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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구곡(華陽九曲)
화양동계곡은 청주에서 동쪽으로 32km 지점에 위치해 있는데,
조선 숙종 때의거유 (巨儒)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글을 읽으며제자들을 양성하고 세파에 지친 심신을 달래던 곳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주자에 비유했던
송시열은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서 화양동계곡의 볼 만한 곳
아홉군데에 이름을 붙이고화양구곡(華陽九曲)이라 명명 하였다고는 하나
우암의 수제자 수암 권상하(1641~1721)가 화양구곡 각각의 이름을 짓고
단암 민진원(1664~1736)의
글씨로 바위에 구곡의 이름을 새기면서 화양구곡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보통 화양동계곡으로 널리 알려진 화양구곡은 입구부터 차례로 거슬러 올라가며
1곡 경천벽을 시작으로 , 2곡 운영담, 3곡 읍궁암, 4곡 금사담, 5곡 첨성대, 6곡 능운대,
7곡 와룡암, 8곡 학소대, 9곡
파천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며 도명산 자락을 휘돌아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제1곡 : 하늘을 받치고 있는 “경천벽(擎天壁)” ~ 華陽洞門(화양동문)
화양구곡에는 아홉 개의 명승지가 있다. 그 첫 번째인 제1곡은 ‘경천벽(擎天壁)’이다. 경천벽은 화양동 초입에서 오른쪽 계곡 건너 산자락에서 바로 만날 수 있는데, 물가로 가파르게 솟아 있는 바위의 모습이 마치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모습이라 하여 ‘경천벽’이라 한다. 소나무와 어우러진 바위 모습과 하늘로 솟구친 바위 형상이 장관이다.
경천벽 왼쪽 바위 벽면에는 이곳이 화양동 입구임을 알리는 ‘화양동문(華陽洞門)’이라 쓰여진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다. 우암 송시열 글씨로 전해져 온다. 매우 힘이 넘치고 멋진 글씨이다.
‘화양동문’이란 바위글씨가 숨겨져 있는 경천벽은 화양 제1교에서도 보이지만, 그것은 경천벽의 옆모습이므로 그 절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 경천벽의 진면목은 화양동 초입에 제1곡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이곳에서 계곡 쪽으로 내려가 물가에 서서 보아야 한다.
그러나 경천벽은 가로수와 그 주변 나무들 때문에 도로변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또한 대부분의 탐방객들은 경천벽 위쪽에 있는 화양동 주차장까지 차로 이동하기 때문에, 경천벽을 그냥 지나친다. 따라서 경천벽을 보기 위해서는 화양동 입구나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킨 뒤 도보로 이동해야만 한다.
경천벽은 옛부터 시인묵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경천벽을 소재로 한 한시가 많이 남아 있는데, 다음과 같은 시들을 통해 그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경천벽(임상주)♣♣
有壁千丈屹 경천벽이 천 길로 우뚝 솟아
可以擎彼蒼 저 푸른 하늘을 떠받치고 있네.
胡不於中國 어찌 중국보다 못하랴
獨此華之陽 이곳 화양동의 승경이.
中有二帝廟 화양동 가운데 두 황제를 모신 사당이 있으니
是亦一中土 이 역시 하나의 중화의 땅이라네.
天乎勿傾頹 하늘이시여, 기울어져 무너지지 않게 하시어
此壁立萬古 경천벽 영원히 서있게 하소서.
♣♣경천벽(권진응)♣♣
一曲漣漪可泛船 일곡이라, 물결 잔잔하여 배 띄울 만하고
擎天危壁逈臨川 하늘을 떠받든 우뚝한 절벽 개울가에 높이 서 있네.
虹橋北望皇祠近 홍교에서 북쪽을 바라보니 황제 모신 사당이 가까운데
松檜森森鎖翠烟 소나무 회나무 자욱이 푸른 안개에 감싸여 있네.
♣♣(경천벽송흠학)♣♣
一曲層巖繫釣船 일곡이라, 층층 바위에 낚싯배 띄어 놓으니
擎天危壁揷長川 하늘을 치받는 높다란 절벽 긴 시냇가에 솟았네.
洞門長護王春脈 화양동에서 대일통(大一統)2)의 뜻을 오래 지켰는데
俯視塵寰閱劫烟 속세를 굽어보니 안개 자욱이 끼었네.
이렇게 우뚯 솟은 괴암절벽 경천벽은 화양동 입구에서 찾는 이를 반갑게 맞이하며 그들로 하여금 이런저런 생각에 젖게 한다. 더욱이 경천벽을 경계로 화양동 안팎이 나뉘어지니, 화양동 밖은 속세요 안은 중화의 문화가 살아 숨쉬는 문화공간이었다.
이와 같은 경천벽을 지나면 넓은 주차장이 나온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화양동 유람은 이곳부터 도보로 화양구곡을 유람해야만 한다. 그 길은 오솔길로 이어져 있어 걷기에 좋다. 사색하기에도 좋다.
그런데 본격적인 화양구곡 유람에 앞서, 풍류유람객의 발목을 잡는 곳이 있다. 그곳은 화양동 주차장 입구 길옆에 있는 서낭당이다. 서낭당은 전통시대 마을 신앙공간의 중심지로써, 큰 나무나 장승 또는 솟대와 함께 돌무더기 형태로 마을 입구에 있었다. 서낭당은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그곳을 지나는 모든 이들의 안녕과 무사평안을 지켜주던 지킴이었다. 그곳을 지나는 이들은 잠시 발길을 멈추고 작은 돌 하나 올려 놓으면서 무엇인가를 진심으로 간절히 빌곤 하였다. 화양동 서낭당도 그랬었다. 화양동 서낭당도 화양동 마을의 수호신으로서, 지킴이로서 오랜 세월 자기 생명을 지켜 왔었다.
그러나 근대화의 물결이 밀어닥치면서, 화양동 서낭당은 급격히 생명의 위기 속에 그 역할과 기능을 상실해 갔다. 화양동 서낭당의 큰 위기는 한국전쟁과 더불어 밀어닥쳤다. 한국전쟁 때 이곳을 지나던 미군은 탱크가 지나갈 도로를 만들면서 서낭당 돌탑을 무너뜨렸다. 미군에게 있어서 서낭당 돌탑은 단지 돌멩이 그 자체였을 뿐이다.
