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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43
요한계시록 11:11-13
증인의 부활
두 증인은 말씀에 의해 측량된 성전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두 선지자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증언이 완성되면 죽임을 당한다. 그 현장이 소돔이고 애굽이며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다. 짐승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것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원수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싫어하고 거부하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증인의 죽음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늘 확인하는 자가 성도이다.
그러나 증인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살리심을 받는다. 본문에 부활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증인의 부활’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은 부활이란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살리심의 은혜를 입은 생명의 상태를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11절). “생기”라고 번역하였는데 헬라어 ‘프뉴마 조에스’란 ‘생명의 영’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창세기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생기”란 히브리어로 ‘니쉬마트 하이욤’인데 ‘생명의 호흡’이다. 아담에게 생명의 호흡을 주셔서 살아 있는 상태로 만드심으로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질 새 창조를 보여주신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창조를 새 창조로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 15:45)라고 선언하였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라는 표현은 에스겔 말씀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10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겔 37:9-10)
여기서 “생기”는 ‘루아흐’로 ‘하나님의 영’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 살아날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 성경에는 “일어나 서는데”라고 히브리어 ‘레겔’을 번역하지 않았다. 직역하면 ‘그들의 발로 일어나 서는데’라는 말이다. 선지자의 대언으로 마른 뼈들이 살아난다. 하나님께서 죽어 마른 뼈와 같은 이스라엘을 다시 살리셔서 새로운 백성으로 만드신다는 환상을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주신 약속의 말씀이다.
선지자에게 임한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도 요한은 그 말씀에 의해 살아나는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을 배경으로 증인이 살아나는 것을 말씀하였다. 다시 말해서 육으로 죽어 있던 첫째 아담 안에서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질 성령에 의해 살아나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증인들이 살아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해 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두 증인”을 “두 선지자”로 표현한 것이다. 증인이란 한마디로 구약의 선지자들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말씀을 대언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충성된 증인으로 죽음을 완성하시고 부활하실 것이 구약에서 이미 약속된 것이고 그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로 증인으로 드러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난 상태가 그 증거이다.
결국 증인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자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만 드러나지는 존재이다.
증인을 통해서는 오직 말씀만 드러나기에 땅적 존재들은 괴로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10절)라고 하였다. 달리 괴롭게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만 흘려주는 것 자체로 땅적 존재들에게 불편하고 괴로운 것이다.
나에게 복을 줄 수 없고 놀라운 이적을 나타내지 못하는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은 끝없이 표적과 지혜를 구한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자기 자신을 믿는 인간 종교가 된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다. 그래서 기독교가 미신이 되고 교회가 우상이 되며 목사가 무당이 되었다. 이런 것으로 하나님은 이 땅의 죄의 극치를 여실히 보여주신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율법 아래 매인 유대교가 진리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진리라는 것을 나타내셨다(행 2:36).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라고 하였는데 땅적 존재들은 증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시체를 장사하지 못하게 하고 보란 듯이 전시함으로 모든 것이 끝났고 복음이 실패하였다는 것을 기뻐하였으나 증인들이 살아나니 크게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나는 것이 땅의 존재들에게는 두려움이다.
36 또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력의 시작인 그 땅의 모든 장자를 치셨도다 37 마침내 그들을 인도하여 은 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그의 지파 중에 비틀거리는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 38 그들이 떠날 때에 애굽이 기뻐하였으니 그들이 그들을 두려워함이로다(시 105:36-38)
큰 두려움이 임하는 정황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방 세력들에게 주신 것이었다(창 35:5, 출 15:16, 신 11:25, 수 2:9, 대하 17:10 등). 죄악의 무리가 가진 기쁨이 증인을 죽이는 것에서 오는 것이나 그것은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늘의 큰 음성으로 반전이 일어난다.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12절). 이 말씀은 세대주의자들이 흔히 말하는 ‘휴거’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미 요한 사도를 불러올리셔서 땅의 상황을 다 보여주신 그 하늘이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계 4:1)
여기서 “구름”(헬, ‘네펠레’), “하늘”(헬, ‘우라노스’)을 다 단수로 표현하였다는 것은 물리적 하늘, 구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비교 1:7). 땅적 존재들에게 물리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물리적인 구름을 타고 물리적인 하늘에 올라갔다는 말이 아니라 원수들이 알 수 있도록 보여주신다는 뜻이다. 요한 사도가 하늘에 올라가 하늘의 시각으로 땅을 보고 진리를 나타내었듯이 성전이요 두 증인이며 두 선지자인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는 하늘의 시각에서 오직 말씀만 땅에 드러내어 땅적 존재들이 분명히 알 수 있었지만 말씀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13절). “큰 지진”이 의미하는 바를 복음서에 이렇게 보여준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마 27:51-54)
땅이 흔들리고 깨어지는 지진으로 말미암아 흔들릴 수 없고 쪼개질 수 없는 하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땅의 진동으로 나타내는 것은 백부장이 하나님의 아들을 인정하는 것처럼 하늘의 것을 인정하는 상태를 상징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증인들이 죽음에서 깨어나 거룩한 성, 즉 하늘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미 완성되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라는 말씀은 하늘의 거룩한 성과 대조하여 이 땅에 율법을 중심으로 삼고 있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성을 말하는데 소돔이고 애굽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곳으로 세상의 대표라는 뜻이다. 단순히 십분의 일이 아니라 ‘십’이 ‘일’이고 ‘일’이 ‘십’이기에 율법적인 것 전부가 멸망의 상태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라고 하였는데 구약을 배경으로 한 말씀이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8)
로마서 11:4에서도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라고 번역하였는데(개역한글판에서는 “칠천”이라고 번역하였다) 열왕기상 본문에도 “명”이라는 말은 없다. 즉 “칠천”인데 ‘칠’이 ‘천’이다. ‘칠’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내고 ‘천’이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을 표현하는 숫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일한 결과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신 결과로 남겨 놓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서 본문에서 “내가 나를 위하여”라고 한 말씀은 ‘나의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것으로 남겨 두신 일하심을 칠천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라고 말씀한다.
증인의 부활, 하늘에 올라감은 단순히 마지막 날에 일어날 현상으로만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종말의 때 안에서 늘 일어나는 일이다. 바울 사도의 선포에서 그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는 일이다.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5-8)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사”, “함께 앉히시니”라는 표현이 다 과거형으로 기록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그래서 “구원을 받은 것이라”라는 말씀이 완료형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증인의 증언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완성되고 날마다 죽음이 이루어져 하늘로 올라간 생명이 드러난다. 그래서 교회요 성도로서 날마다의 죽음이고 부활이다.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5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4-16)
(2023070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