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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낫과 망치, 달러 뭉치, 그리고 초승달
파키스탄이 탈레반 정권에게 넘어가고 신장위구르 지역에서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의 동투르케스탄 이슬람 운동이 권력을 잡으면서, 중앙아시아 방면에 새로운 위협이 도사리게 되었습니다. 타지키스탄 공화국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1998년 1월 9일 두샨베 대통령궁에 이슬람주의에 경도된 군사병력이 당도, 에모말리 라흐몬 대통령을 축출하고 신정부를 수립, "신은 오직 한 분이시며 무함마드는 그의 예언자이다!"를 외치며 성전의 서막을 알렸습니다. 하루아침에 권좌에서 내쫓기고 산악 게릴라로 전락한 라흐몬 대통령은 근방 공화국인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로 향해 연방정부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는 1991년 8월 위기 이후 연방의 결속에 닥친 최대의 위협이었습니다. 카자흐스탄의 나자르바예프, 우즈베키스탄의 카리모프, 투르크메니스탄의 니야조프 등 근방 지역의 수반들 역시 이 사태에 경악했고, 즉시 공화국회의 비상회기가 소집되었습니다.
대처에 나선 연방정부와 각 공화국 수반들은 우선 "배후를 알아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습니다. 일단 파키스탄이 직접적인 후원자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문제는 2중 3중의 경제봉쇄를 당하고 있는 파키스탄이 무슨 수로 연방 내 공화국에까지 대규모의 세력투사를 감행할 수 있었는 지에는 의문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1차 조사 결과, 사우디아라비아 국적자의 명의로 파키스탄 정보부에 정기적으로 다량의 자금을 입금했다는 내역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수상한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죠. 내역이 지나치게 깔끔해 작위적으로 보일 정도였고, 그들이 정부 주도로 이런 대형사고를 칠 정도로 무모한 집단은 아니었습니다. KGB의 국내방첩담당 제2총국장 블라디미르 푸틴은 "누군가 사우디를 의심하게끔 유도하고 있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정부 고관들 역시 그러한 의심에 수긍했고, '진짜 배후'를 찾기 위한 추가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아미나트가 아프가니스탄의 굴부딘 헤크마티야르에게 조언을 구한 결과 이는 일본의 행위임이 유력했습니다. 모든 이들이 격분했죠. 핵탄두를 실은 공군 폭격기로 일본 영공을 위협비행해 강력히 압박하자는 의견이 채택되려 할 때, 또 다른 정보가 입수됐습니다. 엔화 자산이 파키스탄에 대량 유입된 것은 맞지만 그 매개체는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정부였다는 것입니다. 분명 수하르토에 대항하는 반정부 세력에는 파키스탄이 후원하던 이슬람주의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도 말이죠. 이상했습니다.
아미나트와 안드레이가 KGB와 협력해 조사해본 결과, 일의 전모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일본은 공적개발원조 명목으로 인도네시아에 자금을 제공했으나 궁지에 몰린 수하르토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소탕에 '조력을 받는' 조건으로 해당 자금을 파키스탄에 넘겨 버린 것입니다. 파키스탄에서 정보를 얻은 수하르토와 인도네시아 국가정보국(ISIA)은 효과적으로 이들을 제거할 수 있었고, 파키스탄은 안전자산인 엔화로 다량의 물자와 무기를 구해 중앙아시아에 뿌려댄 셈이었죠. 이를 나중에야 알게 된 일본은 황급히 자신들의 책임을 지우기 위해 사우디의 소행으로 위장하는 공작을 실행했던 것이었습니다.
오해와 무능, 진심이 뒤얽힌 이 황당한 사태에 연방정부는 일본을 위협하기보다는 그들의 약점을 잡고 극한의 실리를 추구하기로 했습니다. 알렉세이는 일본 내각 요인들을 만나 "이 건은 묻어줄테니 대 파키스탄 작전의 전비를 전액 조달해달라"는 딜을 맺고 왔습니다. 중앙아시아 등 이슬람교 다수지역에 극단주의가 발흥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이슬람 사회주의로 현지 공산당 당론을 개편하고, 아프가니스탄 와칸 회랑 지역에 대한 출입통제를 현지 협조를 통해 강화하며, 파키스탄에는 국제 제재를 가한다는 안이 채택되었습니다.
허나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는, 파키스탄 극단주의자들의 연이은 무차별 테러로 독이 바짝 오른 인도였습니다. 인도의 힌두 내셔널리즘 정당인 자나타 바라티야, 즉 '인민당' 정권은 파키스탄에 대한 복수를 부르짖으며 이미 3년째 사실상 전면전에 가까운 무력분쟁을 거치고 있었고, 소련의 시그널이 떨어진다면 '무슨 짓을 할 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파키스탄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인도에 여러 가지 조건을 거는 것이 최선이었습니다.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공격과 제노사이드 등 전쟁범죄행위를 엄금하는 대신 파키스탄이 'ABC 무기를 사용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핵병기의 사용을 묵인하겠다는 협정이 맺어졌습니다.