가슴 아픈 일이다. 그래서 한국전쟁 뒤 마을 주민들은 다시 돌탑을 쌓았다. 그리고 상처받은 돌탑의 생명력을 되살렸다. 매년 정월 보름 전 정성스럽게 서낭제 탑고사를 지냈다. 마을의 평안은 찾아오고 주민들은 오순도순 삶을 영위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위기는 찾아 왔다. 1978년경 국립공원을 정비하면서 기존 마을을 화양동 입구로 강제 이주시킨 것이다. 주민들이 이주한 뒤 서낭당은 빈 마을공간만을 지키게 되었고, 매년 지내던 서낭제도 명맥이 끊긴 채 점점 생명력을 잃어갔다. 그것은 병들어 죽은 돌탑 옆 소나무가 잘 말해주고 있다.
화양동 서낭당은 화양동 신앙공간의 중심공간이자 지킴이였다. 그것을 되살리는 일은 화양동을 생명이 살아 숨쉬는 문화공간으로 만드는데 반드시 필요한 전통문화 복원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2006년에 충북학연구소는 주민들과 함께 지난 20년 동안 명맥이 끊긴 화양동 서낭당의 맥을 잇고자 서낭제를 올렸다.
화양동 서낭제는 매년 정월 열릴 것이며, 그를 통해 화양동 서낭당은 되살아날 것으로 기대한다. 아니, 되살아났다. 지금 화양동 서낭당 돌탑을 휘감고 있는 삼색 새끼줄은 생명의 빛을 발하고 있다. 또한 누군가에 의해 치성을 올린 흔적들은 서낭당에 사람의 혼이 서리고 사람과 하늘과 땅이 하나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제2곡 : 구름 그림자 드리우는 “운영담(雲影潭)”
天光雲影共徘徊(천광운영공배회)
화양구곡의 두 번째 명승지인 제2곡은 ‘운영담(雲影潭)’이다. 화양 제2교를 건너 조금 걸으면 좌측으로 보이는데, 계곡에서 내려온 맑은 물이 못을 이루고 있는 곳이 제2곡인 운영담이다. 물이 너무 맑아 기암절벽의 소나무와 하늘이 한데 어우러진 모습, 그리고 하늘의 구름 그림자가 계곡 물속에 맑게 비친다 하여 ‘운영담’이라 이름 붙여졌다. 혹자는 주자(朱子)가 쓴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라는 시에서 ‘운영’이란 이름을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운영담 암벽 밑에 ‘雲影潭’이란 예서체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곳은 모래사장이 넓게 형성되어 있어 단체놀이나 아이들이 뛰어놀기에 좋은 곳이다.
모래사장을 거닐거나, 앉거나, 서서 주변 경치를 감상할 만하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한시를 음미해보는 것도 운영담 감상법의 하나이다.
♣♣운영담(임상주)♣♣
有潭淸且潔 맑고 깨끗한 운영담
活水源頭來 출렁이는 물이 발원지로부터 흘러오네.
白雲溶溶起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니
其中影徘徊 구름 그림자 연못 가운데 일렁이네.
譬彼君子心 비유하노니, 저 군자의 마음 같이
湛然無塵累 한 점 티없이 맑아라.
終日鏡面開 하루 종일 거울처럼 맑아
水抱朝宗義 물이 조종의 의리를 담고 있네.
♣♣운영담(권진응)♣♣
二曲澄潭抱碧峰 이곡이라, 맑은 못 푸른 봉우리 감싸 안고
天雲終古倒寒容 하늘의 구름 시원스레 자태 언제나 거꾸로 비치네.
高山漠漠靈源秘 높은 산은 막막하고 영험한 발원지는 숨겨져 있는데
流水桃花渺幾重 흐르는 물결에 복숭아꽃 아득히 흘러가네.
♣♣운영담(송흠학)♣♣
二曲晴嵐擁壁峰 이곡이라, 옅은 아지랑이 층암절벽을 감싸고
蘸淵雲影渼天容 연못에 구름 그림자 잠겨 있고 하늘의 모습 물결치네.
方塘尙自淸如許 네모스름한 연못은 아직도 절로 푸른데
何况靈源영氣重 신령스런 발원지엔 영기가 얼마나 많이 뭉쳐있겠는가?
이처럼 옛 시인들은 운영담에서 구름 그림자, 신령스러운 기운, 맑고 깨끗한 정신등을 느끼고 사색하였던 모양이다.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는 아니지만, 운영담은 지나는 유람객의 발길을 멈추게 할 만큼 매력을 지니고 있다. 잠시 운영담의 유혹에 넘어가 물가로 내려가 거닐어보는 것도 좋으리라.
제3곡 : 우암이 목놓아 울던 “읍궁암(泣弓巖)”
읍궁암(泣弓巖)
화양구곡의 세 번째 명승지인 제3곡은 ‘읍궁암(泣弓巖)’이다. 운영담을 지나면 길 양쪽에 긴 사각 돌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下馬所’(하마소)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말 그대로 이곳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야 하는 곳이다.
하마소는 조선시대에 관청이나 향교, 서원 등의 입구에 세워져 있던 이정표이다. 이곳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경계석이기도 하다.
이곳에 하마소가 세워져 있는 것은 화양서원의 입구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말에서 내려 옷깃을 여미고 정숙히 걸어 들어가는 것이 법도인데, 150여년전 흥선대원군이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가 화양서원의 유생들에게 봉변을 당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훗날 흥선대원군은 서원 철폐령을 내려 몇 곳을 제외한 나머지 서원들을 강제로 문을 닫게 했는데, 화양서원도 그때 철폐되었었다.
운영담을 거쳐 하마소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최근 복원한 만동묘와 화양서원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만동묘는 조선이 세계의 중심임을 보여주기 위해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과,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신종 황제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고, 화양서원은 화양동에서 조선 성리학을 집대성한 우암 송시열을 모신 서원으로, 조선왕조의 세계관과 이데올로기 및 학문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화양구곡 제3곡인 읍궁암은 바로 만동묘와 화양서원 정문 앞 계곡에 있다. 만동묘 정문 앞에서 계곡 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오래 된 비석 3기가 서 있고 그 아래 시냇가 옆에 있는 둥글고 넓적한 바위가 읍궁암이다.
