했다. 하지만 부계사회인 주나라의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달에 대한 격하가 일어난다. 주나라는 은나라 점인들을 유폐했고 하늘에 대한 제사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나서 恒 자의 달은 해로 바꾸어 버린다. 흥미로운 점은 서양에서도 부계사회가 확립되며 달을 격하하는 동일 현상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 부계신을 모시는 기독교가 확립된 이후에냐 생겨난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전 세계에서 달을 숭상하는 문화는 주류가 아니다. 은나라와 동일하게 이족의 한 지파인 우리 민족은 여전히 달을 숭상하는데, 이는 세계적으로 드문 케이스인 것이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여전히 정화수를 떠 놓고 달에게 소원을 빈다. (178-179쪽)
* '이족'은 '동이족'을 지칭하며, 고조선이 은나라와 연결되었음을 보여주며, 이는 역(易)을 '고조선역'으로 볼 여지를 남김. (박희택)
易 자의 원형적 의미는 '달빛의 비추임'인데, 달빛이 때에 맞추어 스스로 모습을 바꾼다는 측면에서 '바꾸다'라는 의미가 나오는 것이다. 역이란 '비추는 것(易也)'이라고 할 때 易 자는 이와 같은 원형적 의미로 쓰인 것이다. 이러한 취지를 반영하여 서두의 문장을 풀이하면, 역이란 달빛이 비추듯 세상을 비추어 인도하는 법칙이고, 그러한 달빛이 때에 맞추어 스스로 모습을 바꾸듯 변해야 할 때는 변화를 받아들여 바뀔 줄 알아야 하는 것이고, 그러면서도 달빛이 언제나 변함없이 떠올라 밤길을 비추어 주고 안내해 주듯 한결같은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180-181쪽)
불변응만변(不變應萬變)은 '불변은 만변에 응한다'는 뜻이다. 풀이하면 불변은 만변을 두려워하자지 않으며 만변에 기꺼이 응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다섯 글자는 역경의 철학을 함축한 글로서 변화에 대처하는 군자의 자세를 표현하는 말로 많이 쓰인다. 백범 김구 선생이 1945년 해방을 맞아 귀국하기 바로 전날 저녁에 이 문구를 써서 남긴 족자가 전하고 있다. 이와 같은 불변응만변의 자세라면 서로 상충하는 변화의 가치와 불변의 가치를 조화할 수 있다. 변치 않는 하나의 원칙으로 만변에 응하는 것이고, 기꺼이 만변에 응하면서도 변치 않는 하나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181쪽)
* '불변응만변'은 장개석의 경구이자, 호치민의 좌우명이기도 했음. 주역 본문 및 십익에 나오는 표현은 아님. (박희택)
이렇게 변치 않는 중심을 확립할 때 존재는 만변에 응할 수 있다. 중심이 확립되지 않으면 도리어 만변에 응할 수 없다. 변화에 응하다가 자신이 무너질까 두렵기 때문이다. 단, 그 중심이 소아(小我)가 아닌 달의 마음이어야 한다. 자신의 이익에만 집착하는 마음이라면 어떻게 만변에 응할 것인가. 한결같음의 도를 상징하는 괘의 이름이 항아(恒我)였다는 것은 달의 마음으로 나의 에고를 비추어 자아에 대한 집착을 없이 하라는 뜻이다. 자신의 모습에 집착하지 않는 달의 마음을 가질 때라야 기꺼이 만변에 응할 수 있는 것이다. (181-1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