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한국문단 비사']
‘詩 쓰는 초보들‘ 에서 발췌
2008년 12월 19일
[장석주의 '한국문단 비사']
1. 문학평론가 김 현
1961년 겨울 남도의 항구도시인 목포의 한 다방. 곧 눈이라도 내릴 듯한 회색빛 하늘, 잎진 가로수를 훑고 지나가는 찬 겨울 바람. 갈탄 난로가 타오르고 있는 한 다방 안에서 스무살을 갓 넘긴 문학청년 몇몇이둘러앉아 문학 얘기를 나눈다. 이들중 한 명은 20세기 후반기 한국문학을 견인하는 중요한 비평가가 되고 또 두 사람은 한국문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소설가와 시인이 된다. 비평가는 김현이고 소설가는 김승옥이고 시인은 최하림이었다. 1962년 여름 한국어로 사유하고 한국어로 글을 쓴 최초의 한글 세대인, 아직 너무나 젊은 한 무리의 문학 지망생들이 모여 만든 "산문시대"는 그렇게 탄생한다. 김현.김승옥.최하림 등 스무살을 갓 넘긴 나이에 4월 혁명이 흩뿌린 주체 정신과 사유 방식을 수유받은 이들 문학도는 동인지 "산문시대"의 창간호에서 당돌하고도 비장하며 패기에 찬 어조로 자신들의 시대를 선언한다. 새로운 감수성과 방법론으로 다음 시대를 열어갈 주역들이 만든 "산문시대"는 세 사람의 창립 동인에 강호무. 김산초. 김성일. 염무웅. 김치수. 서정인 등이 가세하며 저희만의 영지(領地)를 일궈나간다. 이들이 일궈낸 영지에는 "사소한 것의 사소하지 않음""자기 세계""개인의 자유의지"라는 팻말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김현은 죽은 뒤 "1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평론가"라는 말이 나올 만큼 당대의 한국 문학에 넓고 깊은 영향을 미쳤다. 갓 스물이던 1962년에 "자유문학"신인 공모에 당선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한 그는 저희 또래가 4월 혁명의 이념인 자유와 민주 정신을 승계한 적자라고 굳게믿으며 식민지 언어에 기생하지 않고 한글로 사유하고 한글로 글을 쓴 제1세대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엄청난 독서량과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작품 분석, 인문학 전분야를 아우르는 드넓은 지적 관심, 그리고 명료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비평을 창작에 기생하는 장르가 아니라 독자적인 문학 장르로 끌어올린 최초의 비평가로 꼽힌다. 본명이 광남(光南)인 김현은 1942년 7월 29일 전남 진도군 진도읍 남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과 관련해 그의 기억을 채우고 있는 것은 옻나무, 발목까지 빠지던 뻘의 감촉, 가도가도 끝이 없는 여름날의 황톳길, 더위, 모깃불의 매캐한 냄새 등이다. 그는 섬에서 초등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부모를 따라 뭍으로 이사해 7월에 목포 북교국민학교로 전학한다. 그의 아버지는 목포 공설시장 앞에서 "구세약국(救世藥局)"을 열어 양약 도매업을 했는데 충청 이남의 양약 공급을 장악할 만큼 사업에 크게 성공한다. 목포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1957년 서울에 올라와 경기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지만 떨어지고 목포의 문태고등학교로 진학한다. 그러나 입학한 뒤 그는 곧 서울의 경복고등학교로 전학한다. 뒷날 화제가 되기도 한 그의 다독 습관은 어릴 적부터 나타난다. "국민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그때의 내 고향에는 유식한 피난민들이 할 장사가 없었기 때문에 벌여놓은 헌책방들이 숱하게 많이 있었고 나는 깍듯한 서울말을 쓰며 항상 깨끗한 옷을 입고다니는 이름도 계집애처럼 부용이라고 불리는 한 아이 뒤를 쫓아다니면서 그 헌책방의 소설책들을 거의 다 읽어냈다. 읽었다고는 하지만 지루하고 무슨 소린지 잘 알 수가 없는 지문은 성큼성큼 뛰어넘고 멋진 대화같이 느껴진 것만을 읽어가는 괴상한 독법이었다. 겨울밤에 가슴에 베개를 괴고 해남 물고구마를 눌어붙도록 쪄가지고 먹어대며 이형식에서 오유경에게로, 허숭에서 임꺽정에게로, 그리고 오필리아에서 파우스트로 정신 없이 뛰어다녔다" 김현은 경복고등학교를 거쳐 1960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불문학과에 입학한다. 그는 서울대 재학시절 한국 문학을 주도하게 될 많은 친구를 사귀게 된다. 김화영. 유평근(불문과 1년 선배), 김치수. 김승옥(불문과 같은 학년), 곽광수(불문과 1년 선배), 조동일(불문과 2년 선배), 김주연. 이청준.염무웅(독문과 같은 학년), 박태순(영문과 같은 학년), 김지하(미학과 1년 선배) 등이 그들이다. 1962년 그는 "자유문학"3월호에 "나르시스 시론(詩論)"을 "김현"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다. 1964년에는 2편의 논문과 등단 평론을 포함한 4편의 평론을 묶어 첫 번째 평론집 "존재와 언어"를 5백부 한정판으로 찍어낸다. 이 무렵부터 김현은 당대의 문학계를 이끌 만한 잠재력을 지닌 이들과 만나 교유한다. 이 중에는 당시 환속해 제주도 화북에 머물고 있던 고은을 비롯해 김승옥의 자취방에서 만난 이청준, 그리고 이듬해인 1965년에 알게 된 황동규. 정현종. 박상륭등이 포함되어 있다. 1968년 김현은 1960년대 초에 동인 "산문시대"를 태동시킨 김승옥. 최하림. 강호무. 김성일. 김치수. 염무웅과 "사계"에 가담한 김화영. 황동규. 정현종. 김주연, 여기에 박상륭. 박태순. 이청준. 홍성원. 이성부. 이승훈. 김병익 등을 끌어들여 이른바"4.19 세대"가 대거 참여하는 동인 "68그룹"을 꾸민다. 이들은 대부분 1960년대 한국 문학의 새로운 주역으로 떠오르며 한국 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성과를 일궈낸다. 결성 연도인 1968년을 기려 동인의 명칭을 "68그룹"으로 정한 이들은 "샤머니즘적인 것과 관념적인 유희와 비슷한 것이 되는대로 결합하여 빚어지는 정신의 혼란 상태"가 한국 문학이 당면한 위기의 근원이라고 진단한다. 1970년 가을 김현은 김병익 등과 손잡고 드디어 문학 계간지 "문학과지성"을창간한다. "문학과 지성"은 당시 이미 나오고 있던 "창작과 비평"의 참여론에 대응해 문학의 자율성을 외치며 등장한 잡지로 김현. 김치수. 김병익. 김주연이 편집동인으로 참여한다. 김현은 "문지"의 문학적 이념을 선도하고 자신의 글과 편집. 기획을 통해 이를 현실화한다. 이른바 문단의 "4K"라고 불린 창간동인 가운데 "문지"의 발간에 가장 열성을 보인 이가 김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필자 선정에서 원고 검토까지 두루 감당하며 "문지"의 깃발을 지킨다. 1974년 서른두살의 김현은 몇 달 앞서 떠난 김치수에 이어 유학차 북프랑스 스트라스부르로 간다. 그는 거기서 바슐라르 연구가인 망수이 교수 밑에서 공부를 하다 8개월 만에 돌아온다. 김현이 예정보다 일찍 귀국한 것은 표면상 가정 문제 때문이지만 박사 학위를 피하려는 속내가 작용한 결과라고 한다. 말하자면 김현은 학위 없는 대학 교수라는 전례를 만들고 싶어했다. 그는 가까운 동료이자 시인인 황동규에게도 학위 없는 교수이자 시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길 바란다고 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귀국한 김현은 "문지" 1975년 겨울호부터 "한국문학의 위상"을 연재한다. 이 글의 기본 발상은 "문학은 억압을 하지 않되 억압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는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하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은 인간에 대한 비억압적인 현실 초월의 기능 때문에 억압적인 세계를 "추문"으로 만들고 현실에 대한 자기 반성을 낳는다. 문학의 비억압성은 문학이 현실적으로 유용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고 말한다. 김현은 또 문학에 대해 "문학은 고통이다", "문학은 꿈이다"라는 두 가지 중요한 명제를 제시한다. "문학은 꿈이다"라는 명제는 김현 문학 이론의 한 핵심이다. 문학의 고유한 기능이 삶에 유익한 교훈과 함께 즐거움, 즉 쾌락의 제공에 있다는 사실은 이미 공인된 상식이다. 그러나 김현은 삶에 대한 반성을 방해하고 주어진 조건 속에 주체를 방기하게 만드는 "일시적인 쾌락"의 제공은 "나쁜 문학"의 한 징표라고 본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문학은 쾌락을 주기보다는 고통스럽게 현실과 자아를 직시하게 만들어야 한다. 따지고 보면 문학보다 현실이 늘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인. 문학평론가) 현실 세계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직접 압박을 가해오지만(며칠 쫄쫄 굶거나 칼에 손을 베는 그 생생한 고통을 상상해보라) 문학의 세계는 우리가 마주치고 있는 현실과 거리를 둔 언어 저편의 세계다. 마르쿠제는 "미적 차원"에서 "아우슈비츠와 미라이촌, 고문, 기아, 죽음 - 이런 세계가 "단순한 환상"이나 "지독한 기만"으로 생각될 수 있는가. 그것은 "지독하고" 상상을 넘어서는 현실이다. 예술은 이 현실로부터 움츠러든다"고 말한다. 문학은 본질적으로 현실로부터 비켜나 있는 상상의 세계, 비현실의 세계, 허구의 세계다. 그러나 작가에 의해 창조된 상상이며, 비현실이고, 허구의 세계인 문학은 그 안에일상적 현실보다 더 많은 진리를 머금고 있기 때문에 현실의 허위와 기만성을 낱낱이 까발리곤 한다. 김현은 불문학자로서 "바슐라르 연구"(곽광수와 공저,1976). "현대 비평의 혁명"(1977). "문학 사회학"(1980)" 미셸 푸코의 문학비평"(1989). "시칠리아의 암소"(1990) 등을 펴낸다. 그는 자신이 연구한 프랑스 문학을 한국 문학의 화법으로 녹여내고 그러면서도 편협한 주관성을 벗고 세계사적인 눈으로 한국 문학을 조망한다. 그에게 외국 문학은 좀더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으로 우리 문학을 읽어내고 거기서 의미를 끌어내기 위한 장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한국 문학 속에서 숙성되고 있는 보편성을 깨닫게 함으로써 외국 문학에 대한 우리의 근거 없는 열등감과 콤플렉스를 떨쳐내게 만들며, 나아가 오히려 우리 문학의 가능성을 길어올린다. 김현은 문학의 도구인 언어의 문제에 유난히 예민하게 반응해 구두점 하나에까지 신경을 쓴 평론가이며 스스로 "한글주의자"라고 칭한다. 그의 "한글주의"는 단순히 한자어를 모조리 한글로 바꾸는 편협한 한글 국수주의가 아니라 되도록이면 한글로 쓰되 그 한글의 속을 생각의 겹으로 채우는 의미론적 깊이로 나타난다. 이런 김현의 비평 문체는 "김현체"라고도 불리며 높이 평가받는데 비평의 대상이 된 작가들이 즐겨 읽을 만큼 독자를 매혹한다. 언어에 민감하다는 것 외에 텍스트들의 상호 맥락에 초점을 맞추는 것 또한 김현 비평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김현은 당대의 영향력 있는 비평가로서는 드물게 한 번도 역사의 객관적 법칙과 이에 따른 전망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거론한 적이 없다. 그는 과격한 개혁주의를 민중적 전망주의로, 부르주아 개량주의는 문화적 초월주의로 파악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채 거리를 유지한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사태의 중심부에서 언제나 비켜나 있다는 비난도 받는다. 그는 특히 작품 분석을 중심으로 하는 실제 비평에 뛰어난 면모를 보이며 이는 곧 그가 참여한 "문학과 지성"의 강점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프로이트와 융과 사르트르에서 시작한 김현의 서구 사상 편력은 바슐라르와 알튀세르와 지라르를 거쳐 푸코로 마감된다. 이런 궤적은 상상력 이론과 문화 사회학, 주제 구성과 구조 분석등을 낳는 토대가 되고 그의 비평적 지평을 넓히는 데 이바지한다. 김윤식과 함께 "한국 문학사"(1973)를 선보이고 한국 문학의 전개와 좌표 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한국 문학의 위상"(1977)을 내놓은 김현은 "상상력과 인간"(1973) "분석과 해석"(1988)등의 평론집을 펴낸다. 김현은 1990년 6월 27일 새벽 2시 50분에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지병으로세상을 뜬다. 그가 죽은 뒤에도 "분석과 해석" 이후의 평론을 모은 "말들의 풍경"(1990), 유고일기 "행복한 책 읽기"(1992)등이 나온다. 1991년부터 "문학과지성사"에서 전 16권의 "김현 문학 전집"이 발간되어 1993년에 이르러 완간된다. (2002년 한국경제 연재, 장석주 시인. 문학평론가)
[장석주의 '한국문단 비사']
2. '시인 김소월' 최근에 창간된 한 시전문 계간지가 시인과 평론가 1백명에게 지난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시인 10명을 선정해 달라는 설문을 낸 적이 있다. 그 조사에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첫 번째 꼽힌 시인은 다름아닌 김소월(金素月)이다. 올해로 꽉찬 탄생 1백주기를 맞은 소월은 한국 현대시인의 대명사이다. 그는 명실공히 이 땅의 민중의 한과 슬픔으로 덧난 상처를 보듬어 안은 민족시인이다. 그가 생애에 남긴 단 한 권의 시집인 "진달래꽃"은 무수히 많은 유.무명 출판사에서 숱한 판본으로 거듭 출간되었다. 그의 시집은 아직 공식적으로 집계되지 않았지만 세월과 무관하게 이 땅의 영원한 베스트셀러다. 평론가 김병익에 의하면 김소월은 서구(西歐)의 데카당적 시상(詩想)과 이국적(異國的)인 언어 형식만이 풍미하던 시대에 돌연히 나와 토속(土俗)의 이미지와 전통적인 7.5조의 민요풍 리듬속에 동양(東洋)의 심상(心象)을 최고의 격조로 수용한 시인이다. 평론가 송희복은 "그는 일제 강점기의 민족적 삶의 갱생을 부르짖은 경륜가가 아니었다. 당대의 표준적 생활수준으로부터 그닥 벗어나지 않았던 한 사람의 농민, 한 사람의 식민지 잔맹(殘氓)에 불과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변방의 이름없는 소지식인, 얼치기 농민, 저 북방의 소도시에서 신문지국을 경영하며 비관과 술로 서서히 자신의 생명의 불을 소진시켜가던 이 평범한 청년이 어떻게 우리 시대 최고의 높이에 도달한 민족시인으로 태어날 수 있었을까. 1923년 12월 하순 평북 정주의 산자락에 자리잡은 무덤들 주변을 한 남자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삼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에는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초췌해 보였다. 그는 간략한 성묘를 마친 후 한 무덤가에 앉아 무덤에 뿌리고 남은 술을 천천히 마셨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남자는 허청거리며 산길을 내려갔다. 내려오는 길에 그는 장에 들러 아편을 구했다. 그리고 서둘러 귀가해서 아내와 함께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 그는 아내가 술에 취해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장에서 구해 온 아편을 삼키고 잠에 빠져든다. 그 다음날인 1923년 12월 24일 새벽에 그 남자는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소월이 우리에게 보여준 마지막 모습이다. 소월의 본명은 김정식(金廷植)으로 1902년 9월 7일에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평북 정주군 곽산면 남서동으로 그곳은 일찍부터 공주 김씨들만 백여 호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 소월은 그 정주의 공주 김씨 문중의 장손으로 출생한다. 그의 부친 성도(性燾)는 소월이 두 살 나던 해인 1904년 철도 공사장의 일본인들과 시비가 붙어 집단 폭행을 당한다. 당시 정주와 곽산을 잇는 철도공사에 일본 낭인(浪人)들이 투입되는데 김성도는 음식 선물을 말등에 싣고 처가 나들이를 나섰다가 그것을 뺏으려는 이들과 싸움이 붙었던 것이다. 말잔등에 거꾸로 매달려 돌아온 그의 부친은 근 한 달 동안 의식불명 상태로 있다가 깨어난다. 그 뒤로 정신이상자가 되어 평생을 폐인으로 보내게 된다.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난 것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혼자 구석진 곳에서 무언가를 소리없이 중얼거리고 있는 폐인 아버지는 소월의 운명이 품어 안은 원초의 어둠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 소월의 비사교적인 성격과 폐쇄적인 내향성은 그 어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소월의 유년기 인격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숙모 계희영(桂熙永)과의 만남을 빼놓을 수 없다. 신학문에 눈을 뜬 아버지 덕분에 일찍부터 언문을 깨우쳐 고대소설과 설화들을 탐독했던 계희영은 소월이 만 세살 되던 해 공주 김씨 문중으로 들어왔다. "신부인 나는 큰 머리를 하고 은봉채를 꽂은 채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데 개구멍 바지를 입고 눈은 샛별같이 반짝이며 네 살짜리 사내아이가 새색시 앞으로 다가앉으며 야, 새엄마다라고 반색을 했어. 사내아이는 치맛자락 가까이 다가앉아서 얼굴을 자세히 들여보다가 옷도 한 번 쓸어보고 종일 내 곁에서 떠나지 않았어"라고 숙모 계희영은 소월과의 첫 만남을 회고한다. 그 이후 소월은 틈만 나면 숙모의 곁으로 달려가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댔다. 성격이 활달하여 종가 살림살이를 떠맡고 있던 소월의 모친은 "인제부터는 자네가 우리 갓놈에게 이야기를 실컷 좀 들려주게. 나는 이야기하는 재질도 없고 또 할 말도 없어"라며 소월을 동서 계희영에게 떠맡겼다. 혼인한 직후부터 숙부가 고향을 등지고 외지를 떠도는 바람에 소박맞은 것처럼 혼자가 된 숙모는 틈날 때마다 찰싹 달라붙는 소월에게 심청전 장화홍련전 춘향전 옥루몽 삼국지 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비범한 기억력과 관찰력을 가졌던 소월은 이것들을 다 기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구술하는 데도 재간을 보인다. 폐인으로 일생을 마친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혐오의 양감정에 휩싸여 있던 소월을 소극적이고 여성적인 시세계로 이끈 것은 어머니와 수시로 옛날 이야기,민요를 들려주던 숙모로부터 받은 영향이 압도적이다. 유년기에 듣던 숙모의 이야기들은 소월의 문학적 자양이 되기도 하는데 평안도 박천 진두강가에 살던 오누이가 계모의 학대로 죽어 접동새가 되었다는 설화를 담은 "접동새"같은 시는 바로 숙모가 들려준 이야기를 모태로 씌어진 것이다. 부친이 폐인이 되자 광산을 경영하던 조부가 소월의 교육을 책임졌다. 공주 김씨 문중에서 세운 남산보통학교를 마친 소월은 민족적 자긍심이 강했던 오산학교에 진학한다. 여기서 그의 문학의 두 번째 스승인 김억을 만나게 된다. 소월은 김억을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에 몰입하게 되고 "창조" 동인이었던 김억의 소개로 마침내 1920년 3월 "창조"에 "낭인(浪人)의 봄"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며 데뷔한다. 그리고 같은 해 학생계 7월호에 "거친 풀""흐트러진 모래"등을 발표하여 자신의 문학적 자질을 확인하게 된다. 그 후 소월은 3.1 운동의 여파로 오산학교가 폐교하자 배재고보 5학년에 편입하여 졸업할 때까지 "개벽"에 "엄마야 누나야""봄 밤""진달래꽃""개여울""먼 후일"등과 소설 "함박눈"등을 꾸준히 발표한다. 이듬해인 1923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그 해 9월 관동대지진으로 짧은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다. 이때 서울에 머물며 안서와 함께 이리저리 직장을 구하고 활동무대를 찾았으나 여의치 않자 소월은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의 재능을 높이 사던 소설가 월탄 박종화는 이즈음 두어 번 소월을 만나는데 그의 인상을 단아하고 얌전한 사람이었다고 쓰고 있다. 잠시 "영대(靈臺)"의 동인으로 활동하다가 1925년 소월은 살아 있을 때의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을 펴낸다. 이때 발표된 시편들은 거의 오산학교 시절, 그의 나이 불과 17,8세에 씌어진 것들로 여기에 나타난 민요의 가락, 한과 슬픔의 정조, 설화성 등은 당대 문인들의 주목을 받는다. 그의 스승인 안서 김억은 1939년 봄에 "소월시초(素月詩抄)"를 펴내며 "나이가 불과 17,8이라고 하면 아직도 세상을 모르고 덤빌 것이어늘 이 시인은 혼자 고요히 자기의 내면생활을 들여다보면서 시작에 해가 가고 날이 저무는 것을 모르고 삼매경에 지냈으니 조숙(早熟)이라도 대단한 조숙이외다"라고 소월에 대해 쓰고 있다. 문단의 성향이 카프 중심으로 한창 떠들썩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한켠에서 묵묵히 우리 고유의 언어와 정서를 빚어내던 김소월이 이 해 펴낸 이 시집은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그의 시를 가리켜 민요적 리듬과 부드러운 시골 정조 외에는 보잘 것 없다는 평가도 없지 않았지만 그는 이 시대 다른 작가들과 달리 서구사조의 모방이나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색채와 목소리로 노래한다. 나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영변에 약산/진달래꽃/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가시는 걸음걸음/놓인 그 꽃을/사뿐히즈려 밟고 가시옵소서//나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시집의 표제로 삼은 "진달래꽃"은 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이별이 처절할만큼 절제된 감정으로 표현되어 있다. 미래에 있을 이별을 예감하면서 가는 님을 잡지 않고 고이 보내드린다거나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린다고 말하는 것은 어느 서구 유행사조도 흉내낼 수 없는 한국식 사랑이다. 이러한 이별의 표현법은 진달래꽃 외에도 "못 잊어""예전에 미처 몰랐어요""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님의 노래""먼 후일""초혼""왕십리""산유화""엄마야 누나야" 등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많은 작품에서 계속된다. 이것은 당시의 식민지 시대를 거쳐 해방, 전쟁으로 끊임없이 상실의 아픔을 겪게되는 우리 민족 역사 전반에 걸쳐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먼 훗날까지 많은이들에게 애창된다. 김소월의 전반적 작품 경향은 우리의 전통적인 시편들인 "정읍사""가시리"와 맥이 닿아 있다. 그는 님과의 사랑, 이별, 한 등을 향토적.민요적 언어와 율격에 담아 표현해 낸다. 때문에 수많은 주옥 같은 시편들에도 불구하고 유교류의 휴머니스트라든가 과거지향적 수동주의 라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유교적 과거지향은 도덕이나 규범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님이 원할 때면 언제라도 기꺼이 보내드릴 용의가 있는 융통성 있는, 즉 현대적 자유가 부여된 복고주의로 해석되어야 한다. 또한 1924년 이후에 발표한 "나무리벌 노래" 외에 연대미상의 작품 "봄""남의 나라 땅""전망""물마름""옷과 밥과 자유""가을맘에 있는 말이라고 다 할까보냐" 등의 시편과 유일한 소설 "함박눈" 등을 보면 민족적 저항의식이 은근히 깔려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중 빼앗긴 땅에 대한 회복을 염원하는 "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다면"이 눈에 띈다. "나는 꿈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벌가의 하루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마을로 돌아오는 꿈을/즐거이 꿈 가운데.//그러나 집잃은 내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대일 땅이 있었다면!/이처럼 떠돌으랴 아침에 저 물 손에/새라새롭은 탄식을 얻으면서"(중략) 소월의 한은 그의 성장기적 배경과 삶의 고단에서 오는 우울, 그리고 시인이 말하듯 남의 나라 땅에서의 서러움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를 따라다니던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허무의식과 슬픔에서 연유한 것에 더 직접적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곧 그의 생애의 비극적 결말과도 연결이 된다. 그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확증은 없다. 다만 그가 죽기 얼마 전 김억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보며 당시 그의 허무를 짐작할 따름이다. "제가 구성(龜城)와서 명년이면 10년이옵니다. 10년도 이럭저럭 짧은 세월이 아닌 모양입니다. 산촌 와서 10년 동안에 산천은 별로 변함이 없어 보여도 인사(人事)는 아주 글러진 듯하옵니다. 세기는 저를 버리고 혼자 앞서서 달아난 것 같사옵니다. 독서도 아니하고 습작도 아니하고 사업도 아니하고 그저 다시 잡기 힘드는 돈만 좀 놓아 보낸 모양이옵니다. 인제는 또 돈이 없으니 무엇을 하여야 좋겠느냐 하옵니다." 소월이 자신에게 상속된 전답을 팔아 식솔을 끌고 처가인 구성군 평지동으로 이사한 것은1924년이다. 그곳에서 동아일보 남시지국(南市支局)을 인계받아 혼자 신문 배포, 수금을 모두 책임지고 경영한다. 그러나 사업 수완이 전무하고 세속적인 처세에 서툴렀던 그는 곧 파산해 버리고 생계를 위해 어울리지 않게 고리대금업에도 손을 대보지만 이내 실패하고 만다. "조선문단" 1927년 2월호 문단소식 난에 의하면 그때까지 소월이 남시지국을 경영하고 있는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 문학도, 생활도, 삶에 대한 일체의 애착도 놓아버린 소월은 술에 기대 세월을 보낸다. 소월이 술꾼으로 허송세월하고 있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문중에서조차 그를 불량자로 낙인찍고 천시한다. 잦은 통음(痛飮)으로 몸과 마음이 극도로 피폐해진 소월은 1934년 12월 23일 아편을 먹고 서른세 해의 생을 마감한다. 민족의 토속어.토착어를 가림새 있게 시적으로 승화하는데 발군의 역량을 발휘(송희복)한, 지난 세기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민족시인이었던 김소월은 식민지 변방의 소지식인으로 회의와 실의의 세월을 보내다가 그렇게 덧없이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만 것이다. 유장한 슬픔과 한의 시편들을 빚은 소월이 죽은 뒤 거의 한 세기에 걸쳐 그의 민요적 가락과 민족적 설화, 정한을 담은 시편들은 오랫동안 시름 많고 흠집 많은 우리 겨레의 심사를 달래주며 널리 애송되고 있다. (2002년 한국경제 연재, 장석주 시인. 문학평론가)
