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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브인의 사도들 I. 머리말 1. 슬라브인의 사도들, 성 치릴로와 메토디오는 그들이 수행한 위대한 복음 선교의 업적과 더불어 교회에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들 성인에 대한 추모는 각별히 생생하고도 현대에 적합한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습니다. 살로니카(옛 이름으로 테살로니카) 지방에서 특히 슬라브 민족의 여러 국가 사이에서 거룩한 수도자들이 수세기에 걸쳐 지속한 지대한 존경심을 고려하고, 슬라브 민족에 대한 복음 전파 사업에 미친 이들의 한없는 기여에 유념하며, 아울러, 화해와 형제적 공존과 인류의 발전 그리고 각 나라의 고유한 존엄성에 대한 배려에도 유의하면서, 본인은 1980년 12월 31일에 발표한 사도적 서한 ?탁월한 덕행?1)을 통해 성 치릴로와 메토디오를 유럽의 공동수호성인으로 선포한 바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나는 여러 선임 교황이 취한 조치의 뒤를 이었으니, 특히 레오 13세는 백여 년 전인 1880년 9월 30일자 회칙 「위대한 직무」2)로 두 분 성인에 대한 공경을 전 세계 교회에 확산하셨고 바오로 6세는 1964년 10월 24일자 사도적 서한 「평화의 사도」3)로써 성 베네딕토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2. 본인이 5년 전에 반포한 서한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교회의 이러한 진지한 조치를 재인식시키고, 유럽의 안녕과 화합과 일치를 열망하는 그리스도교 신자 및 선의의 모든 사람들이 성 베네딕토, 치릴로와 메토디오 같은 뛰어난 인물이 지니는 항구적 중요성에 관심을 두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들은 현대의 그리스도교 신자 특히 모든 유럽 대륙의 국가의 구체적인 모범이자 영신적 수호자이며, 유럽 대륙은 각별히 이들 성인의 기도와 업적을 통하여 예전부터 교회와 그리스도교적 전통에 의식적으로 본질적으로 뿌리내려 왔던 것입니다. 1980년에 발표한 본인의 사도적 서한은 유럽과 전 세계에 걸쳐 교회와 국가와 민족을 분열시키는 제반 요소를 극복하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에서 쓴 것입니다만, 이 서한은 나의 기도와 반성의 대상인 세 가지 계기와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첫 번째 계기는 교황 요한 8세가 880년 교황 서한 ?당신의 사업?4)으로써 거룩한 두 분 형제가 번역한 고대 슬라브어의 전례 사용을 승인한 지 천백 주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계기는 앞에 언급한 회칙 「위대한 직무」의 백 주년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계기는 바로 1980년인데 이 해에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가 파트모스 섬에서 다행스럽고 전도유망한 신학적 대화를 개시했던 것입니다. 3. 이 서한에서 본인은 회칙 「위대한 직무」에 관해 각별한 언급을 하렵니다. 교황 레오 13세는 「위대한 직무」에서 두 분 거룩한 형제의 사도적 공적에 관해 교회와 전 세계의 주의를 환기시키려 했는데, 성 메토디오는 전승에 따르면 885년에 대 모라비아 지방의 엘레라드에서 생애를 마쳤고, 성 치릴로는 869년에 형과 사별했을 대 로마에 체재했으며, 지금도 로마의 성 클레멘스 대성당에 성인의 유해가 지극한 존경을 받으며 안치되어 있습니다. 살로니카의 두 분 형제의 거룩한 생애와 사도적 공적을 환기시키면서 교황 레오 13세는 이들의 본명축일을 7월 7일로 정하셨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례개혁의 결과 축일이 2월 14일로 바뀌었는데 새 축일은 역사적으로 성 치릴로가 하늘나라에 들어간 탄생일인 것입니다.5) 레오 교황의 회칙이 나온 지 백 년이 지난 후 성 메토디오의 서거 천백 주년을 맞이하게 되는 새로운 계기에서 우리는 이 중요한 주년에 대한 교회의 기념을 새롭게 표시해야겠다는 자각을 한 것입니다. 폴란드에서 베드로의 좌에 불린 첫 번째 교황, 슬라브 민족 가운데서 첫 번째 교황이 된 본인으로서는 더욱 그렇게 해야 할 의무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과거 수백 년 간 특히 최근 수십 년 간의 여러 여건 변화는 교회가 거룩한 두 분 형제에 대한 종교적 추모는 물론 역사적 문화적 관심을 용이하게 재흥시키도록 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상황과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두 분의 특별한 카리스마를 더욱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역사에 일어난 많은 사건 즉 참다운 시대의 징표들은 이러한 이해에 기여했는데 대표적인 사건은 교회의 생활 속에 일어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입니다. 이 공의회의 교도권과 사목적 지향에 비추어 우리는 새로운 각도에서, 더욱 성숙하고 심오한 시각으로, 천백 년 전 인물인 거룩한 두 분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섭리의 지혜가 이들에게 부여한 요소들을 두 분의 생애 및 사도직 활동에서 발견할 수 있고, 그래서 ‘이 요소들이 우리 시대에 완전하게 드러나고 새로운 결실을 맺게 하려는’ 것입니다. Ⅱ. 간략한 생애 4. 교황 회칙 「위대한 직무」의 전례에 따라 본인은 성 메토디오의 생애를 되짚어 보려 합니다. 물론 성 메토디오의 생애와 매우 유사한 그의 형제 성 치릴로의 생애도 아울러 염두에 두렵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의미에서 살펴보는 것이므로 개별적인 사항에 관한 전문적 논의는 역사적 고찰에 맡기고자 합니다. 두 분 거룩한 형제가 탄생한 도시는 오늘날의 살로니카인데 이 도시는 9세기에 비잔틴 제국의 상업과 정치의 주요 중심지였고 당시 발칸 지방의 지식 계층과 사회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슬라브 민족 영토의 경계선에 위치했기 때문에 솔룬이란 슬라브어 명칭도 아울러 가지고 있었습니다. 메토디오는 형으로서 세례명은 미카엘이었으며 815년과 820년 사이에 태어났습니다. 동생인 콘스탄티노는 나중에 그의 수도명인 치릴로로 더 알려졌는데 827년 또는 828년에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동로마 제국 정부의 고위 관리였습니다. 가문의 사회적 세력을 배경으로 두 형제는 유사한 경력을 쌓을 수 있었는데 메토디오는 실제로 슬라브 민족이 많이 거주하는 변경 지방의 주지사 지위에까지 올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840년 말 메토디오는 관직을 버리고 은퇴하여 당시 거룩한 산으로 알려진 비티니아 지방의 올림포스 산 중턱의 한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동생 치릴로는 비잔티움에서 뛰어난 학업성적을 기록하였으나 전도유망한 정치가의 경력을 단호히 거부하고는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탁월한 지성과 종교적 재능 및 지식 때문에 치릴로는 아주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미묘한 직책 즉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거룩한 지혜의 대성당에 부속된 도서관 관장 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의 비서관이란 높은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곧 야망의 추구를 떠나서 학문과 명상의 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이러한 직책에서 벗어나려 희망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몰래 흑해 연안의 수도원으로 은둔해버렸던 것입니다. 여섯 달 뒤 사람들이 치릴로를 찾아내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고등 교육 학교의 철학 교수직을 수락해 달라고 졸랐습니다. 결국 탁월한 학식에 힘입어 치릴로는 ‘철학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그 이름으로 지금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얼마 후 황제와 총주교는 치릴로를 사라센 족에게 파견했습니다. 이 임무를 마치자 공직에서 물러나 형 메토디오와 합류해 수도원 생활에 몰두했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형 메토디오와 함께 비잔틴 제국의 대표로 카자르 족에게 파견되어 형제는 종교 및 문화의 전문가로 활약했습니다. 크리미아 지방의 케르손에 체류하는 동안 로마에서 이 먼 지방으로 유배된 로마 교황이자 순교자인 성 클레멘스가 묻혔다고 믿는 성당을 확인해냈습니다. 형제는 교황의 유해를 회수해 운반했습니다.6) 두 분 거룩한 형제는 교황의 유해를 모시고 서방으로 여행하고는 드디어 장엄하게 로마에 도착하여 교황 아드리아노 2세에게 봉정했던 것입니다. 5. 대 모라비아의 라스티슬라브 제후가 “자기 백성에게 슬라브어로 그리스도교의 진실한 신앙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주교이며 스승인 인물”을 보내달라고 황제 미카엘 3세에게 요청했을 때 두 형제의 여생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결정되었습니다.7) 성 치릴로와 메토디오는 일단 선발되자 기꺼이 이 사명을 수락하고 길을 떠나 아마도 863년 대 모라비아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대 모라비아는 중부 유럽의 여러 슬라브 민족을 포괄한 국가로서 동서간 영향력이 상호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했습니다. 이들은 슬라브 민족에 대한 사명에 남은 여생을 바쳤는데 여행, 궁핍, 고난, 적대감, 박해를 겪고 심지어 메토디오는 잔혹한 투옥마저 체험했습니다. 두 분 형제는 강인한 신앙과 하느님에 대한 치열한 희망으로 모든 시련을 극복했습니다. 사실 이들은 맡겨진 사명을 위해 충실히 준비했습니다. 거룩한 전례 집전에 필요한 성서를 가져가서는 이를 고대 슬라브어로 번역하고, 철학자 콘스탄티노가 고안해서 슬라브어 음운에 완전히 적용한 새로운 철자법으로 기록했습니다. 두 형제의 선교 활동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지만, 인근 라틴 교회들이 앞서 행한 그리스도교 선교가 이들 새로운 선교사들의 활동에 적지 않은 장애를 야기시켰다는 점도 이해할 만하다 하겠습니다. 3년 후 이들이 로마로 여행하는 도중 판노니아에 잠시 체류하였는데, 니트라라는 정치 및 종교의 주요 중심지에서 쫓겨난 코첼 제후가 이들을 따뜻이 맞이해 주었습니다. 여러 달이 지나자 거기서 다시 로마로 떠났는데 이들은 동행하는 제자들이 성직 서품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베네치아를 통과할 때, 이들의 혁신적인 선교 방식이 공개토론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니콜라오 1세의 뒤를 이은 교황 아드리아노 2세는 두 형제를 로마에서 환대했습니다. 새 교황은 슬라브어 예식서를 인준하고, 오늘날 성모 마리아 마죠레 대성당으로 불리는 당시 성모 마리아 앗 프레세뻬 성당의 제대 위에 이 예식서를 안치하도록 명했습니다. 동시에 두 형제의 제자들에게 사제서품을 주도록 추천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의 노력은 가장 바람직한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메토디오는 다음 단계의 사업을 홀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중병에 걸린 동생이 서원을 하고 수도복을 입자마자 869년 2월 14일 로마에서 영면했기 때문입니다. 6. 치릴로는 죽을 때 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님, 보십시오. 우린 운명을 같이 나누고 동일한 밭을 갈아 왔습니다. 이제 나는 최후를 맞아 밭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형님이 저 산을 깊이 사랑한다는 걸 알지만, 그 산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가르치는 사업을 포기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어디서 이보다 더 훌륭한 구원을 찾겠습니까?”8) 성 메토디오는 동생 유언에 끝까지 충실했습니다. 옛 판노니아 교구의 대주교로 서품되고 “이방인들”(슬라브 민족)을 위한 교황 사절로 임명된 성 메토디오는 재건된 시르미움 주교좌의 교구장으로 취임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주교의 관할을 침범했다는 혐의로 2년간 투옥됨으로 절정을 이룬 정치적 종교적 알력 때문에 메토디오의 사도직 활동이 중단되었습니다. 교황 요한 8세가 개인적으로 개입해서 겨우 석방되었습니다. 대 모라비아의 새로운 지배자인 스바토플루크 제후도 메토디오의 활동에 적대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새 제후는 슬라브어 전례를 반대하고 메토디오 대주교의 정통성에 대한 의혹을 로마에 전파시켰습니다. 880년 메토디오는 교황청에 소환되어(ad limina Apostolorum) 다시 한 번 모든 문제를 요한 8세에게 개인적으로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에서 모든 혐의를 벗은 메토디오를 위해 교황은 ?당신의 사업?9) 이란 칙서를 내렸는데 이 칙서는 적어도 본질 면에서는 교황 요한의 전임자 아드리아노 2세가 슬라브어 전례에 부여한 특권을 회복해 주었습니다. 881년 또는 882년 메토디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가자 비잔틴 황제와 당시 로마와 완전한 일치 상태에 있던 총대주교 포시오로부터 완전한 합법성 및 정통성을 마찬가지로 인정받았습니다. 메토디오는 성서, 예식서, 교부들의 저서 그리고 ?노모까논?이라 불리던 교회법 및 비잔틴 일반법의 전집을 번역하는 일에 여생을 주로 바쳤습니다. 시작한 사업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고라즈드라는 제자를 후계자로 임명하고는 885년 4월 6일 눈을 감아, 슬라브 민족을 위해 설립한 성당에서 영결식이 거행되었습니다. 7. 멀리 앞을 내다보는 사업, 심원한 정통 교리, 중용, 충성, 사도적 열성, 무한한 관용 때문에 메토디오는 여러 로마 교황,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비잔틴 제국 황제, 그리고 신흥 슬라브 민족의 제후들의 인정과 신뢰를 획득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당시 슬라브 민족의 여러 국가에 설립된 교회의 길잡이이자 합법적인 목자가 되었습니다. 메토디오는 동생 콘스탄티노와 더불어 복음의 설교자, “하느님과 거룩한 사도 베드로”10)가 보낸 스승, 그리고 최근 확립된 교회와 그 보다 더 오래된 교회들 사이의 완전한 일치의 초석으로서 이구동성으로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남자와 여자, 비천한 사람과 권세 있는 사람,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자유인과 노예, 과부와 고아, 외국인과 토착민,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1l)이 모두 거대한 무리를 이루어,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된”12) 스승과 목자인 메토디오를 눈물과 찬미가 속에 묘지로 배웅했던 것입니다. 메토디오의 사후 거룩한 형제의 사업이 중대한 위기에 봉착했고, 제자들에 대한 박해가 혹심해져서 선교지를 떠나야만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뿌린 복음의 씨는 계속 결실을 맺었고, 각 민족의 문화적 독자성을 존중하면서 새로운 민족에게 계시의 진리를 전하고자 한 사목적 배려의 태도는 교회와 선교사들에게 영원히 살아 있는 모범으로 남아 있습니다. Ⅲ. 복음의 선구자들 8. 문화적으로 비잔틴에 속하는 형제인 치릴로와 메토디오는 문자 그대로 슬라브 민족의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고향 땅을 떠나는 일은 하느님이 선택한 사람들에게 때때로 요구되는 일인 바,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신앙으로 수락하는 경우에는 지상의 하느님의 백성이 발전하고 성장하는 데 늘 신비롭고 풍요로운 전제 조건이기도 합니다. 주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명했습니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13) 성 바오로가 소아시아의 트로아스에서 꿈을 꿀 때, 유럽 대륙의 주민인 한 마케도니아인이 나타나 바오로에게 마케도니아로 와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14) 하느님의 섭리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 총대주교의 음성과 권위를 통하여 두 분 거룩한 형제에게 모습을 드러냈는데, 슬라브 민족에게 선교사로 가라고 명할 때 위와 똑같은 권유를 한 것입니다. 이 사명은 두 사람에게 명예로운 지위뿐 아니라 명상생활마저 포기한다는 뜻이 있었습니다. 비잔틴 제국을 떠난다는 것, 발달된 국가 조직과 세련된 비잔틴 문화에 기초하고 그리스도교적 원리에 젖은 사회 조직과는 여러 면에서 아주 동떨어진 백성 가운데로 가서 복음을 위해 기나긴 순례 여행을 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로마 교황이 메토디오를 대 모라비아의 슬라브 민족의 주교로 삼아 옛 판노니아 교구의 관할지역으로 파견할 때에도 세 번이나 같은 요구가 있었습니다. 9. 라스티슬라브 제후가 사신을 통해 황제 미카엘 3세에게 한 청원을 슬라브어로 쓴 메토디오 ‘전기’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교 선교사가 이탈리아, 그리스, 독일에서 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가르쳤습니다 … 그러나 우리 슬라브 민족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고 가르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15) 바로 그때 콘스탄티노와 메토디오 형제는 그리 가도록 초대된 것입니다. 이러한 여건 그리고 유사한 모든 여건에서 이들이 보여준 진실로 그리스도교인 다운 응답을 콘스탄티노가 황제에게 한 말이 웅변적으로 입증해 줍니다. “아무리 지치고 온 몸이 다 닳아 없어진다 해도 저는 기꺼이 저 땅으로 가겠습니다.”16)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해서 저는 즐거운 마음으로 출발하겠습니다.”l7) 이들의 선교사적 사명의 진실과 힘은 구속의 깊은 신비에서 나오는 것이며, 이들이 슬라브 민족 사이에 이룩한 복음 전파 사업은 구세주께서 영원토록 교회에 위탁한 사명과 긴밀한 유대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권능으로 사도들에게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18)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상 가서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라. 19)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시간과 구체적 여건 속에서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슬라브 민족의 설교가와 스승들은 다음과 같은 성 바오로의 사도적 이상을 따른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삶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20) 사람들을 진심으로 존중해주고 또 이들의 진정한 이익을 위해 공정한 배려를 함으로써, 거룩한 두 분 형제는 장차 신앙인이 될 사람들에게 빛을 가져다줌과 동시에 선한 것을 보여 주고 선을 얻기 위한 구체적 조력을 베풀기 위해서 필요한 힘과 지혜와 열정과 박애를 풍부히 지녔습니다. 이러한 목적에서 두 분 형제는 복음전파의 대상인 사람들과 모든 면에서 똑같아지려 원했고, 이 사람들의 일부가 되고 모든 것을 함께 향유하기를 바랐습니다. 10. 조직화되면 어느 사회나 골치 아픈 알력이 발생하는 법인데, 바로 앞에 언급한 이유 때문에 두 분 형제는 자연스럽게도 명확한 입장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신흥 로마-게르만 제국의 군사적 문화적 압력에 대항해서 독자성을 수호하려는 민족, 외래적인 것으로 보는 생활양식에 저항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힌 민족에게 불가피하게 닥치는 여러 난관과 문제를 두 분 형제는 자기 일처럼 대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세계의 동서 간 차이가 당시에 이미 벌어지기 시작했고 그 후 불행히도 증대할 추세가 필연적이었는데 거룩한 두 분 선교사는 개인적으로도 이러한 갈등의 틈바구니에 끼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통뿐 아니라 입교한 백성들 삶의 새로운 요소에 대해서도 완전한 정통성과 지속적인 관심을 견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험난한 여건이 밀려 닥쳐 불확실하고 고통스런 양상을 띠기도 했습니다만 콘스탄티노와 메토디오는 시련에 굴복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해, 공공연한 불신, 심지어 메토디오로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납한 투옥까지도 슬라브 민족의 이익과 세계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돕고 공헌하겠다는 강인한 결의를 꺾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전파, 선교사 직책 수행, 당시 형성 중이던 슬라브 민족의 여러 국가에게 새로운 생활양식과 복음을 전해주는 방법을 용기 있게 모색하는 데 있어서 이들이 으레 치러야 했던 대가였습니다. 거룩한 두 분 형제는, 전기의 기록이 전하는 바와 같이, 성서 번역이라는 어려운 사업에 착수했습니다. 그리스어로 배운 성서를 자기네 나라와 고향의 변방에 정착한 슬라브 민족의 언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대단히 곤란하고 미개척 분야인 일을 해내기 위해 두 분 형제는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를 활용하면서 슬라브 민족의 언어, 관습, 전통을 이해하고 이에 젖어들려고 노력하는 한편 거기 내재되고 표현된 이념과 인간적 가치를 성실히 해석해냈습니다. 