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예사조(Literary current)
문예의 역사를 통하여 변천하고 분화하는 정신적 조류를 말한 다. 이것은 N. 하르트만의 이른바 「객관적 정신」(der objekti -ve Geist)으로서의 존재형식을 갖는다. 이 문예상의 객관적 정신은 개개의 작품에 고정된 「객관화된 정신」(der objektiviet -re G.)과는 달리 부단히 생생하게 유동하는 실재적인 살아있는 정신이며, 또한 개개의 작가나 독자의 「개인적(주관적) 정신」 (der personale od. subjektive G.) 과 달라서, 개체의 생에 맡겨지지만 그러한 것 위에 초월하여 존재하며, 고유의 초개인적인 생과 힘을 가지고 그러한 것을 지배하는 역사적 공동정신이 다. 문예사의 여러 단계마다 역사적 사회적 통일체 (시대, 민족, 지역 등)에 각각의 문예사조를 인정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러한 것은 각각 독자적인 시적 예술의사(문예사조)를 가지고 일관되어, 그 목표에 따라서 방향 지워져, 일정 범위에 공통된 특색을 갖는 유형적 현상으로서 존재하며, 따라서 그 작품에 있어서 대상적 현현은 일정한 역사적 양식으로서 파악된다. 이 관계는 다른 예술의 경우와 같은 방식이지만, 문예에 있어서는 그 성질상 양식을 직관적으로 포착하는 것은 비교적 어려우며, 오히려 그 배후에 있는 사건의 흐름이 역사의 초개체적 형성과정을 담당하는 것으로서 중시되는 것이다.
문예사조의 시대적 변천과 민족적 지역적 분화와의 근거 내지 조건으로는, (1) 지리적 풍토적 환경, (2) 인종적 혈족적 소질, (3) 사회적 경제적 및 정치적 정세, (4) 정신사적 문화사적 상황(특히 종교나 철학과 같은 이념적 문화와의 관련)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또한 문예사조는 당대의 다른 예술들의 동향과 근 본적으로 상통하며 이러한 것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그 자신에 내재하는 고유의 객관적 의사를 동인으로 하여 자율 적 발전을 이룬다.
그리고 각 시대의 지도적 작가가 그 개성적 인격성으로 문예사조의 경향에 규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문예학 연구방향들 가운데 대부분은 이상의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구분되어진다. 그러나 문예발전의 역사적 현실에서는 그러한 요인에 의해 규정된 양식통일이 서로 복합되어 다채로운 현상을 나타내 보이며, 특히 시대의 일반적 요구와 민족의 기본적 성격과의 상호관계로부터, 어떤 시대사조 (예를 들면 고전주의) 는 어떤 민족(예를 들면 프랑스)에게서, 어느 국민적 양식(예를 들면 독일적 양식)은 어떤 시기(예를 들면 낭만주의)에 가장 농후하게 그 특색을 나타내며, 다른 경우에는 비교적 약하게 표현된다. 또한 문예사조의 성쇠는 쟝르의 발전과 관련성을 갖는데, 대체로 희곡은 고전주의, 소설은 사실주의, 서정시는 낭만주의 또는 상징주의 하에서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는 동시에 그 자신의 발전의 정점에 달한다.
2. 고전주의(Classicism)
이 명칭은 광의로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고전적 문예작품을 모범으로 하여 그것을 계승하려는 모든 예술경향을 말한다.
이 광의의 고전주의에 포함되는 르네상스 양식은,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일어나 뻬트라르카, 보카치오로부터 16세기 또르꽈또, 따쏘가 죽기까지 계속되며, 이것이 각국에 전파되어 영국에서는 모어 (Thomas More), 프랑스에서는 라블레 (Francois Rabelais), 롱사르 (Pierre de Ronsard), 몽떼뉴, 독일에서는 루터 (Martin Luther), 플란더스에서는 에라스무스(Disderius Erasmus) 등이 각기 대표된다. 이것은 중세의 종교적 정치적 속박에서 벗어나 고전의 정신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자유로운 인간성의 확립을 꾀하는 혁신운동으로, 인문주의(Humanism)라고도 불린다.
그 후 17세기 전반에 조형예술을 선두로 예술전반에 걸쳐 출현 한 바로크 양식은 문예에 있어서도 이탈리아의 마리노(Giambat- tista Marino), 스페인의 공고라 (Luis de Gongora y Argote), 독일의 그리피우스(Andreas Gryphius), 그림멜스하우젠(Christo -ffel Grimmelshaussen) 등의 작품에 나타났다. 그 특색으로는 피안에의 희구와 현세주의, 금욕과 향락주의, 신의 뜻과 자연등 상호모순 되는 요소들이 정돈되지 않은 채 어지럽게 병존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색은 흔히 억압된 감정의 격발, 속박이 풀려진 공상의 표출로 해석된다. 바로크도 후기에 이르면 과장된 표현, 비유의 과잉, 현학취미 등, 피상적인 면에만 국한된 천박 한 작품이 많이 나오고, 본래의 정신적 약동이 자취를 감추고 만다.
협의의 고전주의는 그 이후에 도래했다. 이 양식은 우선 프랑스에서 17세기 꼬르네이으, 라신느(Jean Racine), 브왈로, 몰리에르(Molidre, 본명 Jean-Baptiste Poquelin), 라 퐁뗀느( Jean deLa Fontaine)를 중심으로 시작되어, 뒤이어 영국에서 드라이든을 거쳐 브왈로의 영향을 받은 포프를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또한 독일에서는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 1786)부터 쉴러의 죽음(1805)에 이르는 20년 동안에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명칭은 후에 낭만주의와의 대비에서 붙여진 것이며, 이들 작가들이 자칭한 것은 아니다.
이 고전주의는 데카르트를 대표로 하는 근대 합리주의와, 고대 적인 미의 부흥을 꾀한 휴머니즘 사이에서의 균형을 문예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단적인 표징은 유일한 진리를 합리적 지성에 의해 희구하는 절대주의와, 형식의 통일을 중시하는 표현의욕과의 결합에 있다. 여기서는 개성적인 것보다 보편적 또는 유형적인 것이, 「특성미」 (das Charakteristische) 보다 협의의 「미」(das Schone)가, 현실에 입각한 것보다 이것을 양양하는 것이 요구되어지며, 생의 무한한 유동보다 균형 있는 형식적 통일을, 감정의 충만함보다 합리적 지성이나 직관의 명석함이 중시된다. 따라서 그 양식은 낭만주의에 반하여 정적 합리적이며 「완성」의 이념을 지향한다.