[장석주의 '한국문단비사']
3. 전혜린 전혜린은 우리 뇌에 불에 데인 것과 같은 강렬한 화인을 남기고 홀연히 세상 저편으로 날아갔다. 전혜린은 그의 생애에 이룬 업적 때문에서가 아니라 "무섭게 깊은 사랑, 심장이 터질 듯한 환희, 죽고 싶은 환멸" 등을 추구하는 무서우리만큼 비범한 삶의 자세 때문에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그의 생을 통해 이룬 몇 권의 번역서, 유고(遺稿)로 출간된 수필집, 일기문 따위는 문학 이전의 습작 수준이다. "1세기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는 천재"라는 평가를 받았던 업적으로서는 너무나 하찮고 보잘것 없는 것이다. 레닌은 로자 룩셈부르크를 가리켜 "로자는 혁명의 독수리였으며, 독수리로 남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 말을 빌어 우리는 전혜린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전혜린은 인식에의 갈망으로 불타오르는 독수리였으며, 영원한 독수리로 남을 것이다"라고. 한 지인에게 "어느 조용한 황혼에 길가의 주막에 쓰러져 있는 집시가 있거든 나라고 알아줘!"라고 속삭였던 전혜린. 점성술과 운명학을 믿고 가끔 점을 치며 "운명의 위대한 저울 위에" 내던져진 제 운명을 불안한 시선을 번득이며 가늠해보던 전혜린은 31세로 요절하며 이 세상에서의 짧은 생을 휘발시킨다. 그는 특이하게도 자신의 생으로 이룬 "업적"이 아니라 절대 인식에의 끝없는 갈구와 열띤 방황이라는 삶의 자세와 태도만으로 죽은 뒤 "전혜린 신화"를 일궈냈다. 1964년 1월 9일 토요일. 하늘은 마치 수정처럼 맑고 푸르고 깊었지만 기온은 영하 10도 이하로 급강하한 몹시 추운 날이었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앞의 동숭동 학림다방 오른편 맨 구석의 창가 자리에 밤색 밍크코트를 입은 여성이 오후 들어 몇 시간째 잔설(殘雪)을 이고 있는 바깥 풍경을 무심한 시선으로 내다보며 혼자 앉아 있었다. 한 젊은 여성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고, 검은 스카프를 한 채 창가 자리에앉아 있던 여성이 손을 흔들었다. "세 시간이나 여기서 기다렸어!" 그날 약속 없이 학림다방에 들렀던 서울대 법대 후배인 이덕희(李德姬)가 전혜린을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그들은 다방 한가운데 놓인 난롯가로 자리를 옮겨 앉아 토요일 오후를 담소로 보냈다. 저물 무렵 학림 다방을 빠져나와 명동에 있는 은성으로 갔다. 은성은 당시 문화 예술인들이 단골로 드나들던 유명한 대폿집이었다. 은성에는 소설가이자 연합신문 문화부장이었던 명동백작 이봉구(李鳳九)가 앉아있었다. 명동의 모나리자나 돌체에 들러 친구들과 함께 음악을 듣다가도 "술 좀 마셔 봐야 겠어요. 어떤 것인가를 음미해 보자는 거지요"라며, 두붓집에서 막걸리잔을 앞에 높고 크고 검은 눈동자를 번득거리는 전혜린을 이봉구는 또렷이 기억했다. 여러 사람들이 합석해서 두어 시간 동안 떠들어댔던 그날의 술자리는 매우 유쾌했다. 전혜린은 무척 고조되어 보였고, 다른 날과 달리 더 자주 웃고 더 큰소리로 많은 말들을 했다. 곧 수필집을 낼 예정이고, 책 제목도 정했다고 했다. 전혜린은 이덕희에게 귓속말로 "제목은 나중에 너한테만 알려줄게."라고 속삭였다. 그는 국제펜클럽대회에 참가할 예정이며, 그 때문에 건강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글쎄 내 몸이 괴물처럼 건강한 거야." 짧은 겨울해가 지고, 바깥은 이미 어두워진 뒤 은성에서 나온 전혜린과 이덕희, 동행했던 후배 등은 한 잔 더 하기 위해 신도호텔 살롱으로 자리를 옮겼다. 은성에서 신도호텔 살롱으로 가는 도중에 전혜린은 "세코날 마흔 알을 흰 걸로구했어!"라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몹시 달뜬 음성이었다. 신도호텔의 살롱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동안 전혜린은 몇 차례나 자리에 일어나 카운터에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직은 젊은 소설가들이었던 김승옥. 이호철 등과 합세한 전혜린의 일행은 천장이 낮은 대폿집으로 자리를 또 옮겼다. 소음과 담배연기가 자욱한 그곳에서 그들은 약 한 시간 동안 술을 마셨다. 전혜린은 술을 꽤나 마셨고 취한 눈치였지만, 담배를 피우면서도 다리를 건들거리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 기분은 유달리 좋아 보였다. 담배를 쥔 손톱 밑은 때가 까맣게 끼여 있고, 누군가는 그 불결한 손톱을 "검은테가 둘러진 부고(訃告)"라고 일컬었다. 10시쯤 되었을 때 전혜린이 홀연히 일어서더니 입구에서 일행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사라졌다. 그것이 전혜린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다음날 전혜린은 죽었다. 당시의 신문은 1단짜리 여섯 줄 기사에서 "희귀한 여류 법철학도요, 독일문학가"인 전혜린의 죽음을 수면제 과용으로 인한 변사라고 발표했다. 뮌헨 유학 시절 이미 한 번의 자살미수 경험이 있던 전혜린의 죽음이 수면제 과용으로 인한 사고사였는지, 과도의 저혈압으로 인한 자연사인지, 자살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전혜린의 사후, 구구한 억측이 떠돌았지만 그의 죽음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전혜린은 평남 순천에서 1934년 1월 1일에 전봉덕(田鳳德)의 8남매 중 큰딸로 태어났다. 전봉덕은 29세에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 행정 양과에 합격한 천재였다. 일제 식민지의 악랄한 수탈에 모두들 헐벗고 굶주렸던 그 시절에 혜린은 백러시아계 양복점에서 소공녀가 입을 것 같은 흰 원피스를 입었다. 그의 부친은 혜린이 서너 살 때부터 한글책과 일어책을 읽을 수 있도록 손수 가르쳤다. 맏딸에 대한 극단적인 편애 때문에 그의 부모는 심하게 말다툼을 하기도 했다. 어린 혜린에게 아버지는 신(神)이었다. 훗날 전혜린은 "내 한마디는 아버지에겐 지상명령이었고 나는 또 젊고 아름다웠던 남들이 천재라 불렀던 아버지를, 나를 무제한 사랑하고 나의 모든 것을 무조건 다 옹호한 아버지를 신처럼 숭배했다"라고 회고했다. 범용함을 넘어서서 자기 자신을 초극하기 위해 전혜린이 보여준 처절한 고투(苦鬪)의 정신은 "전혜린 신화"의 가장 중요한 원소이다. 언제나 극점(極點)을 추구하는 전혜린의 정신은 범속한 일상이 주는 권태를 못 견뎌했고, 언제나 "미칠 듯한 순간, 세계와 자아가 합일되는 느낌을 주는 찰나, 충만함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을 갈망했던 그의 눈빛은 광기로 번득였다. "물질. 인간. 육체에 대한 경시와 정신. 관념. 지식에 대한 광적인 숭배, 그 두 세계의 완전한 분리"는 "영아기부터 싹트고 지금까지 붙어다니는 병"이었다. 그 때문에 젊은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때 홍역처럼 전혜린 신화에 몰입하는 것이다. 1952년 전혜린은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대 법대에 들어간다. 서울대 법대 진학은 부친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전혜린이 서울대 법대에 들어갈 당시 수학과목 성적은 0점이었다고 전해진다. 과락이 있는 경우 불합격 처리되는 것이 서울대의 관례였으나 다른 성적이 워낙 출중했던 터라 전혜린은 사정위원회를 거쳐 극적으로 구제되었다. 수학과목의 0점에도 불구하고 전체에서 2등이었다는 얘기는 이제 전설이 되었다. 법학에 권태를 느낀 전혜린은 경기여고 시절의 단짝 주혜가 다니던 문리대에서 오든이나 엘리어트 같은 시인에 관한 강의를 도강(盜講)했다. 법학 과목의 강의 기피와 도강, 그리고 온갖 종류에 대한 광적인 탐닉은 법학에 대한 혐오와 철학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다. 21살 되던 해인 1955년 전혜린은 독일 유학을 떠났다. 그가 에어프랑스에서 내렸을 때 뮌헨 하늘은 축축한 습기를 가득 머금은 회색빛이었다. 전혜린은 학교 근처에 방을 얻었다. 강렬한 인식욕과 날카로운 감수성을 가진 전혜린은 뮌헨대에서 그토록 동경하던 문학과 철학의 세계로 깊이 빠져든다. 뮌헨대에는 독일 학생들 뿐만 아니라 그리스. 터키. 이집트 등지에서 온 유학생들도 많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검소했다. 남학생들은 거의 스웨터 바람이고 여자들은 검은 스커트에 검은 양말, 검은 머릿수건, 길게 늘인 생머리가 제복이었다. 훗날 전혜린의 유명한 검은색의 옷과 검은색의 스카프는 그 시절 습관의 연장이었다. 전혜린은 "온갖 물질의 결핍과 가난과 노동, 식사 부족, 수면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그 하늘을 찌를 듯한 패기, 오만한 젊음, 순수한 정신, 촌음(寸陰)을 아껴노력"하는 독일 대학생들을 부러워하며 그들과 경쟁했고, "목적을 가진 생활, 그 일 때문이라면 죽어도 좋다는 각오가 돼 있는 생활"에 대해 만족했다. 전혜린은 독일 유학 중 결혼을 하고, 딸을 낳는다. 싸구려 번역과 고국에서 보내주는 생활비는 늘 빠듯했다. 한 번은 생활비가 완전히 바닥이 나서 그는 한 주일 동안 일생 처음으로 완전히 굶었다. 훗날 혜린은 "물은 마시니까, 죽지는 않더라."라고 했다. 그것은 그녀가 처음으로 체험한 굶주림이었다. 전혜린은 1959년 독일 유학을 끝내고 귀국하여 서울대. 이화여대. 성균관대에서 강의를 맡는 한편 번역 작업을 했다. 헤르만 헤세. 하인리히 뵐. 에리히 케스트너. 루이제 린저 등의 독일 작품들이 전혜린의 번역으로 소개되고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1964년 독일 유학중 결혼한 남편과 합의이혼한 후 전혜린은 몇 번 열병과도 같은 사랑에 빠졌다. 인습과 사회적 규범을 벗어난 연하 제자와의 사랑도 있었다. 독일 유학에서 막 돌아와 모교인 서울 법대 강단에 선 교수 전혜린과 질풍노도와 같은 스무살의 제자 법학도는 독일어 강의가 있는 매주 수요일마다 만났다. 그들은 가장 첨예한 정신과 정신의 맞부딪침에서나 일어나는 스파크를 일으키며 서로에게 다가갔다. 청년은 시를 써서 갖다 바치고, 아직 새파랗게 젊은 여교수는 편지를 써서 제자이며 연인인 청년에게 건네줬다. 그들은 서로의 타오르는 혼에 경탄했고 서로를 찬미하며 정신의 충일 속에 취해 있었다. 어느날 청년에게 가문의 모든 꿈을 걸고 있는 시골의 어머니가 찾아왔다. 전혜린을 만난 이 어머니는 무릎을 꿇고 제발 자신의 아들과는 헤어질 것을 호소했다. 청년은 모친의 간곡한 만류를 받아들여 전혜린과 결별을 선언했다. 그때 전혜린은 시니컬한 미소를 얼굴에 담고 "네가 날아올 땐 난 네가 독수린줄 알았는데, 날아가는 모습을 보니 참새에 지나지 않았어!"라고 했다. 나는 왜 이렇게 너를 좋아할까? 비길 수 없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너를 좋아해. 너를 단념하는 것보다는 죽음을 택하겠어. 너의 사랑스러운 눈, 귀여운 미소를 몇 시간만 못 보아도 아편 흡입자들이 느낀다는 금단현상(禁斷現象)이 일어나는 것 같다. 목소리라도 들어야 가슴에 끓는 뜨거운 것이 가라앉는다. 너의 똑바른 성격, 거침없는 태도, 남자다움, 총명, 활기, 지적 호기심, 사랑스러운 너의 얼굴 -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죽기 사흘 전 전혜린은 "장 아제베도"라고만 알려진 익명의 누군가에게 "내가 원소로 환원하지 않도록 도와줘! (중략). 나도 생명 있는 뜨거운 몸이고 싶어. 가능하면 생명을 지속하고 싶어. 그런데 가끔가끔 그 줄이 끊어지려고 하는 때가있어. 그럴 때면 나는 미치고 말아. 나를 살게 해줘"라고 썼다. 그것은 익사 직전의 사람이 구조를 요청하는 외침이고, 절규였다. 일찍이 인생의 악덕을 눈치채고 지식의 황홀경 속에서만 헤엄치며 "식은 숭늉 같고 법령집 같은 나날"을 탈출하는 꿈을 하루도 쉬지 않고 꾸었던 전혜린은 너무 빨리 이 세상을 떠났다. 세상이 그의 재능과 광기에 가까운 열정을 그 내면으로부터 남김없이 갉아먹어버렸던 것일까. 전혜린이 익명의 사람에게 썼던 두 통의 편지는 끝내 부쳐지지 않은 채 죽었다. 공교롭게도 1934년 1월 1일 일요일에 태어난 전혜린은 1965년 1월 10일 일요일에 생을 마감했다. (2002년 한국경제 연재, 장석주 시인. 문학평론가)
[장석주의 '한국문단 비사']
4. '괴짜 시인 김관식' "대한민국(大韓民國) 김관식(金冠植)" 명함에 그렇게 새기고 다니던 시인 김관식(1934~1970)이 4.19 직후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했다는 소문이 문단에 파다하게 퍼졌다. 어떤 사람은 껄껄 웃으며 김관식답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무슨 돼먹지 못한 망발이냐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쨌든 하늘을 찌르는 자만심과 호방한 기개에 넘쳐 있던 26세의 김관식은 서울 용산구에 출마했다. 상대는 민주당 신파의 거물인 장면(張勉)이었다. 결과는 자명하였다. 김관식은 떨어졌고 선거를 치르느라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을 남김없이 털어먹고 말았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기와 술과 기행(奇行)뿐이었다. 그는 세검정 밖 홍은동의 산 비탈 국유지 일대를 무단점거하고 거기에 집을 짓고 살았다. 지금은 연립주택 등이 빽빽하게 들어선 주택지이지만 당시에는 그 일대가 능금이며 자두나무가 심어져 있던 과수원과 잡목들이 우거진 채 방치된 주인 없는 땅이었다. 시인의 눈에 저 귀한 땅을 쓸데없이 놀리는 것은 낭비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날 시인은 그 국유지에 목수와 인부들을 동원해 여러 채의 집을 한꺼번에 짓기 시작했다. 판잣집은 한나절에 한 채씩 생겨났다. 무허가 불법가옥이었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구청 직원들에 의해 그 판잣집들은 철거되었다. 김관식은 이튿날 다시 목수와 인부를 동원해 집을 지었다. 한 채 두 채가 아니고 십여 채의 집을 지었다. "보옥(寶玉)을 갖고도 자랑하지 않는 겸허한 산"에 시인들만 사는 마을을 건설하고 "산에서도 오히려 산을 그리며" 살려 했던 것이다. 한때 황명걸. 조태일 같은 시인들이 실제로 시인이 지은 집에 살기도 했다. "산에 가 살래./팔밭을 일궈 곡식(穀食)도 심구고/질그릇이나 구워 먹고/가끔, 날씨 청명(淸明)하면 동해(東海)에 나가/물고기 몇 놈 데리고 오고/작록(爵祿)도 싫으니 산에 가 살래."("거산호(居山好).1") 시인의 삶은 고달팠다. "가난! 가난! 가난 아니면/고생! 고생! 고생이랬다" 낮거미가 집을 짓는 홍은동 산비탈의 누옥 바람벽에는 썩은 새끼에 시래기 두어 타래가 내걸린 채 바람에 흔들렸다. 끼니마다 감자를 삶아 먹고, 호랑이표 시멘트 종이로 도배를 한 방에서 한미간의 우정과 신뢰의 악수 문양이 새겨진 밀가루 포대로 호청을 한 이불을 덮는 누추한 삶이지만, "화옥(華屋)에 고차(高車). 금의(錦衣). 옥식(玉食)을 꿈에도 기루어하지를 않았다"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게으르게 일어나 조로에 물을 담뿍 퍼 들고 텃밭에 심은 상치 쑥갓 아욱들에 물을 주었다. 그가 꿈꾼 것은 여름 저녁때 생모시 옷고름 고의적삼 바람에 합죽선으로 해를 가리고 산책할 수 있는 여유가 허락되는 청빈낙도의 삶이다. 그런 청심과욕(淸心寡慾)으로 하루 세끼의 끼니에 자족하는 삶을 두고 "왕(王). 후(候). 장(將). 상(相)이 부럽지 않고 백악관(白堊館) 청와대(靑瓦臺) 주어도 싫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는 호구지책으로 서울상고(지금의 경기상고)에서 잠시 교편생활을 하기도 하고 세계일보의 논설위원직에도 있었으나, 그의 파천황(破天荒)적인 기행과 면모를 오래 참고 받아줄 직장은 이 세상에 없었다. 어느 출판기념회에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인 장기영이 축사를 하고 있었다. 술에 취해 뒤늦게 출판기념회에 모습을 나타낸 김관식은 씩씩하게 장기영 앞으로 나서며 그를 밀쳐냈다. "자네는 그만 하게. 내가 할 말이 좀 있으니까."라고 말문을 연 그는 직설적인 육두문자를 펼쳐냈다. 그는 낭인이 되어 문단의 이러저러한 술자리나 출판기념회 따위를 누비고 다니며 도발과 공격을 일삼고 종횡무진으로 오연한 자긍심과 호방한 기개를 뽐냈다. 그는 가난했으나 거기에 주눅들어 비굴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미당 처제와 결혼하려 음독자살 소동 김관식은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기 위해 미당 서정주의 집을 드나들었다. 어느날 미당의 집에서 어여쁜 처자를 보았다. 미당의 처제 방옥례(方玉禮)였다. 그는 첫눈에 그 처자에게 반했다. 뒷날 그 처자에게 청혼을 했다. 그러나 그 처자는 사람은 둘째 치고 균형과 비례가 잘 맞지 않는 김관식의 이목구비에 질려 청혼을 거절한다. 그는 마지막 수단을 썼다. 음독자살 소동이 그것이다. 처자는 병원에 실려가 있는 그를 보았다. 그는 끝내 처자가 자신의 청혼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죽겠다고 떼를 썼다. 처자의 순정한 마음이 시인의 그 비장함에서는 꺾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방옥례와 혼인한 뒤 2남 3녀를 두었다. 1950년대의 한국문학은 다방문학이라는 규정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온 문인들은 다방에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있는 풍경을 인습적으로 연출해냈다. 반실업의 문인들은 문예살롱. 대성. 갈채. 모나리자. 동방살롱. 돌체. 청동. 에덴. 봉선화. 마돈나. 남강. 미네르바. 오아시스. 고향. 코롬방. 라쁠륨. 올림피아 등의 다방을 연고에 따라 몰려다녔다. 그 곳에서 원고 청탁과 수교, 소모적인 문단 논쟁, 풍문 속의 문단 연애, 싸움질이 이루어졌다. 한국은 오랜 식민지 지배와 거기에 잇따른 3년 간의 유혈 전쟁을 치르느라 자원이 거덜나버린 세계 최하위의 극빈 국가 중 하나로 전락한 채 외국의 구호물자에 의지해 겨우겨우 연명하는 상황이었다. 문인들은 그 변방 후진국의 암울한 지식인, 혹은 가난한 예술가에 지나지 않았다. 환도 이후 다방 문단사가 펼쳐지는 이 즈음 김관식이 당대 추남의 얼굴을 당당하게 들이밀며 이 다방 저 다방에 출몰하기 시작한다. 논산에서 태어나 호남 명문 중의 하나인 강경상고(江景商高)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한학의 대가들인 정인보(鄭寅普) 오세창(吳世昌) 최남선(崔南善) 등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며 주역(周易), 반야심경(般若心經), 동의보감(東醫寶鑑), 당시(唐詩)를 꿰뚫은 그는 추남에다가 도저한 자만심으로 무장을 하고 전후 문단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김관식은 동양 고전들을 두루 통달한 박학다식과 그에서 비롯된 대가의식으로 꽉 차 이미 문단의 대가로 군림하던 김동리, 조연현, 박목월 등을 감히 김군, 조군, 박군이라고 호칭하며 좌충우돌 나아가는 국외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눈에 비친 당대 문인들은 왜소하게 규격화된 재능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시속(時俗)의 잡배(雜輩) 수준이었다. 그가 "몇몇 심우(心友)와 선배를 쬐끔씩만 믿었을 뿐" 나머지 다방에 죽치고 앉아 있는 문인들을 우습게 여겼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술에 취해 나타나 눈자위 사납게 흰 창을 흘기며 공연히 문인들을 향해 난데없는 욕설과 함께 일갈하거나 초청하지도 않은 화기애애한 출판기념회에 나타나 판을 엎어버리기 일쑤였다. 그야말로 안하무인이었던 그때 김관식은 불과 20대를 넘긴지 몇 해 되지 않은 나이였다. 그의 말년의 생은 시 '병상록(病床錄)'에 나타난 것처럼 깡소주와 생활고와 병고에 꺾이고 만다. 그의 간, 심, 비, 폐, 신 등 오장이 깡소주에 녹아버리고 만 것이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벌써 죽음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역시 죽음을 앞두고는 아내와 철없는 어린것들의 앞날을 걱정하는 지아비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죽음 앞에서 조차 당당했다. "나의 임종(臨終)은 자정에 오라!"고 큰소리쳤다. 임종을 "가장 소중한 손님을 맞이하듯 너를 위해 즐겨 마중하고 있으마"라고 했다. 죽음 뒤에 남을 아내와 어린것들에게는 "그동안 신세 끼쳤던 여숙(旅宿)을 떠나 영원한 본택(本宅)으로 돌아가는 길"이니 너무 슬퍼하지 말하는 당부를 남겼다. 시인 김관식은 1970년 8월 30일에 세상을 버렸다. 그의 나이 불과 36세였다. 그와 동서지간이었던 미당은 김관식이 죽은 뒤 그의 때이른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세상의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고 욕만 퍼부으며 철저한 자존과 고독과 깡소주로만 살다가 완전히 폐가 녹아 사십도 못되어 스러져간 젊은 사내 - 신동출신(神童出身)의 김관식이를 시인으로 추천한 것을 나는 한동안 후회했으나, 이제는 후회 안해도 되는가? 또다시 우리를 괴롭게 울리며 죽어갈 염려는 없어졌으니까." 병상록 / 김관식 병명도 모르는 채 시름시름 앓으며몸져 누운 지 이제 10년. 고속도로는 뚫려도 내가 살길은 없는 것이냐. 간(肝),심(心),비(脾),폐(肺),신(腎)... 오장이 어디 한 군데 성한 데 없이생물학 교실의 골격표본처럼뼈만 앙상한 이 극한상황에서... 어두운 밤 턴넬을 지내는디이젤의 엔진 소리나는 또 숨이 가쁘다 열이 오른다기침이 난다. 머리맡을 뒤져도 물 한 모금 없다. 하는 수 없이 일어나 등잔에 불을 붙인다. 방안 하나 가득 찬 철모르는 어린것들. 제멋대로 그저 아무렇게나 가로세로 드러누워 고단한 숨결은 한창 얼크러졌는데 문득 둘째의 등록금과 발가락 나온 운동화가 어른거린다. 내가 막상 가는 날은 너희는 누구에게 손을 벌리랴. 가여운 내 아들딸들아,가난함에 행여 주눅들지 말라. 사람은 우환(憂患)에서 살고 안락(安樂)에서 죽는 것, 백금 도가니에 넣어 단련할수록 훌륭한 보검이 된다. 아하,새벽은 아직 멀었나 보다. (2002년 한국경제 연재, 장석주 시인. 문학평론가)
[장석주의 '한국문단비사'] '댄디 보이
