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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서 본 ‘상윳따 니까야(Saṃyutta Nikāya)’ 7강
폭류경(Ogha-sutta)1-4
지난 시간에 마치지 못한 폭류경의 마지막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6. 이다마오짜 사 데와따. 사마눈뇨 삿타 아호시. 아타 코 서 데와따. “사마눈뇨 메 삿타” 띠 바가완땅 아비와뎃와 빠닥키낭 깟와 땃 테 아위띠.
Idamavoca sā devatā. Samanuñño satthā ahosi. Atha kho sā devatā: “samanuñño me satthā”ti bhagavantaṃ abhivādetvā padakkhiṇaṃ katvā tatthevantaradhāyīti.
6. 그 천신은 이렇게 말하였고 스승께서는 그의 말을 가상히 여기셨다. 그러자 그 천신은 ‘스승께서 나의 말을 가상히 여기 신다’고 안 뒤 세존께 절을 올리고 오른쪽으로 돌아 경의를 표한 뒤에 거기서 사라졌다.
스승께서 그의 말을 가상히 여기셨다는 것은 그의 말을 동의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부처님께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이때 말로 해서 받아들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경우에 세존께 절을 올리고 오른 쪽으로 세 번 돌아 사라졌다고 번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경전에는 세 번 절을 올렸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불교전통이 생기면서 불법승 삼보에 세 번 절하는 풍습이 생겼는데 부처님 당시에는 그냥 절을 하는 것이지 삼배를 하는 전통은 없었습니다.
인도사회는 항상 참배를 합니다. 스님이나 나이가 한 살이라도 많은 사람과 스승에게 절을 하고 오른쪽으로 도는 전통이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도는 것은 존경을 나타냅니다. 탑돌이 할 때도 오른쪽으로 돕니다. 그리고 인도에서는 존경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발을 만지고 절을 올립니다. 부처님이 고향을 방문하여 왕자시절의 부인이었던 야소다라의 방에 올라갔을 때 야소다라가 부처님 발을 만지고 절을 하면서 울었다고 합니다. 스님이나 수행자의 발을 만지고 이마에 손을 대고 인사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천신이 돌아갈 때는 그냥 가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께 보시를 합니다. 당시 꽃을 드려야한다는 전통이 있어서 천신들이 꽃을 많이 올렸다고 합니다. 상좌부(上座部) 불교인 테라와다(Theravāda)에서는 절에 가서 꽃을 많이 올립니다. 테라와다(Theravāda)라는 뜻은 장로라는 뜻의 테라(Thera)와 말씀이라는 뜻의 와다(vāda)가 합성된 언어입니다. 부처님께서 반열반에 드신 후에 가섭존자와 아난다 존자 등 500분의 아라한에 의해 1차 경전결집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현재 접하고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이들 장로의 말씀을 통해서 계승한 것이며 이러한 승가가 바로 상좌부입니다. 이때 사용한 언어가 빨리어입니다.
땃타에와 안따라다위띠(tattheva antaradhāyīti)는 ‘그렇게 해서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땃타에와(tatthaeva)는 그렇게 해서라는 뜻이고 안따라다위(antaradhāyī)는 사라져버렸다는 뜻입니다. 이때 사라져버렸다는 것은 천신이 몸을 가지고 왔는데 가지고 온 몸을 버리고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천신이 사람 몸인지 천신의 몸인지 어떤 몸으로 왔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때로는 천신이 사람의 몸을 빌려 나타나기도 합니다.