이러한 고전주의적 경향은 또한 다른 시대, 다른 민족에게서도 발견될 수 있다. 이점에서 고전주의의 개념은 넓은 의미에서는 특정한 역사적 양식을 초월하여, 문예 일반의 기본유형의 의미로 확대되는 것이다.
의(擬)고전주의(pseudo-classicism)라는 것은, 나라마다 그 의 미가 다르다. 프랑스에서는 17세기 고전주의의 후계자를 가리키며, 볼테르가 그 대표자이다. 독일에서는 클롭쉬톡 ( Friedrich Gottlieb Klopstock), 비란트(Christoph Martin Wieland), 렛싱, 빙켈만 등이 고대문예에 대하여 수용적인 태도를 가졌던 사실을 말하며, 그것에 이어서 진정한 고전주의가 고전의 정신을 독일 정신 내에 적극적으로 소생시킨 데 대비하여, 의고전주의라고 불려진다. 또한 영국에서는 고전주의의 형체만을 추구했던 사이비 경향을 말하며, 이것은 18세기 영국의 시단을 거의 일관하고 있다.
3. 낭만주의(Romanticism)
romantic이라는 말은 프랑스어 romant에서 유래한다. 이것은 라틴어의 방언인 로만스어로 쓰여진 이야기를 의미했으나, 그 내용이 주로 중세 기사의 공상적 모험담이었으므로, 진기한 경이적인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이 부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고, 시가(詩歌)를 생각나게 하는 듯한 풍경 장소의 의미로 쓰여진 것은 18세기 후반이며, 18세기 말엽 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새로운 문예사조가 일어나자, 그에 속하는 작가들이 스스로 하나의 유파로서 낭만주의를 자칭한 것이다. 문예 사에서 낭만주의 시대로 지칭되고 있는 것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전반까지이다. 독일에서의 낭만주의는 1798년부터 18 30년경에 이르며, 쉴레겔 형제를 선두로 노발리스, 쟝 파울, 티 크, 브렌타노(Clemens Brentano), 클라이스트, 호프만 등에 의하여 대표된다.
영국에서도 1798년 워즈워드와 콜리지의 『Lyrical Ballads』 가 출판되면서부터 명확한 형을 이루었으며, 이 두 사람을 선두로 하여 스코트 ( Sir Walter Scott ), 바이런 ( George Gordon Byron), 셸리(Percy Bysshe Shelly), 키이츠(John Keats) 등을 주요작가로 한다. 또한 프랑스에서는 스따엘부인과 샤또브리앙 을 선구자 또는 독일 영국으로부터의 도입자로 해서, 1820년 라 마르띤느 ( Alphonse Marie Louis de Prat de Lamartine )의 『 Meditations poetiques』에서 시작되어, 비뉘(Alfred de Vigny), 위고(Victor Hugo), 뮈쎄(Alfred de Musset), 상드(George Sand, 본명 Aurore Dupin) 등의 작가가 이에 속하며 - 스땅달(Stendhal, 본명 Henri Beyle)과 발작(Honore de Balzac) 작품의 일부도 이 에 속한다 - 1850년까지 계속된다. 조금 뒤늦게 이탈리아 스페인 러시아 등 거의 전 유럽에 파급되고 아메리카에도 전파되었다. 이러한 문예운동은 시대정신의 일반적 변천을 배경으로 발달한 것으로, 다른 예술영역과도 평행현상이 보여질 뿐만 아니라 철 학 역사 등의 사상과도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이런 의미에서 낭만주의는 문예 사에서의 한 시대양식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 라 정신사에서의 한 시대사조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 발단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낭만주의는 일종의 문예상의 혁명을 의도한 운동이었다. 따라서 그 특색도 고전주의와 서로 대립하는 경향을 지닌다. 1) 엄격한 규칙이나 질서에 구속되지 않고, 풍부한 상상력을 구사하여 생의 자유롭고 무한한 유동에 따 라, 분방한 감정의 유출을 구한다. 그러므로 고전주의가 조소적 객관적 정적이며 「존재양식」에 포함되어진다고 한다면, 낭만주의는 음악적 주관적 동적이며 「생성양식」에 속한다. 2) 미 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공간적으로는 외국의, 시간적으로는 과거 시대의 예술에, 자국의 당대 예술과 동등한 가치를 두고자 하는 상대주의이다. 여기에서 엑조티시즘(Exoticism) 내지 코스모폴 리타니즘을 낳는다. 3) 보편성보다 개성을 중시하며 자기고백의 경향이 뚜렷하여, 서정시 및 소설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4) 「 무한」의 이념을 추구하며 늘 현실을 고양시키려는 경향이 강하 다. 이런 의미에서는 고전주의와 같은 류의 이상주의에 속하며 사실주의와 다르다. 자연을 사랑하며 먼 나라는 동경하고 중세를 찬미하는 것 등은 현실유리라고도 생각되어지지만, 현실의 이상화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고전주의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데서 시작하여 이 광범위하게 파급된 문예운동은, 원래 낭만적 성격을 갖는 게르만 민족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유럽 전 체에 한층 깊은 근대적 자각을 가한 것이며, 그 정신사적 의의 는 더없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낭만주의는 특정한 역사적 양식으로서의 개념을 초월하여, 다른 시대에 같은 류의 경향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이점에서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와 함께 문예일반의 초시대적인 기본유형을 이루는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한국의 낭만주의
한국의 낭만주의 문학은 1920년대에 《백조(白潮)》를 중심으로 일기 시작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퇴색하기 시작하여 1924년도에는 완전히 종말을 고하고, 다만 그 영향만이 1930년대의 서정시인들에게 미치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국민적 희망을 잃고 식민지 지배 하에 놓이게 된 문인들은 실의와 허탈에 빠져 자포자기적이고 퇴폐주의적인 문학을 낳았다.