11. 복음의 진리를 새로운 언어로 옮기기 위해서 이들은 슬라브 민족에게 친근한 형상과 개념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했고 그래서 슬라브 민족의 내면세계를 정확히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따라서 성서의 개념 및 그리스적 신학 개념을 전혀 상이한 사고와 역사적 경험의 바탕에다가 올바로 옮겨놓는 일이 선교 사업을 성공으로 이끄는 필수조건임을 깨달았습니다. 교리 교육의 새로운 방법론 문제였습니다. 이 새로운 방법의 타당성을 옹호하고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서 메토디오는, 처음에는 동생과 함께, 나중에는 혼자서, 867년 교황 니콜라오 1세의 로마 소환에 이어 879년 요한 8세의 소환에도 순종했습니다. 두 교황은 형제가 대 모라비아에서 가르치는 교리와 사도 성 베드로와 바오로가 자신의 영광스런 월계관인 거룩한 유해와 함께 교회의 가장 으뜸인 교구에 전승해준 교리와 비교하려 했던 것입니다. 콘스탄티노와 제자들은 이미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냈기 때문에 선포되고 설명된 진리를 고대 슬라브어로 기술할 수 있었고 그래서 청중이 완전히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진리 선포의 대상인 새로운 백성의 언어를 배우고 의식구조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선교 정신에 참으로 적합한 것이었습니다. 슬라브 민족의 모든 필요와 기대에 자신을 완전히 봉헌하겠다는 각오는 역시 훌륭한 모범이었습니다. 일단 계시로 정화하고 깨우쳐 준 이상, 슬라브 민족의 생활 및 전통과 자신을 일치시키겠다는 관대한 결정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라는 성 바오로의 초대를 수락한 모든 시대의 선교사 모두에게 치릴로와 메토디오가 참된 표양이 되도록 했습니다. 또한, 특히,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각 대륙에 걸쳐 성서와 예식서를 각 민족의 살아있는 언어로 번역하는 데 힘쓰고, 그래서 각 민족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각 문명의 표현 방식에 따라 하느님의 말씀에 접근할 수 있게 하려는 선교사 모두에게 훌륭한 모범이 되었습니다. 완전한 사랑의 일치 때문에 교회는 모든 형태의 지역주의, 인종적 배타주의, 종족적 편견, 그리고 모든 국수주의적 오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치가 온전히 자연스럽고 합법적인 인간 감정을 모두 고양하고 승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Ⅳ. 하느님의 교회를 심은 사람들 12 . 슬라브 민족의 사도들인 치릴로와 메토디오가 채택한 접근법의 특성 가운데 내가 특히 강조하고 싶은 점은, 교회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번되다는 원리에 인도되어 두 분 형제가 “평화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설립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신자와는 달리 슬라브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거룩한 형제를 “내심 깊숙이 슬라브인”이라고 아무리 내세우고 싶다 하더라도 두 분은 여전히 헬레니즘 문화와 비잔틴식 교육에 젖은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완전히 동방 그리스도교의 교회 및 사회 전통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비록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로마라는 동일한 그리스도교 세계의 두 지역 사이에 통탄할 분열이 먼 훗날 일어나긴 했어도, 이미 두 분의 시대에 이러한 차이점이 분열의 구실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슬라브 민족의 복음 전파자이며 스승인 두 분은 동방 그리스도교의 특징인 풍부한 전통과 종교체험에 물든 대 모라비아로 떠났으며, 동방 그리스도교의 특징은 신학의 가르침과 거룩한 전례 거행에서 현저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비잔틴 제국 영내의 모든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그리스어로 거룩한 전례를 거행해 왔습니다. 그러나 전례에서 자기 민족의 언어를 사용하는 그루지아와 시리아 교회와 같은 동방 교회내의 많은 각 민족 교회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진보된 문화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들 교회에 대해서는 철학자 콘스탄티노도 수도에서 또 지방 여행에서 수없이 만난 이들 교회의 신자들과 접촉에서 그리고 자신의 연구 결과로 특히 잘 알고 있었습니다. 두 분 형제는 이러한 전통의 장구성과 합법성을 인식했기 때문에 슬라브어를 전례용어로 삼고 슬라브어를 상용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진리를 전달하는 효과적인 도구로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은 것입니다. 두 분은 우월감 또는 지배 의욕에서가 아니라 정의에 대한 사랑에서 그리고 당시 발전 중인 민족에 대한 순수한 사도적 정열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새로운 민족이 이동해온 이후,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는 새로 이주해온 인종과 라틴어를 사용하는 기존 민족을 혼합하여, 모든 사람을 통일하기 위해서 전체에게 라틴어와 라틴 전례와 라틴 문화를 전파했고 이를 로마 교회가 전담했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동질성은 비교적 젊고 빠르게 팽창하는 사회에 일종의 힘과 단결의 의식을 부여함으로써 유럽인 사이에 더욱 긴밀한 일치와 더욱 강력한 긍지를 느끼게 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때때로 상호 차이점이 아직 미숙한 통일체에게는 위협으로 여겨진다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강제의 형식을 취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러한 상호 차이점을 해소하려는 유혹이 무척 강했으리라는 점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13. 이렇게 복합적이고도 미묘한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거룩한 형제는 선교의 대상인 슬라브 민족에게 그리스어와 비잔틴 문화의 명백한 우월성 또는 자신이 그 안에서 성장했기에 늘 친숙하고 소중한 고도로 발달한 사회의 관습 및 생활양식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점은 범상치가 않고 놀라운 일입니다. 새로운 신자들을 그리스도 안에 하나로 만들겠다는 이상에 불탄 형제는 비잔틴 전례의 풍부하고 세련된 예식서를 슬라브어에 적응시키고, 마찬가지로 그리스 로마법의 미묘하고 복잡한 내용을 새로운 민족의 의식구조와 관습에 맞추었습니다. 이러한 조화와 평화의 계획에 따라서 치릴로와 메토디오는 자기네 사명의 의무를 늘 존중했습니다. 형제는 공의회 교회법이 규정한 전통적 특권과 교회의 권리를 인정했습니다. 따라서 동로마 제국의 국민이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에 속한 신자이면서도 로마 교황에게 선교 사업에 대한 보고를 하는 것이 자기네 의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는 자기네가 고백하고 가르친 교리, 슬라브어로 쓴 전례서, 슬라브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방식에 관한 판단을 교황에게 일임하고 교황의 인준을 구했습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명령으로 선교 사업을 전개하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교회의 가시적 일치의 중심인 로마의 사도좌에 접근하여 확인을 받으려 한 것입니다.2l) 따라서 하나이며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교회의 보편성에 입각하여 형제는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 점은 형제의 모든 행동양식에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이들이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22)라고 한 예수님의 사제적 기도가 다음 시편의 말씀과 일치하는 형제의 선교사업 좌우명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야훼를 찬양하여라!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송축하여라!”23) 오늘 우리에게 두 분 형제의 사도직은 교회 일치를 웅변적으로 역설합니다. 즉 치릴로와 메토디오 시대 이후 심하게 손상된 일치, 특히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간의 일치를 화해의 평화 속에 회복하라는 초대인 것입니다. 살로니카의 거룩한 형제가 지녔던 확신 즉 각 지방 교회는 각자의 재산으로 가톨릭 교회의 보고를 채우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신념은, 개별 그리스도교 교회의 상이한 생활 여건이 결코 하나의 신앙의 고백과 박애의 실천에 있어서 불화, 반목, 분열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는 이들의 복음적 통찰력과 완전한 조화를 이룹니다. 14. 아시는 바와 같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 ‘일치운동’이란 교회의 각종 필요에 따라,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추진하기 위해 개시되고 조직되는 활동 및 사업을 말합니다.”24) 따라서 성 치릴로와 메토디오는 하나의 교회에 속하는 각 공동체 사이의 현존하는 또는 현존하는 듯 보이는 분열을 완전히 해소하거나 감소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일치운동의 진정한 선구자라고 보아도 절대 시대착오적인 견해는 아닙니다. 교회사의 과정에서 불행히도 발생했던 분열은 가슴 아프게도 여태껏 지속하며, “그리스도의 뜻에 정면으로 위배될 뿐 아니라 세상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가장 거룩한 대의를 손상시키고 있습니다.”25) 한편에는 자신이 속한 교회들 즉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와 로마 교회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슬라브 민족의 땅에 설립된 교회가 있어 이들 교회 사이에 신앙과 사랑의 일치를 보존하려 노력한 두 분 형제, 특히 주교의 책임 때문에 메토디오가 지닌 뜨거운 염려는 영원히 위대한 공적으로 남을 것입니다. 두 분 형제의 선교 사업이 865년과 885년 사이 즉 동방과 서방 교회 간 치명적인 반목과 신랄한 충돌이 날로 심해 가던 매우 어려운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점을 생각하면 할수록 이들의 공적은 더욱 위대하게 빛납니다. 이 분열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갓 받아들인 불가리아가 어느 쪽에 속하느냐 하는 문제로 더욱 악화됐습니다. 이웃하는 그리스도교 백성끼리 무력 충돌도 서슴지 않던 격동의 시대에, 살로니카의 거룩한 형제는, 올바른 교리, 완전히 일치된 교회의 전통, 그리고, 특히 고대 여러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교회 조직과 구조의 기초를 이루는 “하느님의 가르침”과 “교회의 가르침”26)에 대해 늘 확고한 충성을 견지했습니다. 이 충성으로써 형제는 위대한 선교 사업을 완수했고,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와, 그리고 자신이 슬라브 민족 사이에 세운 새 교회들과 영신적 교회법적 완전한 일치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15. 특히 메토디오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또 주교로서 자기 의무에 계속 충실하고, 자기를 낳아주고 치릴로와 함께 선교사로 파견해 준 비잔틴 교회에 대해 진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교회에 대한 모범적 충성을 저버리기보다는 차라리 서슴지 않고 오해, 충돌, 비방, 심지어 육체적 박해도 무릅썼습니다. 다음에는 “성 베드로의 영역 안에서”27) 대주교의 직책을 완수한 덕분에 로마 교회에 대한 의무도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슬라브 민족의 영토에서 성장하는 교회에 대한 의무도 있었는데 메토디오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확신하고 이 의무를 받아들여 교회 및 제국의 권위 앞에서 성공적으로 이 교회를 변호했고 특히 고대 슬라브어로 된 전례와 각국의 여러 교회에 고유한 기본적 교회 권리를 보호했던 것입니다. 철학자 콘스탄티노와 마찬가지로 메토디오는 이러한 행동을 취함에 있어서 자기 의견이나 사목적 주도권에 반대하는 사람과 합법성을 의심하는 사람과 늘 대화를 했습니다. 교회는 창시자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항상 하나이며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내려 오는 것이어야 되는데, 메토디오는, 위와 같은 모범으로써, 교회의 다양한 완성을 존중하여 불화를 없애려 노력하는 각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이 임무를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의 15명 교부들의 신앙 고백이 완벽하게 반영했는데 이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의 변함없는 신앙 고백이기도 합니다. V. 교회의 가톨릭적 의미 16. 성 치릴로와 메토디오가 선포한 복음적 교리 내용만 특별히 강조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슬라브 민족은 자기네 언어로 거행하는 거룩한 신비들을 들은 적도 없고 자기네 의식 구조에 완전히 적합하고 실제 생활 여건을 존중해주는 방식으로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걸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두 분 형제가 이들 사이에서 사도적 활동에 적용한 교리 교육적 사목적 방법론은 오늘날의 교회에게도 매우 큰 의의가 있고 본받을 만한 것입니다. 이십 년 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주요 임무의 하나로, 교회의 자각을 일깨우고, 창조주시며 구세주이신 하느님께서 모든 인류의 공동 거처로 주신 이 지구상의 모든 국경선을 초월하여 모든 백성과 국가에 구원, 평화, 상호 화해의 영원한 소식을 선포하려는 새로운 선교적 열정을 교회의 내면적 쇄신을 통해서 교회에게 주입하는 일을 지적했음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보편성의 주제에 관한 언급에서 이 공의회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포함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이루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따라서 이 백성은 단일 유일한 백성으로 머무르며, 모든 세대를 통하여 온 세상에 확장되어, 시초에 한 인간 본성을 만드시고 흩어진 당신 자녀들을 마침내 한데 모으시고자 하신 하느님의 의도를(요한 11,52 참조) 성취시켜야 할 것이다 …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는 어느 민족의 현세적 재화도 감소시키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여러 민족들의 재능과 재화와 관습을, 좋은 것이라면, 촉진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정화하고 강화하여 높여 준다 … 하느님의 백성이 지니고 있는 보편성은 주님의 선물이다 … 이 보편성으로 말미암아 각 부분은 그 고유한 은혜를 다른 부분들과 온 교회에 제공하여, 전체와 각 부분이 모든 것을 서로 나누어 가지며 일치의 완성을 함께 지향하면서 자라게 된다.”28) 17. 이런 전통 즉 교회의 공번성에 대한 극히 최신의 전망은 마치 전 세계의 모든 언어로 된 다양한 전례가 단일한 전례로 일치되는 교향곡, 또는 무수한 사람의 목소리가 전 세계 구석구석에서 역사의 매순간마다 무한한 가락, 음조, 화음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지속적이고도 아름다운 합창과 같습니다. 바로 이러한 전망은 철학자 콘스탄티노와 메토디오의 사도적 선교 사업을 고취하고 슬라브 민족에 대한 사명을 지탱해 준 신학적 사목적 전망과 특히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편협한 교회 개념에서 이러한 전망을 반대하는 태도를 취했던 성직계 대표들 앞에서 성 치릴로는 베네치아에 체류할 때 이 전망을 용감히 옹호했습니다. 과거에 이미 수많은 민족이 자기네 언어로 쓰인 전례를 거행했고 또 계속해서 거행하고 있는 실례 즉 “아르메니아, 페르시아, 아바스지아, 그루지아, 소그디아, 고트, 아바르, 티르시아, 카자르, 아랍, 콥트, 시리아, 기타 수많은 민족”29)의 전례를 성인은 내세웠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 위에 예외 없이 태양을 떠올리시고 비를 내리신다는 점을 환기시키시면서30)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숨을 쉬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오직 세 가지 언어(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만 선언하고 이를 모르는 다른 백성과 종족은 모두 장님에 귀머거리로 남아 있으라고 결정하면서도 수치를 느끼지 않다니 말이 됩니까? 하느님께서 너무 연약하여 다른 언어를 허락하지 못한다거나 아니면 너무 질투심이 많아서 다른 언어의 전례를 원하지 않는다고 여러분은 주장하려는 것입니까?”3l) 반대하는 성직계 대표들의 역사적 논리적 논거에 대해 성 치릴로는 다음과 같은 계시된 성서 구절을 근거로 내세워 반박하였습니다.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32)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리고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찬송합니다.”33) “너희 모든 백성들아 야훼를 찬양하여라. 너희 모든 나라들아, 그를 송축하여라!”34) 18. 교회는 각 개인과 민족의 고상한 사상 및 정당한 기대에 적절히 부응할 수 있도록 계시된 진리의 내용을 온전히 보존해 왔는데 교회가 공번된 이유는 바로 이 계시된 진리를 모든 인간적 언어로 제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각 세대가 무한히 가치 있는 생명의 선물과 함께 후대에게 물려주는 선의 총체는 무한하고 다채로운 조각의 집합을 이루어 파루시아 즉 재림의 순간에 비로소 완전한 영광 속에 본 모습을 드러내실 창조주의 살아 있는 모자이크의 각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각 개인, 민족, 국가 그리고 문화가 선, 진리, 아름다움으로 인정하고 만들어낸 모든 것을 복음은 쇠퇴시키거나 소멸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은 이 모든 가치를 조정하고 발전시키며 관대함과 희열로 생활화시키면서 계시의 신비롭고 고상한 빛으로 완성시키려 합니다. 교회의 기본 요소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여하신 구체적 차원의 공번성은 정체되거나 역사 밖에 있거나 무조건 단일한 형태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공번성은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했고 교회가 성령의 힘으로 가르쳐 온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일치된 신앙으로부터 뭔가는 새로운 것을 나날이 잉태하고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원은 각 사람과 각 나라에 대한 상호 존중 즉 형제적 사랑으로부터, 그리고 신앙 안에서 형제인 모든 사람의 자격과 권리를 성실히 인정하는 데서 당연히 도출되는 것입니다. 19 . 교회의 공번성은 모든 사람이 공동선을 위해 취하는 적극적인 공동 책임 및 전폭적 협력에서 잘 나타납니다. 교회는, 고유한 방식으로, 어머니의 배려로, 실제적 인간적 가치를 모두 수용하고 통합하고 거양함으로써, 어디서나 보편성을 발휘합니다. 동시에 모든 사람을 각자의 진리와 사랑 안에서 서로 그리고 자기 자신과 일치를 이루게 하기 위하여 교회는 어디서나 어떠한 역사적 상황에서나 모든 사람을 하느님께 인도하려 노력합니다. 하느님의 신비한 계획과 구원의 보편 역사 속에서 모든 개인, 모든 국가, 모든 문화와 문명은 각자의 역할과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두 분 형제의 사상이었으며 다음과 같은 말로 잘 표현됩니다. “어질고 자비로운,”35), “모든 사람이 회개하여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시는36) 하느님은 … 인류가 자신의 연약함에 굴복하여 멸망하는 일, 원수의 유혹에 빠지는 일을 허용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느님은 해마다 언제나 태초에서 지금까지 한결같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온갖 은총을 끊임없이 내려주시는데, 처음에는 성조들과 조상들을 통해, 다음에는 예언자들을 통해, 그리고는 사도들과 순교자들 그리고 이 험난한 삶의 한 가운데서 자신이 선택한 의인과 학자들을 통해 은총을 내려주신다.”37) 20. 교회의 보고에서 “낡은 것과 새로운 것”38)을 지혜롭게 꺼내 놓으면서 성 치릴로와 메토디오가 슬라브 민족을 위해 번역한 복음의 메시지는 영원한 진리와 일치하는 설교와 교육을 통해 전파되고 동시에 구체적인 역사 상황에 적응해 왔습니다. 두 분 성인의 선교 노력 덕분에 슬라브 민족은 지존한 삼위일체의 영원한 계획, 인류의 구원을 위한 보편적 계획에 참여하라는 자기네 소명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슬라브 민족은 성부께서 창조하시고 우리 구세주 성자께서 구속하시고 성령께서 빛을 비추어주신 인류의 전체 역 사에 봉사한다는 자기네 역할도 자각했습니다. 