스리랑카에 부처님이 한번 오셨다는 사원이 있는데 켈러니아라는 유명한 사원입니다. 왜 오셨냐고 물으니 “스리랑카 왕에게 초정 받아 왔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오셨던 캘러니아 사원에 스리랑카 스님들이 밤에 명상하러 많이 가시는데 거기에는 밤에 천신들이 하얀 옷을 입고 빛을 내면서 왔다 갔다 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천신이 인간 세상에 올 때는 몸을 나토어서 다니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토다’는 ‘나타내다’는 우리말의 고어입니다. 부처님께서 욕계천상에 가셔서 법문을 하실 때 직접 몸이 가는 것이 아니고 신통한 힘으로 몸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세존께서 폭류를 건너기 위해 머무르지 않고 애쓰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머무는 것도 집착이고 애쓰는 것도 집착입니다. 집착을 우빠다나(upādāna)라고 하는데 달라붙는 특성이 있습니다. 원래 우빠다나(upādāna)는 연료라는 뜻이 있으며 그래서 생명의 연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연료가 윤회를 회전하게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괴로움뿐인 윤회를 끝내려면 이 연료를 주입하지 않아야 합니다.
집착은 네 가지가 있는데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이 있습니다. 둘째, 견해에 대한 집착이 있습니다. 셋째,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이 있습니다. 넷째, 유신견이라는 존재에 대한 집착이 있습니다. 어리석어서 무명에 대한 애착도 있습니다. 신통력에 대한 욕망, 선정에 대한 애착도 큰 애착입니다.
애쓴다는 것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수행입니다. 열심히 노력은 하되 애를 쓰는 노력을 하면 감각적 욕망이 개입될 소지가 있습니다. 욕망으로 인한 괴로움 때문에 수행을 하는데 다시 욕망으로 수행을 하면 바른 수행이 아닙니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애를 쓰는 행동이 악업을 지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결과가 바로 극단적 고행입니다. 극단적 고행을 하면 지성을 나약하게 하여 법을 성품을 볼 수 없습니다. 결국 애쓴 결과로 출구를 찾지 못해 또다시 윤회를 해야 합니다.
다음에 이 경과 연결된 니목카 숫따(Nimokkha sutta)라는 ‘해탈 경’을 보겠습니다.
니목카 숫따
Nimokkha sutta
해탈 경(S1:2)
니목카(Nimokkha)는 해탈이라는 뜻입니다. 해탈은 막가(magga)라고 하는 도(道)를 뜻하기도 합니다. 도(道)를 통해 중생들은 오염원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해탈이라고 합니다. 도(道)는 바른 길을 지향하는 것이고 이러한 도(道)를 통하여 결과인 과(果)에 이르면 오염원의 속박에서 벗어난 닙바나(nibbāna)인 열반에 이릅니다. 이때의 열반이 또 다른 이름으로 해탈입니다. 도는 네 가지 측면에서 조명합니다. 이것이 바로 네 가지 진리라는 뜻의 사성제(四聖諦)입니다. 사성제는 괴로움이 있는 진리인 고제(苦諦)와,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이라는 집제(集諦)와, 괴로움은 소멸하는 열반을 의미하는 멸제(滅諦)와, 괴로움이 소멸하는 길인 팔정도라는 도제(道諦)입니다.
그러므로 해탈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해탈은 열반이라고 하는 닙바나(nibbāna)와 같은 뜻으로 사용합니다. 열반은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도과를 성취해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 되었을 때의 상태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태가 내가 무엇을 얻었다고 하는 정신적인 지위를 뜻하는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어서 구도자들은 닙바나(nibbāna)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때 일반적으로 열반 대신에 해탈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2. 아빅깐 따 완나 께와라깝빵 제따와낭 오바셋와 예나 바가와 떼누빠상까미. 우빠상까밋와 바가완땅 아비와뎃와 에까만땅 앗타시. 에까만땅 디따 코 사 데와따 바가완땅 에따다보짜.
abhikkantavaṇṇā kevalakappaṃ jetavanaṃ obhāsetvā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aṭṭhāsi. Ekamantaṃ ṭhitā kho sā devatā bhagavantaṃ etadavoca:
2. 그때 어떤 천신이 밤이 깊었을 때 아주 멋진 모습을 하고 온 제따 숲을 환하게 밝히면서 세존께 다가왔다. 다가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선 그 천신은 세존께 이와 같이 여쭈었다.
3. 자나시 노 뜨왕, 마리사, 삿따낭 니목캉 빠목캉 위에깐띠?