5.' 시인 박인환 전후 폐허가 되어버린 명동은 군용 반합을 들고 구걸하는 거지아이들과 구두닦이,실직자,모리배,사기꾼들로 붐볐다. 거기에 변변한 직장 없이 떠도는 수없이 많은 작가와 화가,연극인들이 명동으로몰려와 한데 어울렸다. 그곳에 오면 약속 없이도 반가운 얼굴을 만날 수 있었고 재수 좋으면 막걸리라도 한잔 걸칠 수 있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 명동은 아직 훈훈한 인정과 친교를 나누는 문화 예술인들의 활동 근거지였다. 첨단 유행의 발상지로 사랑을 받던 명동은 1970년대 이후로 증권회사들이 들어서며 신흥개발도상국가의 새로운 경제활동의 무대가 되었다. 일찍이 1940년대에 시인 박인환(朴寅煥)이 선구적으로 내다봤듯이 식민지의 애가(哀歌)도,토속의 노래도 사라진 "자본의 군대가 진주한 시가지"가 되었던 것이다. 전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차츰 복구되어 제 모습을 찾아가던 1956년 이른 봄.명동 한 모퉁이의 주로 막걸리를 파는 "경상도집"에 송지영(宋志英),김광주(金光洲),김규동(金奎東) 등의 문인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마침 그 자리에는 가수 나애심(羅愛心)도 함께 있었다. 몇 차례 술잔이 돌고 취기가 오르자 일행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하는데,나애심은 마땅한 노래가 없다고 청을 거절했다. 박인환이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즉석에서 시를 써내려 가고,완성된 시를 넘겨받은 이진섭(李眞燮)이 단숨에 악보를 그려갔다. 나애심이 그 악보를 보고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가 바로 "세월이 가면"이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네.//바람이불고/비가 올 때도/나는 저 유리창 밖/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네.//사랑은 가고/과거는 남는 것/여름날의 호수가/가을의 공원/그 벤취 위에/나뭇잎은 떨어지고/나뭇잎은 흙이 되고/나뭇잎에 덮혀서/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네/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한 시간 쯤 지나 송지영과 나애심이 자리를 뜨고,테너 임만섭(林萬燮)과 명동백작이라는 별명의 소설가 이봉구(李鳳九)가 새로 합석했다. 임만섭은 악보를 받아들고 정식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소리를 듣고 명동 거리를 지나던 행인들이 술집 문 앞으로 몰려들었다. 훤칠한 키에 수려한 얼굴의 박인환은 당대 문인 중에서 최고의 멋쟁이,"댄디보이"였다. 서구 취향에 도시적 감성으로 무장한 그는 시에서도 누구보다 앞서간 날카로운 모더니스트였다. 시인은 여름에도 정장을 곧잘 했다. "여름은 통속이고 거지야.겨울이 와야 두툼한 홈스펀 양복도 입고 바바리도 걸치고 머플러도 날리고 모자도 쓸 게 아니냐?" 어느날 그는 친구들 앞에 땅 끝까지 내려오는 긴 외투를 입고 나타나 "이게 바로 에세닌이 입었던 외투란 말이야"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에세닌이 자살하기 직전 입었던 외투를 잡지 사진으로 보고는 그걸 본떠 미군용담요로 지어 입은 것이다. 그와 가까이 지냈던 시인 김차영(金次榮)은 "그가 입고 다닌 양복은 외국 고급천에 일류 양복점의 라벨이 붙어 있었다. 거기에 흐린 날은 손잡이가 묘한 박쥐우산,봄가을엔 우유빛 레인코트,또 겨울엔러시아 사람들처럼 깃이 넓고 기장이 긴 진회색도 검정도 아닌 중간색의 헐렁한 외투를 입고 다녔다"라고 증언한다. 명동의 술집 마담들은 늘 외상 술을 마시는 미남자 박인환을 차마 미워하지 못했다. "또 외상 술이야?" "어이구,그래서 술을 안 주겠다는 거야?" "내가 언제 술을 안 주겠다고 했나?" "걱정 마.꽃피기 전에 외상값 깨끗하게 청산할 테니까." 시인은 늘 호주머니가 비어 있었지만 한 점의 비굴도 없이 그렇게 당당하고 거침이 없었다. 박인환은 통속적인 것을 혐오하고,원고 쓸 때는 구두점 하나에도 신경질적으로 까다롭게 굴고,싫어하는 사람과는 차도 한 잔 함께 마시지 않는 결벽증을 드러냈다.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가 금주를 선언하자 그를 찾아가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은 선배 자격이 없다며 앞으로는 "선생"자를 떼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한번은 수도극장(뒷날 스카라 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에서 그레엄 그린 원작의 "제3의 사나이"라는 영화 시사회가 열렸다. 문단 선후배들이 모여서 영화를 관람하고 있던 도중에 박인환이 벌떡 일어나 선배 평론가 백철을 향해 소리쳤다. "어이,백철 씨 저걸 알아야 돼.저걸 모르고 무슨 평론을 한단 말이오!" 그것은 그야말로 느닷없는 일갈이었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백철이 박인환에게 또 당했군!"하는 의미의 웃음이었다. 이미 문단에서 대가로 대접받고 있던 백철로서는 난데없는 봉변이 아닐 수 없었다. 헌 책방 '마리서사' 해방을 맞아 평양의학전문대학을 중퇴하고 서울로 돌아온 박인환은 부친과 이모로부터 차입한 돈 5만원으로 뒷날 월북한 시인 오장환(吳章煥)이 낙원동에서 경영하던 스무평 남짓한 서점을 인수한다. 얼마 뒤 초현실주의 화가 박일영(朴一英)의 도움으로 간판을 새로 달고 다시 문을 여는데, 이것이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의 모태 역할을 했던 헌 책방 마리서사(茉莉書肆)이다. 서점 이름은 일본 현대시인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의 시집 "군함 마리(軍艦茉莉)"에서 따왔다는 설도 있고, 프랑스의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의 이름을 땄다는 설로 나뉘어져 있다. 어느 게 정확한 것인지 확인은 불가능하다. "마리서사"의 서가에 진열된 책들 대부분은 박인환이 소장하고 있던 책들인데, 문학인들과 예술인들을 위한 전문 서점이었다.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마리 로랑생, 장 콕토와 같은 외국 현대시인들의 시집, "오르페온""판테온""신영토""황지"와 같은 일본의 유명한 시잡지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마리서사"에는 하루도 시인이나 소설가,화가들이 모여들지 않는 날이 없었다. 김광균(金光均) 이봉구 김기림(金起林) 오장환 장만영(張萬榮) 정지용(鄭芝溶)김광주 등 시인 소설가들, "신시론(新詩論)"동인 김수영(金洙暎) 양병식(梁秉植) 김병욱(金秉旭) 김경린(金璟麟)등, 조향 이봉래 등의 "후반기"동인들, 화가 최재덕 길영주 등이 "마리서사"의 단골손님이었다. 특히 김수영은 박인환과 동년배로 동인활동을 함께 하며 "새로운 도시(都市)와 시민(市民)들의 합창(合唱)"이라는 앤솔로지를 내기도 하는 등 두터운 교분을 가졌다. 그러나 나중에 둘 사이는 소원해졌다. 김수영은 서구적인 것에 경도된 박인환의 취향을 경박하며 값싼 유행의 숭배자라고 몰아부치며 경멸하고, 박인환은 또 그대로 김수영이 세속적인 눈치만 보는 속물이라고 비난했다. 박인환은 통속적인 것을 혐오하고, 원고 쓸 때는 구두점 하나에도 신경질적으로 까다롭게 굴고, 싫어하는 사람과는 차도 한 잔 함께 마시지 않는 결벽증을 드러냈다.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가 금주를 선언하자 그를 찾아가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은 선배 자격이 없다며 앞으로는 "선생"자를 떼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전쟁이 나고 환도할 때까지 박인환은 대구 부산 등지에서 피난생활을 하며, 경향신문사의 사회부 기자로 활동한다. 그는 다소 경박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재기 넘치는 사람이고,사람을 끄는 특별한 친화력 같은 것이 있어 주변엔 문인뿐만 아니라 각계의 친구들이 많았다. 그의 친구들 중에 그보다 십여 년 연장자들이 많은데, 이는 그가 자신의 실제 나이를 숨기고 사,오세 많게 부풀린 탓이다. 그가 죽을 때까지 박인환의 정확한 나이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사람들 사이를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다니다가 돌아오면 암울한 시대를 증언하는 시들을 써내려 갔다. 박인환은 그렇게 "검은 준열(峻烈)의 시대"를 가로질러 갔던 것이다. 그는 시를 쓰고, 영화평론을 쓰고, 경향신문과 평화신문 등에서 사회부, 문화부기자 노릇을 했지만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는 수중엔 돈도 없고, 집엔 쌀도 없는 가난한 시인이었다. 그것들은 "생활적인 직업(職業)"이 못되었던 것이다. 1955년 그는 대한해운공사(大韓海運公社)에 취직을 하더니 "아무 계획(計劃)도 기대(期待)도 없이" 남해호(南海號)라는 외항선을 타고 외국으로 나갔다. 석달 뒤에 귀환한 그는 "아메리카 시초(詩抄)"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그가 생애 동안 가장 사랑했던 것 중의 하나가 책이다. "그는 보기 드문 애서가(愛書家)였다. 양으로는 대단치 않았으나 책을 다루는 폼이 이만저만한 애서가가 아니었다. 이 회고담이 실릴 "현대문학"만 하더라도 손때가 묻지 않도록 유산지나 셀로판지에 씌워 가지고 다녔다고 나중에 장만영은 회고했다. 당시 한국일보에 다니던 시인 김규동의 사무실에 가끔 나타나 "오석천(吳昔泉) 선생을 만나야 한다"고 우물쭈물 앉아 있다가 김규동이 자리를 비우면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경제나 정치서적까지 슬쩍 집어들고 가기도 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목마와 숙녀"는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박인환의 대표작이다. 그는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적인 인생의 무엇을 끝까지 응시하려고 했던 것일까. 전화(戰禍)의 황량한 명동 거리를 누비며 거침없는 언설과 재치를 뽐내며 시대를 가로질러 가던 시인 박인환은 1956년 3월 20일 밤 9시에 세상을 떠난다. 그가 명동의 "경상도집"에서 송지영 김광주 이봉구 등과 어울려 막걸리를 마시며 "세월이 가면"을 써낸 지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이상(李箱)을 유난히 좋아한 그는 이상의 기일(忌日)인 3월 17일 오후부터 주변 사람들과 함께 이상을 추모하며 폭음을 한다(이상이 실제로 죽은 것은 1937년 4월 17일이다). 박인환의 기억의 착오였다. 그 날 박인환은 옆자리에 있던 이진섭에게 "인생은 소모품. 그러나 끝까지 정신의 섭렵을 해야지"라고 메모한 것을 주었다. "누가 알아? 이걸로 절필을 하게 될지..." 무슨 예감이라도 있었던지 박인환은 씩 웃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밤 9시에 만취상태로 세종로의 집에 돌아온 그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답답해! 답답해!"를 연발했다. 그러다가 자정 무렵 "생명수를 달라!"는 부르짖음을 마지막 말로 남기고 눈을 감았다. 갑작스런 심장마비였다. 그의 나이 불과 삼십세였다. 그의 갑작스런 부음에 놀라 21일 새벽 그의 집으로 모여든 친구들은 차디찬 방에 꼿꼿이 누워 천장을 향해 눈을 치뜨고 있는 그의 시신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 치뜬 눈을 감겨 준 것은 송지영이다. 또 다른 친구가 그의 시신에 조니 워커를 따라주었다. 그의 시신이 시인장으로 망우리에 묻힐 때 지인들은 그가 좋아했던 조니 워커와카멜 담배를 함께 묻었다. 박인환은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에서 출생했다. 부친 박광선(朴光善)은 중등교육을 마친 사람으로 면사무소에 다니고 있었는데, 토지도 어느 정도 소유한 시골 살림으로는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다. 인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박인환은 머리가 좋고 똑똑하여, 부친은 아들 교육을 위해 면사무소를 그만두고 서울로 생활터전을 옮기며 산판업을 시작한다. 가족들이 인제에서 서울 종로구 원서동 언덕배기로 이사를 하고, 그는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한다. 박인환은 경기공립중학교로 진학하는데, 이 무렵 영화와 문학의 세계로 빠져들어 공부 대신에 일어로 번역된 세계문학전집과 일본 상징파 시인들의 시집을 열독하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결국 교칙을 어기며 영화관을 출입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경기중학을 중퇴한 그는 한성학교 야간부를 거쳐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한다. 부친의 강요로 3년제 관립학교인 평양의전에 진학하지만, 해방이 되자마자 학업을 중단하고 서울로 내려온다. "사실 안된 말이지만 나는 아들이 죽기 전까지 문학을 하는지 뭘 하는지 몰랐다. 나는 그 애가 의사나 교사 같은 직업을 갖기를 바랬고, 강요하기도 했다. 1년밖에 다니지 못했지만 평양의전에 들어간 것도 내 강권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명이 짧아 애석하더니 세월이 약이다. 자식이지만 청렴하고 의리가 있었던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박광선은 살아 있을 때 아들의 이른 죽음을 몹시도 애석해 했다. (2002년 한국경제 연재, 장석주 시인. 문학평론가)
장석주의 '한국문단 비사']
6. '시인 천상병' 1967년 7월 14일자 신문을 펴든 문학인들은 1면 톱기사로 실린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대남공작단 사건"의 전모와 함께 연루된 사람들의 이름이 실린 것을 보았다. 그들은 어리둥절한 채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엔 뜻밖에도 시인 천상병(千祥炳,1930~1993)의 이름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재불화가 이응로(李應魯), 재독작곡가 윤이상(尹伊桑), 그리고 몇몇 재독 유학생들이 동베를린을 구경하고 돌아온 것을 두고 북한의 배후 조종에 따른 어마어마한 "간첩단"사건으로 확대.조작된 것이다. 중앙정보부 발표문에 따르면 천상병은 강빈구와 만난 자리에서 "동인이 간첩활동을 하고 있어 수사대상 인물임을 기화로 금품을 갈취할 목적하에 동인에 대하여 중앙정보부에서 내사중이라고 말하여 상피의자로 하여금 공포감을 갖게"한 뒤에 수십여 차례에 걸쳐서 "1백원 내지 6천5백원씩 도합 5만여원을 갈취착복"하면서 수사기관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울대 상대 동문이자 친구인 강빈구(姜濱口)는 독일 유학중 동독을 방문했었다는 얘기를 천상병에게 자랑스럽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천상병은 예의 다른 문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강빈구로부터도 막걸리값으로 5백원, 1천원씩 받아 썼던 것이다. 그것이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한 시인 천상병이 "국사범"으로 조작되는 사건의 실체였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한 문인들은 어처구니없어 실소를 터뜨렸다. 어쨌든 천상병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3개월, 그리고 교도소에서 3개월 동안 갖은 고문과 치욕스러운 취조를 받고 난 뒤 선고유예로 풀려났다. "이젠 몇 년이었는가/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당한 그날은...//이젠 몇 년이었는가/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네 사과 뼈는 알고 있다./진실과 고통/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천상병은 중앙정보부에서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전기고문을 세 번씩이나 당했다.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에도 갔다오고 아이도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는 이 사실을 스무 해나 지난 뒤에 털어놓았다. "그날은 - 새"라는 시는 "그날"의 고통과 치욕의 경험을 간결하고 단호한 시행 속에 압축해놓고 있다. "고문은 받았지만 진실과 고통은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나타내 주었기 때문에 나는 진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었던 것이다. 남들은 내가 술로 인해 몸이 망가졌다고 말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의 추측일뿐이다" 그를 한번이라도 만나본 사람은 그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금세 알 수 있다. 불편한 손놀림과 발걸음, 잿빛의 얼굴, 입가에 허옇게 달라붙은 침의 흔적,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라고 말하는 그만의 어눌하면서도 동어 반복적인 화법 등. 그의 이런 "특징"은 과도한 음주의 결과가 아니었던 것이다. 천상병은 1930년 일본 효고의 히메지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거주하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한다. 마산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그는 매우 조숙한 천재의 면모를 보인다. 그의 조숙한 재능은 당시 마산중학교 국어교사이던 김춘수의 눈에 띄어 1949년시 "강물" 등을 "문예"에 발표하기도 한다. 곧 6.25전쟁이 터지고 전란 초기에 미군 통역관으로 6개월 동안 근무한 그는 1951년 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한다. 이 무렵 그는 송영택. 김재섭 등과 동인지 "처녀지"를 발간하고, "문예"에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라는 제목의 평론을 내놓으며 시작(詩作)과 함께 비평활동도 겸한다. 천상병은 1952년 "문예"에 시 "갈매기"로 완료 추천을 받고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다. 1954년 그는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그만두고 문학에 전념한다. 그는 이때 "현대문학"에 월평을 쓰는가 하면 외국 서적의 번역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다가 1964년부터 2년 동안 김현옥 부산시장의 공보 비서로 일하는데, 이것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 생활인 셈이다. 1970년 겨울 어느 날부터인가 동가식 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며 떠돌던 천상병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 명동이나 종로에서 더는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1971년 봄이 다 가도록 종적을 감춘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안부를 궁금해 하는 몇몇 문인들이 연고가 있는 부산에 연락을 넣어왔지만 거기에도 천상병은 없었다. "죽지 않았을까?" 가까운 시인들은 주민등록증도 없이 이 시인이 길에서 쓰러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천상병이 죽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예감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참 아까운 친구였는데. 안됐어. 시집 한 권도 없이 세상을 뜨다니!" 시인 민영등이 "요절시인" 천상병의 유고시집을 묶어주기 위해 이리저리 전갈을 넣어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잡지에 흩어져 있는 작품 60여 편을 모았지만 시집 출간 비용을 조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인 성춘복이 그 시집을 내겠다고 선뜻 나섰다. 그래서 1971년 12월에 당시로서는 호화장정의 천상병시집 "새"가 나오는데, 시집출간 소식이 신문이며 방송 등을 통해 알려지며 장안의 화제거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상병이 살아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는 거리에서 쓰러진 채 발견돼 행려병자로 오인된 탓에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었던 것이다. 얼마 뒤에 천상병은 백치 같은 무구한 웃음을 흘리며 다시 친구들 앞에 나타났다. 천상병은 기인답게 버젓이 살아 있으면서 첫 시집을 "유고시집"으로 낸 유일무이한 시인이 되었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내 영혼의 빈터에/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내가 죽는 날/그 다음날.//산다는 것과/아름다운 것과/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한창인 때에/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한 마리 새.//살아서/좋은 일도 있었다고/나쁜 일도 있었다고/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새) 새는 그의 시 세계의 중심 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시적 자아의 대리자 또는 자유 지향성의 상징이다. 새는 삶과 죽음, 천상과 지상의 교차점을 향해 날아간다. 삶은 견디기 힘들만큼 고통스럽다. 그러자 시인은 죽은 다음날 새가 되어 돌아와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 있는 자신의 현존을 응시한다. 영혼이 새가 되어 다시 삶을 바라보자 그것은 홀연히 찬란한 것으로 비친다. 그렇게 시인의 초연함은 삶의 절망과 고통을 한 순간에 찬란한 것으로 바꿔놓는다. 시인은 한 마리 새가 되어 죽음 쪽에서 삶을 바라보고 삶과 죽음을 동시에 노래하며 현실을 초월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천진무구함과 무욕으로 무장한 천상병은 생전에 자본주의적 관행과 생리에 대해 무차별적인 테러를 감행한다. 그는 시쓰기 외에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그는 유유자적 떠돌며 동료 문인들과 시인 지망생들에게 술값이나 밥값 명목으로 2천원씩을 아무 거리낌없이 뜯어낸다. 시인은 악의 없는 "갈취범"이었다. 그래서 그를 미워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미워하기는커녕 희귀한 문화재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는 것은,/한 잔 커피와 갑 속의 두둑한 담배,/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는 것은/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가난은 내 직업이지만/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이 햇빛에도 예금 통장은 없을 테니까....../나의 과거와 미래/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내 무덤가 무성한 풀잎으로 때론 와서/괴로왔음 그런 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라고,/씽씽 바람 불어라"("나의 가난은") 병원에서 요양하며 몸과 마음을 추스른 시인은 1972년에 친구의 손아래 누이인 목순옥과 결혼해 가정을 꾸린다. 1979년에는 첫 시집 "새"에 실린 작품들을 거의 다 옮겨 실은 시선집 "주막에서"를 민음사에서 펴낸다. 이어 1984년에는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1987년에는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든다면"을 내놓는다. 말기에 이르면 천상병은 천진 난만할 정도로 단순한 어조로 기독교의 신인 하느님을 예찬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깊이 스며든 그의 유고시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하느님과 그 섭리에 감사하는 내용으로 짜여 있다. 시에서 하느님은 대우주에 비견되는데, 그는 절대자를 향한 무궁한 외경심과 찬양 속에서도 어린아이처럼 "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하는 순진한 호기심을 드러낸다. "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대우주의 정기(精氣)가 모여서/되신 분이 아니실까 싶다. //대우주는 넓다./너무나 크다.//그 큰 우주의 정기가 결합하여/우리 하느님이/되신 것이 아니옵니까?"(하느님은 어찌 생겼을까) 1988년 만성간경화증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한 시인은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으나 불사조처럼 살아난다. 이후 그는 시집 "요놈! 요놈! 요 이쁜 놈!"(1991),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1993)를 펴낸다. 1993년 4월 28일, 병든 몸으로 누워 있던 시인은 마침내 숨을 거둔다. 천상병이 고단한 이 세상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던 날, 의정부시립병원영안실 밖으로는 추적추적 봄비가 내렸다. 그가 죽고 난 뒤 몇 백만원인가 하는 조의금이 들어왔다. 시인의 가족으로는 처음 만져보는 큰돈이었다. 시인의 장모는 그걸 사람들 손이 타지 않는 곳에 감춘다고 감춘 것이 하필이면 아궁이 속이었다. 그걸 모르고 시인의 아내는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가난하였지만 순진무구했던 시인이 죽어서도 "만악의 근원"인 돈을 없애버리려고 "장난"을 했는지도 모른다. 시인이 죽은 해 "진짜" 유고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가 나오고, 세해 뒤인 1996년에는 "천상병 전집"이 간행되었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내 영혼의 빈터에/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내가 죽는 날/그 다음날.//산다는 것과/아름다운 것과/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한창인 때에/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한 마리 새.//살아서/좋은 일도있었다고/나쁜 일도 있었다고/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새) (2002년 한국경제 연재, 장석주 시인. 문학평론가)