《백조》에 앞서 발간된 《폐허(廢墟)》에서 염상섭(廉想涉)․김억(金億) 등의 문인들은 퇴폐문학의 지양을 부르짖기도 하였으나, 오상순(吳相淳)․황석우(黃錫禹) 등의 작품에는 퇴폐적․허무적․유미적 색채가 짙었고, 이런 경향이 마침내 낭만주의 문학의 온상을 이루게 되었다. 1922년 1월 《백조》가 발간되어 홍사용(洪思容)․박종화(朴鍾和)․현진건(玄鎭健)․이상화(李相和)․나도향(羅稻香)․노자영(盧子泳)․박영희(朴英熙) 등이 이에 관여하면서 한국의 낭만주의 문학은 본격적으로 싹트게 되는데, 이들도 《폐허》의 동인들과 마찬가지로 건전한 이상과 미래를 내다볼 수 없는 시대적 여건 속에서 절망에 빠진 결과, 그 도피구(逃避口)로서 몽상(夢想), 즉 낭만의 세계를 추구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홍사용의 《나는 왕이로소이다》와 같은 염세적 감상주의,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 박영희의 《꿈의 나라》과 같은 동경(憧憬)과 꿈의 세계를 다룬 낭만문학이 꽃피게 되었다. 이 시기는 한국문학사상 하나의 문예사조로서는 가장 찬연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또한 싫건 좋건 오랫동안 그 영향이 미쳤다. 그러나 한국의 낭만주의 문학은 서구문학에서처럼 역사적인 필연성에서 생긴 근대적 자아의식의 각성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서구사조(西歐思潮)의 단순한 외형적 모방에서 시작된 것이었으나, 한국 초기의 여러 문예사조와 함께 이 나라의 근대화 과정에서 그런 대로 중요한 일익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시의 낭만적 경향이 서구시의 낭만과 그 경향이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1919년 [창조] 창간호에 발표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시라는 평가를 듣는 송아 주요한의 [불놀이]는 분명히 낭만적인 경향의 시요, 이 낭만성의 추세는 20년대의 한국 시를 지배한다.
1920년에 그 창간호를 낸 문예동인지 [폐허]를 통하여 안서 김 억이 등장하여 센티멘탈을 노래하였고, 남궁벽, 오상순, 황석우 등이 낭만주의적 정신을 기조로 시를 썼다. 물론 퇴폐적 분위기가 짙었던 것도 사실이었으나 그것은 당시의 낭만적 기질을 별도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였다.
1921년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시 동인지 [장미촌]이 창간되었다. 주요 동인은 수주 변영로, 춘성 노자영, 월탄 박종화, 회월 박영희 등이다. [장미촌]은 비록 2호의 단명으로 폐간되기는 했으나, 낭만주의라는 특정된 한 목표를 명백히 주장하고 나선 최초의 시 전문지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1922년에 낭만주의를 표방하고 간행된 문예 동인지 [백조]는 그 동인의 대부분이 [장미촌]의 동인들이었다. 그 외에 노작 홍사용은 센티멘탈에 빠진 시를 썼고, 상화 이상화는 격렬하면서도 적당한 언어 배치의 조화를 얻은 가작들을 발표하였다.
1923년에는 일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문예지 [금성]이 간행되었는데, 배출된 주요 시인으로 무애 양주동, 류엽 백기만, 고월 이장희 등이 있다.
20년대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2대 일간지 이외에[개벽](1920), [조선 문단](1924), [해외 문학](1927) 등 주요 잡지가 간행되어 많은 시인들이 등장하였다. 노산 이은상, 파인 김동환, 석송 김형원, 위당 정인보, 탄실 김 영순, 김동명, 김소월, 만해 한용운 등이 그들이다.
20년대의 시인들은 낭만주의 이외에 퇴폐주의, 상징주의 또는 신낭만주의 등을 정식으로 선언하고, 서구 낭만시 이후의 온갖 세기말적 경향을 잡다하게 짧은 기간 동안에 이입하여 각기 자기네의 감정의 의거처로 삼아 보려 하였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낭만시의 범주 속에 넣어 말할 수 있다.
「백조」지는 편집인 홍사용(洪思容). 발행인 H.G.아펜젤러. 경성문화사 발행. 동인은 홍사용 ․박종화(朴鍾和) ․현진건(玄鎭健) ․이상화(李相和) ․나도향(羅稻香) ․노자영(盧子泳) ․박영희(朴英熙) ․안석영(安夕影) ․원우전(元雨田) ․이광수(李光洙) ․오천석(吳天錫) 등이며, 3호부터 김기진(金基鎭)이 참가했다. 한국 근대 낭만주의의 화원(花園)으로 불리는 이 잡지는 통권 3호로 끝났지만 각 권마다 중요한 작품이 수록되었다.
제1호에 월탄(月灘:박종화)의 시 《밀실(密室)로 가다》를 비롯하여 이상화의 《말세의 희탄(阮嘆)》, 나도향의 소설 《젊은이의 시절》, 1922년 5월에 간행된 제2호에는 나도향의 소설 《별을 안거든 우지나 말걸》, 현진건의 《유린(蹂춥)》, 회월(懷月:박영희)의 시 《꿈의 나라로》, 노작(露雀:홍사용)의 《봄은 가더이다》, 월탄의 《흑방비곡(黑房悲曲)》, 1923년 9월에 간행된 제3호에는 시에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 노작의 《흐르는 물을 붙들고서》 《나는 왕이로소이다》 《그것은 모두 꿈이었지마는》, 소설에 나도향의 《여이발사(女理髮師)》, 월탄의 《목매이는 여자》, 희곡에 월탄의 《죽음보다 아프다》(전1막) 등이 실려 있다.
이들 작품에는 3 ․1운동의 실패에서 온 절망감이 그대로 반영되어 애수와 한, 그리고 자포자기적인 영탄(詠嘆)과 유미탐구(唯美探究)의 경향이 뚜렷하다.