자나미 크와항 아우소 삿따낭 니목캉 빠목캉 위에깐띠
야타까탕 빠나 트왕, 마리사, 자나시 삿따낭 니목캉 빠목캉 위에깐띠?
Jānāsi no tvaṃ, mārisa, sattānaṃ nimokkhaṃ pamokkhaṃ vivekanti?
Jānāmi khvāhaṃ, āvuso, sattānaṃ nimokkhaṃ pamokkhaṃ vivekanti.
Yathākathaṃ pana tvaṃ, mārisa, jānāsi sattānaṃ nimokkhaṃ pamokkhaṃ vivekanti?
3. 세존이시여, 당신은 존재들의 해탈과 자유와 떨쳐버림을 알고 계십니까?
벗이여, 나는 존재들의 해탈과 자유와 떨쳐버림에 대해 알고 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어떻게 해서 당신은 존재들의 해탈과 자유와 멀리 떠남에 대해 아십니까?
경전 본문에 나오는 중요한 단어를 살펴보겠습니다.
자나시 노 뜨왕(Jānāsi no tvaṃ)에서 자나시(Jānāsi)는 ‘알다’이고 노(no)는 ‘~인지’이고 뜨왕(tvaṃ)은 ‘당신’입니다. 마리사(mārisa)는 세존을 호칭하는 말입니다. 다음으로 삿따낭(sattānaṃ)은 ‘존재들’을 뜻합니다. 삿따(satta)는 매달린, 집착하는, 존재, 생물, 중생, 유정(有情), 살타(薩陀)라는 다양한 뜻으로 쓰입니다. 그래서 ‘세존이시여, 당신은 존재들의 ~인지 알고 계십니까?’입니다.
니목캉(nimokkhaṃ)은 ‘해탈’이고, 빠목캉(pamokkhaṃ)은 ‘자유’이고 위에깐(vivekan)은 ‘멀리 떠남’, ‘떨쳐버린다’는 뜻입니다. 위에깐(vivekan)은 분리, 멀리 떠남, 떨쳐버림, 휴식을 말하며 ‘쉬겠습니다’라고 할 때도 쓰입니다.
그래서 첫 문장은 ‘세존이시여, 당신은 존재들의 해탈과 자유와 떨쳐버림을 알고계십니까?’입니다. 여기서 해탈을 의미하는 니목캉(nimokkhaṃ)과 자유를 의미하는 빠목캉(pamokkhaṃ)과 떨쳐버림을 의미하는 위에깐(vivekan)이란 세 단어는 모두 열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열반에 이르면 모든 존재들이 괴로움에서 해탈하고 자유롭고 세속의 모든 속박을 떨쳐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자나미 크와항(Jānāmi khvāhaṃ)은 ‘나는 분명히 안다’입니다. 아우소(āvuso)는 ‘벗이여’, ‘존자들이여’, ‘도반이여’라는 뜻입니다. 아우소(āvuso)는 비구들이 대화할 때 사용하는 정중한 호칭입니다. 또는 동료나 아랫사람에게 사용하는 호칭이기도 합니다.
니목캉(nimokkhaṃ)은 해탈인데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라고 할 때의 도(道)인 막가(magga)를 뜻합니다. 도를 통해 존재들은 번뇌라는 오염원의 속박(kilesa-bandhana)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해탈이라고 합니다. 바른 길을 지양하는 도(道)가 있으면 열매라는 결과로써의 과(果)가 있습니다. 이때의 과(果)가 자유를 뜻하는 빠목캉(pamokkhaṃ)입니다. 이러한 도과(道果)가 닙바나(nibbāna)라고 하는 열반입니다. 그래서 ‘벗이여, 나는 존재들의 해탈과 자유와 떨쳐버림에 대해 알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벗어남(nimokkhaṃ)은 수다원도, 사담함도 할 때의 도(magga)를 뜻합니다. 도를 통해 중생들은 오염원의 속박(kilesa-bandhana)에서 풀려나기 때문에 도를 ‘벗어남’이라고 합니다. 과를 ‘풀려남(pamokkha)'이라 하고, 중생들은 열반을 얻은 뒤 모든 괴로움을 떨쳐버리기 때문에 열반을 ’떨쳐버림(viveka)'이라 합니다. 이 셋은 모두 열반의 다른 이름입니다. 열반을 얻은 뒤 존재들은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풀려나고 떨쳐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천인에게 ‘벗이여, 나는 존재들의 해탈과 자유와 떨쳐버림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4. 난디바와빠릭카야, 산냐윈냐나상카야,
웨다나낭 니로다 우빠사나, 에왕 크와항 아우소 자나미.
