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조금씩 풀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다같이 마음을 모아서
다시 한번 한울님의 은덕을 생각하고
또한 평소 생활 속에서
항상 한울님을 잊지 않는 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원하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해 봅니다.
‘도로 먹임’은
대신사님께서
모두가 한울님의 이치와
기운에 의한 것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
『동경대전』 「불연기연」 편에
“가마귀 새끼가 도로 먹임이여,
저것도 또한 효도와 공경을 알고
(烏子之反哺兮 彼亦知夫孝悌)”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사성어를 말씀하신 것이지요.
원래 이시진(李時珍)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 의하면
까마귀는 부화한 지 60일간은 어미가 먹여 살리지만
그 뒤 크면 이번에는 새끼가 어미를 먹여 살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도
‘자오(慈烏, 인자한 까마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곧 까마귀의 되먹이는 습성에서
‘반포(反哺)’라는 말이 나왔으며,
이는 ‘지극한 효도’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반포지효(反哺之孝)’가 바로 그것입니다.
따라서 까마귀는
효도를 하는 새이기도 한 셈입니다.
즉 반포지교, 반포지효라고 하여
까마귀가 새끼 때는 어미가 갖다 주는 먹이를 받아 먹고 자라지만
다 자라서는 어미가 늙게 되면
새끼가 먹이를 물어다가 도로 어미를 먹여 준다는 것이지요.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참으로 저 날짐승 같은 미물도 어미를 효로써 받드는데
어찌 사람이 효를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여
‘효’의 상징으로 반포의 가르침을 자주 말하였던 것입니다.
대신사님께서는
이 고사를 「불연기연」에서 인용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얼마 전부터
청수를 모시거나 심고를 하거나 주문을 외거나 하는
모든 신앙적인 생활들이 ‘도로먹이는 이치다’라는 말을
집사람이나 아이들에게 해오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왜 그게 도로 먹이는 이치인가에 대해서는 잘 정리가 안되더군요.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두고두고 생각을 해 보았지요.
왜 청수를 모시고,
식고를 하고,
심고를 하고,
주문을 항상 생각을 하고,
매사에 스승님들의 가르침에 견주어 행하고 하는 것이
도로 먹이는 이치인가?
생각을 해 보니 결론은 간단했습니다.
우리가 배부르게 음식을 먹고,
따뜻한 옷을 입고,
맑은 공기를 숨쉬고 하는 것은
사실 모두 다 내 몸을 건강하게 잘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내 몸’이란 게 뭡니까?
바로 형체가 보이는 한울님이지 않습니까?
보이고 만져지고 느낄 수 있는 한울님.
우리는 보통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익숙합니다.
모든 생활이 보이는 것 위주로 하게 되어 있지요.
그래서 우리의 생활들도
이 보이는 한울님인 몸을 잘 보살피기 위한 것들 위주로
배우고 익히고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보이는 한울님은 어디에 의지해 있냐 하면
보이지 않는 한울님에 의지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마음속으로
“한울님~” 할 땐
바로 보이지 않는 한울님을 향하게 되는 거지요.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자꾸만 소홀해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지극한 마음으로 한울님을 항상 잊지 않고 생각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요.
‘도로 먹임’이란
바로 유형한 한울인 이 몸으로
무형한 한울님을 봉양한다는 것입니다.
즉 유형한 한울인 이 몸을 받드는 것은
너무도 쉽게 익혀 왔던 것이지요.
그리고 생활 자체가 그것이고요.
이 유형한 한울을 잘 받들지 않으면
그 대가는 고통으로 찾아옵니다.
즉 밥을 안 먹으면 배고프다는 고통,
따뜻한 옷을 입지 않으면 춥다는 고통,
맑은 공기를 숨쉬지 않으면 답답해진다는 고통….
이런 고통 때문에 유형한 한울님을 봉양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히 익혀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무형한 한울님은
유형한 한울님인 이 몸이 난 곳이고,
또 그 근원을 의지한 곳이지만
눈앞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소홀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로 먹임이란
무형한 한울로부터 화생한 유형한 한울로서
다시 무형한 한울님을 봉양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무형한 한울님을 잘 받들어 모실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스승님들께서 가르치신 가르침들을 잘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즉 경전에 쓰여 있는 모든 것들이
바로 유형한 한울로서 무형한 한울을 봉양하는 이치인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들 수도한다고 하여,
산속에 있는 수도원에 가서 가만히 앉아서 주문 공부를 하거나,
또는 마음공부를 한다고 해서
마음을 들여다보고 바른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들을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도란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도란
한울님을 지극히 공경해서
한울님의 이치과 기운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도원에 있으나 세상 속에 있으나
또는 앉아 있으나 누워 있으나
자나깨나 항상 한울님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수도란
바로 그렇게 하기 위한 훈련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 이렇게 모여서 시일식을 모실 때는
누구나 한울님을 생각하지만
일어서서 나가게 되면
어떤 사람은 일어서는 순간에 잊어버리고,
어떤 사람은 문을 열고 나가면서 잊어버리고,
어떤 사람은 산을 내려가면서 잊어버리고,
어떤 사람은 잊지 않고 항상 생각을 하기도 할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잊지 않고
항상 한울님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공부가 바로 수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한울님을 생각하고
또 스승님들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있나, 잊고 있나를 돌아보는 것이 바로 마음공부입니다.
그냥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아서 편안한 상태
그것이 마음공부가 아닌 것이지요.