4. 사실주의(Realism)
넓은 의미에서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는 경향을 가리키며, 이상주의에 대립되는 기본유형이라고도 생각된다. 그러나 역사적 양식으로서의 사실주의는, 꽁뜨의 실증주의의 영향 아래 이상주의적인 계몽사조와 몽상적이며 희미한 낭만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프랑스 영국 독일 등에서 대체로 1850년부터 1880년 경 사이에 융성했던 문예사조를 말한다. 프랑스에서는 발작에서 그 징조를 나타내고,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공꾸르 형제 (Edmond de Goncourt & Jules de Goncourt) 등을 대표로 한다. 영국에서는 덱커레이( Wiliam Makepeace Thackeray ), 디킨즈( Charles Dickens) 등이, 독일에서는 헵벨(Christian Friedrich Hebbel), 켈러(Gottfried Keller), 루드비히(Otto Ludwig), 마이어(Conrad Ferdinand Meyer) 등이 이에 속하며, 또한 거의 비슷한 시기에 러시아에서도 뚜르게네프(I.S. Turgenev), 도스또 예프스끼(F.M. Dostoevskii), 똘스또이 등이 배출되었다.
사실주의의 특색으로는 우선 현실을 가장하거나 로마네스크한 공상 없이,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표현하는 것을 들 수 있다. 그 리고 각각의 사건이나 형상을 유형적으로가 아니라 개성적 표징으로써 묘사한다. 따라서 대상을 형성원리에 따라 미화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특성적인 것」을 존중하는 것이다. 작품의 제재는 광범위하고 실재의 인물을 배치시키며, 특히 작가와 동시대의 사실이 취급되는 일이 많고, 허구라 할지라도 기록되어 있는 듯한 형식을 취한다. 이러한 경향은 당연히 산문 특히 소설에 적합하여, 사실주의 시대는 소설의 전례 없는 황금시대를 이룬다.
이상의 여러 가지 점에서 볼 때, 낭만주의가 문예의 내용상의 혁신이었던 데 비하여, 사실주의는 기술상의 진보였다고 보는 견해도 가능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사실주의는 그 객관적 관점 에 과학적 방법을 더하여 자연주의로 이행하며, 다른 한 편 외면적 사실묘사에서 내면적 심리적 사실 묘사로 심화하여 이른바 「의식의 흐름」을 추구하는 일파를 낳게 된다. 원래 이러한 진전을 예상하는 요소는 이미 사실주의에 속하는 작품들에서 보여 졌으며, 이러한 의미에서도 사실주의의 역사적 의의는 묵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의 사실주의
풍자적 ․사실적 성격을 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양반전》 등 고대 소설에서도 연원을 찾을 수는 있으나, 본격적으로 싹트기 시작한 것은 이광수(李光洙) ․최남선(崔南善)의 계몽문학에 이어 일본을 거친 사실주의 ․자연주의 사상이 유입된 이후부터이다. 특히 1919년의 3 ․1운동으로 실의와 좌절에 빠진 시대상황은 사실주의 문학을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되었으며, 같은 해 창간된 잡지 《창조(創造)》에는 김동인(金東仁)의 《약한 자의 슬픔》, 전영택(田榮澤)의 《천치? 백치?》가 게재되어 처음으로 사실주의적 경향을 드러냈다.
또한 염상섭(廉想涉) ․현진건(玄鎭健)의 작품은 자연주의 문학으로 분류되지만 자연주의나 사실주의가 모두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들의 작품도 사실주의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특히 25년 이후의 신경향파(新傾向派) 문학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특징지어지며, 30년대에는 김유정(金裕貞)의 토착적 사실주의와 이상(李箱)의 심리적 리얼리즘이 대두하였다.
작가, 작품,
1. 현진건은 '빈처','술 권하는 사회'에서 혼탁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운수 좋은 날'에서는 빈곤 속에서 파멸해 가는 하층민삶의 한 단면을 그림.
2. 염상섭은 내면의 가치의식과 현실 사이의 분열 때문에 괴로워 하는 주인공을 다룬 '표본실의 청개구리'와 '만세전'이 있다.
5. 자연주의(Naturalism)
사실주의와 명확히 구별하기는 어렵지만, 그 경향을 한층 더 실증적 과학적으로 철저히 하여 예술을 자연의 충실한 모방으로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추진된 경향이다. 주창자 졸라 ( Emile Zola)는 베르나르(Claude Bernard)의 『실험의학소설』(1865)을 본보기로 하여 『실험소설론』(1880)을 쓰고, 실험실의 박물학자와 같은 정확한 관찰과 엄밀한 실험에 의해 문예작품을 제작 할 것을 선언하며, 이러한 방침 하에 『루공-막까르 총서』(187 1-1893)에 포함된 다수의 소설을 썼다. 그와 함께 모빠상 ( Guy de Maupassnat), 도데(Alphonse Daudet), 유이스망스(Joris Karl Huysmans) 등도 역시 자연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프랑스 자연주의의 영향은 다른 나라에도 파급되어, 영국에서는 기싱(George Robert Gissing), 하디(Thomas Hardy), 독일에서는 하우프트만(Gerhart Hauptmann), 미국에서는 드라이저(Theodor Dreiser) 등이 이 문예사조의 주도자들이 되었다.
문예상의 자연주의는 무신론적 결정론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이러한 세계관에 입각해서 외적 현실을 깊이 관찰하여 근대사회에서의 인간을 해부한다. 따라서 자료조사를 중시하고, 작가의 주정적 태도를 배제하며, 광범위한 사회적 시야를 가지고 냉엄 정밀하게 대상을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하여 자연 주의 작가는 즐겨 비근한 항간의, 특히 하층민의 삶을 묘사하고, 인생의 추악상이나 인간의 수성(獸性)을 기탄 없이 조명하기 시 작 ㎎던 것이다. 이러한 특색을 지닌 자연주의가 소설과 희곡을 주요 분야로 하고, 서정시에서 멀어졌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자연주의에서 때로는 진실탐구에의 요구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예술적 효과를 무시하고 나쁜 길로 빠지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자연주의는 문예 사에 깊은 흔적을 남기면서 비교적 일찍 비판되고 초극되었다. 어쨌든 서사문예 및 극문예 분야에서 일 종의 가치규준의 전화(轉化)가 여기에서 행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사실주의가 더한층 심화된 것이라 할 수 있는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의 추구는 1920년대 사조로서 영국의 죠이스(James Joyce), 울프( Adelaine Virginia Woolf ) 및 프랑스의 프루스트(Marcel Proust) 등을 대표로 한다. 이 파는 미국의 심리학자 제임즈의 「의식의 흐름」에 관한 설 의 영향을 받았으며, 베르그송의 철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도 자극되어서 소설의 표현에 독자적인 수법을 도입한다. 그 특색은 외부에 나타난 행동보다도 내부에서 움직이는 의식, 특히 잠재의식에 주시하여, 거기에서 연속하여 일어나는 여러 가지 심상 정서 기억을 그대로 파악하여 묘사하려는 데 있다. 이 새 로운 수법은 그 후에도 계승되어, 20세기의 소설을 특징 지우는 한 동향이 되고 있다.