교회의 권위 즉 로마의 주교들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들이 합법적으로 승인한 이 가르침 덕분에 슬라브 민족은 자기네도 지상의 다른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39)의 후손이자 상속자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성 메토디오가 창시한 교회 조직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가지는 독자성에 대한 자각에 힘입어, 슬라브 민족은 당시 유럽에서 확립된 교회 안에 예정된 자기네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슬라브 민족의 후손은 신구약의 위대한 선구자들과 자기네를 연결해 주는 이 분에게 감사와 영원한 추모의 정을 계속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Ⅵ. 복음과 문화 21. 살로니카의 형제는 신앙의 상속자일 뿐 아니라 비잔틴 제국이 승계한 고대 그리스 문화의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이 문화유산이 유럽 문화 전체에, 그리고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전 세계 문화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슬라브 민족이 거주하는 영역에서 개척자로서 두 분 형제가 수행한 복음 선포 사업은 오늘날의 “토착화” 즉 복음과 토착 문화의 융합은 물론 토착 문화를 교회 생활에도 도입하는 일에도 모범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의 대상인 백성의 토착 문화와 복음을 융합시킴으로써 성 치릴로와 메토디오는 하나의 문화, 나아가서 여러 문화의 형성과 발전에 뛰어난 공적을 남겼습니다. 사실 슬라브 국가의 모든 문화는 살로니카의 형제의 사업에서 “시작”되거나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이는 슬라브 언어의 문자를 독창적으로 천재적으로 창안함으로써 형제가 모든 슬라브 국가의 문화와 문학에 근본적인 기여를 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치릴로와 메토디오가 제자들과 함께 수행한 성서 번역은 고대 슬라브의 전례 언어에 문화적 품위와 역량을 부여했으며, 이 언어는 수백 년 동안 교회 언어는 물론 공용어 및 문학 언어가 되었고 심지어는 대부분 슬라브 국가의 상류층과 특히 동방 전례의 모든 슬라브 민족의 일상 언어로 군림해 왔습니다. 또한 슬라브 베네딕토회가 창시된 크라코프의 성 십자가 성당에서도 이 언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성당은 바로 이 언어로 최초의 예식서를 출판했습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 언어는 서유럽 여러 나라는 물론 동부 및 남부 유럽에서 가톨릭과 정교회를 막론하고 슬라브 동방 교회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예식으로 거행하는 비잔틴 전례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크로아티아의 가톨릭 신자들이 로마 전례에서도 사용합니다. 22. 동방 전례의 슬라브 민족의 역사적 발전에 있어서 이 언어가 행한 역할은 서방 교회에서 라틴어가 행한 역할과 동일합니다. 이 언어는 라틴어보다 더 오래, 일부 지역에서는 19세기까지, 존속했고, 지역적 슬라브 문학 언어와 라틴어보다 친밀하기 때문에 이 문학 언어들의 형성에 있어서 라틴어보다 더 큰 직접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모든 슬라브 민족과 국가의 문화에 대한 이러한 공적들 때문에 성 치릴로와 메토디오가 수행한 복음 선교 사업은 어떤 의미에서 슬라브 민족과 국가들의 역사 및 생활 속에 늘 자리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Ⅶ. 슬라브 세계에 천 년간 지속된 그리스도교의 의미와 영향 23. 9세기 후반에 속하는 성 치릴로와 메토디오의 사도적 선교 활동은 슬라브 민족의 최초의 효과적 복음화라 하겠습니다. 이 활동은 정도에 따라서 여러 개별지역에서 이루어졌지만 주로 당시 대 모라비아 국가의 영토에 집중되었습니다. 이는 메토디오의 주교좌에 속하던 지역들 즉 모라비아, 슬로바키아, 그리고 오늘날 헝가리아의 한 지방인 판노니아를 주로 포함합니다. 메토디오가 교육한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사도적 활동의 영향은 더 넓은 영역까지 미쳤는데 여기에는 서유럽의 다른 지방들 특히 보헤미아 지방이 포함됩니다. 프레미슬리드 왕조의 인물로 역사적으로 최초의 보헤미아 제후가 된 보지보이(보리보이)는 아마도 슬라브 전례에 따라 세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 후 이 전례의 영향은 소르보-루사티아 종족들과 폴란드 남부 지방까지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나 905~906년경 대 모라비아가 멸망할 때부터 라틴 전례가 슬라브 전례의 자리를 차지했고 보헤미아는 교회 조직상 레겐스부르그의 주교와 그의 주교좌인 잘즈부르그에 소속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성 벤체슬라오 생존 당시인 10세기 중엽에 두 전례의 요소들이 활발히 혼합 과정을 거치고 있었고 슬라브어와 라틴어가 전례상 훌륭한 공존 관계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사람들을 그리스도교 신자로 만드는 일이 토착어를 사용하지 않고는 불가능했습니다. 이러한 기반 위에 비로소 보헤미아에서 그리스도교 용어가 발전할 수 있었고, 나아가서는 폴란드에서 교회 용어의 발전과 강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메토디오 전기?에 나오는 비슬리츠 제후에 관한 이야기는 폴란드 종족의 일파에 관해 가장 오래된 역사적 기록입니다.4l) 불충분한 자료이지만 이 기록은 슬라브 전례의 교회 조직이 폴란드 영토에서 설립된 사실과 연결될 수가 있습니다. 24. 역사상 폴란드의 최초의 군주로서 보헤미아의 공주 두브라브카와 결혼한 미에스코가 966년에 보헤미아 교회에서 세례를 받게 되어 그리스도교가 라틴 형태로 로마에서 폴란드에 전파되었습니다만, 폴란드 그리스도교의 시초는 여전히 먼 살로니카 지방에서 출발한 두 분 형제의 사업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두 분 형제의 노고는 발칸 반도의 슬라브 민족들 사이에서 더욱 현저하게 결실을 보았습니다. 종전에 크로아티아에 이미 설립되었던 그리스도교가 형제의 사도직 활동 덕분에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본 고장에서 추방된 제자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치릴로와 메토디오의 사업은 불가리아에서 활발히 전개되어 놀라운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이 나라에선 오크리드의 성 클레멘스의 노력으로 수도 생활의 활발한 중심지가 여럿 형성되었고 특히 치릴로 문자가 발달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교는 불가리아에서 다른 나라로 전파되어 인근 루마니아를 거쳐 키에프의 옛 루스 지방, 그리고는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몇 년 후 즉 1988년에는 키에프의 대공 성 블라디미르의 세례 천 주년을 기념하게 될 것입니다. 25. 따라서 슬라브 민족이 일찍이 성 치릴로와 메토디오를 자기네 그리스도교와 문화의 아버지로 인정한 것은 타당한 일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여러 나라에서 많은 선교사가 활동했지만 9세기에 슬라브 민족의 대부분은 여전히 이교도의 관습과 신앙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두 분 성인이 개척한 땅 또는 적어도 개척의 영향권에 포함된 땅에서만 그리스도교는 10세기에 비로소 슬라브 족의 역사 안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했던 것입니다. 두 분 형제의 사업은 유럽 그리스도교의 공동의 뿌리를 형성하는 데 막중한 기여를 했습니다. 이 뿌리는 강인한 힘과 활력 때문에 가장 확고한 논거들 가운데 포함되며, 유럽 대륙의 일치를 새롭고 타당한 방식으로 재건하려는 진지한 시도에 있어서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슬라브 민족에 그리스도교가 뿌리내린 지 천백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살로니카의 형제의 유산이 어떠한 분열보다도 더 깊이 더 강하게 슬라브 민족에게 끊임없이 존속하고 있음을 명확히 인식합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유래하는 동방의 전통과 로마에서 유래하는 서방의 전통 즉 그리스도교의 두 가지 전통은, 상이한 문화 그리고 같은 문제에 대한 상이한 접근 방식을 배경으로 해서 형성되었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하나인 교회의 품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상이점은, 그 유래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 가치와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면, 유럽의 문화와 종교적 전통을 풍부하게 만들고, 나아가서는 바람직한 유럽의 영신적 쇄신을 위해 적절한 기초가 됩니다. 26. 그리스도교적 유럽에서 새로운 조직이 등장할 무렵이던 9세기 이후에도 성 치릴로와 메토디오는 우리 시대를 위해 명확하고도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 주고 있습니다. 이 메시지는 바로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국제적 성격의 많은 복합적 문제들 때문에 다양한 요소의 실질적인 교류 속에서 확고한 일치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두 복음 전파자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두 분 형제의 특징이 동방 및 서방에 존재하는 보편 교회의 일치에 대한 사랑, 그리고 보편 교회 안에서, 슬라브 민족들 사이에 형성되고 있던 지역 교회에 대한 사랑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두 분은 또한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신자와 백성에게 ‘다 함께 일치를 이룩하라’는 권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치릴로와 메토디오의 모범이 더욱 큰 가치를 발휘하는 곳은 선교 활동이라는 특수 분야입니다. 왜냐하면 이 활동은 교회의 근본 과업이며 이미 언급한 “토착화”라는 면에서 오늘날 긴급한 과업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는 슬라브 민족의 기존 문화를 깊이 존중하여 사명을 완수했을 뿐 아니라 슬라브 문화를 종교와 함께 끊임없이 뛰어나게 발전시키고 확충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서 깊은 교회들은 오늘날 역사가 짧은 교회와 백성이 독자성을 성숙시키고 그 독자성 안에서 발전하도록 도와줄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합니다.42) 27. 동방과 서방의 전통은 ‘둘 다’ 보편 교회의 ‘하나의’ 위대한 전통 안에 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치릴로와 메토디오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두 전통을 잇는 연결 또는 영신적 다리입니다. 우리에게 두 분 형제는, 동방과 서방의 두 자매 교회의 일치 노력, 본인이 바리를 방문한 기회에 말한 대로 “흡수도 혼합도 아닌 일치”43)를 완전하고 총체적인 교류 안에서 가시적 일치의 기도와 대화를 통해 재발견하려는 노력의 선구자이자 수호자입니다. 일치란 진리와 사랑 안에서 만나는 일, 성령께서 허락하시는 일입니다. 인품과 업적 면에서 치릴로와 메토디오는 “일치를 바라는 심원한 갈망”과 동방과 서방의 자매 교회의 일치를 바라는 “갈망”을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일깨워 주는 분들입니다.44) 완전한 공번성을 위해 모든 국가와 모든 문화는 보편적 구원 계획 안에서 수행할 각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개별적 전통과 지방 교회는 모두 다른 교회와 전통들에 대해, 동시에 보편적이고 공번된 친교에 대해 문을 열고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만일 폐쇄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경우에는 쇠락의 위험에 직면할 것입니다. 치릴로와 메토디오는 자신의 카리스마를 발휘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교류뿐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일치 위에서 유럽을 건설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습니다. 유럽과 전 세계에서는 긴장과 분열과 대립이 인간 생명과 가치를 철저히 파괴하려 위협하고 있는데, 오늘날에도 이러한 긴장을 해소하고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는 길이 다른 데 있는 게 아닙니다. 현대에서 그리스도교 신자가 지니는 의미는 교회와 사회에서 일치를 이룩하는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서로 이해하고, 문화적 정신적 자산을 풍성히 교류함으로써 기꺼이 협력해야 합니다. 오늘날 인류의 근본적인 열망 가운데 하나는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진정으로 인간에게 가치 있는 삶을 위한 일치와 친교의 재발견에 있습니다. 구원과 인류 일치의 보편적인 징표이여 성사임을 자각하면서 교회는 이러한 사명을 완수하겠다는 각오를 선언합니다. “이 같은 교회의 의무를 보다 긴급히 수행하라고 현대 상황은 강요하고 있다. 그것은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사회적, 기술적, 문화적 여러 가지 유대로 더욱 긴밀히 결합되어 있으므로,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도 완전히 일치를 성취해야 하겠기 때문이다.”45) Ⅷ. 맺는말 28. 그러므로 교회가, 로마에서 슬라브 민족의 최초의 대주교로 서품된 메토디오와 동생 치릴로의 사도적 사업이 종결된 지 천백 주년을 맞이하여 위엄과 환희로 이를 기념하고 나아가서, 슬라브 민족이 구원의 역사의 현장에 참여하여 그보다 여러 세기 앞서서 이미 복음의 메시지를 수락한 유럽 여러 나라의 일원이 된 일을 기념하는 것은 타당합니다. 이 로마시에서 베드로가 차지한 적이 있는 주교좌에 거의 이천 년 뒤 부름을 받아 앉게 된 슬라브 민족의 최초의 아들로서 내가 얼마나 심원한 행복감에 젖어 오늘을 기념하는지 여러분은 이해할 것입니다. 29. 성 메토디오는 신앙과 소망과 사랑 안에 선조로 모신 성조, 예언자, 사도, 박사, 순교자들의 나라로 떠나기 직전 임종의 순간에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46) 라는 말을 남겼다고 고대 슬라브어로 쓴 전기가 전합니다만 본인은 이 말로써 성인의 천백 주년의 인사에서 가름하려 합니다. 성령의 인도로 지속된 언행과 일생의 증언으로 성 메토디오는 자신이 살고 간 세기뿐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진 여러 세기 그리고 특별한 의미에서는 우리의 세기를 위해서도 풍성한 소명의 표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 후 885년(그리고 비잔틴식 계산법에 따르면 천지창조 이후 6393년) 봄에 성인은 “복된” 죽음을 맞았는데 이때는 불길한 구름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뒤덮고 날로 증대하는 적대적 긴장이 여러 나라의 평화와 생존, 심지어는 동방과 서방의 교회를 잇는 그리스도교적 형제애와 일치의 성스러운 유대마저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다양한 종족의 신자로 가득 찬 대성당에서 성 메토디오의 제자들은 성인이 일생을 바쳐 전파한 구원과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위해 서거한 목자에게 장엄한 경의를 표했으니, “라틴어와 그리스어와 슬라브어로 전례를 집행했던 것”47) 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을 흠숭했고, 두 분 형제에게서 슬라브어로 복음을 전해 받은 슬라브 민족 가운데 세워진 교회의 최초의 대주교를 공경했던 것입니다. 이 교회는 교황의 명시적 승인 아래 슬라브인 성직제도를 받아들여 더욱 굳게 성장했으며, 사도적 전승에 뿌리를 박고, 로마 교회와 슬라브 민족 선교의 발상지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교회 양쪽과 신앙 및 사랑의 일치를 유지했습니다. 성인의 사후 천백 년이 지난 오늘 본인은 섭리에 따라 메토디오가 사도적 생애를 마친 것으로 보이는 ‘벨레라드’를 적어도 정신적으로나마 찾아보고 싶습니다. 아울러 성 치릴로가 묻힌 ‘로마의 성 클레멘스 대성당’에 잠시 머무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슬라브 민족의 사도인 두 분 형제의 무덤에서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께 두 분의 영신적 유산을 봉헌하는’ 특별 기도를 드리려 합니다. 30.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오, 삼위일체이신 위대한 하느님, 모든 슬라브 민족의 신앙의 유산을 당신께 맡기오니 당신 오, 전능하신 아버지, 당신의 뜻에 따라 이 민족과 국가들에게 “때가 이르러” 살로니카의 거룩한 선교사들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내리신 사명을 충실히 완수했던 그때를 기억해 주십시오. 이들은 사도들의 발자취와 그 후계자들의 뒤를 따라 슬라브 민족이 사는 땅에 복음의 빛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 당신이 인류의 창조주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당신 안에 우리 모두가 형제이며 - 당신의 영원한 말씀이신 성자를 통하여 당신은 만물을 존재하게 하시고 인류가 영원히 당신 생명에 참여하도록 부르셨으며 - 당신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드님을 주셨고, 당신 아드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위해 또 우리 구원을 위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시어 성령의 힘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시고 사람이 되셨으며 - 마침내 당신은 권능과 위로의 성령을 보내시어 그리스도께서 구속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자녀로서의 지위를 받아 당신이 인류에게 하신 굳은 약속의 공동 상속자가 되게 하셨음을 슬라브 민족에게 몸소 증언하였습니다. 오, 아버지, 구속 사업에서 결정을 이루는 당신의 창조 계획은 살아있는 사람을 감싸고 개인의 전 생애와 온 백성의 역사를 포괄합니다. 오, 아버지, 오늘날 교회 전체가 당신에게 간청하는 것을 내려주시고, 살로니카의 거룩한 형제의 사도적 선교 활동으로 진실한 하느님이신 당신을 알고 당신을 받아들여 세례를 통하여 당신 자녀들의 거룩한 공동체에 들어왔던 ‘이 민족과 국가들’이 아무런 장애 없이 열정과 신뢰로써 이 복음적 계획을 여전히 받아들여, 형제의 가르침을 기초로 하여 그들의 모든 인간적 가능성들을 끊임없이 성취하게 해주십시오! - 천백 년 전에 처음 알게 된 길을 따라 이들이, 양심에 합치하여, 당신이 부르시는 목소리에 순종하게 해주십시오! - 당신 아드님 나라의 일원이 되었다고 해서 자기네 지상 조국의 이익에 배치되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없게 해주십시오! - 그들로 하여금 개인 생활과 공적 생활에서 당신에게 합당한 찬미를 드리게 해주십시오! - 그들로 하여금 진리와 사랑과 정의 안에서 그리고 모든 인간의 마음, 공동체, 지구와 온 우주를 감싸는 구세주의 평화를 향유하면서 생활하게 해주십시오! - 인간과 하느님의 자녀로서 지니는 존엄성을 자각하여 그들이 선으로써 모든 증오를 극복하고 죄악을 이겨내도록 해주십시오! 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시여, 두 분 거룩한 형제의 전구를 통하여 유럽 전체가 종교적 그리스도교적 일치의 필요성을 더욱 간절히 느껴, 몰이해와 상호불신이 극복되고 또 이념적 갈등이 진리의 공동 자각 안에서 해소되는 날, 유럽이 상호 존중과 불가침의 자유 안에서 누리는 정의롭고 평화적인 공존의 모범으로 전 세계 앞에 나서도록 해주십시오. 31. 그러므로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 세상을 구속하신 성자 하느님, 모든 거룩함을 지켜주시고 가르치시는 성령이신 하느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교회를, 유럽과 전 세계의 교회를 당신에게 맡기려 합니다. 낡고 새로운 수없이 다양한 선물로 이루어진, 이토록 많고 다양한 자녀들이 공동의 보고에 저장한 이 유일한 재산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 슬라브 민족을 신앙의 공동체로 불러주신 당신께 교회 전체는 이 유산 그리고 이 민족이 전 세계 교회 유산에 바친 공헌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슬라브 민족 출신인 교황이 이를 위해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이 민족의 기여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교회와 유럽 대륙과 전 세계를 풍성하게 하도록 해주십시오! 오늘날의 유럽과 세계에서 그 공헌이 반드시 이루어지게 해주십시오! 우리 동시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말게 해주십시오! 우리는 슬라브 민족이 교회와 인류의 정신적 유산에 보태었고 지금도 보태고 있는 독창적이고 가치 있는 것은 모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렵니다. 이 공동의 보화를 깨닫고 있는 교회 전체는, 이들과 맺은 영신적 연대를 선포하며, 오늘날 전 세계에서 땅 끝까지 완수해야 할 구원 사업의 사명과 복음에 대한 책임을 재확인합니다. 과거의 빛으로 오늘의 현실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리고 내일을 알기 위하여서는 과거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사명은 마래를 향한 불굴의 희망으로 늘 방향을 잡고 인도되기 때문입니다. 32. 미래! 인간적으로 말할 때, 아무리 미래가 엄청난 위협과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는 듯 보인다 해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우리는 이 미래를 당신 손에 맡깁니다. 그리고 당신 아드님의 어머니시자 교회의 어머니이신 분의 전구, 그리고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 성 베네딕토, 치릴로와 메토디오, 아우구스티노, 보니파시오와 유럽의 모든 복음 전파자들의 전구를 통하여 간청합니다. 그분들은 신앙과 소망과 사랑으로 강하게 무장하고 우리 선조에게 당신의 구원과 평화를 선포했으며, 영신적 파종의 노고 속에서 당신의 거룩한 법과 은총의 도움을 바탕으로 한 ‘사랑의 문명’과 새로운 질서를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랑의 문명은 모든 시대가 지난 뒤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모든 사물과 모든 민족들에게 생명을 줄 것입니다. 아멘!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에게 본인의 사도적 축복을 보내드립니다. 교황 재위 7년,
