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모든 설명은
말법만년(末法萬年)의 신리(神理)임을 깨달아,
매일의 생활의 스승으로 할 것.〗
2,500여년 전의 석가는,
이윽고 이 불법은 그 힘을 잃고, 법등은 사라져 없어지고,
무명(無明)의 세계를 만든다고 예언했습니다.
불교는 구전되고, 문자로 되어, 중국으로 건너가, 일본에 정착하였으나,
그 사이에 불교는 어느 사이엔지 철학으로 되고, 학문으로 바뀌어,
어려운 경문으로 되고 말았습니다.
이 때문에, 불교는 법력을 잃고,
불교자(佛敎者)까지가, 생사(生死)의 의의(意義)조차 모르게 되고,
단가 상대의 장례불교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석가가 설(說)한 불법,
즉, 정법은 오늘날, 예언대로 말법으로 화(化)하고 말았습니다.
본래, 정법(正法)은,
이 대우주의 성립과 동시에 생겨난 것이고,
인간도 정법자(正法者)로서,
대우주와 함께, 무한의 진화를 구해서, 이 지상에 태어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전생 윤회를 거듭함에 따라서,
자기 보존이라고 하는 자아가 싹터서,
물질 지상(至上)의 세계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몇 번이나 반복된 노야의 방주 현상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질리지도 않는지, 물질의 노예로 되고,
여기 1만 년의 사이에도 모세, 예수, 석가를 비롯한 대지도령에 의해,
정법이 앞장서서 주장되는데도,
때가 지나면, 또 본래의 좋지 않은 상태로 되돌아가서,
말법(末法)은 만년의 세월에 걸쳐서 계속되어 온 것입니다.
그러나 만년에 걸쳐서 말법(末法)이 계속되었다고 해도,
정법이라고 하는 대우주의 신리는
영원히 계속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대우주가 정법으로부터 벗어날 때는,
대우주의 종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지상은 말법으로 화(化)하여도,
대우주는, 그것을 차분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물질의 노예로 화(化)하고 있다고 해도,
인류는 이윽고 눈뜨게 될 때가 올 것이라고,
신불은, 그 경륜에 따라서, 대우주를 창조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의 노예로 화(化)하고 있는 동안은,
인류로부터 고뇌를 벗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류의 목적은, 정법이라고 하는 조화밖에,
살아가는 권리도, 의무도, 책임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화에 어긋난 생활방식을 하면,
인류에게는 그 분량만큼 고뇌가 따라다닙니다.
⌜ 이 모든 설명은 말법만년의 신리(神理)⌟란,
이상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어,
인류가 물질에, 자기 보존에, 집착을 가지는 한은,
말법은 만년에 걸쳐서 계속되어 갑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법 신리는 계속 살아있는 것이며,
사람들이 고계(苦界)로부터 탈출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정법에 따른 생활을, 심행을.
매일의 생활의 스승으로서, 공부하고, 노력하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정법은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닙니다.
당신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류 전체로 정법을 보급하여 가는 것입니다.
〖 심행 개설(心行槪說)〗
<심행>이란 마음(心)과 행(行)을 말합니다.
이미 심행(心行)을 읽고 알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인간을 포함한 대우주는 항상 상호 관계하여,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태양계 하나만 보아도, 태양을 중심으로 9개의 혹성이 상호 관계하고,
태양계라고 하는 몸(體)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지구나 화성이 하나 빠져도, 태양계의 존립은 꾀할 수 없습니다.
지상의 생활을 하여도,
동(動). 식(植). 광(鑛)의 상호관계가 없으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 상호 관계는 무엇에 기인(起因)하는가,
그것은 대자연의 의식인 것입니다.
질서 정연한 의식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대우주도, 지상의 생활환경도, 조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신비를 볼 때,
우리들은 거기에, 위대한 대자연의 예지(叡智)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神)의 마음인 것입니다.
