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세관음상(救世觀音像)
나라(奈良)의 법륭사(法隆寺)에는 팔각원당(八角圓堂)으로 만들어진 몽전(夢殿유메도노)이
있고 그 안에는 오랫동안 비불(秘佛)로 공개되지 않은 불상이 있는데, 그 불상이 구세관음상이다.
전각 이름이 몽전(夢殿)인 것은 이 절을 창건한 쇼토쿠태자가 고구려 혜자慧慈스님과 백제의
혜총慧總스님으로부터 이곳 몽전에서 부처님 경전을 배웠다. 그리고 태자 혼자서 법화경을
공부하다가 어려운 대목이 나오면 꿈에 귀인이 현몽하여 경전을 풀이한데서 몽전이라 하였다.
쇼토쿠태자는 추고推古천황(여성천황) 30년 (622) 49세로 서거할 때까지 17년간 이 궁(몽전)에서
살았다. 몽전은 비불(秘佛)의 전통에 따라 지금도 일 년에 두 번만 공개 하는데 봄(4월11일~5월5일)과
가을(10월22~11월 3일)에만 일반인에게 공개한다. 목조 구세관음상의 높이 1m78cm
구세관음상은 미국인 어네스트 페놀로사 (Ernest Fenollosa, 1853–1908)와 관련이 있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1878년 일본 동경대학에서 철학과 경제학을 가르쳤다. 그는 회화(繪畵)에 특별한
지식을 가지고 일본의 역사적인 고미술품의 발굴, 등록 및 문화재보호법 제정등의 탁월한 업적을
일본에 남겼다. 1884년 31세때 그는 일본 정부의 보물조사단에 임명되어, 문부성 직원이며 그의
제자인 오까쿠라 텐신(岡倉天心)과 함께 나라와 교토의 고대 신사와 사찰을 탐방한다. 이 조사의
최대의 목적은 법륭사 몽전(유메도노)의 개비(開秘)였다.
내부에는 천년전 창건 당시부터 “구세관음상 (일명:쇼토쿠태자등신상)”이 보관되어 있지만, 주지스님도
봐서는 안 되는 “절대비불”로 되어있었다. 절대비불이란 어떤 경우에도 사람들에게 보이면 안 되는
것으로 전해 오는 비밀의 부처님으로 일본에 가끔 눈에 띄는 전통이다. 법륭사 스님들은 “개비하면
지진이 일어나 이 세상이 멸망한다”고 말했으나 페놀로사는 정부의 허가증을 내밀고 자물통을 열도록
하였다. 밀고 당기는 실랑이를 거쳐 몽전에 들어가자, 관음상은 천으로 돌돌 감겨 있었다. 페놀로사는
감격적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오랜세월 동안 사용한 적이 없는 열쇠가 자물통 속에서 금속음을
내었을 때의 감격은 언제까지나 잊을 수 없다. 불상이 안치된 전각의 문을 열자, 목면의 천으로
붕대처럼 몇 겹이고 둘둘 감아진 사람 키 높이 정도의 물건이 있었다. 천은 약 450미터나 되었고,
그것을 푸는 것도 쉽지 않았다. 드디어 감겨있던 마지막의 천이 풀려 나가자, 이 경탄할 만한, 세계에
둘도 없는 조상彫像은 수세기를 지나 우리의 면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구세관음은 보일 듯 말 듯,
미소 짓고 있었다. 이 장면을 바라 본 사람 모두 그 아름다움에 경탄하며 할 말을 잃었다.
페놀로사는 구세관음과 만나고 난 다음 해 1886년 32세때 그는 기독교를 버리고, 불교도로 개종하였다.
시가현 미쓰이데라 (三井寺=園城寺)에서 수계(受戒), 체신(諦信)이란 불명을 받았다. 2008년은 그의
사후 100년이 되는 해라서 일본에서 그의 업적을 기리는 행사가 열렸다.
구세관음상은 백제에서 만든 불상이다. 백제 위덕왕이 부왕 성왕을 추모하여 일본 왕실에 보냈고,
처음에는 법흥사(法興寺) 금당에 서기 593년 안치시켰다 그리고 나중에 법륭사로 옮겼는데 이같은
기록은 “성덕태자전력”과 “부상략기” “성예초(聖譽抄)” 일본측 자료에서 나오는 내용이다. “부상략기”에
보면 구세관음은 백제국왕이 서거한 뒤에 국왕을 몹시 그리워 하면서 만든 불상이다
(故威德王 戀慕父王 狀所造顯之尊像 卽救世觀音像是也). 성왕이 죽은 뒤 환생한 분이 일본의
쇼토쿠태자이다라고 되어 있다.
법륭사 사료에는 “上宮王(쇼토쿠태자)等身관세음보살상”이라고 불리워왔다. 쇼토쿠태자가 49세로
입적하고 몽전은 화재로 유실된다. 100년이 지나 행신行信스님이 원력을 세워 몽전을 새롭게
건립하고 원래 있던 쇼토쿠태자 등신상을 이곳에 모시게 되는데 이것이 구세관음상이다.
법륭사 몽전(夢殿)에는 일본에서 성인으로 추앙하는 쇼토쿠태자(성덕태자)가 모셔져 있는데
이것을 “쇼토쿠태자등신상”이라 하고 구세관음상이라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많은 학자들은
몽전의 구세관음상(救世觀音像)은 백제 성왕을 추모하는 만든 관음상이라고 주장한다.
동국대학교 김상현교수의 글을 소개한다.
