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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천(瓢 泉) 오 성 건 시인 편
연 보
(별첨)
*바람처럼 왔던길 구름처럼 물처럼 가려네*
1.나는 진정 시(詩)가 목마르다.
*현대를 가르켜 "시인은 많으나 시(詩)가 없으며 시는 있어도 시정신이 고갈(枯渴)된 시대"라고 혹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말은 다른사람 아닌 나를 향한 경고의 멧세지를 죽비로 내리 치는 소리인듯 하여 한 없이 부끄러움을 느껴 오던차다.
나는 진정한 시인이 되기를 원하는 의욕은 옹골차게 차 있으나 소출은 빈곤하고 보람도 초라해서 늘 허기지고 목이 마르다
나는 명색이 이름 앞에 시인(詩人),수필가 라는 관사를 달고 살지만 못내 부끄럽고 늘 시와수필에 배고파 허전 하다.
시(詩)가 최소한의 언어로 최대한의 의미를 끌어 내려는 것,언어와 언어 사이의 여백과 침묵에 의미를 부여 하는 것,압축에 압축을 지향하는 것으로,진술이 아니라 울음 이며 노래이고,다가 오는 것들에 대한 계시로 어두운 하늘에서 우는 천둥이며 번개인 것이라 알고는 있다.
시(詩)는 상징과 은유,절제와생략 그리고 함축에 담은
절규요 함성이라 할것이다.
시인(詩人)은 하찮은 것에서 위대함을,비루한 것에서
장엄함을 보고 모래에서 은하계를,피어나는 꽃에서
우주를,오늘에서 내일을,피어오르는 구름에서 비를 보는
혜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금아 피천득 선생은 수필은 청자연적이며,난(蘭)이요,
학(鶴)이요,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라고했고
수필의 빛은 비둘기 빛이거나 진주빛이고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 이라 했다.
나는 이런 시와수필을 늘 목마르게 그려 보지만 생각대로 쓰여지지 않는것은 죄스럽기도 하고 한편 슬픈 일이기도 하다.
2.문학을 꿈꾸며
*나는 눈을 들면 산이 보이고 돌아가면 강이 보이는 아름 다운 금수강산,전봉준이 농민봉기 횃불든 곳 두등산 끝
자락 거기서 빈손 불끈쥐고 있는 힘 다해 고고의소리 지르며 탯줄을 끊었다.밤이면 별이 쏟아 질듯 빛나고 낮이면 종달새 우짖고 한가로히 낮닭 우는 소리가 요란
하게 들리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거기서 나는 자연과 함께 냇가에서 고기도 잡고 앵두랑 뽕나무에 올라 오디를 따 먹으며 자랐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낸다는 옛말대로
서울에서 배웠고 방송계로 첫발을 딛어 최첨단 예술과
문학의 숲속에서 젊음을 아니 평생을 오직 한길을 걸어
왔다.
그렇게 각 분야의 전문인은 물론 특별히 수많은 문학의 정상들과 방송의 기능상 수시 만나고 접하는 진행 과정 에서 나의 문학에 관한 관심과 선호도가 높아지게 되었 다.
특별히 방송영화중 세계적인 명화의 대본은 걸출한 문학작품을 영화화 했기에 시적인 표현의 집합물이라 할것이다.
결국 방송영화 대본 사전 심의업무는 고도의 문학학습 효과로 이여젔고 나의 문학관에도 크게 선의의 영향력을
주었으며 인하여 나는 시와수필에 등단의 문을 열었다고
생각한다.
3.요란한 전화 벨소리
*몇일전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받고보니 월간 문학세계로 부터"나의 문학관" 원고 청탁이었다, 이여서 아무 에게나 원고를 의뢰하지 않음을 강조해 더욱 부담을 느꼈다.
갑자기 전화를 받고 나로써는 감당키 벅찬 주제같아 정중
히 사양하려 했으나 순간 거절할 사이도 없이 대화는 이여저 "예 알겠습니다"로 전화를 끈었다.
그때부터 나는 무거운 짐을 가슴에 품고 몇일을 그생각이
나를 옥죄고 있어 입맛과 단잠을 잃었다.
