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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경주와 마찬가지로 일본을 대표하는 고대 유적도시가 나라이다.
일본 열도의 중심부에 위치한 ‘나라’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시작된 곳이다.
710년부터 784년까지 고대 일본의 수도였다. 한국어로 ‘국가’라는 뜻이기도 한 ‘나라’는 백제와 관련이 깊다.
상고시대에 나라 땅을 점령했던 사람들은 도래인(渡來人)이라 불리던 고대 백제인이었다.
이런 까닭에 나라에는 고대 백제와 일본의 교류사를 엿볼 수 있는 유적이 산재해 있다.
나라는 일본 고대 불교의 중심지이기도 했는데 여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 또한 백제인이다.
나라의 인구는 현재 약 37만명정도이나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수는 매년 약 140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나라의 대표적인 사원으로 세계 최대 목조건축물의 위용을 자랑하는 도다이지(東大寺)가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동대사’라는 큰 돌에 새겨진 표지판을 지나면 동대사의 입구인 남대문이 나온다.
나라 국립공원 내에 있는 일본을 대표하는 절 도다이지는 거듭되는 재해와 전염병 연이는 흉작, 반란 등으로
고통 받게 되자 천황은 전국에 절을 세우라는 칙령이 내려지고 745년에 쇼무 왕(聖武王)의 발원으로
로우벤(良弁)이 창건하였다
일본 최초의 큰 스님인 행기스님은 백제인으로
도다이지 비로자나대불을 모시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일본 최고의 승려 직책인 대승정에 올랐을 만큼 대중들에게
살아있는 보살로 추앙을 받아서 행기보살이라 불렸다.
홍윤기교수(한국외국어대)이 최근 강의나 저서 등에서 밝힌 행기스님의 이력을 정리해서 옮긴다.
행기 스님의 출생 장소인 에바라지(家原寺). 사카이시(堺市)의 명소로, 오사카부 사카이시 에바라지초(家原寺町)에 있다.
에바라지초는 오사카시의 전철 JR 시텐노지역(四天王寺驛)에서
강와선(阪和線)을 타고 남쪽으로 달리다 12번째인 쓰쿠노(津久野)역에서 내리면 찾아가기 쉽다.
에바라지는 본래 행기 스님의 외가였다. 행기 스님은 뒷날 자신의 생가였던 외가에 찾아와 에바라지를 세웠다. 37세 때의 일이다.
절 경내에는 행기 스님 등신대(等身大) 동상이 우뚝 세워져 눈길을
끈다. 우리가 행기 스님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는 동안 일인 학자들이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행기 스님이 백제인 왕인(王仁) 박사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밝혔던 불교사학자가 뒷날 연구서에서 슬며시 혈통을 백제인에서 중국인으로 돌려버렸다.
불교사학자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노우에 가오루(井上薰1835∼1915) 교수는 도쿄대 국사학과 출신으로 오사카대와 나라대에서 교수를 지낸 문학박사다.
이노우에 교수가 행기 스님 연구서를 처음 쓴 것은 1959년.
그는 이 저서에서 "행기는 백제 왕인 박사의 후손"이라고
그 출신을 밝혔다.
"행기는 덴치왕(天智)이 오우미(近江)의 오쓰궁(大津宮)에서 즉위한 해(668년)에 가와치 오토리군·지금의 오사카부 사카이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지재지(高志才智)이고 어머니는 봉전(蜂田)씨였는데
고지씨는 왕인(王仁)의 자손이라고 한다."(井上薰 '行基' 吉川弘文館
1959) ◇행기보살행장기
행기 스님의 묘지(오사카 가쿠린지·鶴林寺 경내)에서 발굴된 묘지명(도기, 749년 2월23일 승려 진성이 씀)
'대승정사리병기'(大僧正舍利甁記)도 "백제 왕인의 후손"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노우에 교수는
1980년 다시 쓴 글에서 왕인 박사를 중국 사람으로 돌려버렸다.
"행기의 아버지는 고지재지이고 어머니는 봉전씨이며 고지·봉전씨는 한계(漢系) 도래인이다."
(井上薰 '古代史の群象' 創元社 1980)
이노우에 교수가 무엇 때문에 중국인으로 바꿔버렸을까. 행기 스님 무덤에서 파낸 '사리병'의 '대승정사리병기' 기록에 행기 스님의 생부는 "왕인 박사의 직계 후손"으로 나와 있다. 그뿐 아니라, 일본 고대의 대표적 불교 사서이며
역사의 명저로 평가되는 고승전(高僧傳)인 '원형석서'(元亨釋書 14세기)에도 백제 왕손임이 밝혀져 있다.
