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경기 영상 및 안세영 선수 인터뷰 영상은 이 글 맨 하단에 첨부
"스피드와 컨트롤(스트로크의 정확성) 모두 네가 우위에 있으니까 이대로만 밀어붙여라."
이것은 오늘 제1게임이 끝나고 제2게임에 들어가기 직전 일본 배드민턴 국가 대표팀 총감독 오오호리 히토시가 미야자키 토모카에게 건넨 말이었다.
오늘 경기를 처음부터 지켜본 팬이라면 제1게임에서 안세영의 놀랍도록 이상한 움직임에 매우 당황했을 것이다. 발놀림과 반사 신경은 무뎌서 미야자키의 드롭샷에 전혀 따라가질 못했고, 상대가 라인 위에 확실하게 떨군 공격들을 아웃(OUT)이라 착각하며 아직 게임 중반임에도 챌린지 기회를 두 번 모두 날리는 등, 마치 독한 감기약이라도 먹고 정신 못 차리는 사람처럼 최악의 경기력을 보이고 있었으니, 오오호리 감독의 이런 지시는 사실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안세영 곁을 지키는 박주봉 감독과 이현일 코치의 초조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이 그녀가 매우 힘든 싸움에 처해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필자가 인터넷 속도가 느린 구형 노트북으로 라이브 중계를 보았을 때는 제1게임에서 안세영의 발놀림이 매우 무뎌 보였는데, 방금 이 글을 수정하며 유튜브에 올라온 끊기지 않는 경기 영상을 보니 제1게임에서도 하체 움직임과 스트로크의 정확성은 크게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래도 안세영이 미야자키를 2 대 0으로 제압했던 코리아 오픈 8강전에 비해서 오히려 호흡은 더 안정되고 땀도 적게 흘리는 것으로 보아 체력적으로는 오늘 상태가 훨씬 더 좋아 보였기에 필자는 역전승을 기대하며 제2게임을 기다렸다. 결국 제1게임에서 완패한 것은 미야자키가 어제 역전승한 기세를 이어가며 매우 좋은 경기력을 선보인 탓도 있었지만, 무언가 음식을 먹다가 잔뜩 체한 것처럼 답답한 상황을 연출한 안세영 자신에게 원인이 있었기에 이 엉킨 매듭을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관건이었다.
다행히 안세영은 제2게임부터 필자의 기대에 부응해 주었다. 극심한 체력 저하 속에서 정신력으로 버티던 코리아 오픈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마치 구름 위를 거니는 듯한 그녀 특유의 빠르고 우아한 스텝이 다시 살아났고, 미야자키의 날카로운 스매시를 여러 차례 몸을 날리며 수비해 내는 등, 최상의 컨디션일 때의 움직임이 드디어 나왔다. 승패를 떠나서 최소한 오늘 제2, 제3게임에서와 같은 움직임이 나와 주어야만 안세영다운 경기를 했다고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다.(지금 4주 연속 대회를 뛰면서 3주 연속 우승을 노리고 있는 야마구치의 체력이 어디까지 벼텨줄지 의문이지만 아마도 내일 4강 상대는 그녀가 될 것인데, 이 대결 직전에 모처럼 안세영다운 경기 모습을 되찾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만일 오늘 미야자키에게 패했거나, 이겼더라도 좋은 움직임을 회복하지 못한 채 경기가 끝났다면 안세영의 슬럼프는 더욱 깊어질 수도 있었다고 본다.)
필자가 염려하는 부분은 승패에 관계없이 최근 매 시합마다 안세영의 표정이 너무 어둡고 부담감에 짓눌린 듯하다는 점이다. 세계 랭킹 1위 자리를 사수한다는 것은 물론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일이긴 하다. 랭킹 2위나 3위를 유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필자도 어쩌다 보니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모두 전체 수석으로 졸업한 경험이 있어 안세영이 느낄 부담감을 다소나마 이해할 수 있다.(특히 중학교는 2학년 말에 167등에서 시작해 3학년 1학기가 끝났을 때 처음으로 전교 1등을 했었다.) 전교 100등, 그리고 전교 10등은 열심히 공부한 만큼 시험을 즐길 수 있지만, 전교 1등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늘 불안한 법이다. 그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선 한 문제도 놓쳐선 안 된다는 거대한 압박감이 짓누르게 된다.(물론, 인생을 살아 보면 그런 게 전혀 중요한 게 아니란 걸 알게 되지만 말이다.) 전 세계 모든 선수가 안세영의 경기를 수십, 수백 번씩 돌려보며 집중 분석하고, 칼을 갈고 연습하며, 그녀를 한 번이라도 꺾어 보기 위해 필사적으로 덤벼든다. 이런 라이벌들과 경기를 치르면 치를수록 그들의 기량과 체력이 자신 못지않게 향상되고 있음이 느껴질 때 어찌 스트레스가 되지 않겠으며,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학교 시험과 배드민턴 경기는 엄연히 다르다. 학교 시험은 미지의 문제와의 싸움이지만, 배드민턴은 정체가 명백한 상대방과의 1 대 1 대결이다. 학교 시험은 문제를 풀어야 하는 내가 일방적으로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게임이지만, 배드민턴은 나와 맞서 싸우는 상대 역시 나에 대해 긴장하고 부담감을 느끼는 대결인 것이다. 그런데 이때 랭킹 1위인 안세영이 더 긴장해야 할까, 그런 그녀를 상대하는 라이벌들이 더 쫄아야 할까?...... 현명한 안세영이라면 필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하리라 믿는다.
야마구치, 천위페이와의 대결은 분명 앞으로도 매우 피곤한 일이 될 것이다. 이 두 위대한 노장들이 배드민턴에 대한 열정을 아직 내려놓을 생각을 안 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녀들의 체력이 저하될 때까지는 이쪽도 기를 쓰고 버티는 수밖에. 다만, 패배에 대한 두려움만은 머릿속에서 지운 채 보다 즐겁게 경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건 여왕 안세영을 상대하는 선수들이 느껴야 할 감정이지, 안세영이 느낄 감정은 아니다. 그리고... 여왕이 가끔씩 져줘야 다른 선수들도 힘들게 훈련한 보람을 느낄 수 있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계속해서 싸울 의지도 유지할 수 있는 법이다. 안세영 혼자만 잘해서는 여자 배드민턴계 전체가 발전할 수 없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친다면 지금보다는 정신적인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https://www.youtube.com/watch?v=oz3wC30ZuSU
https://www.youtube.com/watch?v=HMVKlpaETfg
https://www.youtube.com/watch?v=cf3Svzbalhg
https://www.youtube.com/watch?v=4_ZOnBEoy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