화양구곡 각각의 이름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된 이름이지만, 읍궁암만은 우암 송시열의 애절한 사연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읍궁암의 애절한 사연은 지금도 읍궁암 입구에 세워져 있는 3기의 비석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비가 바로 읍궁암비(泣弓巖碑)인데, 비문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先生嘗於孝廟諱日 曉起痛哭於巖上 仍吟一絶 後人號其巖曰泣弓 盖取荊湖故事也 歲丁酉方伯尹公憲柱 謁廟訖大書泣弓三字刻石 視後其誠意至矣 尙夏謹書先生絶句於其末云 此日知何日 孤衷上帝臨 侵晨痛哭後 抱膝更長吟
우암선생께서 일찍이 효종의 휘일에 일어나 바위 위에서 통곡하고 일절을 읊었다. 뒷사람들이 그 바위를 불러 읍궁이라고 하였다. 대개 형호의 고사를 취한 것이다. 정유년 방백 윤헌주가 사당을 참배하고 ‘읍궁암’ 석자를 크게 써서 바위에 새기어 후세에 보이니, 그 진실한 뜻이 지극하다. 권상하가 삼가 선생의 절구를 그 말미에 쓰니, “이 날이 무슨 날인지 아는가. 외로운 충정만 하늘에 닿았도다. 새벽이 되도록 통곡만 하다가, 또 다시 엎드려 무릎 끌어안고 탄식하노라” 라고 하였다.
‘이 날이 무슨 날인지 아는가’. 우암 송시열이 통곡하면서 외친 말이다. 그는 무슨 일로 새벽까지 통곡하고 무릎 끌어안고 탄식한 것인가? 그것은 청나라의 무력침략으로 당한 굴욕적이고 치욕적인 국치를 설욕하기 위해 북벌을 꿈꾸었던 효종대왕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암 송시열은 효종의 제삿날인 5월 4일 새벽 읍궁암 위에 엎드려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고 한다.
1679년(숙종 5) 5월 4일은 효종이 탄생한지 60주년이 되는 해이자 스무 번째 제삿날이다. 이 날도 우암은 새벽에 일어나서 통곡하였는데, 슬픈 마음을 더욱 가눌 수가 없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효종 기일의 감회를 읊다>
湯文比德敢云阿 탕 임금 문왕 같은 덕 감히 아첨이라 하겠는가
千一昌期驗濁河 천재일우 좋은 기회 황하에 시험했네
奉諱廿年還一甲 가신 지 이십 년에 탄생한지 60년이 돌아왔으나
呼天天亦奈吾何 목 놓아 울어봐도 나에게 어찌 하리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호란은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국왕이 삼전도에 나아가 항복을 한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만, 당대 수많은 선비들은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국가의 수모요 치욕으로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아직 아물지 않은 역사의 상흔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는 바는 오직 오랑캐나라에 대한 복수요 국가의 자존심을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오랑캐 정벌을 외친 효종대왕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가셨으니, 조선 선비를 대표하는 우암 송시열의 울분과 슬픔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우암의 제자인 권상하는 ‘그날’을 기억하고자 우암이 목 놓아 울던 바위를 ‘읍궁암’이라 하였다. 이 이름은 중국의 순 임금이 돌아가신 뒤 신하가 활(弓)을 잡고 울었다는 고사(古事)에서 인용한 것이다. 또한 충청도관찰사 윤헌주는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후대에 길이 전하고자 1717년(숙종 43)에 읍궁암비를 세웠는데, 현재의 비는 1725년 이후에 다시 세운 것들이다.
이와 같은 사연을 지닌 읍궁암비를 둘러본 뒤, 시냇가로 내려가 읍궁암에 올라 그날을 생각해본다. 읍궁암은 10여명이 족히 둘러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직한 반석이다. 반석 곳곳에는 둥근 홈이 파져 있는데, 마치 그날 우암 송시열의 눈물이 떨어져 파진 듯하다. 조용히 앉아 그날을 느껴본다.
♣♣읍궁암(임상주)♣♣
吁嗟彼盤石 아! 저 널찍하고 평평한 바위,
云胡名泣弓 어찌 하여 읍궁암이라 이름 했나?
孝廟之諱日 효종임금 제삿날이면
有臣號蒼穹 우암선생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네.
年年是巖上 세월이 지나도 이 바위에는
淚痕磨不磷 눈물 흔적 닳아 없어지지 않았네.
侵晨慟哭語 새벽에 통곡하며 탄식한 말씀,
可以泣鬼神 귀신을 울리겠도다.
♣♣읍궁암(권진응)♣♣
三曲巖如泛壑船 삼곡이라, 바위는 골짜기에 떠있는 배와 같은데
貂裘泣血問何年 담비 갖옷 입고 피눈물 흘리기 몇 년인가?
君民大計空遺廟 임금과 백성의 큰 계획 만동묘에 남아 있으니
社宇聲聲聽可憐 만동묘에 통곡하는 소리 가련하네.
♣♣읍궁암(송흠학)♣♣
三曲穹巖似跨船 삼곡이라 읍궁암은 걸터앉은 배와 같은데
攀躋長憶泣弓年 올라가서 한참을 통곡하시던 그날을 생각해보네.
窮山血痕從誰灑 깊은 산에 혈흔(血痕) 누가 뿌려 놓았나?
惟有河西曠世憐 오직 시내 서쪽에 남아 오랜 세월 가련하네.
이들 시를 통해서 읍궁암에 앉아 통곡하는 우암의 모습이 눈에 스치는 듯 하다. 효종의 죽음과 북벌의 좌절, 그것은 우암에게 있어서 참으로 애통하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시냇가에 떠 있는 배와 같은 읍궁암, 그곳에 올라 잠시 그날을 생각해본다.
제4곡 : 맑되 맑은 “금사담(金沙潭)”
忠孝節義(충효절의)
蒼梧雲斷 武夷山空(창오운단 무이산공)
華陽水石 大明乾坤(화양수석 대명건곤)
화양구곡의 네 번째 명승지인 제4곡은 ‘금사담(金沙潭)’이다. 금사담은 화양구곡 가운데에서 유람객들이 가장 많이 쉬었다 가는 곳으로 화양구곡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곳이다. 이름처럼 반짝이는 금빛 모래가 물속에 깔려있는 곳으로, 넓은 바위가 많아서 유람객들의 쉼터가 되어주는 곳이다.