[장석주의 '한국문단 비사']
7. '시인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고, "누가 하늘을 보았다 말하는가"라고 외친 시인 신동엽(申東曄.1930~1969)은 죽은 지 서른 해가 넘었지만 아직도 살아 있는 현재적 의미의 시인이다. 신동엽은 1970년대 이후의 참여 시인들에게는 한용운 임화를 비롯한 카프 계열의 시인들과 이육사의 맥을 잇는 하나의 전범으로 받아들여진다. 신동엽은 1930년 충남 부여읍 동남리에서 농민 신연순과 김영희 사이의 1남 4녀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943년 부여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집안이 워낙 가난해 학비를 줄이려는 마음에서 관비가 지원되는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한다. 신동엽은 병영 생활과 다를 바 없는 일제 말기의 전주사범 기숙사 생활을 묵묵히 견딘다. "그는 그 무렵 기숙사에 있었다. 그는 키가 작아 교실 앞자리에 앉았고 내향적인 성격이어서 학생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하면 나는 키가 큰 육상 선수에 외향적이었으므로 학교 시절 아주 썩 가까운 친구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기숙사와 교실을 오갈 때 옆구리에 세계문학 전집 같은 문학 서적을 끼고 다녔으며 우리는 서로가 문학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소설가 하근찬은 신동엽의 전주사범 시절을 전한다. 1948년 동맹 휴학 관계로 전주사범 기숙사에서 나와 귀향한 신동엽은 부여 근처의 초등 학교 교사로 발령받지만 사흘 만에 그만둔다. 1949년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한 그는 6.25가 일어나자 바로 귀향해 9월 말까지 부여에서 민청 선전부장으로 지내다 수복뒤 국민방위군에 징집된다. 대학을 마친 뒤 제1차 공군 학도간부후보생에 지원해 합격하지만 발령을 받지 못하고 대기하다 환도령과 함께 다시 서울로 올라온다. 성북구 돈암동에 자취방을 얻은 신동엽은 친구의 도움으로 돈암동 네거리 한 귀퉁이에 작은 가게를 세내어 헌책방을 차린다. 이 시기에 신동엽은 얼마 안 되는 수입으로 근근이 살아가지만 그의 내부에 숨겨져 있던 열정은 이따금 주위 사람들을 강하게 매료시킨다. "우리 집이 그 책방 근처여서 자주 들렀는데 내가 "타임"이나 "뉴스위크"와 같은 잡지들을 사니까 유심히 보아두었던 것 같았어요. 자연히 이야기가 오고가는 사이 목까지 여민 군인 잠바에 큰 눈밖에 보이지 않는 그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체온과 시가 다섯 살이나 연하인 나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았다고 할까요" 농촌 경제학의 권위자로서 동국대 교수로 있다가 6.25 때 납북된 인정식(印貞植)의 딸로 당시 이화여고 3학년생이던 인병선의 말이다. 인병선은 그의 책방을 자주 찾았다. 두 사람은 이런 인연으로 1957년에 결혼한다. 결혼한 직후 그는 아내가 부여 읍내에 차린 양장점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생활을 이어가다 간신히 충남 보령군 주산농업고등학교의 교사 자리를 얻는다. 그러나 1958년 말에 갑자기 각혈한 뒤 폐결핵인 줄 알고 학교에 사직서를 낸다. 서울 돈암동의 처가에 아내와 아이들을 보내고 홀로 부여에 남은 신동엽은 병과 가난 속에서 독서와 습작에 몰두한다. 이 시기에 그는 문명과 위선에 물든 현실을 예리하게 비판하는 한편 원초적인 자연과 함께 숨쉬며 살아가는 건강한 사람들을 노래한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를 써서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응모한다. 이 작품이 입선되어 문단에 나온 신동엽은 조선일보에 "진달래 산천",세계일보에 "시로 열리는 땅"등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을 걷는다. 1960년 건강을 되찾은 신동엽은 서울 성북구 동선동에 셋방을 얻어 가족과 합류한 뒤 "교육평론사"에 들어간다. 4월혁명의 열기를 체험한 그는 자신이 근무하는 교육평론사에서 "학생 혁명 시집"을 펴내며 문학 쪽에서 혁명에 동참한다. 1961년 그는 명성여고 야간부 교사로 직장을 옮겨 숨질 때까지 8년 동안 교단에선다. 이 무렵 신동엽은 자신의 시를 통해 격동의 세월을 거치며 민족의 전통적 삶의 양식이 붕괴되는 과정과 이에 따른 현실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데 힘을 기울인다. 신동엽은 시극(詩劇)에 눈길을 주기도 한다. 그가 1965년에 집필한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은 최일수의 연출로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다. 이렇게 시의 장르적 변용에도 관심을 보이며 열정을 분출하던 신동엽은 1967년 신구문화사가 간행한 "현대문학전집" 제18권으로 기획된 "52인 시집"에 그 동안 발표한 시들과 신작시 "껍데기는 가라"등 7편을 실음으로써 더욱 확고하게 자신의 영역을 구축한다. 껍데기는 가라/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껍데기는 가라.//껍데기는 가라/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껍데기는 가라.//그리하여, 다시/껍데기는 가라./이곳에선,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아사달 아사녀가/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부끄럼 빛내며/맞절할지니//껍데기는 가라./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시인은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고 외친다. 그렇다면 그 "알맹이"란 무엇일까. 백낙청은 이 알맹이에 대해 "4.19에서 진짜 알맹이에 해당하는 것은 민중들이 외세를 배격하고 민중의 해방을 위해서 심지어 무기까지 들고 일어섰던 동학년의 곰나루의 그 아우성, 이것이 4.19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살려야 할 알맹이"라고 말한다. 1960년대에 이미 그는 냉전 체제의 변경에 위치한 한반도가 처해 있는 국제 정치학적인 역학 구도 속에서 중립을 통해 민족 자주의 삶을 구현하자고 말한다. "껍데기는 가라"에서 선보인 "알맹이", 동학혁명과 3.1운동과 4.19혁명을 통해 잉태된 그 "알맹이"는 조국의 향그러운 흙 가슴 속에 묻혀 있다 "금강"에서 찬란하게 부화한다. "금강"은 4천8백여 행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장편 서사시인데 1967년 "펜클럽 작가기금"을 지원받아 을유문화사에서 펴낸 "한국 현대 신작 전집"5권 "3인시집"에 실린다. 우리들의/어렸을 적/황토 벗은 고갯마을/할머니 등에 업혀/누님과 난, 곧잘/파랑새 노랠 배웠다./울타리마다 담쟁이넌출 익어가고/밥머리에 수수모감 보일 때면/어디서려 없이새 보는 소리가 들린다.//우이여! 훠어이!//쇠방울 소리 뿌리면서/순사의 자전거가 아득한 길을 사라지고/그럴 때면 우리들은 흙토방 아래/가슴 두근 거리며/노래 배워주던 그 양품 장수 할머닐 기다렸다./.. "금강"은 배다른 누나와 함께 파랑새 노래를 배우기 위해 양품 장수 할머니를 기다리던 시인의 애절한 회상에서 발원한다. 그 물줄기는 4.19혁명에서 1919년의 기미독립운동으로, 다시 1894년의 동학혁명으로 거슬러 오르며 구비구비 장강으로 펼쳐진다. 총 26장으로 구성된 이 서사시는 사건을 차례대로 늘어놓지 않고 현재와 과거를 빈번히 오가거나 병치하는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시간의 차이를 두고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하나의 전체로 파악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엿보게 한다. "금강"에서 신동엽은 농민들의 분노와 저항으로 불타오른 1894년 동학혁명 얘기를 할 때 실존 인물인 전봉준.최제우.최해월 등과 함께 시인 자신의 분신으로여겨지는 가상 인물 신하늬를 등장시켜 시적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문학평론가 김우창은 신동엽의 시 "금강"에 대해 "오늘날의 상황에 대응하는 과거"를 발견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 시인은 이 시에서 연민을 느끼는 데 주저앉아 버리지 않고 연민의 근원을 생각하고 연민의 상황을 만들어내는 사회의 불의에 대하여 맹렬한 분노를 폭발시키며,동학이야기에서 오늘날의 상황에 대응하는 과거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금강"의 "서화"에서 시인은 "우리들은 하늘을 봤다/1960년 4월/역사를 짓눌던, 검은 구름짱을 찢고/영원의 얼굴을 보았다"라고 자유에 대한 뜨거운 갈망을 새겨놓는다. 동학혁명과 겹쳐 떠오르는 이 4월혁명의 내면에서 들끓고 있는 민중의 염원은 다름아니라 인간 본연의 삶,민족 고유의 신명과 덕성이 어우러진 삶을 회복하는것이다. 이 시에 나오는 "맑은 하늘"이 표상하는 것은 바로 외세의 짓누름으로부터 벗어난 우리 민족의 자주적이면서도 주체적인 삶이다. 그것은 이미 "껍데기는 가라"에서 노래한 바 있는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아사달 아사녀"의 삶이기도 하다. "금강"은 역사성과 서사적 골격을 갖추고 있으며 또 시인 스스로 서사시라고 밝히지만 이야기가 있다는 점을 빼놓고는 서정시를 길게 늘여놓은 작품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김주연은 "금강"을 평하면서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 대한 사실적이고도 구체적인 묘사가 결여되어 있으며 유기적 관련성 없이 작가의 주관이나 감정이 불쑥불쑥 끼여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문제점을 안게 된 것은 역사 의식이나 지식의 뒷받침 없이 시작에 임했기 때문이라고 본 그는 "금강"이 "역사를 상대하면서도 역사가 시적 대상이 되지 못" 했다고 말한다. 김우창 역시 "금강"이 "우리의 현실에 대하여 질문하여 마지않는 뜨거운 관심으로 역사를 용해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과거와 현재를 하나의 연속적인 역사적 현실로 이해하게" 만든다고 말하면서도 "역사적 사고가 얕고 단순화된"면을 지적한다. "금강"은 당대의 뛰어난 시적 업적으로 평가받지만 한편으로는 체념주의와 허무주의, 토속적인 샤머니즘에 근거한 운명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작품이다. 1968년 신동엽은 장편 서사시 "임진강"의 집필을 계획하고 자료 준비를 위해 임진강변의 문산 등을 답사하지만 그 계획은 실현되지 않는다. 그는 대신에 전 5집으로 구성된 오페레타 "석가탑"을 써서 드라마센터 무대에 올린다. 같은 해 6월 16일 김수영이 불의의 교통 사고로 숨지자 그는 깊은 슬픔에 빠진다. 김수영의 갑작스런 죽음을 몹시 슬퍼한 그도 이듬해인 1969년 4월 7일, 간암 선고를 받은 지 불과 한 달 만에 서울 성북구 집에서 서른아홉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가 죽은 뒤 미처 활자화 되지 못한 유작시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조국""영影""서울" 등이 "고대문화""월간문학""현대문학""상황" 등에 발표된다. 1970년에는 "사상계"와 "창작과비평"에 "좋은 언어""봄의 소식""강""살덩이""만지(蠻地)의 음악" 등이 실리고 부여읍 군수리 나성터 금강 기슭에 그의 시업을 기리는 빗돌이 세워진다. 1975년 "창작과비평사"에서 "신동엽 전집"이 나온 이래 1979년 선시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1983년 "신동엽 - 그의 삶과 문학" 1984년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평전. 시선집", 1989년 시집 "금강"이 잇달아 간행된다. 역사 의식과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민족의 자주와 해방을 알기 쉬운 언어로 노래한 민족시인 신동엽에 대한 관심과 호응은 그가 숨진 뒤 오히려 높아진다. (2002년 한국경제 연재, 장석주 시인. 문학평론가)
[장석주의 '한국문단 비사']
8. (1) '오감도' 발표후 항의 빗발
한국 현대시 최고의 실험적 모더니스트이자 한국 시사 최고의 아방가르드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상은 어두운 식민지 시대에 돌출한 모던 보이다. 그의 등장 자체가 한국 현대 문학 사상 최고의 스캔들이다. 알쏭달쏭한 아라비아 숫자와 기하학 기호의 난무,건축과 의학 전문 용어의 남용,주문(呪文)과도 같은 해독 불능의 구문으로 이루어진 시들.자의식 과잉의 인물,퇴폐적 소재,악질적인 띄어쓰기의 거부,위트와 패러독스로 점철된 국한문 혼용의 소설들.그의 모더니즘 문학과 비일상적 기행(奇行)들은 이 스캔들의 원소를이룬다. 이상의 "오감도"는 소설가 이태준이 학예.문예부장이던 "조선중앙일보"에 발표된다. 이태준은 이상이 일으킬 파문을 예견하고 안 호주머니에 사표를 넣고 다녔다. 이 원고는 처음부터 말썽이었다. 원고가 공장으로 내려가자 문선부에서 "오감도(烏瞰圖)"가 "조감도(鳥瞰圖)"의오자가 아니냐고 물어왔다. 오감도란 말은 사전에도 나오지 않고 듣도 보도 못한 글자라는 것이다. 겨우 설득해서 조판을 교정부로 넘겼더니 또 거기서 문제가 생겼다. 나중에 편집국장에까지 진정이 들어갔지만 결국 시는 나갔다. 그 다음부터 또 문제였다. "무슨 미친 놈의 잠꼬대냐" "무슨 개수작이냐" "당장 신문사에 가서 오감도의원고 뭉치를 불살라야 한다" "이상이란 작자를 죽여야 한다"... 신문사에 격렬한 독자 투고와 항의들이 빗발쳐 업무가 마비되었다. 당대를 훨씬 앞지른 "첨단",이 도저한 정신분열적 언어의 파행에 독자들은 이토록 거부감을 나타낸다. 당대 사람들의 의식과 정서로는 수용 불가능했던 시 "오감도". 그러나 당대 사람들에게 모독당한 이 시는 뒷날 구태의 한국 문학과는 차별화된 새로운 모더니즘 문학의 진경을 펼쳐 보인 "앞서간 문학"으로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불멸의 자리에 각인되며 후학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다. 뒷날 시인 이승훈은 이상에게서 "반리얼리즘적 태도,실존의 현기,추상성,자아에대한 회의를 배웠다"고 고백한다.
[장석주의 '한국문단 비사']
9. '시인 김수영' 1950년대 말, 서울 명동의 한 술집에서 시인 몇이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이미 술기운이 올라서 다들 붉어진 얼굴이다. 그들 사이에는 시며 잡지, 원고료, 문단 얘기들이 오간다. 다만 유난히 키가 큰 한 사나이는 아까부터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다. 좌중의 화제가 사회와 정치 쪽으로 옮아가자 입을 다물고 있던 사나이도 말문을 연다. 엔간히 취기가 올라 있던 그는 자유당과 이승만을 향해 직설적인 비판과 함께 욕을 토해낸다. 한 시인이 제지하려고 들자 그가 대뜸 항의한다. "아니,자유 국가에서 욕도 내 마음대로 못 한단 말이오?" "글쎄, 김형 말이 도에 지나치니까 하는 말이지." "도에 지나쳐? 그럼 이 썩어빠지고 독재나 일삼는 정부며, 늙은 독재자를 빼놓고 불쌍하고 힘없는 문인들 험담이나 해서 쓰겠어? 당신 시가 예술 지상주의 냄새가 나는 건 그 지나친 조심조심 때문이오!" 이에 상대방이 발끈해 말다툼으로 번지고 결국 술상까지 엎어져 술자리는 난장판으로 끝난다. 이 키 큰 사나이가 바로 시인 김수영(金洙暎.1926~1968)이다. "푸른 하늘을 제압(制壓)하는/노고지리가 자유(自由)로왔다고/부러워하던/어느시인의 말은 수정(修正)되어야 한다.//자유를 위해서/비상(飛翔)하여 본 일이 있는/사람이면 알지/노고지리가/무엇을 보고/노래하는가를/어째서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혁명(革命)은/왜 고독한 것인가를//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이라고 노래한 김수영. 그는 현실의 전위에 선 시인의 불온성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며, 도시 소시민의 내면과 자의식을 까발려 내보이며, 그때까지 한국시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여성적 운율과 재래의 토속성을 벗어던지고 세련된 도시 모더니즘의 시세계로 나아갔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온갖 금기와 허위 의식을 깨뜨리기 위해 좌충우돌하며 그가 생전에 남긴 1백80여편의 도저한 요설의 시들은 곧 쉬지 않는 싸움의 도구이고, 싸움의 현장이다. 김수영은 1921년 11월 27일 서울 종로 6가에서 김태욱(金泰旭)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 김수영네 집안은 본디 의관(醫官)이나 역관(譯官), 부상(富商)들로 이루어진 중인들의 주거지인 관철동에 있었다. 무반(武班) 계급에 속한 김수영네는 경기도 파주. 문산. 김포와 강원도 철원. 홍천 등지에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해마다 4백여 석을 거둬들이는 지주 집안이었으나, 일제의 침탈 뒤 급변하는 사회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했다. 김수영이 태어나던 해에 관철동에서 종로 6가로 이사한다. 그는 어의동 공립보통학교(지금의 효제초등학교)를 전학년 우등으로 마치고 당대의 수재들이 진학하던 경기도립상업학교에 응시했다가 떨어진다. 당연히 합격할 것으로 알았던 집안은 낙방 소식에 울음바다가 된다. 2차로 응시한 선린상업 주간부에도 떨어져 결국 선린상업 전수과 야간부에 진학한다. 상급학교 입시에 거푸 실패한 것은 잔병치레가 잦던 그가 보통 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폐렴과 늑막염으로 앓아 누워 1년쯤 학업을 쉰 탓이다. 1941년 김수영은 선린상업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도쿄성북(東京成北)고등예비학교와 도쿄상대(東京商大) 전문부에 적을 두고 공부한다. 유학에서 돌아온 뒤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만주 지린성(吉林省)으로 이주한 가족을 따라가 거기서 한동안 연극에 빠져든다. 그는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뒤 친구와 함께 일고여덟 달 동안 영어 학원을 경영하기도 한다. 이 무렵 연극에서 시 창작으로 진로를 굳힌 그는 1945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廷)의 노래"를 내놓으며 문단에 나온다. 그의 등단작인 "묘정(廟廷)의 노래"는 평론가 김현의 말처럼 "조지훈류(趙芝薰流)의 회고 취미가 압도적"인 작품이다. 그가 연희전문 영문과 4학년에 편입학했다가 이내 그만둔 것은 1946년의 일이다. 선배 시인들의 복고적이고 퇴영적인 언어 관습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자신의 작품에 불만이 많던 그는 두번째 작품인 "공자(孔子)의 생활난(生活難)"에 이르러 범속한 일상용어들을 시어로 바꿔놓는다. 김수영의 시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은 사물과 현실을 "바로 보려는 정신"이다. 이 비타협적인 "바로 보려는 정신"이야말로 반골의 전형성을 드러내는 정신인 것이다. 1950년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진다. 서울의대 부설 간호학교에서 영어 강사 노릇을 하고 있던 김수영은 피난을 가지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이 퇴각할 때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이북으로 끌려간다. 평남 야영 훈련장에서 1개월 동안 훈련을 받은 뒤 북원(北院)훈련소에 배치된 그는 유엔군이 평양 일대를 장악하면서 자유인이 되어 남하한다. 그런데 얼마 뒤 그는 서울 충무로에서 경찰에 체포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진다.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고 스스로 전하듯이, 그는 포로수용소 야전병원 외과 원장의 통역으로 있다가 풀려난다. 그는 이후 미8군(美八軍) 수송관의 통역, 선린상고 영어 교사, 평화신문사 문화부차장 등을 거친다. 서울 마포 구수동으로 이사한 1955년 무렵부터 그는 양계(養鷄)와 번역을 하며 힘겹게 가족을 부양한다. 1950년대 문단에서 김수영은 노랭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누구랄 것도 없이 가난하게 살던 당시의 문인들은 원고료를 받으면 집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동료들의 막걸리값으로 풀어야 했다. 그것이 당시 한국문단의 미풍 양속이고 관습이었다. 따라서 원고료를 안주머니에 챙겨 꼬박꼬박 집에 갖다주는 김수영의 행위는 이런 관례를 깨뜨려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수영에게 글쓰기와 번역은 가장으로서 생활비를 버는 노동이다. 그는 작품이 발표되거나 번역 원고를 넘기고 나면 신문사나 잡지사로 찾아가 당당하게 원고료를 재촉한다. 창작을 노동으로 생각하는 시인에게 그것은 당연한 행동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김수영의 이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어떤 잡지 편집자는 몇 밤을 새워 번역한 원고의 원고료를 받으러 온 김수영에게 대놓고 "당신이 일해 오는 것은 무서운 생각이 든다"고 모욕적인 말을 내뱉기도 한다. 1960년 4월 12일 부산일보를 받아 든 독자들은 신문에 실린 사진 한 장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머리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중앙 부두 앞 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의 주검 사진이다. 마산상고 입학 시험을 치르기 위해 전북 남원의 집을 떠나 마산의 할머니 집에와 있던 김주열은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벌어진 3월 15일 밤에 사라졌다. 행방불명된 지 거의 한 달만에 참혹한 주검이 되어 나타난 열일곱 살 소년. 이 한 장의 사진이 3.15부정선거와 장기집권을 꾀하는 이승만정권에 신물이 나 있던 민심을 분노로 들끓게 만들어 마침내 4월혁명의 기폭제가 된다. 4월 혁명은 한국 문학의 새로운 세대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이성적 주체의 자율성, 개체의 주관성과 내면성에 대한 신뢰"를 확보하고 자신들의 주체적 정체성을 강화하며 글쓰기를 밀고 나간 전에 볼 수 없던 세대다. 4월혁명에 대한 자의식이 한결 강렬하고 이를 자신의 문학적 자산으로 삼아 성공한 사람으로는 시인 김수영과 신동엽, 소설가 최인훈, 평론가 김현을 꼽을 수 있다. 4월혁명 기간 내내 김수영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들뜬 마음으로 거리를 쏘다녔다. 