삿따낭 니목캉 빠목캉 위에깐띠.
Nandībhavaparikkhayā, Saññāviññāṇasaṅkhayā;
Vedanānaṃ nirodhā upasamā, Evaṃ khvāhaṃ āvuso jānāmi;
Sattānaṃ nimokkhaṃ pamokkhaṃ vivekanti.
4. 생성의 즐거움에 뿌리박은 존재를 소멸해버렸고, 인식과 아는 마음과 행을 모두 부수었고, 느낌들이 소멸하고 가라앉혀버렸노라. 벗이여, 그러므로 나는 이제 존재들의 해탈과 자유와 떨쳐버림을 안다.
마지막 문장에서 난디 바와 빠릭 카야(Nandībhavaparikkhayā)는 ‘생성의 즐거움에 뿌리 밖은 존재를 소멸해버렸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난디(nandī)는 갈애를 말하고 갈애를 바탕으로 한 업의 존재를 끝냈다는 말입니다. 바와(bhava)는 생성을 의미합니다. ‘생성의 즐거움에 뿌리 밖은 존재’라는 말은 유(有)라는 뜻입니다. 난디 바와(Nandībhava)는 2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즐거움에 뿌리박은 업으로서의 존재인 업유(業有)가 소멸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즐거움이 소멸하고 결국 존재가 소멸했다는 뜻입니다.
업을 지으면서도 계속 윤회가 되고 욕계, 색계, 무색계에 애착을 가지면서 윤회하게 됩니다. 색계, 무색계는 업을 짓지 않지만 존재에 대한 애착이 있어서 윤회하게 됩니다. 그래서 생사를 거듭하면서 윤회합니다. ‘윤회를 없애는 방법을 나는 안다.’는 것은 업의 존재와 존재에 대한 즐김을 소멸하는 길을 나는 안다는 것입니다. 빠릭 카야(parikkhayā)는 소멸한다는 뜻입니다. 주석서에서는 3가지 존재에서 갈애를 부순다고 하는데 욕계의 존재와 색계의 존재와 무색계의 존재를 부순다는 뜻입니다.
산냐(Saññā)는 오온의 상(想)이고, 윈냐나(viññāṇa)는 오온의 식(識)으로 아는 마음이고, 상카야(saṅkhayā)는 오온의 행(行)으로 의도, 또는 깜마(kamma)인 업(業)을 말합니다. 웨다낭 니로다 우빠사마(Vedanānaṃ nirodhā upasamā)에서 웨다낭(Vedanānaṃ)은 즐거움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말합니다. 니로다(nirodhā)는 소멸을 뜻하는데 억제, 제어, 파괴 등의 뜻으로 쓰입니다. 우빠사마(pasamā)는 고요, 평화, 적정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가라앉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느낌들이 소멸하고 가라앉혀버렸노라.’입니다. 결국 오온의 수, 상, 행, 식이 모두 소멸한 것을 말합니다. 결국 마음과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 식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오온의 나머지인 색도 소멸한 것을 말합니다. 오온을 가진 상태에서 오온이 소멸한 것은 유여의 열반이고 마지막에 다시 태어남이 없는 오온의 소멸은 무여의 열반입니다.