각 주 1. 「탁월한 덕행」.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적 서한(1980.12.31.), AAS 73(1981), 258-262면. ENCYCLICAL EPISTLE SLAVORUM APOSTOLI
I. INTRODUCTION 1. THE APOSTLES OF THE SLAVS, Saints Cyril and Methodius, are remembered by the Church together with the great work of evangelization which they carried out. Indeed it can be said that their memory is particularly vivid and relevant to our day. Considering the grateful veneration enjoyed for centuries by the holy Brothers from Salonika (the ancient Thessalonica), especially among the Slav nations, and mindful of their incalculable contribution to the work of proclaiming the Gospel among those peoples; mindful too of the cause of reconciliation, friendly coexistence, human development and respect for the intrinsic dignity of every nation, by my Apostolic Letter Egregiae Virtutis(1) of 31 December 1980 I proclaimed Saints Cyril and Methodius Co-Patrons of Europe. In this way I followed the path already traced out by my Predecessors, and notably by Leo XIII, who over a hundred years ago, on 30 September 1880, extended the cult of the two Saints to the whole Church, with the Encyclical Epistle Grande Munus,(2) and by Paul VI, who, with the Apostolic Letter Pacis Nuntius(3) of 24 October 1964, proclaimed Saint Benedict Patron of Europe. 2. The purpose of the document of five years ago was to remind people of these solenm acts of the Church and to call the attention of Christians and of all people of good will who have at heart the welfare, harmony and unity of Europe to the ever-living relevance of the eminent figures of Benedict, Cyril and Methodius, as concrete models and spiritual aids for the Christians of today, and especially for the nations of the continent of Europe, which, especially through the prayers and work of these saints, have long been consciously and originally rooted in the Church and in Christian tradition. The publication of my Apostolic Letter in 1980, which was dictated by the firm hope of a gradual overcoming in Europe and the world of everything that divides the Churches, nations and peoples, was linked to three circumstances that were the subject of my prayer and reflection. The first was the eleventh centenary of the Pontifical Letter Industriae Tuae,(4) whereby Pope John VIII in the year 880 approved the use of the Old Slavonic language in the liturgy translated by the two holy Brothers. The second circumstance was the first centenary of the above-mentioned Encyclical Epistle Grande Munus. The third was the beginning, precisely in 1980, of the happy and promising theological dialogue between the Catholic Church and the Orthodox Churches on the Island of Patmos. 3. In the present document I wish to make particular reference to the Epistle Grande Munus, by which Pope Leo III intended to remind the Church and the world of the apostolic merits of both the Brothers-not only of Methodius, who, according to tradition, ended his days at Velehrad in Greater Moravia in the year 885, but also of Cyril, whom death separated from his brother in 869, when he was in Rome, the city which received and which still preserves his relics with profound veneration in the Basilica of Saint Clement. Recalling the holy lives and apostolic merits of the two Brothers from Salonika, Pope Leo XIII fixed their annual liturgical feast on 7 July. After the Second Vatican Council, as a result of the liturgical reform, the feast was transferred to 14 February, which from the historical point of view is the date of the heavenly birthday of Saint Cyril.(5) At a distance of over a hundred years from Pope Leo's Epistle, the new circumstances in which it so happens that there falls the eleventh centenary of the death of Saint Methodius encourage us to give renewed expression to the Church's memory of this important anniversary. And a particular obligation to do so is felt by the first Pope called to the See of Peter from Poland, and thus from the midst of the Slav nations. The events of the last hundred years and especially of the last decades have helped to revive in the Church not only the religious memory of the two holy Brothers but also a historical and cultural interest in them. Their special charisms have become still better understood in the light of the situations and experiences of our own times. A contribution to this has been made by many events which belong, as true signs of the times, to the history of the twentieth century; the first of these is that great event which took place in the life of the Church: the Second Vatican Council. In the light of the magisterium and pastoral orientation of that Councils we can look in a new way-a more mature and profound way-at these two holy figures, now separated from us by eleven centuries. And we can read in their lives and apostolic activity the elements that the wisdom of divine Providence placed in them, so that they might be revealed with fresh fullness in our own age and might bear new fruits. II. BIOGRAPHICAL SKETCH 4. Following the example offered by the Epistle Grande Munus, I wish to recall the life of Saint Methodius, without however thereby ignoring the life-so closely liked to it-of his brother Saint Cyril. This I will do in general terms, leaving to historical research the detailed discussion of individual points. The city which saw the birth of the two holy Brothers is the modern Salonika, which in the ninth century was an important centre of commercial and political life in the Byzantine Empire, and occupied a notable position in the intellectual and social life of that part of the Balkans. Being situated on the frontier of the Slav territories, it also certainly had a Slav name: Solun. Methodius was the elder brother and his baptismal name was probably Michael. He was born between 815 and 820. His younger brother Constantine, who came to be better known by his religious name Cyril, was born in 827 or 828. Their father was a senior official of the imperial administration. The family's social position made possible for the two Brothers a similar career, which in fact Methodius did take up, reaching the rank of Archon or Prefect in one of the frontier Provinces where many Slavs lived. However, towards the year 840 he interrupted his career and retired to one of the monasteries at the foot of Mount Olympus in Bithynia, then known as the Holy Mountain. His brother Cyril studied with great success in Byzantium, where he received Holy Orders, after having resolutely refused a brilliant political future. By reason of his exceptional intellectual and religious talents and knowledge, there were entrusted to him while he has still a young man delicate ecclesiastical appointments, such as that of Librarian of the Archive attached to the great church of Holy Wisdom in Constantinople, and, simultaneously, the prestigious position of Secretary to the Patriarch of that city. However, he very soon made it known that he wished to be relieved of these posts, in order to be able to devote himself to study and the contemplative life, far from the pursuit of ambition. Thus he retired secretly to a monastery on the Black Sea coast. He was discovered six months later, and was persuaded to accept the task of teaching philosophy in the School of higher learning in Constantinople, where by reason of the excellence of his knowledge he gained the epithet of The Philosopher by which he is still known. Later on he was sent by the emperor and the Patriarch on a mission to the Saracens. On the completion of this task he retired from public life in order to join his elder brother Methodius and share with him the monastic life. But once again, together with Methodius, he was included in a Byzantine delegation sent to the Khazars, acting as a religious and cultural expert. While staying in the Crimea at Kherson, they identified what they believed to be the church in which had been buried Saint Clement, Pope of Rome and martyr, who had been exiled to that distant region. They recovered his relics and took them with them.(6) These relics later accompanied the two holy Brothers on their missionary journey to the West, until they were able to bring them solemnly to Rome and present them to Pope Hadrian II. 5. The event which was to determine the whole of the rest of their lives was the request made by Prince Rastislav of Greater Moravia to the Emperor Michael III, to send to his peoples "a Bishop and teacher ... able to explain to them the true Christian faith in their own language".(7) Those chosen were Saints Cyril and Methodius, who readily accepted, set out and, probably by the year 863, reached Greater Moravia-a State then including various Slav peoples of Central Europe, at the crossroads of the mutual influences between East and West. They undertook among these peoples that mission to which both of them devoted the rest of their lives, spent amidst journeys, privations, sufferings, hostility and persecution, which for Methodius included even a period of cruel imprisonment. All of this they bore with strong faith and indomitable hope in God. They had in fact prepared well for the task entrusted to them: they took with them the texts of the Sacred Scriptures needed for celebrating the Sacred Liturgy, which they had prepared and translated into the Old Slavonic language and written in a new alphabet, devised by Constantine the Philosopher and perfectly adapted to the sounds of that language. The missionary activity of the two Brothers was accompanied by notable success, but also by the understandable difficulties which the preceding initial Christianization, carried out by the neighboring Latin Churches, placed in the way of the new missionaries. About three years later, while travelling to Rome, they stopped in Pannonia where the Slav Prince Kocel, who had fled from the important civil and religious center of Nitra, gave them a hospitable reception. From here, after some months, they set out again for Rome together with their followers, for whom they desired to obtain Holy Orders. Their route passed through Venice, where the innovating elements of the mission they were carrying out were subjected to a public discussion. In Rome Pope Hadrian II, who had in the meantime succeeded Nicholas I, received them very cordially. He approved the Slavonic liturgical books, which he ordered to be solemnly placed on the altar in the Church of Saint Mary ad Praesepe, today known as Saint Mary Major, and recommended that their followers be ordained priests. This phase of their efforts concluded in a most favorable manner. Methodius however had to carry out the next stages by himself, because his younger brother, now gravely ill, scarcely had time to take religious vows and put on the monastic habit before he died shortly afterwards, on 14 February 869 in Rome. 6. Saint Methodius remained faithful to the words which Cyril had said to him on his deathbed: "Behold, my brother, we have shared the same destiny, ploughing the same furrow; I now fall in the field at the end of my day. I know that you greatly love your Mountain; but do not for the sake of the Mountain give up your work of teaching. For where better can you and salvation?"