결론적으로, 타지키스탄 이슬람 반군은 연방의 빠른 대처로 궤멸 수순을 밟았고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사회주의 및 이슬람 민주주의 정착은 성공적이었으며 파키스탄 역시 국제사회의 공조로 빠르게 평정되었습니다. 문제는 파키스탄의 선제 방사능 폭탄(더티 밤) 공격으로 인도군이 총 8기의 핵탄두를 파키스탄 역내에 투하했다는 것이었죠. 수백만이 사망하거나 영구적이고 치명적인 상해를 입었습니다. 국제사회는 그야말로 경악 그 자체의 반응을 보였죠. 미국은 "인도 역시 최악의 전쟁범죄를 자행한 전범국"이라며 길길이 날뛰고 있었습니다. 친소국가가 세계 최초 핵전쟁의 당사자가 되었다는 점은 연방에게도 많은 점을 시사했습니다.
벨 에포크의 시대가, 서서히 종말을 맞아가고 있었습니다.
09. 전쟁은 평화, 무지는 힘.
핵전쟁 사태는 전세계에 엄청난 파장을 가져왔고, 미소간 '신냉전'이라는 용어를 널리 퍼뜨렸습니다. 세계 각국의 사회안정성이 급락해 온갖 강경론과 감정적 수사가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이런 흉흉한 분위기를 엎고 블라디미르 푸틴 KGB 제2총국장은 새로이 내무장관으로 임명된 사사노프와 (핵전쟁사태의 책임을 지고 사임한 리즈코프의 뒤를 이은) 람스도르프 연방총리의 위세를 등에 업고 KGB 수뇌부를 배신, 내무부 소관 연방보안국(SSB)의 수장에 올랐습니다. 미국과의 관계를 벌써부터 지나치게 망치지 않기 위해 쿠바와의 수교를 주선하는 등의 노력이 이루어졌지만, 일어날 일은 착실히 일어나고 있었죠.
미국이 소련에게 인도 경제제재를 압박하고, 다시금 대립의 시대가 시작되려 하자, 연방 수뇌부들은 각오를 다잡았습니다. 위기는 감내해도 굴종을 감내할 수는 없다는 분위기가 우세했죠. 소련의 사실상 최대규모 무역 파트너인 인도를 잃느니 미국과의 냉전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견이 극히 우세했습니다. UN 총회에서 소련의 세르게이 라브로프 대사는 이러한 수뇌부의 의사를 적극 반영, 인도에 대한 경제제재는 절대로 수락할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미국과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순간이었죠.
물론 연방도 아무 생각 없이 이러한 선택을 감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국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못하도록 유화적인 제스쳐를 취하는 동시에 유가 급등을 유도해 상대의 출혈을 강요하겠다는 계획이 수립되었습니다. 카슈미르 지역의 병합 이외에는 인도가 파키스탄에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해당 지역을 중립국화하는 안, 그리고 핵무기 및 재래식무기의 감축 등을 논의하며 미국을 달래는 것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이 막중한 임무를 받아든 외무위원장 알렉세이는 워싱턴 DC로 날아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접견, 필사적으로 설득했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서로 핵공격을 벌였고, 소련은 이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더욱 효과적인 방법으로 상호 절멸의 위기를 막으려 한다는 설득, 그리고 미소 간 핵군축 등을 통해 평화에 공동기여하자는 회유가 이루어졌죠. 올브라이트는 고심 끝에 모든 조건에 동의했습니다. 또한 독일과 칼리닌그라드에서 양측이 동시에 핵무기를 반출하자는 '중부유럽 비핵화' 안 역시 통과되었습니다.
미국이 한 발 물러서는 동안, 안드레이는 연방 최대, 세계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에너지 협동조합인 '가스코프'에서 소요사태를 유발하고 있었습니다.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열린 조합대표회의에서 고의로 노동자들을 도발한 안드레이는 코뼈에 금이 갈 정도로 강하게 '죽빵'을 맞는 사태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의 분노를 이끌어냈습니다. 물론 진의를 드러낼 수는 없었기에 자신의 정치인생마저 걸었던 셈입니다. 아무튼 가스코프 사태는 노동자들의 경영위원회 불신임과 조합개혁을 요구조건으로 한 총파업을 이끌어냈고, 일시적인 석유 및 천연가스 공급마비를 일으켰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증권거래소에서 대기하던 아미나트는 언론사 보도국장과 사장들에게 이 사실을 "곧이곧대로" 보도하라는 지침을 내렸고, '연극'은 '실제'가 되었습니다.