금사담 위쪽으로 작은 다리를 건너면 맞은편 암벽 위에 우암 송시열이 정자로 사용했던 암서재가 노송과 함께 어우러져 있으며, 곳곳에 새겨져 있는 바위글씨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암은 자신이 거처하던 초당과 암서재를 조그만 배로 오가며 풍류를 즐기곤 하였다고 한다.
금사담은 주변 경관이 빼어나 유람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는데, 이곳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눈여겨 보아야 한다.
첫 번째의 금사담 감상 포인트는 바위에 새겨진 글씨들이다. 암서재 입구 왼쪽 암벽에는 명나라 태조의 글씨로 1913년에 새긴 ‘忠孝節義(충효절의)’와, ‘蒼梧雲斷 武夷山空(창오운단 무이산공)’이란 글씨가 힘차게 새겨져 있다. 또 암서재 앞 넓은 바위 위에는 ‘華陽水石 大明乾坤(화양수석 대명건곤)’이란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자세한 내용은 바위글씨 참조). 그밖에 암서재 주변에는 누군인지 알 수 없는 이름 석자가 새겨져 있어 인생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두 번째의 금사담 감상 포인트는 암서재에 올라 주변 경관을 감상하고 우암을 느껴보는 일이다. 암서재에는 우암이 중국 주자의 운곡정사(雲谷精舍)를 본따서 1669년(현종 10) 12월에 쓴 시가 걸려 있다. 우암과 암서재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하는 시이다(앞 장의 ‘암서재’ 참조).
세 번째의 금사담 감상 포인트는 조선후기 많은 선비와 시인묵객들이 그랬던 것처럼 암서재 옆 산길을 따라 지금의 채운사에 오르는 정취이다. 암서재에서 채운사에 오르는 산길은 정감이 있을 뿐 아니라, 채운사 절집과 그곳에서 바라보는 산세가 참 좋다.
채운사가 현재 위치하고 있는 곳은 본래 환장암이 있던 자리였다(앞 장의 ‘환장암’ 참조). 지금은 채운사의 대웅전과 산신각∙요사채만 단아하게 있을 뿐, 이곳이 18~19세기 2백년 넘게 조선중화주의를 상징하는 환장암이 있었던 곳이란 흔적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운한각이 있었던 큰 바위 위에는 요사채가 자리잡고 있고 공운루가 있었던 자리는 밭으로 변한 채, 단지 대웅전과 산신각과 같은 사찰 전각만이 스님이 지키던 환장암의 모습을 느끼게 할 뿐이다.
환장암 대신 채운사가 자리잡은 내력은 채운사 안내문이 다소나마 궁금증을 풀어준다. 채운사는 자신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채운사 약사
이곳 채운사는 원래 앞에 보이는 첨성대 안쪽 계곡에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7백여년전 고려 충열왕 3년(1277)에 도일선사가 창건하였으며 사명은 수도암이라 칭하였다. 그후 광해군 2년 혜식선사가 중창하고 채운암이라 개칭하였다. 또한 현 위치에는 3백여년전 효종 4년(1655)에 혜일선사가 환장사를 창건하였다. 그후 한말 왜병들의 침입을 당하여 많은 건물들이 볼타 전소되고 본당 대웅전만 보전되어 오던 중 건너편에 있던 채운암이 30여년 전 무자년(1948)에 큰 홍수가 나서 산사태로 파괴되자 그 요사채 일부를 이곳에 옮겨 환장사와 채운암을 합쳐 증축하고 채운사로 통칭하여 현존되고 있다. 또한 이곳은 산자수명하고 기암절벽이 뭇사람들의 휴식처로 사방에 명성이 나니 선객스님들의 정진도량으로도 많이 이용되고 있다. 주지 합장.
채운사 안내문에서 확인 가능하 듯이, 채운사는 1907년에 불타 대웅전만 남아 있던 환장암과 1948년에 홍수로 요사채만 남아 있던 채운암이 합쳐져 증축된 사찰이다. 환장암과 합쳐지기 전 첨성대 안쪽 계곡에 있었던 채운암 역시 매우 큰 규모였었다.
1908년 당시 옛 채운암에는 승려가 4명 거주하였고 당우가 20칸이 될 정도였다. 소유하고 있던 토지도 18마지기의 논을 가지고 있었다. 그밖에 불상은 1점, 향로는 2점, 중간 크기의 종이 1점 등이 있었으나, 1948년경 홍수로 대부분 파괴되었다.
현재의 채운사는 1백년전 채운암에 비해 사찰 규모가 크게 작아지었다. 대웅전만이 단아하게 옛 전통을 잇고 있을 뿐이며, 환장암은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다만, 대웅전과 그곳에 봉안되어 있는 본존불 불상만이 채운사의 옛 영화를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채운사 대웅전은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30호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데, 내부구조가 우리 고유의 전통기법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외부 모습도 단아한 것이 아름답다.
대웅전 안에 모셔져 있는 불상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1호로 지정되어 있는 목조여래좌상으로, 몸 속에 조성 연대를 밝혀주는 복장기(腹藏記)를 가지고 있는 조선 시대 목불이다. 복장기에 의하면, 목조여래좌상은 옹정 원년 계묘 5월 초하루 쌍계사에서 조성되었다.1) 옹정 원년은 1723년(경종 3)으로, 비록 이 불상이 언제부터 채운암에 봉안되어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불상의 정확한 조성연대를 확인할 수 있어 조선 후기 불상 연구에 한 기준이 되는 귀중한 불상이다.
이 불상은 나발의 머리 위에 두툼한 육체가 표현되었고 목에 삼도가 돌려 있다. 법의는 양쪽 어깨에 걸친 통견이며 가슴에 군의대가 보인다. 길게 흘러내린 법의는 양쪽 무릅을 덮었고 의단의 일부는 양쪽 손목에 걸쳐 옆으로 펼쳐지면서 흘렀다. 전체적인 조각 기법은 가지런한 편으로 오른손을 어깨에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였고 왼손은 무릎 위에 들어 손바닥을 위로 향한 설법인(說法印)을 취하고 있다.