(8) Consecrated Archbishop for the territory of the ancient Diocese of Pannonia, and named Papal Legate "ad gentes" (for the Slav peoples), he assumed the ecclesiastical title of the re-established Episcopal See of Sirmium. However, Methodius' apostolic activity was cut short as the result of political and religious complications which culminated in his imprisonment for two years, on the charge of having invaded the episcopal jurisdiction of another. He was set free only on the personal intervention of Pope John VIII. The new sovereign of Greater Moravia, Prince Svatopluk, also subsequently showed hostility to the work of Methodius. He opposed the Slavonic liturgy and spread doubts in Rome about the new Archbishop's orthodoxy. In the year 880 Methodius was called ad limina Apostolorum, to present once more the whole question personally to John VIII. In Rome, absolved of all the accusations, he obtained from the Pope the publication of the Bull Industriae Tuae,(9) which, at least in substance, restored the prerogatives granted to the liturgy in Slavonic by Pope John's predecessor Hadrian II. When in 881 or 882 Methodius went to Constantinople, he received a similar recognition of perfect legitimacy and orthodoxy also from the Byzantine Emperor and the Patriarch Photius, who at that time was in full communion with Rome. He devoted the last years of his life principally to making further translations of the Sacred Scriptures, the liturgical books, the works of the Fathers of the Church and also the collection of ecclesiastical and Byzantine civil laws called the Nomocanon. Concerned for the survival of the work which he had begun, he named as his successor his disciple Gorazd. He died on 6 April 885 in the service of the Church established among the Slav peoples. 7. His far-seeing work, his profound and orthodox doctrine, his balance, loyalty, apostolic zeal and intrepid magnanimity gained Methodius the recognition and trust of Roman Pontiffs, of Patriarchs of Constantinople, of Byzantine Emperors and of various Princes of the young Slav peoples. Thus he became the guide and legitimate Pastor of the Church which in that age became established in the midst of those nations. He is unanimously venerated, together with his brother Constantine, as the preacher of the Gospel and teacher "from God and the holy Apostle Peter",(10) and as the foundation of full unity between the Churches of recent foundation and the more ancient ones. For this reason, "men and women, humble and powerful, rich and poor, free men and slaves, widows and orphans, foreigners and local people, the healthy and the sick"(11) made up the throng that amid tears and songs accompanied to his burial place the good Teacher and Pastor who had become "all things to all men, that I might by all means save some".(12) To tell the truth, after the death of Methodius the work of the holy Brothers suffered a grave crisis, and persecution of their followers grew so severe that the latter were forced to abandon their missionary field. Nonetheless, their sowing of the Gospel seed did not cease to bear fruit, and their pastoral attitude of concern to bring the revealed truth to new peoples while respecting their cultural originality remains a living model for the Church and for the missionaries of all ages. III. HERALDS OF THE GOSPEL 8. Byzantine in culture, the brothers Cyril and Methodius succeeded in becoming apostles of the Slavs in the full sense of the word. Separation from one's homeland, which God sometimes requires of those he has chosen, when accepted with faith in his promise is always a mysterious and fertile pre-condition for the development and growth of the People of God on earth. The Lord said to Abraham: "Go from your country and your kindred and your father's house to the land that I will show you. And I will make of you a great nation, and I will bless you, and make your name great, so that you will be a blessing".(13) In the dream which Saint Paul had at Troas in Asia Minor, a Macedonian, therefore an inhabitant of the European continent, came before him and implored him to come to his country to proclaim there the Word of God: "Come over to Macedonia and help us.(14) Divine Providence, which for the two holy Brothers expressed itself through the voice and authority of the Emperor of Byzantium and of the Patriarch of the Church of Constantinople, addressed to them a similar exhortation, when it asked them to go as missionaries among the Slavs. For them, this task meant giving up not only a position of honour but also the contemplative life. It meant leaving the area of the Byzantine Empire and undertaking a long pilgrimage in the service of the Gospel among peoples that, in many aspects, were still very alien to the system of civil society based on the advanced organization of the State and the refined culture of Byzantium, imbued with Christian principles. A similar request has addressed three times to Methodius by the Roman Pontiff, when he sent him as Bishop among the Slavs of Greater Moravia, in the ecclesiastical regions of the ancient Diocese of Pannonia. 9. The Slavonic Life of Methodius reports in the following words the request made by the Prince Rastislav to the Emperor Michael III through his envoys: "Many Christian teachers have reached us from Italy, from Greece and from Germany, who instruct us in different ways. But we Slavs ... have no one to direct us towards the truth and instruct us in an understandable way".(15) It was then that Constantine and Methodius were invited to go there. Their profoundly Christian response to the invitation in this circumstance and on all similar occasions is admirably expressed by the words of Constantine to the Emperor: "However tired and physically worn out I am, I will go with joy to that land";(16) "with joy I depart for the sake of the Christian faith".(17) The truth and the power of their missionary mandate came from the depths of the mystery of the Redemption, and their evangelizing work among the Slav peoples was to constitute an important link in the mission entrusted by the Savior to the Church until the end of time. It was a fulfillment-in time and in concrete circumstances-of the words of Christ, who in the power of his Cross and Resurrection told the Apostles: "Preach the Gospel to the whole creation";(18) "Go therefore and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19) In so doing, the preachers and teachers of the Slav peoples let themselves be guided by the apostolic ideal of Saint Paul: "For in Christ Jesus you are all children of God, through faith. For as many of you as were baptized into Christ have put on Christ. There is neither Jew nor Greek, there is neither slave nor free, there is neither male nor female; for you are all one in Christ Jesus".(20) Together with a great respect for persons and a disinterested concern for their true good, the two holy Brothers had the resources of energy, prudence, zeal and charity needed for bringing the light to the future believers, and at the same time for showing them what is good and offering concrete help for attaining it. For this purpose they desired to become similar in every aspect to those to whom they were bringing the Gospel; they wished to become part of those peoples and to share their lot in everything. 10. Precisely for this reason they found it natural to take a clear position in all the conflicts which were disturbing the societies as they became organized. They took as their own the difficulties and problems inevitable for peoples who were defending their own identity against the military and cultural pressure of the new Romano-Germanic Empire, and who were attempting to resist forms of life which they felt to be foreign. It was also the beginning of wider divergencies, which were unfortunately destined to increase, between Eastern and Western Christianity, and the two holy missionaries found themselves personally involved in this. But they always succeeded in maintaining perfect orthodoxy and consistent attention both to the deposit of tradition and to the new elements in the lives of the peoples being evangelized. Situations of opposition often weighed upon them in all their uncertain and painful complexity. But this did not cause Constantine and Methodius to try to withdraw from the trial. Misunderstanding, overt bad faith and even, for Saint Methodius, imprisonment accepted for love of Christ, did not deflect either of them from their tenacious resolve to help and to serve the good of the Slav peoples and the unity of the universal Church. This was the price which they had to pay for the spreading of the Gospel, the missionary enterprise, the courageous search for new forms of living and effective ways of bringing the Good News to the Slav nations which were then forming. For the purposes of evangelization, the two holy Brothers-as their biographies indicate-undertook the difficult task of translating the texts of the Sacred Scriptures, which they knew in Greek, into the language of the Slav population which had settled along the borders of their own region and native city. Making use of their own Greek language and culture for this arduous and unusual enterprise, they set themselves to understanding and penetrating the language, customs and traditions of the Slav peoples, faithfully interpreting the aspirations and human values which were present and expressed therein. 11. In order to translate the truths of the Gospel into a new language, they had to make an effort to gain a good grasp of the interior world of those to whom they intended to proclaim the word of God in images and concepts that would sound familiar to them. They realized that an essential condition of the success of their missionary activity was to transpose correctly Biblical notions and Greek theological concepts into a very different context of thought and historical experience. It was a question of a new method of catechesis. To defend its legitimacy and prove its value, Saint Methodius, at first together with his brother and then alone, did not hesitate to answer with docility the invitations to come to Rome, invitations received first from Pope Nicholas I in 867 and then from Pope John VIII in 879. Both Popes wished to compare the doctrine being taught by the Brothers in Greater Moravia with that which the holy Apostles Peter and Paul had passed down, together with the glorious trophy of their holy relics, to the Church's chief episcopal See. Previously, Constantine and his fellow workers had been engaged in creating a new alphabet, so that the truths to be proclaimed and explained could be written in Old Slavonic and would thus be fully comprehended and grasped by their hearers. The effort to learn the language and to understand the mentality of the new peoples to whom they wished to bring the faith was truly worthy of the missionary spirit. Exemplary too was their determination to assimilate and identify themselves with all the needs and expectations of the Slav peoples. Their generous decision to identify themselves with those peoples' life and traditions, once having purified and enlightened them by Revelation, make Cyril and Methodius true models for all the missionaries who in every period have accepted Saint Paul's invitation to become all things to all people in order to redeem all. And in particular for the missionaries who, from ancient times until the present day, from Europe to Asia and today in every continent, have labored to translate the Bible and the texts of the liturgy into the living languages of the various peoples, so as to bring them the one word of God, thus made accessible in each civilization's own forms of expression. Perfect communion in love preserves the Church from all forms of particularism, ethnic exclusivism or racial prejudice, and from any nationalistic arrogance. This communion must elevate and sublimate every purely natural legitimate sentiment of the human heart. IV. THEY PLANTED THE CHURCH OF GOD 12. But the characteristic of the approach adopted by the Apostles of the Slavs Cyril and Methodius which I especially wish to emphasize is the peaceful way in which they built up the Church, guided as they were by their vision of the Church as one, holy and universal. Even though Slav Christians, more than others, tend to think of the holy Brothers as "Slavs at heart", the latter nevertheless remain men of Hellenic culture and Byzantine training. In other words, men who fully belonged to the civil and ecclesiastical tradition of the Christian East. Already in their time certain differences between Constantinople and Rome had begun to appear as pretexts for disunity, even though the deplorable split between the two parts of the same Christian world was still in the distant future. The evangelizers and teachers of the Slavs set out for Greater Moravia imbued with all the wealth of tradition and religious experience which marked Eastern Christianity and which was particularly evident in theological teaching and in the celebration of the Sacred Liturgy. The sacred rites in all the Churches within the borders of the Byzantine Empire had long been celebrated in Greek. However; the traditions of many national Churches of the East, such as the Georgian and Syriac, which used the language of the people in their liturgies, were well known to the advanced cultural milieu of Constantinople. They were especially well known to Constantine the Philosopher, as a result of his studies and of his many contacts with Christians belonging to those Churches, both in the capital and in the course of his journeys. Both the Brothers were aware of the antiquity and legitimacy of these traditions, and were therefore not afraid to use the Slavonic language in the liturgy and lo make it into an effective instrument for bringing the divine truths to those who spoke it. This they did without any spirit of superiority or domination, but out of love of justice and with a clear apostolic zeal for peoples then developing. Western Christianity, after the migrations of the new peoples, had amalgamated the newly arrived ethnic groups with the Latin- peaking population already living there, and had extended to all, in order to unite them, the Latin language, liturgy and culture which had been transmitted by the Church of Rome. The uniformity thus achieved gave relatively young and rapidly expanding societies a sense of strength and compactness, which contributed to a closer unity among them and a more forceful affirmation in Europe. It is understandable that in such a situation differences sometimes came to be regarded as a threat to a still incomplete unity. One can also understand how strongly the temptation was felt to eliminate such differences, even by using forms of coercion. 