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세 혐의로 잠정적 은퇴 의사를 밝힌 강호동. 국민 MC의 쓸쓸한 퇴장에 팬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자나 깨나 자식 걱정뿐인 부모마음만 하랴. 경남 마산의 한적한 마을에서 “막내아들만 생각하면 그저 눈물이 앞선다”던 강호동의 아버지 강태중 씨를 만났다. 울던 얼굴에 웃음이 번지고, 웃던 얼굴에 눈물이 번지던 이날의 풍경을 글로 전한다.
- ▲ 강호동 아버지 강태중씨 / 사진=이준경
마산역에서 오동동으로 가는 십 분 남짓한 시간 동안 택시기사는 “취재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며 그동안 귀동냥으로 들어왔던 강호동과 그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풀었다. 어디까지나 ‘~카더라’에 불과한 이야기지만 처음 보는 기자 일행을 돕겠다고 나서는 그가 고마웠다.
오동동에 가면 강호동의 아버지 강태중 씨를 만날 ‘수도’ 있다는 희망만으로 일단 택시에서 내렸다. 마산 아구찜 가게가 즐비했던 탓일까. 노란색 간판이 유난히 눈에 띄는 분식집에 들어가 무작정 “강호동의 아버지를 아느냐”고 물었다. 이제 막 장사준비를 시작하던 40대 초반의 아주머니는 알겠다는 듯 “아~”라는 짧은 감탄사와 함께 가게 밖으로 나가 앞서가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멈춘 곳은 가게에서 30미터 가량 떨어진 골목과 골목의 코너 지점. 그녀가 손을 쭉 뻗어 가리킨 곳은 지은 지 족히 몇십 년은 돼보이던 붉은 벽돌의 모텔이었다. “저기 저 모텔 건물 보이지요? 거가 원래 강호동이 아부지가 했던 데거든요. 지금은 세를 줬는데 거 가서 물어보면 뭐가 나올 끼라예.”
- ▲ 사진은 이제 막 큰아들의 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강태중 씨의 모습(좌), 지은지 무려 40년이 됐다는 강태중 씨의 모텔 건물. 현재는 세를 준 상태. (중앙·우) / 사진=이준경
우리 호동이는 진짜 효자
‘대실 15,000원. 달방 있습니다.’
모텔 입구에 걸려 있던 현수막 문구는 이곳이 지방의 시골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줬다. 계단에 올라 2층 카운터 앞에 다다르자 아무렇게나 잘라 붙였음이 분명한 ‘안내실’ 표지도 보였다.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니스 칠이 반들반들한 안내실 방에서 풍채 좋은 아주머니 한 분이 나왔다. 강호동의 아버지에게 세를 주고 여관을 운영한다던 여주인이었다. 이 여관으로 말할 것 같으면 역사가 40년도 더 됐다고 한다. 가만히 취재팀의 자초지종을 듣던 그녀는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없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강호동의 식구들을 칭찬했다.
“아버지가 호인입니다. 제가 석 달 전부터 이 모텔을 시작했는데, 올 추석에 이쪽으로 젓갈, 꿀 같은 선물이 많이 왔어요. 호동이 아버지가 아직까지 모텔을 운영하는 줄 알고 다 이쪽으로 보낸 거죠. 사람이 참 좋아서 인심을 많이 베풀었대요. 그렇게 도움받은 사람들이 명절이면 인사한다고 그렇게 많은 선물을 보내는 거죠. 아들도 아버지 심성을 똑같이 닮아서 얼마나 착하고 효자인지 몰라요. 호동이가 아버지 몸 안 좋은데 매일 여기 나와 있으니까 이제 자기가 모시겠다고 일 그만두게 했대요. ‘아부지, 우리가 착하게 사니까는 내가 이래 돈을 잘 번다 아입니꺼. 지가 생활비 드릴 테이끼네 일 고마하시고 집에 계시이소.’라고. 호동 아버지는 ‘내가 무슨 복으로 저런 아들을 낳았는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자주 하세요. 요즘 호동이가 세금 빼돌렸다는 말이 나오던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호동이가 그럴 사람이 아니거든요. 호동이 아는 사람들은 그 말 절대 안 믿어요.”
