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조우 (3) – 강선암 미륵불
‘원래 미륵보살님이 스마일 상이셨나? 아닌데...’
2m 높이의 입상 미륵보살이 얼굴에 인자한 미소를 짓고 내려다보자 정훈은 흠칫 놀라서 멈칫거렸다. 서너 번은 더 와 본 절인 데, 큼직한 양손을 펼친 미륵보살 얼굴은 감긴 눈 대신 반달 같은 입술로 분명히 미소 지으며, 뭔가를 얘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래 기다렸구나. 이제 때가 되었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 중생을 구제하거라.”
들어 올려 앞으로 향해 펼친 오른손 손바닥으로는 어서 하산해서 세상으로 나가라는 것처럼 보이고, 아래로 내려 펼친 왼손 손바닥은 네 모든 어려움과 고충은 내가 다 알아서 감내해 줄 터이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거참, 이상도 하네. 오늘은 내가 왜 자꾸 이명 증상이 있는 거야? 내공 급속 충전을 했는데, 산 타고 올라오면서 벌써 다 소진됐나?’
어쨌거나, 부처님이 미소를 지어주시니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다.
그런데, 때가 됐으니 세상에 나가서 중생을 구제하라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셔?
올라오면서 내가 불가의 해탈, 열반을 생각해서 그런가?
하기야, 북한 불쌍한 주민들 구제하려고 내가 이 고생하는 걸 천리안 가지신 부처님이 훤히 내다보고 계셨는지도 모르지!
아니면 아까 두꺼비 바위 위에서 악양면 평사리 최 참판더러 양민들한테 쌀 좀 나눠주라고 고함친 소리를 들으셨나?
아하, 맞다! 그래서 메아리가 들려왔던 거구만!
부처님이 다 듣고 기특하게 생각하셔서 나한테 중생구제의 임무를 내려주시는 거구먼! 히히.
“예, 부처님! 이 몸 미력하나마 세상의 모든 잘못된 자들을 바로잡고, 온 세상이 선한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는 도솔천 같은 미륵 정토가 되도록 노력하겠나이다. 부디 제게 부처님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정훈은 한번 더 큰절을 올리고 부처님이 들으시도록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불교는 삶을 고해의 바다라고 했고 생각 자체를 번뇌로 여겼다.
현생의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미륵 정토는 매력적인 세계였을 것이다.
미륵 정토에만 가면 불교의 종착인 깨달음도 저절로 이룰 수 있다고 했으니, 업보가 많아 이승에서 고생한다고 생각했던 중생들이 죽으면 극락정토 가게 해달라고 얼마나 부처님께 두 손 모아 빌고 또 빌었겠는가?
죽지 않고 살아서, 이승이 미륵 정토만 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는가 말이다.
2012년에 윈-갤럽 인터내셔널이 57개국 5만여 명을 대상으로 신앙심에 대해 설문 조사한 결과가 있다.
대륙 별로는 아프리카가 89%로 신앙심이 가장 깊었고, 이어 라틴아메리카(84%), 남아시아(83%), 아랍(77%), 동유럽(66%), 북아메리카(57%), 서유럽(51%), 동아시아(39%), 북아시아(17%) 순이었다.
무신론자가 가장 많은 나라는 뜻밖에 47%를 차지한 중국이었다. 이어 일본(31%), 체코(30%), 프랑스(29%), 순이었고 한국은 15%로 독일과 함께 5위에 올랐다.
한국 응답자 중 신앙심이 깊다고 답한 사람은 52%, 그렇지 않다는 31%로 나타났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교회도 많고 사찰도 많다. 예수님과 부처님, 두 분 탄신일은 모두 법정공휴일로 지정되어 공무원과 직장인은 일도 안 하고 푹 쉰다.
민주주의가 과반수 넘는 다수결 원칙이라 좋기는 한데, 직장인의 거의 절반은 신앙심 깊은 종교인도 아니면서 괜히 노는 셈이니, 한 번쯤 생각해볼 문제는 아닌가 싶기도 하다.
주 5일 근무에 공휴일 제하면 일 년에 300일도 안 되게 일하면서, 어느 세월에 돈 만들어 미륵 정토 만들 껴?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 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미륵보살님의 은총까지 받게 된 정훈은 신바람이 나서 아자, 아자 하며 산에서 내려왔다.
집에 들르기 전에 탱자 울타리 밖에 세워둔 오피러스에 들어가 가방을 챙겼다.
두터운 여행용 가방에서 우선 오늘 시험할 레이저 건과 타깃만 몇 개 골라내어 작은 디마티니 백팩에 옮겨 담았다.
부모님한테는 오후에 형제봉에 등산 간다고 둘러댈 생각이다.
“어, 이 녀석들이 벌써 우화를 하려나 보네!”