대웅전 앞에서 바라다 보이는 산세는 화양구곡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멋이다. 계곡 너머에는 화양구곡 중 제5곡인 첨섬대가 우뚝 솟아 있다. 이곳이 좋은 것은 계곡이 주는 닫힌 공간에서 벗어나 열린 공간에서 잠시 호연지기를 맛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채운사에서의 발길은 화양구곡 제6곡인 능운대로 이어진다. 채운사를 거쳐 능운대로 발길을 옮기는 것도 좋은 코스이지만, 다시 금사담으로 내려와 주변 경관을 감상하는 것도 멋진 여행길이 될 듯 싶다. 특히 암서재에 올라, 우암이 그랬던 것처럼, 주변 경치를 감상하고 음풍농월을 즐기는 것도 풍류여행객의 멋이 아닐 수 없다.
다음과 같은 시들은 금사담과 주변 경관의 정취를 잘 느끼게 한다.
♣♣금사담(임상주)♣♣
煥章菴邊水 환장암 옆으로 흐르는 물
巖棲齋下斜 암서재 아래로 비껴 흐르네.
日照委黃金 햇빛은 황금빛처럼 반짝이고
漣微曳白沙 잔잔한 물결이 흰 모래 쓸고 가네.
常在空山裏 언제 텅 빈 산 속에 있으니
何處是滄溟 어느 곳이 푸른 바다인지 모르겠구나.
空山兮空山 텅 빈 산이여, 텅 빈 산이여
山中有皇靈 산 속에 황제의 영혼이 있네.
♣♣금사담(권진응)♣♣
四曲金沙映翠巖 사곡이라, 금사담에 푸른 절벽 비치고
巖松汀柳共毿毿 바위 소나무와 물가 버드나무가 빽빽이 어우러지네.
書齋寂寞遺芬遠 서재는 적막하나 향기 오래 남아 있고
秋月依然照碧潭 가을 달빛이 의연히 푸른 연못 비추네
♣♣금사담(송흠학)♣♣
四曲金沙繞碧巖 사곡이라, 금사담은 검푸른 바위로 둘러싸이고
巖棲逕仄草毿毿 암서재 길옆에 풀이 하늘하늘하네.
琴書咫尺開光影 거문고와 서책이 지척에서 빛을 발하니
認是山南第一潭 산남의 제일가는 못인 줄 알겠네.
이렇듯 암서재가 있는 금사담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우암의 정기가 서려 있어 더욱 의미 있는 곳이기도 하다. 황금빛 백사장, 잔잔한 물결, 푸른 연못, 가을 달빛, 향기로운 서재 등 금사담의 멋과 맛이 느껴진다.
허나 변함 없는 것은 금사담 물소리 뿐, 노산 이은상은 화양동을 둘러보고 느낀 바를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아마도 이은상은 암서재 빈 마루에 앉아 금사담을 둘러보면서 이 시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화양동(이은상)♣♣
낙영산 화양동
주인이 누구시오
호령하던 그 어른
어디로 가계시오
오늘은 아홉 구비에
물소리만 들리네.
암서재 빈 마루
금사담 모랫가에
앉거니 거닐거니
말하는 이 하나 없고
여흘져 굽히지는 것
다만 물소리로고.
그렇지, 물소리!
참 주인이야 너고 말고
사람들 여기와서
큰 소리 치던 적 언제던고
오늘은 너 소리만이 화양동을 메는구나.
제5곡 : 별을 따던 “첨성대(瞻星臺)”
萬折必東(만절필동)
華陽書院(화양서원)
非禮不動(비례부동)
大明天地 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
화양구곡의 다섯 번째 명승지인 제5곡은 ‘첨성대(瞻星臺)’이다. 화양 제3교를 건너기 직전 우측으로 나있는 등산로를 오르다 보면 우뚝 치솟은 큰 바위가 있는데, 높게 솟은 이 바위 위에서 별을 관측하였다 하여 ‘첨성대’라 한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치 또한 장관이며, 마주 보는 산 아래 ‘채운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정규탐방로에서 화양 제3교를 건너 첨성대를 바라보면 우뚝 솟은 모습이 하늘에 유난히 가까웠을 듯도 하고, 큰 바위가 층을 이루고 있는 모양새나 꼭대기 부분이 편평한 바위의 모습도 이름에 걸맞다는 느낌이 든다.
이곳에도 의미있는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다. 선조 글씨인 ‘萬折必東(만절필동)’과 숙종 어필인 ‘華陽書院(화양서원)’이란 글씨가 남아 있다. 특히 첨성대에서 계곡으로 내려와 약간 위쪽으로 오르면, 화양계곡의 여러 바위글씨 중 가장 의미있는 글씨가 나온다. 명나라 의종의 글씨인 ‘非禮不動(비례부동)’과 우암의 글씨인 ‘大明天地 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이 그것이다. 이 글씨들은 1674년에 새긴 것으로써, 우암의 사상과 세계관을 읽을 수 있다. 바위글씨 앞의 넒은 바위는 쉬면서 세월을 감상하거나 풍류를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조선 선비들이 바라본 첨성대의 모습과 느낌은 다음과 같은 시들이 잘 보여준다.
♣♣첨성대(임상주)♣♣
北辰居其所 북극성이 자리한 그곳에
衆星拱其下 별들이 그 주위를 받들고 도네.
噫彼旄頭光 아! 저 오랑캐의 침략이
柰何掩中夏 어찌 중화의 땅을 가릴 수 있겠나?
願言觀天像 하늘의 형상을 보고자 하나
四山鬱嵯峨 사방 모두 산이 삐죽삐죽 울창하네.
於焉上高臺 어느덧 높은 첨성대에 오르고서야
歷歷瞻星河 뚜렷히 은하수가 바라 보이는구나.
♣♣첨성대(권진응)♣♣
五曲蒼崖高更深 오곡이라, 푸른 절벽 높고도 깊어
霽雲和雨鎖空林 맑은 구름, 때맞춰 나리는 단비 공허한 숲속에 감도네.
煌煌寶墨腥塵外 빛나고 빛나는 신종․의종 황제의 어필 속세 밖에 돋보여
永激東民拱北心 오래도록 동쪽나라 백성 공북심(拱北心) 우러나게 하네.