13. At this point it is an unusual and admirable thing that the holy Brothers, working in such complex and precarious situations, did not seek to impose on the peoples assigned to their preaching either the undeniable superiority of the Greek language and Byzantine culture, or the customs and way of life of the more advanced society in which they had grown up and which necessarily remained familiar and dear to them. Inspired by the ideal of uniting in Christ the new believers, they adapted to the Slavonic language the rich and refined texts of the Byzantine liturgy and likewise adapted to the mentality and customs of the new peoples the subtle and complex elaborations of Greco-Roman law. In following this programme of harmony and peace, Cyril and Methodius were ever respectful of the obligations of their mission. They acknowledged the traditional prerogatives and ecclesiastical rights laid down by Conciliar Canons. Thus, though subjects of the Eastern Empire and believers subject to the Patriarchate of Constantinople, they considered it their duty to give an account of their missionary work to the Roman Pontiff. They likewise submitted to his judgment, in order to obtain his approval, the doctrine which they professed and taught, the liturgical books which they had written in the Slavonic language, and the methods which they were using in evangelizing those peoples. Having undertaken their mission under orders from Constantinople, they then in a sense sought to have it confirmed by approaching the Apostolic See of Rome, the visible center: of the Church's unity.(21) Thus they established the Church with an awareness of her universality as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This is clearly and explicitly seen in their whole way of acting. It can be said that Jesus' priestly prayer- ut unum sint (22) is their missionary motto in accordance with the Psalmist's words: "Praise the Lord, all nations! Extol him, all peoples".(23) For us today their apostolate also possesses the eloquence of an ecumenical appeal: it is an invitation to restore, in the peace of reconciliation, the unity that was gravely damaged after the time of Cyril and Methodius, and, first and foremost, the unity between East and West. The conviction held by the holy Brothers from Salonika, namely that each local Church is called to enrich with its own endowments the Catholic "pleroma", was in perfect harmony with their evangelical insight that the different conditions of life of the individual Christian Churches can never justify discord, disagreement and divisions in the profession of the one faith and in the exercise of charity. 14. As we know, according to the teaching of the Second Vatican Council " the 'ecumenical movement' means those activities and enterprises which, according to various needs of the Church and as opportunities offer, are initiated and organized to promote Christian unity".(24) Thus it seems in no way anachronistic to see Saints Cyril and Methodius as the authentic precursors of ecumenism, inasmuch as they wished to eliminate effectively or to reduce any divisions, real or only apparent, between the individual communities belonging to the same Church. For the division which unfortunately occurred in the course of the Church's history and which sadly still persists "not only openly contradicts the will of Christ, (but) provides a stumbling block to the world, and inflicts damage on the most holy cause of proclaiming the Gospel to every creature".(25) The fervent solicitude shown by both Brothers and especially by Methodius by reason of his episcopal responsibility, to preserve unity of faith and love between the Churches of which they were members, namely, between the Church of Constantinople and the Church of Rome on the one hand, and the Churches which arose in the lands of the Slavs on the other, was and will always remain their great merit. This merit is all the greater if one takes into account the fact that their mission was exercised in the years 863-885, thus in the critical years when there emerged and began-to grow more serious the fatal discord and bitter controversy between the Churches of the East and the West. The division was accentuated by the question of where Bulgaria, which had just officially accepted Christianity, canonically belonged. In this stormy period, which was also marked by armed conflicts between neighboring Christian peoples, the holy Brothers from Salonika preserved a resolute and vigilant fidelity to right doctrine and to the tradition of the perfectly united Church, and in particular to the "divine teachings" and "ecclesiastical teachings"(26) on which, in accordance with the Canons of the ancient Councils, her structure and organization was founded. This fidelity enabled them to complete their great missionary tasks and to remain in full spiritual and canonical unity with the Church of Rome, with the Church of Constantinople and with the new Churches which they had founded among the Slav peoples. 15. Methodius especially did not hesitate to face misunderstandings, conflicts and even slanders and physical persecution, rather than fall short of his exemplary ecclesial fidelity, and in order to remain faithful to his duties as a Christian and a Bishop and to the obligations which he had assumed vis-a-vis the Church of Byzantium which had begotten him and sent him out as a missionary together with Cyril. Then there were his obligations to the Church of Rome, thanks to which he fulfilled his charge as Archbishop in "the territory of Saint Peter";(27) likewise his obligations to that Church growing in the lands of the Slavs, which he accepted as his own and successfully defended-convinced of his just-right before the ecclesiastical and civil authorities, protecting in particular the liturgy in the Old Slavonic language and the fundamental ecclesiastical rights proper to the Churches in the various nations. By thus acting, he always resorted, as did Constantine the Philosopher, to dialogue with those who opposed his ideas or his pastoral initiatives and who cast doubt on their legitimacy. Thus he would always remain a teacher for all those who, in whatever age, seek to eliminate discord by respecting the manifold fullness of the Church, which, conforming to the will of its Founder Jesus Christ, must be always 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 This task was perfectly reflected in the Creed of the 150 Fathers of the Second Ecumenical Council of Constantinople, which is the unalterable profession of faith of all Christians. V. CATHOLIC SENSE OF THE CHURCH 16. It is not only the evangelical content of the doctrine proclaimed by Saints Cyril and Methodius that merits particular emphasis. Also very expressive and instructive for the Church today is the catcehetic and pastoral method that they applied in their apostolic activity among the peoples who had not yet heard the Sacred Mysteries celebrated in their native language, nor heard the word of God proclaimed in a way that completely fitted their own mentality and respected the actual conditions of their own life. We know that the Second Vatican Council, twenty years ago, had as one of its principal tasks that of reawakening the self-awareness of the Church and, through her interior renewal, of impressing upon her a fresh missionary impulse for the proclamation of the eternal message of salvation, peace and mutual concord among peoples and nations, beyond all the frontiers that yet divide our planet, which is intended by the will of God the Creator and Redeemer to be the common dwelling for all humanity. The dangers that in our times are accumulating over our world cannot make us forget the prophetic insight of Pope John XXIII, who convoked the Council with the intent and the conviction that it would be capable of preparing and initiating a period of springtime and rebirth in the life of the Church. And, among its statements on the subject of universality, the same Council included the following: "All men are called to belong to the new People of God. Wherefore this People, while remaining one and unique, is to be spread throughout the whole world and must exist in all ages, so that the purpose of God's will may be fulfilled. In the beginning God made human nature one. After his children were scattered, he decreed that they should at length be unified again (cf. Jn 11:52)... The Church or People of God takes nothing away from the temporal welfare of any people by establishing that kingdom. Rather does she foster and take to herself, insofar as they are good, the abilities, resources, and customs of each people. Taking them to herself she purifies, strengthens, and enobles them... This characteristic of universality which adorns the People of God is a gift from the Lord himself... In virtue of this catholicity each individual part of the Church contributes through its special gifts to the good of the other parts and of the whole Church. Thus through the common sharing of gifts and through the common effort to attain fullness in unity, the whole and each of its parts receive increase".(28) 17. We can say without fear of contradiction that such a traditional and at the same time extremely up-to-date vision of the catholicity of the Church-like a symphony of the various liturgies in all the world's languages united in one single liturgy, or a melodious chorus sustained by the voices of unnumbered multitudes, rising in countless modulations, tones and harmonies for the praise of God from every part of the globe, at every moment of history-this vision corresponds in a particular way to the theological and pastoral vision which inspired the apostolic and missionary work of Constantine the Philosopher and of Methodius, and which sustained their mission among the Slav nations. In Venice, before the representatives of the ecclesiastical world, who held a rather narrow idea of the Church and were opposed to this vision, Saint Cyril defended it with courage. He showed that many peoples had already in the past introduced and now possessed a liturgy written and celebrated in their own language, such as " the Armenians, the Persians, the Abasgians, the Georgians, the Sogdians, the Goths, the Avars, the Tirsians, the Khazars, the Arabs, the Copts, the Syrians and many others".(29) Reminding them that God causes the sun to rise and the rain to fall on all people without exception,(30) he said: "Do not all breathe the air in the same way? And you are not ashamed to decree only three languages (Hebrew, Greek and Latin), deciding that all other peoples and races should remain blind and deaf! Tell me: do you hold this because you consider God is so weak that he cannot grant it, or so envious that he does not wish it?".(31) To the historical and logical arguments which they brought against him Cyril replied by referring to the inspired basis of Sacred Scripture: "Let every tongue confess that Jesus Christ is Lord, to the glory of God the Father";(32) "All the earth worships you; they sing praises to you, sing praises to your name";(33) "Praise the Lord, all nations! Extol him, all peoples!".