거의 매일 만취되어 집에 돌아오고, 어느 때는 고래고래 소리를 높여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다가 날이 새면 또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이다. 4월혁명을 통해 김수영은 비로소 시인으로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난해시에서 참여시로, 서정시에서 혁명시로 나아가던 그는 4.19 전에 내놓은 "하. 그림자가 없다"에서 이미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고 하며 혁명을 예감한다. 또 "진정한 시인이란 선천적인 혁명가"("시의 뉴프론티어")라고 선언한 바도 있다. 김수영은 혁명의 현장을 생생히 목격하고 자유에 대한 느꺼움을 가누지 못해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 후 아침에 깨어나서는 말짱한 정신으로 시와 산문을 미친 듯이 썼다. 그리고 정치와 사회 현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한다. 비로소 그의 시 세계는 만개하며 절정을 맞은 것이다. 그의 언어들은 풍자(諷刺)와 해탈(解脫) 사이로 뚫린 길 위를 질주한다. 그의 시는 독재, 빈곤, 무지, 허위, 속물 근성을 사정없이 질타하고 후진국 지식인의 설움을 머금는다. 자신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 소시민적 자아의 소심함과 비겁함을 까발리며 그는 치를 떤다. 이처럼 젊은 정신과 끊임없는 자기 갱신의 언어는 그를 영원한 청년시인으로남게 한다. 그는 자유와 정의, 사랑과 평화, 행복을 얻기 위한 혁명에는 피와 고독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한다. "푸른 하늘을"에서 자유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피"라는 대가를 치러야 하며, 혁명은 본디 "고독한 것"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서라벌예대.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에서 시간강사 노릇을 하던 그는 이 혁명이 "미완"으로 끝나고 말 것이라는 비관적 예감에 사로잡힌다. 이승만정권이 무너진 뒤 새로 들어선 제2공화국의 요직을 친일 지주와 관료, 경찰 출신이나 보수적 인사들이 차지할 때 혁명은 이미 실패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혁명이 좌절되었다고 느끼자 그는 "제2광화국!/너는 나의 적이다/나는 오늘 나의 완전한 휴식을 찾아서 다시 뒷골목으로 들어간다"고 토로하거나, 체제와 제도는 거의 달라지지 않고 사람만 바뀐 현실 상황에 비애를 느껴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고 절규한다. 이듬해 5.16군사쿠테타가 터지고 군부 세력이 정권을 잡자 현실에 대한 시인의 환멸과 절망은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시인을 정말로 괴롭힌 것은 그토록 혁명을 원했으면서도 스스로 혁명의주체가 될 수 없다는 소시민의 한계에 대한 인식과 자신이 "현실의 피해자일 뿐 아니라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뼈저린" 인식이다. 혁명의 장애 요소들이 우리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다는 깨달음은 정치와 사회 현실에 주고 있던 그의 눈길을 다시 "안"으로 돌리게 한다. 그러나 "안", 즉 아내를 비롯한 가족이라든지 헤어날 길 없는 소시민적 일상은 나태와 허위로 감싸여 있고 이런 사실은 그를 못 견디게 만든다. 밤늦게 집에 돌아와서는 거지가 되고 싶다고 외치거나 가족이라는 속된 사슬에서 풀어달라고 미친 듯이 소리를 쳐서 잠자던 아내와 아이들을 깨워 울리는 등 예전보다 심하게 식구들을 괴롭힌다. 그는 혁명 뒤에도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조국의 후진적인 정치 현실에 절망하며 그 절망을 술로 풀었던 것이다. 언젠가는 술이 억병이 되어서 눈 위에 쓰러진 것을 지나가던 학생이 업어 가지고 경찰서에 데려다 준 일도 있었다. 술에 취한 채 경찰서에 업혀간 그는 순경을 보고 천연덕스럽게 절을 하고 "내가 바로 공산주의자올시다!"하고 인사를 했다. 그는 이튿날 사지가 떨어져나갈 듯이 아픈 가운데에도 아내에게 이 말을 전해 듣고는 더럭 겁을 내기도 한다. 극심한 자기 비하나 자기 연민에서 비롯된 이런 잦은 음주와 가정 폭력은 시에서 혁명의 좌절을 가져온 소시민 계급의 안일함과 소극성을 향해 거침없이 내뱉는 야유와 욕설로 변용된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 파병에 반대하는/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일부) 이 시는 주체로서의 각성과 반성을 보여주는 김수영의 정신적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의 실천적 이성은 마땅히 "왕궁의 음탕"과 "언론의 자유","월남 파병"같은 정치적으로 예민한 문제들에 온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생활 속에서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한다. 설렁탕집 여주인과 야경꾼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소시민의 범주에 든다. 행동에 나서기보다 일상의 조가비 속에서 방관자로 지내며 나약한 후진국 지식인에 머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가 치를 떤 까닭은 바로 이런 비겁함 자체가 퇴폐고 타락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그를 자기 연민과 비애의 감정으로 나아가게 하거나 때때로 온갖 억압으로 가득 찬 사회 속에서의 고독한 자기 학대로 나아가게 한다. 영원한 자유를 향한 비상과 거듭된 좌절 사이에 걸쳐 있는 김수영의 시 세계는"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라고 할 수 있다. 김수영 시의 감동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1968년 4월 13일, 그는 펜클럽이 마련한 부산의 문학 세미나에 참석해 "시여, 침을 뱉어라"(원래의 제목은 "시에 있어서의 형식과 내용"이다)라는 제목으로 40분쯤 강연을 한다. 그는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파격적이고 예기치 못한 발언으로 청중을 당혹에 빠뜨린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내가 지금 - 바로 지금 이 순간에 - 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다." 김수영은 상업 학교를 나왔음에도 숫자를 극도로 싫어해 원고지에 매기는 번호도 아내나 여동생에게 부탁하곤 한다. 1968년 6월 15일, 그는 이날도 아내가 번호를 매긴 원고를 들고 광화문 네거리에있던 신구문화사에 나갔다. 번역 원고를 넘긴 뒤 고료를 받은 그는 이날 밤 신구문화사의 신동문(辛東門), 늦깎이로 등단한 신예 작가 이병주(李炳州), 한국일보 기자인 정달영(鄭達泳)과 어울려 청진동의 술집들을 옮겨다니며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신다. 술에 취한 김수영은 좌충우돌하며 횡설수설하던 끝에 "야,이병주, 이 딜레탕트야"하고 시비를 걸었다. 이병주는 "김 선생,취하셨구먼"하고 껄껄 웃어 넘긴다. 그들이 헤어진 것은 밤 이슥한 시각. 김수영은 이병주가 운전사 딸린 자신의 폭스바겐 차로 모시겠다는 것을 뿌리치고 시내버스를 타고 서강 종점에서 내린다. 그 때 좌석버스 한 대가 인도로 돌진하면서 인적 끊긴 길을 비틀거리며 걸어가던 김수영의 뒤통수를 들이받는다. 갈색 옷을 입고 있던 김수영은 "퍽!"하는 두개골이 파열되는 소리를 내며 멀찌감치 나가떨어진다. 밤 11시 30분께의 일이었다. 그는 적십자병원 응급실로 옮겨지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튿날 아침에 숨진다. 김수영은 스스로 몸담고 있는 사회 현실에 대한 준엄한 비판의식을 시 속에구현하고자 애썼다. 그는 해방 이듬해에 시작 활동에 뛰어들어 1950년대의 궁핍하고 혼란한 시기에"후반기" 동인을 거치며 비로소 자신의 독자적인 문법을 발견하고 비판적 시선을 날카롭게 심화시켰다. 이어 자유에 대한 갈망의 구체적이고 극적인 표현인 4월혁명을 기점으로 1960년대에 들어서며 아직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이 땅의 현실과 그의 의식은 첨예하게 부딪친다. 이때 시인 김수영의 비판적 감수성이 절정의 시편들을 토해낸다. 그가 죽기 직전에 내놓은 것으로 새로운 변모를 예감케 하는 "풀"을 쓰기까지 시적인 탐색 작업은 한결같이 이어진다. 1969년 사후 1주기에 맞춰 그의 무덤에는 시비(詩碑)가 세워지는데, 이 시비에는"풀"이 육필(肉筆)로 새겨진다. 김수영은 죽은 뒤에 더 높이 평가를 받고 유명해진 시인이다. 그가 죽은 뒤 민음사에서는 1974년에 시선집 "거대한 뿌리", 1975년 산문집 "시여, 침을 뱉어라", 1976년 시집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 1979년 산문집 "퓨리턴의 초상"을 잇달아 펴낸다. 이후에도 지식산업사, 창작과비평사, 열음사, 미래사 같은 여러 출판사에서 다투어 시선집을 내놓았다. 김수영은 근대적 자아 찾기, 온몸으로 자기 정체성 찾기의 한 모범을 보여준 시인이다. 그는 이상(李箱) 이후 최고의 전위시인이며 4월혁명의 정치적 함의를 정확하게 읽어낸 명실상부한 현대 시인이다. 그는 문학 속에 하찮은 "일상성"을 수용하고, 삶이 문학이며 문학이 곧 삶임을 일깨운다. 거칠고 힘찬 남성적 어조의 시 속에 담아 낸 소시민적 자아에 대한 가차없는 자기 폭로, 후진적 정치 문화에 대한 질타, 빈정거림, 맹렬한 비판은 오랫동안 여성적 정조의 전통을 이어오던 한국 시에 대한 반동이며 갱신의 뜨거운 몸짓이다. 그는 정신의 깊이와 정직한 자기 성찰, 예술가의 순결한 양심과 완전하게 밀착된 시를 쓰려고 했으며, 이것이 곧 시인에게 부과된 행동과 실천의 길임을 믿은 사람이다. 따라서 시를 쓴다는 것은 삼중의 싸움, 곧 언어와 자기 자신, 그리고 정치 현실과의 힘든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김수영은 그 길을 기꺼이 걸어갔다. 그의 시집이 30여 년이 훨씬 지난 오늘까지 여전히 이 땅의 젊은이들 사이에서가장 널리 그리고 꾸준히 읽히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드디어 울었다./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다시 누웠다.//풀이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발목까지/발밑까지 눕는다/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날이 흐리고풀뿌리가 눕는다" 이 시는 "풀"과 "바람"이라는 명사와 "눕다" "일어나다" "울다" "웃다"라는 동사 두 쌍만을 교묘하게 반복함으로써 뛰어난 음악성을 만들어낸다. 단순하기에 오히려 암시성의 극대화를 가져온 시가 바로 "풀"이다. 이런 까닭에 일부에서는 풀을 민초의 상징어로 읽어 참여시의 표본으로 내세우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대지에 뿌리를 내린 인간의 근본적 삶과 관련된 순수 서정시의 백미로 본다. 이처럼 견해가 엇갈리는 것 자체가, 이 시가 풍부한 의미성을 내재하고 있는 문제작이라는 증거다. 이 시는 직설투의 딱딱한 산문적 언어에 의한 시작 과정을 거쳐 시인 김수영이 도달한 예술적으로 깊어진 세계를 유감 없이 보여준다. (2002년 한국경제 연재, 장석주 시인. 문학평론가)
[장석주의 '한국문단비사']
10. '소설가 김유정' 김유정, 한국 소설문학의 기린아 운명 ! 나를 꽉 누르고 어떻게 할 수 없게하는 그 그림자! 1930년 8월 말. 스물 두 살의 청년은 늑막염이었다. 청년은 유산을 틀어쥐고 앉아 있는 고향의 형에게 치료비와 생활비를 보내달라는 간곡한 편지를 썼다. 그때 청년은 둘째 누나 집에 얹혀 살고 있었다. 형은 고향에서 술과 난봉질로 가산을 탕진하고 있으면서도 병석의 동생이 보낸구조 신청을 외면했다. 겨우 몇 푼 보내주는 시늉을 하고서는 입을 씻은 것이다. 이 청년이 바로 소설가 김유정(金裕貞,1908~1937)이다. 김유정은 스물아홉 짧은 생애 동안 소설 30편, 수필 12편, 편지.일기 6편, 번역소설 2편을 남긴 작가다. 1996년까지 김유정 문학에 대한 연구 논문이 무려 3백 60편에 이르는데, 이렇게 쏟아지는 연구 논문은 그의 문학사적 위치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그는 1935년 조선일보와 중외일보의 신춘 문예 공모에 각각 "소낙비"와 "노다지"가 당선됨으로써 문학 지망생들의 부러움을 사며 문단에 나온다. 등단하자마자 "금 따는 콩밭" "떡" "만무방" "봄 봄"같은 걸작 단편을 잇달아 내놓아 다시 한 번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김유정은 1908년 1월 11일 일제 때의 행정 지명으로 강원도 춘천부 남내이작면 실레마을에서 아버지 김춘식과 어머니 심씨 사이의 2남 6녀 중 일곱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유정 일가가 현금과 토지 일부를 정리해 서울 종로구 운니동의 1백여 칸짜리 살림집으로 이사를 한 게 1913년이다. 그런데 이사할 무렵부터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가 갖은 약을 다 써도 일어나지 못하고 이듬해 숨을 거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3년 뒤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김유정은 고아가 되었다. 실질적인 가장이 된 형 유근은 운니동의 집을 처분하고 관철동으로 이사를 했다. 어린 유정은 저녁마다 근처의 우미관에서 들려오는 나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죽은 어머니를 그리워하곤 했다. 유근은 선대에 악착같이 모은 재산을 주색 잡기로 탕진하는데 바빠 어린 동생의 허전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유정은 제 책상 위에 놓인 어머니의 사진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곤 하며 소년기를 보냈다. 휘문고보 시절, 그는 친구인 안회남에게 어머니의 사진을 보여주고는 "내 어머님은 미인이다"라고 자랑을 했다. 휘문고보를 나와 1929년 연희전문학교에 갓 들어간 김유정은 명월관 기생이자 남도창을 하는 박녹주에게 막무가내로 연애편지를 보냈다. 비누와 수건을 손에 들고 목욕탕에서 나오는 박녹주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한 그는 검은 휘장으로 들창을 가린 어두운 방에서 날마다 한 통씩 편지를 써서 부쳤다. 유정이 기거하던 방안은 늘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그러나 박녹주는 연하의 김유정을 얕잡아본 것인지 그가 보낸 편지를 읽지도 않고 찢어버렸다. 편지 공세가 그치지 않자 하루는 박녹주가 가정부를 시켜 김유정을 불렀다. "당신이 김유정이오" "그렇습니다" "어쩌려고 나에게 그런 편지를 했소" "어쩌려고가 무슨 말이오. 편지를 받아보지 않았소?" 훤칠한 키에 잘생긴 김유정은 스스럼없이 응수했다. 그는 사랑한 뒤에 어쩔 생각이냐는 박녹주의 물음에 "결혼하는 겁니다" 하고 대꾸한다. 박녹주가 "남편이 있는 몸"이라고 타일러도 소용이 없었다. 쫓겨나다시피 박녹주의 집에서 물러나온 김유정은 좀처럼 포기를 하지 않고, 노골적인 협박과 호소가 범벅이 된 편지를 다시 쓴다. "엊저녁에는 네가 천향원으로 간 것을 보고 문앞에서 기다렸으나 나오지 않았다. 만일 그 때 너를 만났다면 나는 너를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좋아하지 마라. 단 며칠 목숨이 연장될 따름이니까." 혈서로 된 이런 편지를 받고 박녹주는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래서 외출도 되도록 삼가고 더러 밖에 나갈 때는 휘장을 내린 인력거를 타고 남바위를 얼굴까지 푹 내려써서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 연희전문 학생과 기생 박녹주 사이의 염문은 장안에 파다하게 퍼졌다. 그러나 혈서도, 애원도, 협박도 효과가 없어 유정의 짝사랑은 무참히 밟히고 만다. 김유정은 노동자를 상대로 싸구려 밥장사를 하는 둘째 누님 집에 얹혀 살았다. 그의 유일한 친구인 안회남이 찾아오면 장기를 두고 속이 출출하면 누님이 웃묵에다 차려놓고 간 밥상을 잡아당겨 둘이 함께 먹었다. 그때 이미 김유정의 병은 깊어갔다. 유정은 집에서는 둘째 누님의 학대와 수모를 고스란히 견뎌야만 했다. 광업소에 나간다고 속이고 기둥서방 노릇을 하는 정씨는 누님에게 걸핏하면 손을댔다. 누님은 그 화풀이를 집안에서 빈둥거리는 유정에게 했던 것이다. "너 취직이라도 좀 해라. 네 누나가 고생하는 게 네 눈엔 안뵈니" 유정은 누님도 밥장사를 하느라 심신이 고달팠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며 구박을 견뎌냈다. 연애도 실패하고 사업도 실패했다. 인생살이가 제뜻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몇 편의 소설을 써냈지만 그것으론 약값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 나날이 암담했다. 유정은 폐지 위에 "운명! 나를 꽉 누르고 어떻게 할 수 없게 하는 그 그림자"라는 글 따위를 끄적이며 탄식을 했다. 그는 혜화동의 누님 집을 나와 도서관에 틀어박혀 소설을 썼다. 그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운명이 치질과 폐병을 안고 있는 그의 몸을 짓누르면 짓누를수록 그는 더욱 소설에만 매달렸다. 짝사랑에 따른 좌절을 겪은 데 이어, 유근이 술과 여자에 빠져 가산을 탕진한 여파로 유정은 1930년에 연희전문학교를 중퇴했다. 유정은 일본 대판으로 건너가 노동을 하며 공부를 해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누님이 그를 만류했다. 그는 일본행을 포기하고 주저앉았다. 혜화동 언저리의 허름한 방에서 지내다가 늑막염에 걸려 고생하던 유정은 1931년 고향인 실레마을로 내려갔다. 고향에서 유정은 요양에만 매달리지 않고 틈틈이 장만한 나무로 야학당을 지어 글 모르는 이들을 가르친다. 이듬해에는 충청도 지방의 금광을 비롯해 곳곳을 떠도는데 그는 떠돌이 생활을 하며 많은 것을 체험했다. 특히 짚으로 꼬아 만든 주머니 속에 술병을 넣어 들고 다니며 농부나 광부에게 술을 파는 "들병이"들을 만난 일은 나중에 그의 창작 생활에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1932년 유정은 다시 실레마을로 가서 본격적인 계몽운동에 나선다. 이 무렵은 1920년대에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던 브 나로드, 곧 농촌 계몽운동이 조직화 되어 펼쳐지던 시기다. 그도 고향에서 야학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칠 때 브 나로드운동 팸플릿을 교재로 썼다. 그는 또 학생들과 마을 청년들을 모아 농우회를 조직하고 이를 발전시켜 정식으로 간이 학교 인가를 받아 금병의숙(錦屛義塾)을 설립했다. 그러나 형의 음주벽과 가족에 대한 횡포가 갈수록 심해지자 1933년부터는 서울로 와서 조카 형수와 함께 창신동 신당동 효제동 등을 전전하며 셋방살이를 했다. 유정은 이 무렵부터 소설쓰기에 본격적으로 매달린다. 1933년 1월 "산골 나그네"를 끝낸데 이어 8월에는 "총각과 맹꽁이"를 썼다. 유정은 "개벽사"에 다니던 안회남에게 "산골 나그네"를 보내는데 이 작품은 "제일선"에 발표된다. 유정은 밤마다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은 채 깨어나 소설을 썼다. 서울시청 위생병원에서 진단을 받아보니 병명은 폐결핵. 결핵균의 침식에 의해 이미 쇠약해진 몸으로 그는 어두운 운명의 그림자를 떨쳐버리려고 필사적으로 투쟁한다. 1933년 발족된 "구인회"에 들어가면서 그의 창작 활동은 더욱 불붙기 시작한다. 그는 구인회의 회지 "시와 소설"에 "두꺼비"를, "개벽" 3월호에 "금 따는 콩밭"을, "중앙일보"에 "떡"을, "조선일보"에 "만무방"을, "조광" 12월호에 "봄봄" 등을 잇달아 발표한다. 그러다가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낙비", "중외일보" 신춘문예에 "노다지"가 동시에 당선된다. 흔히 한국 단편문학의 결정체로 일컬어지는 김유정의 작품들은 카프의 해체등으로 말미암은 문단 전반의 침체 분위기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유정의 단편들은 풍자와 아이러니 수법을 사용해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도 검열에 걸리지 않을 수 있는 돌파구를 열었다. 아울러 이전 좌익계 소설들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재미도 만만치 않아 우리 소설계에 새로운 방향과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소낙비"는 1930년대 식민지 농촌의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주 기본적인 도덕이나 윤리마저 팽개치는 농민들의 체념적 생존 양식을 희화화하고 있다. 춘호는 노름판에서 돈을 따서 도시로 나갈 자금을 마련할 궁리를 하지만 노름 밑천 2원이 없어 실천에 옮기지 못한다. 춘호는 어린 아내를 때리며 화풀이를 하고, 이에 견디다 못한 춘호의 아내가 돈을 구하기 위해 집을 뛰쳐나간다. 춘호의 아내는 쇠돌엄마네 집을 지나치다가 쇠돌엄마네 집으로 들어가는 이주사를 본다. 이주사는 마을의 소문난 부자인데 쇠돌엄마는 이주사 덕에 살림이 폈다. 잠시 밖에서 서성이던 춘호의 아내는 용기를 내어 쇠돌엄마네 집으로 들어간다. 춘호의 아내는 혼자 있던 이주사와 정을 통한 뒤 이튿날 2원을 받기로 한다. 다음날 춘호는 아내가 이주사에게 가는 것을 알면서도, 곱게 차리고 집을 나서는 아내를 들뜬 마음으로 지켜본다. 이처럼 가난과 연관된 비정상적인 남녀 관계는 김유정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소낙비"를 비롯한 그의 많은 소설 속에는 남편의 병이나 노름 밑천 빚 생계 때문에 단돈 몇 푼에 몸을 팔거나 술집 작부 또는 들병이로 나서는 아내, 그리고 아내의 매춘을 뻔히 알면서도 분노나 죄책감 없이 묵인하는 남편이 수두룩하게나온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작중 인물들의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다만 이들의 행태를 유머 아이러니 풍자 해학적 수법으로 그려낸다.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그 이면에는 늘 짙은 우수가 깔려 있는 게 김유정 소설의 특징이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만무방"역시 농민들이 가난 때문에 겪는 사건을 담아낸 단편소설이다. 아무리 땀흘려 일해도 결국 "제 살 깎아먹기"가 되기 일쑤이던 1930년대 우리 농촌의 단면을 예리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염치없고 막 되어먹은 잡놈의 무리"라는 뜻을 가진 "만무방"같은 뻔뻔함과 천연덕스러움은 유정의 다른 소설들에서도 도둑질 도박 매춘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비윤리적인 삶의 형태로 줄곧 나타난다. 또 하나의 걸작 단편 "봄봄"은 지주의 대리격인 마름이 가난과 데릴사위 풍속을 이용해 순진한 농촌 청년을 기만하는 과정을 역시 풍자적 수법으로 녹여낸 작품이다. 주인공 "나"는 점순네 데릴사위로 들어가 그 집에서 3년반 동안이나 뼈빠지게 일하지만, 마름인 점순 아버지는 심술궂게도 성혼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일만 부려먹는다. 이런 "나"를 보고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거냐고 점순이가 은근히 부추긴다. "나"는 점순의 말에 용기를 내어 그 동안 일해준 대가를 요구하며 점순 아버지와 대판 싸움을 벌이는데, 이를 지켜보던 점순이 오히려 "이 망할 게 아버지 죽이네!" 하며 제 아비의 편을 든다. 김유정의 문학은 자신이 속해 있던 모더니즘의 한 기류를 보여줬던 구인회의 도시적 특성과도 멀찍이 떨어져 있다. 그는 특유의 토속적이고 질퍽한 어휘, 유머와 풍자적 수법 등으로 지극히 평범한 일상사를 소설 속에서 새로운 형태로 살아나게 한다. 그가 거둔 이와 같은 문학적 성과는 구인회를 또 다른 각도에서 빛나게 한다. 어찌 보면 유정에게 소설은 일종의 도피처였다. 이미 형 유근이 그 많던 선대의 가산을 거의 다 날린 뒤여서 그에게 돌아올 몫은 남아 있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독립할 수 없는 비참한 처지, 암울한 시대 상황, 정신적 고립감,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쓰라린 기억, 그리고 폐결핵 선고... 소설 쓰기는 이 모든 시름과 고뇌, 우울과 절망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몸짓이었다. 구인회 시절에 유정은 삶과 죽음에 걸쳐 각별한 관계를 맺게 되는 이상과 만났다. 두 사람은 집안 형편이 비슷하고 문학관도 웬만큼 통하는 사이였다. 특히 폐결핵을 같이 앓고 있어서 더욱 가까이 묶인다. "각혈이 여전하십니까?"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치질이 여전하십니까?"