집안으로 들어서던 정훈이 탱자나무 울타리 앞에 멈춰 서서 연두색 잎새 사이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손가락 마디만 한 갈색의 호랑나비 번데기가 탱자나무 가시에 몸을 매달고 하늘을 향해 곧추서 있는 모습이 여럿 보인다.
호랑나비는 3월부터 11월에 걸쳐 번데기에서 변태하여 성충이 된다.
이른 봄에 우화 하는 놈은 몸은 작지만, 무늬가 선명한 애호랑나비로, 겨울을 번데기 상태로 보내고 3월 말이면 성충이 되어 날아다닌다.
알에서 깬 호랑나비 애벌레는 여러 차례 허물을 벗으며 탱자나무 잎을 갉아먹고 자란다. 네 번 허물을 벗으면 5령 애벌레가 되어 녹색 몸통에 노란 얼룩무늬도 있는, 새끼손가락 굵기의 꽤 무섭게 생긴 모습으로 호랑나비 애벌레 티를 낸다.
머지않아 악양루는 복숭아꽃 살구꽃 위로 날아다니는 온갖 벌 나비의 나래 짓에 덮인 무릉도원 같은 아름다운 경관을 보일 것이다.
이 풍진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산수 좋은 곳에 머물며, 계절 따라 변하는 자연의 이치나 음미하며 살다 가면 오죽 좋으랴마는.
닭장 같은 시멘트 콘크리트 빌딩 숲에 파묻혀서 아스팔트로 덮인 미로를 헤매고 다니며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겠다고 아웅다웅 겨루며 사는 인생!
길지도 않은 젊은 시절을 금세 허비하고, 늘그막에 늙고 병들어 지친 몸을 의탁할 데도 없이 서러운 요양원 신세나 지다 가는 한 갑자 인생은 얼마나 한심하고 안타까운 것인가?
돈이 많으면 무엇 하나?
14조 원 재산을 가진 채 식물인간이 되어 몇 달을 누워있는데도, 그 저명한 회장님의 생사를 궁금해하는 사람조차 드문 데, 부자가 과연 진정으로 행복한 인간이란 말인가?
“계곡 따라 올라갔더니 경치가 아주 그만인데요. 개나리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었어요. 하하.”
“엊그제 비가 와서 도랑물이 좀 있더나? 니도 고마 돈 쪼맨만 벌고 내려 오이라! 여그서 우리랑 같이 살고로. 호호.”
어머니 마음이야 그랬으면 싶으시겠지요. 그래도, 말은 크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크면 한양으로 보내랬는데, 장차 이 지구를 위해 큰일 해낼 아들을 이런 시골구석에 처박아 두면 안 되시지요! 당장은 장가도 들어야 하고. 음 흠.
“그럴까요, 엄마? 나는 아직은 좀 그렇고, 장가 들어서 손자 낳으면 세 살쯤에 데려올게요. 여기서 진달래 따 먹고 가재나 잡으며 초등학교 다녀도 괜찮을 것 같은데. 하하.”
아서라, 말이 씨앗 된다. 신 모계사회에 장모님 허락부터 받아야지, 어디서 함부로 되지도 않을 짓을 할 거라고 말하나!
*** ***
‘우선 알루미늄 타깃부터 뚫어볼까?’
정훈은 섬진강 재첩국으로 점심을 먹고 다시 피라미드 스톤에 올라왔다.
두꺼비 바위에서 조금 떨어진 못생긴 작은 바위 무더기 주변에 자리를 잡고 디마티니 백팩을 열었다.
우선 크기가 가로세로 10cm이고 두께가 1mm인 알루미늄 1t 타깃을 꺼냈다. 사격장 과녁판처럼 다섯 개의 동심원에 팔방으로 빗금이 그어져 있다.
십 보 정도 거리의 바위로 걸어가 어깨 높이에 과녁 받침대를 얹어놓고 타깃을 꽂아 세웠다.
제자리로 돌아온 정훈이 가방에서 권총형 라이터처럼 생긴 소형 레이저 건을 꺼내 들었다.
드론 BB에 장착할 모델은 방아쇠가 없이 전자 스위치 작동으로 발사되는 타입이지만, 시험을 위해서 방아쇠 달린 권총으로 만들어 가지고 온 것이다.
크기는 작아도 최대출력이 1W나 되는 꽤 강도 높은 레이저 건이다.
출력 조절 노브(knob)를 돌려 0.1W에 맞춘다.
보안경을 꺼내 쓰고 오른팔을 뻗어 총구를 과녁에 겨냥한다.
왼손으로 손목을 받친 채 안전핀을 풀자 알루미늄 타깃에 적황색 조준점이 투사되어 나타난다.
과녁의 중앙에 정조준하고, 심호흡 후 낼 숨 3분지 2에서 호흡 정지, 발사!
-푸지익!
명중이다!
