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기 훈련
김은미
남한산성 아래에 사는 지인 집에서 하룻밤 묵은 적이 있다. 다음 날 아침 그녀가 남한산성을 같이 올라가자고 하였다. 나는 압박 골절된 허리에 무리가 간다는 이유를 대며 입구까지만 가기로 하고 오르막길이 시작되는 곳에서 같이 되돌아왔다.
오래전, 악몽 같은 극기 훈련 때 내 키보다 더 큰 숲길을 헤치며 밤새 걸었던, 끔찍했던 기억과 석유 마신 기억이 떠올랐지만, 그때의 얘기는 하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 스물한 살 신입사원 때 부서 대표로 가을 극기 훈련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내가 몸 담고 있던 직장 S그룹에서는 봄, 가을에 극기 훈련을 하였는데 가을에는 고강도의 훈련을 진행했다. 선배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본인들도 신입 때 다녀왔으니 이번엔 내 차례라며 모두가 나의 지원을 반겼다. 30km 야간 산악 행군이라는데 나는 그 거리가 가늠되지 않았다. 시골 출신이라 도시 출신보다는 걷기에 자신이 있을 것 같은 빈 자신감마저 충만했다.
이 판단 탓에 스스로 무덤을 파게 될 줄이야...
집결지까지 혼자서 어떻게 찾아갔는지 모르겠다. 그곳이 어디였는지 경기도권의 어느 초등학교라는 기억밖에 없다.
그곳에는 다른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아는 직원도 있었고 동기도 몇 명 있어서 내심 마음이 놓였다. 운동장에 모여 팀을 나누고 지급된 도시락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팀별로 긴 새끼줄을 묶어서 하나씩 나눠줬다. 어릴 때 많이 했던 기차놀이가 생각나 우습기도 했고 재밌기도 했다. 팀별로 움직이는 터라 길이 없는 숲속을 헤치기도 하고 혹시 모를 이탈자를 대비하여 이걸 꼭 사용해야 한다는 설명을 했다. 새끼줄 속으로 들어가 군대를 갓 제대한 직원이 맨 앞에서 끌고 나머지 팀원은 뒤를 따르기로 했다.
옆 팀에 새끼줄 안에 들어가 있는 동기와 눈을 마주치고는 서로의 모습에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그때까지는 그랬다.
꽤 많은 팀이었는데 참가자가 몇 명쯤이었는지 기억은 없다. 최종 도착지는 아침 7시 남한산성이다.
출발하기 전 남자 직원들은 30km 야간 산악 행군이 군인들도 힘든 코스라며 겁을 주었다. 갑자기 자신감은 바닥에 떨어지고 뒤따라올 119차에 실려 가지 않기만을 바라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나는 사전 준비물에 대해 들은 바가 없어 빈손으로 참여했다. 워낙 덤벙인 데다가 산행은 그해 봄 단합대회 때 울고 넘는 박달재를 무리 없이 올라갔던 경험이 있어 안심하던 터였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어느 마을을 지나가는데 굴뚝에서 피어나는 연기가 한데 모아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그곳에서 편안한 저녁을 맞고 있을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물 한 병 없이 밤새 산길을 걷고 길이 없는 곳은 사람 키보다 더 큰 풀숲을 헤치며 목적지를 향해 찾아갔다. 두 갈래 길에서는 나뭇가지에 회사명이 쓰인 노란색 리본이 묶여있는 쪽으로 갔다. 장소 곳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지휘관이 미션을 주면 전원이 해결해야 그 코스를 통과할 수 있었다. 이렇게 힘든 훈련이 꼭 필요한 것인지 이런 훈련을 받아야만 애사심이 고취되는지 의문을 품으며, 별생각 없이 훈련에 지원한 걸 후회 했다.
지쳐갈 무렵 어느 한 장소에서 전체가 모여 간단한 게임을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걷고 걸었다. 몸은 이미 내 몸이 아니고 눈은 감겼고 발은 자동으로 기계처럼 움직였다.
굽이진 좁은 산길을 돌아갈 때 허리띠보다 좁은 계곡에 한가하게 흐르고 있는 오아시스를 만났다. 몇몇 남자 직원들은 한 손으로 물을 떠 마시며 갈증을 해소했지만 나는 그 물을 마실 용기가 없었다. 목이 말랐지만 참았다. 반 정신을 잃고 새끼줄에 매달려 따라만 가는데 거짓말처럼 해가 떠오르고 손목시계는 아침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는 그때 모두가 멍한 상태에서 남한산성 성곽을 오르고 있었다.
도착지에 물통 두 개가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그곳으로 달려갔다. 옆에 컵이 있고 모르는 남자 직원이 물을 따르고 있어 나부터 달라고 하였다. 한 모금 벌컥 마셨는데 석유 냄새에 놀라 컵을 내던졌다. 석유통을 가져다 놓은 직원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어! 그거 석유인데~” 하며 나를 보다가 몸이 정지돼있었다. 그것은 피날레를 위한 캠프파이어용 석유였는데 당연히 물일 거라고 그냥 마셨던 거다. 갑자기 내 몸 안에서 석유 냄새가 올라오고 금방이라도 불이 나서 타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컵을 건네줬던 직원도 놀라면서 “석유 먹으면 몸속에 회충이 죽어서 좋아요. 일부러도 먹는데 잘됐다고 생각하세요” 하는 거다. 그 말이 그때는 그 어떤 말보다 위로가 되었다. 내가 석유를 물인 줄 알고 마셨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나는 얼굴을 들고 다니기가 부끄러워 캠프파이어 때도 땅만 보고 다녔다. 그 이후 남한산성은 석유 냄새를 다시 생각나게 하는 아픈 기억이 떠올라 가지 않았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은 군대 근처에도 가지 않고 그 방향으로 오줌도 안 눈다는데 나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고나 할까.
그토록 힘들었던 훈련이었지만, 지금은 뿌듯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한창 전성기였던 그 시절, 내 인생의 한 페이지를 깊게 장식한 훈련은 다시 하기 어려운 값진 경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직 그날의 견딤을 잊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나의 내면 깊숙한 저력底力으로 자리하여 지금까지 잘 쓰이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날, 가까운 직원들과 남한산성 수어장대 앞에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찍은 기념사진을 보면 일곱 명 모두가 초췌한 모습이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사진 속의 몇몇 직원들의 근황이 궁금해진다. (23.01)
약력
전남 신안 출생
2021년 월간수필문예지 『한국산문』 등단
한국산문작가협회 회원 강서문협 회원
동인지 『목요일 오후』 『산문로 7번가』 참여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