결과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련을 핵감축 테이블로 '끌고 오고' 가스코프의 마비사태를 유도한 클린턴을 '맹수를 조련한 능력자'로 칭송하던 미국인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했습니다. 유가는 1달만에 무려 420%의 상승폭을 보인 끝에 전 세계 제조업을 침체시켰죠. 이는 동아시아 투자자들의 대패닉을 유발, 글로벌 뱅크런 사태를 야기했습니다. 전세계 증권거래소가 매일같이 서킷브레이크를 작동시키고, 각종 안전장치를 강구했음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대장성의 강력한 권한을 과감히 사용해 갖은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특단의 조치를 취한 일본은 여파를 최소화하는 데 성공했지만, 미국은 주요 투자은행들과 대기업, 특히 IT분야에 낀 거품이 터져나가면서 생긴 공황사태의 직격탄을 맞고 말았습니다. 클린턴 행정부의 지지율은 94%에서 3달만에 25%까지 수직낙하했죠. 부동산 시장까지 타격을 받으면서 중산층이 몰락하고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작용은 덤이었습니다.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서구권이 '밀레니엄 경제위기'의 타격을 받고 역성장과 대침체, 사회혼란에 시달리는 동안,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과 일본은 '그나마 적은 피해'로 버틸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가스코프 사태의 여파와 세계 경제위기의 여파로 사회안정성이 뚝 떨어졌다는 것이었죠. 좌익 극단주의 정당인 '마르크스주의볼셰비키공산당'이 노동자들의 지지를 끌어모으며 공산당의 위치를 위협하는 초유의 상황이었습니다. 그 대처로 안드레이는 내무장관직을 사임하고 우크라이나 정계로 진출해 공산당 당적을 정리한 채 공화국 총리가 되었고, 알렉세이는 가스코프 노동조합회의에 방문해 보드카 파티(...)를 벌이며 신뢰를 회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미나트는 우주개발로 대중의 열망을 돌리는 한편 마르크스주의볼셰비키공산당의 내부혼란과 파시즘 성향을 폭로해 극단주의 세력에 대한 총공세에 나섰죠.
결과적으로 극단주의 세력은 크게 붕괴, 마르크스-레닌-스탈린주의자들의 정당인 사회민주노동자당과 좌익 파시트트들로 나뉘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SSB 국장 블라디미르 푸틴이 돌발행동으로 헌법수호청의 집행을 무시하고서 좌익 파시스트 집단의 우두머리인 이사예프와 리모노프를 체포하고 당조직을 와해시키는 공작을 벌였고, 수호청과 공산당 간의 알력다툼으로 번진 끝에 사실상 수호청의 기능이 무력화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1991년 제도의 현저한 한계를 나타내는 사건이었죠. 푸틴은 이 사태로 논란의 인물이자, 차기 거물정치인으로 성장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공산당은 정권을 지켜냈지만, 체제가 망가지는 것은 반드시 대처가 필요할 것입니다.
<캐릭터 일람>
0.
- 이름: 예브게니 일리치 람스도르프
(Евгений Ильич Ламсдорфф)
- 플레이어: NPC- 생년월일: 1946년 1월 29일
- 클래스: 연방 총리
- 민족: 러시아인+부랴트인 혼혈
- 모국어: 러시아어
- 구사가능언어: 영어, 독일어, 중국어(약간)
- 배경:
예브게니 람스도르프는 1946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러시아인 지역당원이던 아버지와 부랴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총명함을 인정받았고, 활발한 콤소몰 활동과 뛰어난 학업성적으로 1965년 모스크바국립대학 인문학부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1학년을 마치고 장교로 군복무를 시작한 람스도르프는 1968년 상부로부터 긴급명령을 받아 그의 소대를 이끌고 어디론가 향하게 되었습니다. 연대장은 그에게 "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을 막으러 간다"고 전했지만... 그가 도착한 곳은 이상하게도 사회주의 동지의 나라라던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였죠. 그곳에서의 경험은 아주 끔찍했습니다. 비무장한 노동자, 아이를 업은 어머니, 지팡이를 짚은 노인에게 발포명령을 내려야만 했던 람스도르프는 그때부터 모종의 신념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사태가 진압되고 다시 복귀해 남은 복무기간을 마치고 복학한 뒤 대학을 졸업한 람스도르프였지만, 그는 밤마다 울부짖는 체코인들의 악몽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1972년 모스크바 지역당에서 교육행정업무를 맡으며 장래가 매우 촉망되었으나, 그와 안면이 있던 중앙당 정치국원 안드레이 키릴렌코와 니콜라이 리즈코프의 필사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 람스도르프는 '브레먀' 방송에 소련 체제를 비판하는 투서를 남기고 그대로 체코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망명하고 말았습니다.