※한국의 자연주의
한국에서 자연주의 문학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염상섭(廉想涉)이다. 그는 1921년에 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다음해에는 평론 《개성과 예술》을 발표하여 자연주의 문학의 이론과 실제를 겸한 자연주의 문학의 포고자(布告者)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국의 자연주의 문학을 말할 때 문제가 되어온 것은 개념의 모호성과 혼돈, 자연주의와 개성, 자연주의와 개인주의의 관계, 자연주의와 프로 문학, 자연주의와 사실주의의 문제 등이다. 염상섭은 전기 논문에서 '자아의 각성', '개성의 발견', '창작상의 개성' 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자아의 각성에 대하여는 인간 정신의 가장 본절적인 의의는 자아의 각성 및 그 회복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대인의 특색이며 그 가치관으로 볼 때 곧 문예부흥이다. 개개인의 눈으로 보면 어떤 신성(神聖)이나 경건이 도리어 추악․비속으로 보일 때가 있다. 이런 심리상태를 보통 현실 폭로의 비애, 또는 환멸의 비애라 한다. 이로 말미암아 사상은 중추가 무너지고 암담과 고독을 낳고 가치관의 혼란이 야기된다. 이에 이상주의적 낭만주의시대를 경과하여 자연과학과 함께 자연주의 또는 개인주의 사상을 유발한 것이다.
둘째, 개성의 발견에 대하여는 개성이란 단독적 생명이며 그것의 유로(流露)가 곧 개성의 표현이다. 일반적 생명과 단독적 생명은 표리의 관계다. 생명은 개성의 자각과 함께 동적인 것으로 파악된다. 위대한 개성의 표현만이 모든 이상과 가치의 본체인 진선미(眞善美)로 표징되는 위대한 사업이다.
셋째, 예술창작상의 개성에 대하여는 미(美)는 쾌감의 상징이다. 그러나 생명이 없다면 쾌감이 있다고 미가 되지는 않는다. 생명의 연소(燃燒)에 미가 있다. 예술미는 작자의 개성을 투영한 창조적 직관의 세계요, 그것의 투영이 예술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생명의 유로와 활약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염상섭의 주장에 대하여 여러 논객들이 긍정 또는 부정의 논지를 폈으나, 자연주의는 결국 1920년대 전반에 수법의 문제로서나 문학관의 문제로서 강력한 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이었는데, 예를 들면 나도향(羅稻香) 등 감상적인 낭만주의적인 작가들까지도 그 세력에 끌어들이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연주의는 신경향파(新傾向派)가 등장하면서 이론적 충돌을 빚게 되지만 가령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암야(闇夜)》 《만세전(萬歲前)》 같은 작품에 비하여 신경향파의 소위 최서해(崔曙海)의 빈궁소설은 질적으로 비교가 안될 만큼 낮은 것이었으며, 신경향파 이후의 프로문학은 자연주의 문학에 이데올로기라는 의상을 입힌 문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현진건(玄鎭健)이나 김동인(金東仁) 등의 문학을 자연주의와의 관련 속에서 파악하는 경우도 없지 않으나 역시 한국의 자연주의 문학은 염상섭 한 사람에게서 집중적으로 개화(開花)했다고 할 수 있다
6. 유미주의(탐미주의, Aestheticism)
광의로는 일종의 세계관 내지 인생관으로서, 모든 가치 중에서 미를 최고로 하는 입장을 말하며, 이미 낭만파 시인이나 쉘링의 사상에서도 보여진다. 그러나 문예 사에서의 유미주의는 미의 창조를 언어예술의 유일한 목적으로 추구하는 창작태도를 말하며, 보통 「예술을 위한 예술」( L' art pour l' art )의 한 지류로서 19세기 후반에 나타난 일종의 문예사조를 가리킨다. 프랑스에서 는 포우의 영향 아래 보들레르에 의해 강조되었고, 영국에서는 로세티( Dante Gabriele Rossetti )를 선두로 하여 페이터 등이 이에 이어지며, 와일드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한다.
이러한 유미주의자는 (1) 「자연」을 배척하고 「인공」을 중시하며, 사실을 거부하고 예술의 독자적인 공상적 세계를 창조 하고자 한다. (2) 인간적 의미내용보다, 예술적 형식과 기교를 중시하며, 사상 감정보다 감각을 애호한다. 예술의 무감동성 ( impassibilite')이라고 하는 주장도 여기에서 나온다. (3) 관습이나 유형을 벗어나서 독창성을 강조하며, 참신하고 기발한 생각을 시도한다. (4) 다른 가치기준, 특히 도덕의 규범을 초탈하고 오직 미의 자율성을 드러내는 데 힘쓰며, 이 점으로부터 종 종 악을 절대적 목적으로 하여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신도 부정하는 악마주의(Satanism, Diabolism)로 연결된다. 물론 유미주의가 항상 악마주의는 아니지만, 미의 이상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반면 다른 모든 가치를 무시하고 선을 파괴하는 점에서 악으로의 경향을 따르기 쉽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술상의 유미적 태도가 실생활에 영향을 미치게 되면, 개인주의나 귀족주의와 결부되어 이른바 댄디(dandy)를 이상으로 하며, 생활 자체를 미화시키려 한다. 와일드 등은 그러한 댄디즘의 두드러진 예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유미주의는 자연주의와는 완전히 상반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도 세기말의 문예에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것으로서, 그 특징의 일면은 다음 대의 상징주의로 계승되며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현대의 실존주의에서도 일부(예를 들면 쥬네) 맥을 잇고 있다.
※한국의 유미주의
유미주의가 한 시대의 암울한 탄압과 절망 속에서 싹튼다는 주장도 잇는데, 한국 근대문학사는 이를 입증해 준다. 카프문학에 대한 탄압이 혹심했을 때 9인회는 탄생했고, 이 모임은 근대 한국문학사에서 유미주의의 한 상징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태준의 <오몽녀>나 <까마귀> 같은 작품은 일제 강압통치 아래서 비판의식이 밀폐 당했던 시기의 문학인이 미학적 통풍구로 마련했던 유미주의의 실체를 엿보게 해준다.