(34) 18. The Church is catholic also because she is able to present in every human context the revealed truth, preserved by her intact in its divine content, in such a way as to bring it into contact with the lofty thoughts and just expectations of every individual and every people. Moreover, the entire patrimony of good which every generation transmits to posterity, together with the priceless gift of life, forms as it were an immense and many-coloured collection of tesserae that together make up the living mosaic of the Pantocrator, who will manifest himself in his total splendour only at the moment of the Parousia. The Gospel does not lead to the impoverishment or extinction of those things which every individual, people and nation and every culture throughout history recognizes and brings into being as goodness, truth and beauty. On the contrary, it strives to assimilate and to develop all these values: to live them with magnanimity and joy and to perfect them by the mysterious and ennobling light of Revelation. The concrete dimension of catholicity, inscribed by Christ the Lord in the very make-up of the Church, is not something static, outside history and flatly uniform. In a certain sense it wells up and develops every day as something new from the unanimous faith of all those who believe in God, One and Three, revealed by Jesus Christ and preached by the Church through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This dimension issues quite spontaneously from mutual respect proper to fraternal love-for every person and every nation, great or small, and from the honest acknowledgment of the qualities and rights of brethren in the faith. 19. The catholicity of the Church is manifested in the active joint responsibility and generous cooperation of all for the sake of the common good. The Church everywhere effects her universality by accepting, uniting and exalting in the way that is properly hers, with motherly care, every real human value. At the same time, she strives in every clime and every historical situation to win for God each and every human person, in order to unite them with one another and with him in his truth and his love. All individuals, all nations, cultures and civilizations have their own part to play and their own place in God's mysterious plan and in the universal history of salvation. This was the thought of the two holy Brothers: God "merciful and kind",(35) "waiting for all people to repent,) that all may be saved and come to the knowledge of the Truth,(36) ... does not allow the human race to succumb to weakness and perish, and to fall into the temptation of the enemy. But year by year and at every time he does not cease to lavish on us a manifold grace, from the beginning until today in the same way: first, through the Patriarchs and Fathers, and after them through the Prophets; and again through the Apostles and Martyrs, the just men and the Doctors whom he chooses in the midst of this stormy life".(37) 20. The message of the Gospel which Saints Cyril and Methodius translated for the Slav peoples, drawing with wisdom from the treasury of the Church "things old and new",(38) was transmitted through preaching and instruction in accordance with the eternal truths, at the same time being adapted to the concrete historical situation. Thanks to the missionary efforts of both Saints, the Slav peoples were able for the first time to realize their own vocation to share in the eternal design of the Most Holy Trinity, in the universal plan for the salvation of the world. At the same time, they can recognized their role at the service of the whole history of the humanity created by God the Father, redeemed by the Son our Savior and enlightened by the Holy Spirit. Thanks to this preaching, duly approved by the authorities of the Church-the Bishops of Rome and the Patriarchs of Constantinople-the Slavs were able to feel that they too, together with the other nations of the earth, were descendants and heirs of the promise made by God to Abraham.(39) In this way, thanks to the ecclesiastical organization created by Saint Methodius and thanks to their awareness of their own Christian identity, the Slavs took their destined place in the Church which had now arisen also in that part of Europe. For this reason, their modern descendants keep in grateful and everlasting remembrance the one who became the link that binds them to the chain of the great heralds of the divine Revelation of the Old and New Testaments: "After all of these, the merciful God, in our own time, raised up for the good work, for the sake of our own people, for whom nobody had ever cared, our Teacher, the holy Methodius, whose virtues and struggles we unblushingly compare, one by one, to those of these men pleasing to God".(40) VI. THE GOSPEL AND CULTURE 21. The Brothers from Salonika were not only heirs of the faith but also heirs of the culture of Ancient Greece, continued by Byzantium. Everyone knows how important this heritage is for the whole of European culture and, directly or indirectly, for the culture of the entire world. The work of evangelization which they carried out as pioneers in territory inhabited by Slav peoples-contains both a model of what today is called " inculturation the incarnation of the Gospel in native cultures and also the introduction of these cultures into the life of the Church. By incarnating the Gospel in the native culture of the peoples which they were evangelizing, Saints Cyril and Methodius were especially meritorious for the formation and development of that same culture, or rather of many cultures. Indeed all the cultures of the Slav nations owe their "beginning" or development to the work of the Brothers from Salonika. For by their original and ingenious creation of an alphabet for the Slavonic language the Brothers made a fundamental contribution to the culture and literature of all the Slav nations. Furthermore, the translation of the sacred books, carried out by Cyril and Methodius together with their pupils, conferred a capacity and cultural dignity upon the Old Slavonic liturgical language, which became for many hundreds of years not only the ecclesiastical but also the official and literary language, and even the common language of the more educated classes of the greater part of the Slav nations, and in particular of all the Slavs of the Eastern Rite. It was also used in the Church of the Holy Cross in Cracow, where the Slav Benedictines had established themselves. Here were published the first liturgical books printed in this language. Up to the present day this is the language used in the Byzantine liturgy of the Slavonic Eastern Churches of the Rite of Constantinople, both Catholic and Orthodox, in Eastern and South Eastern Europe, as well as in various countries of Western Europe. It is also used in the Roman liturgy of the Catholics of Croatia. 22. In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the Slavs of Eastern Rite, this language played a role equal to that of the Latin language in the West. It also lasted longer than Latin in part until the nineteenth century-and exercised a much more direct influence on the formation of the local literary languages, thanks to its close kinship with them. These merits vis-a-vis the culture of all the Slav peoples and nations make the work of evangelization carried out by Saints Cyril and Methodius in a certain sense constantly present in the history and in the life of these peoples and nations. VII. THE SIGNIFICANCE AND INFLUENCE OF THE CHRISTIAN MILLENNIUM IN THE SLAV WORLD 23. The apostolic and missionary activity of Saints Cyril and Methodius, which belongs to the second half of the ninth century, can be considered the first effective evangelization of the Slavs. This activity involved the individual territories in varying degrees, and was mainly concentrated in the territories of the then existing State of Greater Moravia. It principally included the regions belonging to the metropolis of which Methodius was pastor, namely Moravia, Slovakia and Pannonia, the last being a part of modern Hungary. Included in the sphere of the wider influence exercised by this apostolic activity, especially that of the missionaries trained by Methodius, were the other groups of Western Slavs, particularly those of Bohemia. The first historical Prince of Bohemia of the dynasty of the Premyslids, Bozyvoj (Borivoj), was probably baptized according to the Slavonic Rite. Later this influence reached the Sorbo-Lusatian tribes, and the territories of southern Poland. However, from the time of the fall of Greater Moravia in about 905- 906 the Latin Rite took the place of the Slav Rite and Bohemia was assigned ecclesiastically to the Bishop of Regensburg and the metropolis of Salzburg. However, it is worthy of note that about the middle of the tenth century, at the time of Saint Wenceslaus, there was still a strong intermingling of the elements of both rites, and an advanced coexistence of both languages in the liturgy: Slavonic and Latin. Moreover, the Christianization of the people was not possible without using the native language. And only upon such a foundation could the development of the Christian terminology in Bohemia take place, and from here, subsequently, the development and consolidation of ecclesiastical terminology in Poland. Information about the Prince of the Vislits in the Lite of Methodius is the most ancient historical reference to one of the Polish tribes.(41) Insufficient data exist for it to be possible to link this item of information with the institution in the Polish territories of a Slav Rite ecclesiastical organization. 24. The Baptism of Poland in 966, in the person of the first historical sovereign, Mieszko, who married the Bohemian princess Dubravka, took place principally through the Bohemian Church, and by this route Christianity reached Poland from Rome in the Latin form. But the fact remains that the beginnings of Christianity in Poland are in a way linked with the work of the Brothers who set out from distant Salonika. Among the Slavs of the Balkan peninsula the efforts of the holy Brothers bore fruit in an even more visible way. Thanks to their apostolate the Christianity which had already for some time been established in Croatia was consolidated. Principally through their disciples who had been expelled from the area where they had originally worked the mission of Cyril and Methodius was confirmed and developed wonderfully in Bulgaria. Here, thanks to Saint Clement of Okhrid, dynamic centers of monastic life arose, and here particularly the Cyrillic alphabet developed. From here too Christianity moved to other territories, until it passed through neighboring Romania and reached the ancient Rus' of Kiev, and then spread from Moscow eastwards. In a few years, in 1988 to be exact, the millennium of the baptism of Saint Vladimir, Grand Duke of Kiev, will be celebrated. 25. Rightly therefore Saints Cyril and Methodius were at an early date recognized by the family of Slav peoples as the fathers of both their Christianity and their culture. In many of the territories mentioned above, although there had been various missionaries, the majority of the Slav population in the ninth century still retained pagan customs and beliefs. Only in the land cultivated by our Saints, or at least prepared by them for cultivation, did Christianity definitively enter the history of the Slavs during the following century. Their work is an outstanding contribution to the formation of the common Christian roots of Europe, roots which by their strength and vitality are one of the most solid points of reference, which no serious attempt to reconstruct in a new and relevant way the unity of the Continent can ignore. After eleven centuries of Christianity among the Slavs, we clearly see that the heritage of the Brothers from Salonika is and remains for the Slavs deeper and stronger than any division. Both Christian traditions-the Eastern deriving from Constantinople and the Western deriving from Rome arose in the bosom of the one Church, even though against the background of different cultures and of a different approach to the same problems. This diversity, when its origin is properly understood and when its value and meaning are properly considered, can only enrich the culture of Europe and its religious tradition, and likewise become an adequate foundation for its hoped- for spiritual renewal. 