그녀는 강호동의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면 건너편 느티나무 벤치 아래서 가만히 기다리라고 귀띔했다. 3개월 전 여관 운영에서 손을 뗀 강 씨는 매일 낮 12시에 큰아들의 차를 타고 오동동 나무벤치 앞에 와서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 ▲ 인터뷰 도중 아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훔치는 강태중씨. / 사진=이준경
나는 호동이를 믿어요
낮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 과연 느티나무 벤치 앞으로 까만색 스타렉스 차량이 섰다.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차 안에서 등산용 지팡이에 의지해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오는 노인이 있었다. 넉넉한 풍채, 뚜렷한 이목구비, 무엇보다도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는 웃음. 한눈에 알아봤다. 그는 강호동의 아버지 강태중(75) 씨였다.
몇 년 전 찾아온 중풍으로 보행이 다소 불편하다는 강 씨는 주춤주춤 걸음을 떼 벤치에 앉았다. 노인들의 전용공간이나 마찬가지인 벤치에 젊은 기자가 앉아 있는 게 좀 이상해 보였던지 물끄러미 쳐다보기도 했다. 기자의 방문이 달갑지 않겠다는 지레짐작 때문에 잠시 망설이던 끝에 조심스레 다가가 인사를 했다. 예상 외의 반응이 돌아왔다.
“뭐 기자? 서울에서 왔다꼬?(껄껄껄) 뭐 할라꼬 여까지 천 리 길을 왔노. 내는 할 말 없다.(껄껄껄)” 할 말이 없다던 아버지는 한 마디 덧붙였다. “궁금한 기 뭐꼬? 물어보면 내 대답은 해주께.” 그렇게 강호동의 아버지와 대화가 시작됐다.
아버님, 그러니까… (질문을 완성하기도 전에 강태중 씨는 거침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호동이가 어제도 나한테 전화했어요. “아부지, 걱정하지 마이소. 별일 아입미더. 밥 잘 잡숫고 계시이소.” 하더라고. 나는 호동이를 믿어요. 일부러 세금 안 내고 그럴 아이가 아닙니다. 그거 안 냈으면 내가 다 내줄 생각입니다. 호동이 엄마는 요즘 눈물 마를 새가 없어요. 그 일 때문에 호동이가 추석에도 안 내려왔어요. 집 안이 북적북적한데, 그놈 하나 없다고 집 안이 썰렁했어요. 사람 하나 자리가 그렇게 크더라고요.
- 강호동 씨가 굉장한 효자라고 하던데요.
(껄껄껄) 호동이는 마음 씀씀이가 괜찮아. 자기도 바쁠 텐데 큰댁 제사는 꼭 옵니다. 나보고 서울 오고 싶으면 차 보내줄 테니까 언제든지 말만 하시라고 하질 않나. 용돈도 많이 주고.(웃음) 고생한다고 여관도 그만하라고 했어요. 형한테도 매일 전화해서 한다는 소리가 “형, 우리 아부지한테 진짜 잘하자. 내도 잘하께.” 우리 큰아들도 효잡니다. 오늘도 우리 큰아들이 여기까지 데려다줬습니다. 이렇게 나와서 천천히 돌아다니다가 7시 정도 되면 큰아들이 다시 태우러 옵니다. 내가 자식복은 있는 것 같아요.
-어린 시절의 강호동 씨는 어땠나요.
우리 고향이 진주시 이반성면 길성리인데 호동이가 거기서 태어났어요. 호동이 엄마가 호동이를 가졌을 때 한약을 먹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갓난아기 덩치가 꼭 세 살 같았지요. 동네에서 싸움이 될 만한 아이가 없었고, 똑똑하기도 참 똑똑했어요. 하루는 또래보다 어려 보이는 애들이랑 놀고 있길래 왜 이렇게 어린 애들이랑 놀고 있냐고 물어봤더니, “아부지, 야들 6학년입미더.”(그때 강호동은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라고 하더라고요. 막내라 귀여움도 많이 받고 자랐어요.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엄마랑 같이 잤을 정도니까. 곡식은 남의 것이 좋고 자식은 제 것이 최고라는데, 그 말이 딱 맞아요. 나는 누가 뭐래도 우리 호동이가 진짜로 제일 예뻤어요.
- 막내 아드님이라 더 애틋하시겠어요.