다윗이 "나는 석양 그림자 같이 지나가고 또 메뚜기 같이
불려 가오며"라고 자기 심정을 토로 한것처럼 원고 마감
일은 어찌 그리 빠르게 닥아오는지 정말 걱정이다.
잘 모르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듯이 나는 용기 백배하여
나의 가진것 그대로 나의 문학관을 진솔하게 써가기로
무작정 붓을 들었다.
4.나는 이런 시(詩)를 쓰고 싶다
*첫번째는 서정주시인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를
좋아한다
"섭섭하게/그러나/아조 섭섭한 듯만 하게
-중략-
연꽃/만나러 가는/바람 아니라/엊그제/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한두철 전/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이렇게 섭섭한듯 해도 아주 섭섭하지 않고,이별 이라고 해도 언젠가는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이별을 하는 모습,
누구를 만나러 가는 바람 처럼 흥분하여 들뜨지 않고,만나고 돌아가는 바람처럼 조용히 가라앉은 뉘앙스를 느끼게 하는 시여서 나는 좋아한다.
*두번째는 김소월시인의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를 배우고 닮아가고 싶다.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중략-
이제금 저달이 서름인 줄을/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 시에서 어렵거나 생소한 말은 단 한마디도 찾아 볼수 없다,이제 말을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 정성을 다해 자신의 속 뜻을 내 보이는듯한 시여서 나는 좋아한다.
유아기에 습득한 기층언어 일수록 함축과 함의는 풍요
하고 강렬하여 타지에서 듣는 고향의 사투리가 친근감과
함께 진한 향수를 느끼게 하는 차원의 것이라 생각된다.
*세번째는 시인 정지용의"호수"를 좋아한다.
"얼굴 하나야/손바닥 둘로/폭 가리지만
보고싶은 마음/호수만 하니/눈 감을 밖에"
비교적 짧은 시라 할지라도 시인의 그리움은 아득히 넓고
시리도록 맑고 깊은 호수에 비유함으로 그립고 보고픈
마음을 한층더 간절하게 묘사 승화시켜 오래오래 생각나게 하는 시여서 나는 좋아한다.
얼마나 깊고 깊은 심연인가.
*네번째는 김춘수 시인의 "꽃"을 좋아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중략-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싶다"
이 시는 나와 그와 이름의 세개의 지주(支柱)로 되어 있다.
누군가가 나의 빛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으로 나를 부재
에서 이끌어 주면 그에게로 가서 나도 꽃이 되고 싶다.
무었이 되고 싶다.그런데 나는 그것에 언어를 주었고
그것은 잊혀지지 않는 의미가 되어 나에게로 온다.
그리하여 나의 꽃이 된다.
여기서 시(詩)의 언어는 생존의 아픔을 보상할 힘을
가지고 있고 사물과의 교감으로 인한 절대에의 비상(飛翔)을 뜻한다.
5.방송생활 33년의 인연들
*나는 33년의 긴 세월 방송에 몸 담아 오면서 한국의
기라성 같은 여러 문인들을 가족처럼 가까이 모시고 스스럼없이 지내 오는동안 그 분들의 문향(文香)이 나의 문학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된다.
다음은 그시절로 돌아가 가까이 모셨던 분들과 회상에 잠겨본다.
*시인 김춘수 심의위원장이 어느날 나를 위원장실로 불러 본인의시 "꽃"을 고운 창호지 전지에 친히 정성을
다해 붓으로 쓰고 낙관을 찍어 고이 접어 주시어 표구로
제작 지금은 미국에 살고있는 딸내집 거실에 걸어놓아
외손들이 모두 "꽃"을 암송하고 있으며 1986년도에 출간
한 "김춘수시 전집"에 서명하여 주시어 지금 귀중히 소장하고 있다.
*1985년도 방송심의위원장으로 모셨던 선우휘 소설가는
조선일보편집국장,주필을 역임한 언론인이자 소설가요
동인문학상수상작"불꽃"작가요 반공주의 운동가였다.
그는 늘 손에 책이 들려 있어 공부하는 뜨거운 열정에 나는 존경의 마음을 갖었다.