서독 본 대학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배우던 그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경험했습니다. 인간은 무언가를 비판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를 끊임없이 증명받는 존재였고, 어떠한 주제든 성역 없이 토론해야만 헤겔이 말한 정-반-합의 논리에 따라 건설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람스도르프는 탄탄대로였던 자신의 인생이 누군가의 처절한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보드카, 보르시, 톨스토이, 체호프, 라흐마니노프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사랑했고, 그의 조국 역시 사랑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는 '타락한 노동자 국가' 소비에트 연방을 구원하고 인민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진보를 가져다주어야만 하는 운명을 지고 태어난 이였습니다.
그러나 서방세계의 모든 것이 그의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 꽤나 많긴 했으나, 그들의 대책없는 개인주의와 인간 소외, 빈부격차의 정당화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혀 옹호할 수 없었죠. 람스도르프는 고향에서나, 여기서나 소수파에 속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더더욱 '내 사람'에 집착했습니다. 다행히 문화와 예술, 음주가무를 즐기고 지갑 여는 데 인색하지 않으면서도 지나친 물욕을 경계하는 그의 성격은 꽤 많은 이들의 호감을 살 수 있었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1986년, 새 서기장으로 취임한 고르바초프는 개혁개방을 외치며 그간 탄압해왔던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석방과 복권을 단행했습니다. 꾸준히 인연을 맺어왔던 리즈코프는 람스도르프를 잊지 않고 다시 연방에 불러들였죠. "개혁은 필수적이나, 미국인들에게 굽혀서는 안된다. 우리가 우리만의 원칙을 저버린다면 그들은 그대로 우리의 약점을 파고들어 종속시킬 것이다"라는 편지 내용이 리즈코프로 하여금 안심하고 람스도르프를 다시 불러들이게끔 하는 결정적 이유였습니다. 1988년 아르메니아 대지진 복구작업 지원 과정에서 고르바초프에게 눈도장을 얻고 나서, 그는 정치국 중앙위원회와 유류기지건설-가스공업부 장관으로 전격 발탁되었습니다. 물론 1990년 리즈코프와 함께 고르바초프-옐친의 "500일 경제재건계획"을 '비현실적'이라며 비판하다가 다시 서기장의 눈밖에 나긴 했지만, 그는 일단 자신의 직위를 유지하며 일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람스도르프는 소비에트 연방이 인권을 중시하고 공동체적 가치를 드높이며 서방과 협력하되 굴복하지는 않는 튼튼한 국가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는 약간의 고육지책이 필요할 지도 모르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해 주어야 하는 일이 빈번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이상만은 수단으로써 뒤집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바라는 조국에서는 그 누구도 무고하게 상처받지 않아야 하니까 말입니다...
1.
- 이름: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메스너
- 플레이어: 카라멜 마끼아또
- 생년월일: 1946년 5월 8일
- 클래스: 연방 외무위원장
- 민족: 러시아인
- 모국어: 러시아어
- 구사가능언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 능력:
지휘(0)/통솔(0)/행정(0)/경영(2)/호신(0)/조사(2)/위조(2)/선전(4)/공작(3)/화술(5)/장악(5)/압박(5)
- 트레잇:
#친절한 미소, 강력한 빠따: 동지에게는 무한한 신뢰와 친절을, 적에게는 가차없는 독설과 위협을 날려야 합니다. 영향력 하 국가에 대한 화술에 +2, 압박에 -1. 적성국에 대한 압박에 +2, 화술에 -1. 서방 국가에 대한 화술에 +1.
- 잔여포인트: 1
- 배경:
알렉세이 메스너는 1946년 5월 8일 대조국전쟁 승리 1주년이 되던 해 모스크바에서 소련 최고회의 의원인 니콜라이 메스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니콜라이 메스너는 당시 소련 법무장관을 역임한 사람이었습니다. 공산당 수뇌부의 일원으로 태어나 자란 그는 어릴적부터 소련에 대한 애국심을 교육받으며 자랐기에 조국 소련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을 마음 가득 가지게 되었죠. 아버지 니콜라이는 아들이 자신처럼 법조인의 길을 걷길 바랬지만 알렉세이는 외교관이 되어 조국의 이름을 국제무대에서 널리 퍼뜨리길 원했습니다. 그렇게 알렉세이는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외교학과에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하고 외무부에 들어가 외교관의 길을 걸었습니다. 브라티슬라바 조약, 모스크바 협정, 헬싱키 협정, 전략무기제한협정 등의 냉전 중반기 주요 외교장에서 경험을 쌓으며 평판을 쌓아나갔죠.