♣♣첨성대(송흠학)♣♣
五曲瞻星擇地深 오곡이라, 첨성대 지세를 잘 잡았으니
斗南光氣耀山林 천하의 빛나는 기운 산 숲을 밝히네.
厓前寶刻天章爛 바위 절벽에 새긴 황제의 글씨 현란하여
省識瑤躔拱北心 북극성을 향하는 줄 알겠네.
이와 같은 첨성대는 도명산을 오르는 길목에 있다. 도명산은 해발 643m로 속리산 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괴산군 최고의 명산으로, 적당한 높이와 수려한 자연경관 때문에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첨성대에서 정상까지는 1시간 20분, 화양동 주차장에서 왕복 3시간 소요된다. 정상은 크고 작은 바위 다섯 개가 하나를 이루고 있는데, 그 중 높고 큰 바위에 올라 앉아보면 신선이 따로 없다. 동으로는 백악산에서 뻗은 줄기, 서로는 그 넘어 금단산, 남으로는 낙영산 넘어 톱날같이 늘어선 속리산 연봉들, 북으로는 화양계곡 너머 군자산의 위엄이 다가선다.
특히 도명산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것은 마애불이 있기 때문이다. 도명산 마애불은 거대한 암벽에 새겨진 삼존상으로, 당대의 불상을 대표할 만한 우수한 작품이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0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 높이는 9.1m 정도이지만 깨어진 부분까지 감안하면 15m가 넘는 대불이며, 삼존 모두 장대한 불상들이다.
본존불은 얼굴이 2m나 되는데 다소 도식적이지만 이목구비가 시원스럽고 큼직하다. 어깨는 각이 지고 신체 역시 사각형이며 선각의 옷주름이 U자 모양으로 밀접하게 표현되었는데, 규격화된 인상이 짙다. 따라서 얼굴과 신체, 옷주름은 서로 유기적인 관련을 유지하면서 조성되었다고 여겨지며, 이러한 특징은 큰 바위에 선을 새겨 불상을 그리는 고려 초기의 마애불상과 같은 경향을 보여준다.
오른쪽 협시상은 규격화된 선각선들이 본존불과 비슷한 경향이며, 보살상의 형태로 생각된다. 왼쪽 협시상은 타원형의 얼굴과 둥근 머리, 이목구비 등이 약간의 부조기법으로 만들어져 세련된 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목 이하는 선각 위주이며 천의자락, 신체의 굴곡 등은 다소의 곡선미가 있다.
어느 기록에 의하면, 이 산 봉우리에 장군의 말 유적이 있는데, 당나라 때 산 그림자가 중국 땅에 비추자, 술사가 찾아와 산봉우리에 미륵불상을 그렸다고 한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옛날 이 산 바위 속에 황금밀탑(黃金密塔)이 있었는데, 탑의 그림자가 중국에 비치었다. 그러자 당나라 고조가 사람을 보내어 탑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바위를 깨고 탑을 찾은 뒤 바위에 미륵불상 2구를 새겼다고 한다. 이와 같은 전설이 있는 만큼 도명산 미륵불은 예사롭지 않으며, 그 때문에 지금도 이곳을 찾아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도명산 마륵불을 찾아가는 길은 첨성대에서 올라도 되지만, 화양구곡 제6곡인 능운대 앞이나 제7곡인 학소대에서 접근하는 것이 가깝고 손쉽다.
제6곡 : 구름을 벗한 “능운대(凌雲臺)”
능운대(凌雲臺)
화양구곡 여섯 번째 명승지인 제6곡은 ‘능운대(凌雲臺)’이다. 능운대는 화양 제3교 다리를 지나 조금 오르면 식당이 보이고 왼쪽으로 채운사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 뒤에는 나무에 가려진 큰 바위가 솟아 있는데, 그것이 바로 능운대이다.
능운대는 큰 바위가 우뚝 솟아 능히 구름을 찌를 듯 하다는 의미이나, 지금은 변형된 길로 인해 그 느낌을 갖기 힘들다. 그렇지만 현재보다 훨씬 낮은 위치에 있었을 물가 쪽의 작은 길에서 한참을 우러러 올려다보아야 했을 옛 사람들에게는 과연 ‘능운대’였을 것이다.
지금도 옛 사람들이 이곳을 왜 능운대로 명명했을까 하는 의문을 풀 길은 있다. 능운대 뒤쪽은 채운사 오르는 길이다. 채운사로 오르면 능운대 정상에 닿는데, 놀라운 일은 아래에서 보면 보잘 것 없던 바위가 갑자기 솟은 듯 수십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넓고 평평한 바위로 변해있는 것이 아닌가. 바로 능운대 위이다. 바위 위에는 이곳이 능운대임을 영원히 알리려는 듯 ‘凌雲臺’라는 한자가 예서체로 큼직하고 힘차게 쓰여져 있다.
바위에 새겨진 글자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다시 한번 써 본다. 촉감이 좋다. 이곳에 앉아 풍류를 즐기던 지난날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체취가 느껴진다. 분명 옛 선인들은 능운대 위에 앉아 차를 마시고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기었으리라.
♣♣능운대(임상주)♣♣
嵬磊石層層 우뚝 솟은 바위가 층층이 쌓여
屹屹仍作臺 높되 높은 능운대가 되었어라.
凜凜凌風雲 늠름하게 풍운 뚫고 솟아
迢迢絶塵埃 아득히 속세의 티끌에서 벗어났네.
山靄半空浮 아지랑이 산 중턱에 감도는데
儼然天中入 위엄 있게 하늘 가운데 솟아있네.
有類豪傑士 호걸스런 선비가
唾手燕雲立 한가로운 구름 가운데 늠름하게 서 있는 것 같네.
♣♣능운대(송흠학)♣♣
六曲凌雲又一灣 육곡이라, 능운대는 또 하나의 물구비
水門烟雨暖常關 수문에 항상 뿌연 안개비 서려있네.
自崖高揖干霄氣 언덕으로부터 하늘을 범하는 기운 높이 모였으니
仁者巖巖智者閑 어진 자는 높고 높으며 지혜로운 자는 한가하네.