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유정만 싫지 않다면 나는 오늘 밤으로 치러버릴 작정입니다. 일개 요물에 부상당해 죽는 것이 아니라 27세를 일기로 불우한 천재가 되기 위해 죽는 것입니다" 1936년 가을, 이렇게 은밀하게 찬란한 정사(情死)를 모의하던 두 사람은 그 뒤로 1년도 채 지나기 전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세상을 버렸다. 1936년 유정은 만성적인 늑막염과 치질, 폐결핵으로 말미암아 정릉 언저리의 암자에서 휴양을 했다. 휴양 중에도 글쓰기는 이어져 같은 해 "사해공론"에 "산골 나그네", "여성"에 "옥토끼" "슬픈 이야기", "조광"에 "동백꽃" "야앵"을 발표했다. 이듬해인 1937년 초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아 "조광"에 "따라지" "정분", "여성"에 "땡볕" "총각과 맹꽁이" 등을 내놓지만, 가난 때문에 약을 제대로 쓰지 못해 건강은 날로 악화되었다. 암자에서 내려온 그는 병든 몸으로 다시 효제동 셋방과 매형의 집 등을 전전하며 창작을 하는 한편 돈이 될만한 일거리에 매달렸다. 유정은 경기도 광주에서 과수원을 하는 다섯째 누이의 집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요양 생활을 할 참이었다. 서울에 있을 때 고통이 너무 심한 나머지 극소량의 아편을 썼으나 광주에 내려와서는 그것마저 끊었다. 형편이 아편을 살 수도 없었고, 거기에 중독되면 헤어날 길이 없으리라는 걸 잘알고 있었다. "나는 날로 몸이 꺼진다. 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기조차 자유롭지가 못하다. 밤에는 불면증으로 괴로운 시간을 원망하고 누워 있다. 나는 참말로 일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내가 돈 백 원을 만들어 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 주기 바란다. 또 다시 탐정소설을 번역하여 보고 싶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걸로 한 두 권 보내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오십일 이내로 번역해서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 주마. 네가 극력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물론 이것이 무리임을 잘 안다. 무리를 하면 병을 더친다. 그러나 병을 위하야 엎집어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나의 몸이다. 그 돈이 되면 우선 닭 삼십 마리를 고와 먹겠다. 그리고 땅군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십여뭇 먹어 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궁둥이가 쏙쏙구리 돈을 잡아 먹는다. 돈, 돈, 슬픈 일이다. 나는 지금 막다른 골목에 맞딱드렸다. 너의 팔에 의지하여 광명을 찾게 해다우. 나는 요즘 가끔 울고 누워 있다. 모두가 답답한 사정이다. 반가운 소식 전해다우. 기다리마. 삼월 십팔일. 김유정으로부터" 유정은 친구 안회남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다. 돈이 될만한 탐정소설을 구해 보내라는 부탁이었다. 그는 조카가 방으로 들고 온 세수대야를 앞에 놓고 생각했다. 내 몸 속에 지금 고름이 꽉 차 있을텐데 이깟 세수는 해서 무엇을 하나. 그래도 유정은 남은 생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유정은 안회남이 보내온 돈이 될만한 탐정소설을 열심히 번역하는 수밖에 없었다. 유정은 제 몸의 생명력이 서서히 꺼져가는 걸 느꼈다. 밤을 새워가며 탐정소설 번역 일을 하는데 유정의 온몸이 땀으로 후줄근하게 젖곤 했다. 닭 삼십 마리와 살모사 열 마리를 고아먹기 위해. 그렇게 해서라도 병을 떨쳐내고 살기 위해. 한밤중에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다. 소리를 질러 조카를 불렀다. 누님을 오게 해 홍문을 보아달라고 했다. 누님이 치질이 악화된 홍문을 들여다 보지만 통증을 없앨 수는 없었다. 그는 홍문을 면도칼로 도려내는 듯한 통증 때문에 한잠도 못 자고 비명을 지르며 밤을 새웠다. 가래도 끓고 기침도 잦아졌다. 1937년 3월 29일, 새벽이 오고 있었다. 유정은 그날 새벽 6시 30분 경 길게 숨을 한번 몰아쉬고 눈을 크게 떴다. 세상을 마지막으로 잘 보겠다는 듯이. 그리고 이내 영원히 눈을 감아버렸다. 스물아홉 나이였다. 유정의 시신은 화장을 했고, 조카가 한강에 나가 분말로 변한 뼛가루를 뿌렸다. 김유정이 죽고 난 스무날 뒤 멀리 도쿄에 있던 이상(李箱)이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2002년 한국경제 연재 장석주 시인 평론가)
[장석주의 '한국문단비사']
11. '청마 유치환' 靑馬(청마) 柳致環(유치환,1908-1967)을 생각하면 먼저 통영과 우체국을 떠올리게 된다. 청마는 통영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아버지가 유약국을 경영하고 있었고, 청마는 통영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훗날 아내가 되는 권재순을 만나 누이, 오빠로 지내다가 결혼을 하기도했다. 청마는 "우편국에서"라는 시를 남기고 있는데, 아마도 통영에 있는 한 작은 우체국일 것이다. "진정 마음 외로운 날은/여기나 와서 기다리자/너 아닌 숱한 얼굴들이 드나는유리문 밖으로/연보랏빛 갯바람이 할 일 없이 지나가고/노상 파아란 하늘만이열려 있는데"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은 그 기다림 때문에 행복하다. 우체국의 유리문이 여닫힐 때마다 파란 하늘과 함께 갯비린내가 밀려왔다. 아마도 시인은 거기에 와서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치고 한참 동안 앉아 있다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살아 있는 동안에 많은 여인들을 연모했고, 그 쉬지 않는 연모에서 시를 길어냈다. 청마는 어느 글에선가 "나의 생애에 있어서 이 애정의 대상이 그 후 몇 번 바뀌었습니다. 이같은 절도 없는 애정의 방황은 나의 커다란 허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자성의 빛을 비치기도 했지만, 여인들이란 시인에게 "항상 얻지 못할 영혼의 어떤 갈구의 응답인 존재"였던 것이다. 청마의 가장 널리 알려진 연모의 대상은 시조시인 이영도이다. 청마는 1946년께 이윤수 시인등과 함께 "竹筍(죽순)"동인을 했다. 대구 서문로에서 名金堂(명금당)이라는 시계점을 내고 있던 이윤수는 1946년 5월 1일자로 해방 이후 최초의 시동인지인 "죽순" 창간호가 나오자 점포 앞에 "죽순시인구락부"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그해 11월이 다 저물 무렵 명금당에 나타난 청마는 동인들과 사나흘 같이 지내다 집으로 돌아갔다. 청마가 여류 시조시인 이영도를 처음 만난 것도 바로 "죽순" 동인을 통해서이다. 당시 통영여중의 교사로 있던 이영도는 결핵으로 남편을 잃고 혼자였다. 청마는 이영도를 향해 쉬지 않고 편지를 보내고, 숱한 연모의 시를 썼다. 청마의 이영도에 대한 사랑은 매우 고통스러운 사랑이다. "쉬이 잊으리라/그러나 쉬이 잊히지 않으리라" 그들은 같이 있을 수 없었다. 그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연정의 조각"은 "가슴을 저미는 쓰라림"으로 그를 찔렀다.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어룽"은 마침내 다음과 같은 명편의 시를 낳기도했다. "오늘도 나는/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 뵈는/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행길을 향한 문으로 숫한 사람들이/제각기 한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봇지를 받고/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사람께로/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한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비귀꽃인지도 모른다.//.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느니/.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하지만 사람들은 청마 유치환을 "깃발의 시인"으로 기억한다. 남성적 준열한 삶의 의지를 실어나르는 한문 투성이의 그의 시들은 한과 애상, 그리고 여성적 비극의 정조로 물들여져 있는 한국 현대시의 맥락으로부터 멀리벗어나 있다. 청마는 "나는 시인이 아닙니다. 만약 나를 시인으로 친다면 그것은 분류학자의 독단과 취미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어찌 사슴이 초식동물이 되려고 애써 풀잎을 씹고 있겠습니까?"라고 두 번째 시집 "생명의 서" "서문"에 썼다. 그의 목소리는 높고 준열하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저 푸른 海原(해원)을 향하야 흔드는/永遠(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純情(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오로지 맑고 곧은 理念(이념)의 標(표) 대 끝에 /哀愁(애수)는 白鷺(백로)처럼 날개를 펴다./아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국정교과서에 실림으로써 유명해진 "旗빨"이다. 그 "기빨"은 무엇일까? 그가 지향했던 "정신적 높이"와 상응하는 위치에서 펄럭이는 그것은 아직 변질하지 않는 생명의 원형이었을까? 해방 이전까지만 해도 문단적 교류가 전무한 채 변방에서 외롭게 혼자 시를 써가던 청마는 "사랑하는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라는 불멸의 에피그람을 남겼다. 1908년 경남 통영의 태평동에서 한의였던 유준수의 8남매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남은 극작가인 유치진이다. 그의 부친은 본래 거제군에서 살았으나 결혼한 뒤에 처가가 있던 통영으로 삶의터전을 옮겼다. 그는 외가에서 태어나 11세때까지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배웠다. 어린 시절의 그는 말이 거의 없는 소년이었다. 학교의 종이 울리더라도 뛰어가는 법이 없이 조용히 걸어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로 들어갔다. 그가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豊山)중학교에 입학한 것은 1922년이다. 그의 형 유치진은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그의 내성적 성격은 중학교시절 더욱 심화되었다. 일본인 친구들을 사귀는 대신에 그는 혼자 책을 읽고 무언가를 쓰는 일에 열중했다. 도일한 이듬해 관동대지진을 맞이 했고, 그때 잔학한 일인들에 의해 무고한 한국인들이 무참하게 학살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주일학교에서 만난 소녀에게 매일같이 신문을 보냈다. 그 소녀가 바로 권재순이다. 도요야마중학 4학년 때 부친의 사업이 기울자 청마는 귀국하여 동래고보 5학년에 편입한다. 1928년 연희전문을 중퇴하고 진명유치원의 보모로 있던 한 살 연하의 권재순과 결혼한다. 그 당시로는 드문 신식 결혼식이었다. 이때 결혼식에 신랑신부 앞에 꽃바구니를 들고 서 있는 어린아이 중의 하나가 훗날 시인이 된 김춘수이다. 그는 일본의 아나키스트들과 정지용의 시에 깊은 영향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청마는 1931년 문예월간에 "정적"이라는 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나온다. 이때 청마는 비슷한 또래의 통영의 문학청년들과 어울려 다니며 술을 마시곤 했다. 그의 장래를 불안하게 생각하던 아내는 시아버지와 청마를 설득하여 거처를 평양으로 옮긴다. 청마는 평양에서 사진관을 경영했으나 여의치 않자 이내 걷어치우고 시작에만 전념한다. 그의 아내는 청마에게 평양의 신학교 진학을 권유했으나 그는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거절했다. 다시 거처를 부산으로 옮긴 것은 1934년이고, 부산 화신연쇄점에 근무한다. 그는 "청마시초"라는 시집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사실 나는 해방 이전에는 문단적 교유나 교섭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한때 미염(米鹽)을 벌이하던 화신(和信)관계로 부산에서 조벽암과 접촉하던 외에는 간간이 서울 가면 주배를 나눈 이로서 소운, 지용, 이상제씨가 기억에 남아있을뿐. 따라서 현재 내가 가진 문단의 선배, 동배의 교분은 거개가 해방 후에 비로소 맺어진 것이다" 어느날 김소운은 충청도 서천에 계시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았다. 그는 화신에 근무하던 청마를 불러내었다. 다방에 청마와 마주앉은 소운은 청마 앞에 전보를 내밀었다. 청마는 전보를 읽고는 얼마면 되느냐고 물었다. 소운은 수중에 돈이 있긴 있느냐고 물었다. 청마는 자신에겐 가진 것이 없고 유치원에 있는 아내에게 부탁을 해보겠다고 했다. 유치원 보모이던 권재순의 월급이 40원이던 시절이다. 청마는 20원을 구해 소운의 손에 쥐어주었다. 청마의 첫시집 "청마시초(靑馬詩抄)"가 나온 것은 1939년이다. 이 시집은 김소운의 주선으로 화가 구본웅의 부친이 경영하던 인쇄소 창문사에서 찍어냈는데, 시집 표지에는 청색지사라는 출판사 이름이 찍혀 있다. 시집의 제호는 김소운의 의견을 따른 것이고, 시집의 본문 용지는 파지를 이용했다. 청마 유치환이 농장 경영을 하겠다고 가족을 이끌고 북만주로 떠난 것은 1940년 봄의 일이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는 때여서 너나 할것없이 궁핍했던 시절이다. 하얼빈에서도 마차로 하루길을 더 들어가야 하는 연수현이라는 곳이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그 소도시의 네 거리에는 효수당한 비적의 머리가 높이 걸려 있었다. 그것은 오래 걸려 있었는지 말라서 소년의 얼굴처럼 작고 검푸렀다. 흑룡강에서부터 불어온 황량한 바람이 그 비적의 마른 얼굴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그곳에 가형인 동랑 유치진이 개간한 땅이 있었는데, 청마는 그것을 관리하고 개발하는 일을 했다. 자금 융통이 필요했던 청마는 이듬해 귀국했지만 빈 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겨울이었다. 영하로 떨어진 날씨는 베일 듯 추웠고, 대기를 부옇게 지우며 흰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년 뒤에 청마는 어린 아들을 잃었다. 땅이 얼어 삽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이는 허허벌판 밭두렁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흥안령 가까운 북만주의 광막한 벌판이었다. 그것은 시인의 말대로 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 같은 절망의 광야(!)였다. 청마는 해방 직전인 1945년 6월 돌연 고향 통영으로 귀환하는데, 그것은 아내 권재순의 강권 때문이다. 아내는 꿈마다 할아버지가 나타나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손짓을 한다고 남편을 채근했다. 그들이 귀국하고 두달 뒤에 해방이 되었다. 문학청년이었던 김춘수는 친구와 함께 고향의 대시인을 방문했다. 점심 무렵이었는데, 청마는 유약국집 마루에 혼자 앉아 파쌈을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키고는 파쌈을 고추장에 찍어 입에 연신 집어넣고 있었다. 결벽증이 있던 문학청년의 눈에 청마의 모습은 너무나 세속적으로 비쳐 실망감이 컸지만 그것을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김춘수가 청마를 방문하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9월 15일 통영문화협회가 결성되었다. 청마가 대표가 되고 윤이상, 전혁림, 김춘수 등이 간사를 맡았다. 문맹자를 위한 한글강습, 시민상식 강좌, 농촌 계몽연극 공연 등을 하는 계몽적인 예술운동 단체였다. 청마는 교육계에 오래 몸담고 있었다. 1954년에 안의중학교에서 교장을 지냈고, 그 뒤로 경주중고등학교, 경주여중고, 대구여고, 경남여고 등의 교장을 지냈다. 자유당 말기였던 1959년에는 자유당의 정책에 잘 따르지 않던 청마는 한때 미움을 사서 교장직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하지만 청마는 학생들로부터 단단한 신임과 함께 인기가 높았던 교장이었다. 전근 발령이 날 때마다 재직하고 있던 학교의 학생들이 유임 데모를 벌이곤 했다. 그 뒤 청마는 경북대학교 문리대에 자리를 얻어 시론을 강의했다. 청마는 향촌동에 있던 백구세탁소 2층에 세들어 살았다. 추운 겨울이면 방안에 있던 잉크병이 얼기도 했다. 이때 경북대 의대를 나온 문학청년 허만하는 혼자 청마를 흠모하며 시를 쓰고 있었다. 1960년 이른 봄 허만하는 대구 경북여고 부근 육군 관사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청마의 집을 방문했다. 청마는 자유당 정권에 의해 실직 상태였고, 한쪽 다리는 신경통으로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시기이다. 햇빛이 따뜻했던 그날 마루 끝에 걸터 앉은 허만하는 얘기 끝에 청마에게 "선생님,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을 하셨겠습니까?"라고 묻자 "아마 천문학자가 되었을끼라"라고 청마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청마가 세상을 뜬 것은 1967년 2월 13일이었다. "그러면은 너는 오늘 이 시간까지를 진실로 무엇에 의지하여 살아왔으며 또한 살아 있는지, 천길 벼랑 끝에 딛고 선 절망의 공허감에 시방 잇빨을 갈고 내닫는 차 쇠바퀴에 반드시 두개골을 부딛고 말리라" 청마는 죽기 십여년 전에 이런 글을 남겼다. 마치 시인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과 같은 글이다. 그날은 고교 후기 입시날이었다. 부산남여상 교장으로 있던 청마는 학교 일을 마치고 예총 일로 몇 문인을 만났다. 그들과 어울려 몇 군데 술집을 들렀다. 청마는 고혈압 때문에 술 대신에 사이다를 마셨다. 술값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가던 청마는 부산의 좌천동 앞길에서 버스에서 내려 길을 건너다가 한 시내버스에 치였다. 밤 9시 30분경이었다. 청마는 부산대학 부속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절명했다. 유독 천년고도 경주를 사랑해서 주말이면 술집들이 늘어서 있던 "쪽샘"을 거쳐 반월성이나 남산 기슭을 자주 거닐다가 돌아가던 청마는 그렇게 떠나갔다. "경주 남산 기슭에 초간 삼간 짓고 할망구와 단둘이 살다가 뼈를 묻겠다"던 시인은 끝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청마는 부산시 서구 하단동의 산록에 묻혔다. (2002년 한국경제 연재 장석주 시인 평론가)
[장석주의 '한국문단비사']
12. '소설가 이병주' 1960년 4월혁명 뒤 나라 곳곳에서는 교원노조(敎員勞組)가 결성된다. 그러나 이듬해 5.16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혁명 검찰부를 구성하고 교원노조운동을 용공으로 매도하며 소속 간부들을 잡아들인다. 이때 소설가 이병주(李炳注,1921~1992)는 교원노조 고문이라는 명목으로 잡혀 들어간다. 사실은 이병주가 주필로 있던 "국제신보"에 "조국의 부재(不在)" "통일에 민족역량을 총집결하라"는 제목의 한반도 영세 중립국화를 주장한,시대를 너무 앞질러 간 논설을 써서 싣는 바람에 걸려든 것이다. 이 일로 이병주는 군사 정권의 이른바 혁명재판소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2년7개월을 복역한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온다. 출소 직후 이병주는 수감 생활을 하며 구상한 소설을 1주일 만에 원고지 5백여장 분량의 중편 소설로 써낸다. 이병주의 등단작이 된 "소설 알렉산드리아"는 뜻하지 않은 수감 생활에 대한 일종의 보상인 셈이다. 마흔네 살이 되던 해에 첫 소설을 발표한 이후 왕성한 필력을 과시한 이병주는 "관부연락선"(1972). "예낭풍물지"(1974) "망명의 늪"(1976) "지리산"(1978) "바람과 구름과 비"(1978) "산하"(1979) "행복어사전"(1980)" 소설 남로당"(1987) 등의 문제작을 잇달아 내놓으며 작가로서 입지를 굳힌다.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말을 즐겨 하던 그는 작가란 햇빛에 바래진 역사를 새로 쓰는 복원자, 준엄한 사관(史官)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모든 역사는 승자들을 위한 기록이다. 따라서 당연히 역사는 승리자 중심으로 기술되고 결과만 따지게 된다. 그러나 문학은 역사가 빠뜨리고 간 것을 챙기고 메워준다. 무명의 패배자에게도 발언권을 주고 결과만이 아니라 동기도 중요하게 조명을 한다. "역사의 그물로 파악하지 못한 민족의 슬픔의 의미를 모색하는 것"을 자신의 문학적 지향으로 삼은 이병주는 철저한 자료 수집과 취재에 바탕을 두고 한국 현대사를 소설의 공간에서 충실하게 되살려낸다. 1970년대 중반,문인들이 모인 어느 술자리. 한 젊은 소설가가 술기운을 빌려 이병주에게 대뜸 묻는다. "선생님, 빨치산 하셨지요?" 적당히 술이 올라 기분이 좋았던 이병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린다.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이병주에게 쏠린다. 짧은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이병주가 벌떡 일어선다. "내가 빨치산 한 걸 네가 봤어? 증거 있으면 대보라구, 이 자식아!" 이병주가 들고 있던 술잔이 어느 새 젊은 작가의 얼굴을 향해 날아간다. 말 한 마디 잘못 꺼낸 죄로 뜻하지 않은 봉변을 당한 젊은 작가가 묵묵히 있자 이병주는 분이 덜 풀린 듯 후배 작가의 멱살을 움켜잡는다. 주위 사람들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아 가까스로 더 큰 불상사로 번지지는 않는다. 이병주는 자신에게 평생 동안 따라 다닌 좌익 혐의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다. 그의 사상적 편향에 대한 의심 때문에 그는 숱한 오해와 불이익을 당하며,그의 내면에는 이에 대한 강박증적 피해 의식이 깃들이게 된다. 그가 숨진 뒤 한 유력 월간지에 마치 특종처럼 "나는 빨치산이었다"라는 기사가실린 적이 있다. 그 기사대로라면 6.25 직후 해인사 경내에 피신해 있던 이병주는 그 곳을 습격한 빨치산 부대장 김간도를 만나고, 일본 메이지대학 동창인 그를 따라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한다. 그러나 그 기사는 오보였다. 그의 좌익 전력은 인민군 점령 치하에서 연극동맹을 맡은 것이 전부이고, 그 어쩔 수 없는 "부역 행위" 때문에 진주경찰서에 자수해 불기소 처분을 받고 풀려난다. 이병주의 삶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 태평양전쟁, 강제 징병, 해방 공간에서 불거진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 한국전쟁, 부역, 남북 분단, 5.16정변, 필화 사건으로 말미암은 감옥살이 등 수난과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고스란히 끌어안고 있다. 그는 삶의 갈피마다 서려 있는 수난과 질곡의 현대사를 어떤 식으로든 토해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해방과 6.25를 전후하여 지리산에서는 2만여 명이 죽어갔습니다. 파르티잔과 군경 토벌대인 이들은 대부분 젊은이들이었지요.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든지 간에, 또 파르티잔의 상당수가 잘못 선택한 길을 갔든지 간에 그들의 죽음은 민족과 시대의 관점에서 다시 조명되어야 합니다. 2만여 생명이 죽어간 민족의 비극을 그냥 묻어 둔다는 것은 기록과 문자가 있는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들의 일이 가슴에 호소하는 그 무엇으로 남겨져야 합니다" 1992년 4월 4일치 도하의 신문들은 일제히 한 작가의 타계 소식을 전하고 있다. 마흔네 살의 늦깎이로 작가의 길에 들어선 이래 한 달 평균 2백자 원고지 1천 장, 총 10만여 장의 원고에 단행본 80여 권의 작품을 남기고 갑작스럽게 떠난 작가 이병주의 죽음을 알린 것이다. 그는 "격동의 현대사에 대한 소설적 복원"에 주력한 대형 작가, 투철한 직업 정신으로 일관한, 프로패셔널리즘이 철저하게 몸에 배어 있던 작가다. 생전에 그는 "나는 프로 작가다. 따라서 작품을 많이 써야 하며 어떠한 것도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한편으로 그는 자신의 냉정한 평가대로 혼돈과 미제의 시대를 살면서 "양지 쪽으로만 걷는 인간, 위난(危難)이 저편에서 피해 가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삶은 격동의 현대사 속에 끼어 어쩔 수 없이 시대의 부하를 온몸으로 감당해야만 했고, 그 삶의 안쪽에 고난과 비극의 무늬가 아로새겨질 수밖에 없었다. 이병주는 "한이 많아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이 풀리려면 아직도 멀었다. 그러니까 계속 써야 한다"고 말했다. 타고난 체력과 열정, 박람강기로 무장한 작가였던 그의 죽음은 한국 문학의 부피를 늘려온 보기 드문 대형 작가의 상실이라는 점에서 큰 아쉬움을 남긴다. 이병주는 일제 강점기인 1921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다. 그가 다닌 진주중학은 일제의 조선어 과목 폐지와 일본어 상용, 신사 참배, 창씨개명 강요로 대표되는 식민지 교육 체제 속에서도 저항을 멈추지 않을 만큼 민족주의 정신이 퍼렇게 살아 있던 학교다.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는 식민지 교육에 반발하고 저항하는 학풍 속에서 정신을키운 이병주는 일본 유학을 떠나 메이지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 불문과에 다니던 1944년 학병(學兵)으로 소집되어 중국 쑤저우의 일본군 수송대에 배치된다. 그는 일제 패망 뒤인 1946년 3월 8일 중국 상하이에서 미군의 LST를 타고 한국으로 귀환한다. 경남 하동군 북천면 생가로 돌아와 쉬고 있던 그는 진주농고의 요청으로 영어 교사가 된다. 해방 뒤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진주농고 학생들은좌익인 "학동(學同.학생동맹)"과 우익인 "학련(學聯.학생연맹)"으로 갈려 싸우고 있었고, 교사들도 어느 쪽으로든 기울어 있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병주는 좌우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는다. 일종의 회색인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로 말미암아 "학동"과 "학련" 양쪽에서" 반동 회색 분자"라는 공격을 받기도 한다. 이병주가 미국 뉴욕으로 떠난 것은 1990년 10월 8일의 일이다. 그는 복간되는 신경남일보의 명예 주필 겸 뉴욕지사장의 직함을 받고 조용히 출국한다. 뉴욕의 한국 교포 밀집 지역인 플러싱에 거처를 정한 그는 낮에는 원고를 쓰고저녁에는 시내 곳곳을 산책하며 소일한다. 그가 숨지기 전에 쓰고 있던 소설은 장편 "카리브해"와 야심을 갖고 시작한 역사 실명 소설 "제5공화국"이었다. 건강이 나빠져 1991년 3월 뉴욕에서 돌아와 곧장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에 입원하는데, 그때 그는 폐암 선고를 받는다. 주변에 그 사실을 숨긴 채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작가는 속기사를 소개받기로 한 날, 1992년 4월 3일, 이국 땅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사인은 폐암이었다. 그는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둔 그 순간까지 "써야 될 소설"을 준비한 진정한 프로작가였다. (2002년 한국경제 연재 장석주 시인 평론가)
