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부 장원]
장터
서울시 영등포구 당산동 박혜진
살아있던 것들이 좌판에서 질척이는
장터에선 늘
비릿한 항구 냄새가 났다
죽은 개들이 시장의 그물맥 사이로
열을 맞춰 차갑게 짖어대면
인부들의 떡진 머리칼이
칼국수처럼 팥죽색 하늘에
하염없이 흩날렸고
나무박스 켜켜이 가지런한 고등어들은
퀘퀘 묵은 가짜 얼음바다 위에서
연신 뜬 눈으로
남은 환영을 지껄이고 있었다
모퉁이 구석에서
돼지의 창자를 꿰던 어머니는
본래의 삶을 잊은 씨줄과 날줄들로
주둥이가 터진 인생을
어디까지 시침질 했을까
빈 집의 아이들 같은
한 무더기의 순대가
새벽 내내 고아 온 국밥의 바닥에
무거운 젊음의 닻을 내릴 때
얼핏 골목 사이로 가녀린 울음이
뱃고동의 구슬픔처럼 스미었던가
무딘 칼날에 나동그라지는 순대 낱알같이
축축한 비린내로 뒤엉킨
거무룩한 동이 틀 때면
그녀를 닮은 장터의 허름한 관상이
잠든 어머니의 해묵은 관절 사이로
어리광을 부리며 파고든다.
[일반부 차상1]
마을
진천군 진천읍 김순옥
마을이라는 두 글자에 그리움이 밀려온다.
아버지를 따라 간 곳이 용인시 옥산리 마을이었다. 유년시절부터 중학교까지 살았으니까 10년 넘게 그 곳에서 살았다.
아버지 또한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다. 경기도 연천에서 6.25 난리에 여동생 손을 잡고 경계선을 넘어 오셨다고 한다. 지금은 민통선으로 인해 가족들을 만날 수가 없어 그리워만 하셨다. 여기저기 떠돌다 그나마 정착한 곳이 이 마을이었다.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셨어도 이곳을 잊지 못해 가금 혼자 다녀가시고는 하셨단다.
나는 결혼을 하면서 진천에 살게 되었다. 아버지는 우리 집에 오시면 사위에게 그 마을에 데려다 달라고 하신다. 40분 거리에 있어 더 가보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그동안 나도 ‘한 번쯤은 가봐야지’ 생각만 했을 뿐 가보지는 못했다. 어떻게 변했는지 보고 싶은 마음에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동네 마을회관으로 들어섰다. 몇몇 어르신들이
“어여 와.”
하며 아버지 손을 잡고 반긴다. 옆에 있는 나를 보더니 누구냐는 듯이 쳐다보자 아버지는
“우리 큰 딸이야.”
하자
“네가 순옥이냐?”
하며 놀란 듯 쳐다보신다. 옆에 남편이 있는 것을 보고는
“다 커서 시집도 가고. 몰라보겠네.”
하신다. 그냥 인사만 꾸벅하자
“나 용진이 아버지여.”
한다. 그때서야 나는 다시 인사를 하며 용진이에 대한 이야기를 이것저것 여쭈어봤다. 아버지께 저녁에 모시러 오겠다는 말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저 멀리 다리가 보인다. 옛날에는 크고 긴 다리였는데 지금은 작고 허름하기까지 하다. 세월의 흐름에 가슴이 시리다.
초등학교는 마을에서 30분 거리에 있다. 수확을 끝낸 빈 논으로 가로질러 가면 더 빨리 갈수도 있다. 우리 마을을 지나가는 친구 중에는 여자보다 남자 친구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인지 가끔 남자애들은 꼼수를 부린다.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지는 사람이 가방 들어 주기이다. 나는 가위 바위 보를 못해 뒤로 뺐지만 남자 친구들은 오늘은 이길거라며 부추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을 밀어 보지만 역시 나였다. 못하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남자친구들은
“야호.”
하며 내 양 어깨와 팔에 가방을 척척 걸고는 재빨리 달아난다. 가방무게에 뒤뚱거리며
“다리까지 만이다.”
하며 냅다 큰소리를 지른다. ‘10분이며 가는 거리가 왜 이리 멀게만 느껴지는지…….’
다리에 도착하자마자 바닥에 가방들을 우르르 떨구어 버린다. 다시는 가위 바위 보는 안 할 거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중학교 다닐 때에도 남자애들의 장난은 그칠 줄 몰랐다. 남자애들은 자전거로 통학을 했었다. 가끔 자전거 뒤에 여자애를 태우고 내리막길에서 지그재그로 장난 운전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길옆에 쌓아놓은 거무죽죽한 소똥더미로 쓰러진다. 여자애는 울상이 되어 재빨리 개울가로 뛰어가 손과 몸에 묻은 소똥을 닦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제 나이 40이 되어 초등학교 동창회도 나가고 마을 모임도 일 년에 두어 번 참석한다. 세월이 흘렀음에도 남자 친구들은 장난기 어린 모습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소똥에 떨어졌던 여자 친구가 백혈병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직도 마을을 지키며 사는 친구들과 함께 그 옛날 그리움을 간직하며 살고 싶다.
[일반부 차하]
터미널
청주시 흥덕구 조현수
저마다의 신발은 앞이 있다
서로를 마주하진 않지만
각자의 방향대로 자리를 찾아 간다
아버지의 바짓가랑이가 붉은
들숨을 쉴 때마다
명치끝으로 올라가는 허릿춤
터미널 네거리에서
멎어버린 한 쪽 다리
사년 전 아버지의 시간이 멈춰선 곳
곡선과 직선이 엇갈린 아버지의 다리
바늘꽃처럼 앙상한 한 쪽 다리는
붉은 낙엽과 함께 터미널에서
가을을 보내고 있다
바람이 불수록 휘청거리는
바짓가랑이 사이로 터미널 네거리의
풍경이 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