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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기획 ‘분열하고 막힌 한국, 소통합시다’의 결말이 참담하다. 그렇게 사람이 없는가? 아직도 최장집인가? 경향신문의 한계, 그리고 진보의 한계를 본다. 7월14일자 5면을 장식한 ‘특별기고 - 소통에 대한 이해와 오해’ 얘기다.
“민주적인 의사형성이란 차이를 인정하고 이들 차이간의 합리적 경쟁을 통해 일정한 합의를 넓혀가는 과정이라 할 때, 사전에 정해진 어떤 의사, 가치를 위로부터 부과하는 것은, 무엇보다 민주주의 원리와 부합하지 않는다.”고 했다. “소수언론과 엘리트들이…성급하게 시민을 가르치려는 태도”를 비판하는 것인데, 이건 사실 이명박 정부와 조중동의 문제다. 당연히 민주주의 원리와 부합하지 않는다.
그런데 최장집은 이명박 정부가 보수정부일 망정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두둔했다. 자신이 정의한 민주주의 원리에 부합하지 않는 조건에 이명박 정부의 행태가 정확히 일치함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니 무슨 잠꼬대같은 소리인가? 다음의 구절은 최장집 교수의 의중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정부를 반민주적이라고 평하게 되면, 역으로 ‘민주정부’라고 생각하는 앞선 정부들은 그만큼 긍정적으로 미화될 것이다. 이러한 정치에 대한 이해방식은, 소통불능을 오히려 강화하는 것이 될 것이고, 이른바 진보세력의 발전에도 기여하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과 과거 정부의 잘잘못을 평가하는 문제가 동일한 것일 수는 없다. 과거 이른바 진보적인 정부들 역시, 경제와 사회정책에서 신자유주의 성장정책을 일방적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로 서민과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은 나빠졌고, 국가의 사법, 경찰기구들은 충분히 민주화되지 못했다. 또 소통이 잘 안 되었던 것은 그때도 비슷했다.”
이 정부를 민주적이라고 평해서 앞선 정부들을 반민주적이라고 평하고 싶은 모양이다. 참여정부에는 참여할 기회를 얻지 못했으니 원망도 있겠지만, 김대중 정부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은데 이상하다. 최장집은 김대중 정부의 정책기획위원장이었다. 그리고 조선일보가 그를 좌파로 규정하며 공격했을 때 명예훼손 소송을 했고, 그 여파로 위원장직을 사임했다.
1999년에 있었던 이 사건은 안티조선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선일보에 대응했던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최 교수는 소송을 취하하고 말았다. 대책위에 참여했던 단체들은 맥이 풀렸고, 결국 해체하게 되었다. 이것으로 사실 최장집 교수의 지식인으로서의 생명을 끝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후 최장집을 제외한 (진보적) 지식인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이 안티조선운동을 사회운동으로 승화시킨 바 있다.
노무현 정부가 국민의 지지를 잃어가면서 최장집은 부활했다. 노무현 정부를 비판하면서 마치 공정한 심판자라도 되는 양 필명을 날린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지지율이 빠진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조중동의 왜곡보도 내지는 소통 차단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인터넷에 댓글까지 쓰는 등 국민들과 소통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사실에 부합하지 않은 궤변을 늘어놓는 건 최장집이지 진보세력이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과 과거 정부의 잘잘못을 평가하는 문제가 동일한 것일 수는 없다.”고 했다. 도대체 누가 동일하다고 했을까? 이 글에서 일관되게 ‘서거’가 아닌 ‘죽음’이라는 기호를 동원했다. 왜일까? 자신이 잘 알 것이다.
과거(김대중과 노무현) 정부들의 신자유주의 성장정책 때문에 서민과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이 나빠졌다? 뭐 아주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렇다면, 같은 날 경향신문 2면 톱으로 보도한 ‘빈곤층은 늘고, 중산층은 줄고’는 어떻게 해석하겠는가? 1998년에 12.4%였던 빈곤층이 2008년에는 14.3%로 늘었다는 KDI(한국개발연구원) 보고서 내용이다. 이것도 과거 정부 탓으로 돌리고 싶을까? 아마 지금은 더 늘었을 터,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 어쩌면 급격히 많이.
자본주의의 모순은 자본과 노동의 모순인 바, 자본은 노동력가치(혹은 임금)를 낮추면서까지 잉여가치(혹은 이윤)의 증대에 목숨을 건다. 그 결과 과잉생산에 의해 시장에 상품은 넘치는데 소비자의 구매력은 떨어져 공황과 불경기가 주기적으로 발생한다. 이 마당에 이명박 정부는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등 서민생활을 더욱 궁핍하게 만듦으로써 모순을 극단적으로 심화시키고 있다.
부자 감세와 빈자 증세. 이명박 정부의 정책이다. 부자 감세로 인한 세수 감소를 빈자 증세로 메우겠다는 것이다. 느는 건 국가 부채다. 2008년 33.6%였던 국가부채비율이 1년 새 40%로 증가했다. 국가채무가 349조 7,000억원에서 366조 9,000억원으로 늘었다는 것이다. 부자 감세로 인한 부족한 세수를 간접세 인상으로 메우겠다는 게 이명박 정부의 발상이다. 술과 담배에 부과하는 세금을 올리겠다는 것이다. 이름 하여 ‘죄악세’라나?
소통이 잘 안 되었던 것은 그때도 비슷했다고? 그렇다 치고,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리고 뭐 “민주주의를 잘하는 것이 소통을 가능케 하는 방법이지, 소통에 대한 강조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은 아니다”라고? “소통문제가 두 개의 세력으로 양극화된 정치”를 비판하면서 자신은 이렇게 양극화 논리를 펴다니...이게 어디 양자택일의 문제인가? 소통은 커뮤니케이션이요, 사회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는 게 미디어인 바, 미디어를 장악해 아래로부터의 소통을 차단하려는 이명박 정부에 대해 최장집 교수는 무슨 생각을 할까?
칼럼 김동민 2009.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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