이렇듯 능운대에서 바라다보는 주변 경관은 장관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능운대 바로 밑으로 도로가 지나가고 그 옆으로 줄지어 서 있는 큰 가로수나무 때문에, 옛 능운대의 정취는 맛볼 수 없다.
다만, 능운대 앞 계곡은 일품이다. 특히 능운대 앞쪽에서 계곡을 건너 조금 아래로 내려오면, ‘비례부동’ 바위글씨가 있다. 바위글씨 앞은 수십 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은 바위가 펼쳐져 있는데, 이곳에서 앉아 바라다보는 계곡과 능운대 주변 경관은 참으로 좋다. 바람도 시원하다. 아마도 우암과 그의 제자들 역시 이 바위글씨 앞에서 강학을 하고 시국을 논하고 시를 지으면서 풍류를 즐기었으리라.
제7곡 : 용이 누워 있는 “와룡암(臥龍巖)”
臥龍巖(와룡암)
화양구곡의 일곱 번째 명승지인 제7곡은 ‘와룡암(臥龍巖)’이다. 제6곡을 지나 은사시나무 가로수 오솔길을 따라 1백미터 정도 계곡을 오르다 보면, 오른쪽 길옆에 계곡 따라 길게 드러누워 있는 바위를 만날 수 있다. 이곳이 바로 화양구곡 제7곡인 ‘와룡암’이다.
긴 바위의 모습이 꼭 용이 드러누워 있는 형세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와룡암의 한쪽 끝부분이 길 아래로 들어가 버린 탓에 웅장함이 많이 훼손되었다.
♣♣와룡암(임상주)♣♣
維彼臥龍巖 저 누워 있는 와룡암만은
若垺乘風雲 풍운 타고 오르는 것 같네.
宛在水中央 완연히 물 한가운데 있는데
蒼痕背成文 푸른 물결이 얼룩무뒤 되었네.
知是南陽翁 알겠도다, 제갈공명이
變化爲此石 변화해 이 암석이 된 것을.
平生興復意 그가 지닌 평생 부흥의 뜻
蜿蜿如宿昔 지금도 꿈틀꿈틀 예전 같네.
♣♣와룡암(권진응)♣♣
六曲奇岩枕綠灣 육곡이라, 기이한 암석이 푸른 물구비를 베고 누웠는데
重重雲樹隔塵關 겹겹이 구름 감도는 나무들 속세와는 격리되었네.
天時冉冉群陰剝 날씨는 쨍쨍 짙은 녹음은 늘어졌는데
潭底潛龍臥自閒 웅덩이의 잠룡이 절로 한가로이 누워 있네.
♣♣와룡암(송흠학)♣♣
七曲龍巖枕石灘 칠곡이라, 용 바위가 바위 여울에 잠겨 있는데
一方魚水臥雲看 한쪽 곁에 누워 물과 고기를 구름 아래서 바라보네.
草堂春睡今誰喚 초당에 봄잠 오는데 지금 누구를 부르리오!
思漢人心尙自寒 제갈량을 생각하니 마음이 오히려 절로 싸늘해지네.
이들 시에서 느낄 수 있듯이 용이 누워 있는 듯한 자태를 하고 있는 와룡암은 범상치 않았다. 지금은 계곡 물줄기가 바뀌고 그 옆으로 오솔길이 지나고 있어 옛 분위기를 느낄 수 없지만, 예전에는 와룡암 주변으로 물이 흘러 신비로운 형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계곡 밑으로 내려가 와룡암을 쳐다보면 예사롭지 않다. 특히 계곡 반대편으로 건너가 와룡암을 보면 옛 선인들의 느낌을 조금이라도 공감할 수 있다.
제8곡 : 청학이 둥지 튼 “학소대(鶴巢臺)”
화양구곡의 여덟 번째 명승지인 제8곡은 ‘학소대(鶴巢臺)’이다. 와룡암을 조금 지나면, 상류 대각선쪽에 제8곡인 ‘학소대’가 나온다. 높이 솟아 있는 바위 위에는 낙낙장송이 멋스러운 자태를 드리우고 있는 곳으로, 백학과 청학이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몸과 마음이 머물러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 새끼를 치고 살았다 하여 ‘학소대’라 한다. 학소대교를 지나 도명산을 오르면 마애삼존불이 있다.
♣♣학소대(임상주)♣♣
鶴巢問何年 학이 깃든지 얼마나 되었길래
祗今猶有臺 지금은 오히려 누대만 남아 있네.
神仙不可見 신선을 볼 수 없으니
怊悵空徘徊 서글퍼 부질없이 서성이네.
安得安期生 어떻게 하면 안기생1)을 만나서
一問長年術 오래 사는 비결을 물어볼 수 있을까?
長年欲奚爲 내가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은
願掃犬羊窟 오랑캐 소굴을 소탕하려 함이네.
♣♣학소대(권진응)♣♣
七曲淸流激作灘 칠곡이라, 맑은 물이 빠르게 흘러 여울이 되었으니
鶴巢秋色錦屛看 학소대의 가을 색이 비단 병풍 같네.
徜徉盡日忘歸去 하루 종일 노닐다보니 돌아가는 것도 잊고
幽鳥不鳴空翠寒 학은 울지 않는데 허공의 푸른 빛이 차기만 하네.
♣♣학소대(송흠학)♣♣
八曲巖泉怳復開 팔곡이라, 바위 샘물이 어렴풋이 다시 솟아오르고
鶴巢臺下耐沿洄 학소대 아래 물굽이 돌아흐르네.
莫嘆華表無歸影 화표(華表)2)가 돌아갈 그림자 없음을 한탄하지 마라
猶有杉松引得來 오히려 삼나무 소나무가 있는 이곳으로 오렴아.
제9곡 : 흰 반석이 펼쳐진 “파천(巴串)”
화양구곡 중 마지막 명승지인 제9곡은 ‘파천(巴串)’이다. 편평하게 이어지던 오솔길은 학소대를 지나면서 점점 높아지며 길이 가파라지고 유람객들도 뜸해진다. 오솔길에서 파천의 아름다움이 바로 보이는 것은 아니다. 파천을 보려면 오솔길 아래쪽으로 난 산책길을 따라 내려가야 한다.
