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부터 계간 음악학 전문잡지 낭만음악에 신작악보 코너를 이건용 선생님과 함께 맡아 쓰게 되었습니다. 2001년 여름호에는 작곡가 이용주의 가곡을 실었고, 겨울호에 제1회 신동일의 작곡마당에서 발표된 이지연의 피아노곡 "시계와 거북이"를 실었습니다. 게시판에 악보까지 실을 수는 없고 글만 올리겠습니다.
신작악보 이지연의 "시계와 거북이"
작곡가 이지연은 서울예술고등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피아노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전형적인 단계를 밟아 작곡 교육을 받았고, 학교를 통해 배운 음악과 작곡에 관련된 지식에 대하여 한 점 의문을 품어 보지 않은, 그의 이력으로 보면 지극히 평범한 작곡가라고 할 수 있다.
작곡가 이지연을 알게 된 것도 사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학생이 운영하고 있는 인터넷의 한 작곡 동호회의 발표회를 도와줄 기회가 있었는데 이지연이 발표회에 참가하게 되었고, 발표회의 준비 모임을 가지면서 처음 그를 알게 되었다. 처음 만난 그에게 그다지 관심을 가질만한 부분도 없었다. 이지연 스스로도 이야기하듯이 작곡 공부를 하는 동안 한 눈 팔지 않고, 정상적이면서 전형적인 코스로 음악 공부를 했다. 지금은 대학원 재학 중 시작한 피아노학원을 지금도 운영하고 있는 평범한 가정 주부일 뿐이었다.
이지연은 대학원 졸업 후 진로가 불투명해지면서 결혼과 함께 작곡을 포기했었다. 집안 살림과 학원 운영에 전념하는 동안 자기 내부로부터 어떤 질문을 받은 듯 하다. 자기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 무엇인가? 음악과 작곡은 자기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이지연은 이런 자신에 대한 이런 질문들을 통해 자기 내부에 담긴 어떤 욕구를 새롭게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작곡에 대한 열망이 최근 되살아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지연을 처음 만났을 때는 그 자신도 아직 스스로의 마음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학업을 마치고 음악계 밖으로 밀려나 있던 그에게 인터넷 공간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동호회의 첫 발표회는 이지연에게 개인적으로 상당히 소중한 것이었다. 이 발표회를 준비하면서 그와 인터뷰한 내용의 일부를 소개한다.
신동일 님 음악에서 있어서 의사소통의 중요성에 대한 의견을 듣고 음악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에 대해 저도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는데 결론적으로 저에게는 있어서는 음악에서의 의사 소통이 별로 중요하지 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언어가 다른 두 사람의 정확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느낌의 표현으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제가 연주자에게 요구하는 것이며 청중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제가 쓴 작곡기법과 그 밖의 것이 아무리 이해될 수 없는 것이라도 연주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느낌으로 청중에게 그 곡을 이해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저의 의도는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혹 청중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음악의 절대적이며 순수한 미적 가치가 있음을 확신하며 그것을 추구합니다.
저는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현대적 작곡기법에 의해 곡을 쓸것이며 지금의 다른 사람들이 제시한 작곡기법을 모방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아직은 찾지 못한 나만의 독창적인 작곡기법을 찾는 여행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이 조그만 발표회에서 젊은 작곡가들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하고 만들어낸 것이 "신동일의 작곡마당"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작곡발표회였고, 이 공연에서 이지연의 피아노 독주곡 "시계와 거북이"가 피아니스트 신민정에 의해 초연되었다.
2001년6월2일 마루홀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열린 첫 번째 "신동일의 작곡마당"은 참여한 작곡가들의 독특한 이력과 청중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적극적인 진행 방식, 발표 작품의 양식적 다양성 등 기존 작곡발표회와 차별되는 공연의 독창적인 면모 때문인지, 공연 규모에 비해서는 언론과 일반 청중들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었고, 세상과 처음 대면한 작곡가 이지연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신동일의 작곡마당" 이후 이지연은 더 이상 평범한 작곡가가 아니었다. 창작 활동을 하는 피아노학원 원장은 특수한 경우다. 더구나 이지연은 학교에서 전수 받은 학구적인 음악 어법을 절대로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는 현대음악의 아카데미즘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한다. 기성 작곡동인이나 학교를 중심으로 한 여러 작곡발표회에서야 아카데믹한 작품들이 주로 발표되지만, 생활인으로서 학구적인 자세로 창작 활동을 계속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결국 한 음악신문과 인터뷰까지 하게 되었는데, "훌륭한 현대음악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고전에 비해서 친숙치 않은 것은 현대음악을 무작정 외면하고 비판하는 전문가의 영향이 크다"며 "현대음악이 대중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서기 위해서는 현대음악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수준 향상과 더불어 현대음악이 좋고 나쁘고를 판단하기 전에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자신의 창작곡에 대한 견해를 피력했다.