타깃의 정 중앙 지름 1cm의 10점짜리 원의 중심에 레이저 광선이 뻥 뚫린 흔적을 남겼다.
천천히 표적 지점으로 걸어가서 알루미늄 과녁판을 들어내고 뒤편 바위를 살펴본다.
과녁판 뒷면에서 5cm 정도 거리인 바위 표면에는 아무런 자국이 보이지 않는다.
과녁판 중심에는 지름 5mm 정도의 작은 구멍이 뚫려있다.
레이저광선이 두께 1mm인 알루미늄판만 뚫어내고 뒤쪽으로는 불필요하게 멀리 진행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음, 괜찮네! 이만하면 출력과 거리조절은 잘 되는 셈이다. 양호!’
레이저 건의 출력 0.1W에서 이 정도면 출력은 더 이상 문제 되지 않는다.
지금은 대인용 소형 레이저 건을 시험하고 있다. 대북지원사업을 하다가 맞닥뜨릴지도 모를 북한군과의 전투를 고려하여 최소한으로 인체에 상처만 입힐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이번에는 타깃 두 개를 1cm의 좁은 간격으로 포개 세워두고 시험했다.
두꺼운 가죽제 방호복을 입은 병사의 인체에 상처를 입힐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이다.
시험 결과는 앞쪽 타깃은 관통 구멍이 지름 5mm로 전과 동일한데, 뒤쪽의 타깃은 구멍이 지름 3mm 정도로 거의 80%는 관통한 모양새다.
이 정도면 우선 저출력 레이저 건의 발사 출력은 0.1W로 정해도 문제는 없겠다. 이제부터는 사격 거리를 5m 간격으로 수십m까지 늘이면서 데이터를 잡아 비교해보면 되겠다.
첫 시험 발사 성공에 고무된 정훈이 상기된 얼굴을 식히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싶어 진다.
풀밭에 앉으려다가 조금 떨어진 두꺼비 바위로 걸어가 기어오른다. 두 키도 넘는 높이지만 두 번째라 힘들지 않게 두꺼비 등위에 올라섰다.
두꺼비를 둘러선 3개의 신랑 모자 바위가 만드는 피라미드 스톤의 중심에 놓인 고인돌 두꺼비 바위 밑에는 4천 년 전 고대 부족장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
두꺼비 정면으로 기어오르면 강선암 미륵보살님이 두 손 벌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려다보고 계신다.
“이얏, 호. 얏호! 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훈은 양손을 입가에 대고 미륵암을 향하여 큰소리로 외쳤다.
“…. ….”
“어? 누, 누구세요? 언제 올라왔어요?”
정훈이 소스라쳐 놀라며 어쩔 줄을 모른다.
통쾌하게 고함을 지르고 나서 막 두꺼비 바위에 드러누우려는데, 눈앞에 어떤 사람이 서 있는 게 아닌가?
분명, 올라오는 인기척은 없었다. 그렇게 쉽게 올라와 지는 바위도 아니다.
첫댓글 하하, 재미지게 읽다가 나갑니다.
나중에 다시 들어와 마저 읽을께요.
그렇죠. 인간은 고행의 바다를 헤쳐나가야만 진정한 삶을 맛보는 거죠.
이제 또 고행하러 갑니다.
아자자!
네, 난정 주영숙 작가님. 오늘은 어디서 또 무슨 고행을 하실까요?
@삼일 이재영 오늘 손녀 병원 데리고 갔다가 왔답니다.
아침부터 고행하느라 바빴지용~
@蘭亭주영숙 아, 저런. 아직 할머니 노릇까지 하시는군요.
다리에 깁스해도 운전이 쉽지는 않겠지요. 고행 맞습니다.
(할아버지가 대신 하시면?)
미륵보살이 어떻게 손만 허옇네.
예. 제가 악양 초등 2학년 때(1959년?) 소유권 다툼이 있어 옮겨 다니다가 손이 훼손되어 다시 만들어 붙였답니다.
처음엔 그대로 였는데, 보기 흉하니까, 나중에 장갑을 끼워 카무플라주 한 것 같습니다.
(당시는 문화재로 지정이 안되어 '광덕보살'이라는 분이 자기 거처로 옮겼는데, 제 어머니 등 신도들이 나서서 원위치시킨 기억이 납니다)
@삼일 이재영 와아~ 어머니께서 큰일 하셨네요.
근데 장갑 낀 보살님이시넹!
@蘭亭주영숙 예. 악양 국민학교 교장 사모님이라 광덕보살님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지 싶습니다. ㅎ
우리 동네 시흥 옥구공원 '소녀상'에는 초겨울부터 목도리, 털모자에 장갑 끼워주던데, 악양 강선암은 여름에도 시원해서 사시사철 장갑 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ㅎㅎ
장갑 끼지 않은 미륵불 손 모습입니다.
(현재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