*1980년도 방송심의위원장으로 모셨던 차범석 극작가는
연극인이고 극작가이며 희곡 "밀주"와"귀향"이 조선일보 에 당선 되었고"산불""새야 새야 파랑새야"등의 극작가 이다.그는 체구는 비록 작았으나 생각은 광대하여 무한의 상상력을 갖인 극작가로 당시 방송극의 지평을 넘나들며
드라마극본의 대가의 자리를 아무도 넘보지 못했다.
*1980년도 방송위원회 초대위원장으로 모셨던 윤석중 위원장은 아동문학가요 새싹회회장으로 "낮에 나온 반달""초생달" 우리가 초등학교 졸업식때 부르며 눈물 흘렸던 "잘있거라 아우들아 정든교 실아/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와 "퐁당 퐁당 돌을 던저라"등 수많은 동요를 작사했다.
윤석중위원장은 1981년도 설악산 뉴설악 호텔에서 전국방송인 세미나를 주최 진행했던 주무담당 책임자
였던 나를 불러 수고했다고 격려 하시고 멀리 울산바위
를 함께 바라 보며 기념 사진을 남겼다.(사진)
*특별히 잊혀지지 않는 시인은 기형도기자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빈집""밤눈"엄마 걱정" "진눈개비"등을쓴 기형도 기자는 방송위원회 담당 중앙일보 문화부기자로 대 언론사 창구 담당자였던 나와
스스럼없이 가까이 지냈던 시인은 1989년3월7일 새벽
삼류극장인 파고다극장에서 숨을 거둬 스물아홉에 요절
했다.아~아까운 청춘(靑春)이여!
*그외 방송윤리위원으로 "보리밭"을작사한 아동문학가
박화목시인,"자유부인"작가 정비석소설가,"렌의 애가"와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의 모윤숙시인,"
방송위원으로 연극 평론가와 영미희곡 전문가인 여석기위원,"그대 있음에"와 "편지""가난한 이름에게"
등을 작사한 김남조시인,분단작가 실향민 이호철소설가,
영화감독 이자 제작자로"외인구단"과"별들의 고향"으로
데뷰한 이장호감독 등 여러분이 생각에 떠오른다.
6. 눈보라도 있었고 꽃피는 봄날도 있었네
*방송에 33년 젊음을 불태우는 동안 감당하기 힘들었던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꽃피고 새우는 봄날도 많았다.
나는 1995년4월9일부터 10일간 미국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타에서 열린 NAB'95국제세미나(사진)에 방송
위원회대표 책임자로 4명의직원과함께 세계적으로 알려
진 미라지호텔에 머물면서 세미나를 마친후 호프만 방송
제작사와 헐리우드 유니버셜 스튜디오(사진)그리고
그랜드케년(사진) 자연의 그웅장함과 창조의 신비경을
관광후 귀국했고,1997년9월3일 한국방송70주년 기념식에서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내가슴에 달아 주어
가문에 영광으로 남았다(사진)
또한 2006년3월10일KBS1라디오방송 전세계와 전국망
인 아침7시 뉴스에 당시 라디오 진행자였던 봉두완 앵커 와의 생방송 전화대담 방송에서 봉두완앵커의 첫 일성 인즉"안녕하십니까,봉두완입니다,오늘 아침은 방송위원 회 오성건 방송심의 실장님과의 대담이라 다른 분과는 달리 조금 떨리네요,그러나 조금 잘못 해도 오늘만은 그냥 넘어가 주시겠지요?"였다 언중유골 이라 암묵중에
방송심의규정을 의식하며 방송에 임하고 있음이라
그때 나는 "물론이지요"로 답하고 방송에서 청소년 보호 법시행에 따른 핵심 질문에 매끄럽고 선명하게 대담을 잘
마쳤고 그 생방송 테이프는 지금도 보관중이다.
7.한국장로 문인회
*한국장로문인회는 1996년4월4일에 한국기독교 초교파 17개 전교단 130여명의 장로로 구성 창립21주년된
문화관광부에 등록된 기독교 문인단체다.
나는 한국장로문인회의 총무이사 로써 선배 문인장로님
들을 모시고 섬기며 열심히 배우고 있다.