만약, 자연의 그러한 상호 관계가,
단순한 우연의 연속에 의해 생긴 것이라고 하면,
지구는 아주 옛날에 멸망했습니다.
지구 탄생에는 여러 가지의 설(說)이 있습니다만,
지구라고 하는 구체(球體)가 출생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3억 년이나 이전의 일입니다.
그 당시의 지구는, 이른바 불의 구슬이며, 태양처럼 활활 타고 있었습니다.
생물이 살 수 있도록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6억 년이나 전의 일입니다.
그때까지의 지상(地上)은,
화산의 폭발이랑, 빙하시대를 반복하였습니다.
대우주의 시간의 흐름으로 보면,
6억 년이라고 하는 세월은 일순간에 일어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기 시작하고,
이미 수십억 년, 그 궤도는, 옛날도 지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극대의 대우주와 극미의 소립자에는,
둘 다 핵과 분자의 상호관계가 보인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곳에 대자연의 의사(意思), 의식(意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나(신지)는 그러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합니다.
다만 여러분들에게 설명할 경우에는,
주관적으로는 납득시킬 수 없기 때문에, 아래와 같은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대우주에는 마음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우리들의 마음에도 서로 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이것을 설명하면,
태양의 열, 빛에 강약이 없다, 공기에 증감이 없다.
하루는 낮과 밤이 있어, 결코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다.
즉 대자연의 마음은,
'우리들에게 중도(中道)라고 하는 조화된 질서를 가르치고 있다'
고 하는 것이 됩니다.
태양의 열, 빛이 강하게 되거나, 약하게 되거나 하면 어떻게 될까요.
지상(地上)의 생명은 살아갈 수 없습니다.
공기가 줄어들거나 늘어나거나 해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활 태도도,
너무 먹으면 배가 아프고, 게으른 잠을 탐하면, 체력이 저항력을 잃습니다.
그러나 더욱 몸에 영향을 주는 것은 마음입니다.
걱정거리가 있으면 식욕은 감퇴하고, 수면을 방해하게 됩니다.
소리를 지르거나, 화가 나면 혈행이 나쁘게 되고,
화난 숨을 풍선에 넣어서, 어항에 넣으면 금붕어는 죽음에 이릅니다.
노여움의 숨은 대단한 독성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적습니다.
대자연은 조화라고 하는 중도의 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몸도 무리를 하면 안 되고, 나태해도 안됩니다.
마음에 대해서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면,
몸에, 정신에, 나쁜 영향을 줍니다.
육체도 마음도, 중도에 맞는 생활 행위,
즉 바른 상념과 행위가 필요한 것입니다.
대자연은, 그것을 가르침과 동시에,
대자연의 마음에 거스르면,
그 분량만큼의 괴로움이 따라다니는 것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중도(中道)란 족(足)함을 아는 생활입니다.
욕망에 번롱당하지 않는 자기 자신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괴로움은,
이러한 중도(中道)의 마음을 잃은 자아아욕에 집착한 상념,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대자연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대자연으로부터 벗어나서는 생활이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대자연의 마음과 서로 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행(心行)>이란,
족함을 안 마음으로 감사하고, 보은이라고 하는 행위를 나타내가는 것입니다.
그런 고로, 심행(心行)은
'중도(中道)의 정신으로 매일의 생활을 하세요.'
라고 하는 것입니다.
<심행(心行)>은,
대우주의 상호 관계와, 인간의 관계,
그리고 모든 것은 순환되고,
그 순환은, 대우주의 마음, 중도를 축으로 해서 회전하고,
인간의 혼도 또 이러한 바른 순환의 과정 속에서 육성되며,
조화라고 하는 목표를 향해서,
전생 윤회를 거듭해가는 영원의 생명체인 것을,
더없이 평이하게, 단적으로, 문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세상사에는 모두 기둥이라는 것이 있는데,
<심행>의 기둥이 되는 것은,
ㅡ대자연이라고 하는 신의 마음.