근대 한국 유미주의는 이효석에 이르러 자연과 성에의 집착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확대시킨다. 자연을 배경 삼아 토착적인 성애를 인간과 동물을 가리지 않고 부각시킨 이효석의 문학은 원시적인 생명욕을 아름답게 그렸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요인을 갖는다. 현대 유미주의는 순수문학 - 모더니즘의 일부분 -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쳐 해체주의와 보조를 함께 하며 가족 해체의 단계를 지나 개인 분해의 경지로 접어든지 오래다. 특히 1990년대 이후에는 에로티시즘과 밀착하여 그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에로티시즘은 현대문학의 중요한 모티브이면서도 한국에서는 넓게 보면 미학적인 형상화가 모자라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에로티시즘은 유미주의의 한계이자 출구이기도 하다
작가 : 김영랑(내마음), 현진건, 황순원, 김동인의『광화사』 『광염소나타』등.
7. 상징주의(Symbolism)
문예사적 양식으로서의 상징주의는 1880년대부터 20세기초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특히 서정시에 나타난 문예사조를 가리킨다. 이것은 사실주의 내지 자연주의에 대한 반동이면서, 동시 에 유미주의의 일면을 계승하여, 그것을 심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운동이다.
보들레르의 지대한 영향하에서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가 주도자가 되고 베를렌느(Paul Verlaine), 랭보, 좀 더 후세에는 발레리 등이 이에 동조한다. 이 운동은 독일과 영국에도 파급, 독일에서는 데멜(Richard Dehmel), 게오르게( Stephan George) 일파, 호프만쉬탈( Hugo von Hofmannsthal ) 및 릴케 ( Rainer Maria Rilke) 등이, 영국에서는 예이츠(Wiliam Butler Yeats), 시몬즈(Arthur Simons), 도우슨( Ernest Dowson ) 등이 이 파의 대표를 이룬다.
상징주의의 특색은, (1) 대상파악에 있어 지성화된 감수성을 가지고, 내면적 세계와 외면적 세계와의 조응 안에서 독자적인 현실을 발견하려는 것, (2) 표현방법에 있어서는 언어의 의미관련에 의해 명확히 규정된 일정한 내용을 묘사하기 보다, 성음현 상의 운열이나 상상심상(想像心象)의 감정효과에 의해, 오묘한 정취를 오래 남게 하려는 것이다(이 파의 「상징」은 주로 기분 상징이다).
거의 서정시에서만 행해진 이 운동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쟝르의 극점이라 할 수 있는 몇몇의 작품을 낳았다. 「순수시」 의 주장이 제기된 것도, 또한 「자유시」가 두드러지게 진화된 것 도 이 상징주의에서였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발견된 새로운 미적 현실과 그 표현기법은, 그 후 서정시에는 물론 문예의 각 분 야에 널리 이어져, 20세기 문예의 도처에 그 여파를 미치고있다.
더우기 상징주의라는 개념은, 넓게는 특정한 역사적 현상을 초월하여 예술의 하나의 가능한 창작방향 또는 양식유형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한국에서의 상징주의
한국에서의 상징주의 문학은 김억(金億) ․백대진(白大鎭)이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 제6호와 제7호에 베를렌의 《거리에 내리는 비》, 예이츠의 《꿈》 등 상징파 시인의 작품을 게재하면서 처음으로 이 이론이 소개되었으며 잇따라 베를렌의 《작시론》 등을 비롯하여 일본 작가들의 작품이 《창조》 《백조》 《폐허》를 통해 번역, 게재되었다. 김억 ․황석우(黃錫禹) ․박종화(朴鍾和) ․박영희(朴英熙) 등의 작품에서는 비록 내면적 깊이는 얕지만 상징주의적 작풍이 짙게 풍기고 있다.
8. 표현주의(Expressionism)
19세기 후반 회화의 영역에서 군림했던 인상주의는 조각이나 음악에도 파급되었고, 문예에도 적은 범위나마 파급되었다. 독일의 릴리엔크론(Detlev von Liliencron)이나 초기의 만(Thomas Mann) 등이 이에 속한다. 외계의 감각적 인상을 감관에 비친 그 대로 직접 묘사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감각적 현상의 정밀한 묘사에 의해 선명한 상상직관상(想像直觀像)을 환기하는 것이, 그 특색이다.
표현주의는 이러한 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으로서, 감정표출이라는 의미에서 표현을 예술창작의 본성으로 하는 입장이다. 특히 독일에서 많은 표현주의 화가가 배출된 데 호응하여, 문예의 영역에서도 카이저(Georg Kaiser), 베르펠 ( Franz Werfel) 등을 대표로 하여 1차 세계대전 경부터 전후 약 10년 간 에 걸친 운동이다.
표현주의의 특징은 인상주의처럼 객관적으로 감각적 인상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능동적으로 작용하여 자아 감정을 앙양시키고 정신적 인격성에 대한 가치의 자각을 추진하고자 하 는 데 있다. 표현형식으로는 종래의 법칙을 깨뜨리고, 문장구성 의 방만화, 말의 누적응집, 관사 접속사 등의 생략, 시구의 운율적 자율성 등 참신하고 대담한 수법을 지닌다. 이 양식은 서 정시에 가장 순수하고 유효하게 나타났으나, 희곡에서도 훌륭한 혁신을 일으켰으며 소설에도 어느 정도 도입되었다.
인상주의와 표현주의는 대립개념으로서 일반적으로 예술의 본 질적 형성가능성을 보이는 유형 개념으로도 사용된다.
1차대전 후에 표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신즉물주의( 新卽物主義, Neue Sachlichkeit )가 일어나, 나치스 출현가지의 약 10년 동안 독일 문단을 지배했다. 이것은 신사실주의 또는 신비적 사실주의라고도 불리며, 표현주의의 순수 주관적 경향을 배제하고, 사물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 본질을 냉정하게 묘사하고자 하는 것으로 레마르크(Erich Maria Remarque) , 브레히트 등을 그 대표로 하여 소설 희곡 서정시 등 각 방면에 파급되었다.