봄 가을 문학기행과 시 낭송회(사진)를 갖고 "장로문학"지
를 발간 현재 제22호를 발간 준비중이며 "장로문학상"을
제정하고 시와수필,소설과희곡,평론과아동문학 각 장르 에서 우수대상자를 선정 본회 회원으로써 한국문단과 학계등 사회에서 크게 활동하며 한국 기독교문학의 발전
과 교계와사회에 기여한자를 표창하여 기리고 있으며 금년4윌7일 창립21주년 기념일에 제20회 장로문학상을
시상할 예정이다.(제18,19회 시상식사진)
*지난2014년6월26일 종로3가 초동교회에서 개최한
제32회 한국기독교문학상 시상식에서 한국장로문인회
회원이였던 박명재회원의 기독교문학상 수상식에 참석,
시상식에 축사를 하셨던 황금찬 시인과 저와 함께 기념 사진 (사진) 을 담았던 박명재 시인이 2015년 5월 28일 별세 고인이 되었으니 아~인생(人生)의 무상(無常)함
이여!
*한국장로 문인회위원장을 역임하셨고 현재 월간 수필 문학회장님인 갈석 강석호선생 문학기념비 제막식이
섬진강변 하동군 금성면 진정리 그의 선영이 잠들어 있는
선산 앞 나지막한 언덕위에 남해바다 건너 금산(錦山)
정상을 응시하며 우뚝 세워진 선생님의 문학기념비 제막식에 동행의 행운을 갖었다.(사진)
잘 다듬어진 문학비에는 그의 가족사와 갈석 선생님의
대표작 "흔들리는 나뭇잎"이 새겨져 있고 기념비 건립에
함께 뜻을 모은 문학 동인들의 이름이 빼곡이 적혀 있어
그가 여기까지 외롭게 문인으로 걸어온 삶의 흔적과 세월
의 이끼가 한 눈에 보이는듯 했다.
갈석 선생에게 어떤 피나는 인고(忍苦)의 세월이 있었기 에 오늘 그토록 영혼을 울리고 가슴을 적셔주는 깊고 광대 하면너도 극도로 절제된 한국수필문학의 광맥을 찾아 내고 있을까.
정녕 평생 오직 수필 한길 긴 편력끝에 돌아온 달관의
열매라 생각해 본다.나는 매주 금요일엔 월간 수필문학에
서 진행하는 갈석 강석호회장의 수필강의를 듣고있다.
8.한울 장로성가단
*한울 장로성가단은 올바른 예배음악의 보급과 교회연합
및 친교와 구제와 봉사를 목적으로 2000년4월에 전국 기독교 초교파 장로60여명으로 구성된 장로성가단이다.
격년으로 해외와 국내에서 정기연주회를 갖고 선교와 구제 봉사 활동을 하고 있으며 나는 세컨 베이스파트를
맡고있다.(사진)
9.우리 가정사(家庭史)
*우리가정사는 나의 "자화상"시에 소개 되었기에 간략히
밝힌다,자녀 2남1여로 두 아들은 서울에서 오손도손 살고 있고1남과2남을 두었으며 딸과사위는 남매를 두어 미국 시민으로 센디어고에서 살며 사위는 세계적인기업
퀄컴에 외손녀는 싼타바바라 주립대학을 외손자는 초등 학교에 다니고 있다.(사진)
10.끝맺는말
*나는 "시인의 임무는 인간의 넋을 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데 있다.
(J.E Flecker)"고 말한 플리커의 말에서 이제 조금은
위안을 받는다.
"나는 쓴다,고로 나는 존재 한다"라는 명제가 나를 오래
오래 지탱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제 갈길은 먼데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발아래
그림자가 길어 진다.
나는 노경에 절창(絶唱)의 시와수필을 쓰고 싶은 마음 간절하여 쉬임 없이 읽고 또 쓰면서 죽기 직전 노래가
가장 아름답다는 백조를 덧없이 오늘도 꿈꾸어 본다.
공중으로 도약하기 직전의 꿈 많은 새 처럼!.
*대표 작품
-시(1)강물
(2)고향(故鄕)
(3)고뇌(苦惱)
(4)백로 한마리
(5)자화상(自畵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