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그것은 이별의 무게 때문이 아니고 그 기억 때문이다.
[시민포커스=조한일 기자]
소파를 보내며
정용국
취한 몸도 받아주고 게으름도 참아주며
살벌한 전시에는 안방이 되어주던
말귀도 훤할 듯하다 솔기 터진 저 화상
살갑던 웃음소리 날이 섰던 말다툼에
풀 없이 주저앉던 실망의 무게까지
모른 척 버티던 다리도 힘에 겨워 울었다
얼룩진 팔걸이에 모처럼 코를 묻고
마지막 네 품에다 몸을 맡겨 보는 밤
옹색한 변명이 길다 너그럽던 꿈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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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는 지독히도 많은 변명을 먹고 살다 떠났다. 편식과 과식이 주된 원인이었으므로 체형도 자꾸만 형편없이 변해 갔다. 무게를 견디고 온갖 시름을 삼키며 선잠도 내어주던 그. 손도 팔도 없는 것이 그렇게 다 품어주고 귀도 없는 것이 다 들어주고 눈도 없는 것 다 보아주던 바보도 그런 바보가 없다. 미련곰탱이랄까?
자정 무렵 한숨 한 번에 ‘솔기’도 한 번 터지고 술 냄새에 가죽도 덩달아 취한 척도 해주고 ‘게으른 주인’의 눈높이에 맞춰 퍼질러 누운 척하던 그 ‘화상’을 보내고 말았나 보다.
소파는 희로애락이 집약된 전시장이며 시인이 말하는 ‘전시’에는 작전사령부가 된다. 피 터지는 안팎의 전황을 철저히 혼자서 때로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와 함께 적의 동태에 대해서 식음을 전폐하고 살아남기 위한 어설픈 작전을 짜기도 한다. 물론 집안에서 일어나는 시가전에서도 치명상을 입기도 한다.
집안의 모든 집기 중에 삶의 무게를 가장 많이 견디는 것이 소파다. 푹 꺼진 소파가 보유한 체형의 가해자인 시인은 소파에서 들리는 울음소리마저 세파에 많이 약해졌을 청력에도 이명을 뚫고 기어이 듣고 있다. ‘버티다’ 못한 울음을 듣는 것만으로도 떠나보내는 그와의 이별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별에도 무게가 있다. 떠난 뒤 그 무게를 견딜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남겨질 뿐이다.
‘마지막 네 품에다 몸을 맡겨 보는 밤’에서 보듯 살아가면서 몸을 맡길 수 있는 품은 우리에게 얼마나 있을까? 바이러스처럼 자라나는 삶의 변명에 나를 던져도 내가 쓰러져도 내가 한없이 작아져도 끌어 앉아주던 소파라는 너그러움의 완전체.
보내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그것은 이별의 무게 때문이 아니고 그 기억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