이 경은 색계 천신들과의 대화입니다. 천신이 묻기를 어떻게 존재들이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풀려날 수 있는지 떨쳐버릴 수 있는지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4가지 폭류인 오거(ogha)를 얘기하고 여기서 더 집중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갈애입니다. 이들 경에서 공통적인 단어는 갈애와 애착입니다. 갈애와 애착을 떨쳐버려야 하고 애착은 극단을 취하면서 생긴다고 말씀하십니다.
부처님께 질문한 천신은 욕계 천신이 아니고 색계 천신이라서 과거에 선정수행을 한 천신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질문하는 천신이 현재 어느 천상에 머물고 있는가에 따라 질문의 내용이 다릅니다. 천상은 다양한 천신들이 있기 때문에 자세하게 살펴보면 질문하는 내용의 차이가 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우빠니야 숫따
Upanīya sutta
덧없음 경(S1:3)
1. 사왓띠양 아타 코 사 데와따 바가와또 산띠께 이망 가탕 아바시.
Sāvatthiyam-Atha kho sā devatā bhagavato santike imaṃ gāthaṃ abhāsi:
1. 그 천신이 한쪽으로 물러서서 세존의 앞에서 이와 같이 게송을 읊었다.
2. 우빠니야띠 지위따 맙빠 마유, 자루빠니땃사 나 산띠 따나.
에땅 바양 마라네 뻮카마노. 뿐냐니 가이라타 수카와하니띠.
Upanīyati jīvitamappamāyu, Jarūpanītassa na santi tāṇā;
Etaṃ bhayaṃ maraṇe pekkhamāno, Puññāni kayirātha sukhāvahānīti.
2. 삶은 덧없이 사라지고 생명은 짧네. 늙음에 휩쓸린 자에게 보호란 없으니,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행복을 가져올 공덕을 지어야 하네.
바가와(Bhagavā)
세존
3. 우빠니야띠 지위따 맙빠 마유, 자루빠니땃사 나 산띠 따나.
에땅 바양 마라네 뻭카마노, 오까미상 빠자헤 산띠뻭코띠.
Upanīyati jīvitamappamāyu, Jarūpanītassa na santi tāṇā;
Etaṃ bhayaṃ maraṇe pekkhamāno, okāmisaṃ pajahe santipekkhoti.
3. 삶은 덧없이 사라지고 생명은 짧네, 늙음에 휩쓸린 자에게 보호란 없으니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평화를 찾는 자, 세속적 미끼를 버려야 하네.
앞의 두 개의 경은 비슷한 얘기로 이루어졌는데 이 경은 죽음으로 휩쓸려 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빠니야띠(Upanīyati) ‘끝나다’, ‘지나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삶이 덧없이 사라지다’입니다. 또는 다가간다는 것으로 차츰 죽음으로 다가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치 목동이 소떼를 몰고 가듯이 늙음에 의해 죽음의 곁으로 인도되는 것을 말합니다. 지위따(jīvita)는 ‘생명’, ‘수명’, ‘목숨’을 말하고 마유(māyu)는 ‘짧다’는 뜻입니다. 결국 세월은 속절없이 빠르게 지나가고 끊임없이 변해서 무상하며 허공을 나는 새처럼 아무 자취도 남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많이 살면 100년 삽니다. 그것은 굉장히 짧은 순간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도 순간이라고 하지만 순간이 아니라고 합니다. 과거, 미래, 현재에 매달리려고 하는데 존재하는 것 같지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처님은 이 경에서 말씀하십니다. 100년이라는 시간은 인간들 입장에서는 긴 것이지만 천상에서 보면 긴 것이 아닌 짧은 시간입니다.