그렇게 외교관의 일에 열중하던 1980년. 알렉세이는 주영대사관의 공사참사관으로 발령받았습니다. 런던에서의 경험은 그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습니다. 분명 영국은 '지는 태양의 나라'이자 광업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구세대의 실패국가라고 배웠으나, 그런 영국의 인민들마저도 '초강대국'이라는 소련의 인민들보다 훨씬 나은 생활수준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국에서는 국영 백화점(굼) 등에서 길게 줄을 서야 살 수 있던 치약과 비누, 의류, 주류 등이 시골마을의 작은 상점에도 즐비하다는 것은 정말 놀라웠습니다. 부임을 마치고 모스크바로 돌아온 알렉세이는 자신의 조국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자유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도입을 지지하는 '반체제 인사'가 되었습니다.
1985년, 공산당 정치국원들과 서기장이 직접 참관한 연방 외무부 실무자 전체회의에서 알렉세이는 서방과의 화해, 자유화, 아프간 철수, 군 개혁, 경제개혁 등이 연방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모험적 연설을 함으로써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관심을 샀습니다. 외무부 내에서 '인기 스타', 또는 '검은 양'이 된 알렉세이를 고르바초프는 기꺼이 중용하기로 했습니다. 대외교류위원회 서기, 그리고 고르바초프의 개인 외교안보자문위원을 역임하는 등 이른바 '고르비 라인'을 타는 듯 했죠. 그러나 개혁의 향방을 두고 둘의 사이는 극명하게 벌어졌고, 1990년 외무부 서유럽국장직을 끝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휴직계를 제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그에게 대학 시절 친구였던 람스도르프가 접근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눈 끝에 둘은 의기투합해 조국을 바꿀 마지막 찬스를 잡아나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들의 싸움은 이제부터입니다.
2.
- 이름 :아미나트 잠불라토브나 나가이
(Аминат Джамбулатовна Нагай)
- 플레이어 :렌지파일
- 생년월일 :1955년 11월 7일
- 클래스: 연방 금융경제기획원 장관
- 민족 :체첸계 고려인(체첸 3/4, 고려 1/4)
- 모국어 :소련파 북한말(문화어+중앙아시아 한국어)
- 구사가능언어 :러시아어, 북한말, 바이나흐어(체첸-잉구시어), + 제한적으로 망명지 언어
- 능력:
지휘(0)/통솔(0)/행정(2)/경영(5)/호신(1)/조사(4)/위조(5)/선전(3)/공작(0)/화술(4)/장악(4)/압박(0
)- 트레잇:
#창조적 파괴: 다방면의 경험은 그녀에게 변화무쌍한 환경에 대한 적응력, 선호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민간조직의 혁신과 투자에 +2, 관료조직의 평시 관리에 -1.
#현란한 언론플레이: 그녀는 언론을 다루는 데에 상당한 재능을 보입니다. 여론선동 및 전환에 +1 모디파이어.
- 잔여포인트: 1
- 배경:
할아버지는 고려인, 친할머니와 어머니는 체첸인이라는 복잡한 가계도를 가진 아미나트는 북한 평양 출신의 여성으로, 그의 아버지 잠불라토프 나가이(나백선)는 스탈린의 지령을 받고 정권 수립에 참여하기 위해 북한으로 이주한 소련파 고려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이 8월 종파사건으로 대대적으로 소련파를 숙청하기 시작하자 나백선과 그의 딸인 아미나트는 소련 모스크바로 다시금 이주하였습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미나트의 부모는 북한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압박의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말았고, 아미나트는 체첸인 할머니와 함께 자라며 충격적인 진실을 듣게 되었습니다. 아미나트의 할아버지인 나창만이 1938년 스탈린의 대숙청때 누명을 쓰고 사망하였으며, 그 후로 나씨 일가는 소련체제에 대한 증오심을 마음 속에 품고 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모스크바 국립교대에 진학한 아미나트는 서서히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나탈리아 마그나트, 그리고 알렉산데르 타라소프와 만난 아미나트는 체 게바라와 레프 트로츠키 등의 사상을 공부하며 이윽고 신좌파 비밀결사인 '신 소련공산당(NCPSU)'의 당원으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75년 NCPSU의 정체가 발각되고 타라소프가 정신병원에 강제수감되는 동안 아미나트는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하였으며, 이때부터 아미나트의 11년에 걸친 망명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의 상징 유고슬라비아는 노동자 자주관리와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실현하고 있었고, 아미나트는 유고 시스템을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1980년 유고의 최고지도자 티토가 사망하며 민족주의자들이 유고 전역에서 득세하였고, 아미나트는 이번에도 망명하여 굴라쉬 공산주의를 실현하던 헝가리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노쇠한 야노슈 카다리의 헝가리 또한 쇠퇴기에 있었고,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사회주의 모델이 완전한 실패를 했다고 판단한 아미나트는 마침내 서구로 향했습니다. 스웨덴, 네덜란드 등지에서 '비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사회주의', 즉 반공 사회민주주의와 코포라티즘 등에 대해 공부하며 망명가 생활을 이어가던 아미나트는 1982년 람스도르프를 만나 친분을 다졌고, 일명 '람스도르프 서클' 내 좌파로써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1986년 고르바쵸프의 초청으로 람스도르프와 동지들이 소련으로 복귀한 뒤에, 아미나트는 몇 안되는 '복지국가형 자유주의'를 공부한 사람으로써 리즈코프 내각의 각종 경제정책 실무에 참가하였습니다.