파천은 계곡 전체에 희고 넓은 바위가 넓게 펼쳐져 있으며, 그 위로 흐르는 물결이 마치 ‘용의 비늘을 꿰어 놓은 것’처럼 보여 ‘파천’이라 부른다. 200평쯤 되는 널찍한 반석에서 신선들이 술잔을 나누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물과 모래와 반석과 녹음이 어우러져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경승지이다. 이곳이야말로 화양계곡의 백미이며 숨겨진 계곡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파천의 한자 표기는 葩谷, 巴谷, 葩溪, 巴溪, 葩串, 巴串 등 다양하게 사용하였으나, 공통으로 사용한 파(葩․巴)자는 화(華)자와 통한다. 즉, 파는 꽃처럼 아름답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파곡이나 파계는 꽃처럼 아름다운 계곡이란 의미로, 파곡은 꽃처럼 아름다운 계곡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串자는 현재 ‘천’으로 읽고 있는데, 지명에 쓰이는 串자는 ‘곶’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화양구곡 제9곡이 ‘파천’으로 불리어지든, ‘파곶’으로 불리어지든, 이곳의 아름다움은 변함이 없다. 꽃이 피는 봄날의 파천은 무릉도원 같고, 녹음이 우거진 여름의 파천은 시원스러움 그 자체이며, 단풍으로 물든 가을날 찾는 파천은 마치 아름다운 그림 속에서 노니는 것 같다. 잔설이 쌓인 겨울날의 파천은 마음속 깊은 데까지 어루만질 수 있는 온기를 느끼게 한다. 참으로 아름답고 다시 찾고 또 찾고 싶은 곳이다.
그런데 옛날 파천계곡은 파곶산(巴串山)에서 흘러내린 물이 흐르는 계곡으로 알려져 왔다. 노수진(盧守愼, 1515~1590)이 쓴 <<소재집(蘇齋集)>>에 수록된 ‘환희사(歡喜寺)’라는 제목의 한시 주석에는 ‘환희사는 속칭 파곶사(葩串寺)라 하는데, 파곶(葩串)은 실제 산의 이름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조선후기에 작성된 <<청주읍지(淸州邑誌)>>는 파곶산을 낙영산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파천은 파곶산(낙영산)에서 흘러내린 계곡으로 불리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곳에는 파곶사라는 유명한 절이 있어 대곡 성운(1499~1579)이나 퇴계 이황(1501~1570), 서애 유성룡(1542~1607)과 같은 저명한 인물들이 찾곤 하였다.
이와 같이 꽃처럼 아름다운 파천 계곡이 지금과 같은 특정 장소로 불리어진 것은 우암 송시열 이후부터이다. 특히 우암의 수제자 수암 권상하(1641~1721)가 화양구곡 각각의 이름을 짓고 단암 민진원(1664~1736)의 글씨로 바위에 구곡의 이름을 새기면서 파천은 화양구곡의 제9곡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면서 파천은 많은 선비들과 시인묵객, 관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도 파천에는 이곳을 다녀간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1841년에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한 김정균(金鼎均)은 계묘년 4월에 아들과 함께 파천을 찾았고, 관찰사 원재명(元在明, 1763~1817)도 아들과 함께 숭정4 신미년 가을에 파천을 찾았다. 그밖에 임금의 명을 받고 화양동에 내려온 이서, 관찰사 김려, 김광묵, 절도사 정충달, 김익빈, 구병훈, 원세현 등도 파천을 찾아 바위에 이름을 새겨 놓았다. 그들이 이름을 바위에 새긴 것은 이름 석자를 후대에 알리기 위함이 아니라, 파천에서 느낀 아름다움을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함일께다.
파천의 아름다움은 바위글씨로만 전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선비와 학자들이 파천을 찾은 뒤 느낀 바를 시로 지어 후대에 전하고 있다. 그 중에 세 편의 시를 읊어보자.
♣♣파천(임상주)♣♣
憶昔漢昭烈 옛날 유비의 행적을 생각하니
都邑在西巴 그 도읍지가 서파2)에 있었다네.
崢嶸彼劒閣 우뚝한 저 검각(劒閣)3)이
坦然成中華 의젓하게 중화를 이루었네.
嗟玆一巴字 아! 이곳 파천과
地名胡相似 지명이 어쩌면 서로 같은가?
磷磷白石上 희끗희끗한 흰 돌 위로
千載空流水 천년 세월 부질없이 물만 흐르네.
♣♣파천(권진응)♣♣
八曲寬平眼忽開 팔곡이라, 넓적하고 평평하고 눈이 확 떠지고
素磐千頃水縈洄 하얀 반석 널찍하며 물이 빙빙 도네.
蒼苔細逕渾依舊 푸른 이끼가 오솔길에 의구한데
尙想吟風詠月來 아직도 음풍영월하던 일 상상할 수 있네.
♣♣파천(송흠학)♣♣
九曲心眸頓擴然 구곡이라, 마음과 눈이 갑자기 떠지는데
長松白石鴻靑川 긴 소나무와 흰 돌이 맑은 시내에 펼쳐졌네.
巴溪別是源頭水 파천 계곡이 특별히 발원의 머리가 되는 물인데
宛在中央一洞天 완연히 화양동 중앙에 있네.
이들 한시에서 느낄 수 있듯이 파천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넓은 흰 반석 위에 앉아 있는 나는 신선과 다름없으며, 곧 무아지경에 빠진다. 찾는 이가 많지 않아 더욱 좋다. 혼자 자연과 벗하면서 노닐기에는 더더욱 좋은 곳이다. 신선도 같은 생각이리라. 우암 송시열은 화양동을 떠너기 직전 1686년(숙종 12)에 파천에서 와서 “물은 청룡처럼 흐르고 사람은 푸른 벼랑으로 다닌다(水作靑龍去 人從翠壁行)” 라고 읊었다.
파천이 좋은 것은 계곡이 있기 때문만도 아니다. 고즈넉한 오솔길로 이어지기에 더욱 좋다. 파천에서 올라와 자연학습원으로 길을 잡으면,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한적한 오솔길을 걸을 수 있다.
파천부터 자연학습원에 이르는 구간은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고 차량도 다닐 수 없을 뿐 아니라, 주변 경관이 빼어나다. 공기도 참 맑고 시원하다. 이곳을 걸으며 화양동에 서린 우암 송시열의 혼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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