따라서 도로 먹임이란
사실은 신앙 생활 그 자체의 진정한 의미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스승님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하면 ‘시천주’일 것입니다.
시천주란 게 무엇입니까?
한울님을 잘 모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해월신사님은 「천지부모」 편에서
“천지부모는 일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한울과 땅이 덮고 실었으니 덕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하셨습니다.
또한 “천지는 만물의 아버지요 어머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시천주’할 때 그 ‘주’는
“님이란 것은 존칭하여 부모와 더불어 섬기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또한 “존칭하여 부모와 같이 섬긴다는 것은
옛 성인이 밝히지 못한 일이요,
수운대선생님께서 비로소 창명하신 큰 도”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천지가 그 부모인 이치를 알지 못한 것이
오만년이 지나도록 오래 되었으니,
다 천지가 부모임을 알지 못하면
억조창생이 누가 능히 부모에게 효도하고 봉양하는 도로써
공경스럽게 천지를 받들 것인가” 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천지부모를 길이 모셔 잊지 않는 것을
깊은 물가에 이르듯이 하며
엷은 얼음을 밟는 듯이 하여,
지성으로 효도를 다하고
극진히 공경을 다하는 것은
사람의 자식된 도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부모의 포태가 곧 천지의 포태니,
사람이 어렸을 때에 그 어머니 젖을 빠는 것은
곧 천지의 젖이요,
자라서 오곡을 먹는 것은
또한 천지의 젖이니라.
어려서 먹는 것이 어머님의 젖이 아니고 무엇이며,
자라서 먹는 것이 천지의 곡식이 아니고 무엇인가.
젖과 곡식은 다 이것이 천지의 녹이니라.
사람이 천지의 녹인 줄을 알면
반드시 식고(食告)하는 이치를 알 것이요,
어머님의 젖으로 자란 줄을 알면
반드시 효도로 봉양할 마음이 생길 것이니라.
식고는
반포의 이치요 은덕을 갚는 도리이니,
음식을 대하면 반드시 천지에 고하여
그 은덕을 잊지 않는 것이 근본이 되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자, 여기 다시 ‘반포’라는 말씀이 나왔군요.
이제 결론입니다.
“한울은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은 먹는 데 의지하나니,
만사를 안다는 것은
밥 한 그릇을 먹는 이치를 아는 데 있느니라.
사람은
밥에 의지하여 그 생성을 돕고
한울은 사람에
의지하여 그 조화를 나타내는 것이니라.
사람의 호흡과 동정과 굴신과 의식은
다 한울님 조화의 힘이니,
한울님과 사람이 서로 화하는 기틀은
잠깐이라도 떨어지지 못할 것이니라.”
이 말씀은
결국 앞에서 말씀드린 유형한 이 ‘몸한울님’과
보이지는 않지만 이치와 기운으로서 간섭을 하시는 무형한 한울님은
바로 잠깐이라도 떨어지지 못하는 것이므로
항상 무형한 한울님을 봉양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그동안 잘못해 왔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한울님~” 하고 찾을 때 항상 바깥을 향합니다.
그리고 높은 곳을 향하게 되고요.
웬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그동안 어려서부터 몸에 밴 습관이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스승님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바로 여러분 현재 있는 그 자체가 한울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말씀은
내 몸 어딘가에 고상한 한울님이 숨어 있다는 말씀이 아니고
여러분 머리카락 하나 땀방울 하나 세포 하나하나가
한울님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까운 것을 버리고 멀리서 구하지 말라는 말씀은
내 몸이 바로 한울님이라는 것을 알라는 말씀인 것을
요즘 와서 새삼 느끼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여러분 몸이
바로 그렇게 애타게 찾던 한울님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한울님도 별것 아니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몸은 내가 별것 아닌 걸로 생각해 왔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스승님들께서는
바로 “입도한 세상사람 그날부터 군자 되네”,
또는 “지상신선 네 아닌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고귀한 모습을 자각하게 되면
바로 그날부터 군자 되고 신선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우리는
각자 각자가 그 자체로 가장 고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왜?
바로 한울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의심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무리 한울님이라고 해도
공부 못 하는 나,
능력 없는 나,
돈 못 버는 나,
아파서 빌빌대는 나는
여전히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승님의 말씀대로라면
공부 못 해도 나는 여전히 존귀한 한울님이고,
돈 못 벌어도 나는 여전히 고귀한 한울님이고,
아파서 빌빌대도 나는 여전히 고상한 한울님입니다.
다만 스스로 그렇게 별 볼일 없게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한울님을 잘 모시려고 하고
한시도 한울님을 위하는 생각을 놓지 않게 된다면
스스로 만족해서 화사한 미소가 얼굴에 가득하게 되는
“심독희 자부”하는 내가 된다는 것입니다.
“심독희 자부”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내 마음 속에서
저절로 기쁘고 뿌듯한 마음이 흘러 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도를 하는 기쁨입니다.
그러면 저절로 춘삼월 호시절에 태평가 불러 보세,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 좋을시고
하는 마음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한시도 도로 먹이는 생활을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항상 심고하고,
항상 식고하고,
항상 주문 외고,
또한 항상 사람이나 물건이나 나무나 꽃이나 짐승이나 벌레나 할 것 없이 한울님으로서 공경함을 늦추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인 모두
부디 한울사람으로서 항상 얼굴 가득 환한 미소가 가득하고
또한 가족 간이나 친구간이나
다같이 서로 한울사람으로 공경함을 잃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