우리 호동이가…(강태중 씨가 갑자기 주머니에 물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호동이’라는 이름만 나와도 눈물이 난다고 했다.) 우리 호동이가 고3 때까지 내 품 안의 자식이었어요. 그런데 씨름을 하겠다고 부산으로 간다고 했을 때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눈물이 다 나려고 해요. 호동이가 장가 갈 때도 아버지, 어머니가 얼마나 허전하겠냐면서 짐이며 물건이며 방에 그대로 놓고 갔어요. 씨름하면서 받은 트로피도 전부 두고 갔고요. 아마 스물한 개쯤 되는 것 같아요.
- 왜 씨름선수로 키울 생각을 하셨어요.
중학교 때 호동이 담임이 씨름을 권유했어요. 나도 호동이 먹성을 보고 ‘씨름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했고요. 마산에서 고기장사를 했는데, 그때는 고기장사를 한다고 하면 백정이라고 했던 시절이에요. 그래도 나는 우리 식구들 먹여 살리는 게 더 중요했어요. 우리 식구 입으로 먹을 게 들어가는 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했어. 그래서 고기 들어오는 날에는 최고 좋은 부위를 집으로 가져갔어요. 육회 알죠? 호동이 엄마가 그걸 참 잘했거든. 고기를 칼로 잔잔하게 썰어서 참기름 한 숟가락, 배 조금 썰고 조물조물해서 만들어서 호동이를 먹이곤 했어요. 호동이가 혼자서 600g은 너끈히 먹었어. 양푼에다 밥 먹는 거 보면 진짜 기가 막혔죠. 그래서 씨름을 시켰어요. 지금은 그때 비교하면 10분의 1도 안 먹는 겁니다. 밖에 나가 먹으면 밥을 한 공기밖에 안 먹더라고.
- 연예인이 된 아들. 어떠셨어요.
어릴 때나 내 자식이죠. 연예인을 한다고 했을 때 반대는 안 했어요. 씨름에서 일등 했으니 딴 거 해봐도 되겠다 싶었죠. 내가 이경규한테 진짜 고마워요. 그때 호동이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연예인을 만들어줬어요. 이경규 처가 진주 강씨거든. 그래서 더 잘해준 것 같아요. 호동이가 큰 상(2008년 백상예술대상) 받았을 때도 이경규한테 상을 갖다준 거 알죠?
- 그때 그 상을 병상에 누워 계시던 아버님한테 드렸잖아요.
그걸 어떻게 알고 있어요? (2008년 백상예술대상 TV부문에서 대상을 받은 강호동은 관계자들과 간단한 식사를 마친 뒤 트로피를 들고 곧장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 강호동 씨 형제관계가 어떻게 되나요.
우리 호동이가 막내고, 위로 누나 셋, 형 하나입니다. 큰아들은 우리 집 근처에 살고, 딸들은 미국, 창원, 대전 이렇게 제각각 살고 있어요. 우리 큰손녀는 창원과학고등학교 1학년이고, 손자는 마산중앙중학교 1학년입니다. 근데 나는 이제 두산(강호동의 아들)이가 제일 예뻐요. 손자 생각하면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나요. 우리 두산이 돌잔치 때 몸이 아파서 못 갔어요. 20돈짜리 목걸이만 선물했죠. 두산이가 이제 세 살인데 엄청 똑똑해요. 내가 호동이한테 두산이 동생은 안 낳을 생각이냐고 물으니까 그냥 웃고 말더라고요.(웃음) 참 우리 두산이 사진 좀 보여줄까요? 아, 맞네. 내가 휴대폰을 잃어버렸네.
- 며느님은 어떠세요? (강호동은 지난 2006년 대학원생 이효진 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우리한테 참 잘해요. 내가 기특해서 “어디서 그렇게 잘 배웠니?”라고 물으니까 교수님이 어른들한테 잘하라고 가르쳤대요.(껄껄껄) 나보고 “아버님 서울 올라오세요. 맛있는 거 해드릴게요.” 그런다고. 한 달만 있으면 두산이 보러 또 갈 겁니다. 우리 호동이가 또 까만 차 보내줄 건데, 진짜 둘이 타고 가기 아까울 정도로 좋아요.
- 마지막으로 꼭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세요?
가령 강호동 씨가 앞으로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다던지… 우리 호동이가 그래도 사람들을 웃기는 사람입니다. 사람들한테 웃음을 주는 사람 말입니다. 내 소원은 그겁니다. 국민들 그저 편하게 웃겨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