※한국에서의 표현주의
표현주의는 처음부터 기존의 질서와 가치를 거부하는 데에서 발생한 것인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거부해야 할 기존의 문학 자체가 정립되지 않은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 데다가 표현주의의 수용 자체가 미미한 양상을 보였으므로 한국문학에서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은 작가나 작품을 논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노릇이다. 다만 표현주의에 일찍 관심을 보였고 독일 표현주의자들이 흔히 그러했듯 파격적 자살로 생을 끝맺은 김우진의 작품, <이국의 소녀>, <이영녀>, <난파>, <산돼지> 등에서 표현주의적 편린을 검출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듯 김우진이라는 희유(稀有)한 개인을 통해 영향을 자취를 남긴 표현주의는 그 이후 이렇다 할 후계자를 갖지 못하였고 서항석에서 마무리된 표현주의 문학의 수용작업도 그 이후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그만큼 표현주의는 한국문학에 뿌리를 내리기에는 이질적인 문학운동이었고 유럽에서도 지속력이 약했던 것처럼 한국문학에서도 단명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9. 실존주의(Existentialism)
철학에서 예로부터 「본질」(essentia)의 대립개념으로 간주되는 「존재」(existentia)의 개념을, 특히 현실의 자각적 존재로서의 인간존재 고유의 본연의 자세로서 파악할 때, 이를 실존 ( Existenz, Existence)이라 하며, 그 구조를 분석하고 해명하고 자 하는 철학적인 입장을 실존주의라 한다. 이 사상은 멀리 그 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계보를 찾아볼 수 있지만, 근대에는 키에르케고르, 니체가 그 선구로 보여진다. 그러나 그것이 본래 의 실존철학으로서 명확한 현대적 형태로 발전할 것은, 훗설의 현상학 이후 하이데거나 야스퍼스에 이르러서이다. 그 독일 철학이 프랑스에도 파급되어, 특히 제2차대전 후 마르셀( Gabriel Marcel ), 싸르트르 등의 실존주의 사상을 환기시킨 것이며 이 명칭도 주로 프랑스의 경우에 쓰여지고 있다.
그런데 실존주의는 철학사조임과 동시에 문예사조로서 발전하여, 싸르트르를 선두로 하여 메를로 뽕띠, 보브와르( Simone de Beauvoir), 까뮈(Albert Camus), 아누이(Jean Anouilh), 쥬네 ( Jean Genet) 등이 그 대표작가로 주목되고 있다. 그리고 카프카 와 같은 타국의 작가도 이 경향의 선구자로서 새로이 주목되고 있다.
실존주의 작가는 까뮈와 같이 이 진영에 들기를 거부하는 자도 포함하여, 인간존재를 그 근원적 적인 부조리성에서 추구하는 것 을 공통의 특색으로 한다. 그 주도자싸르트르의 무신론적 존재론에 의하면, 인간은 「자유」의 원리에 따라서 자기를 내던지 고, 행위의 「근원적 선택」에 의하여 자기를 형성하며, 좌절을 되풀이하면서 인생의 허망을 초극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기 자신이면서 역사를 창조하는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각 사람은 역사적 상황에 참여( engagement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소설 희곡에서 구체화되며, 거기에서 인 간의 실존적 결단을 강조하는 「한계상황」을 설정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행동주의(Activisme)는 정치활동이나 혁명 운동, 모험적 생활 등의 과격한 행동을 기록적으로 작품에 기술하는 것을 특색으로 하며, 1930년대부터 현대에 이르고 있다. 그 대표자는 말로와 생떽쥐뻬리(Antoine de Saint-Exupery)이며, 그들이 이른바 「르뽀르따쥬」(reportage)의 형식을 소설에 도입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실존주의와 행동주의 모두 니힐리즘의 극복을 목표로 하는 현 대의 대표적 사조이며, 이에 속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현존하는 작가로서 지금도 그 운동은 진행되고 있다.
※한국의 실존주의문학
언제 들어왔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제2차세계대전 뒤 특히 1950년을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으로 생각된다. 1940년대에는 사르트르의 《프랑스인이 본 미국 작가(1946)》, 전창식(田昌植) 번역의 《벽(1948)》, 양주동(梁柱東)의 평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1949)》, 김명원(金明遠) 번역의 《흑사병(1950)》 등이 발표되었다. 50년대에는 정명환(鄭明煥) 번역의 《자유의 길(1958)》 《벽(1958)》, 방곤(方坤) 번역의 《구토(1959)》 등의 사르트르의 작품과 김붕구(金鵬九) 번역의《카뮈의 문학과 사상(1958)》, 정명환 번역의 《현대의 증인》 등의 카뮈의 해설 및 작품번역이 나와 실존주의가 한국의 문단을 주도하는 인상을 주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손창섭(孫昌涉)․오상원(吳尙源) 등 한국작가들에게도 인간조건의 추구라는 점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이론은 50년대 말 이후 참
문학의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장용학의 <요한시집>과 오상원의 <유예>는 의식, 존재의 문제, 소외된 인간, 의식의 흐름에 의한 기술, 죽음 등과 같은 실존주의 문학의 특성들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그것들을 통해 인간의 실존이 가능성임을 밝히고 있는 실존주의 문학이다.
10.모더니즘(Modernism)
19세기 말엽부터 유럽의 소시민적 지식인들 사이에 일어나 20세기 이후에 크게 성 행한 사조로서 기존의 사실주의와 유물론적 세계관, 전통적 신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전반적인 새로운 문화운동으로 극단적인 개인주의, 도시 문명이 가져다 준 인간성 상실에 대한 문제의식 등에 기반을 둔 다양한 문예사조를 통칭한다.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입체파, 미래파, 다다이 즘, 표현주의, 인상주의, 주지주의, 이미지즘)
※한국의 모더니즘
1) 이미지즘, 주지주의로 대표됨 : 최재서 주지주의 평론. 김기림의 모더니즘 운동
* 1930년대 정지용, 김기림, 김광균 (단, 李箱 :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 김규동 : <나비와 광장>
* 후반기 동인 : 김수영, 김경린, 박인환
2) 영.미 계통의 시인, 평론가인 흄, 파운드, 엘리어트의 영향
3) 기존의 낭만주의 시들이 내용에 치우쳤다는 점, 지나친 감정의 노출을 비판하고 단단한 형식, 지성(知性)에 의한 감정의 통제 등을 표방함
- 모더니즘은 신의 죽음으로 상징되는 보편주의와 절대주의 그리고 초월의 가능성을 믿는 내세주의(來世主義)의 붕괴에서 생겨난 시 운동이다. 이것은 1930년대 한국 시 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쳐 김기림의 시론과 이상의 시를 가능케 하는데, 김현승은 프로테스탄티즘의 '경건성'에 의지하여 과학주의, 상대주의의 한계를 쉽게 벗어난다.