[장석주의 '한국문단 비사']
13. 소설가 이봉구 -명동서 예술혼 꽃피워 1974년 어느날, "명동백작"이라는 애칭의 소설가 이봉구(李鳳九,1916~1983)가 고혈압으로 쓰러진다. 서울 명동의 오래된 문화적 상징물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그 자리에 증권 회사들이 들어서던 무렵이다. 갑자기 이봉구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면서 문화 예술인들의 명동 시대는 사실상 막을 내린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필하모니며, 크로이체, 티롤, 전원 등의 음악감상실이 곳곳에 건재하고, 예술극장, 카페 떼아뜨르, 창고극장 등에서는 연극이 공연되었다. 한두해 전까지 티롤 등에는 아직 새파랗게 젊었던 황석영, 송영, 조해일 등이 진을 치고 있다가 빠져나가고, 뒤를 이어 서울대학교의 불문과 학생이던 이인성 등 "언어탐구"동인들이 가끔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나 명동은 이제 더 이상 문화예술인들의 것일 수 없었다. 문화 예술인들의 메카이자 주요 활동 무대이던 명동은 신흥 개발 도상국의 젊은 금융인들을 새로운 주인으로 맞아들일 채비를 서둘렀다. 정치라곤 이승만 대통령밖에 없고, 유솜이 한국경제를 대표하고, 구호 물자, 양갈보, 화랑훈장, 검은 상처의 블루스, 바라크, 꿀꿀이죽 뿐이던 시대, 1950년대의 명동은 폐허의 비극적 교회였다. 피난지에서 돌아온 문인들은 구호 물자 속에서 건진 트렌치 코트를 걸치고 초저녁부터 "술취한 실존주의로 절규하고 떠들고 왁자지껄해지는" 밤의 명동을 연출한다. 그들은 "명동의 무너진 건물 사이의 길을 끼고 노천 주점에서 무겁게 취해"갔다고 고은의 "1950년대"는 증언한다. 이즈음 명동에서는 일본인 아내와 헤어진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린 화가 이중섭, 불교에 귀의해 무소유의 사상을 실천하며 주로 다방을 무대로 문학활동을 펼치던 반속반승(半俗半僧)시인 오상순, 특유의 독설과 배짱으로 서울 문단을 진압해버린 동양 고전을 두루 꿰뚫은 괴물청년 김관식 등이 함께 어울린다. 그 시절 은성이라는 대폿집에 들르면 손님도 거의 없는 이른 시각부터 카운터 앞 지정석에 언제나 비품처럼 단정하게 앉아 혼자 술을 마시는 이봉구를 볼 수있었다. 1916년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나 서울 중동중학을 중퇴하고 낙향해 농촌 계몽운동을 벌이던 이봉구가 소설가로 이름을 내미는 것은 1934년 중앙일보에 단편 "출발"을 선보이면서부터다. 얼마 뒤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청강생이 되는데, 그는 이 때 비로소 체계적이고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받는다. 1938년 귀국한 뒤 김광균. 오장환. 서정주 등과 "자오선" 동인으로 시를 쓰며 일제 말기를 묵묵히 견디던 이봉구는 이윽고 소설로 전향해 "광풍객""밤차" 같은 단편들을 발표한다. 해방 뒤 그는 주로 신문사 기자 생활을 하며 작품 활동을 병행한다. 이봉구는 전쟁 뒤 김수영. 김광주. 이진섭. 김광균. 박인환 등과 거의 날마다 명동에서 어울리는데, 그토록 자주 술을 마셔도 취해 흐트러진 모양새는 보인 적이 없었다. "명동백작"이라는 애칭도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는 그의 깨끗하고 단아한 태도 때문에 붙게 된 것이다. 전후의 과장된 허무와 절망감에 젖은 문인들의 술자리는 광태나 추태로 얼룩지는 일이 흔했다. 다만 이봉구가 끼여 있는 술자리는 으레 깨끗하게 끝났다. 그는 술마시는 동안 세 가지 철칙을 준수하도록 동료 문인들에게 요구했다. 첫째, 술자리에서 정치 얘기를 꺼내지 말 것, 둘째, 술자리에서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의 험담을 하지 말 것, 셋째, 술자리에서 돈 꿔달라는 말을 하지 말 것 등이다. 그는 술을 마시되 한 자리에서 석 잔 이상은 마시지 않았다. 이봉구는 생전에 다섯 권의 창작집을 내는데, "명동 20년" "명동" "명동 비 내리다"가 그 가운데 세 권의 제목이다. 고혈압으로 쓰러진 뒤 명동이 빠르게 변모하는 동안 "명동백작"은 수유리 집에서 조용히 투병 생활을 했다. 1983년 1월 29일 이른 11시, 이봉구는 예순일곱의 나이로 삶을 마친다. 그날 명동에는 그의 한 창작집의 제목처럼 스산하게 겨울비가 내린다. (2002년 한국경제 연재 장석주 시인 평론가)
[장석주의 '한국문단 비사']
14. 춘원 이광수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1892~1950)는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서 그만큼 많은 칭찬과 비난을 동시에 받으며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은 달리 찾기 어렵다. 이광수는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김현)다. 그렇지만 한국 문학사는 이광수를 빠뜨리고는 기술될 수 없다. 그가 한국 문학사에 남긴 발자취가 크고도 뚜렷하기 때문이다. 최남선이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서 가족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 데 반해 이광수는 변방의 몰락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스스로 생계를책임지며 세파를 헤쳐나간다. 고아라는 취약하고 불우한 배경 속에서도 춘원은 명민한 머리와 피나는 노력으로 한국 문학의 선구자,민족의 지도자로 우뚝 선다. 그러나 우리 현대 문학사가 낳은 이 걸출한 인물은 동시에 변절자 또는 민족 반역자라는 오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선각자 이광수를 현대문학의 흠 많은 아버지로 갖게 된 것은 우리 현대 문학사에 내장된 불행이다. 1940년대 초엽 어느 겨울날의 일이다. 덕수궁에서 도쿄 유학생들의 미술 전람회가 열렸다. 마침 겨울 방학을 맞아 일본에서 돌아와 서울에 있던 20대 초반의 문학 청년 김춘수(金春洙)는 그 전람회장에 갔다가 뜻밖에 이광수를 만난다. 춘원은 여러 학생에게 둘러싸여 나직한 목소리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키가 큰 춘원에 대한 첫 인상은 까만 테 안경을 낀 점잖고 준수한 신사의 그것이었다. 얼굴 생김새는 동글납작하고 폐를 앓고 있던 터라 안색은 파리한 편이었다. 그 날 김춘수는 몇몇 학생과 함께 효자동에 있던 이광수의 집까지 따라간다. 아내 허영숙의 산부인과 병원에 붙어 있던 춘원의 집 거실에서 차까지 얻어 마시고 문학 이야기를 나누던 김춘수 일행은 정오 사이렌이 울리면서 눈앞에 펼쳐진 충격적인 장면과 맞닥뜨린다. 당시에 일제는 정오 사이렌이 울리면 행인들에게 걸음을 멈추고 그 소리가 멎을때까지 황군(皇軍)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비는 묵도를 올리도록 했다. 그런데 거실에 있던 춘원과 차를 내온 춘원의 딸이 정오 사이렌이 울리자 묵도를 올리는 것이 아닌가! 이광수는 1892년 2월 27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대소과(大小科)에 실패하고 술에 기대어 여생을 탕진하고 있던 이종원의 장남으로 태어난다. 아명은 보경(寶鏡)인데 명치학원 중학부 졸업생 명부에는 이 이름으로 올라 있다. 다섯 살 때 한글과 "천자문"을 깨치고 여덟 살 때에는 "사략" "대학" "중용""맹자" "논어" "고문진보" 등과 같은 동양 고전을 두루 섭렵할만큼 신동이던그는 생계를 돌보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 어린 몸으로 산에 가서 나무를 하거나 궐련초를 팔아 학비를 보태며 서당에 다녔다. 열 살 나던 해 나라에 창궐한 호열자로 부모를 한꺼번에 여의고 갑작스럽게 고아가 된 소년 이광수는 절망감에 휩싸여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제 운명에 드리워진 불행의 그림자에 치를 떨던 소년은 사당에 불을 질러 홍패(紅牌). 문적(文籍). 위패(位牌)등을 태워버린 뒤 고향을 버린다. 이윽고 외가와 재당숙 집 등을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던 그가 한 접주의 인도로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지대도덕(保國安民之大道德)이라는 이념에 감명을 받아 동학에 입도한 것은 1903년경이다. 교도가 된 그는 정주 지방 동학도 박찬병 대령의 집에서 기숙하며 도쿄와 서울에서 오는 문서를 베껴 배포하는 서기 노릇을 한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한층 심해진 동학에 대한 압박을 피하여 서울로 온 이 숙한 천재는 일진회와 접하며 개화 사상에 눈을 뜬다. 그는 삭발을 하고 "일어 독학"을 암송하는 식으로 혼자 일본어를 익혀 일진회가세운 광무학교의 전신인 소공동학교에서 잠시 일본어 교사 노릇을 한다. 곧 광무학교가 정식으로 설립되자 이번에는 학생 신분으로 일본어와 산술을 다시 배운다. 교사이자 학생 신분으로 지낸 광무학교 시절의 경험은 이광수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1905년 8월 일진회의 유학생으로 뽑혀 일본 유학길에 오른 그는 이듬해 메이지학원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학한다. 이 시기에 이광수와 더불어 20세기초 조선의 삼대천재라고 일컬어지는 최남선. 홍명희 등과 교유하며 문학 이야기를 나눈다. 어느 날 도쿄에 들른 도산 안창호의 강연을 듣고 깊이 감동한 이광수는 이 때부터 기독교에 관심을 가진다. 1907년 최남선이 서울로 돌아간 뒤 그는 톨스토이. 이런 등의 작품을 읽으며 서구의 문예 사조에 심취한다. 또 홍명희. 문일평 등과 함께 소년회를 만들어 회람지 "소년"을 펴내고 여기에 시와 논설을 싣는다. 1909년에는 장편 "노예(奴隸)"를 쓰고 얼마 뒤에는 메이지학원의 동창회보 "백금학보"에 일어로 발표한 "사랑인가"가 일본 잡지에 실린다. 이로써 이광수는 재일 유학생 사이에 문사로 꽤 알려지게 된다. 메이지학원 중학부를 졸업하고 다이이치고등 예과에 합격하여 입학 준비를 하던 1910년 초 부모가 죽은 뒤 누이동생을 돌봐주고 어려운 살림에 학비까지 보태주던 조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는다. 조국에 돌아온 이광수는 곧 상경하여 신문관의 최남선을 찾는데 두 사람은 날 새는 줄 모르고 그동안 쌓인 정치와 문학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그러고서 곧 "소년"에 단편 "어린 희생"과 "헌신자"를, "대한흥학보"에는 단편 "무정"과 평론 "문학의 가치"를 싣는다. 또 그는 3월과 4월에 걸쳐 "대한흥학보"에 어린 몸으로 시집가서 남편과 시부모에게 구박을 받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자살하고 마는 조혼에 희생당한 구식여성 문제를 다룬 단편 "무정"을 싣는다. 조부상을 치른 이광수는 오산학교 설립자인 이승훈의 초청으로 교편을 잡으며 둥지를 트는데 8월 들어 "소년"지에 장사를 하여 모은 돈으로 교육사업에 헌신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헌신자"를 발표한다. 그러고는 실제로 오산학교에서 야학을 열어 계몽운동을 벌이던 중 8월 29일 비운의 한.일합방 소식을 듣는다. 이광수는 망명 도중 오산에 들른 신채호와 만나게 되고 최남선과는 "조선 역사" 5부작을 계획한다. 1911년에는 이승훈이 105인 사건으로 구속되자 학감으로 취임해 오산학교를 실질적으로 책임을 떠맡는다. 기독교계인 이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생물 진화론과 톨스토이를 가르친 것이 빌미가 되어 선교 교사와 의견 충돌이 일어나고 이로 말미암아 4년만에 교직에서스스로 물러난다. 1915년 그는 최남선과 인촌 김성수의 독려로 9월 일본 와세다대학 고등예과 2학기에 편입하여 다음해 7월에 졸업한다. 이어서 1917년 3월에 같은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는데 이광수 이후로 이 학교의 영어 강독 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사람이 거의 없다고 알려질 만큼 뛰어난 성적을 올린다. 그렇다고 학업에만 매달린 것이 아니라 틈틈이 "대한매일신보"에 계몽적 소설이나 논문을 게재하는가 하면 조선학회의 월례회에서 "우리 민족성 연구" 같은 학술논문을 발표하기도 한다. 1916년 12월 일본에서 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있던 그에게 대한매일신보사로부터 전보 한 통이 날아든다. 신년 연재 소설을 청탁받은 것이다. 이광수는 이미 써둔 원고 "영채(英彩)"를 다듬어 새 제목을 달아 서울로 보낸다. 이것이 1917년 정월 초하룻날부터 "대한매일신보"를 화려하게 장식한 장편 연재소설 "무정"이다.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은 "무정"이 같은 해 6월 1백26회로 끝나자 그는 소설 집필에 한층 더 박차를 가한다. 7월 "청춘"에 단편 "어린 벗에게"를, "매일신보"에 장편 "개척자"를 이듬해 3월까지 연재하고 단편 "윤광호"도 곁들여 발표한다. 1918년 7월 와세다대학 철학과 2학년 학기말 시험에서 그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진급한다. 그런데 이광수는 이것으로 학업을 접게 된다. 한 여자와 베이징으로 애정 행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이미 그는 1910년 고향 정주에서 중매로 결혼을 한 몸이었다. 그러나 애정이 없어 겉돌던 차에 유학 생활로 더욱 아내와 멀어지고 결국 1918년 9월에 이혼을 하기에 이른다. 1919년 독립 선언서 작성에 가담한 이광수는 이를 전달하기 위하여 상하이에 간다. 상하이에서 그는 임시 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주필을 맡아 3.1 독립선언을"차이나 프레스"와 "데일리 뉴스"에 보내는 등 우리나라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리는 데 앞장선다. 1920년에는 흥사단의 임시 반장이 되어 안창호. 주요한 등과도 일하는데 이때 허영숙이 찾아와 잠시 임시정부 내에 파문을 일으킨다. 두 사람은 1921년 5월에 정식으로 결혼하여 당수동에 보금자리를 꾸민다. 두 사람은 한때 애정이 두터워 2남 2녀의 자녀를 두지만 해방 뒤인 1946년 5월에 이혼하게 된다. 종학원에서 철학과 윤리학을,경성학교와 경신학교 등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이광수는 1922년 5월 갑자기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한다. 이 논문에서 그는 우리 나라가 쇠퇴한 까닭은 타락한 민족성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 민족의 속성으로 허위와 비사회적 이기심,무신(無信)과 겁나(怯懦)와나타(懶惰),사회성 결여 등을 꼽는다. 그러면서 이러한 민족성을 개조해야만 우리 민족이 살아날 수 있다는 이론을 펼친다. 이 논문이 발표되자 문단과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쳐서 개벽사는 사무실 집기가 파손되는 등 호된 곤욕을 치른다. 대여섯 명의 열혈 청년들이 한꺼번에 춘원의 거처로 난입해 민족을 모욕한 죄를 물어 죽인다고 협박까지 하기도 했다. 1926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1934년 조선일보 부사장까지 지내는 동안에 그는 "재생""마의 태자""단종 애사""흙"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서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어느 정도 회복한다. 그러나 1934년에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 두 번째 아내 허영숙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그가 몹시도 사랑하던 일곱살박이 아들 봉근이 병으로 죽은 것이다. 게다가 수양동우회를 이끌던 도산 안창호의 장기 투옥은 그의 마음을 더욱 황폐하게 만든다. 1937년에는 이광수 자신이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5년의 징역을 선고받는다.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나 이듬해 병 보석으로 풀려난다. 1939년 5월 몸을 추슬러 "세종대왕"의 집필에 들어갈 무렵 그는 일제의 권유로 박영희. 임학수. 김동인과 함께 친일의 대열에 합류한다. 이광수는 차츰 적극적으로 친일 노선을 걷는데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김용제, 최재서, 김기진 등과 문인보국회를 조직하는가 하면 이성근. 김연수. 최남선 등과 함께 도쿄에 파견되어 조선 유학생을 상대로 학병 지원 권유 강연에도 나선다. 일찍이 재일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 때 문안을 기초하고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 주필까지 지낸 춘원 이광수의 변절은 많은 사람에게 실망과 함께 분노와 배신감을 안긴다. 그는 자신의 친일 행각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내가 조선신궁에 가서 절하고 카야마 미쓰로로 이름을 고친 날 나는 벌써 훼절한 사람이었다. 전쟁 중에 내가 천황을 부르고 내선일체를 부른 것은 일시 조선 민족에 내릴 듯한 화단을 조금이라도 돌리고자 한 것이지마는 그러한 목적으로 살아 있어 움직인 것이지마는, 이제 민족이 일본의 기반을 벗은 이상 나는 더 말할 필요도 안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나의 고백"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매우 모호한 논리로 자기 변명을 하고 있는데 그가 뼈저리게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해 반성했던 것 같지는 않다. 1950년 태양신문에 장편 "서울"을 연재하던 도중 6.25를 맞는데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 그는 7월 12일 인민군에 의하여 납북된다. 이광수가 북에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수십 년이 지나서야 알려진다. 강계에서 30여 떨어진 산악 지대의 강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그는 병약한 몸에 심한 동상까지 걸린다. 사경을 헤매던 그는 나중에 북한 부수상까지 지내는 홍명희의 도움으로 만포의 한 병원에 있다가 1950년 10월 25일 숨을 거둔다. 1970년대 들어 북한 당국은 그의 무덤을 평양으로 옮기고 비석을 세우는 것으로 조선 현대문학의 개척자를 예우한다. (2002년 한국경제 연재 장석주 시인 평론가)
[작가와 문학사이]
15. 김선우-스스로 충만한 아름다움
1990년대 중반의 어느 날. 만취한 여자 하나 밤거리에서 비틀대고 있었다. 몸 가누지 못하고 기어이 쓰러져 머리가 깨졌다. 길바닥에 드러누워 피 흘리던 그녀, 헤실헤실 웃으면서 말한다. “아아 상쾌해.”(‘헤모글로빈, 알코올, 머리칼’) 80년대는 “격렬한 외상의 날들”이었으나 90년대는 “우울한 내상의 날들”이었다. 한 시절은 속절없이 저물고 함께 꾸던 꿈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이제는 몸 상할 일 없어 좋겠구나 했는데 꿈 없는 세상이 끔찍해 마음은 속에서 곪아갔다. 그러니 아시겠는가, 무엇이 그녀를 쓰러뜨렸는지. 취중난동은 자해공갈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김선우, 1970년에 태어나 1996년에 시인이 되었다.
그녀가 여성성의 매혹과 위력을 새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그녀의 머리 미처 성할 날 없었을 것이다.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왔습니다/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벌 나비를 생각해야만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얼레지는 얼레지/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얼레지’)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다. 타자(남성)의 시선을 바라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유롭게 자족하는 아름다움이다. 원한의 여성주의가 아니라 긍정의 여성주의다. 꽃을 여성의 생식기와 포개었던 화가 조지아 오키프 생각도 난다. 특히 “얼레지는 얼레지”가 이 시를 어여삐 들어올린다. 힘 있는 것들이 발설하는 자기확인의 동어반복은 역겹지만 겨우 존재하는 것들의 자기확인은 당당하다. 이 시인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분별 자체를 해체하는 길 말고 여성의 고유성을 더욱 보듬는 길을 택했다. 이를테면 “그냥 두세요 어머니, 아름다워요”(‘어라연’)라고 말하는 긍정의 길이다.
제 안의 여성(어미)됨에 지극한 이라면 고통 없이는 볼 수 없는 사태들이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 나를 꽃 피워주세요/당신의 몸 깊은 곳 오래도록 유전해온/검고 끈적한 이 핏방울/이 몸으로 인해 더러운 전쟁이 그치지 않아요/탐욕이 탐욕을 불러요 탐욕하는 자의 눈 앞에/무용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무력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찢겨져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하는/어머니, 당신의 혈관으로 화염이 번져요.”(‘피어라, 석유!’)