그러나 체첸인-고려인의 이중 정체성을 가졌던 아미나트의 입장에서 체첸인 동지라고 생각했던 소련공군 전략폭격대 사령관 '조하르 두다예프' 소장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융단폭격을 했다는 사실이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에 의해 폭로되자, 큰 충격을 받은 아미나트는 사하로프의 국회연설 당시 원내에서 그를 옹호하며 악명과 유명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후 경제업무에서 좌천되어 1990년 12월 한국 노태우 대통령의 소련 방문을 담당하는 의전일을 맡았던 아미나트는 1991년 8월인 지금 무너지는 연방을 어떻게든 평등한 사회민주주의 국가로 개혁하던 재건국하던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생각을 마음 속 깊이 품고 있습니다.
3.
- 이름 :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사사노프
(Андрей Андреевич Сасанов)
- 플레이어 : dear0904
- 생년월일 : 1955년 8월 20일.
- 클래스: 우크라이나 공화국 총리
- 민족 : 우크라이나+체코인 혼혈
- 모국어 : 우크라이나어
- 구사가능언어 : 러시아어, 체코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 능력:
지휘(0)/통솔(3)/행정(5)/경영(1)/호신(0)/조사(5)/위조(0)/선전(2)/공작(2)/화술(5)/장악(3)/압박(0)
- 트레잇:
#적의 적은 나의 친구: 이념과 이상의 차이는 일시적 협력에 그 어떤 장애도 되지 않습니다. 국내 적대/알력집단의 포섭 및 설득에 +1.
#명품 서포터: 탑, 원딜, 정글러가 빛나려면 누군가는 와드를 박아야 합니다. 각 메인이벤트 당 한번, 타인의 행동에 +2의 버프를 추가 부여해줄 수 있습니다.
- 잔여포인트: 7
- 배경:
사사노프는 1955년 키이우에서 우크라이나 당원인 아버지, 그리고 조약 체결 행사때 방문한 체코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적부터 외가인 체코와 우크라이나 사이를 오가면서 지내 왔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13번째 생일날 우크라이나에 있던 사사노프와 가족은 비보를 전해 들었고, 그때부터 사사노프는 신념을 가졌습니다. 우크라이나에 대기근을 조장하고, 체코에 피바람을 몰고온 소련을 언젠가는 내 손으로 엎어버리겠다고. 그러나, 그는 아직 어렸기에 자신의 속내를 깊게 숨기며 가슴속의 칼을 다듬었습니다.
1974년에 그는 키이우 종합 대학에서 법학과-외교 관계 연구소에 진학하여, 군 복무를 거쳐 훌륭한 성적으로 석사학위와 함께 졸업 했습니다. 사사노프는 국제법과 지역학을 배우면서 본인의 의지를 더욱 단단하게 굳혔고, 대학 총장의 추천사를 받아 소련 외무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외무성에서 일하는건 상당한 고통이었습니다. 프라하의 봄에 일조한 그로미코. 그리고 소련의 높으신분들. 그리고 그게 어느정도 눈에 띄는 바람에, 사사노프는 1984년 외무성에서 한직인 종교 문제 위원회로 좌천 되었습니다. 그는 차라리 더러운 사람 밑에서 계속 있기보다는 낫다 생각하며, 그 좌천을 받아들여 2년동안 버텼습니다.
그리고 1986년,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몇몇 부서들을 개혁 할때, 외무부로 다시 불려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는 람스도르프를 만났고, 같이 술 자리를 가졌습니다. 그와의 대화는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소련은 이대로는 안된다." "프라하의 봄을 진압한건 미친일이었다." "부당한 탄압들은 모두 사라져야 한다." 같은 말과... 계산까지. 이후 람스도르프와 자주 만나면서, 이 호인의 조력자가 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화술과 인맥으로 형님의 아르메니아 행을 지원했고, 사사노프는 공연히 람스도르프 라인으로 인식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0년 람스도르프가 서기장의 눈 밖에 났을때, 그의 라인인 사사노프 또한 문학 출판국 본부로 밀려났지만, 그는 계속 버텨낼 것입니다.