1930년대 중반 무렵부터 이러한 모더니즘 경향을 지닌 한 무리의 시인들이 등장하였다. 주지파(主知派)라고도불리는 이상, 김기림, 김광균, 정지용 등으로 대표되는 1930년대 한국의 모더니즘은 카프를 중심으로 한 계급주의 문학과 민족주의 문학 간의 대립 구도가 허물어지는 전형기(轉形期)의 문학적 산물이다. 이와 함께 모더니즘은낭만적이며, 주정적(主情的)인 20년대의 시풍을 거부하고 지적인 태도로 시를 쓰려고 했으며, 음악성을 중시하는시문학파의 시작 태도를 거부하고 도시 감각과 현대 문명을 시각적 심상을 통하여 형상화하려고노력하였다. 즉, 1930년대의 서구화와 도시화라는 현대 문명의 시대적 풍경과, 점점 가혹해지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 말미암은 지식인의 자기 소외, 고향 상실감과 무력감을 반영한다. 여기에는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과거를 부정하며 주체 분열의 자의식에서 몸부림친 이상의 문학이 있고, 그 한편에는 황폐화해 가는 도시 문명을 공허하게 바라보고 있는 김광균과 그 속에서 문명비판적인 세계사적 전망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김기림 등의 문학이 있다. 이러한 한국의 모더니즘 문학의 이론적 근거는 김기림과 최재서에 의해 제공된다. 영문학을 공부한 최재서(崔載瑞)는 영․미(英美) 주지시 이론을 소개하였고, 김기림(金起林)은 '시론(詩論)'을 통하여 모더니즘 이론을 확립하는 한편, '기상도(氣象圖)', '이별(離別)' 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김광균은 시의 회화성(繪?性)을 중시하는 주지시의 경향을 보여 주었다. 그는 1939년에 이러한 경향의 시를 모아 '와사등(瓦斯燈)'이란 시집을 발간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시는 도시적 감상(感傷)에 빠져 주지시로서 성공하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녀 있다.
내 호올노 어델 가라는 슬픈 신호(信號)냐.
기인 여름 해 황망히 날애를 접고
느러슨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저저
찰난한 야경(夜景)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크러진 채
사념(思念)의 벙어리 되여 입을 담을다.
- 김광균, '와사등'에서
이때 장만영(張萬榮)도 주지시의 영향을 받아 등장하였는데, 농촌과 자연을 소재로 한국적 정서를 시각적으로 심상화하는 특색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이상(李箱)은 1934년에 초현실주의적(超現實主義的)인 시 '오감도(烏瞰圖)', '거울' 등 독특하고 난해한 실험시를 발표하여 당시의 문단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파격적인 작품을 써 종래 시의 고정 관념을 무너뜨린 다다이즘(dadaism)적인 주지주의 경향을 보여 주었다.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오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오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握手)를받을줄모르는 ---- 악수를모르는왼손잽이오
- 이상, '거울'(1933)에서
그리고 해방 후에 '바라춤'을 쓴 신석초(申石艸)도 이때 주지시를 쓴 시인이다.
1930년대 순수 문학과 모더니즘 문학은 시어에 대한 현대적 자각과 주체 의식의 반영, 그리고 기법의 혁신이라는 '현대성'으로 말미암아, 전대의 내용 중심주의의 문학에서 한 단계 발전한 문학사적 의의를 획득한다. 그러나 날로 노골화되어 가는 일제의 식민 통치 하에서, 고개를 수그리고 시인의 내면 속으로만 침잠해 들어가거나, 애써 현실을 외면하는 공허한 유미주의적 자세는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비판받아 당연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들에 의해 한국 현대시의 지평이 확대되고, 이들의 많은 작품이 오늘날에까지 널리 애송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역시 시의 본질은 그 서정성에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11.실증주의
실증주의(positivism)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프랑스의 사회사상가 상 시몽(saint
simon. 1750-1825)이었다. 그는 이 것을 과학적 방법 및 그 방법을 철학에 확대 적용시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꽁트(Augibnute comte. 1798 -1857)에 이르러 하나의 철학체계로 확립되어 19세기 후반과 20세기초의 유럽각국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 커다란 지적운동으로 번지게 된다. 실증주의의 사상적 근원은 18세기 계몽사상과 영국의 경험철학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러나 그것을 가능케 만든 지적 풍토는 당시의 산업혁명과 산업기술의 성공이 초래한 낙관주의의 거대한 물결이었다. 실증주의는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한 계몽사상에 내포된 과학주의를 보다 철저하게 확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실증주의를 사관으로서 기초를 이루게 한 인물이 꽁트인데 사회현상은 인간의 진보에 의해 지배되는 인간 사회의 불가피한 진화의 형태로 작용하는 엄격한 결정론에 예속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실증주의를 구체적으로 역사학에 도입한 인물은 버클이었다. 버클은 역사의 진보 과정이 일정규칙과 법칙에 의해 파악될 수 있다고 확신하고 물리적 도덕적 지적 법칙 등을 내세웠다. 이러한 주장은 역사의 과정이 자연법칙과 같이 필연적인 인과관계에 의해 전개된다는 기계적 인식론(機械的認識論) 또는 역사가 외부 현상과 환경으로부터 일정한 법칙에 따라 제약을 받고 있다는 결정론(決定論)에 토대를 둔 것이다. 실증주의 사관을 내세운 학자들이 인간의 진보를 결정 짓는 요인으로 자연환경과 물질적 조건이 중시하였다는 점에서 실증주의 사관은 물질적 원동력이 생산관계에 있다고 보는 유물론과 유사하나, 원칙적으로 다른 것은 그들이 역사에 일정한 법칙을 찾고 하나의 과학으로 확립시킬 수 있다는 신념적인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