2003년 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 ‘검은 피’에 굶주린 이들 앞에서 어머니-대지는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했다. 화자-석유는 제 자신이 차라리 ‘무용한 꽃’이거나 ‘무력한 꽃’이기를 바란다. 안쓰러운 반전시위다. 둘 다 꽃을 노래하고 있지만, ‘얼레지’의 관능과 ‘석유-꽃’의 절규 사이의 거리는 멀다. 애틋한 긍정에서 애절한 부정까지의 이 거리가 바로 김선우 시의 넓이다. 이 화력(花力)의 시학을 세간에서는 에코-페미니즘(생태-여성주의)이라고도 한다. 어떻게 그 꽃들의 산파가 될 것인가.
거름을 줘야 한다. 시인은 어렸을 적 파밭 밭둑에 똥 한 무더기 누고는 밭고랑에 던져놓고 오기도 하였다(‘양변기 위에서’). “뜨듯한 흙냄새와 시원한 바람 속에 엉덩이 내놓은”(‘오동나무의 웃음소리’) 채로 오줌을 누기도 하였다. (뒤의 시를 아껴 읽은 소설가 천운영은 언젠가 이 시인을 만나면 꼭 한번 함께 오줌을 누리라 다짐한다. 마침내 시인을 만난 소설가, 통음난무 끝에 얼추 목표달성 했다는 후문.) 건강하고 생생하다. 꽃의 시들이 한바탕 피고 나면 똥오줌의 시들이 능청스럽게 거름을 뿌린다. 그 위에서 다시 꽃은 피리라. 이것이 김선우 시의 선순환(善循環)이다.
세상의 꽃은 세상의 칼을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그 백전백패의 아름다움만이 서정의 본진(本陣)이고 문명의 배수진이다. 혹여나 그녀 시의 아름다움을 많이 배운 여자의 우아한 성정 탓이라 할 텐가. 모 일간지에 띄엄띄엄 실린 그녀의 세설(世說)들을 읽으면 모진 말 쉽게 못할 것이다. 세상의 낮은 곳으로 퍼져 흐르는 연대(連帶)의 향기가 거기에 있다. 내처 기다려 보라. 곧 나올 그녀의 세번째 시집은 아마도 자신이 꽃임을 잊어버린 이 시대의 슬픈 여성들에게 바쳐질 것이다. 피어라, 꽃! -〈신형철|문학평론가〉-
[작가와 문학사이
16. 진은영-청신한 몸·유연한 머리의 언어
그녀의 첫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2003)은 명품이다. 재료도 고급이고 만듦새도 정통이며 외장도 우아하다. 열혈독자가 많다는 소문이다. 그녀는 나가르주나와 니체를 비교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철학도이기도 하다. 그녀가 철학적인 시를 쓰고 시적인 철학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게 있다는 생각은 거의 오해에 가깝다. 반쯤은 호메로스이고 반쯤은 플라톤인 사람은 호메로스도 플라톤도 되지 못한다. 시는 시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때 철학의 문으로 나올 수 있고, 철학은 철학의 계단을 더 높이 올라갈 때 시의 문으로 나올 수 있다. 횔덜린의 시와 하이데거의 철학이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 단호히 제 길을 갈 때 그 둘은 궁극에서 만난다. 시인 진은영은 시만 생각한다.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슬픔/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자본주의/형형색색의 어둠 혹은/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문학/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시인의 독백/“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혁명/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가로등 밑에서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전문)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서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묻는다. 시란 무엇입니까. 시인 왈, 시는 메타포다. 시 조갈증에 걸린 우편배달부에게 이 시를 처방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이 시는 고급 메타포의 일대 향연이다. 무릇 메타포는 수혈(輸血)이다. 봄 슬픔 자본주의 문학 시인 혁명 시 등과 같은 혼수상태의 단어들이 젊은 피를 받아 막 살아난다. 뛰어난 메타포는 감각의 문으로 들어가 사유의 문으로 나온다. 특히 ‘혁명’을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로 혹은 “가로등 밑에서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로 규정한 대목은 곱씹을수록 아득해진다. 사유를 건너 뛴 감각은 가슴만 물들이지만 사유를 관통한 감각은 머리까지 흔든다. 그녀의 좋은 시들이 대개 그러하다.
혹자는 그녀를 최승자의 후계자라 칭한다.(시인 김정환의 말대로라면 이 후계책봉은 어느 술자리에서 최승자 본인의 기꺼운 재가를 이미 받았다고 한다.) 최승자가 누구인가? 한국 여성시의 발성법을 혁신한 시인이다. 발명이라고 해도 좋다. 최승자의 언어는 격렬한 액체의 언어다. 그녀는 시에서 오줌 싸고 똥 누고 생리혈을 흘린 최초의 여성이었다. 생의 막장에서 자존심 내던지고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청파동을 기억하는가’) 너에게 가겠다고 매달리는 여자의 발화다. 참혹하고 두렵고 아름답다. 이 몸의 언어가 머리의 언어와 연동해 지진을 일으킬 때 그녀의 시는 더욱 위력적이었다. 역사·정치·문명의 허위를 사유하는 강인한 지성이 또한 그녀의 것이었다. 덕분에 ‘여류’라는 수상쩍은 말이 척결될 수 있었다.
“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죽을 때까지 기억난다”(‘서른 살’)는 식의 발성은 확실히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서른 살은 온다”(‘삼십세’)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 데가 있다. 더 깊이 앓는 몸과 더 깊이 사유하는 머리가 최승자 이후에 없지 않았으나 그 둘의 뜨거운 합선(合線)은 이후에도 드물었다. 후계 운운하는 사람들의 저의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젊은 시인이 몸의 언어와 머리의 언어 모두에 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자신이 사숙한 선배와는 또 달라 보인다. 덜 뜨겁지만 더 청신한 몸의 언어, 덜 치열하지만 더 유연한 머리의 언어가 그녀의 것이다. 그 차이가 더 소중하다. 그녀는 그녀만의 또 다른 혁신으로 선배에게 진 빚을 탕감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두 번째 시집이 나올 때가 되었는데 소식이 없다. 시인은 시만 생각하지 말고 기다리는 사람 생각도 해야 한다.
〈신형철|문학평론가〉
[작가와 문학사이]
17. 문태준
1970년에 태어나 1994년에 시인이 되었다. 세 권의 시집을 펴냈고 여섯 개의 문학상을 받았다. 받은 상보다 받지 않은 상을 헤아리는 것이 빠르다. 그래서 혹자는 ‘문사마의 시대’라고 했다. 욘사마만큼 인기 있겠는가마는 욘사마만큼 노곤할 일도 많겠다. 소설가 김연수와 김중혁이 그의 고교동창이다. 김연수가 도서관 타입이고 김중혁이 박물관 타입이라면 문태준은 마을회관 타입이다. 최근 주목 받고 있는 젊은 시인들이 ‘고양이’과라면 그는 비슷한 연배인데도 ‘소’과에 가깝다. 그는 소처럼 ‘마실’ 다니며 끔뻑끔뻑 쓴다. 그런데 그게 너무 아름답다.
멀게는 백석, 가깝게는 장석남과 시적 혈연관계다. 그는 서정시 가문의 적자다. 서정시는 아름다운 말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말을 아름답게 쓰는 것이다. 어떤 말이 팽팽한 긴장을 품어 읽는 이를 한동안 붙들어 맨다는 것이다. 한 단어를 공용사전에서 구출해 개인사전에 등록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수런거리다’나 ‘뒤란’ 같은 말들이 그렇다. 첫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이후 이 말들은 시인 문태준의 인질이 되었다. 인질이 인질범을 사랑하듯 이 말들은 이제 문태준만을 사랑한다. ‘맨발’과 ‘가재미’를 거치면서 그런 말들 점점 많아졌다.
부럽다. 자신의 마음을 ‘뒤란에서 수런거리는’ 것들에게 몽땅 내주는 방심(放心)이 먼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그런 것들의 존재를 혼신으로 호명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어떤 것들이 단지 ‘있다’는 사실만을 지극하게 기록한다. 깨달음의 발설을 자제하고, 감탄문이나 느낌표를 아낀다. 혹은 그럴 때 아름다워진다. 출석을 부르는 시간만큼은 모든 학생들이 평등해지듯, 그가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다’고 그 존재를 호명해 줄 때 만물은 서정적 사해동포주의로 느릿느릿 물든다.
그가 ‘나’를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감응하고 해석하고 교설하는 ‘나’가 겸손하다. “낮과 밤과 새벽에 쓴 시도 그대들에게서 얻어온 것이다”라고 그는 썼다. 이런 겸허함은 서정시를 쓰는 시인들의 습관 같은 것이라 감동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의 시가 실제로도 그렇게 씌어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일은 감동적이다. 시를 대하는 태도와 시를 쓰는 원리가 일치하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가 시를 얻어온 ‘그대들’의 목록은 다채롭지만 특히 ‘나무’에 진 빚이 커 보인다.
“내가 다시 호두나무에게 돌아온 날, 애기집을 들어낸 여자처럼 호두나무가 서 있어서 가슴속이 처연해졌다.”(‘호두나무와의 사랑’) “아픈 아이를 끝내 놓친 젊은 여자의 흐느낌이 들리는 나무다(…) 바라보면 참회가 많아지는 나무다.”(‘개복숭아나무’) “꽃에서 갓난 아가 살갗 냄새가 난다/젖이 불은 매화나무가 넋을 놓고 앉아 있다.”(‘매화나무의 해산’) 세 권의 시집에서 한 편씩 골랐다. 모아놓고 보니 꽤나 닮아있다.
이 세 편의 시에서 그의 근본 중 하나를 짐작한다. 그의 시는 여자를 슬퍼하는 남자의 시다. 그는 나무에게서 하필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 아이를 잃은 여자, 아이를 낳은 여자를 본다. 이 여자들은 어머니라기보다는 출가한 누이에 가깝고, 시인은 고단한 그녀들 앞에서 조용히 아파한다. 혹자는 그의 시에서 장자(長子) 의식을 읽어냈다. 나는 차라리 철든 막내를 볼 때 누나들이 느끼는 애처로움 같은 것을 느낀다. 그는 따뜻하고 슬프다. 이를 자비(慈悲)라 한다. 그는 불교방송 프로듀서다.
몰인정의 시대에 그의 시는 갸륵하다. 그의 다정(多情) 때문이다. 이조년은 “다정도 병인 양하여”라 했다. 병 맞다. 이를 다정증이라 부르려 한다. 문태준은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다정증 환자다. 이 환자가 우리 딱한 정상인들의 가슴을 찌른다. 저 환자의 눈에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휑하고 빤한 인생일까 싶어진다. 그래서 돌연 아연하여 옷매무새를 가다듬게 되는 것이다. 서정시란 그런 것이다. 언제 그 맥이 끊어질지 모를 이 소중한 환후(患候)를 우리는 아껴 기린다. 그는 낫지 말아라. 그래야 우리도 산다. 〈신형철|문학평론가〉
18.<김선우 시인, 비평가를 비평하다>
"탈주체 담론이 검열체계로 작동"
(서울=연합뉴스) 이준삼 기자 = "시 비평을 읽는 일이 시인들에게 생산적인 자극이 되지 않으니 시인들이 비평을 찾아 읽을 이유가 없어진다."
시인의 입장에서 비평가들을 비판한 김선우 시인의 글이 계간 문예지 '실천문학' 봄호를 통해 소개됐다. 제목은 '손가락이여 심장들이여, 어떻게 이 고양이를 살리죠?'.
김씨는 이 글을 통해 현재 비평가들이 작품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비평글의 형식적 완성을 위해"서라거나 "비판을 위한 섣부른 비판으로 시 작품들을 난도질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표적인 예로 현대 문학작품들의 분석도구로 자주 쓰이는 '탈주체의 담론'을 들었다.
그는 "시인이 읽어도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시에 붙어 다니는 '탈주체' 운운하는 소리들이 기표를 달리할 뿐 구ㆍ신세대를 가르는 빨간딱지같이 붙어다닌다"며 '탈주체'라는 담론이 시단에서 '검열 체계'로 작동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근대 주체 중심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로서 나타난 '탈주체' 개념이 문학에 적용되면서 도그마로 전락하고 있다는 느낌"이라며 "그간 전개된 비평들은 현란한 관념성에 치우쳐 있거나 애매한 추상성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상 등의 시인을 볼 때 "(탈주체성을 띤) 새로운 어법의 시들이 출현한 것도 그리 새로운 일만은 아니다"며 "유독 오늘날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새로움이 마치 미래 시문학의 대안인 것처럼 거론되는 과잉 담론화가 진행 중"이라고 덧붙였다.
글의 결론부분에서 그는 "좋은 글(비평)의 공통 분모에는 일차 질료인 작품에 대한 애정이 깃들어 있다"며 "시와 시인에 대한 애정을 결여한 비평은 어떤 논리와 수사로 무장해도 활검이 되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19. [상처가 예술을 낳는다] 시인 이성복
상처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용의 피를 뒤집어쓰고 철갑영웅이 된 지그프리드나 어떤 칼도 뚫을 수 없던 헤라클레스도 마음의 상처를 이길 수는 없었다. 살아 있기에 상처를 입는다. 독일 여성 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살아 있다는 것은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말이다”라고 했다.
상처는 인생의 보물이면서, 또 극약이다. 상처에 굴복하느냐, 상처를 딛고 이겨내느냐가 문제다. 특히 예술가들은 상처 입은 영혼들이다. 상처를 문학과 예술로 승화한 이들이다. 상처를 인생의 전기로, 또 삶의 또 다른 목적으로 이룬 문학·예술인들. 그들의 삶과 예술 속의 상처이야기를 격주로 소개한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다’(시 ‘그날’ 중에서).
시인 이성복은 ‘우리 몸 어딘가가 썩어 들어가는데도 아프지 않다면, 이보다 더 난처한 일이 있을까?’라고 했다. 상처를 얘기하면서 시인 이성복(56)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20대에 쓴 절절한 시편의 성찬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이하 ‘뒹구는 돌’)는 벌겋게 곪아 벌어진 상처를 손톱으로 후벼 파는 듯한 시어로 가득 차 있다. ‘내 구두발에 짓이겨',‘엄마, 내 가려운 몸을 구워 줘, 두려워',‘소리 질렀다. 죽여 버릴테야',‘아버지, 아버지! 내가 네 아버지냐’... .
사회가 만들어낼 수 있는 상처 생산력의 극점을 달리던 1980년. 그의 시집은 현실의 폭력성과 일그러진 가족사를 칼 끝 같은 분노로 헤집으며 독자의 공감을 얻었다. 그의 이 지독한 아픔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한 평 반 남짓한 작업실에서 만난 시인은 무척 고단해 보였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책이 머리맡에 놓여 있고, 작은 전기히터만 힘겹게 찬 공기를 데워주고 있었다. 그는 “시는 상처받은 것들에게 올리는 제사”라고 했다. 그렇게 보면 첫 시집 ‘뒹구는 돌’과 두 번째 ‘남해 금산’은 그 제사상의 헌주고 헌사이다.
그는 초기 시집의 상처 이미지는 “집단적 상처가 내면화된 것”일뿐, 나의 개인적 상처는 아니었다고 했다. 그러면 아버지에게 쏟아내는 독설과 어머니에 대한 연민, 누이와 형에 대한 훼손된 감정은 뭐란 말인가.
시인은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영민하고 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떼를 써 서울로 유학을 갔다. 가난해도 궁핍할 정도는 아니었고, 부모님도 사려 깊고 온화했다. 시 속에 보이는 폭력 이미지와는 판이했다.
실제 아버지는 시 속의 인물처럼 증오의 대상이거나, 상처를 준 장본인이 아니었다. 그는 “사회적 폭력이 가족사로 구조화된 것”이라며 자신은 “사회를 투영하는 하나의 공명통일 뿐”이었다고 했다. 가족사로 사회의 폭력성을 은유했던 카프카적인 해석인 셈이다.
그의 시 때문에 아버지가 고통을 많이 받았다. ‘그해 가을’에는 ‘아버지, 아버지···X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라는 극단적 표현이 있다.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에게 뱉는 욕설로 들리지만, 사실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말이라고 풀이했다. “중간에 끊어 줘야 되는데... 아버지한테 굉장히 미안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 했다.
그러면 그의 상처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상처야 많지. 겨울날 살얼음 낀 웅덩이의 물도, 추운 날 수족관 속 도다리도 상처라면 상처지”라고 입을 뗐다. 그는 “세상에 발 딛고 살아가는 것이 상처”라고 했다. 내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의 불가피성, 원죄에 대한 상처이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잉크 삼아 시 한 줄 쓰는 시인의 결벽증이 엿보이는 해석이다. 우리가 갓 핀 미나리를 보면 저걸 솎아 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라고 생각하는 것마저 상처, “결국 생명을 해치며 살아가는 우리는 상처의 집합체”라는 것이다.
그는 “육식과 초식은 오십보백보”라며 “나는 광합성이 제일 좋아”라며 웃었다. 그가 본 상처의 근원은 보들레르가 말하듯 인간이 근본적으로 어리석고 무감각하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상처도 있지만, 스스로 미성숙해 일어나는 상처, 자기 상처보다 남에게 저지른 상처를 기억하는 자기정화가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상처투성이로 보이는 그의 시 세계는 원죄를 안고 사는 인간의 생명 사이클을 보여주는 듯하다. 아버지(‘뒹구는 돌’)->어머니(‘남해 금산’)->당신(‘그 여름의 끝’)->가족(‘호랑가시나무의 기억’)->사물(‘아, 입이 없는 것들’)로 이어지는 성장기는 심리학자 프로이트와 라캉이 분석한 인간 성장과정과도 닮았다.
초기의 격동은 가라앉고, 성찰적 그리고 영성적 태도로 사물을 쓰다듬는다. 구조적 폭력에 대한 격한 반응도 ‘아, 입이 없는 것들’에선 아버지의 얼굴에 앉은 파리마저 연민의 대상이 된다.(‘파리도 꽤 이쁜 곤충이다’)
그럼에도 근원적 고통은 여전히 그를 옥죄고 있다. 문학적 창작의 고통이다. 문학은 시체공시실의 시체를 덮은 시트를 벗겨 보는 것이다. “누가 보고 싶겠어. 그러나 벗겨 볼 수밖에 없어. 내 눈알이 휙 돌아가더라도...”라고 했다.
상처는 감각의 깊이지, 상처의 중량 때문만은 아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섰기 때문에 누구도 탐낼 수 없던 예수의 상처처럼, 그 상처를 기억하고, 껴안고, 곱씹는 것이 오히려 상처 치유의 지름길일 수 있다.”고 했다. 살아 있기에 상처를 받는다. ‘뒹구는 돌’에서 그는 “상처는 ‘살아 있음’의 동의어이며 ‘살아야겠음’의 경보”라고 후기를 적었다.
논어 등 동양철학에 심취했던 시인이 최근 종교적인 성찰에 기대는 것도 상처를 껴안고, 그래서 ‘살아있음’을 확인하려는 과정은 아닐까. 아직 미발표된 시를 기자에게 음송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퍽 편안해 보였다. 손바닥만 하던 히터의 열기가 그제야 온 방을 가득 채웠다.
Copyrights ⓒ 1995-, 매일신문사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약력
1952년 상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불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1977년 ‘문학과 지성’을 통해 등단했으며 시집 1980년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1986년 ‘남해 금산’, 1990년 ‘그 여름의 끝’, 2003년 ‘아, 입이 없는 것들’을 발표했으며, 김수영문학상과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20. '한 잎의 女子' 오규원 시인 별세
'날(生) 이미지의 시'를 추구하면서 많은 애송시를 남긴 중진시인 오규원 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가 2일 오후 5시10분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66세.
강원도 영월과 경기도 양평 등지에서 요양생활을 했던 고인은 최근 지병인 폐기종이 악화돼 입원했다. 1941년 경남 삼랑진 산. 부산사범학교를 거쳐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했으며 1965년 '현대문학에 '겨울 나그네'를 시작으로 1968년 '몇 개의 현상'이 추천 완료돼 등단했으며 '분명한 사건'(71년)에서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2005년)에 이르기까지 시집 10여권을 출간했다.
고인은 자연에 대한 감각적인 묘사, 언어의 리듬을 통한 이미지 재현, 광고이미지를 비튼 독특한 시세계를 펼쳐보이면서 전통적인 시작법에서 탈피하여 개성 강한 시세계를 보여왔다.
20여년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들을 길러낸 고인은 2002년 회갑 때는 신경숙 함민복 하성란 천운영 장석남 마르시아스 심 등 제자 문인 46명이 <문학을 꿈꾸는 시절>을 기념문집으로 내기도 했다.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등을 받았으며,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문학부문(2003) 수상자로도 선정됐다. 유족으로는 시인이자 방송 다큐작가인 부인 김옥영씨와 2남 1녀가 있다. 발인은 4일 오전. 빈소는 강남 삼성의료원.
한 잎의 女子 1 / 오규원
- 언어는 추억에 걸려 있는 18세기형 모자다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女子, 그 한 잎의 女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女子를 사랑했네. 女子만을 가진 女子, 女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病身 같은 女子, 詩集 같은 女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女子, 그래서 불행한 女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女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女子.
한 잎의 女子 2 / 오규원
- 언어는 겨울날 서울 시가를 흔들며 가는 아내도 타지 않는 전차다
나는 사랑했네 한 女子를 사랑했네. 난장에서 삼천 원 주고 바지를 사입는 女子, 남대문시장에서 자주 스웨터를 사는 女子, 보세가게를 찾아가 블라우스를 이천 원에 사는 女子, 단이 터진 블라우스를 들고 속았다고 웃는 女子, 그 女子를 사랑했네. 순대가 가끔 먹고 싶다는 女子, 라면이 먹고 싶다는 女子, 꿀빵이 먹고 싶다는 女子, 한 달에 한두 번은 극장에 가고 싶다는 女子, 손발이 찬 女子, 그 女子를 사랑했네. 그리고 영혼에도 가끔 브래지어를 하는 女子.
가을에는 스웨터를 자주 걸치는 女子, 추운 날엔 팬티스타킹을 신는 女子, 화가 나면 머리칼을 뎅강 자르는 女子, 팬티만은 백화점에서 사고 싶다는 女子, 쇼핑을 하면 그냥 행복하다는 女子, 실크스카프가 좋다는 女子, 영화를 보면 자주 우는 女子, 아이 하나는 꼭 낳고 싶다는 女子, 더러 멍청해지는 女子, 그 女子를 사랑했네. 그러나 가끔은 한 잎 나뭇잎처럼 위험한 가지 끝에 서서 햇볕을 받는 女子.
한 잎의 女子 3 / 오규원
- 언어는 신의 안방 문고리를 쥐고 흔드는 건방진 나의 폭력이다
내 사랑하는 女子, 지금 창밖에서 태양에 반짝이고 있네. 나는 커피를 마시며 그녀를 보네. 커피 같은 女子, 그레뉼 같은 女子, 모카골드 같은 女子, 창밖의 모든 것은 반짝이며 뒤집히네, 뒤집히며 변하네, 그녀도 뒤집히며 엉덩이가 짝짝이가 되네. 오른쪽 엉덩이가 큰 女子, 내일이면 왼쪽 엉덩이가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女子, 줄거리가 복잡한 女子, 그녀를 나는 사랑했네. 자주 책 속 그녀가 꽂아놓은 한 잎 클로버 같은 女子, 잎이 세 개이기도 하고 네 개이기도 한 女子.
내 사랑하는 女子, 지금 창밖에 있네. 햇빛에는 반짝이는 女子, 비에는 젖거나 우산을 펴는 女子, 바람에는 눕는 女子, 누우면 돌처럼 깜깜한 女子. 창밖의 모두는 태양 밑에서 서 있거나 앉아 있네. 그녀도 앉아 있네. 앉을 때는 두 다리를 하나처럼 붙이는 女子, 가랑이 사이로는 다른 우주와 우주의 별을 잘 보여주지 않는 女子, 앉으면 앉은, 서면 선 女子인 女子, 밖에 있으면 밖인, 안에 있으면 안인 女子, 그녀를 나는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처럼 쬐그만 女子,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