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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古蘭亭後 酌川第一樓 | 천년 전에 난정(蘭亭)이 있은 뒤 작천정이 제일의 누각(다락)이다 | |
白無如許石 淸有此間流 | 저처럼 하얀 바위는 어디에도 없을텐데 이 사이로 맑은 물까지 흘러가네 | |
月地飜疑雪 夏天剩得秋 | 달빛이 서린 땅은 눈처럼 번득이며 여름날인데도 가을기운까지 느껴진다 | |
難收多少景 把筆惹紅愁 | 몇몇 풍경을 거두어들이기 어려워 붓을 잡으니 여인(紅)의 시름이 일어나네 |
이 시는 1943년 작천정 편액으로 걸린 것으로 작품의 뒷부분에 “이 정자가 퇴락하여 건물이 없어졌을 때에 흩어져서 없어진 현판이 몇 개였던가? 그 중에서도 특히 이구소의 시는 이미 일세에 회자되었던 것이다. 중수하여 준공하는 날 시사회 회원들이 그 원고를 애석하게 생각하고 문미(門楣)에 걸어 둔다”라는 설명으로 이 작품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고 있다.
반구대암각화나 천전리각석이 선사인의 스케치북이었다면, 작천정 바위들은 구한말 언양 지식인들의 화선지요, 詩集이다. 김영호 어록 |
울산의 거부 김홍조(1868-1922)
-울산 반구동 소금장수의 아들로 태어남
-무관시험에 합격하여 울산 병영에서 근무
-아버지 재산을 밑천으로 목재상 개업
⓵부산항 개항 때 항만건설에 필요한 목재 납품
⓶경부선 철도 침목 납품
⓷전봇대 납품
●부산 피혁공장+강원도 흑연광산+부산 울산간 자동차회사 설립+구포은행 설립
●사회사업
⓵학성공원과 작천정 기증
⓶인재육성(최현배, 박관수씨 등)
⓷일신학교(진주여고의 전신) 설립
➃경남일보 창간
➄독립운동자금 제공
<이구소와 김홍조의 만남>
-김홍조는 철종의 부마 박영효가 울산에 왔을 때 작천정을 구경시켰다. 이때 이구소를 동반함
-구소가 21살 때 24살이나 많은 김홍조의 소실로 약 10년간 생활함
-김홍조는 본처의 외아들 택천의 양육비로 논 100마지기를 구소에게 줌
-김홍조는 많은 재산을 남겼는데 외아들 김택천이 해방 후 정치판에 뛰어들면서 탕진함
휘늘어진 가지 천갈래 만갈래
가시는 임 못붙들 줄 나 익히 알건마는
꾀고리 노래 요란한 이처럼 좋은 때에
오래 같이 하고 싶은데 지루하실까 두렵네
이 시는 김홍조와 시를 주고받으면서 쓴 ‘和秋田令詩(추전령의 시에 답하다)’이다. 여사의 애틋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3. <울산이 낳은 여류 한시 작가 구소 이호경>이란 책은 그의 일생과 또 그와 관련된 인맥과 환경 등을 싣고 있어 책을 읽고 나면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 울산의 인물들을 대부분 알 수 있다. -장성운 저-
花藏山人 눈솔 정인섭(鄭寅燮) 문학평론가, 영어학자
-1905∼1983 언양 출신으로 1929년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1946년까지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한글학회회원(1930)·극예술연구회 동인(1931)·한국민속학회 회원(1932)·한국음성학회 발기인(1935)·제4회 국제언어학자대회 한국대표(1936) 등을 역임
-1946년 중앙대학 교수를 역임
-영국 런던대학 교수(1950∼1953),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 교수 및 경도대학원 강사(1953), 런던대학원을 수료(1953)하였다.
-1954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의 창설에 발기인으로 참가하는 등 한국 문학의 올바른 소개에 진력하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가마바위 타고서 기다리는가
간월산 맑은 정기 고이 받아서
작천정 호박물이 흘러 내리네
반석은 크고 적은 그릇이 되어
천사가 내려와서 소풍하는 곳(하략)”
그는 ‘작천정의 노래’에서 이곳의 풍광과 전설을 위와 같이 노래하였으며, 작천정에는 鄭寅燮이 쓴 부친의 詩板이 있다.
<시판의 한글 내용>
제1회 시회에서 합격한 시로 제목은 白石灘(흰바위의 여울)이고 압운은 奇, 宜, 遲, 時, 詩이다.
동남지방에 물이 빠지니 기이한 바위가 들어나는데
날아갈듯한 정자는 시읊고 술마시기에 적당하네
평평하게 펼쳐진 빙설에 봄은 늘 싸늘하고
갈고 쫀 유리 가운데 세월은 더디네
날아 지나가는 흰 새는 그림자 구분이 어렵지만
빨래하러온 붉은 빛의 아가씨는 분명하게 들어나네
빙두른 구역이 모두 한가지로 맑고 깨끗하니
내 갓끈을 씻고 시를 지을만 하네
아송 정택하가 짓고
둘째 아들 인섭이 받들어 쓰다
정인섭의 가계
▲ 한학자였던 아버지 아송(蛾松) 정택하는 당시 200석 부호로 두 아들을 일본에 유학시킨 개화파였다. 일제강점기(1924) 언양초등학교에 2개의 교실을 건립, 기부했고 기타 지방 유지로 헌신적인 공로가 많았다.
▲ 형 인목은 제헌의원 울산 을구에 출마하여 고배를 마시고 숙명여대·경상대학 학장을 지낸 학자
▲ 1979년 동아일보 ‘신팔도기 울산 인물’의 정씨 집안에 대해 기록이다.
‘흔히들 울산사람들은 울산 인물들이 서부 5개면에서 났다고들 한다. 언양, 삼남, 상북, 두동, 두서면 등 태화강 상류 남천 70리 주변에서 태어난 인사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인물이 서부에서 난다는 말을 실감케 한다. 숙대 학장으로 경상대학장까지 지낸 정인목 박사(77), 중앙대 대학원장과 외국어 대학원장을 역임하고 지금은 국제기구인 아세아 문학번역회 회장과 색동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정인섭 박사(74)는 형제간으로 언양면 어음리가 고향이다.
▲ 아송의 6녀 정복순은 경기여고와 중앙보육을 졸업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는 세례명이 안나로,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에 성모원과 유치원을 지어 언양 성당에 기증하고 돌아갔다. 언양성당은 이런 안나의 헌신적인 행적을 기념해 1979년 성당 내에 ‘안나 데레사 회관’을 건립했다. 현재 울산에는 정씨의 생가터가 있고 작괘천에는 그의 이름이 파인 석각이 있다. 그리고 언양성당 뒷산 가족묘에는 그의 무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