사사노프는, 소련은 인민을 탄압하는 국가로써, 소련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람스도르프가 소련에 칼을 들이댄다면, 그를 절대적으로 도울것입니다. 그것이, 소련을 붕괴 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더 기뻐하며 도울 것 입니다...
- 사회 안정성 : 3(동요함)
: 낮을 수록 극단주의가 횡행하고 급진적 수단이 선호됨.
- 주요국 안정성: 미국(?)/동아시아(?)/EU(?)CIS(?)
- 정권 지지도 : 6(괜찮음)
: 낮으면 인민들이 들고 일어남.
- 국가평판 : 2(울부짖는 불곰)
: 낮을 수록 호전적이고 공격적인 국가로 인식됨.
- 주요 대외관계 : 미국(5) / 일본(4)
@카라멜 마끼아또 어쩔수 없는게 그럼 히틀러를 도와 유대인 절멸과 파괴를 일삼는 악인 집단이 되는지라.ㅎㅎ
정 안됨 플레이어가 찬성파와 반대파를 선택해 각자의 진영을 하는게 좋을수도?
@931117 제가 제3제국을 원하는게 그러고 싶어섭니다... 심연을 드려다보면 심연에 물들게 된다는 니체의 말처럼요.
@931117 같은 인종학살과 파괴행위라도 아예 대체역사, 가상역사로 가면 상관이 없는데 실존하는 조직으로 원역사대로의 절멸행위를 일삼는 내용을 써버리면 이게... 상당히 논란이 될 거라서 말이죠... ㅋㅋ
@카라멜 마끼아또 RP라 하더라도 그런것에 불쾌감을 느낄수 있다는걸 감안하면... 그 종류로 갈때는 참가자가 많을수 있을때가 좋을것 같긴 하네요.
@E.E.샤츠슈나이더 예를 들어 한국판 파시스트가 집권해서 백인들을 수용소로 보내고 주요도시에 핵샤워를 날리며 평화 시위자들을 중기관총과 겨자가스로 학살하는 내용은 그게 악행이라는 사실을 명시해주기만 하면 어차피 가상역사니까 돈 받고 파는 웹소설에도 자유롭게 넣을 수 있지만(물론 묘사가 너무 심하거나 미화 요소가 있으면 그래도 욕먹음...) 아예 나치가 나치 짓 하는 내용을 쓰는 건 좀 저어되는 거죠.
@E.E.샤츠슈나이더 당장 저도 북한 플레이를 제한조건으로 달아서 허가시켜도 괜찮은가 불안하다 대선보고 취소할 생각이니 어느정도는 공감이 갑니다.ㅎㅎ
그게 아니더라도 전에 80년대 한국 개헌 철회하려 하는등의 일을 필사적으로 저지 했으니(나는 상관 없는데 그쪽이 욕먹을수 있어요 정치적으로라는 식으로.)
@카라멜 마끼아또 근데 그거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사람도 있을테니까요.
@카라멜 마끼아또 저번의 폭파된 스페인의 슬픔을 무릅쓰고 다시 한번 진행을 도전한다면 헤드라이너를 글로 옮겨온 RP로 하려하는데. 배경을 가상으로 해야 할지 아님 현실로 해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이 많이 되네요. ㅎㅎㅎㅎ...
현실을 배경으로 하면 주제 구하기는 쉽지만 정슈게 갈 것 같고 가상을 배경으로 하면 정슈게 염려는 없지만 이벤트 짜기가 어렵고...
@카라멜 마끼아또 하긴 카라멜님은 전용게가 없어서?
일단 그럼 민원실에 질의 해보는게 어떨까 싶습니다.
지속적으로 우려가 나오니까
@931117 그게 아니라 현실을 배경으로 하면 브렉시트나 최순실 게이트, 트럼프 당선 등 140% 싸움날 수 있는 주제가 이벤트로 올라올 수 있기 때문에....
그렇지만 가상으로 하면.... 뭘 이벤트로 해야해?
@카라멜 마끼아또 그냥 뮤지션 컨셉이면 연예 뉴스만 나오면 되는거 아닙니까?
@931117 뮤지션이 아니라 언론사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전부 다루는 쪽이라. 예를 들어 브렉시트에 긍정적인 기사와 반대하는 기사가 올라오면 둘 중 어느 쪽을 보도해야 하냐로 논쟁을 해야 하고.
@카라멜 마끼아또 ... 문제는 그 주제로 토론을 해야 하면, 참가자를 모으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만...