이지연의 피아노 독주곡 "시계와 거북이" 역시 서구 현대음악 어법에 근거하고 있다. 이 곡은 작곡가의 자전적인 작품으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지연의 현재 작업은 음악을 통한 자기 찾기에 있고, 이 작품은 그 첫걸음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그는 "시계와 거북이"를 작곡하게 된 계기와 관련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저는 인격적으로 상당히 미성숙합니다. 늘 실수하면서도 조금의 실수에 지나치게 자신을 학대하거나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은 경우에는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초조해해서 쉬어야 할 시간에도 쉼을 누리지 못하곤 합니다. 물론 저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런 현실에 너무 슬프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TV위의 시계를 보고 왠지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슬픈 나의 모습이 그곳에 있더군요. 하염없이 그 시계를 바라보고 있는데 TV에서 '동물의 왕국' 같은 프로그램을 하더군요. 그때 느리디 느린 거북이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부럽고도 자유스러워 보였는지, 저는 그 순간만큼은 행복했답니다. 그것이 이 곡을 쓰게 된 동기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느린 마음의 자유를 간곡히 소망합니다. 제 평생의 소망입니다.
"시계와 거북이"는 악상이 단순하면서도 독특한 작품이다. 표제를 가진 작품이어서 어느 정도 표제의 이미지를 음악적으로 묘사하기도 하면서도, 모든 부분이 절대음악적 입장에서 다뤄지고 있으며, 구성 면에서도 잘 조절되어 있는 곡이다. 전체가 짧은 세 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는데 각각 부제가 붙어 있다. 1악장은 초조한 시계, 2악장은 세상에서 가장 느린 거북이, 3악장은 행복한 시계이다.
1악장 "초조한 시계"에서는 째깍거리는 시계의 이미지를 묘사적으로 표현하면서 점점 긴박하게 음악을 몰아간다. 2악장 "세상에서 가장 느린 거북이"에서는 느리게 움직이는 거북이를 표현하고, 3악장 "행복한 시계"에서는 변화해 가는, 또는 희망하는 작곡가 자신의 모습을 그린다. 이지연은 자기 자신이 아직 불완전한 모습이기 때문에 3악장에서 완전하게 행복해 지지는 못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시계와 거북이"를 통해 '자기'를 솔직하게 드러내면서 청중에 대해 대단히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공연 당시 관객의 반응은 현대적인 어법에 대한 여전한 반감도 없지 않았지만, 작곡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상당히 전달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신동일의 작곡마당"이라는 음악회의 성격 자체가 워낙 음악을 통한 청중과의 의사 소통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지연은 작품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최대한 보여주려고 노력하면서, 작품이 올려지는 무대에 대해서도 성실한 자세로 정성을 쏟았다. 그는 인터뷰에서 "신동일 선생의 도움으로 사고의 편협함과 작곡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했다"고 이야기했는데, 세상과 음악에 대해 변화해 가는 자신을 자기 작품에 담아내고 청중에게 그 의미를 적극적으로 전달하려고 노력한 결과, 음악에서 의사 소통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던 작곡가가 현대음악 어법을 통해서도 청중과 소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작곡가 자신이 작품해설을 대신해 쓴 글로 마무리한다. 이지연은 이제 작곡가로서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고, 새로운 작업을 계속 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작곡과를 졸업하면서 더 이상 작곡을 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될 것이며, 작곡을 왜, 어떻게 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답안을 제시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옛날에 시계가 한 마리 살고 있었습니다.
그 시계는 자기자신의 시계추 소리에 늘 초조하고 불안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시계는
세상에서 가장 느리다는 행복한 거북이를 만났습니다.
그 둘은 서로를 바로 알아보았습니다.
그래서 거북이는 시계를 삼켜버렸습니다.
이제 시계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할 것입니다.
시계는 늘 초조합니다.
그래서 시계는 언제나 불행합니다.
그 시계가 꿈꾸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느리다는 행복한 거북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거북이가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