15세기 초에 법륭사 성예(聖譽)스님이 쓴『성예초(聖譽鈔)』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威德戀慕父王像 所造顯之尊像卽 救世觀音像是也」“위덕왕이 부왕(성왕)을 연모하여 만들어서
나타낸 존상이 구세관음상이다.” 일본 국보로 보존되고 있는 법륭사 몽전의 구세관음상에서 백제
성왕의 얼굴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신기할 뿐이다.
백제는 27대 위덕왕 시절, 일본에는 오늘의 일본국가 틀을 잡은 성덕태자(聖德太子)가 누이를
대신해 섭정을 하고 있었다. 위덕왕은 일본에 불교를 전한 성왕의 아들이다. 당시 한반도는 백제,
고구려, 신라가 한강 유역을 두고 격전을 펼치고 있었다. 어느날 성왕은 전쟁터에 있는 태자를
격려하기 위해 나섰다가 신라군에 포위되어 참살당하고 만다. 자신 때문에 부왕을 잃은 죄책감에
태자는 출가를 결심하지만 대신들의 만류로 돌아선다. 그 대신 청년 100여명을 출가시켜 성왕의
명복을 기원한다. 부친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달랠 수 없었던 위덕왕은 성왕을 모델로 불상을
조성했다. 이것이 일본 법륭사 몽전에 있는 구세관음이다.
어느날, 백제 아좌태자(성왕의 손자)가 사신으로 일본을 방문한다. 처음으로 성덕태자를 만난
아좌태자는 깜짝 놀란다. 성덕태자의 모습이 백제에 있는 구세관음상과 같았기 때문이다. 아좌태자는
귀국 후 위덕왕에게 이같은 사실을 전한다. 위덕왕은 평소 일본에 불교를 전하며 일본을 애틋하게
챙기던 부친이 성덕태자로 환생했다며 기뻐했다. 그리고 부왕의 모습을 본떠 조성한 구세관음을
일본으로 보낸다. 성덕태자는 선대부터 펼치던 법륭사 불사를 위해 백제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
백제의 건축, 와당, 도자기, 불상 등 다양한 전문가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간다. 건설관련 대형회사가
통째로 옮겨진 것이다. 이들은 성덕태자의 후원으로 법륭사는 물론 광륭사, 사천왕사 등 아스카 7대
사찰을 건립한다.
오랜 역사의 비밀을 찾아 진실을 밝혀낸다는 것은 흩어진 조각을 맞추는 퍼즐 게임과도 같다. 각지에
흩어져 있는 역사의 파편들을 모아 하나로 모으다보면 아득한 옛 이야기들이 파노라마처럼 우리 곁에
펼쳐진다.
지난 1993년 부여 능산리 사지에서 발견된 백제 금동대향로와 일본의 일본 법륭사(法隆寺) 몽전(夢殿)에
비밀스럽게 전해지는 구세관음.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이 두 가지 불교문화재가 원래는 백제 성왕을
기리기 위한 성물(聖物)이었으며, 백제 땅 부여 능산리 사지에 함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제기
된 것은 동국대 김상현 교수였다. 김 교수는 1999년 4월 ‘백제 위덕왕의 부왕을 위한 추복과
몽전관음’이라는 논문을 통해 일본 법륭사 몽전의 구세관음이 성왕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유상(遺像)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그의 주장은 한·일 양국학자들 사이에 엄청난 파문을 몰고
왔는데, 그도 그럴 것이 몽전관음은 백제 양식이지만 일본에서 만들어졌고, 일본 불교의 개창조인
성덕태자의 등신상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김 교수의 이러한 주장의 바탕에는 15세기 경
일본 성예(聖譽)스님이 저술한 성예초(聖譽抄)라는 귀중한 자료의 발견이 근거가 됐다.
성예초에는 구세관음의 성왕유상설을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위덕왕의 부왕 성왕을 연모하여
그 존상을 만드나니, 구세음관이 바로 이것이다(故威德王 戀慕父王 狀所造顯之尊像 卽求世觀音像是也)
라는 구절이 있다. 또 이것이 성덕태자의 모습이라고 알려진 것은 성덕태자의 전생이 바로 성왕이었다는
설에 의거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몽전의 구세관음은 이러 내용을 뒷받침하듯 일반 보살상과 다른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1m78cm라는 장신에 흩어진 머리가 어깨를 덮고 있고, 코가 유난히 큰데다, 이형의 콧수염,
관리의 신분을 표시하는 대 등을 착용하고 있다. 보살이 아닌 신분이 높은 관리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몽전관음과 백제금동대향로는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주장은 어떻게 가능할까? 김 교수는
백제금동향로가 발견된 능산리사지에서 창왕명사리함(昌王名舍利함)이 발견된 것에 주목하고 있다.
창왕은 바로 성왕의 아들인 위덕왕으로 일본서기에 위덕왕은 억울하게 죽은 성왕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당시로는 엄청난 숫자인 100여명을 출가시켜 추복불사 (追福佛事)를 하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추복불사의 장소가 바로 능산리 사지였음이 밝혀진
것이다. 따라서 금동대향로가 능산리사지에 모셔졌던 성왕의 구세관음 앞에 놓인 향로로 놓였을
것이라는 추론은 자연스런 것이다. 성왕은 신라군에 잡혀 노비에게 죽음을 맞이하는 비운의 왕이기도
하다. 14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성왕의 모습이 찬란한 불교문화재로 화현해 한·일 양국에 남아있음이
그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위로가 됐으면 한다.
-복천사 일광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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