(釋行基 世姓高志氏 泉州大鳥郡人 百濟國王之胤 天智七年生.)
◇‘행기보살좌상’ 목조. 높이 83.3cm
일본의 가장 오래된 불교 전적으로 꼽히는 '일본영이기'(日本靈異記 822년경 편찬)는 상세하게 일화까지 전한다.
'일본영이기'는 야쿠시지(藥師寺)의 경계(景戒) 스님이 787년 집필한 고전이다.
일본 왕실 최초의 대승정이 된 백제인 행기 스님의 생애는 파란만장했고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일본 각지에 49곳의 수도장과 사찰을 몸소 세웠다.
특히 빛나는 업적 중 하나는 나라(奈良)시에 있는 도다이지 건조와 세계 제1의 금동불상 '비로자나대불' 주조에 앞장선 일이다. 일본 고대불교의 성인으로 추앙되는 행기 스님은 지금의 에바라지 터에서 668년 태어나 15세 때인 682년 출가한다. 나라 땅 야쿠시지에 찾아가 신라에서 건너온 혜기 법사(惠基法師)의 문하에 들어갔다.
3년간 혜기 법사 밑에서 '유가유식론(瑜伽唯識論)'을 공부한 뒤에 685년, 18세 때에 나라 땅 아스카데라(飛鳥寺) 남쪽 선원으로 옮아가 이번에는 백제 스님 도소 화상(道昭和尙) 문하에서 선을 배우면서 금식과 심신 수련을 했다.
22세에는 나라의 가스가산(春日山) 암자의 백제 스님 의연 법사(義淵法師) 문하로 옮겨 수도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24세 때 청년 행기는 가쓰라기산(葛木山) 고쿠지(高宮寺)로 가서
신라에서 건너온 덕광 법사(德光法師) 문하에서 비로소 '구족계'를 받아 승려가 됐다.
일본에는 538년 백제 성왕(523∼554 재위)에 의해 불교가 처음 전파된 이래로 백제와 신라로부터 건너온 고승들의
포교가 활발했다. 그러기에 행기 스님은 소년 시절부터 신라와 백제에서 건너온 고승들의 문하를 두루 돌면서 불법을 수도했다.행기 스님은 그런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700년 나라 땅 호키산(法器山) 기슭에 부랑인 수용소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행기 스님은 행려병자들을 구휼하느라 계속해서 무료 숙박시설인 '포시옥(布施屋)'을 새로이 지어 나갔다.
그러는 동안 행기 스님은 자신의 생가인 에바라지며 신호지(神鳳寺), 온코지(恩光寺) 등 사찰도 직접 지어 나갔다.
헐벗고 굶주린 대중은 행기 스님의 설법회로 몰려왔다. 스님은 제자들을 모아, 가뭄에 시달리는 농민들을 위해 도랑을 파서 냇물을 끌어준다. 물 웅덩이를 파주었으며 큰 냇가에 다리를 놓아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고통도 덜어 주었다. 그러기에 "행기의 추종자는 때로 1000명을 넘었다"(속일본기)고 전한다.
도다이지 건설에 행기스님을 돕고 있던 로우벤(良弁)스님은 행기스님이 입적을 하자 그 절의 건설 공사를 마무리 한다.
로우벤(良弁)스님 또한 백제씨족의 후손이다.
동대사를 지을 때 총 책임자는 고구려인 고려복신(高麗福信)이 맡았고, 대불의 주조는 백제인 국중마려(國中麻呂)가,
그리고 대불전 건축은 신라인 저명부백세(猪明部百世)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나라시에 있는 도다이지(東大寺) 역시 백제인의 혼이 어려 있는 사찰이다.
도다이지 경내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중층의 남대문을 통과하게 되고 역시 중층인 중문을 거친다.
엄청난 터의 넓이 위에 세워진 압도적인 크기의 건물, 그리고 그 속에 앉아 있는 비로자나대불의 웅장함이
보는 이를 주눅들게 한다.
일본 불교 문화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는 비로자나대불은 높이 15m 무게 25톤에 달하는 거대한 불상이다.
가운데 손가락 길이만 1m다. 대불의 표정은 인자하면서도 위엄이 가득 서려 있다.
7년간에 걸쳐 비로자나대불 제작에 나섰던 백제인의 집념과 끈기가 존경스럽다.
대불 뒤 기둥에는 밑동에 어른이 통과할 정도로 큰 구멍이 뚫려 있다.
그 구멍을 통과하기 위해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 있는데 구멍을 한번 통과하면 액운을 막아 줘
1년간 병치레를 안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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