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2012년 분청도자기 축제 로고
(최근 강석순의 작품도자기(제작중))
내가 45년 전 중학교 때는 진례에서 도자기를 본 적이 없다. 본 것이 있다면 겨우 진례 점에(청곡)에 옹기 만드는 굴이 있는 것만 기억이 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최근 진례에는 도자기 업체만도 80여곳이 되고, 해마다 10월이면 분청도자기축제가 전국행사로 개최되는 등 부산하다. 또 김해시가 자랑하는 (흙+건축)연구소 진례클레이아크 앞에서 농협주유소에 이르는 도자기 거리도 곧 착공을 앞두고 있다. 그래서 인지 사람들은 진례가 도자기 고장이라고 알고 있다.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 항상 의문이었는데 오늘 그 해답이 풀렸다.
(인화무늬 생활용 분청자기)
몇 일 전 진례중총동창회 체육대회를 한답시고 사전 10계단 선후배 모임에 가서 후배기수 28회 총무 강석순을 만났는데 마침 도자업를 하고 있었다. 바로 내 직장 옆에 공장(령선도예)이 있어 찾아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참고로 강후배는 결혼 전 23세 때부터 오빠와 같이 도자기를 하여 도자 기술자로서는 가장 젊은 축에 들어가는 귀한 인물이다. 특히 섬세성을 지닌 여성으로서 미술까지 전공하였기 더욱 그러하다. 도자기를 빗는 그의 솜씨를 옆에서 지켜보노라면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증언을 통해 진례 도자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생활용 분청자기)
옛날 가야시대 토기기술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역사를 통해 잘 안다. 계속 진례를 포함한 가야땅에 도자기술이 전승되어 오다가 일본이 임진왜란 때 도공을 모두 인질로 잡아갔다. 그 후 진례에는 도자업이 없어지고 점차 옹기를 만드는 마을로 변해 갔다. 진례면사무소 주위 청곡부락를 ‘점에’라고도 하는데 이는 옹기 갯수를 셀 때 한 점 두 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영향으로 지금도 도자기를 셀 때 한 점, 두 점 식으로 센다. 그나마 옹기도 몇 십년 전까지 유지되다가 편리성만 추구하는 플라스틱등에 밀려 쇠퇴하기 시작했다.
(인화무늬를 나타내기 위한 도장. 이 도장을 흙에다 꼭 찍는다)
그때, 지금부터 약 35여년 전,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에서 도자업으로 부자가 된 재일교포에게 조국에 도자기 기술을 전승해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한다. 교포사장이 문헌을 찾아내어 본 결과 김해 진례가 도자기의 본 공장이라고 했고 자신이 직접 한국에 나와 진례 다곡에 도자기 공장을 만들어 운영을 하였다(*참고로 나는 젊은 30대 시절 소방점검차 (구)김해요업 타일공장 옆 이 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여기서 만든 도자기는 인화기법(도장을 새겨 꽃무늬를 찍는 법. 위 사진 참조)의 생활도자기를 만들어 전량 일본에 판매를 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인화기법이 대단히 유행하여 재고가 없을 정도로 잘 팔렸다고 한다. 교포사장이 약 20여년간 운영하다가 타계한 후 공장이 문을 닫았는데 그 밑에서 일을 했던 10여명 정도의 일꾼이 나와서 도자업을 시작한 것이 진례도자기 재번성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작품용 분청도자기)
약 10여년 전부터 우리 국내에서도 인화무늬기법의 분청도자기가 붐을 탔는데 바로 이 공장에서 일했던 종업원들이 그 배운 기술을 십분 이용하여 분청도자기 전성기를 이루고 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다.
처음에는 수준이 서툴렀지만 현재에 이르러서는 경쟁 체제하에서 상당히 기술이 진보되었다고 한다. 원래 도자기는 분지로 둘러싸여 안개가 자욱한 기후 조건과 적당한 불의 온도로 인하여 그 질이 결정되므로 진례가 도자기 하기에 최적합 지역이라는 것이다. 이런 진례 땅에서 난 도자 흙으로 분을 발라 불을 지피면 청색을 띠는 도자기가 나오는데 이것을 ‘분청도자기’라고 하며 진례의 명물이 되었다. 그래서 10~30년 전에는 도자업이 상당히 재미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업체가 너무 많아 별로 인데 그러다보니 생활도자기에 손을 댈 수 밖에 없었고 꾸준히 판매소에 납품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어 소위 작품 도자기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작품용 분청도자기)
진례 분청자기에 대하여 강석순에게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분청기법이 전파되어 어디서든 분청도자기를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도자기의 일번지인 여주, 이천에 가면 그들은 더 정교한 기법으로 분청도자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례도자기가 그들보다는 투박하고 밉상이지만 작품성은 더 뛰어나고 소비자들에게 더 인기가 많습니다. 많은 요업들이 문을 닫고 있지만 유일하게 그 나마 진례가 흙으로 먹고 사는 이유는 수작업 기법이 뛰어나고 부지런함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라고 했다. 강석순 후배를 만나고 나오면서 10년쯤 지나 나이 60정도가 넘어가면 귀한 진례 도자기의 산증인이 될꺼라고 격려를 했다. 강석순의 오랜 경험과 그의 여성적 섬세함과 현대미술 감각이 합쳐 완숙한 조화를 이룰 그 날을 기대해 본다.
(작품용 분청도자기 분을 바르고 건조중)
첫댓글 "점에" 가 그런 깊은 뜻이 있었네..지금도 우리는 점에라고 부르지..청곡이라고 안부르고..진례도자기는 우리집에도 여러개 있는데 다 이런 역사를 가지고 우리 부엌까지 온거고나..투박하면서 서민적인 분청생활도자기 나도 무척 아끼고 좋아하는데 다음에 진례가면 강석순꼭 만나봐야 겠구나..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사실 처음에 나온 도자기는 별로라서 아버지께서 몇점 주시던 화병같은건 이사하는 통에 어디론가 다 가버리고 찾지도 않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버지의 유품이고 아주 귀한 건데 말야..아이고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