자루빠니땃사(Jarūpanītassa)는 ‘늙음에 휩쓸린다’는 말입니다. 누구나 죽음을 향해 갑니다. 이런 과정에서 누구의 보호도 받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천신은 죽음에 직시하면서 공덕을 지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고 죽음에 휩쓸립니다. 숨을 들이 마시는 자체가 들이마시면서 내쉬어야 하는 것입니다. 명상하면서 일어남 사라짐을 보는데 들숨날숨에서 들이마시고 내쉰다는 자체가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매달릴 수 있는 길은 오직 공덕을 쌓는 일입니다. 공덕을 짓게 되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행복을 가져옵니다. 뿐냐니 까이라타 숙카와하니(Puññāni kayirātha sukhāvahānī)는 ‘행복을 가져올 공덕을 지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공덕을 지으면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천신의 게송에 대해 방편적으로 말씀을 하십니다. 처음에는 공덕을 많이 지은 색계 천신이 왔으므로 당신이 공덕을 지었으니 색계 천신이 된 것이라고 칭찬을 해 주십니다. 그런 뒤에 다음 단락에서 방금 전 칭찬하신 말을 잘라버리고 다른 말로 바꾸십니다. 당신이 공덕을 많이 지어서 색계에 갔는데 또 공덕을 지으라고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당신이 공덕을 지어서 천신이 된 것은 맞지만 정작 중요한 사실은 세속적인 미끼를 버리는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바꾸어서 하신 이 말씀이 바로 로까미상 빠자헤(Lokāmisaṃ pajahe)로 ‘세속적 미끼를 버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때 세속적 미끼는 욕계, 색계, 무색계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색계 천신은 선정수행을 해서 출세간의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출세간의 진리인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나도록 세속의 감각적 욕망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욕계, 색계, 무색계의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은 2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속적 미끼라는 비유적인 의미의 방편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문자적인 의미의 비방편이 있습니다. 비유적인 어법의 방편을 빠리야야(pariyāya)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세속의 미끼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문자적 의미의 비방편은 닙빠리야야(nippariyāya)라고 하는데 ‘바꿀 수 없는 것’, ‘다른 교설이 아닌 것’으로 열반을 얻기 위한 실질적인 물품들을 말합니다.
비유적인 의미에 따르면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를 윤회하는 것이 세속적 미끼입니다. 하지만 문자적 의미에 따르면 수행에 필요한 네 가지 필수품인 의복, 거처, 음식, 약품입니다. 사실 이런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수행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네 가지는 실질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로까미상(Lokāmisaṃ)이라는 세속적 미끼는 성취를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비유적 의미이고, 문자적 의미의 비방편은 빠리닙빠나(parinibbāna)로 반열반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부처님께서는 천신에게 공덕을 지으면서 삼계를 떠도는 끝없는 윤회하지 말고, 평화를 찾는 자(santi-pekkha)는 세속적 미끼를 버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평화는 빠리닙바나(parinibbāna)를 말하는데 산띠(santi)는 깨달음이라는 뜻의 열반이라는 닙바나(nibbāna)와 비슷한 단어입니다. ‘평화를 찾는 자’라는 뜻의 산띠 뻭카(santi pekkha)는 열반이라고 일컬어지는 지극한 평화를 찾고, 원하고, 추구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은 삼계의 존재에 대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처음에는 따뜻하게 공덕을 칭찬해 주시고 다음에는 존재에 대한 애착을 버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색계에 있는 천신들이 욕계 천신들과 인간들을 비난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색계 천신들이 인간들에게 너희들은 공덕을 좀 많이 짓지 100년 살려고 이렇게 고생 하느냐고 비웃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자만하는 생각을 지워주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선정수행을 해서 색계에 사는 천신은 주로 혼자서 삽니다. 욕계에 사는 천신은 아직 감각적 욕망이 있으므로 모여서 삽니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쓸 때 공덕을 떠올립니다. 공덕을 가지고 산다는 자체가 행복을 말합니다. 축복경인 망갈라 숫따(Maṅgala sutta)에 전생에서 공덕을 지었던 것은 금생에 행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생에서 공덕을 지었기 때문에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환경을 공덕에 의해서 누리고 있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행도 공덕인데 선정을 닦은 분들은 색계, 무색계에 태어납니다. 일반적인 공덕은 욕계 육욕천과 인간으로 태어납니다. 욕계는 명상과 관련 없고 종교와도 관련이 없습니다. 하지만 10바라밀을 닦으면 도솔천에 태어납니다. 그러나 윤회가 끝나는 열반은 사성제와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는 팔정도 명상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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