@카라멜 마끼아또 헤드라이너 검색하니 메인 이벤터라길래요.
근데 그럼 무리 같은데요...
@931117 제가 말한 헤드라이너는 이거...
https://store.steampowered.com/app/918820/__NoviNews/
그렇다면 좀 더 고민을 해봐야겠네요.
@카라멜 마끼아또 당장 국내 정치물도 국제물도 인원이 딸리는 지금 아예 정치적 논쟁이 메인인 소재가 호응이 클까도 좀 걱정이네요
@카라멜 마끼아또 그 게임을 이미 알고 있어서... 일단 RP로 바꾸는거 자체야 쉽죠. 언론사의 성장이 주요 스토리가 되고, 주필이나 편집장이 역할이 될텐데, 문제는 이벤트로 해야 하는게 무한 논쟁. 그것도 플레이어간? 어후... 저는 좀 무리...
@931117 사실 정치적이 아니라, 다른거 (예컨데, 아이즈원 조작 사건/더 지니어스 절도 사건) 이라도 힘들죠. 사람과 논쟁 하는게 안 피곤할리가요.
@dear0904 논쟁이 없어도 문제지만 너무 과해도 문제죠...
저도 참여기가 싫을듯...
@931117 사실 저 게임이면, 단순하게 메인 이벤트 하나는... 20분만 줘도 만들죠. 성장이나 이런걸 어케 하느냐. 엔딩은 어쩔거냐... 가 문제여서 글치. 근데 그것도 그거지만, 참가자가 없으면 뭐... 아무리 잘 만들어도 의미가 없는거죠.
+ 거기다, 여기서 논쟁... 에서 안 좋은 경험이 없는 플레이어 없을걸요? 저만 해도...
@dear0904 성체 훼손 갖고 분노해 미친적도 있으니까.
아마 그게 정치 이슈관련해서 가장 열받은 순간중 하나였을걸요?
@931117 뭐, 그래도 저 게임을 한다는 가정하에... 그런 명확한건 안 올라오겠죠. 올라 온다면, 그 기사에 지면을 얼마나 할당할거냐 정도겠지.
@dear0904 중요도 갖고 논쟁이 클테니...
@931117 그렇죠. 메인 이벤트 하나를 하면... 주요 논쟁거리 1-2개/지면 할당 사안 2-3개. 해서 거리를 채울건데, 그것도 쉬운일이 아니고, 판매 부수는 어떻게 하고... 뭐, 여러모로 쉬운일은 아니죠.
+ 아. 물론 만들려면 만들어서 진행 한번쯤이야 어려운건 아니고... 여러번이 어려운거라서요. 여기서 하기는 또 허락도 받아야 하고? (아래의 국가 스탯들은 이렇게 되겠죠. 회사 이미지/회사의 분류(정치색)/자금력/영향력?)
@dear0904 일단 저는 구현 불가능한 시스템이네요...
@931117 시스템이 만들기 쉽지는 않죠. 납득 시키는것도 중요하고.
+ 저 언론사... 은근 마음에 드는군요. 사실 사건이 걱정이라면, 간단히 말해... 부탁 해서 소망문을 차용하면 쉽긴 합니다. 잠깐 적자면...
1. 당신. 이 격동의 시기인 91년 8월... 언론사를 개업 하시겠다구요? 진심이십니까? 뭐... 그렇다면 여기 도장을 찍으십시오. 근데, 당신이 개업하는 국가가 어디였죠? 1. 미국/2. 소련 (추가는 자유지만, 이 이외로 가면 움직이기가...)
일케 시작 하는것도 가능하죠. 미국이면, 8월 쿠데타 관련 사안 (옐친 사망의 시민 논객 사설 인용 여부/고르바초프 의혹을 쓸까? 말까?/쿠데타에 대해선 어떻게 쓸까?) 이런거로 시작하면 되고, 반대여도...
@dear0904 언론사로 한다면 생각한 스텟은 다음과 같은데.
- 독립성(1에 가까울수록 정권 친화적, 10에 가까울수록 독립적)
- 성향(좌파냐 우파냐)
- 경영 상태
- 신뢰도(1에 가까우면 검은건 글자, 흰건 종이라는것만 진짜고 다른건 다 거짓, 10에 가까우면 신문이 곧 진리)
- 영향력
이정도?
@카라멜 마끼아또 너무 많으면 굴리기 힘들죠. 독립성... 이면 관영/민영을 구분 하는걸 생각하면 빼도 되지 않을지? 독재 국가면 어차피 의미 없고, 민주 국가도 비슷하잖아요. 신뢰도와 영향력도 일맥 상통. 못 믿는게 영향력이 높을순 없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