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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원이야기
 
 
 
카페 게시글
경상북도(이야기) 스크랩 오계서원 이야기
관보 추천 0 조회 14 11.12.15 19: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오계서원(?溪書院)
소 재 지 :  경북 영풍군 평은면 천본리 55-1
건 축 주 :  이덕홍(李德弘, 1541~1596)
건축시기 :  1570년(선조 3)
중건시기 :  1570년(선조 3)
훼철시기 :  1868년(고종 5)
소 유 자 :  영천이씨 오계서원파 종중(관리자 : 오계서원)
문 화 재 :  문화재자료 제475호(영주시), 2005-01-10 지정, 일곽

건축 배경
오계서원은 1570년(선조 3) 간재 이덕홍이 세운 오계정사의 후신으로 정사가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지자 1600년(선조 33)에 이덕홍의 장남인 이시가 쌍계마을로 이건하고 한호의 글씨로 관성재·관서헌의 편액을 걸었다. 1665(현종 6)에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도존사를 건립하였다.

1691년 오계서원으로 승격하고, 1699년과 1707년의 대홍수로 물길이 바뀌어 서원 침수 피해가 있자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고종 때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19년에 복향하였고, 1978년에 도존사를 재건하였다.

건축 구성
입도문을 통해 경내에 들어서면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뒤편 다소 높은 지대에 명륜당이 그 앞쪽 좌우측에 동재 관성재와 서재 험위료가 마주보고 있다. 관성재는 송나라의 학자 장식이 주자에게 ‘동정상수 체용불리(動靜相須 體用不離)’라는 글을 보내자 주자가 좌우(座右)에 써서 ‘출입관성(出入觀省)’ 한 데서 취한 것으로 편액의 글씨는 석봉(石峰) 한호(韓濩)가 썼다.

험위료는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의 응사(應事)에 ‘사지사응 즉험우위(事至斯應 則驗于爲 : 일이 생겨 곧 응하게 되면 실천으로 시험하여 보라)’라는 구절에서 취하였으며 편액은 역시 한석봉의 글씨이다.

명륜당 뒤편에는 별도의 일곽 내에 내삼문과 사당인 도존사를 앉혔다. 서원 밖에는 간재선생이 오계정사 창건 시에 같이 건립한 군자정(君子亭)이, 정자 앞에는 연못이 있다. 서원 입구 언덕에는 오른쪽에 연어대(鳶魚臺), 왼쪽에는 활발대(活潑臺)가 있다. ‘연어’는 『시경』의 ?대아 한록편?에서 ‘연비려천 어약우연(鳶飛戾天 魚躍于淵 : 솔개가 날아 하늘에 이르거늘 물고기는 못에서 뛰논다).’라고 한 데서 취하였고, ‘활발’은 자사(子思)가 윗 구절을 『중용(中庸)』에서 인용하고 장자(程子)의 해설에 ‘끽긴위인처 활발발지(喫緊爲人處活潑潑地 : 요긴하게 사람을 위한 것으로 생동감이 넘치는 곳이다)’라고 한 데서 취하였다.

현판
관성재(觀省齋)
한호의 글씨
관서헌(觀書軒)
한호의 글씨

관련인물

관련인물
- 대를 이은 가학, 이덕홍과 이시 부자
이덕홍(李德弘, 1541∼1596)의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굉중(宏仲), 호는 간재(艮齋)이다. 습독(習讀) 이현우(李賢佑)의 아들이며, 형조 참판 이현보(李賢輔)의 종손자이다. 1541년(중종 36) 영천(榮川) 남촌(南村) 구룡동(九龍洞 : 현재의 영주시 장수면 호문리 녹동)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19세에 금난수(琴蘭秀)의 주선으로 퇴계 이황 선생을 뵙고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30세 때에 스승의 명으로 선기옥형(璿璣玉衡)을 제작하여 천리연구에 활용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잠시 귀향하였다가 그 해 10월에 관동을 경유하여 용강산성에 이르러 왕세자(광해군)를 배알하고 왜적을 물리칠 계책을 올렸고, 다음해 정월에 행재소에서 임금에게 왜적을 물리치기 위한 소를 올렸다. 이 소에서 육지에서는 구갑거(龜甲車)를, 바다에서는 구갑선(龜甲船)을 사용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말미에 첨부된 구갑선도(龜甲船圖)는 우리나라 최초의 거북선도로 알려져 있다. 저서로는 『주역질의(周易質疑)』·『사서질의(四書質疑)』·『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주자서절요강록(朱子書節要講錄)』·『간재집』 등이 있다.
이시(李蒔, 1569∼1636)의 자는 중립(中立), 호는 선오당(善오堂)이다. 이덕홍의 장남으로 오천 본가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서 13, 14세에 이미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일찍 향시에 합격하였지만 어지러운 과장(科場)의 모습을 보고는 도를 굽혀 명예를 따르지 말라는 부친의 가르침을 받들어 벼슬을 단념하고 학업에 전념하였다. 그가 오계서당에서 성학을 연마하고 제자를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는 스승 정구(鄭逑)와 학우 장현광(張顯光)이 찾아와 ‘대를 이은 가학’이라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역리와 도학에 정통하여 앞일을 예지하는 경지에 이르러 광해군 때 당쟁이 극심해지자 조정에서 벼슬하는 동생 4형제와 아들의 앞날을 걱정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아우들이 화를 당하자 두문불출하다가 1636년(인조 14) 세상을 떠났다. 1724년 오계서원에 배향(1724년)되었다. 유고로 『선오당일고』가 있다.

마을이야기

영주 > 평은문수권 > 천본리
- 유학자 이덕홍의 발자취를 따라, 천본리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는 서남향으로 내성천이 흐르고 동향으로 원천천이 합류가 되며 동쪽의 망월동, 우측의 영지산이 준엄한 자세로 솟아 있다.
천본리는 조선시대 영천군 천상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말천동·망월동·우천동·본리 일부를 병합하여 말천과 본리의 이름을 따서 천본리라 하고, 영주군 평은면에 편입되었다. 천본리는 1·2리로 나누어져 있는데, 1리는 와뚜들·멀래·서부럼, 2리는 내매·망월마을이 있다.
와뚜들은 옛날부터 이곳에 기와를 굽던 굴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조선 후기 기와굴이 없어졌다 한다. 멀래는 낙동강 상류에 위치한 마을로 원천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내성천과 원천천이 합수하는 곳에 자리 잡은 내매는 동리의 모양이 흡사 매화와 같다. 그래서 이곳을 매화낙지라는 설에 의해 동명을 내매라 했다. 음지내매는 내성천 동쪽에 위치하고, 양지대매는 내성천 서쪽에 있는데 이곳은 지금 이산면 신천리에 속해 있다. 내매는 조선시대 천상면의 소재지가 있던 곳이다. 망월은 음력 정월대보름날 달을 보기 좋은 곳에 위치한 동리라 하여 망월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천본리에는 간재 이덕홍을 모신 오계서원과 간재가 지은 군자정이 남아 있다. 또한 윗두들 남쪽에는 송복원이 지은 만대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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