ㅡ영원의 생명체를 유지하고 있는 순환의 법,
ㅡ자비와 사랑,
이 3개입니다.
이 세 개가 <심행>을 만들고, 우리들을 계속 살려가는 것입니다.
<심행>은 그런 고로, 마음의 가르침이며, 생활의 규범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암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실천해 가는 것입니다.
실천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들은, 대우주의 중도의 마음에 조화되어, 참된 평안을 체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라는 것은 파동입니다.
경문의 통독은 그저 소리 내어 읽는 것만으로는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경문의 의미를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는 자가 통독할 때는,
그 말의 파동은 저 세상의 금강계까지 통하고,
사람들을 감동시켜가는 것입니다.
'말'은 본래, 언혼(言魂)이라고 해서,
원래 빛의 입자로부터 만들어져 있어,
'말'을 발(發)하는 사람의 마음가짐 여하에 따라서,
'말'의 하나하나가,
빛의 구슬로 되어, 공간(空間)으로 흘러나가는 것입니다.
빛의 구슬은 보통 육안(肉眼)으로는 알 수 없지만,
영시(靈視)가 가능한 사람,
혹은 4차원의 세계로부터 보면, 이 점은 사실로 확실하게 보입니다.
사람의 말에 감동한다.
또는 웃음이나, 노여움이 나오는 경우는,
말하는 쪽의 마음과,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정신상태에 따라 다릅니다.
그러나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는 경우는,
이것을 듣는 쪽에 사심(邪心)이 있어도,
대개 그 사심(邪心)은 사라져 가고 맙니다.
말은 조리가 정연해서 알지만,
전혀 기분이 그 말에 다가가지(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말하는 쪽의 마음가짐이,
듣는 사람에게 아주 큰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마음은 빛이 되고,
마음에 응어리가 있으면 빛이 검은 덩어리로 되어
상대에게 전해져 가기 때문에, 반작용을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어지간한 절에 가면, 범종이 있습니다.
그 범종의 음색도,
이것을 타종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울림이 달라집니다.
쿵 ~~ 하는 종의 소리는 누가 쳐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타종하는 사람이 항상 연찬(硏鑽)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그 종의 파동은 저 세상의 금강계까지 도달하고,
그 사람에게 되돌아올 뿐만 아니라,
그 종의 파동은, 사람들의 마음에 전해져 정화해주는 것입니다.
경문의 통독, 낭독이란 것도, 완전히 이것과 똑같습니다.
바른 마음과 행위를 하고있는 사람이 하면,
그 목소리의 파동은 금강계까지 통하고,
다시 그 사람에게 파동이 되돌아와서,
마음의 통일, 평안을 한층, 더 깊게 해가는 것입니다.
<심행(心行)>의 낭독은, 이러한 의미에서 중요한 것이고,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만, 쓰여 있는 의미도 모르고, 외고 예배하면 이익이 있다고 하는 것은 안됩니다.
반야심경은 어디에서도 읽히고 있습니다.
고마운 경이다, 따라서 사경(寫經)도 좋고, 통독 또한 이익이 있다고 전하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도 모르고, 행위도 없는 것이,
밤낮으로 올려도 빛은 닿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불교는,
경문을 올리거나, 사경을 하는 것 자체에 무게를 두어서,
일상의 상념과 행위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심행>은, 이러한 의미에서, 중신(中身=중심)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현실의 생활 위에 나타내고,
그렇게 해서 그 마음으로 낭독하게 되면,
하나의 언혼은, 둘이 되고, 셋이 되어,
마음의 평안을 늘려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로서 <심행>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밤에 잘 때에, 잠자리 위에서 차분히 낭독하고,
그날 하루의 상념 행위를 반성하고,
과실을 바로잡아, 중도의 마음을 길러 갈 것을 기원합니다.
심행의 언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