26. Ever since the ninth century, when in Christian Europe a new organization was emerging, Saints Cyril and Methodius have held out to us a message clearly of great relevance for our own age, which precisely by reason of the many complex problems of a religious, cultural, civil and international nature, is seeking a vital unity in the real communion of its various elements. It can be said of the two evangelizers that characteristic of them was their love for the communion of the universal Church both in the East and in the West, and, within the universal Church, love for the particular Church that was coming into being in the Slav nations. From them also comes for the Christians and-people of our time the invitation to build communion together. But it is in the specific area of missionary activity that the example of Cyril and Methodius is of even greater value. For this activity is an essential task of the Church, and is urgent today in the already mentioned form of "inculturation". The two Brothers not only carried out their mission with full respect for the culture already existing among the Slav peoples, but together with religion they eminently and unceasingly promoted and extended that culture. By analogy, today the Churches of ancient origin can and must help the young Churches and peoples to mature in their own identity and progress in it.(42) 27. Cyril and Methodius are as it were the connecting links or spiritual bridge between the Eastern and Western traditions, which both come together in the one great Tradition of the universal Church. For us they are the champions and also the patrons of the ecumenical endeavor of the sister Churches of East and West, for the rediscovery through prayer and dialogue of visible Unity in perfect and total communion, "the unity which", as I said on the occasion of my visit to Bari, "is neither absorption nor fusion".(43) Unity is a meeting in truth and love, granted to us by the Spirit. Cyril and Methodius, in their personality and their work, are figures that awaken in all Christians a great "longing for union" and for unity between the two sister Churches of East and West.(44) For full catholicity, every nation, every culture has its own part to play in the universal plan of salvation. Every particular tradition, every local Church must remain open and alert to the other Churches and traditions and, at the same time, to universal and catholic communion; were it to remain closed in on itself, it too would run the risk of becoming impoverished. By exercising their own charism, Cyril and Methodius made a decisive contribution to the building of Europe not only in Christian religious communion but also to its civil and cultural union. Not even today does there exist any other way of overcoming tensions and repairing the divisions and antagonisms both in Europe: and in the world which threaten to cause a frightful destruction of lives and values. Being Christians in our day means being builders of communion in the Church and in society. This calls for openness to others, mutual understanding, and readiness to cooperate through the generous exchange of cultural and spiritual resources. One of the fundamental aspirations of humanity today is to rediscover unity and communion for a life truly worthy of man on the worldwide level. The Church, conscious of being the universal sign and sacrament of salvation and of the unity of the human race, declares her readiness to accomplish this duty of hers, to which "the conditions of this age lend special urgency so that all people joined more closely today by various social, technical, and cultural bonds can achieve as well full unity in Christ".(45) VIII. CONCLUSION 28. It is fitting, then, that the Church should celebrate with solemnity and joy the eleven centuries that have elapsed since the close of the apostolic work of the first Archbishop, ordained in Rome for the Slav peoples, Methodius, and of his brother Cyril, and that she should thus commemorate the entry of these peoples on to the scene of the history of salvation and into the of European nations which during the preceding centuries had already accepted the Gospel message. Everyone will understand with what profound happiness I will share in this celebration as the first son of the Slav race to be called, after nearly two millennia, to occupy the episcopal see that once belonged to Peter in this city of Rome. 29. "Into thy hands I commend my spirit": we salute the eleventh centenary of Saint Methodius' death with the very words which as his Life in Old Slavonic recounts he uttered before he died, when he was about to join his fathers in faith, hope and charity: the Patriarchs, Prophets, Apostles, Doctors and Martyrs. By the testimony of his words and life, sustained by the charism of the Spirit, he gave an example of a vocation fruitful not only for the century in which he lived but also for the centuries which followed, and in a special way for our own times. His blessed "passing" in the spring of the year 885 after the Incarnation of Christ (and according to the Byzantine calculation of time, in the year 6393 since the creation of the world took place at a time when disquieting clouds were gathering above Constantinople and hostile tensions were increasingly threatening the peace and life of the nations, and even threatening the sacred bonds of Christian brotherhood and communion linking the Churches of the East and West. In his Cathedral, filled with the faithful of different races, the disciples of Saint Methodius paid solemn homage to their dead pastor for the message of salvation, peace and reconciliation which he had brought and to which he had devoted his life: "They celebrated a sacred office in Latin, Greek and Slavonic",(47) adoring God and venerating the first Archbishop of the Church which he established among the Slavs, to whom he and his brother had proclaimed the Gospel in their own language. This Church grew even stronger when through the explicit consent of the Pope it received a native hierarchy, rooted in the apostolic succession and remaining in unity of faith and love both with the Church of Rome and with that of Constantinople, from which the Slav mission had begun. Now that eleven centuries have passed since his death, I desire to be present at least spiritually in Velehrad, where-it seems-Providence enabled Methodius to end his apostolic life: -I desire also to pause in the Basilica of Saint Clement in Rome, in the place where Saint Cyril was buried; -and at the Tombs of both these Brothers, the Apostles of the Slavs, I desire to recommend to the Most Blessed Trinity their spiritual heritage with a special prayer. 30. "Into your hands I commend...". O great God, One in Trinity, I entrust to you the heritage of faith of the Slav nations; preserve and bless this work of yours! Remember, O Almighty Father, the moment when, in accordance with your will, the "fullness of time" arrived for these peoples and nations, and the holy Missionaries from Salonika faithfully fulfilled the command that your Son Jesus Christ had entrusted to his Apostles; following in their footsteps and in those of their successors, they brought into the lands inhabited by the Slavs the light of the Gospel, the Good News of salvation and, in their presence, bore testimony -that you are the Creator of man, that you are our Father and that in you we are all brethren; -that through the Son, your eternal Word, you have given existence to all things, and have called human beings to share in your life without end; -that you have so loved the world as to grant it the gift of your only begotten Son, who for us men and for our salvation, came down from heaven and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became incarnate in the womb of the Virgin Mary and was made man; -and that finally you have sent the Spirit of power and consolation so that every human being, redeemed by Christ, may in him receive the dignity of a child and become a co-heir of the unfailing promises which you have made to humanity! Your plan of creation, O Father, culminating in the Redemption, touches the living man and embraces his entire life and the history of all peoples. Grant, O Father, what the whole Church today implores from you and grant also that the people and the nations which, thanks to the apostolic mission of the holy Brothers from Salonika, have known and accepted you, the true God, and through Baptism have entered into the holy community of your children, may still continue, without hindrance, to accept with enthusiasm and trust this evangelical programme and continue to realize all their human possibilities on the foundation of their teachings! -May they follow, in conformity with their own conscience, the voice of your call along the paths shown to them for the first time eleven centuries ago! -May their membership of the Kingdom of your Son never be considered by anyone to be contrary to the good of their earthly homeland! -May they render to you due praise in private and in public life! -May they live in truth, charity, justice and in the enjoyment of the messianic peace which enfolds human hearts, communities, the earth and the entire universe! -Aware of their dignity as human beings and children of God, may they have the strength to overcome all hatred and to conquer evil with good! But also grant to the whole of Europe, O Most Holy Trinity, that through the intercession of the two holy Brothers it may feel ever more strongly the need for religious and Christian unity and for a brotherly communion of all its peoples, so that when incomprehension and mutual distrust have been overcome and when ideological conflicts have been conquered in the common awareness of the truth, it may be for the whole world an example of just and peaceful coexistence in mutual respect and inviolate liberty. 31. To you, therefore, God the Father Almighty, God the Son who have redeemed the world, God the Spirit who are the sustainer and teacher of all holiness, I desire to entrust the whole Church of yesterday, today and tomorrow, the Church both in Europe and throughout the earth. Into your hands I commit this singular wealth, made up of so many different gifts, ancient and new, placed in the common treasury by so many different sons and daughters. The whole Church thanks you, who called the Slav nations into the communion of the faith, for this heritage and for the contribution made by them to the universal patrimony. The Pope of Slav origin in a special way thanks you for this. May this contribution never cease to enrich the Church, the Continent of Europe and the whole world! May it never fail in Europe and in the world of today! May it never fade from the memories of our contemporaries! We desire to accept in its entirety everything original and valid which the Slav nations have brought and continue to bring to the spiritual patrimony of the Church and of humanity. The whole Church, aware of this common treasure, professes her spiritual solidarity with them and reaffirms her own responsibility towards the Gospel, for the work of salvation which she is called upon to accomplish also today in the whole world, unto the ends of the earth. It is essential to go back to the past in order to understand, in the light of the past, the present reality and in order to discern tomorrow. For the mission of the Church is always oriented and directed with unfailing hope towards the future. 32. The future! However much it may humanly speaking seem filled with threats and uncertainties, we trustfully place it in your hands, Heavenly Father, invoking upon it the intercession of the Mother of your Son and Mother of the Church, the intercession of your Apostles Peter and Paul, and of Saints Benedict, Cyril and Methodius, of Augustine and Boniface and all the other evangelizers of Europe who, strong in faith, hope and charity, proclaimed to our fathers your salvation and your peace, and amid the toils of the spiritual sowing began to build the civilization of love and the new order based on your holy law and the help of your grace, which at the end of the age will give life to all things and all people in the heavenly Jerusalem. Amen! To you, dear brothers and sisters, my Apostolic Blessing. Given in Rome, at Saint Peter's, on 2 June, the Solemnity of the Most Holy Trinity, in the year 1985, the seventh of my Pontificate. JOHN PAUL II
NOTES 1. JOHN PAUL II, Apostolic Letter Egregiae Virtutis (31 December 1980): AAS 73 (1981), pp. 258-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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